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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리얼리즘 문학의 작가, 소설가 황석영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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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2007-08-16

유럽에서 본 이주노동자의 삶은 처참했다! 소설가 황석영

[출처]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리얼리즘 문학의 작가, 소설가 황석영을 만나다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리얼리즘 문학의 작가, 소설가 황석영을 만나다




1.

“유럽에서 본 이주 노동자의 삶 처참했다 ”

장편 ‘바리데기’의 소설가 황석영




굶주린 자의 허기는 굶주려 쓰러져 본 자가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자의 슬픔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가슴 속까지 쩍쩍 갈라터진 자가 가장 잘 안다고 합니다.




리얼리즘 문학의 소설가 황석영의 신작소설 바리데기의 여주인공 ‘바리’가 바로 그런 여자입니다. 북한 청진에서 온 가족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중국으로, 중국에서 영국 런던으로 부초처럼 떠밀려 다녔습니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대 식량기근사태로 한 끼 밥걱정 없이 하루를 살지 못했고, 부모는 생사조차 모르며, 할머니와 언니 현이는 얼어 죽었고, 중국으로 도망간 언니 미이는 인신매매범에게 팔려 중국 시골 어느 사내에게 팔려갔습니다.




탈북 소녀 바리의 인생유전을 통해 세계사적 사건과 무관하지 않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운명과 삶을 보여주는 소설 바리데기를 최근 완성한 소설가 황석영 씨를 8월 16일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작가나 예술가들도 작품 끝나고 나면 산후 조리원 같은 데가 있었으면




▶ 소설 ‘바리데기’의 출간을 축하합니다. 굉장히 반응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얼마 전에 김훈 씨도 나오셨는데 ‘남한산성’을 앞질렀다고 하던데요. (웃음)




4년여 만에 책을 냈는데 독자들이 많이 찾아주시네요. 베스트셀러 줄 세우기가 문제인데, 김훈 씨의 ‘남한산성’이 두 달간 선두를 지켰으니 이제는 형님한테 양보를 해도 되지 않을까요? (웃음) 그러면서 멤버체인지 하는 거죠, 뭐. (웃음)




▶ 두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시너지효과도 있을 수 있고 장편소설이 인기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잖아요.




지난 2년여 동안 각 미디어들이 ‘한국문학의 위기다, 한국장편소설의 위기다.’ 라며 우려를 표시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저만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이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 같아요. 봄부터 시작해서 앞으로도 계속 계획돼서 나올 책들을 제가 좀 알고 있는데, 원로부터 젊은이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달에 두세 편씩 장편이 발표 돼요. 그래서 저는 한국문학의 중흥기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격려의 말도 합니다.




▶ 어느 글에선가 ‘임산부는 출산을 하면 산후조리원에서 쉰다는데 작가는 작품을 마치면 어디서 쉬어야 하느냐?’고 하셨는데 좀 쉬셨나요? (웃음)




쉬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료조사도 하고 생각도 하고 구성도 하고 그러다가 쓰고 책을 다 마치고 나면, 연극이 끝나고 나서도 마찬가지지만 허탈함이 한 일주일 정도 가거든요. 그렇다고 젊을 때처럼 친구들과 만취해서 돌아칠 수도 없는 것이고 그냥 허전한 채로 있으니까 제가 농담 삼아 ‘작가나 예술가들도 작품 끝나고 나면 어디 조리원 같은 데가 있으면 좋겠다....’ 그랬어요. (웃음)




▶ 바리데기는 설화 속의 인물인데, 소설 ‘바리데기’의 내용은 어떤지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무속설화라는 것은 다 알고 있고 전국에 47종류가 있는데 줄거리가 약간씩 다르죠. 크게 보면 ‘어느 나라에 일곱 번째 공주로 태어난 바리를 아버지가 참다 참다 분노해서 갖다버리라고 해서 버리니까 짐승들이 보호하고 산속에 사는 공덕 할미, 할아비가 나타나서 키웠다. 그런데 바리를 버리고 나서 수십 년 후에 온 세상에 병이 돌고 부모님도 병이 들어 죽게 생겼는데 점을 치니까 옛날에 갖다버린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오면 산다. 그래서 바리를 찾고, 바리가 돌아와 생명수를 찾아서 서천서역 넘어 해가 지는 서쪽 끝에 가면 세상 끝에 생명수가 있다고 해서 그곳에 가서 생명수를 구하고 돌아와서 부모와 세상을 다 살린다.’는 줄거리입니다.




이 줄거리는 전국이 똑같아요. 저는 이 줄거리를 현재에 맞추어 전 세계적인 현상인 이주(Migration)에 두었어요. 전 세계에서 못사는 나라나 소외된 나라들이 전부 서구에 또는 잘사는 나라에 몰려들어서 런던, 뉴욕, LA... 등 굉장하잖아요. 지금 우리나라도 이주노동자가 어림잡아 백만이 넘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농촌으로 결혼을 하러 많은 나라에서 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우리 안에도 들어와 있는 문제죠.




우리가 20세기를 끝내면서 ‘21세기에는 정말 정화되고 상생하고 평화로운 그런 세기를 만들 것이다.’ 하면서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그랬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금도 지옥과 같은 현실이 계속되고 있지요. 이런 모습들을 옛날 ‘바리설화’에 담아서 말하자면 평화, 상생할 수 있는 생명의 물이라는 것의 의미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그런 작품입니다.




▶ 소설의 주인공인 바리라는 북한소녀가 결국 기근에 못 이겨서 탈주하고 중국을 거쳐서 런던에까지 가지 않습니까? 그러다 마지막에 파키스탄인하고 결혼을 하지요. 그런데 파키스탄인 남편이 동생을 찾아서 자기 나라로 가고, 동생은 결국 죽게 되고... 저는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요즘에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를 어쩌면 이런 식으로 예언을 하셨을까 하면서 깜짝 놀랐어요.




사실 이런 상황은 우리에게 뒤늦게 온 것인데, 저는 유럽에 있는 동안 유럽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거의 일상적인 사건이죠. 영국을 무대로 삼은 것도 옛날에 제국이었고, 이슬람을 믿는 나라들이 대게 중동과 아프리카에 많이 있고 동남아에도 많이 퍼져있는데 영국의 구식민지였던 나라들이었기 때문에 그쪽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거든요. 마침 제가 가있을 때 문화적으로 단절돼 있었던 파키스탄인 청년들이 말하자면 테러에 가담해서 런던 철도와 버스를 폭파시켰고 그뿐만 아니라 9․11이후부터 백인사회와 모슬렘사회 간의 갈등이 거의 눈에 보일 정도로 두드러졌어요.




◇ 힘 있는 자의 교만과 약한 자의 절망이 합쳐져서 이루어 놓은 현세라는 지옥




▶ 영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어려웠죠?




