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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세가(孔子世家)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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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공자세가(孔子世家)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방자해 졌다.



928. 仲尼悼禮廢樂崩(중니도례폐락붕),

예(禮)가 없어지고 악(樂)이 무너지는 것을 슬퍼한 공자가



929. 追脩經術(추수경술),



세상을 구하는 방도를 추구하여



930. 以達王道(이달왕도),

그것으로써 왕도를 달성하고



931. 匡亂世反之于正(광란세반지우정),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길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932. 見其文辭(견기문사),

공자의 저서와 글을 보면



933. 爲天下制儀法(위천하제의법),

천하를 위해서 의례와 법도를 만들었고



934. 垂<六藝>之統紀于后世(수<육예>지통기우후세).

후세에 육예의 기강을 영원히 남겼음을 알 수 있다.



935. 作<孔子世家>第十七(작<공자세가>제십칠)

이에 <공자세가>제십칠을 지었다.





공자는 노나라의 평창향(平昌鄕)②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공방숙(孔方叔)③이다.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았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흘(紇)은 안씨(顔氏)와 야합(野合)④하여 공자를 낳았다. 안씨는 공자를 낳기 전에 니구(尼丘)⑤에 올라 기도(祈禱)를 올렸다.

공자는 노양공(魯襄公) 22년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의 정수리 가운데가 움푹 파져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⑥이고 성은 공(孔)이다.

공구(孔丘)가 태어났을 때 그 부친 숙량흘이 죽어 방산(防山)에 묻었다. 방산은 노나라 동쪽에 있었다. 자라서 철이든 공자는 부친의 묘가 어디 있는지 궁금해 했으나 모친은 알려주지 않았다.⑦ 어린 공자가 소꿉장난을 할 때는, 항상 조두(俎豆)⑧를 늘어놓고 예를 갖추어 제례를 올렸다. 이윽고 공자의 모친이 죽자 부친의 묘를 알시 못해 임시로 노성(魯城)의 큰 대로 옆에 있는 오부지구(五父之衢)라는 곳에 빈소를 차렸다.⑨ 이것은 부모를 함께 매장하는 풍속을 지키기 위해 신중을 기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추읍(郰邑) 사람 만보(輓父)의 모친이 공자의 아버지 묘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음으로 비로소 모친의 시신을 방산에 합장할 수 있었다.

공자가 아직 상중에 있을 때 계씨(季氏)⑩들이 노나라의 명사들을 초청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자 공자도 참석하려고 했다. 계손씨들의 가신인 양호(陽虎)⑪가 공자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계씨들이 잔치를 여는 목적은 노나라의 명사들을 위해서이지 그대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에 공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다.

공자가 17세 때 즉 기원전 535년 노나라 대부 맹리자(孟釐子)⑫가 병이 들어 임종시에 그의 후계자인 아들 의자(懿子)에게 당부했다.

「공구(孔丘)는 송나라에서 멸족된 성인(聖人)의 자손이다. 그 조상인 불보하(弗父何)⑬는 원래 송나라 군주의 적자였으나 그의 동생인 려공(厲公)에게 군주의 자리를 양보했다. 정고보(正考父)⑭ 때에 이르러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으로부터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했으며 그래서 정(鼎)에 세겨 넣기를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절을 한 뒤에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가운데를 걷지 않고 담장 곁에 붙어 다녔으나 아무도 감히 그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鼎)에 ’풀과 죽을 쑤어 먹으며 청렴하게 살았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로 그의 선조들은 청렴하고 공손했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후손들은 군주의 자리에 앉지는 못해도 필시 귀한 신분에 이르는 자가 있다고 했다. 오늘 공구(孔丘)가 비록 나이가 어리다 하나 예법을 좋아하니 그 자가 바로 귀한 신분에 이르게 될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게 되거든 너는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맹리자가 죽자 의자(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⑮이 공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 이 해에 계무자(季武子)⑯가 죽고 계평자(季平子)⑰가 계손씨들의 종주 자리에 올랐다.

출신이 가난하고 천한 공자가 장성하게 되자 일찍이 계손씨들의 창고를 관리하는 말단 관리가 되었다. 그의 저울질은 공평하였고, 목장의 말단관리가 되었을 때는 가축들은 번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공(司空)⑱의 직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노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제(齊)나라에 갔으나 배척을 받고, 이어서 송(宋)나라와 위(衛)나라에 차례로 갔으나 모두 쫓겨났다.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난관에 빠지자 다시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는 키가 9자 6치⑲가 되어 사람들은 모두 그를 키다리(長人)이라고 부르고 그의 큰 키를 기이하게 여겼다. 그가 노나라에 돌아온 이유는 노나라 사람들이 잘 대했기 때문이었다.

노나라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후(魯侯)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려고 하니 허락해 주십시오.」

노후가 공자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필, 시자(侍者) 한 명을 주어 노나라에 가게 하여 예에 대해 묻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공자는 노자(老子)를 만날 수 있었다. 이윽고 공자가 헤어지려고 할 때 노자가 전송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 부귀한 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 재물로써 하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전송할 때 말로써 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부귀하자 못하나 어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그대를 말로써 전송하고자 합니다. ‘총명하고 주도면밀한 사람들은 항상 죽음의 위험이 따라다니는데 이는 다른 사람과 다투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박학하며, 언변에 뛰어나고, 식견이 넓은 사람은 그 몸이 위태로운데, 이는 남의 나쁜 점을 들쳐 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자녀 된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항상 자기 부모를 마음속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남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자기를 잊고 항상 자기 앞에는 군주가 있는 듯이 행동해야 합니다.’」⑳

그 당시 당진의 평공(平公)이 음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정권을 전횡하고 있던 육경(六卿)이 동쪽의 제후들을 공격하였다. 또한 초영왕(楚靈王)이 강한 군사들의 힘을 믿고 중원의 제후국들을 넘봤다. 대국 제나라는 노나라와 이웃하고 있었다. 노나라는 소국에 국력이 미약했음으로 초나라에 붙으면 당진이 화를 냈고, 당진에 붙으면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공격해 왔음으로 미처 제나라에 대한 방비를 할 틈이 없었다. 제나라는 이것을 노리고 이윽고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쳐들어왔다.

노소공 20년 기원전 522년은 공자의 나이 30세 때다. 제경공(齊景公)과 안영(晏嬰)이 노나라에 왔다.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옛날 섬진(陝秦)의 목공(穆公)은 변방의 작은 나라의 군주에 불과했음에도 어떻게 해서 그가 패자가 될 수 있었소?」

공자가 대답했다.

「섬진 목공은 비록 소국의 군주였지만 그 뜻이 원대하였고, 그 나라는 비록 중원과 멀리 떨어진 변방에 위치했지만 정도를 행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초나라에 도망쳐 살고 있던 백리해㉑를 숫양가죽 5장을 속죄금으로 주고 데려와 감옥에서 꺼내어 포승줄을 풀어준 목공은 그와 3일 밤낮을 서로 대화를 나누어 본 후에 대부에 봉하고 섬진의 정사를 맡겼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천하도 얻을 수 있었지만 단지 패자(覇者)에 머무렀음은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노소공 25년은 기원전 517년으로 공자 나이가 35세 되는 해이다. 그 해에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㉒과 투계(鬪鷄)를 하다가 소공에게 죄를 얻었다. 소공은 공실의 군사를 이끌고 계평자를 공격했다. 평자는 맹손씨 및 속손씨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가병을 합쳐 소공을 공격했다. 소공이 싸움에서 지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제나라는 소공에게 건후(乾侯)㉓를 주어 살게 했지만 얼마 후에 노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공자가 제나라에 가서 고소자(高昭子)㉔의 가신이 되어 경공에게 호소하여 노후를 복위시키려고 했다. 제나라의 태사(太師)㉕와 음악에 대해 토론하다가 『소(韶)』㉖ 라는 음악을 듣고 그것을 배우는 3달 동안은 고기 맛을 잃을 정도로 심취하자 제나라 사람이 공자를 칭송하였다.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신하는 신하다워야,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제경공이 말했다.

「옳은 말입니다. 만약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다면, 비록 양식이 있다한들 내가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 후에 경공이 다시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다시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재화를 아껴 쓰는데 있습니다.」

경공이 기뻐하며 장차 공자를 니계(尼谿)의 땅에 봉하려고 했다. 안영(晏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무릇 유자(儒者)는 말재간이 좋아 법규(法規)를 준수하지 않으려 하며, 오만하고 불공하여 무슨 일이든 제멋대이기 때문에 밑에다 두고 쓰기 어렵습니다. 상례를 중시하며 오랫동안 슬픔을 멈추지 않고, 과다한 장례비용으로 재산을 축내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습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도처에 유세를 다니며 관직이나 록만을 구하는 그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오래 전에 성인들이 사라진 이래로 주나라 왕실의 도가 이미 쇠해졌고 예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 공자의 행색을 보니 몸치장을 성대히 꾸미고 오르고 내리는 절차를 번거롭게 할뿐 아니라 세세하게 강요하고 있는 행동규범은 몇 세대를 거쳐도 다 배우지 못할뿐더러 평생 동안 연습을 해도 그가 추구하는 예법을 터득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공자를 임용하여 제나라의 풍속을 바꾸려고 하심은 어린 백성들을 이끄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제경공이 안영의 말에 공자를 임용하지는 않았으나 예전처럼 공경하게 대했다. 경공은 그 이후로는 예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공자를 불러 말했다.

