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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7:55:513600 
사마천의 사기 감상-미르
양승국
일반

 

 

사마천의 [史記]에 대한 감상 

출전 - 사마천의 사기( www.x-y.giant. net)


사마천의 <사기>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기>는 한나라 때의 역사가인 사마천이 지은 130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그 내용은, 춘추전국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영웅과 호걸, 간웅으로부터 협객, 자객, 그리고 아래로는 점쟁이, 건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보는 <열전>, 제왕들의 연대기에 따라 발생했던 사건들을 서술한 <본기>, 제후들의 역사를 그린 <세가>, 당대의 생활상을 분야별로 그린 <서>, 역사적인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표>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사기>는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방식을 가장 먼저 채용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유래한 용어이다.


특히 <사기>의 열전편은 유명하며 그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역사서요, 전기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마천은 역사의 아버지다. 서양에 헤로도토스가 있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었다.

그의 <사기>는 분명히 역사서이다. 그러면서도 철학서이며 또한 불후의 문학 작품이다.


<사기>는 오묘하기 그지없다. 역사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온갖 인간들이 등장하는 역사서다.

황제와 성현과 명재상이 등장한다. 지사와 재벌과 열사가 나오고 문호와 학자와 정객과 자객. 유협. 혹리. 해학가. 검객. 점술가. 깡패. 도둑. 남색. 사기꾼까지 나온다. 모두가 일류들이다. 표독함을 극하는 황후도 나오고 절세의 경국지색도 등장한다.


어떤 유형의 인간이든 모조리 등장하기 때문에 <사기>는 의미가 있다. 권력자가 읽으면 지배의 원리와 기술을 배우게 되고, 반역자가 읽으면 저항의 논리와 전술을 배우게 될 것이다. 특히 은둔자가 읽으면 인생의 숭고한 허무를 감지하게 된다.


종이를 발명하지 않았던 시절에 죽간이라는 대나무 패찰과 목간이라는 남무판대기 에다 한문 52만 6천 5백자, 권 수로는 1백 30권이나 되는 방대한 기록을 칼로 새기고 옻으로 칠해서 만들어진 책이다. 그런 사마천은 어찌 보면 숙연하다 못해 차라리 귀기스럽기조차 하다.


사마천은 자신의 생몰 연대를 써 놓지 않아 정확한 날을 알 길이 없으나 다만 일반적으로 B.C. 145년경인 한제국 효경제 때에 태어나 효소제 시대에 죽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사마천이 실질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앞의 두 황제 사이에서 54년 간 재위한 효무제 시대인 것이 분명해진다.


사마천의 먼 조상은 주왕조 때의 사관이었다.

열국들이 대립하기 시작하는 춘추시대가 되자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산서성의 강국인 진나라를 섬기게 되는데, 얼마 뒤 사마씨의 또 한 일족은 서쪽땅 섬서성으로 들어가 신흥세력인 진을 섬기게 되며, 사마천은 결국 이 갈래의 일족에 속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마천은 섬서성 한성현에서 출생했다. 예부터 하양이라 불려졌던 황하의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다. 사마천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사마천은 산간벽지에서 목가적인 생활을 하며 자랐다. 거기서 부친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부친 사마담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고 사관이 가져오는 문서나 기타 기록들을 정리 보존하는 태사령이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사마천도 글과 관계 있는 영향을 입었을 것이 분명해진다.


한의 효무제는 B.C. 138년 수도 장안에서 북서쪽 40킬로미터쯤 떨어진 무릉에다 자신의 능묘터를 정했다. 그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그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사마천도 가족들과 함께 그 바람을 타고 수도의 위성도시인 무릉으로 이주했다.


무릉은 관중을 관통하며 흐르던 위수(渭水) 북쪽 기슭이었다. 효무제는 수도 장안과 교통상 가깝게 하기 위해서 위수에다 편문교라는 다리를 놓았다. 그로 인해 무릉은 수도 장안과 지척의 거리가 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재능 또한 비범한 사마천이 문화적 분위기가 물씬한 수도에서 청년기를 보냄으로써, 그가 어떤 인격으로 형성돼 갔던가를 짐작하기란 그토록 어렵지가 않다.


당대의 석학 중에 동중서란 인물이 있었다. 공자가 편찬한 <춘추>의 해석학으로 유명했으며, 공자의 역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미래의 한왕조가 어떤 식의 이상국가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점을 기조로 효무제에게 새로운 정책을 헌책하는 사상가이기도 했다.