네, 심지어는 학교에서 ‘부르카(burka), 히잡(hijab) 이런 것을 벗어라.’그러고... 그러면 ‘안 벗겠다.’ 하고.... 직장에서도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서로 종교와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의상도 다르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데 어떻게 하면 서로가 받아드리고, 서로 다른 점을 받아드리고,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21세기 화두를 크게 두 가지로 봤습니다. 이행기인데 이동과 조화를 이 소설의 주제로 삼아서 했던 것입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갖는 느낌도 제가 이미 소설에서 지적을 했습니다. 폭탄 테러한 친구도 지옥에 갇혀 있고 거기서 죽은 병사들도 갇혀 있는데 이승에서 전쟁했던 전사가 지옥으로 떠가는 배를 타고 가면서 어떻게 내가 적과 같이 있느냐고 물어봐요. ‘강한 자, 악한 자가 이기는데 내가 왜 적과 같이 이 배를 타고 있냐?’...




그러니까 ‘이승에서의 승리는 절반이다.’ 라는 공수가 들려와요. 이승에서의 승리는 다 절반이죠. 승자도 패자이고, 패자도 패자이고.... (웃음) 그리고 한편으론 유럽에서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쪽에 고향방문을 갔던 많은 친구들이 전선지역에서 잘못 오해받아 죽거나, 잡혀서 엉뚱하게 행방불명됐다 몇 년 만에 나타나는 사건들이 벌어져요. 독일, 프랑스에서도 그런 사건이 있었고, 런던에는 여러 명 있었어요.




그런 것을 보면서 저것을 좀 반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소설에서도 보면 동생이 모슬렘들 모여서 전선에 나가라고 하니까 격해져서 아프가니스탄을 가고 형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못 만나고, 동생은 이미 죽고, 형은 거기서 오해받고 잡혀서 쿠바의 관타나모로 가는 이런 일이 벌어졌죠. 관타나모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아들이 그 아버지에게 동생 우스만이 이러이러해서 죽었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이 철없는 것’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가 ‘야, 우리가 다 철없는 것들이다.’라고 얘기를 하면서 ‘현재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옥은 힘 있는 자의 교만과 약한 자의 절망이 합쳐져서 이루어 놓은 지옥이다, 이걸 우리가 힘이 없지만 힘을 합쳐서 쌍방을 도와야 한다.’......

돕는 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그치게 해야 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알라의 말을 인용하면서 분노하는 자의 절망, 그것은 불과 같아서 스스로를 파멸시킨다고 하죠.




▶ 너무 예언적인 결말인 것 같아요.




맨 마지막에 보면 모슬렘인 남편과 북한소녀인 바리가 자그마한 샌드위치가게를 하면서 먹고살아 가는데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런던 폭탄테러로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된 모습을 보고 바리가 자기의 부른 배에 담겨있는 아기를 잡고 ‘아기야 미안하다.’라고 해요. 미래에도 이 아이들에게 이런 지옥을 물려줘야 되니까요...그러면서 두 부부가 울고 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이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지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이 작품을 집필하기 위해 파리와 런던에 체류하시면서 보셨던 세상,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보시면서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셨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항상 미국중심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나이브(naive)하다고 그럴까, 천진하다고 그럴까,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미국에 가서 늘 보면 미국사람들은 미국이 세계거든요. 세계는 없고 미국이 세계예요. ‘굉장히 천진하고 무지몽매한 그런 사람들이다.’ 하는 느낌을 받거든요. 물론 대도시는 다르겠습니다만 중․서부지역을 가면 이 사람들이 과연 현 세계 사람들인가 할 정도로 선량하고, 착하고, 그러면서 세상모르고...




우리도 분단을 겪고 바로 지척에서 수백만이 굶주려서 죽고 하는 그런 시대를 넘어오면서도 바깥세상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것 같아요. 이제는 좀 한반도 밖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는 것, 세계를 미국 중심으로 보지 않는 것, 이런 것을 좀 배워야 되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 언제나 소설을 쓰시려면 현장도 가보셔야 하고, 자료조사도 굉장히 철저히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바리데기에서도 90년대 중반의 북한의 식량난, 대기근, 이런 것이 진짜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더라고요. 직접 보시지는 않으셨죠?




사실 저는 그때 징역을 살고 있었는데... (웃음) 제가 89년, 90년에 방북할 때는 동유럽이 붕괴하기 전이어서 그래도 비동맹 국가들과 서로 물물교환하면서 교역이 있었어요. 동구가 무너지면서 말하자면 세계화 체제가 재편성되잖아요. 그러면서 남아있는 상징적인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 쿠바와 북한만 남았잖아요.




쿠바는 따뜻한 지방이니까 T-셔츠 한두 장이면 산답니다. 그리고 사철농사를 지으니까 빵도 먹고 사탕수수 심으면 팔아서 먹을 것도 사먹고 그러는데 북한은 혹독한 겨울에 에너지 사용이 많고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라 옛날부터 지하자원 공장 같은 것 하고 남쪽의 식량을 갖다먹었거든요. 식민지 때 이미 남과 북이 그렇게 편성이 됐어요.




분단이 되면서 처음부터 고질적인 식량난이었을 텐데 그러다 동구가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와 다 두절된 상태로 거기다 기둥처럼 여기던 지도자 김 주석이 죽고, 당내에도 우리가 볼 때는 재편과정이 있지 않았겠어요. 세대교체라든가... 그리고 거기다 자연재해까지... 90년대 중반이 전 세계적으로 엘니뇨현상이 굉장히 성행해서 불이 많이 났는데 북한의 경우에도 불까지 많이 났다고 그래요. 나중에 보니까 화전을 하려고 불을 많이 질렀다고 그러는데 굉장히 특이하게 봤습니다.




시카고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부부가 특히 부인이 다이아스포라 코리아(Diaspora Korea)라고 한국의 근대화 속에서 다른 나라로 흩어지고 이런 과정들을 연구과제로 삼아서 북한 쪽도 그중의 하나라고 해서 인터뷰도 하고 그런 자료를 보니까 산불이야기가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위성자료들을 찾아보니까 한때는 저녁에 사진을 찍어놨는데 함경남북도 이쪽이 봉홧불처럼 점점이 불이더라고요.




▶ 산불이 나면 산불을 끌만 한 장비도 사실 없겠어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고, 그러니까 계속 타는 거죠.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중국국경에 가서 두만강 건너를 보면 무인지경, 허허벌판처럼 산과 들이 다 민둥산이에요. 개간하는 핑계도 되고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도 했겠지만 나무 한 그루 없죠. 소설에서 사실주의처럼 묘사를 한 것이 아니라 생략하고, 상징적으로 건너뛰면서 했는데도 보는 사람들이 ‘아유~ 이랬구나...’ 그러세요.




제가 취재를 하느라고 중국과 조선국경을 갔더니 그쪽 안전부 담당자라는 사람들은 내가 남쪽에서 유명한 사람이니까 ‘야, 우리는 인권문제가 전혀 없는데 저쪽이 저렇다.’ 하느라고 여러 가지 자료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보여주기도 하고, 그래서 들어가지 못하는 군사지역도 샅샅이 들어가 보고 그랬어요.




◇ 평화와 상생, 문명적인 자생이 흐르는 21세기를 꿈꾸다




▶ 북한 쪽도 들어가 보셨어요?




