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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07 17:05:042707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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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고려사(高麗史)

사실과 사관의 조화



저자 정인지(鄭麟趾)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아버지는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낸 흥인(興仁)이며,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16세인 1411년(태종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14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상왕인 태종의 천거로 세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29세인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뽑히는 등 세종의 치세 때 문관과 유학자로서 크게 활동을 했다. 36세인 1431년 정초(鄭招)와 함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고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저술하는 등 역법을 정비하였다. 47세인 1442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사륜요집(絲綸要集)』을 편찬하고, 이듬해 지중추원사로 당시에 찬·반의 논의가 격렬하던 공법(貢法)을 극력 주장하여 그 실시를 확정하는 데 공헌하였다. 『치평요람(治平要覽)』(1445)의 편찬, 『태조실록』(1447)의 증수(增修)에도 참여하였으며, 56세인 1451년 김종서(金宗瑞) 등과 함께 『고려사』를 개찬(改撰)하였고 이듬해 김종서 등과 함께 다시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1455년 세조의 즉위에 끼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에 책봉되었고 1466년에는 하동군(河東君)에 봉해졌다. 저서로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다.


1. 최고 편찬자의 이름이 뒤바뀐 『고려사』

『고려사(高麗史)』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함께 고려왕조(918~1392년)의 역사를 가장 충실하게 담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왕조에 대한 역사 지식의 대부분은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책은 고려 당대에 씌어지지 않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고려사』는 1451년(조선 문종 1) 정인지(鄭麟趾), 『고려사절요』는 그 이듬해 김종서(金宗瑞, 1390~1453)에 의해 각각 편찬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편찬 책임자에 불과하다. 두 역사서는 왕의 명령에 의해 편찬되었다. 『고려사』는 편찬 책임자 정인지를 포함하여 32명의 역사가, 『고려사절요』는 편찬 책임자 김종서를 포함하여 27명의 역사가들이 참여하여 편찬된 이른바 관찬사서(官撰史書)이다.

고려 인종 때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도 왕명에 따라 편찬 책임자 김부식(金富軾)을 포함해 14명의 역사가에 의해 편찬된 점에서 『고려사』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 책에는 김부식의 사관이 담긴 사론(史論)이 30개 실려 있다. 관찬사서임에도 김부식 개인의 생각이 『삼국사기』의 서술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의 사관에 대한 이해없이 『삼국사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삼국사기』가 관찬사서임에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로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사』를 '정인지의 『고려사』'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러나 『고려사』에는 편찬 책임자의 사론을 찾아볼 수 없어 우선 그런 이름을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편찬 책임자도 원래는 정인지가 아니었다. 서문에 해당하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의 작성자가 정인지로 되어 있어, 정인지가 편찬했다고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문종 1년(1451) 8월 25일자에는 『고려사』가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김종서가 올린 글이 실려 있다. 『고려사』의 서문과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같은 글에 대해 작성자가 다르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인가?

1451년에 편찬이 완료된 『고려사』는 1454년(단종 2)에 인쇄되어 공식적으로 반포되었다. 이 사이에 큰 사건이 있었다. 출간 한 해 전에 수양대군 - 후일의 세조 - 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단종을 지지했던 정치인을 대거 제거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해 김종서가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사건 직후 『고려사』가 출간되면서 편찬 책임자는 김종서 대신 정인지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실록까지 수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록에는 김종서가 『고려사』를 편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고려사절요』는 『고려사』보다 한 해 늦게 완성되었지만, 계유정난 직전에 인쇄 출간되었기 때문에 이 책의 첫 머리에 김종서가 쓴 「진고려사절요전(進高麗史節要箋)」의 서문과 함께 편찬의 최고 책임자로 그의 이름이 남을 수 있었다.

정치적인 논리에 따라 책의 편찬 책임자가 바뀐 조선 초기의 현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60여 년간 개정에 개정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제기된 편찬의 내용과 방향을 둘러싼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편찬 책임자의 교체는 그러한 과정을 마무리 짓는 마침표에 불과하다. 정치와 역사는 별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고려사』 편찬 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곧 『고려사』의 특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름길이 된다.

