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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0 21:34:444598 
연개소문(1)
양승국

단재 신채호는 그가 조선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 사가들은 이 사람에 대한 연구적 업적이 별로 없는 관계로, 다만 삼국사기의 개소문편전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유독 연개소문전에서 만큼은 그 지독한 사대주의와 노예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저술을 함으로서 삼국사기를 신주단지 모시듯 떠 받드는 유학자들과 제도권 사가들은 고려후기 시대부터, 불과 20여년전까지 고구려를 무너뜨린 독재자로만 묘사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독재자이며, 고구려를 무너뜨린 원흉일까.. 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한단고기의 연개소문 저술을 들어보며,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연개소문 론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삼국사기>>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水} 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嗣位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소문[혹은 개금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씨이다. 스스로 물 속에서 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는 외양이 웅장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라고 한다.] 대인 대대로가 사망하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할 것이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에 뒤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그 직위를 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계승하더니 흉포하고 잔인하여 무도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것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사열하는 것 처럼 하고, 동시에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사열하기를 권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그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사망자가 모두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 나라의 병부 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 ,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穆宗{太宗}> 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 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렇게 되자 그는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횡하여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벌려 세우고 갔는데, 앞에서 대오를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면서 구덩이나 골짜기도 피하지 않았으니, 국인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 태종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국사를 전횡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였다. 이 때 장손 무기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수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일을 더욱 마음대로 하고 난 뒤에 그를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소문이 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중국에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 없으니,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 오기를 바랍니다" 하니, 왕이 마침내 표문을 보내 이를 청하였다. 당에서는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내며 동시에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그들을 사찰에 묵게 하였다. 그 때 마침 신라가 당에 가서 말하기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가 당 나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려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니, 이에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빈다고 하였다. ○於是, <太宗>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 勅王曰: "<新羅>委眞{質} 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 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奬>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奬>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 ,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玄奬>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 {虐} 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 <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句麗本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 현장으로 하여금 새서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왕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대와 백제는 각각 군사를 거두어야 하리라. 만일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토벌하겠노라" 하였다. 처음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쳤었는데 왕이 그를 소환하였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하기를 "옛날 수 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이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 갔다. 이로부터 원한과 간극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잃어버린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장이 말하기를 "기왕의 일을 어찌 추론하겠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이를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가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하였으나 소문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모두 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의 대신들을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지금은 또한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 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로써 위협하였다. 사자가 이에 굴하지 않자 소문은 마침내 그를 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직접 정벌하였으니, 이 사실이 모두 [고구려본기]에 기재되어 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 知國事.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소문은 건봉 원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인데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다가 중리 소형으로 영전되었으니, 이는 당의 알자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남생은 또한 중리 대형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으니, 모든 사령을 그가 주관하게 되었고, 중리 위두 대형으로 승진되었다. 오랜 뒤에 그는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고, 결국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여러 부에 나가서 안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이 국사를 보살피게 되었다. 누군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남건과 남산이 이를 믿지 않았다. 또한 어떤 자가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내 두 동생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잡아 두었다. 그리고 즉시 왕명을 가장하여 남생을 소환하니, 남생이 두려워 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무리를 거느리고 거란, 말갈병과 함께 당 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아들 헌성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을 제수하고, 수레, 말,비단, 보검을 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 {袍} 帶金 七事. 明年, 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 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 待罪, 世以此稱焉.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고종이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남생을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이에 화를 면하였다.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 행군 대총관 겸 지절 안무 대사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한 서대 사인 이 건역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포대 금구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그를 불러 입조케 하여, 요동대도독현토군공의 직함으로 바꾸고 서울에 거처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군중으로 돌아가 이 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게 하였다. 황제는 자기의 아들에게 조서를 주어 요수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게 하였다. 남생은 군중에서 돌아와 우위 대장군 변국공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46세에 죽었다. 남생은 순후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이치에 합당하게 상주를 올렸으며, 말을 잘 하였고, 또한 활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에 엎드려 대죄하니 세상에서 이것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 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 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였다. 