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62 
· 어제 :  142 
· 최대 :  2,389 
· 전체 :  1,663,119 
 
  2004-05-12 18:08:344558 
사마천과 전기문학- 2. 사기의 사상과 그 내용
양승국
일반
제2절 사기의 사상과 그 내용 

사기는 독창적인 역사 거작이다. 이 위대한 역사 저작은 중국 전설 중의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 태초 3년 기원전 99년까지의 약 3천 년간의 역사를 서술한 기전체(紀傳體)의 통사이다. 사기는 모두 13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왕(帝王) 및 역대의 중요한 사적을 기록한 본기(本紀) 12권, 역대 제왕과 제후국의 대사를 나열한 표(表)가 10편, 경제, 문화 등의 전문 역사를 논술한 서(書)가 8편, 제후 왕국의 흥망 성쇠를 서술한 세가(世家)가 30편, 영향력이 있는 역대의 인물 전기 및 소수의 외국사와 민족사를 기술한 열전(列傳)이 70편, 도합 130편이 사기에 망라되어 있다. 사마천 자신이 <태사공자서>에서 통계한 바에 의하면 사기는 도합 52만 6천 5백자에 달한다. 위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다섯 가지 부류로 나뉘어 쓰기는 했지만 기실 사기는 완전한 통일체다. 사기 이후로 중국 역대 봉건왕조의 정사는 대부분이 사기의 기술 방법을 본따서 씌어졌다.

사기는 전국 시기 이전의 역사는 간략하게 서술하였고, 전국 이후의 역사는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한초 시기의 경제, 정치, 문화, 민족관계, 국내외 왕래 등 여러 면을 폭넓게 기술하였다. 사기는 역사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는 방법으로써 역사적 형편을 반영하였다. 작자는 역사적 인물의 행위, 언어 심지어는 인물의 정신, 용모까지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 일정한 계급과 계층에 속하였는데 어떤 인물들은 이야기 식의 방법으로 기록하였으며 묘사와 서술에 있어서 애증이 분명한 뜨거운 감정이 주입되었고 작자의 견해와 염원이 스며들어있다. 그럼으로 사기에는 생동하는 인물 형상이 많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사기는 문학적 역사인가 하면 또 역사학적 문학이기도 하다. 역사와 문학이 결합된 산물로써 중국 고대 산문사상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즉 기전체 역사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고대 전기 문학의 규범이기도 하다.

사기는 일정한 역사적 범주 안에서 형형색색의 인물 형상을 서술하였다. 위로는 제왕, 장군, 승상, 정치가, 학자, 자객, 협객, 혹리, 순리(循吏)로부터 아래로는 창우(倡優), 점복, 농민 봉기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 각 계층의 인물 형상을 창조하였다.


첫째, 사기는 음란하고 포악한 제왕들의 작태를 밝혀 놓았다. 사마천은 덕치와 배치되는 학정을 실시한 하걸(夏桀), 은주(殷紂), 주려왕(周厲王) 및 진시황(秦始皇)과 같은 폭군들의 죄악을 규탄하고 그들의 멸망의 필연성을 드러내었다. 나아가서 그는 당시의 이름난 군주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견책하고 있다.

