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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6-24 14:57:307701 
채제공의 관악산 등정기
양승국
일반


다음은 조선 후기 때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채제공의 관악산 등정기다. 채제공이 관악산에 올랐던 해는 정조 10년인 서기 1786년으로 채제공의 나이 67세 때다. 그리고 2년 후, 정조에 의해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당시 조선의 개혁정책을 담당한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관악산을 오르고 산행 후기를 적어 놓은 것이 흥미를 끌어 옮겨 본다.


기행문을 읽다보시면 아시게 되겠지만 67세의 나이로 지금의 노량진 어디쯤에서 살던 채제공이 집안의 수하들을 이끌고 관악산을 오르는데 2박3일 여정으로 지금은 팔봉능선 코스를 이용하여 연주대에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산화나 아무 장비도 없이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신발은 짚세기는 아니었겠고 가죽신을 신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힘든 산행이었다는 것이 짐작이 간다. 채제공 대감이 오를 때와 내릴 때 묶었다는 불성사는 지금도 팔봉능선 코스 도중에 건재하고 있다. 자기도 83세가 되면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남인의 영수 허목과 같이 관악산을 다시 오르겠다고 맹세했지만 그가 80세에 죽었기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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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찍이 들으니 미수(眉수) 허목(許穆) 선생은 여든세 살 때 관악산 연주대에 올랐는데 걸음이 나는 것 같아 사람들이 신선처럼 우러러보았다고 했다.


관악산은 경기 지방의 신령한 산이다. 그리고 선현들이 일찍이 노닐던 곳이다. 옛날부터 한 번 그 위에 올라가서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고 선현을 태산처럼 사모하여 우러르는 마음을 기르고자 하였으나, 생각만 있을 뿐 일에 얽매여 이루지 못하였다. 정조 10년 봄에 노량의 강가에 거주하니 관악산의 푸르름이 거의 한 눈에 들어오는 듯하여 마음이 춤추듯 움직여 막을 길이 없었다.


4월 13일 이웃의 이숙현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출발했다. 수행하는 집안 아이들이 또한 대여섯 명이 되었다. 10리 남짓 가다가 자하동에 들어가서 한 칸 정자 위에서 쉬었다. 정자는 즉 신씨의 별장이었다. 시냇물이 산골짜기로부터 흘러오는데 숲과 나무들이 그것을 덮고 있어 아득히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물이 정자 아래에 이르러 돌과 부딪쳐 튀는  물방울이 되어 뿌리고 고인 것은 푸른 못을 이루고는 다시 흘러서 동문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것이 마치 피륙을 바래는 것 같다. 언덕 위에는 진달래가 한창 피어 어우러져서 바람이 불면 그윽한 향기가 물을 건너서 코를 간지럽힌다. 아직 산에 들어가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하여 멀리서도 정취가 그만이다.


정자를 거쳐서 10리 남짓 가니 길이 험하고 높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타고 왔던 말과 함께 하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기로 하였다. 칡덩굴을 뚫고 골짜기를 지나는데 앞에서 길을 인도하던 사람이 잘못하여 절 있는 곳을 잃어 버렸다.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고 해도 얼마 남지 않았으나 길에는 나무꾼도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다. 수행하는 자들이 혹은 앉기도 하고 혹은 서기도 하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홀연히 보니 이숙현이 나는 듯 빠른 걸음으로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으나, 잠깐 사이에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고 또 나무라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흰 장삼을 입은 중 네댓 명이 어디서부터인지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수행자들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중이 온다!"고 환성을 질렀다. 아마 이숙현이 멀리 절 있는 곳을 찾아내고는 먼저 가서 우리 일행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린 모양이었다.


중에게 인도되어 4,5리쯤 가서 절에 닿았다. 절 이름은 불성사(佛性寺)였다. 절은 삼면이 산봉우리로 둘러 있고 앞면만이 훤하게 트여서 막힘이 없었다. 문을 열어 놓으면 앉으나 누우나 눈으로 천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튿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아침밥을 재촉해 먹고 소위 연주대라는 곳을 찾기로 했다. 건장한 중 몇 명을 골라 좌우에서 길안내를 하도록 하였다. 중이 말했다.

" 연주대는 여기서 10리 남짓 가야 하는데 길이 몹시 험하여 나무꾼이나 중들도 쉽게 올라가지 못합니다. 기력이 감당하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 천하만사는 마음이라네. 마음은 장수이고 기운은 졸병과 같은 것일세, 장수가 가는데 졸병이 어찌 안 갈 수 있겠는가?"


드디어 절 뒤 높은 산꼭대기를 넘는데, 혹은 길이 끊어지고 혹은 벼랑이 갈라져 그 아래가 천길이나 되는 곳을 만나면 몸을 돌려 석벽에 착 붙이고 손으로 번갈아 나무뿌리를 잡으면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현기증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감히 밑을 보지 못한다. 큰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속이 패여 골이 진 곳 중에서 별로 날카롭게 깎이지 않은 곳을 골라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두 손으로 그 곁을 버티면서 어물쩍어물쩍 미끄러져 내려갔다. 바지가 걸려 찢어져도 돌볼 겨를이 없다. 이렇듯 천신만고 끝에 비로소 연주대 아래에 닿았다.