무후가 일찌기 금폐를 내놓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 장 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 검위 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또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얼마 후에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 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내 준신이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목매어 죽였다. 무후가 나중에 헌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다. ○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저자의 견해 : 송 신종이 왕 개보와 사적을 논하여 말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개보가 대답하였다. "개소문은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즉 소문도 역시 재사였는데, 정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가히 요행으로 토벌을 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9 <<한단고기>>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를 강하는 것과 장성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 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 고을로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 웅위하고 의기 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 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면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 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았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르 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들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였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횡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 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진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 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필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나의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을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 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것입니다.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 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안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 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수로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단재 신채호 선생의 <<讀史新論독사신론 연개소문론>> 살펴보건대,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소년시절에 중국을 유람하면서 이세민의 사람됨을 엿보며 영웅들을 결탁하였고 장애와 고난을 두루 겪으며 외국의 문물과 풍토를 관찰한 것은 피터대제와 같다. 각 귀족들이 태자가 어린 것을 보고 부왕父王이 죽은 후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거늘, 돌연히 번개 같은 솜씨로 여러 귀족들의 권한을 깎아 버리며 그 병권兵權을 독차지하고 하늘을 울리고 땅을 녹이는 군사의 위세로 동서를 정벌하매 그가 가는 곳에 당할 적이 없는 것은 나폴레옹과 같다. 왕의 적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비열한 정책으로 한때를 구차히 지내고자 하는 자였다. 비록 연개소문이 간諫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여 중지하게 하였으나 끝내 신의가 없이 몇몇 간신들과 같이 모의하고 비천한 말과 후한 폐백으로써 적국과 내통한 후에 그를 오히려 해치고자 하니, 이에 국가가 중요하고 임금은 가벼운 것이라 곧 한때 위풍 있고 당당히 분한 기세를 일으켜 흰 장검을 뽑아 왕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높이 매달고 온 나라에 호령함은 크롬웰과 같다. 아아, 연개소문은 곧 우리 광개토왕을 본받은 손자이며 을지문덕의 어진 동생이요, 우리 만세萬歲의 후손들에게 모범이 되거늘, 이제 『삼국사기』를 읽으매 첫째는 흉악한 사람이라 하며, 둘째는 역적이라 하여 구절구절마다 오직 우리 연개소문을 저주하고 욕하는 말뿐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나는 이것으로써 후세 역사가들의 어리석고 어두움을 꾸짖는 바이다. 당시 이세민李世民이 우리 영토를 침범할 때 연개소문이 그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가 선전宣戰의 글을 쓰는데 연개소문을 어지러이 욕하는 것은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지럽게 욕하기 위해서는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고려의 역사가들은 고구려의 사료가 이지러져 없어짐을 인하여 거의 당사唐史에서 그 자료를 뽑았던 까닭에 연개소문전은 일체 이세민의 선전서宣戰書 중의 말을 추려 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흉악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머리를 끄덕이면서 예예 하고, 이세민이 연개소문은 역적이라 하면 손바닥을 비비며 그렇다고 했다. 곧 저 이세민의 원수가 되는 연개소문의 역사를 쓸 때 오직 저 이세민의 뱉어 내놓은 것을 모아놓았으니 연개소문이 흉악한 사람이 되고 역적이 됨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아아, 저 눈먼 역사가들이 그 홍몽鴻蒙한 필법으로 우리의 절세 영웅을 묻어 없애버려 우리 수천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면목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저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의 번개와 같은 솜씨에 한번 크게 혼이 난 이후로 수천여년 동안 울렁거림을 진정하지 못하여 말이나 글로써 연개소문에 관한 역사를 서로 전하여 왔는데, 그 모습은 천인天人과 같이 우러러보며 그 군사 전략은 귀신과 같이 놀랍다고 했다. 이 까닭에 석자나 되는 수염을 가진 풍채風彩는 당나라 사람의 『태평광기太平廣記』에 그려 냈으며, 비상한 영웅으로서의 공덕은 왕안석王安石의 경연강론經筵講論에서 찬미하였으며, 깃발과 보루가 40리 뻗어진 기세는 유공권柳公權의 『잡저雜著』에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 대장군 연개소문이 장안을 순식간에 쳐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갔네. 금년에 만약 공격해 오지 않는다면 명년 8월에는 병사를 일으킬 것이네" 라고 한 호쾌한 시가 여련거사如蓮居士의 『패담稗談』에 실려 있으니 이러한 말들이 우리 연개소문의 실제 자취인지에 관해서는 단정을 내리지 못하겠으나, 이미 그 당시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아주 두려워했다는 한 증거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저 이세민의 눈앞에서 아첨하는 당나라 역사가들이 비록 한 손으로 만 사람의 눈을 가리어 나라의 부끄러움을 숨기려 하였으니 마침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 살펴보건대, 요사이 역사를 읽는 사람들 중에 가끔 당 태종이 양만춘楊萬春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물러갔다고 하고 연개소문과 교전한 사실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단지 『당사唐史』의 거짓된 평가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10만 대군을 몰아서 야심에 넘쳐 우리 나라를 넘보다가 어찌 안시성安市城 하나가 잘 지키는 것을 보고 돌연히 물러가겠는가. 이때 반드시 하나의 큰 패배가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이 과연 크게 패배했다면 양만춘이 비록 잘 지키기는 하였으나 탄환이 비오듯 쏟아지는 외로운 성에서 수백 명의 쇠약한 군사로서 그 공을 세우지는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반드시 연개소문과의 한바탕 큰 싸움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조선 정조正祖 때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가 북경에 가다가 안시성을 지나갔다. 거기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에 계관산鷄冠山 위에 계명사鷄鳴寺가 있는데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서로 전하기를, 이 곳은 당 태종이 고구려병에게 크게 패하여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다가 이 산 위의 풀과 바위 사이에 몰래 숨어 묵었던 유허遺墟라 하니, 이것 또한 연개소문의 잃어버린 전사전사를 메워주는 것이다. 이 뒤에 당나라 사람들이 그 묵은 수치를 감당하지 못하여 다시 쳐들어오려 하나 고구려의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중에, 우리 남방의 신라가 고구려와 대대의 원수임을 정탐해 알아내고 즉시 사신을 자주 보내어 두텁게 서로 맺었으니, 슬프다, 저 신라가 만년의 원대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도적을 도와 형제를 쳤으니 이것 또한 우리 민족 역사상 하나의 큰 부끄러움을 남겼도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피폐하고 저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활발하고 강한 기운을 갑자기 발현하니 이것이 제4기다.(독사신론은 우리 민족과 지나(중국)민족의 접촉을 5기로 나누어 증거했다. 이 부분은 4~5기임.) 얼마 후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男生 형제가 불화不和하여 내정이 결렬하고, 또한 신라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그 기회를 틈타 침략하여 오매 남쪽 근심이 바야흐로 커졌는데, 이 때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와 협력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남은 병력이 고구려에 이르러 동명왕조가 마침내 기울어 엎어지게 되고 북방 일대가 거의 중국민족에 빼앗긴 바 되었더니, 다행히 하늘이 내려 준 위인 대중상大仲象 부자父子가 일어나 변변치 못한 종족으로 백두산 동쪽을 점거하고 말갈의 남은 무리를 채찍질하여 고구려의 옛 영토를 모두 수복하며, 다시 북진하여 흑룡강 부근을 병합하여, 지나의 남은 도적들을 격퇴하고 저 등주자사登州刺史 이해고李偕固를 쳐서 목을 베니, 아아, 단군. 부루의 남긴 혼령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을지무덕과 연개소문의 옛 업적이 다시 이어짐은 어찌 대씨大氏 부자父子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제5기다. 이 5 기를 경과한 후에는 저 지나족이 우리 민족을 향하여 하나의 화살도 쏜 것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민족과 지나 민족의 관계가 이 대에 이르러 일단락一段落을 고하게 된 것이다.