사마천은 한고조 유방(劉邦)에 대하여 비범한 천인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고조본기(高祖本紀)에 “ 일찍이 유온(劉媼)이 큰 연못가에서 잠이 들어 꿈에 신을 만났다. 이때 뇌성벽력이 요란하고 세상이 캄캄해졌다. 태공이 그곳으로 가본 즉 교룡(蛟龍)이 유온 위에 있었다. 이윽고 태기가 있어 고조(高祖)를 낳았다. 고조의 사람됨을 본다면 용안에 콧날이 서고 구레나룻을 기르고 왼쪽 허벅다리에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其先劉媼嘗息大澤之陂, 夢與神遇, 是時雷電晦冥, 太公往視, 則見蛟于其上, 已而有身, 遂産高祖, 高祖爲人, 隆准而龍顔, 美鬚髥, 左股有72黑子)”라고 썼다. 동시에 사마천은 유방의 망나니 같은 일면도 이모저모로 밝혀냈다. 소년 시기에 그는 외상술을 먹고 수염을 쓱 씻는 무뢰한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색을 좋아하였다.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에 한 번은 주창(周昌)이 상주할 일이 있어서 궁중에 들어갔다가 대낮에 유방은 척희(戚姬)를 끌어안고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주창이 물러났는데 유방이 달려나와 주창의 목에 걸터앉고 “ 나는 어떤 임금인가?”라고 묻자 충직한 주창은 “ 폐하께서는 걸주(桀紂)와 같은 임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나라를 건립한 후 어느 날 신하들 앞에서 그 아버지인 태공을 보고 뽐내면서 “ 옛날에 아버지는 저를 늘 망나니라고 하셨는데..... 오늘 제가 성취한 사업을 형님과 비기면 누가 더 큰 일을 했습니까?(始大人常以臣無賴..... 今某之業所就, 孰與仲多少?)”라고 빈정거린 적도 있었다. 이런 유방이니만큼 항우와 대전할 때, 항우가 유방더러 항복하지 않으면 너의 아버지를 삶아버리겠다고 을러대자 유방은 “너와 나는 의형제를 맺어 나의 아비는 곧 너의 아비인데 너의 아비를 꼭 삶으려 한다면 나한테도 국 한 종지를 보내다오(항우본기)”하고 완전히 망나니의 언사를 내뱉었던 것이다. 또 이런 일도 쓰고 있다. 유방이 항우에게 쫓길 때 너무나 급한 나머지 한 수레를 탄 자기의 친딸과 친아들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뜨렸다. 수행하는 장수가 두 번이나 떨어뜨린 유방의 아들딸을 도로 차 위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자기만 살려고 친자식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묘사하였다.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는 유방이 한왕조를 건립한 개국공신들을 하나 하나 살해한 비인간적 죄행도 규탄했다. 유방은 한신이 황제의 위를 찬탈할까봐 겁이 나 먼저 손을 써서 한신을 처단해 버렸다. 그야말로 “토끼가 죽고 나니 사냥개를 삶아먹고, 나는 새가 떨어지자 활을 보관해 두고, 적국이 격파되니 모신을 죽이는 구나!(狡▩死, 走狗烹, 高鳥盡, 良弓藏, 敵國破, 謀臣亡!)”라고 말하면서 유방의 음험하고 교활하며 잔혹한 본질을 드러내놓고 규탄하였다.

당시 황제인 한무제 유철(劉徹)에 대해서는 더욱이 필묵을 아끼지 않고 폭로하였다. 원저의 금상본기(今上本紀)는 유철이 직접 삭제했다. 그럼으로 원래 사마천이 어떤 말로 유철을 규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전기와 다른 편장(篇章)에서도 유철에 대한 폭로와 견책을 찾아내기 어렵지 않다. 유철은 인민을 우롱하기 위하여 언제나 순시(巡視), 구선(求仙), 봉선(封禪) 등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으며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려고 토목건축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처남인 이광리(李廣利)를 책봉하기 위하여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는 것도 꺼리지 않고 대완(大宛) 땅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혹리(酷吏)들을 양성했다. 사기는 한무제의 사냥개들인 이런 혹리들의 영악한 본질을 성공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한무제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한무제의 총신 공손홍(公孫弘)의 허위적이고 간사하며 음험한 본질을 드러내 놓으면서 사람 됨됨이가 남을 시기하는 데 젖어들어 “ 겉보기는 너그러운 것 같지만 속은 독하고 자기와 알력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짐짓 좋게 대해주는 체하나 암암리에서는 화를 덮어씌우곤 한다.”고 하였다. 이런 공손홍은 전문적으로 유철의 의지에 영합하여 아첨하는 바람에 승상까지 바로 올라갔다. 이런 자를 “ 매우 좋아하였다.”는 말로써 한무제 유철을 폭로하였다. 그리고 장탕(張湯), 왕온서(王溫舒), 두주(杜周) 같은 자들은 모두 유철이 신임하고 총애하는 혹리들이다. 이 자들은 모두 다 황제의 눈치를 봐가면서 인민들과 정적을 잔혹하게 진압함으로써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대권을 손아귀에 거머쥔 마귀들이다. 두주는 소송 안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한무제의 비위를 맞추는 자였다. 어떤 사람이 두주에게 “ 그대는 천자를 대신하여 법을 행사함에 있어서 삼척법(三尺法)을 쫓지 아니하고 오로지 임금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는데 옥사를 다스린다는 것이 진실로 이러하오?”하고 물었다. 두주의 대답이 “ 삼척법(三尺法)이란 어디에서 나왔소? 전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을 밝히어 율(律)로 하고 뒤의 임금이 옳다고 하는 것을 진술하여 령(令)으로 하는 바 당시에 마땅한 것이면 그만이지 무슨 옛 법이 있단 말이오?”라고 대답했다. 봉건시대 때의 법률 자체가 불공평한데 그것마저 제쳐놓고 황제의 의사만 쫓아 마음대로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잔인하기 그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왕온서는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있던 기간에 수없이 많은 사람을 체포했으며 연좌법으로 천여 호나 되는 사람을 잡아 처형하여 그 피가 십여 리나 흘러내렸다고 했다. 그 시기의 형법에 입춘 이후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기로 되어 있었다. 사람잡이에 눈이 뒤집힌 왕온서는 도리어 발을 동동 그르면서 “ 오! 겨울을 한 달만 더 늘어나게 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몽땅 다 해치울 수 있었을 걸!” 하고 한탄했다. 두주나 왕온서 같은 이런 살인마들은 한무제는 “능란하다”라고 칭찬하면서 벼슬도 올려 주었다. 이에 대해 작자는 매우 분개하여 서자위(徐自爲)의 입을 빌어 “ 옛날에는 삼족을 멸하는 죄가 있었지만 왕온서의 죄는 동시에 오족을 멸해야 했었구나!”라고 하는 말로써 자기의 분개와 증오를 토로하였다.


