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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10 19:55:484034 
서기 242년 관구검(毌丘劍) 의 고구려 침략
양승국

 

관구검(毌丘劍)


(魏)나라의 고구려 침공, 삼국지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지만. 고구려 역사에서는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위나라로서는 후방의 공격을 대비한 이민족 정벌이며,고구려로서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운 큰 전쟁이었습니다. 위나라의 고구려 침공과 관구검에 대해 알아봅니다..


1. 고구려, 삼국시대에 뛰어들다.


고구려 제11대 동천왕이 재위에 올라 있었을 쯤. 당시 공손씨(公孫氏)와 고구려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옛날 발기와 연우(산상왕)와의 왕위다툼에 공손씨가 개입하여 고구려 땅 일부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사실 공손씨와 고구려는 서로 경계하고 대립하였는데, 이 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공손연이 연나라를 세우고 독립을 선언하면서. 위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고구려는 이에 위나라와 힘을 합하여 공손씨의 배후를 쳐서 공손씨를 멸망시킵니다. 이렇게 사이좋던 위나라와 고구려가전투를 벌이게 된 것은 위나라가 촉오의 남부전선에 치중하고 있는 줄 알고 요동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뭔가 실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갈량은 죽고 촉나라는 방어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오(吳)나라 또한 국지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위나라의 국력은 강성하여 넘쳐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고구려가 위나라의 배후를 친답시고 요동을 공격한 것은 큰 실수였지요. 결국 위나라는 배후의 공격을 당하자 장수 관구검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나섭니다.


2. 관구검, 그는 누구인가?


관구검은 자가 중공이고 하동군 문희현 사람입니다. 위명제(魏明帝 : 造詣)의 아들과 친하여 명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사마의(司馬懿)를 도와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였습니다. 명제는 그에게 유주자사와 도요장군, 호오환교위를 맡게 하였으며 그는 오환족을 끌어들임으로서 북방에서 입지를 굳힙니다. 이 때,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하였으므로 북방을 맡고 있던 관구검이 정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좌장군 등 승진했고 이후 오나라와 전투에서 군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사마씨의 독재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사마씨와 대립하지만. 점점 전세가 사마씨에게 기움으로써 안풍진 도위가 관구검을 죽였고 이로써 '관구검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3. 고구려와 위나라


서기 242년 관구검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동천왕(위궁)은 2만의 군대로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위군의 우세로 점쳐졌던 전투는 의외로 예상 밖 결과를 냅니다. 바로 고구려군의 승리로 위군 3천여 명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만에 빠진 나머지 신하 득래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관구검의 유인책에 걸려 사방의 공격을 당해 고구려군 1만 8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동천왕은 겨우 1천여 명만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퇴각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하도록 하고, 환도성을 점령하자 동천왕은 난을 피해 남옥저로 패주합니다. 다행히도 밀우, 유옥구가 위군을 저지하고 유유가 적장을 암살함으로써 위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사실 국제전이었습니다. 선비족과 부여가 각각 병사와 군량을 위군에 보급했고 백제는 위나라 낙랑군을 공격하는 등 역사상 동아시아 첫 국제전이었습니다. 또한 동천왕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충신 밀우, 유옥구, 유유가 나온 까닭은 동천왕이 어질고 인자한 후덕한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천왕이 죽자 그를 따라 죽으려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주에는 아직도 관구검이 만든 관구검공적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뼈아픈 역사이기도 한 역사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삼국사기의 기록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토>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록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기>, 追王. 王奔<南??沮{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沮{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호<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전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록>·<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密友紐由傳.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8월, 위나라가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이란 자는 위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기(王頎)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이 전쟁 시에 위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


[「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의가 공손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 때의 사실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했다.



관구검의 공격으로 고구려는 그 수도까지 함락 당했습니다. 수도가 함락된다고 해서, 국가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으나, 동천왕이 피신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왕의 자만에 의한 것이었고, 유유의 계략으로 마침내 관구검의 침략을물리치게 됩니다. 관구검은 고구려가 위나라를 공격하자 유자자사의 신분으로 고구려를 응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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