출전 : 21세기경제학 자유게시판(www.taeri.org)

지은이 : 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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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개소문(2)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666)은 중국인들에게도 `영웅'이었다. 1350여년 전 안시성 전투(645)에서 당 태종에 뼈아픈 패배를 안긴 연개소문이란 존
양승국 04-05-10
[] 기장벌의 여인(機長足姬)과 연오랑세오녀(延烏郞 細烏女)

기장벌의 여인(機長足姬) 경상북도 기장군에 대해서 삼국유사에 재미있는 설화가 실려 있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가 그것이다. 신
양승국 04-05-10
[] 고구려 태조대왕의 업적

9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고구려의 터전을 닦았던 태조대왕은 한국사를 통틀어 왕위에 가장 오랫동안 있었다. 김수로왕은 158년을 재위했다고 하나 신
양승국 04-05-10
[]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1)-고국천왕

고국천왕 (재위 기원 179 - 197년) 고구려 제 9대 왕으로 신대왕의 둘째 아들이고 산상왕의 부왕이다.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
102.3K 양승국 04-05-10
[] 삼국지로 통해본 고구려 연대기2-산상왕(상)

삼국지를 통해본 고구려 연대기 2 산상왕(상) 기원 198 - 213년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36.5K 양승국 04-05-12
[] 경제학교수의 한일고대사<백제왜>

한국의 고대사 연구의 주류는 일본인들입니다.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결과로 형성된 식민사관에 뿌리를 둔 강단사학과 실증사학에 사로잡힌 한국의 역
양승국 04-05-12
[] 삼국지로 통해 본 고구려 연대기3-산상왕(하)

삼국지로 통해본 고구려연대기3-산상왕(하) 기원 214-227년 기원 중국 고구려 재위 대 사 표 재위왕
양승국 04-05-12
[] 고구려 멸망의 원인1

한국상고사학회 (펌) 작성자 : 무명 '고구려 멸망의 핵심, 대외적 원인'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한반도 내부의 정황으로만 파악해서는 그 전
양승국 04-05-12
[] 고구려 멸망의 원인2

한국상고사학회 펌 작성자 : [지나가며]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백제의 멸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고구려 원정 초기에 신라
양승국 04-05-12
[] 삼국지와 고구려

삼국지와 고구려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고구려의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고구려는 삼국지 후반부의 주요 인물인 관구검(母丘儉)의
양승국 04-05-12
[] 고구려사의 위기-펌

高句麗史의 危機 (글쓴이 : 朴馨丘) 미련퉁이 2003-07-16 12:43:29, 조회 : 115, 추천 : 11 동프라이즈 개혁의 동이 터오는 그날까지-동프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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