둘째, 통치 집단 내부의 첨예한 모순과 그들 사이의 아귀다툼을 진실하게 반영하였다. 그것은 유방의 부인들인 여후(呂后)와 척희(戚姬) 간의 모순 및 여후의 야만성에서 볼 수 있다. 여태후는 효혜제(孝惠帝)와 딸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척희는 조은왕(趙隱王) 여의(如意)를 낳았다. 효혜제가 어질고 심약하여 고조는 자기 같지 않다고 여기면서 늘 태자를 폐하고 척희가 낳은 여의를 자기 같다고 여겨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척희는 사랑을 받아 관동으로 유방을 늘 따라다닐 수 있었다. 그는 밤낮으로 울면서 자기 아들을 태자 대신으로 세워 달라고 하였다. 여후는 나이가 많아서 뒤에 늘 남아 잇게 되어 유방을 자주 만나지 못하는 까닭에 날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의가 조왕으로 된 후로 여러 차례나 거의 태자를 대체할 뻔했다. 그러나 대신들이 극구 말렸고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해서 태사는 겨우 폐립을 면했다. 고조 유방이 그의 재위 12년만에 장락궁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자 태자가 이를 이어 받아 임금이 되었다. 여후는 척부인 및 그의 아들 조은왕(趙隱王) 여의를 매우 증오했다. 그는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가두어 놓고 조왕 여의를 불러들이라는 령을 내렸다. 조왕 여의를 불러들이기 위해 사자를 세 번이나 보냈으나 다 되돌아 왔다. 조나라 승상 건평후 주창(周昌)이 사자에게 “ 고제(高帝)가 신에게 조왕을 부탁하였오. 조왕은 아직 어리오. 듣자하니 태후께서 척부인이 미워서 조왕을 불러들여 함께 죽이려고 하신다 했오. 나는 조왕을 장안으로 보내지 못하겠오. 더욱이 지금 조왕께서 병중이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여후는 노발대발하면서 곧 사람을 보내 조왕을 또 불렀다. 조왕이 도착하기 전에 마음이 어진 효혜제는 여후가 노여워함을 알고서 파상(灞上)까지 나가서 조왕을 마중해서 함께 입궁하여 조왕과 음식을 같이 먹으면서 기거했다. 여태후가 조왕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좀체로 짬을 얻지 못했다. 효혜제(孝惠帝) 원년 섣달 어느 날 효혜제가 새벽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나이가 어린 탓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혼자 남아 자고 있는 조왕 여의를 여후는 말술을 먹여 죽여버렸다. 여태후는 드디어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알을 빼고 귀를 지지고 말을 못하게 하는 약을 먹여서 변소에 내버려두게 하고는 ‘ 인체(人彘)’ 즉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며칠이 지난 다음 효혜제를 불러들여 ‘인체(人彘)’를 보게 했다. 효혜제가 그것이 척부인인 것을 물어서 알고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 병이 들었다. 그는 친어머니인 여태후를 청해놓고 “ 이것은 사람이 할 노릇이 아니오.”라고 하였다. <여후본기(呂后本紀)>의 이 기록을 보면 여태후와 척부인, 즉 봉건 왕조 내부의 후비들 사이의 내부 모순과 아귀다툼이 얼마나 치열하고 참혹하며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비들 사이의 모순과 아귀다툼은 곧 최고 통치자인 황위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 왜냐하면 황위를 손아귀에 틀어쥐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신과 외척, 당우(黨友)들의 생명, 재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혈안이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이었다. <사기>에는 외척들 간의 아귀다툼도 꼭 후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치열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즉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은 아귀다툼으로 함께 망해 버렸다고 썼다.