아니오. 옛날에 방북했을 때 무산이니 백두산 기슭 쪽을 다 봤는데 지금도 별로 변화가 없으니까요. 거기서 나온 사람들 인터뷰도 많이 하고 사진자료도 많이 봤는데 사실 이 소설은 실상이 십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 해요. 실상은 굉장히 우리가 상상을 초월하게 처참한 그런 상황이죠.




▶ 두만강가에서 계속 시체가 둥둥 떠내려 오고 그랬나요?




그랬다고 그래요. 사진도 나오고 뭐 동영상도 많이 나와 있죠. 이미 방송에서도 방영을 한 것으로 알고 있고 옛날 필름을 런던에 있을 때 BBC에서 한번 보여주더라고요. 90년대부터 2000년 초까지 계속.... UN에서는 대게 300만 정도로 보고 있는데 직접 굶어 죽은 사람과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어린아이들, 노약자가 제일 많이 죽었다는 거죠.




▶ 들으셨던 이야기 중에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팔리기도 하고 그런가요?




마을이 다 비고, 아이들은 거지가 돼서 흘러 다니다가 죽고, 중국에서는 팔려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죠.




▶ 무슨 나라가 300만을 굶어 죽입니까...




북한 통치 층 시스템의 잘못도 물론 있지만 상대방에게 변화의 시간을 주면서 차츰차츰 평화 쪽으로 정착시켜 가려던 차에 부시 정권이 들어오면서 완전히 정책을 바꾸고 일시에 막아버렸죠. 외국에서 교역을 할 수 있는 창구까지 다 막아버렸잖아요. 저는 강대국의 그런 논리를 위선적인 논리라고 생각을 하는데, 다행히 요새 풀려서 관계개선도 하고 평화체제로 가겠다고 했으니까 지켜봐야지요. 당시에 섣부르게 생각한 것이 저렇게 목조르기를 하면 일시에 붕괴될 것이라고 봤던 모양인데 그러니까 죄 없는 백성들만 죽어간 거죠.




저는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가 지난 20세기를 극단적인 분열과 분쟁과 갈등의 세기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20세기 내내 거의 전쟁을 했는데 이제는 좀 평화적으로 서로 살아갈 길을 찾고 사는 방식이나 방향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좀 이렇게 문명적인 자성들을 하는 그런 사상적인 흐름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 엄마와 새언니, 가족들을 데리러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자 바리가 다시 부령으로 가죠. 가서 죽음을 맞이한 길거리의 시체들을 보며 이런 말을 해요.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어느 탈북자 소녀의, 그 비슷한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어요.




▶ 실제로 탈북자 분들을 만나셨나요?




중국에서 소개로 탈북자 서너 사람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심양이니 대련 같은 곳에 가면 대도시가 대단하잖아요. 자기 식구들은 저쪽에서 굶어 죽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무심하게 거리에 음식은 넘쳐나고 불빛은 휘양 찬란하고 가족들이 손잡고 왔다 갔다 하고.... 그러니 ‘세상이 이렇구나! 이러면서 우리를 내버려두다니...’ 이런 게 있는 거죠.










◇ 바리는 성공이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삶




▶ 그러다 바리가 자기가 일하는 집 사채 때문에 떠밀려서 배타고 런던까지 가게 되는데 배 안의 풍경이 너무 끔찍했어요. 폭행, 감금...




자료에 다 나오는 이야기들인데, 그 일화는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 남쪽 지방 사람들도 많이들 옮겨갔어요. 파리에도 중국인만 20만이 있고 런던에도 25만 된다고 하는데 ‘뱀단’이라고 밀항조직원들이 있어요. 밀항을 시키면 불법입국자들이니까 노임이 싸서 거의 노예노동인데 제가 런던에 도착한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아일랜드가 마주 보이는 영국 해안에서 ‘새조개’를 잡는 일을 시키려고 배가 썰물 때에 인부들을 내려놓고 적당한 시간에 가서 인부들을 데려와야 되는데 늦게 가서 인부들이 다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더라고요.




가령 네덜란드 국경에서 냉동선을 열었더니 한 50여 명이 얼어 죽었다든가 뉴욕 항이나 LA항구에서도 컨테이너 안에서 무리죽음이 나오는 일들이 많이 있거든요. 중국인들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지브랄탈(Gibraltar)이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해협 같은 데를 가면 유럽대륙으로 건너오려는 무수한 밀항자들이 있어요. 걸어서 지브랄 타르(Gibraltar)까지 와서 건너가려고 3년을 일하면서 기다린다고 합니다.




▶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붙잡혀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그렇죠. 제가 런던에서 들은 얘기로는 유로스타 지붕에서도 그런 일이 많다고 해요. 프랑스 쪽을 보면 포도밭을 보호하려고 둑을 쌓아서 U자형인데 둑에 엎드려있으면 지붕 높이와 비슷하니까 엎드려 있다가 터널이 가까워오면 기차가 속도를 늦추니까 지붕으로 뛰어내리고 매달려서 20분을 가는데 터널 속의 바람이 굉장하잖아요. 떨어져 죽기도 해서 선로관리인들이 시체를 가끔 수거한다고 그래요.




그런 이동이 엄청나게 진행되고 있는데 브라질의 사진작가인 세바스티앙 살가도 (Sebastião Salgdo)의 사진집 ‘Migration’시리즈를 런던에서 봤는데, 아프리카, 동남아, 라틴아메리카의 실상들과 동유럽의 유랑노동자들의 사진... 그 장면, 장면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몰라요.




▶ 그렇게 목숨을 걸고 와서 바리는 열심히 발마사지를 해서 어느 정도 성공하는데...




성공이라기보다는 살아남은 거죠.




▶ 선생님을 이야기하자면 89년 방북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절에 어떻게 가실 생각을 하셨어요?




소련에 냉전이 와해되는 분위기가 왔고 당시에 노태우 정권이 7․7선언이라고 해서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고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시민단체들, 민주화 운동 단체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면 그것을 핑계 삼아서 반공사건이라든가 간첩사건 같은 것으로 늘 북을 핑계 대고 압제를 심하게 했거든요. 그때 당시에 종교계, 지식인들, 학생들이 ‘우리가 먼저 민간자주교류를 해버리면 다음부터는 우리를 보고 감히 간첩단 사건 못 만들 것 아니냐.’하는 것도 있었고, 또 하나는 문 목사님을 모시고 제가 대변인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내부의 결정이 내려져서 그때는 가볍게 갔다가 와서 귀싸대기나 몇 대 맞으면 되겠지 했어요. (웃음)




그렇게 쉽게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제가 작가니까 양쪽의 이념적인 굴레나 이런 것에서 자유스럽게 훌훌 벗어던지고 뛰어넘으면 작품세계가 훨씬 더 열릴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갔는데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죠. (웃음)




▶ 제가 생각할 때는 황석영 선생님의 그 ‘못 말리는 호기심’이.... (웃음)




지금도 굉장합니다. (웃음)




▶ 얼마나 갔다 오신 거죠?