현재의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등 모두 139권이다. 이 책이 완성되기 전까지 3차례의 편찬이 있었다. 최초의 편찬은 1396년(태조 5) 정도전 등이 편찬된 『고려국사(高麗國史)』이다. 다시 유관(柳觀), 윤회(尹淮) 등이 1423년(세종 5)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를 편찬하였고, 이어서 1442년 신개(申槩), 권제(權踶) 등이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을 편찬하였다. 1451년 현재의 『고려사』가 편찬되기까지 무려 55년이 걸린 셈이다. 3년 만에 현재의 『고려사』가 완성되었다고 하나, 이같이 3차례의 편찬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단기간에 완성될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고려사』를 제외한 다른 역사책은 이름만 남아있고,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려사』 편찬이 무려 60여 년이라는 오랜 시일이 걸린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일은 『고려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문종 1년(1451) 8월 25일자 기사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가 139권의 『고려사』를 완성한 후 왕에게 올린 글의 일부다.


"돌이켜 보면, 고려의 사직은 없어졌으나, 그 역사는 없앨 수 없다고 하시면서, [태조대왕께서] 통감 -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 의 편년체를 본받아서 역사를 편찬하게 하셨습니다. ··· 세종대왕께서 ··· 신하들에게 명하여 범례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본받게 하였습니다. 대의는 왕의 지시를 받아, 본기(本紀)를 피하여 세가(世家)라 고 한 이유는 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짜 왕 신씨(辛氏) -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 를 낮추어 열전(列傳)에 넣은 이유는 왕위를 도둑질한 데 대한 형벌을 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충성스러움과 망녕됨, 잘못과 올바름을 종류별로 나누고, 제도와 문물을 종류별로 모아 통치의 기강이 문란하지 않고 연대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건의 자취는 자세하게 했으며, 빠뜨린 것은 덧붙이고 바로 잡았습니다. ··· 지금의 왕 - 문종 - 께서 이 일을 계승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이 일을 책임지게 하여, 관청에 소장된 여러 기록들을 참고하여 3년 만에 고려왕조의 역사를 완성하였습니다."


위의 글은 『고려사』 첫 머리에 정인지가 작성했다고 했는데, 그 사정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어떻든 서문으로서 이만큼 책의 성격과 방향을 함축적으로 정리한 글도 없을 듯하다. 이에 따르면 고려왕조의 역사 편찬에서 가장 고심했던 문제는 편년체(編年體)에서 기전체(紀傳體)로 서술체제의 변동, 고려시대 말엽 우왕 이후의 역사 서술문제와 사대명분론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2.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위의 글에 따르면 『고려사』 편찬에서 첫 번째로 고심했던 문제는 바로 서술체제였다. 즉, 태조 때 편찬된 『고려국사』는 통감을 모델로 했는데, 이는 바로 편년체로 편찬되었음을 뜻한다. 윤회 등이 편찬한 『수교 고려사』 역시 그 서문에 따르면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고려사』는 사마천의 사기를 모델로 한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이보다 앞서 1442년에 편찬된 『고려사전문』 역시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이같이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서술체제가 바뀌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왜 역사서술에서 서술체제가 문제가 되었을까? 1452년 2월 20일 김종서 등이 새로 찬술한 『고려사절요』를 바치면서 올린 전문(箋文)에 이에 대한 답이 실려 있다.


"편년체는 좌씨(左氏)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 에서 비롯되었고, 기전체는 사마천의 『사기』에서 처음 시작하였습니다. 반고(班固) - 『한서(漢書)』의 편찬자 - 이후에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모두 사마천의 사기를 근본으로 하여 역사를 편찬한 이유는 [서술의 범위와] 규모가 넓고 내용을 자세하게 서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이 쓸데없이 많아서 [사실을] 밝히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들이 갖게 되는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둘(기전체와 편년체) 가운데 어느 한 곳을 취하여 다른 것을 버릴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따르면 기전체는 서술의 범위가 넓고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장점이 있으나, 너무 쓸데없는 내용이 많고 사건에 대해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편년체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실을 한 곳에 종합하고 축약하여 정리하는 장점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매우 편리한 체제라는 뜻이 된다. 송나라 사마광이 기전체로 쓰여진 중국 역대 17왕조의 방대한 역사를 1/5로 축약한 편년체의 자치통감을 찬술했고, 이것이 널리 읽힌 이유였다.

하나의 사건 속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실타래처럼 얽혀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사건이 전개되어 편년체 형식으로 같은 시점에 함께 요령 있게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 기전체 서술체제는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는 데 적합하다.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는 관련 기록을 하나하나 본기나 열전에서 찾아 읽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사건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본기 지 열전 등에 각각 나누어 서술함으로써 관련 기록을 자세하게 남길 수 있는 것이 기전체의 장점이다. 역사 편찬자에게 기전체는 대단히 편리한 서술체제이지만, 편년체는 반대로 읽는 사람에게 편리한 서술체제다.