셋째, <사기>는 중하층 사회 출신 사람들의 우수한 품성, 포악한 자를 때려눕히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는 용감한 영웅적 행위를 열렬히 칭송했다. <신릉군열전(信陵君列傳)>에서 후영(侯嬴), 주해(朱亥), 모공(毛公), 설공(薛公) 등 소인물(小人物)은 모두 시급한 대목에서 위나라 공자 신릉군을 도와 조나라를 구원하고 위나라를 보존하며 진나라에 저항하는 일을 수행했다.

후영은 대량성(大梁城) 이문(夷門)의 문지기로써 신릉군의 후한 대접을 받고 자기를 알아주는 신릉군을 목숨까지 바쳐 도와주었다. 위나라 안리왕(安釐王) 20년 기원전 257년 진소왕(秦昭王)이 군사를 보내 조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을 에워쌌다. 조나라에서 구원 요청을 받은 위안리왕은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자 진소왕이 위왕에게 “ 내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이제 조석지간에 한단성을 함락시킬 순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조나라를 구원하려고 하는 제후가 있다면 내가 조나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그부터 치리라!”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위안리왕은 겁을 먹고 진비더러 진격을 멈추고 업성(鄴城)에 주둔하라고 명했다. 조나라의 평원군이 신릉군에게 “ 내가 혼인을 맺게 된 것은 남의 곤란을 재빨리 도와주는 공자의 높은 의기를 홈모하였기 때문이오. 지금 한단이 진나라에 항복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이 조석에 달렸는데 위나라 구원병이 오지 않으니 남의 재난을 재빨리 도와주는 공자의 의기가 어디로 갔단 말이오? 하물며 공자가 나를 하잘것없는 사람으로 보고 진나라에 항복하게 내버려둔다 치더라도 어찌 공자의 친누님도 가엾게 여기지 않는단 말이오?” 라고 사자를 보내어 꾸짖었다. 신릉군이 위왕에게 몇 번이고 간청하였지만 진나라가 두려워 끝내 응낙하지 않았다. 위공자 신릉군은 하는 수 없이 식객들을 뽑아서 수레 백여 승을 마련하여 조나라와 운명을 같이하자고 떠났다. “ 이 문을 지날 때 후영에게 전후 사연을 다 이야기한 다음 떠나려하는데 후영이 “공자께옵서 수고하시겠습니다. 노신(老臣)은 따라가지 못하겠습니다.”하고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공자는 떠나가면서 생각할수록 불쾌했다. “ 내가 후생을 차별 없이 대해준 것은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금 나는 죽으러 가는 판인데 후생이 나를 바래다주는 말을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니 나에게 잘못된 점이 있단 말인가? ” 신릉군은 생각다 못해 다시 후생한테 물어보러 되돌아왔다. 후생이 “ 제가 듣기에 진비가 이끌고 있는 군사들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호부(虎符)가 위왕의 침실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위왕에게 가장 총애를 받고 있는 여인은 여희(如姬)입니다. 그녀만이 왕의 침소를 무상으로 드나들 수 있어 호부를 몰래 훔쳐낼 수 있습니다. 옛날 여희의 부친이 어떤 사람에게 살해되었을 때 그녀가 3년 동안이나 한은 품자 왕과 그 이하의 사람들이 그녀 부친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했으나 그 원수의 머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여희가 이에 공자에게 눈물로 호소를 하자 공자는 문객을 시켜 그 원수의 머리를 베어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여희는 공자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나 아직껏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었던 것은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자께서는 만약 입을 한 번 열어 절실한 마음으로 여희에게 청한다면 그녀는 필히 허락할 것이며, 그 호부로 진비가 거느린 군사들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하여 진군을 물리쳐 조나라를 구원한다면, 공자가 세운 공은 오패(五覇)에 버금갈 것입니다.” 