한번 갔다 온 뒤에 들어오지 못하고 독일 베를린에 있었고 ‘범민족 대회니까 이왕 밖에 있으니 참가해라. 한번 갔다 오나 두 번 갔다 오나 마찬가지니까 네가 가라.’ 그렇게 길이 생겨서 몇 차례 베를린에서 평양을 오갔죠.










◇ 이념적 굴레를 벗어난 자유함의 세계




▶ 그래서 많은 고초도 겪으셨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작품생활에 엄청난 도움이 되신 건가요?




양측으로부터 자유스러워졌다고 할까요, 국가논리랄까 그런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난번 ‘손님’도 그랬고 ‘바리데기’ 같은 소설은 남측의 어떤 일부 쪽이나 북측의 통치 핵심에 있는 분들이나 기분이 많이 나쁘겠죠. (웃음)




▶ 솔직히 겁나지는 않으셨어요? (웃음)




목사님도 그렇겠지만 작가들도 인생을 던져서 하는 일이 무섭지는 않거든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옛날에 조사를 받을 때 사람이 긴장이 풀어지면 나중에 인간적으로 되니까 넘기기 전에 서로 속을 풀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우스갯말로 ‘얼마나 살겠소? 한 십여 년 살겠소?’ 그랬더니 ‘많이 살걸.’ (웃음) 그러면서 ‘황석영 씨야 다 살고 나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제가 될 텐데 뭐’ 하며 병 주고 약 주고 하더라고요. (웃음)




▶ 매 맞고 그렇지는 않으셨어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때리면 같이 때리고 욕하면 같이 욕하고 그랬어요. (웃음)




▶ 정말 많은 분들을 북에서 만나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면 한두 분만 말씀해 주세요.




남쪽에서도 일부러 북한문학을 우리 안에 끌어드리려고 ‘만해문학상’도 주고 그렇지 않습니까? 저야 문인이니까 특히, 벽초 홍명희 선생님의 손자인 작가 홍석중 씨가 저와 비슷한 연배인데 지난번 드라마나 영화화됐던 ‘황진이’도 있는데 그런 것이 북한에 문화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합니다.

‘황진이’가 비록 우리가 보는 시각하고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러나 북한 사회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시각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굉장히 고무적으로 생각을 하고 늘 헤어져있지만 애틋한 친구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후배 남대현 이라고 ‘청춘송가’도 쓰고 그랬는데, 안 보면 생각이 나고 걱정이 되고 그럽니다.




▶ 가장 최근에 북한을 다녀온 때가 언제인가요?




2005년에 ‘남북작가회담’을 해서 100명의 작가들과 함께 갔었어요. 낭송회도 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했는데 이분들이 고생을 많이 겪어서 그런지 너그러움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전에는 해외동포들이나 여행자들이 가서 비아냥거리는 얘기들도 하고 정치적인 민감한 얘기를 해도 웃어넘기고 그랬는데 지금은 일일이 다 싸우고 지적하고 문인들과도 많이 싸웠습니다.




굉장히 예민해져 있고 삼엄해져 있고 자리마다 이른바 기관원들이 동석을 해서 앉아있는데 부담스럽잖아요. 더 열고 좋은 얘기들 많이 나누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동료 문인들이 가서 인간적인 실망을 한 것이 커서 참 답답했어요. 지혜롭게 서로 풀어나가야 할 텐데.... 문인들 하나하나가 엄청난 입이고 손이고 그럴 텐데 이렇게밖에 전달을 못 하나 굉장히 섭섭했습니다.




▶ 선생님의 이야기는 도저히 한 시간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전에 양해를 얻어 내일 이 시간에 한 번 더 모시기로 했습니다.








2.

중국 만주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방 후 외가가 있는 평양으로 들어갔지만 좌우로 생각이 달랐던 가족은 북으로 남으로 헤어지게 되지요!




6.25 4.19 5.16 현대사의 격랑 속에 한 소년은 숱한 방황을 하게 됩니다. 자퇴에 퇴학에 가출에.. 그 속에서 만난 숱한 밑바닥 민중의 삶들은 글재주 있는 한 소년을 튼튼한 소설가로 성장시킵니다.




베트남 전쟁에 해병대 대원으로 참전한 이후 본격적으로 삼포가는 길, 객지, 장길산, 장산곶매 등의 대작을 만들어 냈습니다. 노동과 빈곤, 부와 분배, 분단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해남과 광주에 살면서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작가에게 현실은 늘 극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반쪽의 조국을 바로 알기 위하여 89년 북한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떠돈 유럽에서의 몇 년 동안의 망명, 5년여의 감옥생활, 끊임없이 그 고민들은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현실에 깊이 뿌리박고 선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한국 리얼리즘 문학을 개척해온 소설가 황석영 선생을 어제에 이어서 8월 17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어머니, 자수성가한 아버지와 떠밀리듯 결혼해




▶ 고향이 만주 장춘이라고 하셨는데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제가 43년생이니까 곧 해방이 되잖아요. 그때 기억은 별로 없어요. 외가 쪽이 평양에서 근대화된 집안이에요. 외할아버지가 전홍걸 목사라고 감리교 목사이면서 평양의학전문학교도 만드셨어요. 계몽주의자셨죠. 그래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외삼촌과 이모가 다 일본유학을 다녀오셨는데 그 중에서 일부는 사회주의 운동에 빠지셔서 북에 남은 분들도 있었어요. 가족이 좌우로 갈렸다고 하셨는데 그런 식이죠. 어머니가 결혼하실 때 외할아버지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계셨어요. 아버지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누나 밑에서 혼자 중농 정도로 자라셨는데 매형이 땅도 다 팔아먹고 하니까 집을 나와서 상업전수학교를 나오셔서 서비스 공장 같은 걸 하셨는데 돈을 많이 버신 모양이에요. 일제 때 남양에서 고무가 나오니까 타이어를 찍어내는 공장을 하셔서 크게 돈을 벌어가지고 나이가 들어서 고국의 규수를 맞이하겠다고 매파를 앞세우고 평양에 나왔는데 외가가 기울어지니까 어머니가 성큼 결혼하신 거예요.




▶ 형제가 어떻게 되셨어요?




4남매입니다. 위로 누나가 둘, 밑의 동생 하나가 있어요. 맨 밑의 누이동생이 죽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5남매죠. 그래서 평양으로 나왔는데 그때부터는 기억이 납니다. 모란봉 밑에 살았는데 을밀대 아침마다 올라가던 거며 그리고 모란봉 밑이 바로 전철 종점이었거든요. 종점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생각도 나요. 나중에 북한 갔을 때 찾아갔었는데 그 부근에 큰 경기장이 생겼더라고요. 전쟁 때 동네자체가 없어지고 전쟁 전에 적산가옥들이,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란봉 기슭에 한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어요. 그러다가 48년에 아버지가 남쪽에 직장이 생겨서 가족이 남으로 내려오게 됐죠. 전쟁 전에 3.8선을 넘어서 내려와서 영등포에 정착을 했습니다. 지금은 한전이지만 옛날에는 경성전기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곳에 들어가시고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직장을 잡아서 다니셨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가사선생을 하시다가 그만두셨어요. 그래서 영등포에서 성장을 했죠.