3. 김종서가 편찬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위의 글에서도 김종서는 두 서술체제에 입각한 각각 독립된 고려왕조사 편찬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편년체의 『고려사절요』를 편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 방침은 이미 세종 때 현재의 『고려사』 편찬에 착수하면서 정해졌다. 즉, 1438년(세종 20) 허후(許詡)는 이전에 편찬된 편년체의 『수교 고려사』를 사략(史略)이라 하면서, 이와 별도로 기전체의 본사(本史)를 편찬할 것을 건의했다. 세종이 허락하자 4년 후 기전체의 『고려사전문』이 편찬되었다. 『고려사전문』과 『수교고려사』는 다시 김종서 등이 편찬의 책임을 맡아 1451년과 1452년에 각각 현재의 기전체 『고려사』와 편년체 『고려사절요』로 완성하였다. 긴 시간에 걸친 서술체제의 논쟁은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기전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라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소유하게 된 대단히 생산적인 논쟁이기도 하였다.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는 37권이다. 현재의 『고려사절요』 역시 35권이다. 모두 편년체이다. 반면에 기전체의 『고려사』는 무려 139권이나 된다. 기전체 『고려사』는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편년체 형식으로 담을 수 없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사실들을 담고 있다. 고려 당대의 문화를 객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정리하려는 세종의 실사구시적인 태도도 기전체로 서술체제를 바꾼 또 다른 이유였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건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편년체로서는 5백년 고려왕조사의 내용을 담기에는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고려사』가 하나의 풍부한 자료집의 성격을 갖는 것은 이러한 서술체제 때문에 가능하였다.


4.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위하여

『고려사』의 편찬에 오랜 시일이 필요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우왕 이후의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었다. 이는 조선왕조 건국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립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일찍이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국사』의 서술내용을 둘러싸고 먼저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

태종은 고려시대 말엽의 태조 이성계에 관한 사실이 충실하지 않다고 했으며, 1414년에는 우왕 이후의 사실에서 왜곡된 곳이 있기 때문에 하륜(河崙), 남재(南在),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고려왕조사의 재편찬을 명하였으나, 하륜이 사망하면서 2년만에 이 작업은 중단되었다. 세종 역시 『고려국사』가 고려시대 당시 사용된 천자국의 용어를 고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신(史臣)이 작성한 사초(史草)와도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두 국왕의 불만은 결국 태조 이성계와 우왕 이후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김종서가 현재의 『고려사』를 완성한 뒤 올린 글에서 가짜 왕인 우왕과 창왕을 낮추어 열전에 넣은 이유는 왕위를 도둑질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대로, 우왕과 창왕 때의 역사는 실제로 군주의 역사를 기록한 세가(世家)가 아니라 신하들의 역사를 기록한 열전에 실려 있다. 두 군주는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기 때문에 군주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짜를 폐위시키고 진짜 군주를 내세워야 한다는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는 위화도회군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의 개혁에 대해 쉽게 협조하지 않은 창왕을 제거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면 공민왕 사후 그가 즉위할 때 제기되어야 할 문제였다. 아니면 늦어도 위화도회군 직후 우왕을 내쫓고 아들 창왕을 옹립할 때 제기되어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창왕을 군주로 옹립한 지 1년이 지나서 제기된 '폐가입진'의 논리는 권력 강화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했다.

고려왕조사의 편찬에서 부닥쳤던 문제의 하나는 1388년(고려 우왕 14) 위화도회군과 그 이후 개혁사업,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서술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우왕 이후 조선의 건국까지 약 20년의 역사와 그 속에서 이성계의 위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고려왕조사의 편찬을 거듭하게 된 또 다른 이유의 하나였다.


5. 사대명분론을 뛰어 넘어서

고려왕조사가 긴 시간의 난산을 겪은 또 다른 이유는 조선시대 초기에 지배층이 명나라와 조선을 각각 천자국과 제후국의 관계로 생각했던 대외적인 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려왕조 역사의 일부를 다시 수정하려는 문제 때문이었다. 정총(鄭摠)이 쓴 『고려국사』의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원나라 이전에 고려에서 사용한 용어가 참람하여 종(宗:황제의 호칭)의 호칭을 왕(王)으로, 절일(節日 : 황제의 생일)의 용어를 생일(生日)로, 조(詔: 황제의 명령)를 교(敎)로, 짐(朕: 황제가 스스로를 일컫는 말)을 여(予)로 고쳤습니다. 이는 명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였습니다..