「내가 그대를 계손씨와 똑 같이 상경(上卿)에 해당하는 대우를 하라겨 했으나 할 수가 없었소!」

이후로 경공은 공자를 계손씨의 상경과 맹손씨의 하경(下卿) 사이의 지위로 대우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나라의 대부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공자가 알았다. 경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나는 이미 너무 늙어 그대를 쓸 수가 없소!」

그래서 공자는 결국은 행장을 꾸려 노나라에 돌아왔다.

공자의 나이 42세 때인 기원전 510년에 노소공(魯昭公)이 제와 당진을 오가다가 결국은 건후(乾侯)에서 죽자 노나라는 정공(定公)을 새로 세웠다.

노정공 5년 기원전 505년 여름, 계평자(季平子)가 죽고 그의 아들 계환자(季桓子)㉗가 그 뒤를 이었다. 우물을 파다가 안에 양과 같은 모습의 물체가 들어있는 장군[부(缶)]처럼 생긴 항아리를 얻은 계환자가 공자에게 일부러 개와 같은 물건을 얻었다고 하면서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양인 듯 싶습니다. 산에 있는 나무와 바위의 귀신은 기(夔)㉘와 망랑(罔閬)㉙이라고 하며, 물에 사는 괴룡은 망상(罔象)㉚, 흙 속에 사는 귀신은 분양(墳羊)㉛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월나라를 정벌하여 회계산을 점령한 오나라가 수레 한 대에 가득 차는 두개골 한 개를 얻었다. 오나라가 사자를 보내어 공자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도대체 누구의 해골이건대 이렇게 큽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옛날 우임금이 여러 신들을 회계산에 모이도록 불렀는데 방풍씨(防風氏)㉜가 시간을 어기고 늦게 도착하자, 우임금이 그를 죽여 시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을 때. 방풍씨의 두개골이 커서 수레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방풍씨의 해골인 듯 싶습니다.」

오나라 사신이 다시 물었다.

「우임금이 불렀다는 신들은 어떤 신들이었습니까?」

「산천의 신령들은 능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불러 천하에 복을 내리며, 산천을 지키면서 제사를 지내는 일을 감시하는 신들이며, 토신과 곡신을 지키는 신들은 공후에 속하는데 이는 모두 왕자에 속하는 신들입니다.」

오나라의 손님이 계속 물었다.

「방풍씨는 무엇을 지키던 신이었습니까?」

「왕망씨(汪罔氏)㉝의 군장들로 봉산(封山)과 우산(禺山)을 지키며 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성은 리씨(釐氏)였습니다. 우(虞), 하(夏), 상(商) 나라 때는 왕망(汪罔)이라 했고 주나라 때는 장적(長翟)이라 했으며 지금은 대인족(大人族)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키는 어떠했습니까?」

「초요씨(僬僥氏)㉞는 키가 삼척으로 가장 작고, 큰 종족으로는 그들의 열 배가 넘지 않은데 그것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선생은 참으로 성인이십니다.」

계환자가 총애하던 가신 중에 중양회(仲梁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양호와 사이가 나빴다. 양호가 중양회를 쫓아내려 하자 공산불뉴(公山不狃)㉟가 말렸다. 그해 가을 중양회가 더욱 교만해지자 양호가 그를 붙잡아 가두었다. 환자가 노하여 양호를 찾아가 중양회를 풀어달라고 하자 양호는 환자까지 감옥에 가둔 다음 자기에게 복종할 것을 맹세하게 한 후에 석방했다. 이 후로 양호는 계손씨 종족들을 더욱 경시하게 되었다. 계손씨들 역시 분수를 모르고 공실보다 더욱 참람하게 굴었기 때문에 노나라는 대신들의 가신들이 나라의 국권을 잡게 되었다. 이에 노나라는 대부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분수와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직분을 넘어서서 정도를 벗어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다시는 노나라에서 관직을 얻으려고 하지 않고 집에 칩거하여 『시(詩)』, 『서(書)』, 『예(禮)』, 『악(樂)』과 같은 경전을 정리하고 연구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공자에게서 배우려는 제자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늘어나 수 천리 먼 곳으로부터도 찾아와 마을을 열고 공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공산불뉴(公山不狃)는 계환자로부터 뜻을 얻지 못하자 양호의 세를 이용하여 란을 일으키고 계손씨, 맹손씨, 숙손씨 등 삼가의 적자들을 죽이고 평소에 양호와 사이가 좋았던 그들의 서자들을 세우기 위해 계환자를 붙잡았으나 환자가 양호를 속여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정공 9년 기원전 501년, 양호가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이때가 공자의 나이 50세 였다.

공산불뉴가 비읍(鄪邑)에서 계손씨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불렀다. 공자는 그 때 도를 추구한지 오래 되었으나, 그 도를 시험해 볼 곳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기용해 주는 군주도 없어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공산불뉴의 초빙을 받은 공자가 말했다.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풍(豊)과 호(鎬)와 같은 작은 땅에서 일어나 왕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읍이 비록 작으나 풍과 호 정도는 되지 않는가?」

공자가 공산불뉴의 부름을 받고 가려고 하자 자로(子路)가 기뻐하지 않으며 공자를 못 가게 말렸다. 공자가 자로에게 말했다.

「무릇 나를 부르는 일이 어찌 무익하겠는가? 그가 나를 불러 등용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동방에 주나라와 같은 훌륭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공자는 공산불뉴에게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노정공은 공자를 중도(中都)㊱의 읍재(邑宰)로 임명했다. 공자가 중도의 읍재가 된지 일 년이 되자 사방의 제후들이 공자의 통치 방법을 따랐다. 공자는 중도의 읍재에서 도성으로 불려와 사공(司空)이 되었고 다시 사공에서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정공 10년 기원전 500년은 공자의 나이 52세 때다. 그 해에 노나라가 제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그리고 여름, 제나라 대부 여서(黎鉏)가 경공에게 말했다.

「노나라가 공자를 임용하여 그에게 국정을 맡긴다면 노나라는 대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이웃 나라인 제나라가 위태하게 됩니다.」

이어서 제나라가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 회맹을 연 후에 우호관계를 수립하자고 하면서 협곡(夾谷)에서 만나기로 했다. 노정공이 아무런 대비도 없이 회맹장에 참석하려고 했다. 공자가 회맹의 의식을 주재하는 상례(相禮)의 일을 대신 맡겠다고 하면서 말했다.

「신이 알기로는 문사(文事)에는 반드시 무(武)를 갖추어야 하며 무사(武事)에는 반드시 문(文)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제후들이 강역 밖에 나갈 때는 언제나 관리들을 대동했다 했습니다. 청컨대, 좌우 사마(司馬)를 데리고 가십시오.」

정공이 공자의 말을 따라 좌우사마를 대동하고 회맹장으로 출발하여 협곡에서 제경공을 만났다. 제사를 올릴 제단과 그 곳을 오르기 위한 세계의 흙 계단이 완성되자 두 군주가 서로 회동하여 상견례를 간략하게 행한 다음, 두 손을 높이 들어 서로 앞서기를 양보하면서 제단으로 올랐다. 두 군주가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예가 끝나자 제나라의 관리가 앞으로 달려와 말했다.

「이족(夷族)의 춤과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옵소서.」

경공이 허락하자 일단의 이족들이 머리에는 꿩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몸에는 가죽옷을 입고, 손에는 각각 모(矛), 극(戟) 및 칼과 방패 등의 무기를 들고, 북소리를 울리며 요란한 모습으로 제단 위로 몸을 솟구쳐 올라왔다. 공자가 재빨리 앞으로 나와 성큼성큼 한 계단씩 계단을 오르는데㊲ 마지막 한 계단은 오르지 않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소리쳤다.

「두 나라의 군주께서 우호를 맺기 위해 만나시는 자리에 이적(夷狄)의 춤과 노래가 어찌하여 연주되는가? 청컨대 관리들을 시켜 물러나게 하시기 바랍니다!」

제나라의 관리들의 나아가 이적의 무리들을 물러가게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나라의 수행원들이 제경공과 재상 안영의 눈치를 살폈다. 제경공이 마음속으로 심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팔을 휘둘러 이적의 무리들을 물러나게 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자 제나라 관리들이 다시 앞으로 나와 말했다.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겠습니다.」

경공이 허락하자 광대와 난쟁이가 재주를 부리면서 앞으로 나왔다. 공자가 다시 황급하게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마지막 계단은 오르지 않고 소리쳐 말했다.