해가 이미 정오를 가르켰다.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니 놀러온 사람들로서 나보다 먼저 대에 오른 사람들이 만길이나 되는 곳의 위에 서서 몸을 굽혀 아래를 보는 것이 흔들흔들하여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다. 머리칼이 쭈뼛쭈뼛하여 견딜 수가 없어서 수행원을 시켜 큰소리로 " 조심하세요 위험합니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나도 또한 힘을 다하여 곱사처럼 등을 구부리고 기어서 마침내 그 정상을 정복하였다. 정상에 돌이 있으니 평평하여 수십 명이 앉을 만한데 이름을 차일암(遮日岩)이라 한다. 옛날 양녕대군이 왕위를 피하여 관악산에 와서 머무를 때 간혹 여기에 올라와 대궐을 바라보았는데 해가 뜨거워 오래 머물기가 어려우므로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았다고 한다. 바위 구석에 꽤 오목하게 파 놓은 구멍이 네 개 있는데 아마도 장막을 안정시키는 기둥을 세웠던 자리일 것이다.


연주대가 구름과 하늘 사이로 높이 솟아 있어서 스스로 내 몸을 돌아보니 천하 만물이 감히 높음을 겨루지 못할 것 같고 사방에 보이는 못 산봉우리들이 시시하여 비교할 것이 못 된다. 오직 서쪽 변두리에 쌓인 기운만은 한없이 넓고 아득하여 하늘과 바다가 서로 맞닿은 듯하다. 하늘인가 싶으면 바다이고 바다인가 싶으면 하늘이니, 뉘라서 하늘과 바다를 분별하겠는가?


한양의 성과 궁궐이 밥상을 대하는 것 같이 분명히 보인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고리처럼 둘러서 빽빽하게 들어찬 곳은 경복궁의 옛 대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양녕대군이 오락가락 돌아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던 일은 비록 백대 후에라도 그 마음을 상상할 수가 있다. 내가 돌에 의지하여 큰소리로 " 산에는 개암나무, 진펄에는 감초풀, 그 누구를 생각하는가? 서방의 아름다운 사람, 저 아름다운 사람이여, 서방의 사람이여!" 외치자 이숙현이 말했다.

" 그 소리에 생각함이 있습니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내가 다시 말했다.

" 임금을 연모하는 것은 사람으로써 떳떳하게 지켜야 할 도리이네. 본래부터 옛사람이나 지금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지, 다만 생각건대, 내 나이가 예순일곱 살이니 미수옹의 그때 나이에 비하면 열여섯 살이나 모자라는군. 그런데도 미수옹은 걸음걸이가 나는 것 같았다는데 나는 힘이 다하고 숨이 차서 같은 애를 쓰며 고생하였으나, 도학과 문장이 옛사람과 지금사람이 같지 않음이 어찌 이렇게 다른가. 하늘의 신령한 도움을 힘입어 내가 만약 여든세 살까지 살면 비록 가마를 타고서라도 반드시 이 연주대에 다시 올라 고인의 발자취를 이을 것이니 그대는 기억해 두게나!"

이숙현이 대답했다.

" 그때 저도 또한 마땅히 따라올 것입니다."

내가 그 소리에 크게 웃고 말았다. 이숙현의 나이는 지금 바야흐로 예순다섯이다. 이날 봉성암에 돌아와서 자고 이튿날 노량의 거주지로 돌아왔다.


나를 수행한 사람들은 이숙현과, 생질 이유상(李儒尙), 내종 아우 서공(敍恭), 아들 홍원(弘遠), 종질(從姪) 홍진(弘進), 척손(戚孫) 이광기(李寬基), 청지기 김상겸(金相謙)이었다.



(출전 솔출판사. 명산답사기)



채제공(蔡濟恭)

조선 후기 때 문인이자 정치가로 서기 1720년에 태어나서 1799년에 죽었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영조 19년 서기 1743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영조 29년 서기 1753년 호서(湖西) 암행어사가 되어 균역법(均役法)과 염세법(鹽稅法)의 실시에 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조사했다. 1776년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 시장, 어제, 어필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고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가 되어 옥사를 관장했다. 이어서 정조의 명으로 사노비의 폐단을 지적하는 항목을 제정함으로써 1801년 순조 원년에 사노비 제도의 혁파가 가능하게 하였다. 정조 원년 서기 1777년 벽파(僻派)인 홍상범(洪相範)이 호위군관들과 공모하여 정조를 시해하려는 사건을 사전에 적발했으며, 창경궁의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여러 번에 걸친 벽파들의 정조에 의한 시해기도를 분쇄했다. 정조 4년 서기 1780년 홍국영(洪國榮)이 물러나자 그 뒤를 이어 정조를 충실하게 보좌하여 정조 12년인 서기 1788년에는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발탁되자, 왕실의 권위를 세울 것, 당쟁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들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 잡을 것 등의 6가지 조항을 진언했다. 1790년에는 좌의정으로 올라 실질적인 행정수반이 되어 3년 간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오로지 했다. 정조 14년 서기 1790년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위로는 왕을 섬기는 도를 지키고 아래로는 자기가 속한 당인 남인을 보호하기 위해 천주교 문제에 대해 온건 정책을 펼쳤다. 채제공이 정조 17년 서기 1793년 이후 10여 년 동안 영의정 자리에 있는 동안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심하게 행해지지는 않았다.


채제공의 사상은 제도개혁 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중요시하여, 중간 수탈자들의 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와 같은 개혁을 추진하여 탐관오리의 작폐를 없앰으로서 국가의 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전통적인 농업우선 정책을 견지하고, 사희의 안전을 위해서는 사족(士族) 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서로는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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