결국 효무제에게 중용된 동증서는 공자의 권위를 등에 지고 <춘추>를 국가통치의 근본원리로 삼게 했다. 그

즈음에 장안에서 살고 있던 사마천이 효무제에게 등용되는 동시에 유교의 권위자인 동증서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됨은 피치 못할 사정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천재 사마천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승 동증서와 자신에게 끊임없이 던지게 된다. 결국 그는 유교란, 경전을 해석하는 하나의 기술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린 뒤 동증성의 학설에 엄격한 검토와 문제점 찾기에 골몰한다.


스무 살이 된 사마천은 자신의 일상적인 안일한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드디어 천하주유의 등장에 오르는 것이다. <사기>의 전말마다 붙어 있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태사 공자서>를 보면, 그가 주유천하하는 동안에 느낀 감상을 잘 적어 놓고 있다.


그는 고대 5제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유적을 찾고 그들의 전설에 접하면서 감격해 하고 있다.


역사적인 영웅인 제의 태공망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그의 인간됨에 유념하기도 한다.


곡부에 들러 숭배해 마지않던 공자의 묘당을 방문함며 공자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오래 동안 상상해 보기도 한다.


주의 무왕이 포악한 은의 주왕을 토벌할 때 그나마도 무력혁명이라 하여 그 밑에서 녹 먹을 것을 비굴하게 여겨 수양산으로 도망쳐 들어가 굶어 죽었다는 백이. 숙제의 유적을 찾고는 심란해 한다.


전국시대의 맹상군과 신릉군과 춘신군 등과 인연이 있던 지방을 지나칠 때에는 q반드시 그들의 유적을 답사하고는 후손들에게 그들 생전의 인간 됨됨이를 자세히 물어 두곤 했다.


초의 회왕 때 간신의 참소를 받고 끝내 강남의 멱라수에 투신자살한 충신 굴원의 유적을 찾고는 그의 신세를 억울해 하기도 한다.


진나라가 구축한 만리장성 위로 올라, 산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골짜기를 메운 장대한 광경을 목도하고 상상하면서 이런 대사업에 투입되어 죽어 간 슬픈 농민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치기도 한다.


장성 축조를 지휘했던 장군 몽염이 시황제의 죽음과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을 느끼며 홀로 착잡해 하기도 한다.


한나라가 천하통일을 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명장 한신의 고향을 굳이 찾아, 그가 가난에 쪼들리고 비천한 신분에 있으면서도 원대한 꿈을 잃지 않더라는 촌로들의 얘기를 들으며, 큰 인물로서의 비범한 재능과 행적이 어떤 것이었나를 세심히 관찰 기록한다.


사마천은 맨처음 장안을 떠나 낙양으로 가서 남하해 회수와 양자강 유역을 돌아 회계산을 올랐으며, 구의산을 둘러보고 원수와 상수를 배로 건넜으며, 다시 북상해 민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공자의 조국인 노의 수도 곡부를 거쳐 천하 명산 태산에 올랐고, 추현의 역산에도 올랐으며, 파현. 설현. 팽성형을 들르고 양과 초를 거쳐서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다.


적어도 3년은 충분히 걸렸으리라는 추측이며, 돌아온 직후 낭중 벼슬에 오르는 것으로 돼 있다.

그가 처음부터 역사를 서술한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역사적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았던 점은 가히 운명적이랄 수 있다. 역사적 문헌을 탐독할 수 밖에 없던 인연이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 혹은 위인들의 고향을 찾아 그 곳의 인정. 풍속을 접하게 되는 천하주유의 대장정 감행 또한 역사가로서 그의 숙명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전력 없이는 중국 역사학의 걸작인 <사기>는 탄생될 수가 없는 일이다.


B.C. 2세기경인 효무제가 통치하는 재위 54년 간은 중국사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빛나던 시대로 일컬어진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사상. 문학 등에서 그 동안 축적돼 온 중국인의 저력이 일시에 폭발되는 문예부흥기로 말해진다.


효무제가 태양이라면 그 주위로 빛나는 위성들처럼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인물들이 많다. 역사가 사마천을 필두로 사상가 동중서, 시인 사마상여, 해학가 동방삭, 대장군 위청, 경골한 급암, 여행가 장건, 청년작전가 곽거병 외에도 당시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수없이 많다.


효무제는 국가적인 행사로 산동성의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을 단행코자 했다.

봉선이란 태산의 산정에 올라 토단을 쌓고 천신인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태산의 구릉인 양보로 내려와 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그 행사는 성전이었다. 개인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 있을까말까 하여 봉선의식 참가는 그지없는 영광이었다.

봉선에 참가코자 하는 고관들이 하도 많아 정부로서는 인원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중이천석의 봉록을 받는 삼공과 9경들은 어쩔 수 없었더라도 기타의 하급 관리들은 지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6백 석의 봉록을 받는 사마담은 불행히도 봉선 참례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더구나 기록관인 태사령으로서도 참례 못 하게 된 사실이 못내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병이 되었다. 동도 낙양에 잔류하면서 실의와 낙담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이 더욱 위중해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직감했다.