「필부의 몸으로 제후들을 희롱하는 자는 그 목을 베야 합니다.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처단해주십시오.」

제나라의 관리들이 법을 적용하여 그들을 요참형(腰斬刑)에 처했다. 경공이 공자의 행동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감탄하며 자기는 도리를 앎에 있어서 공자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경공이 제나라에 돌아가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자기의 대신들에게 말했다.

「노나라의 신하들은 도의로써 그 군주를 보필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한낱 이적(夷狄)의 도로써 나를 이끌었다. 그 결과 나는 노나라 군주에게 죄를 얻게 되었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나라의 한 관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군자를 잘못을 범하면 물질로써 그 잘못을 사과하고, 소인은 그 잘못을 빈 문장으로 한다 했습니다. 주군께서 진정으로 잘못을 사과하실 생각이시라면 물질로써 하십시오.㊳」

이에 제경공은 옛날 노나라에서 빼앗은 운(鄆)㊴, 문양(汶陽)㊵, 귀음(龜陰)㊶ 등의 땅을 다시 돌려주고 제나라의 잘못을 사과했다. 노정공 13년 기원전 497년은 공자 나이 55세 때다. 그해 여름, 공자가 정공(定公)에게 말했다.

「신하된 자로써 무기를 갖고 있으면 안되며, 대부되는 자로써 그 성은 100치(雉)㊷가 넘으면 안됩니다. 」

이에 공자는 그의 제자 중유(仲由)를 계손씨들의 가신으로 보내어 삼가의 종읍들인 비읍(費邑)㊸, 성읍(郕邑)㊹, 후읍(郈邑)㊺의 성곽을 허물려고 하였다. 숙손씨들의 종읍인 후읍의 성곽을 먼저 허물었고 이어서 계손씨들의 종읍인 비읍(費邑)의 성곽을 허물려고 하자 읍재(邑宰)인 공산불뉴(公山不狃)와 숙손첩(叔孫輒)이 비읍의 군사들을 이끌고 곡부(曲阜)를 공격했다. 정공(定公)과 삼가(三家)의 종주들이 계손씨들의 궁에 있던 무자대(武子臺)에 올라 란을 피했다. 비읍의 군사들이 공격하였으나 싸움에서 결정적으로 이기지는 못하고 공실의 군사들 뒤를 따라 정공이 피신해 있던 무자대 밑에까지 들어왔다. 공자가 좌우사마인 신구수(申句須)와 락기(樂頎)에게 명하여 비읍의 군사들을 공격하게 했다. 비읍의 군사들이 싸움에 져서 도망치자 국인들의 뒤를 추격하여 그들을 고멸(姑蔑)에서 격파했다. 공산불뉴와 숙손첩 두 사람은 도망쳐 제나라로 망명했다. 공실의 군사들은 비읍의 성곽을 허물었다. 계속해서 성읍(郕邑)의 성곽도 허물려고 하자 성읍의 읍재(邑宰) 공렴처보(公斂處父)가 맹손씨에게 말했다.

「성읍의 성곽을 허물게 되면 필시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제나라 군사들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맹손씨의 보루인 이곳 성읍이 없어지면 맹손씨들도 없어지게 됩니다. 제가 차마 성읍의 성곽을 허물지 못하겠습니다.」

정공이 공실의 군사를 보내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노정공 14년 기원전 496년은 공자의 나이 56세 때이다. 공자가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노나라의 재상 일을 대리하게 되자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제자들이 물었다.

「군자란 화가 몸에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좋은 일이 생겨도 얼굴에 즐거운 기색을 띄우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너희들의 말이 맞다. 그러나 ‘귀한 신분으로 낮은 신분의 사람을 대하는 일도 즐거움의 하나라도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얼마 후에 노나라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 소정묘(少正卯)라는 대부를 죽였다. 공자가 노나라의 국정을 맡은 지 3개월이 지나자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파는 장사들이 값을 속이지 않게 되었고 남녀가 길을 걸을 때 떨어져 걷게 되었으며,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가지 않게 되었다. 사방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관리를 찾아가 여행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모두 대접을 잘해서 돌려보낼 수 있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듣고 매우 두려워하며 말했다.

「공자가 정치를 맡았으니 노나라는 장차 패자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이웃 나라인 우리 제나라가 노나라에 병합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제나라는 어찌하여 땅을 떼어 미리 바치지 않는가?

여서(黎鉏)가 제후(齊侯)에게 말했다.

「땅을 떼어주기 전에 먼저 시험삼아 노나라의 정치를 방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나라가 선정을 행한다면 그때 가서 땅을 떼어 바친다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나라안의 미녀 80명을 뽑아 모두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강락무(康樂舞)㊻를 가르쳐서 무늬가 있는 말 120필이 끄는 30대의 수레에 태워 노나라에 보냈다. 제나라 사자가 여자 무희와 아름다운 말들을 곡부성 남문의 높은 곳에 진열시켰다. 계환자가 미복 차림으로 아무도 몰래 그곳에 세 번이나 가서 구경하고 미녀와 말들을 받아드리기 위해 노후(魯侯)와 함께 지방을 순시한다고 하고는, 남문으로 가서 하루 종일 여자들의 가무를 구경하고 정사를 게을리 했다. 자로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노나라를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이 번에 교제(郊祭)㊼ 지낼 때, 노후께서 만약 제사를 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준다면 내가 노나라를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윽고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온 여자 무희들을 받아들여 노후와 함께 그녀들이 추는 춤을 구경하느라 3일 동안을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노후는 교제를 지내고도 제사 음식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지도 않았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가다가 둔(屯)㊽이라는 곳에 묵게 되었다. 노나라의 태사(太師) 기(己)가 공자를 배웅하면서 말했다.

「선생께서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어째서 떠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내가 노래를 한 곡 불러도 되겠는가?」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彼婦之口, 可以出走 (피부지구 가이출주)

군주가 여인을 좋아하면, 군자는 떠나고




彼婦之謁, 可以死敗 (피부지알 가이사패)

군주가 여인을 너무 가까이 하면, 나라는 망하는도다!




善優哉游哉, 維以卒世 (선우재유재 유이졸세)

유유자적하며, 세상을 살리라!




노나라로 돌아간 태사 기에게 계환자가 물었다.

「공자가 위나라로 가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태사가 공자가 부른 노래를 계환자에게 그대로 전했다. 환자가 듣고 한탄하며 말했다.

「제나라의 무희들을 받아들인 나를 비난하고 있구나!」

공자가 이윽고 위나라에 도착하여, 자로의 처형인 안탁추(顔濁鄒)의 집에서 묵었다. 위영공(衛靈公)이 공자에게 물었다.

「노나라에 있을 때 봉록을 얼마나 받았습니까?」

「조 6만 두를 받았습니다.」

위영공도 역시 공자에게 6만 두의 봉록을 주었다. 공자가 위나라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자가 그를 위영공에게 참소했다. 위영공이 공손여가(公孫余假)를 시켜 공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했다. 공자가 죄를 얻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결국은 머문지 10달만에 위나라를 떠나야했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를 가다가 광(匡)㊾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공자의 제자인 안각(顔刻)이 수레를 몰다가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옛날에 제가 이 곳을 왔을 때는 저 부셔진 성곽의 틈 사이로 들어왔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광인(匡人)들은 옛날 양호(陽虎)가 다시 쳐들어온 줄로 알았다. 양호는 옛날 노나라에서 일으킨 란이 성공하지 못하자 이곳으로 도망쳐 광인(匡人)들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광인(匡人)들이 몰려와 공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자의 생김새가 양호와 비슷했기 때때문에, 공자의 일행은 그 곳에서 5일이나 갇혀 있게 되었다. 안연(顔淵)이 공자의 뒤를 따라 도착하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란 중에 죽은 줄 알았다.」

「선생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일행을 향해 더욱 다급하게 압박을 가하는 광인들을 두려워한 제자들을 향해 공자가 말했다.

「주문왕(周文王)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에 대한 제도는 모두 나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하늘이 만일 주나라의 예악(禮樂) 제도를 없애려 했다면 우리들에게 전승하도록 시켰겠는가? 하늘이 주나라의 예약 제도를 없애지 않으려 하는데 광인(匡人)들이 우리를 어찌 하겠는가?」

공자는 그를 따라 나섰던 제자 한 사람을 보내 영무자(寧武子)㊿의 가신으로 만든 연후에야 비로소 광인(匡人)들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공자가 광 땅을 벗어나 포(蒲) 땅을 지나다 가던 길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한 달여 만에 다시 위나라로 돌아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서 묵었다. 당시 영공(靈公)의 부인은 남자(南子)였다. 그녀가 사람을 시켜 공자를 보고 말하게 했다.