명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조선왕조를 제후국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 초기의 지배층들에게 천자국으로 자처하여 그에 걸맞은 용어와 제도를 사용했던 고려왕조의 역사를 그대로 역사서술에 반영하는 일은 천자와 제후 사이의 사대 명분질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참람한 행위로 비춰졌다. 『고려국사』 서문에 드러난 편찬자 정총의 이러한 생각은 편찬의 최고책임자인 정도전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을 대변했다. 따라서 정도전은 새로 편찬한 고려왕조사에서 사대명분론의 입장에서 고려시대에 사용했던 천자국 용어와 제도를 제후국의 용어로 모두 고쳤다.

뒤에 고려시대 때의 용어를 함부로 고쳐 역사의 진실을 없앨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었으며, 이 문제는 다시 조정의 논의에 부쳐졌다. 세종은 정도전 등이 고친 용어를 모두 고려실록의 내용대로 다시 고쳐 쓰라는, 즉 사실을 사실대로 올바르게 쓰라는 이른바 '이실직서(以實直書)'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사대명분론에 입각한 고려왕조사 편찬 방침은 잘못되었으며, 당시의 용어대로 사실에 입각하여 고려왕조사를 편찬한다는 원칙이 최종적으로 확정되면서, 다시 고친 역사서가 1424년(세종 6) 편찬된 『수교고려사』이다. 윤회가 이 책을 편한 뒤 올린 서문에는 그러한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신들은 전하의 밝으신 명령을 받들어, 원종 이전의 실록을 신사(新史) - 고려국사(高麗國史) - 와 비교하여 종(宗)을 왕으로, 절일을 생일로, 조(詔)를 교로, 짐(朕)을 여(予)로, 사(赦)를 유(宥)로,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로, 태자(太子)를 세자(世子)로 고친 용어들을 다시 당시의 실록의 기록대로 고쳤습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이 고려왕조사 편찬에 완전히 적용되지 않았다. 역대 군주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를 제후의 역사를 기록한 세가로 고친 사실 따위에서 사대명분론의 흔적이 『고려사』 편찬에 어느 정도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의 역사전통을 존중한 세종의 이러한 원칙 표명으로 인하여 고려왕조가 중원 대륙의 국가와 함께 황제국 체제로 당당하게 국체를 유지했던 귀중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고려왕조의 문화적 자산을 새롭게 인식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6. 짙게 드리워진 흥망사관(興亡史觀)

『고려사』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또 하나의 분명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의 글이 바로 그러하다.


의종(毅宗)·명종(明宗) 이후로는 권세있고 간사한 자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의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며 용도를 함부로 하여 창고가 텅 비게 되었다. 원나라를 섬기면서 백성을 수탈하는 일이 끝이 없었다. ··· 고려시대 말기에 백성들은 권세가의 집에 들어가고 전시과 토지가 사전(私田)이 되었으며, 권세 있는 자의 토지는 산천으로 표식을 삼았고, 조세를 징수하기를 한 해에 두 세 번이나 되었다. 법은 다 무너지고 나라도 따라 망하였다.

- '식화지' 서문


의종·명종 이후에 권신이 정권을 장악하고 군사권도 이들에게 옮겨져 날랜 장수와 굳센 사졸들이 모두 사가(私家)에 소속되면서 도적이 들끓어도 나라에는 1여(旅) - 500명 - 의 군사도 없었다.

- '병지' 서문


고려 초에는 인재를 육성하는 방법과 선발하는 제도, 관리를 임명하는 법이 정연하고 조리가 있었으며, 뒤의 여러 자손도 이를 잘 유지하여 우리나라 문물의 번성함이 중국과 비교할 만하였다. 그러나 권신이 사사로이 정방(政房)을 두어 정사가 뇌물로 이루어지고 관리를 임명하는 제도가 크게 무너졌다. ··· 이로 인해 고려의 왕업이 크게 쇠하였다.