신릉군이 후영의 계책을 쫓아 여희에게 청하자 여희가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후영은 또 진비가 혹 “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수 있다”라는 구실로 군사를 넘겨주지 않을 때에는 서슴없이 진비를 죽이라고 하면서 술도가에 몸을 숨겨 살고 있던 자기의 친구 주해(朱亥)를 천거했다. 신릉군이 진비의 군영에 당도하여 병부를 맞추니 진비가 과연 미심쩍게 여겨 군사들을 넘겨주려고 하지 안항ㅆ다. 이에 곁에 있던 주해가 소매 속에 감추고 있던 40근 짜리 철퇴를 꺼내어 진비를 격살했다. 신릉군은 진비의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로 진격하여 한단성을 구했다. 후생은 앞서 신릉군에게 맹세한 대로 신릉군이 진비의 군영에 당도했을 때 자기가 동행하지 못한 대신 죽음으로써 그 은혜를 갚았다. 이와 같은 기술은 성문지기인 후영의 지혜와 학식, 그리고 그의 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주해의 비범한 완력을 높이 찬탄하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유협(遊俠)들에 관해서도 전기를 썼다. “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을 구제함에 가난하고 천한 사람부터 구해주며 (振人不瞻, 先從貧賤始)” “오로지 남이 시급할 때는 자신 일보다 더 근심하며( 走趨人之急, 甚己之私)”, “남의 목숨을 살려주고도 그 공덕을 자랑하지 않는다(振人之命, 不矜其功).” 라는 말로 주가(朱家)나 곽해(郭解) 같은 사람을 찬양했다. 그 당시 이런 협객들은 봉건 통치 계급의 비난을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를 받는 약자들을 위해 포악한 자들을 제거하였다. 이 점에서 협객들의 전기를 쓴 사마천의 사상의 높이를 알 수 있다.


넷째, <사기>는 일련의 애국 영웅들과 역사적으로 중대한 기여를 한 인물들을 열정적으로 구가하였다.

‘먼저 나라의 위급을 생각하고 뒤에 사사로운 원수를 따지는(先國家之急, 而後私仇)’ 인상여(藺相如)의 애국 정신과 용감하고 슬기로운 품질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의 ‘완벽귀조(完璧歸趙)’, ‘민지지회(澠池之會)’, ‘부형청죄(負荊請罪)’, ‘문경지교(刎頸之交)’ 같은 대목에서 인상여와 염파 장군의 숭고한 품성과 고귀한 정신을 충분하게 반영하였다.

사마천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썼다. 이광(李廣) 장군은 용감하고 지혜를 갖춘 정직하고 애국정신을 소유한 장군이었다. 특히 군사를 통솔함에 있어서 기갈(飢渴), 곤경에 부딪쳤을 때 “ 물을 만나면 사졸이 다 마시기 전에는 광(廣)은 물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졸이 밥을 다 먹기 전에는 광은 밥을 들지 않았다.( 見水, 士卒不盡飮, 廣不近水; 士卒不盡食, 廣不嘗食)” 그는 한조를 위하여 흉노를 물리치고 변강을 보위하는 싸움에서 여러 차례 큰 공훈을 세웠지만 한평생 통치 집단의 배쳑을 받아 마침내 60여 세에 자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애석한 심정으로 이광을 추모하면서 그가 죽자 “ 광(廣)이 통솔하던 전군의 사대부들은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백성들도 그 소문을 듣고 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라고 썼다. 그 외에도 <굴원고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서는 굴원의 애국 정신과 그의 고결한 인격을 열렬하게 칭송했다.