「우리 위후(衛侯)와 만나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사방의 군자들은 필히 위후의 부인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부인께서 공자를 뵙고 싶어합니다.」

공자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사양하다가, 더 이상 미루지 못하고 들어가 남자를 만났다. 공자가 들어갔을 때 부인은 휘장 안에 앉아 있었다. 공자는 남자를 향해 북면하여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드렸다. 남자도 휘장 안에서 절을 두 번 올렸다. 부인의 허리에 찬 패옥들이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냈다. 공자가 부인을 만나고 나와서 말했다.

「나는 부인을 접견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왕 만나게 되었으니 예로 대해 주었을 뿐이다.」

공자의 행위를 불쾌하게 생각한 자로를 보고 공자가 하늘에 맹세 하며 말했다.

「내가 한 일이 만일 잘못이라면,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위나라에 돌아와 머문 지 한 달여가 되었을 때, 영공이 남자와 같은 수레를 타고 환관(宦官) 옹거(雍渠)를 시자(侍者)로 태워 궁문을 나섰다. 영공이 공자를 다른 수레에 타게 하고 뒤따라 오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가 한탄했다.

「나는 덕을 쌓기를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을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공자가 위영공의 행동에 실망하여 위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 노정공이 죽었다. 이 때가 노정공 재위 15년으로 기원전 495년, 공자의 나이 57세 되던 해였다.

공자가 다시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에 대해서 강론했다. 송나라의 사마 환퇴(桓魋) 공자를 살해하려고 하면서 그 나무를 뽑아 버렸다. 공자가 송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서둘러 도망가자고 했다. 공자가 대답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천하에 펼치라는 사명을 주었는데, 환퇴 따위가 나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정나라에 도착했으나 도중에 제자들 일행을 잃어버리고 홀로 정성(鄭城)의 외곽(外廓) 동문(東門) 앞에 혼자 서 있게 되었다. 어떤 정나라 사람이 자공(子貢)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이마는 마치 요임금과 같고, 그 목덜미는 고요(皐陶)를 닮았으며, 그의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세 치가 짧으며 풀이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집의 개와 같았습니다. 」

자공이 후에 공자를 만나 그 사람의 말을 전했다. 공자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모습은 내가 알지 못하겠으나, 상가집 개와 같았다는 말은 맞다. 그렇지, 맞는 말이고말고!.」

공자가 정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가서 사성정자(司城貞子)의 집에 머물렀다. 진나라에 머물기를 일 년이 지났을 때 오왕 부차가 진나라에 쳐들어와 세 고을을 빼앗은 후에 돌아갔다. 당진의 상경 조앙(趙鞅)56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조가(朝歌)를 빼앗아 갔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포위하자 채나라는 오나라 땅으로 나라를 옮겼다.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을 회계산의 싸움에서 이겼다.

어느 날 매 한 마리가 진(陳)나라 궁전 뜰 안으로 날아와 죽었다. 매를 살펴보니 싸리나무로 만든 화실이 매의 몸통을 관통해 있었고 화살촉은 돌로 만들어졌는데 그 화살의 길이는 한 자 팔 촌에 달했다. 진민공(陳湣公)이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매는 아주 먼 곳에서 날아왔습니다. 이것은 숙신(肅愼) 족이 사용하는 화살입니다. 옛날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 구이(九夷)와 백만(百蠻)의 땅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구이와 백만의 이족들로 하여금 각기 그 지방의 특산물을 가져와 조공으로 바치게 하여 각기 그들의 직무와 본분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숙신족들은 싸리나무와 돌촉으로 만든 화살대를 바쳤는데 그 길이가 한 자 여덟 치였습니다. 주무왕께서 그들의 미덕을 표창하기 위해 숙신의 화살을 장녀 태희(太姬)에게 주었습니다. 후에 태희(太姬)를 우(虞)나라의 호공(胡公)과 결혼시키고 그를 진(陳)에 봉했습니다. 동성 제후들에게는 진귀한 옥을 나누어주어 왕실의 친척으로서의 임무를 행하게 하고, 이성(異姓) 제후들에게는 먼 지방에서 바친 조공품을 나누어주어 주왕실에 복종할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진나라에게는 숙신에서 바친 화살을 주었습니다.」

진민공(陳湣公)이 옛날 물품을 쌓아 두는 창고를 뒤져 찾아보게 했는데 과연 그와 같은 화살을 찾을 수 있었다.

공자가 진나라에서 3년을 보냈다. 그때 초나라가 서로 세력을 다투던 당진국이 진나라를 공격해 왔다. 뒤이어 오나라가 진나라를 다시 쳐들어왔다. 진나라는 강대국들의 침략에 항상 시달렸다. 공자가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진취적이고 처음 먹었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공자는 진나라를 떠났다. 공자의 일행이 노나라로 가던 중에 포(蒲) 땅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마침 공숙씨(公叔氏)가 포(蒲)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포인(蒲人)들이 공자의 길을 막았다. 제자 중에 공량유(公良儒)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말 네 마리가 끄는 수레 다섯 대를 끌고 공자를 따라 다녔다. 그는 장자의 기풍에 어질고, 제법 용력이 있었다. 공량유가 공자에게 말했다.

「제가 옛날 선생님을 따라 다니다가 광(匡) 땅에서 곤란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곳 포(蒲) 땅에서 다시 곤란을 당하니 그것은 나의 운명인 듯합니다. 제가 선생님과 다시 위난에 빠지느니 차라리 싸우다가 죽겠습니다.」

공량유가 앞으로 나가 포인들과 싸움을 격렬하게 했다. 공량유의 무용에 포인들이 두려워하며 공자를 향해 말했다.

「만일 위나라로 들어가지 않겠다면 당신들의 일행을 지나가게 해 주겠소.」

공자가 포인들에게 위나라로 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 공자의 일행은 포성의 동문을 통해 빠져 나와 곧바로 위나라로 들어갔다. 자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위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셨는데 이렇게 하시면 남을 속이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강요된 맹약은 신도 인정하지 않는 법이다.」

위영공이 공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그를 맞이하기 위해 위나라의 도성 교외까지 마중 나와 공자에게 물었다.

「포읍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겠습니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위나라 대부들은 불가하다고 합니다. 오늘날 포읍은 초(楚)와 당진(唐晉)의 침략을 막는 중요한 땅입니다. 그런데 위나라가 직접 그곳을 공격한다면 쉽게 진압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곳의 남자들은 모두 위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부녀자까지도 서하(西河)57의 땅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포읍에는 토벌할 자가 불과 4-5명밖에 안 됩니다.」

「좋습니다. 선생의 말씀대로 토벌대를 보내도록 하지요.」

그러나 영공은 포읍에 토벌군을 보내지 않았다. 영공이 늙어 정사를 태만히 하고 공자를 쓰지 않았다. 공자가 크게 한탄하며 말했다.

「만일 누가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일 년이면 자리가 잡히고 3년이면 성과가 나타날 텐데 안타까운 일이로다!」

불힐(佛肹)58이 중모(中牟)의 읍재가 되었다. 당진의 조간자(趙簡子)가 범씨와 중행씨를 공격했다. 불힐이 조간자에게 반기를 들고 사람을 시켜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가 불힐의 부름에 응하려고 하자 자로가 말했다.

「제가 선생님으로부터 듣기를 ‘스스로 옳지 않은 짓을 한 자에게는 군자는 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만, 오늘 불힐이 몸소 중모에서 반기를 들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가시려고 하니 그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그렇다고 내가 말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강한 것은 갈아도 얇아지지 않고, 진정으로 하얀 것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어찌 쓸모없는 박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찌 줄기에 매달려 있기만 하고 사람에게 먹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공자가 경(磬)59을 연주했다. 그때 망태기를 등에 짊어지고 공자의 집 앞을 지나가던 자가 듣고 말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경을 연주하는 사람이여! 쨍강 쨍강,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을!」

공자가 악사인 사양자(師襄子)로부터 거문고 타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10일 지나도 진전이 없었다. 사양자가 말했다.

「이제는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나는 이미 그 곡조는 익혔으나 연주하는 수법은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나 사양자가 공자에게 말했다.

「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수법을 터득하셨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이 구(丘)가 수법은 터득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뜻하는 바를 곡조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얼마가 지나자 사양자가 공자에게 말했다.

「이제 노래가 말하려고 하는 뜻을 거문고로 표현할 수 있으니 다른 곡을 배워도 되겠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그 곡을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조용한 가운데 깊이 생각하고 또 즐거운 마음으로 원대한 마음을 갖게 된 공자가 말했다.