◇ 일찌감치 틔운 꽃망울, 숱한 방황으로 퇴학까지




▶ 황석영 선생님은 어떤 학생이셨어요?




어렸을 때는 혼자 놀기를 좋아해서 책을 주로 많이 봤어요. 그때는 야시장에 가면 개인 서가에서 나온 책들을 책꽂이에 꽂아서 팔기도 하고 빌려주기도 했잖아요. 누나들이 이용하기 시작해서 나도 같이 가서 어른들이 보는 책을 초등학교 때 몇 군데씩 옮겨 다니면서 다 읽었어요. 이전에는 어머니가 대구 피난시절에 걸리버 여행기라든지 소공자를 사다주셨는데 읽다 보면 금방 끝나고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른들 보는 책을 가서 봤어요.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어른들이 보는 책을 본 게 철가면이라고 굉장히 두꺼운 책이었어요. 그 다음이 초등학교 3,4학년 때 몽테크리스토 백작,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인데 아마도 일본에서 중역된 책일 거예요. 그런 세계명작들을 초등학교 때 봤어요. 그리고 학원이라는 잡지가 있었는데 그것도 초등학교 때부터 애독을 했고 그 전에 소년세계라는 게 있었어요. 새 벗도 있었고 다 피난시절에 보던 겁니다.




▶ 피난은 어디로 가셨어요?




대구로 갔어요. 대구에서 중앙초등학교를 1년 다니고 다시 영등포로 돌아왔죠. 그래서 영등포초등학교를 다니고 경복중학교를 들어갔어요. 평소에는 좀 놀다가 시험 때가 되면 벼락치기를 해요.(웃음) 그러면 성적이 올라가곤 했어요.




▶ 학교 때는 공부시간에 주로 소설책을 보셨어요?




그런 걸 봤죠.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톰소여처럼 슬슬 장난이 늘었어요. 여기 목동에 옛날에 오목네가 있었는데 여기는 물론 먼데까지 마포강변에서부터 관악산까지 돌아다녔어요. 땡볕에 가도 가도 끝이 없어서 새까맣게 타도록 걸어다녔죠. 런닝 차림에 남의 밭에서 생옥수수 슬쩍 해서 먹기도 했어요. 이 방송국 근처가 전부 하천부지였어요.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중국음식점에 채소를 대는데 채소밭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 근처에 양배추니 뭐니 심었던 기억이 나요.(웃음)




▶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 쪽에 관심을 가지셨어요?




초등학교 때 백일장을 나가서 뭘 썼는데 그게 최우수상을 받아서 신문에도 났어요. 사회로부터 처음으로 꼬마가 칭찬을 받았잖아요. 나는 작가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거라는 걸 알았으면 안 했을 텐데, 뭔지도 모르고 이 다음에 뭐가 될래? 물으면 작가라고 대답했어요. 저는 중, 고등학교 때 문예반에 들어간 적이 없어요. 여학생은 괜찮은데 남학교 같은 경우에 문예반이나 꽃 가꾸는 원예반은 여자애들이 하는 건데 저걸 사내자식들이 왜 하느냐고 주위에서 그러니까 중학교 때는 수영반에서 수구를 했어요.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산악반에 들어갔고요. 거기서 주먹도 쓰면서 싸움 많이 했죠.(웃음)




▶ 아버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아버님은 전쟁 직후에 돌아가셨어요. 고생을 들입다 하고 사선을 넘고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니가 별의별 장사를 다 하고 고생 많이 하셨죠. 그리고 누나들은 둘 다 경기여고를 다녔는데 고학년이 되니까 학교 가서 늦게 오기도 하고, 저는 동생을 데리고 밥도 먹기도 하고 자취도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가 노트를 찢어서, 제 아명이 수남이인데 ‘수남아, 밥은 밥솥에 덥혀놓았고 국은 곤로에 데워먹어라.’ 써 넣고 가시면 동생이랑 같이 먹었죠. 그러면서 보냈는데 고등학교 가서는 공부도 잘 안 하고 싸움패에 들어갔어요. 등산반이라는 게 이탈하는 코스가 되거든요. 왜냐하면 학교에 있다가 우리끼리, 소년들끼리 모이면 술, 담배도 하게 되고 껄렁껄렁해지면서 불량소년이 되어 버린 거죠. 그러다가 나중에 문학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싸움을 하는 바람에 퇴학을 맞았는데 학교를 3군데 정도 돌아다녔어요. 그때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 하셨는데 저는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많습니다.




퇴학당했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하면 화장실에 서서 창문으로 내다보면 바로 앞에 길이 보이거든요. 아침에 여학생들이 칼라 내밀고 입김을 하얗게 토해내면서 학교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저기에서 쫓겨났구나, 그때부터 국외자에 대한 게 있었나 봐요. 작가로서 특별한 경험을 한 거죠.




◇ 어머니가 눈물을 쏟아내며...“집에 가자”




▶ 퇴학당하신 후로는 뭘 하셨어요?




집에서 책도 보고 집에서 가출해서 혼자서 남도를 돌아다녔어요. 부산 칠북에 장춘사인가 하는 절이 진주 외곽에 있어요. 거기서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좋게 보고 그때 동래 범어사에 하동산 스님이 조실스님으로 있고 원주 스님이 불광이라는 잡지도 하셨는데 지금은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고광덕 스님 앞으로 편지를 써서 제가 갔어요. 갔더니 조실 스님한테 데리고 갔는데 그게 구두시험처럼 면접시키는 거예요. 그때 출가를 하려고 했죠.




스님이 “너, 여기 있으면 얼마나 있을끼고?” 그러시더니 더 이상 말씀을 안 하세요. 그게 한 바퀴 돌리는 건데 광덕 스님이 뭐라고 하시더냐고 물으시기에 얼마나 있을 거냐고 하셨다고, 갈 데 없어서 왔는데 있을 만큼 있겠다고 했어요. 자기를 찾으러 왔다는 둥 철학적인 건 딱 질색이거든요. 행자 애들은 내가 가니까, 내 또래 애들이 밥도 갖다 주는데 자세는 아주 겸손하지만 시건방지게 자기를 찾으러 왔냐고 물어봐요. 쑥스러워서 먹고 살길이 없어서 여기 왔다고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그 이튿날 나가라고 그러더라고요.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않고요. 그런데 문 앞에 있다가 웬 스님이 지나가면 따라가 보라고 해서 문 앞에 서있었더니 스님 한 분이 지나가요. 스님 되려고 왔는데 저 좀 데려가 달라고 했더니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갔어요. 첫 번째는 역에다가 저를 떼어놓고 도망가 버리고 그 이튿날 기다렸더니 저 어디 울산가는 쪽에 바닷가 오막살이 절에 갔는데 대웅전도 콧구멍만하고 흙방이 옆에 붙어있어요. 청소하라고 해서 먼지 때가 얼마나 꼈는지 다 닦아내고 밥 한술 얻어먹고 자는데 새벽 3시에 와서 막 발로 차더라고요. 이게 중 된다고 온 놈이 시간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자느냐고 당장 나가라고 보따리 채 집어던지더라고요. 또 쫓겨나고, 그렇게 여러 군데를 돌린 다음에 다시 범어사로 가는 거예요. 가서 기다리기를 몇 차례 한 다음에 겨우 배치 받은 곳이 금강원이라고, 지금 유원지가 되어 있는 곳이에요.