병석에 누운 채 사람을 시켜서 아들 사마천을 급히 낙양으로 불렀다.


'주공단이 사거한 지 5백 년 만에 공자가 <춘추>를 저술해 끊어졌던 기록의 전통이 되살아났다. 공자 또한 사거한 지 5백 년 만인 오늘에 이르렀다. 그 동안 명주와 현군과 충신과 역사 등의 수효가 수없이 많았다. 나는 사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그들의 족적을 기록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급병이 들어 세상을 뜨니 못다 한 일 때문에 한이 많구나. 나를 대신하여 네가 그 기록들을 남겨 내 한을 풀어 주면 어떻겠느냐.'


아들 천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불민한 자식이오나 삼가 아버님의 유지를 모시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구래의 기록들을 잘 정리해 결코 빠짐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약속이 사마천의 운명이 되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다.


그는 우선 황실도서관에 비장되는 책으로 일컬어지는 석실. 금궤의 서들을 열람하기 시작했다. 전제국의 연대기를 읽었다. 한제국의 조칙과 대신들의 상주문 따위e들도 섭렵했다. 오경인 <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도 다시 정독했다. <좌씨전> <국어> <세본> <초한춘추>등도 열심히 탐독했다.


드디어 <사기> 저술에 착수했다. 거기에 몰두한 지 7년 뒤 어느 날, 사마천에는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장군 이능이 5천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북방 원정길에 올랐다가 흉노군 1만의 적을 베고도 8만 대군에 포윋되어 항복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격노한 효무제는 이능을 문책하는 어전회의를 열었다. 순수한 열정을 지닌 사마천이 단신 이능을 변명하고 나섰다.


'이능만큼 충직무쌍한 장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금의 어떤 명장도 5천의 소수병력으로 8만 대군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칼은 꺽이고 화살은 다했지만 그는 맨주먹으로 죽을 각오로 적진에 뛰어들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그가 적에게 묶인 바 되었지만 차라리 그의 용맹함은 천하에 과시되었습니다. 그가 이번에 죽지 않고 적에게 항복한 것은 폐하를 욕되게 하려는 짓이 아니라 후일 나라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일 뿐입니다. 전날의 혁혁한 전공은 잊으시고 어찌 한번 패한 일을 가지고 벌 주시려 합니까. 차라리 구원군을 보내 주지 않은 총사령관 이광리를 벌 주십시오.'


오히려 그런 식의 비호가 화근이었다. 이광리는 무제가 총애하는 후궁의 오빠였던 것이다.

사마천은 투옥당했다. 궁형에 선고된 것이다. 생식기를 제거당하는 남성의 가장 치욕적인 형벌이며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그 쪽이 악취나게 썩기 때문에 부형이라고도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옳았다. 사형죄를 범한 자라도 50만 전만 있으면 속죄되지만 가난한 사마천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 한다. 중국의 통사를 쓰겠다고 아버님과 약속한 일이 있지 않은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어 사마천은 생식기를 제거당한 인간 이하의 인간으로서나마 살아 남기로 작정했다.

후한의 역사가인 반고가 저술한 <한서>의 <사마천전>을 보면 사마천이 그의 친구인 임소경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때의 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의 조상은 할부나 주서를 받는 일국의 성주가 될만한 공적도 없이 기록이나 천문, 역서 따위나 주관하던 하잘 것 없는 직업으로 점쟁이나 다를 바가 없었소이다. 폐하께서 마음내키실 때 일종의 노리개감으로나 상대하던 배우들 신분과 똑같지요. 말하자면 세상에서 경멸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분을 이어받은 내가 법의 제재를 받고 사형되었다 치더라도 구우의 일모가 사라지거나 하찮은 벌레나 개미 한 마리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소. 세상 사람들의 눈이 절개나 의리를 위해 죽은 자들과 같이 보아 줄 리가 만무하오. 지혜가 다하고 죄가 무거워 별 수 없이 죽어 갔다고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내 평새을 두고 또한 그렇게밖에는 살지 못했던 책임도 있소. 그렇지만 죽음이란 태산보다 무겁게 여겨질 때가 또한 있지 않겠소. 요는 어떤 목적을 위해 죽었느냐가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소.


최선의 죽음이란 조상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고, 차선의 죽음이란 제 몸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로는 자신의 면목을 잃게 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로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 생각하오. 그보다 못한 것으로는 신체의 자유가 구속되어 부끄러움을 당하고, 코나 귀를 잘리고, 입묵을 당하고, 팔다리를 잘리고, 손가락를 당하는 것이오. 그런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형벌이란 것이 바로 궁형이 아니겠소. 부끄러움의 극치겠지요.