「내가 이제야 곡을 만든 사람의 됨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피부는 검고, 키는 크며, 눈은 빛나 멀리까지 볼 수 있는데 마치 사방의 제후국을 다스리는 사람 같았으니 이는 문왕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사양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자를 향해 절을 올리며 말했다.

「원래 나의 스승께서도 이곡의 이름은 『문왕조(文王操)』60라고 하셨습니다.」

공자가 위(衛)나라에서 임용되지 못하자 장차 서쪽으로 가서 조간자(趙簡子)를 만나려고 했다. 황하의 나루에 이르렀을 때 조나라가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62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수의 강물을 쳐다보면서 한탄했다.

「아름다운 황하의 물이여, 넓고도 넓구나! 내가 이 강을 건너지 못함은 하늘의 뜻인 듯하구나!」

자공(子貢)이 달려와서 물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무슨 뜻에서입니까?」

「 두명독(竇鳴犢)과 순화(舜華)는 당진의 어진 대부였다. 조간자가 뜻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오로지 이 두 사람의 말을 쫓아 정치를 행했다. 이윽고 그가 조나라에 치세를 이루어 뜻을 이루자 그는 오히려 이 두 사람을 죽이고 직접 정치를 관장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배를 갈라 태아를 죽이면, 기린이 도성밖에 이르지 않고, 연못을 마르게 하여 고기잡이를 하면 교롱(蛟龍)이 구름과 비를 일으켜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 하지 않으며, 둥지를 뒤집어 알을 깨뜨리면 봉황(鳳凰)이 날지 않는다고 했다.63 어째서 인가? 군자는 자기와 같은 류의 사람들이 상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무릇 날짐승이나 들짐승도 의롭지 않은 것을 피할 줄 아는데 하물며 내가 그것을 모르겠느냐?

공자가 되돌아가 추향(陬鄕)64에서 휴식을 취하며『추조(陬操)』라는 노래를 지어 두 사람의 죽음을 애도했다. 후에 공자는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거백옥(蘧伯玉)의 집에서 묵었다.

어느 날 영공이 공자를 불러 군사를 부리는 진법과 용병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했다.

「제례에 대한 일은 제가 일찍이 들어왔지만, 군사에 대한 일은 아직까지 배우지 못했습니다. 」

다음 날, 영공이 공자와 함께 대화를 하다가 하늘을 나는 기러기를 보자 그것을 우러러보며 공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공자가 행장을 꾸려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갔다.

여름, 위영공이 죽고, 그의 손자 첩(輒)이 뒤를 이었다. 이가 위출공(衛出公)이다. 6월에 조간자가 당시 당진국에 망명해와 있던 출공의 부친 태자 괴외(蒯聵)65를 위나라 군주로 세우기 위해 척읍(戚邑)66으로 보냈다. 조앙의 명을 받은 양호(陽虎)는 태자 괴외와 8사람의 수행원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머리와 허리에 질(絰)을 두르게 한 다음 척읍으로 들어가 상복을 입은 8명의 수행원들이 태자를 모셔가기 위해 위나라로부터 마중 나온 사람처럼 가장하여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채(蔡)나라가 주래(州來)67로 나라를 옮겼다. 노애공(魯哀公) 3년, 기원전 492년은 공자 나이 60세 때다. 제나라가 위나라를 도와 척읍을 포위했다. 태자 괴외(蒯聵)가 척읍에 있으면서 위나라 군주 자리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노나라의 환공(桓公)과 희공(僖公)의 묘(廟)에 발생한 화재를 남궁경숙(南宮敬叔)이 진화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 있다가 노나라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그 불은 틀림없이 환공(桓公)과 희공(僖公)의 묘에서 났을 것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해 가을 몸에 병이 든 계환자(季桓子)가 수레를 타고 곡부성을 쳐다보고 한탄했다.

「옛날에 노나라가 흥성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공자에게 죄를 얻은 나 때문에 나라가 이렇게 쇠약해 졌음이라!」

계환자가 그의 후계자인 아들 계강자(季康子)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내가 죽게 되면 너는 나의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정권을 잡고 주군을 보좌하게 될 것이다. 네가 노후를 보좌하게 되거든 너는 필히 공자를 불러 쓰도록 하라!」

이윽고 며칠 후에 계환자가 죽고 그 뒤를 계강자가 이어 노나라 재상이 되었다. 계환자의 장례를 마친 계강자는 그의 부친이 유언한대로 공자를 부르려고 했다. 대부 공지어(公之魚)????가 말했다.

「옛날 선군께서 공자를 등용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끝이 좋지 못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다시 그를 등용해서 결과가 좋지 않게 된다면 다시 제후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구를 불러와야 하오?」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를 부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계강자는 사자를 보내 염구를 불러오게 하였다. 행장을 꾸리고 있는 염구를 보고 공자가 말했다.

「이번에는 노나라가 너를 불러 크게 쓰려고 하는 것 같다.」

이윽고 염구가 출발하는 날이 되자 공자가 말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내 고향의 젊은이들은 뜻은 크지만 일을 함에는 소홀함이 많으며. 그들의 문장은 화려하고 아름다우니, 내가 그들을 다듬어야 하겠다.」

노나라에 돌아가고 싶은 공자의 마음을 짐작한 자감(子竷)????은염구를 전송하면서 당부했다.

「자네가 노나라에 가서 등용되면 반드시 선생님을 불러주게나!」

염구가 노나라로 들어간 다음 해에 공자는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들어갔다. 채소공(蔡昭公)이 오나라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오왕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옛날 신하들을 속이고 주래로 나라를 옮긴 채소공이 오나라에 들어간 목적이 나라를 다시 옮기기 위해라고 채나라의 국인들은 의심했다. 대부 공손편(公孫翩)이 활을 쏘아 채소공을 죽였다. 초나라가 채나라를 공격하였다. 그해 가을 제경공이 죽었다.

다음해 즉 기원전 491년, 공자의 자이 61세 때, 공자가 채나라에서 초나라의 섭읍(葉邑)으로 갔다. 섭공(葉公) 심제량(沈諸梁)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먼데 있는 사람을 찾아오게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데 있습니다.」

후일 섭공이 자로(子路)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으나 자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공자가 알고 자로에게 말했다.

「유(由)야, 너는 어찌하여 ‘저희 선생님은 도를 배우는데 싫증을 내지 않고, 사람을 가르치는데 권태를 느끼지 않으며, 일에 열중하면 식사조차도 잊으며, 음악을 들으면 근심을 잊으며, 장차 늙어가는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공자는 섭(葉) 땅을 떠나 다시 채나라로 돌아갔다.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라는 사람이 쟁기를 양쪽에서 잡고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는 그 두 사람이 은자(隱者)라고 생각하여 자로를 시켜 강을 건너는 나루를 물어보도록 했다. 장저가 자로에게 물었다.

「지금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 공구(孔丘)라고 합니다.」

「바로 노나라의 공구라는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루터를 알고 있을 텐데 구태여 남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까?」

걸익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그대는 누구십니까?」

「저는 중유(仲由)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공구의 제자인 자로라는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천하 사방의 사람들이 동요되어 모두가 불안한데, 누가 이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피해 다니는 인사를 따라 다니기보다는 세상을 피해 다니는 인사를 따라 다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장저와 걸익은 말을 마치고 자기들이 하던 쟁기질을 계속했다. 자로가 돌아가 공자에게 두 사람이 한 말을 전했다. 공자가 실망하는 기색을 띄며 말했다.

「사람이란 새나 짐승처럼 산림에서 떨어져 살 수 없는데, 천하가 태평하다면 나 역시 이를 바꾸기 위해 여러 나라를 이렇게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자로가 길을 가다가 괭이를 메고 가는 노인을 만나 물었다.

「혹시 우리 선생님을 보시지 못했습니까?」

그 노인이 말했다.

「사지를 부지런히 놀려 일하지도 않고, 오곡도 분명하게 구분하지도 못하는 당신들과 당신들의 선생을 내가 어찌 알겠소?」

그 노인은 지팡이를 땅에 박아 세우고 풀을 뽑기 시작했다. 자로가 공자를 만나 그 노인에 대해 고했다. 공자가 말했다.

「그는 은자일 것이다.」

자로가 다시 그 자리에 가서 그 노인을 다시 찾았으나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공자가 채나라로 옮겨와 산지 3년이 되던 해에 오나라가 진(陳)나라를 공격했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군사들이 성보(城父)에 주둔했다. 공자가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의 땅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의 장수가 사람을 보내 초빙했다. 공자가 초나라 진영으로 가서 초빙에 응해 예를 행하려고 했으나 진(陳)과 채(蔡) 두 나라의 대부들이 알고 모의했다.

