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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0 21:32:494876 
허무맹랑한 신공황후 기사
양승국

신공황후기 왜곡 일본서기에서 가장 많이 왜곡되어 있는 부분은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이다. 신공황후기의 왜곡 부분을 나누어 살펴본다. 「섭정전 10월 전략.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은 미질기지파진십지(微叱己知波珍十岐)를 인질로 하여 금, 은, 채색(彩色)..중략..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관군을 따라가게 하였다. 때문에 신라왕은 항상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친다. 이것이 그 연유다. 이에 고구려, 백제 2나라 왕은 신라가 지도와 호적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가만히 그 군세(軍勢)를 엿보게 하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영외에 와서 머리를 땅에 대고 "금후는 길이 서번(西蕃)이라 일컫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후략」 위 문구는 일본서기 저자 안만려(安萬侶)가 A.D 712년에 지은 고사기(古事記)에도 없는 내용이므로 왜곡임이 분명하다. 또 신공황후가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을 항복 받고 미질기지(微叱己知)를 인질로 잡아 왔다고 적혀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파사이사금은 A.D 80년부터 A.D 111년까지 재위한 신라왕이고, 미사흔(未斯欣)이 인질이 된 해는 구태백제(九台百濟)에 인질이 된 A.D 391년과 임나원정에 인질이 된 A.D 402년이므로, 파사이사금이나 미사흔은 모두 신공황후 때의 인물이 아니다. 위 문구는 일본열도왜가 신라를 정벌한 적이 있었는 것처럼 왜곡하기 위하여 옛 신라기(新羅記)에서 왜(倭)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내용을 찾아내어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은 것이다. 「섭정전 12월 전략. (一에 말하였다. 신라왕을 포로로 하고 해변에 와서 무릎근을 뽑고서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일본의 재<宰>-로 하고 돌아왔다. 그 후에 신라왕의 처는 남편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을 모르고 혼자서 재<宰>를 유혹할 생각을 가졌다. 재<宰>를 꾀어서..후략)」 위 문구는 구태백제가 신라의 서불한(舒弗邯) 석우노(昔于老)의 말 실수를 빙자하여 석우노를 죽인 내용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253년에 일어난 사실이다. 따라서 석우노의 죽음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일본서기 저자는 옛 신라기에서 왜(倭)가 신라 대신(大臣)을 죽인 내용이 나오자 이 왜가 일본열도왜인 것처럼 왜곡하여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었다. 석우노가 죽은 A.D 253년경은 야마대연맹이 와해된 후 일본열도가 수십 개의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이고, 반면에 구태백제는 온조백제, 일본열도 내 백제계 소국들, 일부 가야국들을 후국(侯國)으로 거느리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이다. 따라서 강대국인 신라가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신라의 최고 대신(大臣)을 죽도록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상대방은 일본열도 지역의 소국(小國)이 아니고 왜(倭)를 군사(軍士)로 사용한 구태백제(九台百濟)이다. 「원년(일본서기년도 A.D 201년 실제년도 A.D 173년) 신공황후 즉위하다.」 신공황후는 A.D 167년경에 중애(仲哀)를 죽이고 사실상 섭정을 하였으나 정식으로 섭정왕이 된 년도는 비미호(卑彌乎)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이라 칭한 A.D 173년이다. 즉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즉위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8년이 늦어져 있다. 「신공황후 5년 신라왕은 오례사벌(오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후략」 신공황후기 5년조 내용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A.D 417년에 일어난 사실로서 신공황후보다 일백 수십년 후에 일어난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 박제상(朴提上) 등이 찾아간 왜국은 대화왜(大和倭)가 아니고 대마도 임나연정(任那聯政)이다. 따라서 위 사실은 A.D 247년에 죽은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가 없다. 이처럼 신공황후기에 신공황후와 전혀 관계없는 사실이 들어 있는 것은 일본서기를 지은 백제인들이 신라에 대한 적개심으로 옛 신라기에서 왜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는 기록을 모두 찾아내어 신공황후기에 짜깁기해 넣었기 때문이다. 「신공황후 69년 여름 4월 황태후(皇太后)가 치앵궁(稚櫻宮)에서 붕(崩)하였다.」 위지(魏志)에 의하면 신공황후는 A.D 247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일본서기에 적혀 있는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는 실제년도보다 22년이 늦어져 있다. 이는 신공황후의 사망으로 구주왜(九州倭) 천황시대가 끝이 난 후 백제의 직할통치를 거쳐 A.D 390년부터 대화왜(大和倭) 천황시대가 시작되자, A.D 247년부터 A.D 390년까지 142년간의 천황 공백기를 감추고 구주왜와 대화왜를 같은 천황가(天皇家)로 묶기 위하여, 신공황후의 사망년도를 실제년도보다 22년 늦추고 응신천황(應神天皇)의 즉위시기를 실제보다 120년 앞당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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