선원이 있었는데 그곳 행자로 들어가서 1년 동안 지냈어요. 밥하고 허드렛일하고 심부름하고. 그러다가 스님들 심부름을 나가면 새끼 중이 할 수 있는 일이 딱 2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자장면을 사 먹고 또 하나는 영화구경을 하는 거예요. 이건 신부님도 그렇고 군대 가서 휴가 나온 군인들도 그렇고 코스가 그겁니다. 그래서 역시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시간이 있으니까 영화구경을 갔는데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아요. 제목이 ‘오케스트라의 소녀’에요. 그걸 보고 나오는데 누가 바로 옆에 와서 날 잡아요. 보니까 큰 누나 매형의 친구에요. 서울대학교 나오신 분인데 동기동창이라서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왔던 분이에요. 날 보더니 네가 여기 웬일이냐고, 그러잖아도 어머니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같이 가자고 안 놔주는 거예요.




그때 계는 아직 안 받았지만 이미 승복입고 머리도 깎아서 모습은 스님의 모습이죠. 가자는 걸 뿌리치고 도망갔어요. 어머니가 아시고 그 길로 부산 근처 일대의 절을 다 뒤졌어요. 스님이 되려면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까 동래의 범어사를 가라고 누가 시키더래요. 그래서 찾아오셨는데 광덕 스님을 만난 거예요. 처음에는 모른다고 그랬다가 어머니가 며칠 동안을 매일 삼문 앞에 오셔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실 그런 사람이 여기에 있지만 왜 불가에 들어온 사람을 찾느냐고 물어보셨겠죠.




내가 홀어머니인데 저거 하나 바라보고 이생을 살고 있는데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불쌍한 사람을 보고 가련하게 여기는 건 똑같지 않느냐,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그쪽도 마음은 같은 거 같은데 우리 아들이 가출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으니 만나게 해달라고 하셨어요. 그랬더니 그러면 어머니가 만나보시고 아들이 우리 쪽을 선택해서 다시 산문 안을 들어오면 우리 사람이니까 찾지 말고, 어머니를 따라가면 어머니 인연이니까 우리도 더 이상 말 안 하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나는 그런 속도 모르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을 쓸고 있는데 동자승이 오더니 산문 앞에 나가보라고 해요. 누가 왔다고, 올 사람이 어디 있나? 금강원에서 죽 내려오면 양쪽에 나무들이 있고 그 사이로 길이 있는데 큰 길로 나가면 절 앞에 기념품 가게가 있어요. 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여자가 하나 서 있어요.(웃음) 가까이 보니까 우리 어머니에요. 어머니가 붙들더니 눈물을 쏟아내세요. 집에 가자고 하셔서 예, 갑시다 하고 따라 나서서 그 길로 그냥 돌아서 나왔죠. 부산 역 앞에 국제시장이 있는데 사복을 사고 승복을 벗어서 보따리에 싸고 모자 하나 쓰고 들어가서 어머니가 사주시는 불고기를 먹었는데 대단히 맛있었다는 기억이 지금도 있어요.(웃음)




◇ 채울 수 없는 허기...자살미수 그리고 베트남




▶ 지금 자녀가 어떻게 되세요?




3남매입니다. 아들 둘에 딸 하나에요.




▶ 만약에 그 아들이 그랬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다행이 우리 아들은 저 같지 않고 정서가 안정되어 있어요.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저보고 청룡열차라고 해요.(웃음) 우리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세요. 제가 자살 미수도 3,4번 했잖아요. 그때마다 살려놓고. 그 다음에 베트남 가려고 특수교육대 앞에 차량을 타고 훈련을 받으러 가는데 거기에 민간인이 올 곳이 아닌데 삼거리에 어머니가 와서 기다리고 계세요. 베트남 간다고 어머니께 말씀을 안 드렸거든요.




▶ 베트남에는 왜 가시려고 하셨어요?




군대 신체검사에 3번을 안 갔어요.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 안 갔더니 파출소에서 잡으러 오더라고요. 그 달에 나가는 게 뭐가 있나 봤더니 해병대가 있어서 거기에 자원입대해서 간 거예요. 그때 미스코리아 심사하듯이 3군데를 사람을 세워놓고 뽑아요. 학력도 좋고 풍채가 좋으면 의장대와 군악대, 헌병대를 뽑는 거예요. 이게 3대 골병대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기합이 세거든요. 그래서 떨어진 곳이 헌병대에요.




헌병학교 가서 교육받고 배치 받은 곳이 진해 헌병대인데 거기 가서 교통정리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진해 사령부에 근무를 했는데 그때는 가난할 때니까 파견대장 했던 사람이 직업군인이니까 중사쯤 됐어요. 그 사람이 기름을 빼서 팔아요. 나는 졸병이니까 시키는 대로 통과시켰죠. 그런데 그게 걸렸어요. 이 사람이 와서 나는 여기 말뚝이고 처자식도 있는데 어떡하냐, 너는 졸병이니까 졸았다고 해라. 그래서 졸았다고 했죠.결국 영창을 살다가 파병하는데 특수교육대에 가서 교육받고 그대로 베트남으로 갔어요. 포항에 있는 특수교육대 앞에 어머니가 서 계시더라고요. 영화장면처럼 차가 달리는데 좇아오시는 거예요. 난 정말 어머니 이야기 나오면 할 말이 없습니다.




▶ 그 당시에 뭐가 그렇게 황석영 선생님을 자살로까지 가게 했을까요?




뭘 채울 수 없는 허기라고 해야 할지, 도달할 수 없는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글을 계속 썼죠. 1년에 몇 편씩은 썼어요. 쓰지 않으면 못 견디니까요.




▶ 그때가 데뷔를 하셨던 때였나요?




그렇죠. 고등학교 2학년 때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니까요. 이 이야기가 그러고 나서의 일입니다. 고등학교 때 가출도 당선 이후에 한 일들입니다.그리고 그 후에 다녀와서도 대학 재학 시절에 6.3사태가 났을 때도 노량진 경찰서에 집회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붙잡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징역을 보내지 않고 구류를 살렸어요. 경찰서 유치장 구류로 사는데 제 2한강교 교각공사 하러 나왔다가 술 먹고 십장을 폭행한 노동자가 하나 잡혀왔는데 그 사람이 해병대 출신이더라고요. 갈매기 3개를 대위로 바꿔서 별명을 붙였는데 본인도 대위래요. 「삼포가는 길」과 「객지」의 모델이 되는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서 그 사람과 남도를 떠돌았어요. 이때가 대학생이니까 군대 가기 전이에요.이를 테면 삼포가는 길 같은 경우는 우리가 신탄진 연초장 기초공사할 때 한 방에 있다가 비도 오고 구질고 임금도 밀리고 하니까 튀었어요. 조치원에서 청주까지 가는 길이 60여리가 되는데 이 길이 옛날에 참 아름답던 길이에요. 옆에 강 비슷한 개울이 흐르는 길을 오후부터 밤새도록 걸었어요. 그때 비가 왔는데 소설에는 눈으로 바꿨어요.