「공자는 현자(賢者)라! 그가 비난하고 풍자하는 일들은 모두가 제후들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한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오가며 살아 왔다. 그 동안 우리 두 나라의 대부들이 행했던 일들 모두는 공자의 뜻과는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대국인 초나라가 오늘 공자를 초빙하는 목적은 그를 등용하기 위해서인데, 그렇게 되면 진과 채 두 나라의 국정을 맡고 있는 우리들이 처지가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진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그 즉시 그들의 가복들을 동원하여 들판에서 공자를 포위하고 초나라 군영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공자의 일행이 길을 가지 못하고 포위를 당해 식량이 떨어졌다. 따르던 제자들 중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강론도 하고 낭송도 하다가 다시 거문고도 타고 노래도 부르며 전혀 기세가 죽지 않았다. 자로가 화를 내며 공자에게 물었다.

「군자도 이렇게 곤궁할 때가 있는 법입니까?」

「군자는 곤궁함에 처해도 동요하지 않지만, 소인은 곤궁하게 되면 절제를 잃는 법이다. 」

자공이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하자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너는 내가 박학다식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나는 한 가지 기본원칙을 가지고 전체의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뿐이다.」

공자는 제자들이 마음속으로 매우 화가 나있음을 알고 즉시 자로를 불러 물었다.

「『시(詩)』에 ‘외뿔소도 아니요, 호랑이도 아닌 것이 저 넓은 광야를 해메고 다니나!’라고 했는데 내 도에 무슨 잘못이 있어,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곤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자로가 말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어질지 못한 우리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지혜가 부족해서 사람들이 우리를 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중유야! 만약에 어진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게 된다면 어찌하여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죽었겠느냐? 만약에 알고 있는 지혜를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한다면 어찌하여 왕자 비간(比干)????이 은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에게 죽임을 당했겠느냐?」

자로가 나가자 자공이 들어와 공자를 뵈었다. 공자가 말했다.

「사(賜)야! 『시(詩)』에 ‘외뿔소도 아니요, 호랑이도 아닌 것이 저 넓은 광야를 해메고 다니나!’라고 했는데 내 도에 무슨 잘못이 있어,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곤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자공이 대답했다.

「선생님의 도는 참으로 크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중 선생짐의 도를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선생님은 어찌하여 조그만 일에 스스로를 폄하(貶下)하십니까?」

「사(賜)야! 훌륭한 농사꾼이 씨 뿌리는 일은 비록 잘할지는 몰라도 수확까지 잘 한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또한 훌륭한 장인이 비록 정교한 솜씨를 가졌다고 해도 그 주문한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군자가 도를 잘 연마하여 강기(綱紀)76를 세우고 잘 절제할 수는 있겠지만, 세상이 반드시 그 도를 받아들인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너는 도를 닦기를 게을리 하면서 어찌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느냐?」

자공이 나가고 안회(顔回)가 들어왔다. 공자가 말했다.

「『시(詩)』에 ‘외뿔소도 아니요, 호랑이도 아닌 것이 저 넓은 광야를 해메고 다니나!’라고 했는데 내 도에 무슨 잘못이 있어, 여기에서 우리가 이런 곤란을 당해야 한단 말이냐?」

「 선생님의 도는 너무 커서 천하에 선생님을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학설과 주장을 스스로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세상이 선생님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도란 받아들이지 않은 다음에야 군자의 본색이 더욱 들어 나게 되는 법입니다. 무릇 군자는 도를 닦지 않음을 수치로 여겨야 하고, 큰 도가 있음에도 쓰지 않음을 나라를 운영하는 자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어찌 선생님의 도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근심하십니까? 」

공자가 유쾌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구나! 안씨 집안의 아들이여! 네가 만일 큰 부자가 된다면 나는 너의 가재(家宰)가 되겠노라!」

얼마 후에 공자는 자공을 초나라에 보냈다. 초소왕이 군사를 보내 나와 공자를 맞이해 갔다. 공자는 비로소 진(陳)과 채(蔡) 두 나라 사이에서의 곤란을 면할 수 있었다.

초소왕이 공자를 7백리에 달하는 땅에 봉하려고 했다. 초나라의 영윤(令尹) 자서(子西)77가 말했다.

「왕의 신하 중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보낼만한 사람이 자공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의 신하 중 재상으로서 삼아 보필 받을만한 사람 중 안회만한 인

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이 거느린 장수 중 자로만한 인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왕의 신하 중 재여(宰予)만큼 일을 잘하는 장관이 있습니까?」

「 없습니다.

「우리 초나라의 조상은 주나라 왕으로부터 봉해졌을 때78 그 봉지는 사방 50리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공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치국(治國) 방법에 통달하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이룬 공업에 밝으니, 만일 왕께서 공자를 불러 쓰신다면 어찌 초나라가 당당하게 세세대대로 다스려온 사방 수천 리의 땅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주문왕(周文王)은 풍(酆)에 주무왕은 호(鎬)에 도읍하여 사방 백리의 땅에서 출발했으나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공자가 우리 초나라에서 봉함을 받아 그 땅을 얻게 되면 어진 제자들의 보좌를 받아 나라가 크게 번성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코 우리 초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닙니다.」

소왕이 자서의 말을 듣고 공자를 봉하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그해 가을 초소왕이 성보(城父)로 출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초나라에 미치광이 접여(接與)79가 노래를 부르며 공자의 곁을 지나갔다.




鳳兮 鳳兮(봉혜, 봉혜)

봉황새야! 봉황새야!




何德之衰(하덕지쇠)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해 졌던 말인가?




往者不可諫兮(왕자불가간혜)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來者猶可追也(래자유가추야)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已而已而(이이,이이)

그만두어라!




今之從政者殆而(금지종정자태이)

지금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위태로울 진데!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접여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히 몸을 피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나누어 볼 수가 없었다.

노애공 6년 기원전 489년은 공자의 나이 63세 때다. 그 해에 공자가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갔다.

그 다음 해인 공자의 나이 64세 때인 기원전 488년 오(吳)와 노(魯) 두 나라의 군주가 증(繒)80에서 만났다. 오왕이 노나라에게 백뢰(百牢)의 예를 요구하였다.81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계강자(季康子)를 소환해서 백뢰의 예를 행하도록 강요했다. 계강자가 자공(子貢)을 대동하고 오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비를 설득하여 백뢰의 예를 행하는 것을 모면하게 되었다. 공자가 말했다.

「노(魯)와 위(衛) 두 나라는 원래 형제의 나라이다」82

그 때 위출공(衛出公) 첩(輒)의 부친인 괴외(蒯聵)는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나라 밖에 있었다. 제후들이 위출공에게 군주의 자리를 괴외(蒯聵)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여러 번 책망하였다. 공자의 제자 중 여러 사람이 위나라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위나라 군주가 공자를 임용해서 정사를 맡기려고 하자 자로가 말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에게 정사를 맡기려고 하는데, 선생님은 제일 먼저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반드시 나라에 명분을 바르게 하겠다.」

「세상사람들이 선생님은 세상물정에 어둡다고 하던데 맞는 말인 듯합니다 어찌하여 제일 시급하게 행해야 할 일이 명분을 바르게 세우는 것입니까?」

「무식한 자로야! 대저 명분이 바르게 서지 않게 되면 말이 불순하게 되고, 말이 불순하게 되면 세상에 어떤 일인 들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겠느냐?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고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지 않게 되며, 형벌이 공정하게 시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무슨 일을 하던 명분에 부합되어야 하고, 일단 말을 꺼냈다하면 반드시 행해야 한다. 그리고 군자의 말에는 구차하거나 경솔하면 안 되는 법이다.」

그 다음 해인 노애공 8년 기원전 487년, 공자의 나이 65세 때 염구(冉求)가 계손씨들의 장수가 되어 제나라와 랑(郞)에서 싸워 이겼다. 83계강자가 염구에게 물었다.

「그대의 용병술은 스승에게서 배웠습니까? 아니면 원래부터 타고 태어났습니까?」

「스승인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공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를 등용하면 나라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의 뜻이 백성들에게 전파되어, 비록 죽은 귀신을 불러내어 물어 본다 해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에게 저와 같은 길을 걷게 한다면 비록 그가 공을 세워 천사(千社)84의 봉읍을 받는다 해도 선생은 결코 그 이익에 마음이 움직이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내가 공자를 부른다면 그는 응하겠소?」

「공자를 부르시려 한다면 그를 신임하여 결코 소인들이 방해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위나라의 공문자(孔文子)가 포(蒲)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공숙(公叔)을 토벌하기 위해 공자를 찾아와 그 계책을 물었다. 공자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즉시 그 앞에서 물러 나와 수레를 타고 나가면서 말했다.