다섯째, 사회현실의 암흑상을 폭로하고 인민들의 고통을 반영하였으며 나아가 농민 봉기의 지도자인 진섭(陳涉)의 행위를 높게 샀다.

사마천의 선후 두 차례의 전국 순행은 그로 하여금 인민들의 질고(疾苦)를 직접 목격할 수 있게 하였고, 인민들의 반항 정서가 날로 높아간다는 것을 직접 들을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인민들의 질고와 반항심을 야기시키는 근본 원인이 토지의 급격한 집중과 무위 도식하는 기생충의 급격한 증대에 있다고 하였다.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에서 관부(灌夫)라는 사람에 대하여 폭로하고 있다. 관부와 왕래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호걸과 교활한 무리들이었다. “ 집안에 모은 재산이 천만금에 달하고 식객이 매일 수 십 명 내지 백 명에 달했다. 전원에 못을 파고 (水利 田場을 독차지하기 위해) 종족 빈객들은 집권을 쟁탈하여 영천 일대에 횡행하였다.(家累數千萬, 食客日數十百人. 陂池田園, 宗族賓客爲權利, 橫于穎川)”라고 썼으며 나아가서 승상의 입을 빌어 “ 관부(灌夫)의 집은 영천이온데 거리낌없이 횡행함으로 백성들이 견딜 수 없습니다.” 라고 규탄했다. 바로 관부같은 대관료, 대상인, 대지주들의 겸병과 약탈로 말미암아 빈곤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거나 유리 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천은 이 참상을 “ 산동에 큰물과 가뭄이 들어 가난한 백성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山東水旱, 貧民流徒), 중원은 텅비고 변경의 백성들은 아주 빈곤하여졌다.(中國以空虐, 邊民大困貧)”라고 반영하였다. 통치계급의 가혹한 착취와 잔혹한 탄압은 가난한 백성들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농민들은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혹리열전(酷吏列傳)>에서는 농민봉기의 기세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도적떼들이 여기 저기에서 일어났다. 남양(南陽)에서는 매면(梅免), 백정(白政), 초(楚)에서는 은중(殷仲), 두소(杜少), 제(齊)에서는 서발(徐勃), 연조(燕趙)지간에서는 견로(堅盧), 범생(范生) 같은 무리들이 있었다. 큰 패거리는 수천 명에 달하며 제멋대로 호(號)를 짓고 성읍을 쳐서 무기고의 병장기를 빼앗아가고 사형수들을 석방하고 군의 태수나 도위들을 결박하여 욕을 보이고 2천 석의 대관료들을 죽였으며 현에 격문을 내어 식량을 가져오라고 재촉하였다. 작은 무리들은 백을 헤아리고 향리에서 노략질하는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천자는 비로소 어사중승(御史中丞)과 승상장사(丞相長史)에 명해 도적떼들의 토벌 상황을 감독하도록 했지만 도적떼들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광록대부 범곤(范昆), 제보도위와 구경(九卿)을 지냈던 장덕(張德) 등에게 관복을 입고 부절(符節)과 호부(虎符)를 가지고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게 하였다. 참수(斬首)의 경우 많을 때는 만여 급에 달했다. 그리고 음식을 제공한 자를 법에 의해 목을 베었다. 이에 연좌된 자로서는 여러 군에 다 있으며 심한 데는 수천 명이나 되었다. 몇 해가 지나자 괴수들은 거의 붙잡히게 되었으나, 흩어진 하졸들은 다시금 작당하여 험준한 산천에 무리를 지어 웅거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침명법(沈命法)을 실시했다. 즉 도적떼가 일어났는데도 발각하지 못하고 또 발각했다 해도 일정한 수효를 잡아내지 못하면 2천 석 이하 작은 벼슬과 아전에 이르기까지 그 책임자는 모두 참수한다고 한 것이다. 그후로 현의 아전 나부랭이들은 참수가 두려워서 도적이 있어도 고발하지 않았다. 붙잡기가 힘들고 붙잡아도 정액이 차지 않으면 죄를 짓고 또 부(府)에 연루될까봐 꺼려했기 때문이다. 부에서도 그들더러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도적은 잠차 많아지고 상하기 함께 숨기면서 문서로 인하여 법에 걸리는 일을 피하였다.”라고 썼다.