▶ 재미있는 게, 사람들이 삼포가 어디에 있는 곳이냐고 물어보죠.




삼포는 지상에 없는 장소입니다. 사실 고향이라는 게 지상에 없죠. 그 전에 갔던 공간은 이미 아니니까요.




◇ 불구덩이 속에 들어간 원고, 결국엔 인정해 주셨어




▶ 어머니가 소설 쓰시는 것을 안 좋아하셨다고요.




밥 못 먹을까봐. 의사라든지 실용적인 직업을 택해라. 외삼촌이 용렬한 사람이지만 외삼촌을 가리키면서 난리 통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의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 글 쓰고 소설 쓰면 룸펜밖에 더 되느냐고요.(웃음)내가 원고를 써서 습작을 하면 불구덩이에 집어넣으셨던 적이 많아요. 그런데 그 뒤에 내가 학원문학상도 받고 사상계 신인상도 받고 할 때마다 그래도 인정을 안 하시더니 다 연로하셔서 광주에서 마지막 몇 해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때 장길산을 쓸 때였는데 농촌경험이 없으니까 호남을 택해서 내려가서 있었어요.아침에 신문이 오면 장길산을 연재한 연재물을 돋보기를 쓰고 오리고 계세요. 스크랩해서 붙이셨어요. 그걸 보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생업으로 인정을 하셨구나 생각했죠.




▶ 어머니는 언제 돌아가셨어요?




80년 광주항쟁이 끝나고 그 해 겨울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감옥 가는 걸 안 보시고 가셔서 다행입니다.(웃음)그런데 광주민주화 항쟁이 초창기에 터질 때 제가 서울로 도피를 했는데 합동수사본부에서 잡으러 왔거든요. 신발 신고 7,8명이 마루에 들어오니까 어머니가 나와서 그 사람들을 밖으로 내쫓는다고 “이 놈들아, 신발 벗어라.” 그러셨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이북 평양 분이시기 때문에 아주 대단하셨거든요.




▶ 황석영 선생님의 첫 작품이 뭐였어요?




세상에 처음 나온 게 「입석부근」이고 그 다음에 나온 게 「탑」이라는 소설이었어요.그리고 중간 중간 썼던 게 재고품이 되었다가 데뷔한 뒤에 사이사이에 나오게 되죠.




◇ 넌 ‘세수 안 한 사슴’이고 난‘억울한 사슴’이야




▶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쓰신 건 언제부터인가요?




「탑」부터였어요. 본 이름이 황수영인데 그건 여자이름이잖아요. 빼어날 수, 꽃뿌리 영인데 완전히 여자이름이라서 놀림이 되었어요. 동생이름은 수웅이고요.제 원래 본명은 수남이에요. 빼어날 수, 사내 남, 이게 일본이름이잖아요. 옛날에 여자들한테는 ‘자’를 붙이고 남자들 이름은 ‘웅’, ‘남’ 등 일본식 이름이 많아요.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가 남으로 내려와서 다시 올리면서 수영으로 바꿨다고 그래요. 아버님의 소박한 생각으로는 수영이와 수웅이를 합치면 영웅이 되니까 그러신 것 같아요. 하지만 수영은 여자이름이에요. 그래서 황석영이라는 이름을 제가 지었어요. 수영이보다는 석영이가 발음이 더 좋고 한자도 예쁘고 해서 제가 지었죠.




▶ 황석영 선생님은 정말 끼가 많으세요. 배우로 무대에 서시겠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어요?




옛날에는 많이 그랬죠. 연극도 많이 했어요.고등학교 때 이순재 선배가 학교에 와서 지도도 하고, 저도 연극반에 가서 활동도 했어요. 그랬는데 친구들 대부분이 글을 쓰다가 대학교를 가더니 연극반에 들어가서 활동을 하더라고요.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화운동이라는 개념이 생겨요. 민주화운동을 하는데 문학 쪽에서 할 일이 많다고. 김지하 형과 같이 처음 그걸 개척해서 마당극이니 현장극이니 이런 것들을 하게 되죠.




처음에 같이 하다가 김지하 형이 민청학련 사건 이후로 장기간 구속되면서 모여 있던 후배나 친구들한테 후사를 석영이한테 맡긴다고 해서 맡게 된 거예요. 지금은 다 50이 넘었는데 그 세대가 저하고 같이 일을 했죠. 당시에 대학교에서 문화 1세대에요. 화려한 휴가를 제작했던 유인택씨, 이 사람이 2세대정도 되죠. 장선우 감독, 탈하는 부산대학교 최희완 교수, 임진택, 노래하는 김민기 등등 이 사람들이 1세대에요.




▶ 황석영 선생님의 말솜씨를 두고 사람들은 ‘황구라’라고 하는데, 말씀 잘 하시는 건 어머니 쪽인가요, 아니면 아버님 쪽인가요?




경복중학교에 갔더니 애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공부도 잘 하는 것 같아요. 주목을 끌 일을 해야 하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주목을 끌 수 있겠구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한 게, 아이들 말로 히트 칠 문구를 생각해 낸다든가 교실 등교를 해서 문을 열 때 아이들이 와르르 웃어야 직성이 풀렸어요. 지금은 손녀도 생기고 하니까 인품이 잡혀서 광대의 비극적 아우라 하고는 거리가 있거든요.(웃음)




▶ 지금은 김훈 선생님한테 자리를 좀 뺏기시는 것 같아요.




김훈은 피리 부는 소년이거든요. 그 친구는 보면 늘 문어체로 말을 해요.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꼭 옛날 일기장에 보면 오늘의 명언 같은 게 나오잖아요. 그런 식으로 보통 때 말을 해요. 너는 말씨 좀 고치라고, 평소에도 문어체로 말을 하냐고 그래요.요즘 자기의 모토는 ‘단정하고 경건한 노인네가 되자.’래요. 단정함은 자세를 이야기하고 경건은 마음가짐, 노인네는 연륜을 표한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야, 이 사람아.”(웃음)




▶ 예전에는 여성 팬들도 독점하고 계셨는데요.