「나는 새가 살고 싶은 나무를 능히 선택할 수 있지 어찌 나무가 나는 새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공문자가 공자를 붙잡으며 만류했으나 그때 마침 계강자가 공화(公華), 공빈(公賓), 공림(公林) 등의 세 사람에게 예물을 들려 공자를 초빙하러 왔음으로 공자는 그들을 따라 노나라에 돌아왔다. 공자가 유랑생활을 끝내고 13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노애공(魯哀公)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사람을 잘 뽑아 쓰는데 있습니다.」

다시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정직한 사람을 쓰고 부정직한 사람을 쓰지 말아야합니다. 그렇게 되면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한 사람으로 바뀝니다.」

계강자가 도둑이 많은 노나라를 걱정했다. 공자가 말했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비록 상을 주지 않는다 해도 사람들은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은 노나라는 공자를 등용하지 못했고, 공자도 역시 구태여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주왕실의 쇠퇴해져 『예악(禮樂)』이 사라졌고 『시(詩)』와 『서(書)』가 훼손되었다. 이에 공자는 삼대(三代) 즉 하(夏), 상(商), 주(周)의 예(禮)에 대한 제도를 찾아서 『서전(書典)』86을 편찬하여 위로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으로부터 시작하여 밑으로는 섬진(陝秦)의 목공(穆公)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순서에 따라 정리했다. 공자가 말했다.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내가 능히 언급할 수 있으나 그 후손들이 세운 기(杞)87나라에 대해서는 사료(史料)가 부족하여 증명할 수가 없다. 상(商)나라의 예(禮)에 대해서는 내가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후손들이 만든 송(宋)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사료가 없어 말 할 수 없다. 만약에 기(杞)나라와 송(宋)나라에 대한 사료(史料)가 충분히 있었다면 나는 그 두 나라의 예까지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공자는 은(殷)과 하(夏) 두 왕조의 예(禮)가 쇠하고 흥한 역사에 대해 말했다.

「이후로는 비록 백세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예(禮)의 변화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주나라의 화려함을 중시하였고 다른 하나는 은나라의 소박함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주나라 때의 예의제도는 하(夏)와 은(殷) 두 왕조가 세운 제도를 따랐기 때문에 그 문화는 참으로 풍부하고 아름답게 되었다. 나는 주나라의 예악(禮樂) 제도를 따르겠다.」

그래서 『서전(書典)』과 『예기(禮記)』를 공자가 처음으로 편찬했다.

공자가 노나라의 태사(太師)에게 말했다.

「나는 음악은 이해 할 수 있다. 음악을 시작할 때는 오음이 조화를 이루고, 그 다음은 청순하고 어울려 끊이지 않고 잘 이어져 여운이 남음으로써 한 노래는 완성된다.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온 후에서야 비로소 음악이 바르게 되고 『아(雅)』88와 『송(頌)』89이 제 자리를 찾게 되었다.」

옛날 『시(詩)』가 삼천여 수가 있었으나 공자 때에 이르러 중복된 시를 빼고 예의(禮義)에 부합할 수 있는 작품만 취했다. 위로부터는 설(契)90과 후직(后稷)91에 관해서 노래했던 시이고, 중간에 와서는 은(殷)과 주(周) 두 왕조의 성대함을 서술한 시이며, 유왕(幽王)과 려왕(厲王)의 실정(失政)에 관한 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책의 서두에는 남녀와 부부간의 관계와 감정을 표현한 『시편(詩篇)』을 서술했다. 그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자기가 편집한 『시경(詩經)』에 대해 언급했다.

「국풍(國風) 편은 『관저(觀雎)』로부터 시작했고, 소아(小雅) 편은 『녹명(鹿鳴)』으로부터 시작했다. 대아(大雅) 편은 『문왕(文王)』으로 시작했고 송(頌) 편은 『청묘(淸廟)』로부터 시작했다.」

시경 305편을 공자가 모두 거문고를 뜯으며 불러 소(韶)92, 무(武)93, 아(雅), 송(頌)의 음악에 맞추려고 했다. 예악(禮樂)은 이로부터 회복되어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이어서 왕도가 갖추어지고 육예(六藝)94가 완성되었다.

공자 말년에 주역(周易)에 심취하여 단(彖)95, 계(繫)96, 상(象)97, 설괘(說卦)98, 문언(文言)99을 서술했다100. 공자가 주역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다가 그 책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공자가 주역 읽기를 마치고 말했다.

「만약 나에게 몇 년을 더 살게 해 준다면 주역의 문사(文辭)와 도리(道理)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통달할 수 있겠다.

공자가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을 가르쳤는데 그 제자만도 3천 명이 넘었고,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만도 72명이 되었다. 그러나 안탁추(顔濁鄒)와 같이 육예(六藝)에 대해 가르침을 열심히 받고도 72명의 중에 들어가지 못한 제자들도 매우 많았다.

공자는 제자들을 네 가지 방면에서 가르쳤다. 즉, 문(文), 행(行), 충(忠), 신(臣)은 권장하고101,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 네 가지를 강조했다.102 그가 특히 신중하게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은 말은 재계(齋戒), 전쟁(戰爭), 질병(疾病)이었다. 공자는 이(利)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게 될 때면 자기의 운명이나 인덕(仁德)과 결부해서 말했다. 그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사람이 곤란한 지경에 처해도 스스로 배우려는 자세로 번민하고 발분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았고, 한 가지 도리를 가르쳐서 세 가지 도리를 물어오지 않으면 다시는 반복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가 고향에 살 때는 겸손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나, 그가 종묘(宗廟)나 조정에 있을 때는 흐르는 물처럼 언변이 뛰어났으나, 한편으로는 신중하였다. 조정에서 상대부들에게 의견을 이야기 할 때는 태연하면서도 할 말을 능히 다 하였으며, 하대부들에게 의견을 말할 때는 온화하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대했다.

공자는 궁궐의 문에 들어 설 때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경의를 표현하였고, 문 안으로 들어서서 급히 걸음을 옮길 때는 공경하는 태도로 예의를 갖추었다. 나라의 군주가 공자에게 손님을 영접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는, 얼굴에 엄숙한 기색을 띄우고 진심으로 대했다. 군주가 공자를 접견하기 위해 불렀을 때는, 수레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켜 급한 걸음으로 서둘러 갔다.

공자는, 상한 생선이나, 맛이 변한 육고기나, 혹은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의자가 바로 놓여 있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상을 당한 사람의 곁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결코 배불리 먹지 않았다. 상가에서 곡을 한 날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을 입은 사람이나 맹인을 봤을 때는 비록 그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얼굴에 동정심을 표시했다.

공자가 말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사람 중에 분명히 스승으로 모실만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덕을 쌓지도 않고, 학문도 연마하지 않으며, 옳은 소리를 듣고도 행하지 않으며,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은 일이야말로 내가 하는 걱정이다.」

공자가 다른 사람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잘 부르면 다시 부르게 하여 같이 따라 불렀다.

공자는 괴(怪), 력(力), 란(亂), 신(神)103들에 대한 것들과 관련된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이 쓰신 책의 내용으로써 많이 배울 수 있으나,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하늘의 도리나, 사람의 본성이나 운명에 대한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안연이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의 학문은 우러러볼수록 숭고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깊이 탐구하면 할수록 견고하고 심오함을 알 수 있었으며, 이윽고 그 도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홀연히 뒤에 가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조리있게 사람을 이끌어 주시고 풍부한 전적과 문장으로 나를 박학하게 해 주시고 예(禮)로써 나를 절제토록 하시니, 내가 공부를 그만 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온갖 재주를 다해 봤지만, 선생님의 학문은 내 앞에 우뚝 서 있어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달항(達巷)이라는 당(黨)104에 사는 사람이 말했다.

「참으로 위대하도다, 공자여! 그러나 박학다식은 하나 육예(六藝) 중 한 가지도 일가를 이루지 못했구나!」

공자가 듣고 말했다.

「나는 무엇으로 일 가를 이룰까? 수레를 끄는 어자(御者)로 일가를 이룰까? 아니면 활 쏘는 솜씨로 이룰까? 아니 나는 차라리 수레를 끄는 마부가 되어 일가를 이루련다!」

자뢰(子牢)105가 듣고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세상의 부름을 받아 등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예(技藝)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노애공 14년 기원전 478년은 공자의 나이 69세 때다. 그 해 봄에 대야현(大野縣)106 에 사냥나갔다. 숙손씨의 마부 서상(鉏商)이라는 사람이 기이한 짐승을 잡았는데 사람들이 그것은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라고 했다. 공자가 가서 보고 말했다.

「이 짐승은 기린이란 동물이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그 동물을 잡아서 가지고 갔다. 공자가 말했다.

「옛날처럼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입에 팔괘도(八卦圖)를 물고 나타나지 않고 락수(雒水)에서는 신령스러운 거북이 서판(書版)을 등에 지고 나타나지 않으니 내가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리고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한탄하면서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곡부의 서쪽에서 사냥하다 잡힌 기린을 보고 말했다.