사마천은 이렇듯 농민봉기의 생성, 성장 및 발전과 통치 집단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으며 통치 집단이 잔인할수록 반항의 봉기는 더 세차고 금절하지 못한다는 진리를 사실로써 구명해 주고 있다. 특히 최고 통치집단의 암흑같은 통치는 통치집단 내부의 중하층까지의 반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밝힌 점은 매우 심도 깊은 도리를 천명한 것이라 하겠다.

사기는 당시의 농민봉기의 현상을 반영하였으며 더 나아가 진섭(陳涉)의 농민봉기를 서술했다. 진나라의 폭정에 반대하여 일어난 진섭농민봉기의 정의성과 역사적 공적을 긍정하였으며 농민봉기의 두령인 진섭의 영웅적인 형상을 청사에 길이 빛나도록 적어 놓았다. 진섭은 “ 진실로 부귀하여 지면 서로 잊지 말자 ( 苟富貴, 不相忘 )”고 하는 소박한 농민혁명사상을 소유하였으며,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랴!(燕雀安知鴻鵠之志哉!)”라고 말하며 소인은 무시하는 사상도 가지고 있는 고농(雇農) 출신이다. 이 고농 출신에 역적도모를 한 진섭을 왕후장상들과 함께 세가(世家)에 넣었다. 더욱이 “ 걸주(桀紂)가 왕자의 도를 잃게 되니 상탕(商湯)과 주무왕(周武王)이 일어났고 주가 왕도를 잃게 되니 춘추(春秋)가 지어졌다. 진이 정도(政道)를 잃게 되니 진섭이 대사를 일으켰다.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켜 풍운이 일어나서 결국은 진나라 왕조를 멸망시켰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난 발단은 진섭이 군사를 일으킨 데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桀紂失其道而湯武作, 周失其道而春秋作 ; 秦失其政而陳涉發迹, 諸侯作難, 風起雲蒸, 卒亡秦族, 天下之端, 自涉發難)”라고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진섭세가(陳涉世家)>에서 또 “ 진승(陳勝)은 죽었지만 그가 두고 파견한 왕후장상들이 마침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말았으니 섭이 대사를 창도한 것이다.(陳勝雖已死, 其所置遺侯王將相, 竟亡秦, 由涉首事也)”라고 말했다. 아주 뚜렷한 바 사마천은 고농(雇農) 출신의 진섭을 상탕, 주무왕과 같은 성왕(聖王)과 현주(賢主)와 같이 보았으며 그의 사업의 정의성과 역사적 공적을 높이 찬양하였다. 동시에 그의 공적은 문란한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춘추(春秋)를 쓴 공자의 공적과 같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찬양하였다. 특히 진왕조를 멸망시킨 첫 공로를 진섭에게 돌린 것은 현실에 충실하고 역사의 진실을 중시하는 사마천의 진보적인 역사관점을 남김없이 과시한 것이다.

사마천은 진섭이 처음으로 반진봉기의 깃발을 치켜들었고 마침내 드디어 그가 봉한 왕후장상들이 진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반진투쟁에서 감수할 수 없는 결함과 오류를 범했다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진섭이 왕이 된 다음 옛날 함께 머슴살이하던 친구가 찾아왔다. 그 친구는 진섭의 궁전에 들어가서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 ...... 섭이 왕이 되더니 대단히 차려놓았구나. 정말 궁실이 대단한데!” 진섭의 옛날 친구가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진왕의 옛 이야기를 퍼뜨렸다. 한 사람이 진왕더러 ‘ 손이 우매 무지하여 망설을 퍼뜨려 대왕의 위엄을 손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진섭은 곧 그 친구를 죽여버렸다. 그러자 진왕의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물러가게 되어 진왕에게는 친한 사람이 남지 않았다.”라고 썼다. 이는 대중에게서 벗어났음을 엄중하게 지적한 것이다. 거기에다 주방(朱房)과 호무(胡武) 같은 자들을 등용하고 그들더러 휘하의 장군들은 감찰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장수들은 진섭에게 다가붙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 이것이 바로 진왕이 패배한 까닭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이렇게 진섭이 간특(姦慝)한 밀고를 경솔하게 믿고 처리했으므로 모두 떨어져나가고 고립당한 것이 또 하나의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이 두 가지 오류는 후세 농민 봉기의 거울이 되었다. 주의를 돌릴만한 것은 진섭의 실패를 서술함에 있어서 작자의 애석해 하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점이다. 