- '선거지' 서문


이에 따르면 무신정변이 있었던 의종과 명종 이후로 무신들이 경제권과 군사권,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국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그와 같은 정책의 혼선으로 인해 왕조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기록은 『고려사』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의 역사가들은, 고려시대 전기는 잘 다스려진 치세(治世)였는데, 후기는 모든 제도들이 문란하여 왕조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난세(亂世)였다는 흥망사관의 입장에서 고려왕조사를 서술하였다. 이는 위화도회군 이후 난세의 고려왕조를 바로잡으려 했던 이성계와 사대부 세력의 개혁과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부각하려는 목적 때문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흥망사관 역시 조선왕조 건국의 역사적 정당성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채택된 사관이었다.


7. 풍부한 자료집, 『고려사』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반영하면서 역사가의 사관(史觀)이 잘 드러난 역사서를 저술하는 일은 고금의 역사가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고려사』는 조선시대 초기 역사현실과 그에 대한 역사가의 문제의식, 즉 사관이 잘 드러난 역사서이다.

역사적 사실의 충실한 반영이라는 차원에서 『고려사』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고려사』는 고려왕조사에 관한 가장 풍부한 기초 자료집이라는 점이다. 『고려사』가 가진 또 하나의 특성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비록 조선 초기 정치현실이 『고려사』 편찬에 영향을 미쳤으나, 그 때문에 『고려사』의 사료적 가치가 결코 훼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윤회가 쓴 「수교고려사서」에 따르면 정도전과 정총의 『고려국사』는 고려시대 역대 국왕의 실록, 민지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제현의 『사략(史略)』, 이색과 이인복의 『금경록(金鏡錄)』을 모아 편집했다고 했다. 편찬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37권의 『고려국사』가 완성될 수 있었음은 고려 말 찬술된 역사서에 힘입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사』 편찬이 처음부터 역사가의 독창적인 저술이 아니라 기존의 자료를 모아 편집하는, 일종의 자료집 편찬에서 출발했음을 알려 준다. 뒤에 기전체로 서술체제가 바뀌면서 그러한 성격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현재의 『고려사』는 모두 139권으로 37권인 『고려국사』에 비해 3~4배 정도 분량이 많다.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서술체제가 바뀌면서 서술 내용이 더욱 늘어났기 때문이다. 『고려국사』와 같이 기존의 역사가들이 찬술한 역사서에 의존하여 내용을 채우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수십 명의 역사가들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관찬사서의 특성 때문에 개인의 저술과 같이 역사가 개인의 생각을 함부로 담을 수 없었다. 정도전은 부친 정운경(鄭云敬)에 관한 사실을 고쳐 쓴 잘못으로 비난을 받았다. 권제(權踶)는 선조 권수평(權守平)을 태조공신의 후예로 기록했다가 역시 비난을 받았다. 자연히 『고려사』는 당시까지 전해지던 방대한 자료를 담은 '고려실록'에 의존하여 자료의 보충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당시까지 전해지던 문집과 묘지명 등 각종 자료가 이용되었다.

『고려사』는 철저하게 원 사료를 충실하게 재구성한, 즉 원전 자료를 편집하는 방식으로 편찬되었다는 점에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시대 묘지명 자료가 실제로 『고려사』 열전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편찬의 방향을 둘러싼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원 사료의 일부가 취사선택되는 경우는 있었으나, 찬술자가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용을 보충하지 않은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특히 조선 초기 역사가의 사론이 전혀 실려 있지 않은 점도 이 책이 사실을 충실하게 모은 자료집으로서의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흔적이다.

왕조가 멸망한 뒤 편찬되어 엄밀한 의미에서 『고려사』는 2차 사료지만, '고려실록'과 같이 당대에 작성된 원래의 사료를 그대로 옮겨 적은 방식으로 편찬된 점에서 당대에 편찬된 1차 사료와 다를 바 없다. 『고려사』가 자료집으로서의 가치와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이 때문이다.


8. 더 생각해볼 문제들

① 역사가의 사관이 역사현실과 밀접한 관련 속에서 형성되는 한 완전한 객관적인 역사는 결국 존재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역사학에서 객관성이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②. 편년체 역사서술의 장점과 단점은 각각 무엇일까? 편년체와 기전체 역사서술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까? 아니면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해석해야 할까? 왜 세종 임금은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고려사』 서술 체제를 바꾸었을까?

③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6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까지 고려왕조의 역사를 정리하려 했을까? 편찬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④『고려사』가 조선 초기에 편찬된 2차 사료이면서 1차 사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할까? 왜 『고려사』는 『삼국사기』처럼 편찬 책임자의 사론이 실려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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