아니에요. 제 별명이 스스로 ‘억울한 사슴’이에요. 나는 사슴인데 여성분들은 저를 야수로 알아요. 그래서 억울한 사슴이에요. 우리 후배 중에 김훈이 질투하는 상대가 있는데 김훈보다 조금 아래에요. 시인 김사인이라고 있는데 본인이 사슴인 줄 알아요. 오빠부대가 많았는데 지금도 있을 거예요. 노래를 시키면 아주 나직하게 천천히 동요를 정감 있게 부르니까, 늘 보면 쓸쓸하고 먹여주고 싶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괘심해서 별명을 지어줬어요. 너는 세수 안 한 사슴이라고, 그냥 사슴이라고 하면 억울하잖아요. 그리고 나는 억울한 사슴이라고 하고.(웃음)




그런데 김훈 이 친구는 옛날부터 서울내기 버릇이 있어요. 마초와 같은 위압적 자세를 취하면서 말을 해요. 예를 들어 여자가 좀 터진 옷을 입으면 “어 거, 꿰매 입어라.” 이런다든지.(웃음) 그래도 내가 이 친구를 보고 참 좋다 싶은 건 올해 환갑인데도 청년 같아요. 지금 저 나이에 잊혀지는 사람들이 많은데 참 다행한 일이다 싶어요. 거의 그 나이 또래들이 물러앉아서 동사무소에서 “여러분, 오늘은 노인들을 위해서 설렁탕을 준비했으니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모여주세요.” 그런 방송을 동네에서 듣는다는 거 아닙니까.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는 거 보면 참 다행이다 싶은데 요즘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몇 번 혼을 냈는데 그러고 나니까 사방에 다니면서 형님 다음에 자기라고 그런대요.(웃음)




◇ 지금도 부엌 쟁탈전, 요리는 수준급




▶ 황석영 선생님 하면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요즘에는 뭘 좋아하세요?




날이 갈수록 특별히 맛있는 것이 없네요. 그리고 다 맛있어요.옛날 음식이 그렇게 맛있어요. 지난번에 후배인 윤한봉이 죽었다고 그래서 나와는 형제 같은 친구인데 파리에 있는 동안 부음을 들어서 미처 오지 못했다가 이번에 새삼스럽게 망월동에 가느라고 잠시 들렀었어요. 상원이하고 노동운동을 하던 여학생 박기순하고 영혼결혼을 시키면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었는데, 박기순의 오빠가 윤한봉의 누이동생과 결혼해서 사는데 그 친구는 건설회사도 하고 성공했어요. 그런데 내가 왔다고 하니까 떡 벌어진 한정식 집에 갔어요. 가정식으로 드시겠느냐고 해서 그러자고 해서 그때 옛날식 굴비를 지져놓은 걸 처음 봤어요.그걸 또 녹차 얼음물에 밥을 말고 굴비 지진 것하고, 적당히 땅에다 묻어놓은 열무김치 삭인 거 조금하고 묵은지를 먹었는데 옛날에 먹던 음식들이 얼마나 맛있던지 한 그릇 반을 먹었어요. 과식하면 속이 답답한데 어떻게 맛있게 먹었는지 두 시간 있으니까 금방 꺼지더라고요. 속이 참 편했어요. 요새 그런 음식이 좋습니다.갈치 새끼처럼 생긴 갈치포를 조린 걸 물에 말아서 먹는 음식들하고 짭짤한 마늘지에다 된장에 재워놓았지만 깨끗한 깻잎, 얼마나 맛있습니까.




▶ 요즘도 직접 음식을 하시나요?




그럼요. 부엌 쟁탈전을 매일 벌이죠. 집 사람은 부엌 더럽힌다고 뒷정리도 깨끗이 못한다고 하는데 깨끗이 한다고 하는데 부엌 권리를 안 내어주네요. 런던이나 파리에 있을 때도 직접 만들어 먹었어요. 국수는 종류별로 한국 것부터 파스타까지 다 해요.




▶ 북한에 가셨을 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였어요? 언 감자국수라고 있다고요?




문익환 목사님과 몇 번 본 다음에 나 혼자 김일성 주석과 점심을 몇 번 같이 했는데 국수가 보니까 새까맣더라고요. 여기에도 칡으로 냉면을 만들잖아요. 북에서는 그걸 언감자 국수라고 하는데, 그 분 말씀으로는 일제시대 때 그 지역 사람들이 독립군들에게 식량을 직접 전달을 못 하니까 산등성이에 감자를 묻어놓고 표시를 해 뒀대요. 그러면 소위 보급투쟁을 나가서 캐 오는데 언 땅 속에 있었으니까 감자가 다 얼어있을 거잖아요. 먹는 방법을 몰랐는데 강원도 화전민 출신의 병사가 언 감자를 녹말을 내려서 국수를 뽑는 방법을 알고 있더래요. 그걸 뽑아서 눈 녹인 물에 말아서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점심에 국수를 뽑아서 콩국에 말고 검은 깨를 뿌리고 그 위에 함경도 들갓을 얹는데 북쪽지방의 갓김치는 젓갈을 안 넣고 고추, 마늘 등의 양념만 해서 맛이 아주 담백하고 깨끗했어요. 들갓이 작은데 그걸 콩국수 위에 놓는데 콩국은 하얗고 국수는 까맣잖아요. 또 검은 깨를 뿌리고 들갓은 초록이고. 그걸 아주 맛있게 먹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와 늘그막에 두 분이 친하게 지냈던 모양인데,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독일에서 오셨으니까 얼린 감자로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물었더니 처음이라고 하더래요.언감자 국수가 굉장히 찰기가 있어요. 우리는 그게 아릴 것 같은데 찰기가 있고 맛있습니다.




▶ 노티는 뭔가요?




노티는 약과의 일종인데 약과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기장쌀이라고 남쪽에는 없는데 북쪽에는 조하고는 조금 다른데 조하고 그 사이에 뭐가 있어요. 그 기장쌀을 가루로 만들어서 엿기름에 넣고 섞어서 잰 것을 적당히 발효시킨 다음에 참기름에 노릿하게 지져요. 이것을 꿀에 잰 과자 같은 간식이에요. 그러고 항아리에 재어놓고 두고두고 먹는 거죠. 이건 평안도 음식이에요. 어디서 들으니까 개성에서도 노티라는 이름으로 있다고 하더라고요.




◇ 리얼리즘의 최고봉, ‘소설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




▶ 바리데기 소설도 나왔고, 다음 계획은 어떤 게 있으세요?




9월 20일까지 여러 일정을 국내에서 소화한 다음에 돌아가서 청산하고 짐 싸가지고 나와야죠. 10월 말이면 완전히 귀국을 합니다.




▶ 시골에 가서 사시겠다는 말도 들었어요.




그래서 몇 군데 보고 있어요. 시골에 정착을 해서 들어앉아서 작품 쓸 일밖에 더 있겠어요. 작품의 소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어요. 계획한 것의 절반도 못 썼어요.(웃음)




▶ 작품 쓰실 때 특별한 버릇 같은 게 있으세요?




제일 나쁜 악습이 담배를 많이 피우고 밤을 새운다는 건데 담배피우는 걸 중지하면 한편으로는 작품이 제대로 나올까 하는 염려도 있지만, 담배를 끊고 작품을 시작했다는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지 않을까 해서 담배를 끊고 새로운 작품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 글 쓰는 것 외에 좋아하는 취미는 뭔가요?




젊은 때는 다른 게 있었겠지만 요즘은 글 쓰는 시간 이외에 산책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파리에서도 집 근처 숲까지 걸으면 15분 정도 걸리는데, 가서 2시간 정도 숲 속을 걸어 다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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