이런 형벌을 받는 죄수야말로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진의 재상 이사, 한의 명장 한신, 맹장 팽월, 공신 주발, 명상 전분 같은 이들도 일단 투옥되면 보잘 것 없는 옥리를 보고도 머리를 땅에 조아려야 되고 그 밑에서 일하는 천민을 보고도 숨을 죽인 채 눈치를 살펴야 할 만큼 진구덩이 속에서 몸을 더럽히는 일은 고금을 통해서 그 예가 적지 않소. 자결할 기회를 잃은 죄수의 몸이 e되면 다 그러하오.

부귀했어도 죽은 후 그 이름이 사라져 버린 예가 고래로 수없이 많소. 그렇더라도 출중한 인물들은 후세의 칭송을 받았소.


주의 문왕 서백은 감옥에 갇혀 <주역>을 저술하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곤경을 겪으며 <춘추>를 저작하고, 굴원은 추방되어 <이소>의 시를 노래했고, 좌구명은 실명한 후에 <국어>를 저술하고, 손자는 두 다리를 절리고서 <병법>을 서술하고, 여불위는 촉땅으로 유배되어 <여씨춘추>를 세상에 전하고, 한비자는 진의 감옥 속에서 <세난>과 <고분> 등을 남겼소. <시경> 백 편도 성인과 현인들이 분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편찬한 것이오. 요컨대 인간이란 심중에 답답한 응어리가 있으면 이를 발산하기 위해 과거사를 서술해 미래사를 생각하게 되나 보오. 좌구명이 눈이 멀게 되고 손자가 두 다리를 잘린 불구자 되자 사회에 나와 활동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세상을 피해 저술에 열중함으로써 비분강개의 뜻을 문장 속에 푼 듯하오.


나 역시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나 비재를 돌볼 겨를도 없이 보잘 것 없는 문장으로 천하에 흩어진 기록과 구문을 망라하고, 역사에서 활약했던 인간의 행동을 성찰하고 그 진상을 추구해 왕조의 흥망성쇠를 대국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성공과 실패의 이치를 구명해 황제에서 지금까지의 사건을 1백 30권의 저술로써 완성시킬 결심을 했소이다. 이 저술을 완성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것은 오로지 아깝고 억울하다는 마음 뿐이어서 궁형이라는 극형도 감수하고 말았소이다.


나는 지금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소. 다만 내가 심혈을 기울인 이 저술이 완성되면 명산에 감추어 영원히 전하게 하고 또 한 벌은 대도에 사는 뜻있는 인사들에게 전할 참이오. 그럼으로써 나의 치욕은 씻겨질 것이며, 그 때 일만 번 사형을 받을지라도 나에겐 아무 한이 남지 않을 것이오.


사마천은 과연 그런 각오로 <사기> 집필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효무제 역시 영민한 군주였기로 역린을 건드린 사마천에게 일시적으로 극형에 처히긴 했으나 곧 그의 비범한 재능과 충성심을 인정하고 봉록 5천 석인 중서령에 임명했다.


사마천은 공무 처리 외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오로지 <사기> 저술에만 바친다. 드디어 그의 나이 55세 때인, 집필을 시작한 지 19년째 되던 해에 1백 30권의 대작 52만 6천 5백 자, 대 <사기>는 완성되었다. 그 때의 책이름은 <태사공서>였다.


그의 사기 연대에 관해서는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 반고 역시 <한서>에서도 사마천의 생몰 연대를 기록하지 못했다. 다만 전기학자들은 효무제가 사거한 얼마 후 사마천도 60세를 전후하여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의 말미에 <사기>를 저술하게 된 목적과 구성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하에 산일된 구문을 망라히고 왕자가 사업을 일으키는 데 있어 그 시작과 끝을 살피고 흥망성쇠를 관찰하여 그것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술 논평한다. 대체로 하, 은, 주 3대를 연구하고 진, 한대는 그대로 기록하여 위로는 황젱에서 시작해 밑으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12권의 <본기>를 저술하여 미리 조리를 세워 기재한다.


-시대가 병행하기도 하고 세대에 차이가 생겨 연대의 차이가 정확하지 못하므로 10권의 <표>를 만든다.


-예의와 음악에 증감이 있었으며 음률과 역법에 개혁이 있었다. 그리고 군사, 산천, 귀신, 하늘과 인간 관계 등에서 폐해가 있은 후에라야 사세의 변황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있었으므로 이의 경과에 관해 8권의 <서>를 저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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