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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7:56:223031 
비애와 분노를 역사에 승화시킨 태사공-이야기 중국문학사
양승국
 R사기를 저술하는 사마천.jpg  (334.3K)   download : 27
일반

서한시대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경제가 번영하여 문학에 유리한 사화적 조건을 제공했다. 신흥 문체와 기이한 작풍이 뒤섞여 다양한 국면을 이루었다. 이때 성행했던 부(賦)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문학형식으로 변했고, 또한 문학 자체의 영향력도 점차 확대되었다. 한나라 이전의 일반적인 정치 논문이나 학술 저작, 역사기록 등은 대개 내용을 중시하고 수식적인 요소는 별로 고쳐지지 않았지만, 서한에 이르러서는 의식적으로 문학적 색채가 가해져 점차 문예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육가(陸賈), 조착(晁錯), 유향(劉向), 유흠(劉歆) 등의 정치 논문들은 유창한 산문이었지만 동중서(董仲舒), 회남자(淮南子), 양웅(楊雄), 왕충(王充) 등의 학술 전문서는 상당한 문학성을 띠었다. 그 중 역사기록인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와 문학이 고도로 결합한 결정체로, 독보적인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통상 태사공(太史公)으로 존칭된다.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서 소제(昭帝) 시원(始元) 원년, 기원전 86년에 사망했다. 자는 자장(子長)으로 지금의 산서성 한성시(韓城市) 인 풍익(馮翊) 하양(夏陽)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역대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 특히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당대의 저명한 학자로 36년 간 태사령(太史令)이라는 박학다식하지 못하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최고의 사관을 맡았다. 사마담은 공자가 춘추(春秋)를 편수했던 정신을 이어받고자 수많은 자료를 수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로 한 사람이 일대에 완성할 일은 아니었다. 이에 사마담은 어린 사마천을 가르쳤다.


사마천은 어린 시절을 고향인 하양(夏陽)에서 보내며 목동들과 들판을 뛰어 놀면서 농민들의 고통과 노동을 몸소 체험했다. 한번은 곽해(郭解)라는 유명한 인물이 그의 고향에서 기예(技藝)를 팔고 있었다. 곽해의 신출귀몰한 솜씨에 어린 사마천은 넋을 잃었다. 이 일은 두고두고 가슴깊이 남아 후에 유협열전(遊俠列傳)을 쓰게 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다.


10살 때 부친이 장안으로 데려가 당시 저명한 학자 공안국(孔安國)에게 사사토록 했다. 이후 10년 간 오로지 공부에 힘써 온갖 서적을 섭렵하여 평생의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채우기 위해 20세부터 유랑을 시작하여 명산대천을 두루 다니며 각지 백성들의 풍속과 살아가는 모습들을 고찰했다. 이는 훗날 그의 저작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닌다.(讀書萬卷, 行萬里路)’라는 말처럼 사마천은 아무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했던 것이다.


이 유람 중 그는 장강(長江) 연안과 회하(淮河) 유역의 각지를 지나며 한신(韓信)의 묘를 참배하고 대시인 굴원(屈原)이 투신한 멱라강(汨羅江)에서 그를 추도하고, 우왕(禹王)의 유적을 탐색했다. 또 발해(渤海)와 황해(黃海) 일대를 지나면서 공자의 고향을 방문하여 공묘(孔廟)의 수레와 옷, 제기(祭器) 등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긴 여행 끝에 얻은 견문과 경험이야말로 그에게는 실제적이고 유용한 학문이었다. 책 속에서 얻을 수 없었던 지식을 실제생활로부터 체험한 것이다.


1차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근시랑중(近侍郞中)을 맡았는데, 오늘날의 경호원과 같은 직책이었다. 그래서 한무제(漢武帝)를 수행하여 중국문화의 발원지인 서북지역은 물론 이족(彛族)이 모여 사는 서남의 귀주(貴州)와 운남(雲南) 등지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이 덕분에 안목과 생각의 폭을 대번에 넓힐 수 있게 되었다.


서남에서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 사마천은 겨우 26세의 청년이었다. 이때 낙양에 있던 부친 사마담이 병석에 눕자, 그는 급히 낙양으로 내려가 병구완을 하였다. 사마담은 임종시 아들의 손을 잡고 “우리 가문은 대대로 사관을 지내왔다. 절대로 사서 완성의 염원을 잊지 말거라.”라고 유언했다.