목록 글쓰기
7315
[일반] 열전31. 경포(黥布)

사마천의 사기 싸이트에 올려져 있던 [최정설의 사기읽기]를 옮겼습니다. [경포열전] 1. 머리말 자비로운 천사들은 우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천의 자기소개서-한양대 이인호 교수

<한양대 이인호 교수님 홈페이지에서 전재했습니다.> 사마천의 자기소개서 저는 중국민족의 공통시조 황제(黃帝)로부터 제가 살았던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천의 사기 감상-미르

사마천의 [史記]에 대한 감상 출전 - 사마천의 사기( www.x-y.giant. net) 사마천의 <사기>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성에 대해 살펴보자
양승국 04-05-12
[일반] 비애와 분노를 역사에 승화시킨 태사공-이야기 중국문학사

서한시대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경제가 번영하여 문학에 유리한 사화적 조건을 제공했다. 신흥 문체와 기이한 작풍이 뒤섞여 다양한 국면을 이루
양승국 04-05-12
[일반] 사기강독1 -사마천의 생애와 사기(史記)

전한(前漢) 무제(武帝 : 재위 기원전 141 - 87년) 재위 시 국력과 문화면에서 다대한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무제 이전, 승평시대(昇平時代
양승국 04-05-12
[일반] 사기강독2-사기의 체제

사기는 처음에는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불렀는데 끝부분에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 130권의 주제를 간단히 기술하고 제목을 달았다. 전체의 체
양승국 04-05-12
[일반] 강독3-사기의 가치와 영향

사기는 중국 제일의 통사(通史)이다. 춘추가 노나라의 연대기 중심의 편년사이고 국어(國語)와 전국책이 나라별 제후국들의 사서이며, 상서(尙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천과 전기문학- 1. 그 생애

사마천과 전기문학 제1절 사마천의 생애 사마천의 자는 자장이고 좌풍익(左馮翊) 하양(河陽), 즉 지금의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사람이다. 왕국유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천과 전기문학- 2. 사기의 사상과 그 내용

제2절 사기의 사상과 그 내용 사기는 독창적인 역사 거작이다. 이 위대한 역사 저작은 중국 전설 중의 황제(黃帝)로부터 한무제 태초 3년 기원전 99
양승국 04-05-12
[일반] 사마천의 전기문학- 3.사기의 예술적 성과 및 영향

제3절 <사기(史記)>의 예술적 성과 및 영향 사기는 사상성이 높을 뿐 아니라 예술적 성과도 아주 높다. 사기는 고대 사회의 다양한 계급,
양승국 04-05-12
[일반] 도연명의 사기(史記) 감상문

1.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二子讓國 相將海隅(이자양국 상장해우) 나라를 사양한 백이와 숙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닷가
양승국 04-05-12
[일반] 독이사전(讀李斯傳)

독이사전(讀李斯傳) 一車致三轂(일거치삼곡) 한 수레에 바퀴를 세 개나 단 것은 本圖行地速(본도행지속) 원래
양승국 04-05-12
[일반] 한양대 이인호 교수의 사기평설

司馬遷의 [史記] 중국 산문의 발전 과정에서 선진(先秦) 산문(散文)의 성과를 집대성하여 중국 고문(古文)의 전형(典型)을 마련한 작품이 사마
양승국 04-05-31
[일반] [사마천] 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사마천] 진시황과 한무제에 당당하게 맞선 역사가 사마천,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다 오귀환/ <한겨
양승국 04-06-16
[일반] 사마천의 중국 주유도

220.有子曰遷(유자왈천).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221.遷生龍門(천생용문),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서
master 04-10-15
1 [2][3][4][5][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