부친이 죽은 뒤 사마천은 고대의 예법에 따라 3년 상을 치르고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태사령이라는 존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시시각각 부친의 유언을 떠올리며 사서를 완성하고자 직책을 활용하여 황실에 보관된 도서와 문서 그리고 각종 관련 사료를 두루 살피며 저작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몇 년간의 고된 연구 끝에 마침내 통사(通史)의 방법으로 그 체계를 확정했다. 그 내용은 역대 황제의 사적을 기록한 본기(本紀), 각 제후들의 행적을 기록한 세가(世家), 중국의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문기록과 각종 문물제도를 기록한 서(書), 표(表)라는 형식으로 각종 문물과 사적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표(表), 각 시대의 유명 인물들의 언행과 행적을 기록한 열전(列傳) 등이다. 이 체계의 특징은 폭 넓은 자료 수집을 통해 크고 작은 사건들과 각종 문물제도를 한꺼번에 포괄하며, 언급되는 인물도 군후장상(君侯將相)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에 이르기까지 경중을 따지지 않고 적절히 묘사함으로써 전면적인 역사의 진면목을 보존해 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 작업에 들어섰을 때 소위 ‘이릉(李陵)의 화(禍)’라는 사건에 휘말려 궁정 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 유명한 ‘이릉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무제는 일찍이 대장군 이광리(李廣利)에게 6로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토벌하도록 했다. 그런데 다른 장군들은 겁을 먹고 길을 잃었다는 핑계로 진공하지 않았으나, 이릉만이 용감히 전진을 계속하다 적진 한가운데서 포위되었다. 이 와중에서도 악전고투로 연전연승했지만 원군 없이 고립된 상황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힘이 다하여 흉노에 투항하고 말았다. 무공 세우기를 좋아했던 무제는 이릉의 항복 소식을 접하자 크게 진노하여 이릉의 온 집안 식구를 구금하여 죄를 묻고자 했다. 사마천은 평소에 이릉과 특별한 친분은 없었지만 그의 투항이 부득이했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대장군 이광리와 그 밖에 5로 장군들은 겁을 먹고 진격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고, 혼자 분전하다 포위되어 잠시 투항한 용장만 단죄한다는 것이 공평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릉의 처지를 동정하여 무제의 면전에서 이릉을 변호하는 말을 하다 스스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대장군 이광리는 바로 무제의 손위 처남이었다. 무제는 말년에 이(李)부인을 총애했는데, 이광리는 바로 이부인의 오빠로 누이의 보살핌에 6로군의 대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릉의 투항을 괘씸히 여기고 있던 무제는 사마천이 자신의 처남을 비겁하다고 조롱했다는 생각이 들어 불같이 화를 내며 사마천을 당장 구금시켜버렸다. 이때가 무제 원봉(元封) 3년인 기원전 108년의 일로 사마천은 37세의 나이에 불과했다.


투옥만 해도 온갖 고초를 겪어야 되는데, 더욱 불행했던 일은 이듬해 이릉이 흉노 병사를 훈련시켜 중국 침략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무제는 보고를 접하고 더욱 진노했다. 이릉은 이미 적군의 장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제의 분노는 자연 이릉을 변호했던 사마천에게 옮겨갔다. 그리하여 사마천은 별 수 없이 참혹한 부형(腐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형벌은 남자의 고환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 시절에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부형을 받은 사마천의 통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변방에서 흉노 군사를 훈련시킨 자는 이릉이 아니라 이서(李緖)라는 또 다른 소식이 전해졌다. 한 글자의 착오로 엄청난 화를 입은 사마천은 분함을 이길 길이 없었다. 조정의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처사를 통한하며 부형의 치욕을 견디지 못해 몇 변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부친이 남긴 유업을 아직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치욕을 참고 옥중에서 발분저서(發憤著書)하여 계획했던 사서를 완성시키겠다고 결심했다. 터무니없이 억울한 형벌은 사마천의 강한 반항정신을 자극하여 그의 저서 속에서 종종 한나라 왕조 임금들의 소행에 대해 무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에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써서 이릉의 영웅적 행동을 칭송했다. 한편으로는 이릉의 무고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가슴속에 맺힌 억울함을 발설했다. 오래지 않아 무제는 사마천을 석방했다. 사실 무제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점을 알았으며, 또한 사마천의 지조와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라, 그의 관직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시켜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려고 했다.


그러나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사마천은 한나라 왕조에 대해 다시는 환상을 갖지 않게 되었고,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해 반공개적 상황에서 저술을 진행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작은 어떤 정치적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봉록을 받기 위해서 아부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사상 통제에 반기를 들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도 기존의 유가와 더불어 인(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고 보고 유가 이외의 학술을 맹목적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사가의 공정한 태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작이 거의 끝나갈 무렵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남은 부분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동한(東漢)의 역사가 저소손(褚少孫)에 의해 보충 완성되었다. 이 사서가 바로 후세에 전해지는 사기(史記)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고도의 문학적 기교를 운용하여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해 정확하고 깊이 있게 묘사했다. 즉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뿐만 아니라 최고의 문학적 기교를 발휘한 권위 있는 문학 작품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 저서가 후세에 끼친 영향은 시경(詩經)이나 초사(楚辭)에 비해 조금도 뒤떨어질 것이 없다.



지세화 저 이야기중국문학사(일빛출판사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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