「도를 행하려던 나의 희망도 여기서 다 끝나고 말았구나! 내가 행하려는 도를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자공이 듣고 물었다.

「어째서 사람들이 선생님의 도를 몰라준다고 하십니까?」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으며, 다만 아래에서 사람의 일을 배워 위로 천명(天命)에 이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는 이는 하늘뿐이 아니겠느냐?」

공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다. 그리고 유하혜(柳下惠)107와 소련(少連)108은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였다. 우중(虞仲)109과 이일(夷逸)110은 은거하여 세상사에 대해 논하지 않았고 행동은 깨끗했고, 공명과 작록도 구하지 않아 화를 피하는데 시의적절하였다. 그러나 나의 뜻은 다르다. 가한 것도 불가한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111

공자가 말했다.

「안되지, 안되! 군자는 죽어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데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그럼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는가?」

공자는 역사의 기록을 보고 『춘추(春秋)』를 지었다. 춘추는 노은공(魯隱公)112에서 시작되어 노애공 14년113에 이르기까지 모두 노나라의 12군주114 치세동안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주나라 왕실을 정통으로 받들었으며, 은나라의 옛날 제도를 참조하여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의 도를 논했다. 문장은 간략했지만 말하고자 하는 뜻은 넓다. 오(吳)와 초(楚) 두 나라가 왕호를 칭했지만『춘추(春秋)』에서는 그것을 낮추어 본래의 작위인 자작(子爵)으로 칭했다. 당진의 문공이 주재한 천토(賤土)에서의 회맹115은 실제로는 제후가 천자를 불러서 행한 일이지만 『춘추』에서는 그 사실을 피해서 ‘천자가 하양(河陽)116으로 사냥을 나갔다.’라고 기록했다. 역사를 기술한 이러한 방법론을 당시의 법통을 바로 잡는 기준으로 삼았다. 제후들에 대한 ‘포폄(褒貶)’의 뜻은 후에 왕자가 되려는 사람들로 하여금 참고하여 시행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춘추』의 대의가 행해지면 천하의 란신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자가 옛날 관직에 있으면서 소송사건을 심리했을 때, 문서의 내용 중에 다른 사람과 상의해야할 문제가 있을 때는, 결코 혼자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춘추(春秋)』를 지을 때는 결단코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자하(子夏)와 같은 제자들마저도 한 마디도 거둘 수 없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춘추(春秋)』의 뜻을 전수한 뒤에 말했다.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춘추(春秋)』 때문일 것이며,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춘추(春秋)』 때문일 것이다. 」

다음 해인 기원전 480년 공자의 나이 72세 때 위나라에서 벼슬을 살던 자로가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괴외(蒯聵)가 위후(衛侯)의 자리에 앉는 사건의 여파로 죽었다. 그 일로 해서 공자가 병이 들어 눕게 되었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479년 공자의 나이 73세 때 병석에 눕게 된 공자를 뵙기 위해 자공(子貢)이 달려와 뵙기를 청했다. 그때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거닐고 있던 공자가 자공을 보더니 물었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

그리고 탄식을 한 번 하더니 노래를 불렀다.




泰山壞乎(태산괴호)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梁柱摧乎(양주최호)

기둥이 부셔진다는 말인가!




哲人萎乎(철인위호)

철인(哲人)이 죽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노래를 다 부르더니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울기를 멈춘 공자는 자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다. 나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례를 치를 때 그 시신을 하(夏)나라 사람들은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周)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으며 우리 은(殷)나라 사람들은 그 중간에 모셨다. 어제 밤의 꿈속에서 나는 두 기둥 사이에서 모셔져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그리고 7일 만에 공자가 죽었다. 그때는 노애공 16년 기원전 479년 4월 기축(己丑) 일로 공자의 나이 73세 때였다.

애공이 공자를 애도하는 글을 지어 말을 대신했다.

「하늘도 무심하여 노인 한 사람마저 남겨 놓지 않고 데려가고, 나 혼자만 이 세상에 내버려두어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구나! 아아 슬프다, 공자여! 내 다시는 스스로를 얽매이지 않겠노라! 」

자공이 듣고 말했다.

「군주께서는 아무래도 노나라에서 편안하게 죽지 못할 것 같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를 잃으면 질서가 무너지고, 명분을 잃으면 잘못을 저지른다. 사람이 의지를 잃는다는 것은 정신이 혼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행위를 과오라고 하셨다. 살아 생전에는 중용하지 못하고 죽은 후에나 심히 애도하니 그것은 곧 예를 벗어난 행위이며, 또 제후의 신분으로 ‘나 혼자 만’117이라는 말을 하니 실로 명분에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노나라 도성인 곡부성(曲阜城) 북쪽 사수(泗水) 강변에 묻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 간 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슬퍼하며 3년 상을 마치고 서로 헤어졌는데 차례로 길을 떠날 때마다 곡을 해서 애도를 다하였으며, 어떤 제자는 더 머물다가 돌아가기도 했다. 오직 자공만이 무덤 옆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몰려와 무덤 가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해서 100여 가구가 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로 인하여 공자의 묘가 있던 곳을 공자마을이라고 불렀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며,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118를 행하고 활쏘기를 하면서 가지 않고 공자의 묘 옆에서 살았다. 공자의 무덤 크기는 일경(一頃)119에 달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머물던 방들은 후대에 이르러 공자의 신위를 모신 묘(廟)로 만들어져 공자의 의관과 거문고 및 타고 다니던 수레와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한나라가 세워지고도 200여 년간이나 보존되었었다. 한고조 유방이 노나라를 지나다가 소, 양, 돼지 등을 모두 구비한 태뢰(太牢)의 희생을 바쳐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다. 제후와 경대부, 재상들이 노나라 땅에 부임하면 우선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후에 정사에 임했다.




공자는 아들에 이(鯉)라고 있었는데 자(字)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가 아들 급(伋)을 낳았다. 자(字)가 자사(子思)이다.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송나라에서 고생을 했었고, 후에 『중용(中庸)』을 지었다.

자사는 자가 자상(子上)인 백(白)을 낳았다. 백은 나이 47세까지 살았다.

자상은 자(字)가 자가(子家)인 구(求)를 낳았다, 자가는 나이 45세까지 살았다.

자가는 아들 기(箕)를 낳았다. 자가 자경(子京)인 기(箕)는 46세까지 살았다.

자경은 아들 천(穿)을 낳았다. 자가 자고(子高)인 천(穿)은 51세까지 살았다.

자고는 아들 신(愼)을 낳았다. 신은 일찍이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으며 57세까지 살았다.

자신(子愼)은 아들 부(鮒)를 낳았다. 부(鮒)는 진한 교체기에 진왕 섭(涉) 밑에서 박사(博士)를 지내다 나이 57세 때 죽었다.

부(鮒)는 제자로 자양(子襄)이라는 사람을 두었다. 자양은 일찍이 효황제(孝皇帝) 밑에서 박사를 하다가 다시 장사태수(長沙太守)가 되었다. 키가 9자 6치의 장신으로 그도 나이 57세 때 죽었다. 자양이 아들 충을 낳았다. 충(忠) 역시 57세까지 살았다.

충(忠)이 낳은 아들 무(武)도 57세까지 살았다. 무는 아들 연년(延年)과 안국(安國)120을 낳았다. 안국은 금상(今上)121 황제 밑에서 박사가 되었다. 벼슬이 임회(臨淮)122 태수까지 올랐으나 일찍 죽었다. 안국은 앙(卬)을 낳았고, 앙(卬)은 환(驩)을 낳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시경(詩經)』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길은 따라간다.’123라고 했다. 내가 비록 공자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공자를 동경하고 있었다. 나는 공자가 쓴 책을 읽어보고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를 상상해 봤다. 내가 노나라에 갔을 때 공자를 모신 묘당(廟堂)에 올랐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던 수레나, 의복 및 제기(祭器) 등을 보았고, 유생(儒生)들이 수시로 와서 제례를 익히는 의식을 참관했다. 내 마음속에 공자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선뜻 그 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수많은 군왕들과 현인(賢人)들이 있었지만, 모두 살아 있을 때는 영화를 누렸으나, 죽어서는 그것으로 끝났다. 공자는 평민의 신분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世)가 지나도록 여전히 학자들의 종주로 추앙 받는다. 천자, 왕후장상(王侯將相)에서 시작해서 나라 안의 육예(六藝)를 논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으니 가히 최고의 성인이라고 추앙할만하다.




『공자세가 끝』




주석

1)공자세가(孔子世家) : 공자 자신은 결코 제후나 왕후장상이 아니다. 비록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봉지를 얻지는 못했다. 공자는 일생의 대부분을 평민에 가까운 사(士) 계급으로 지냈다. 사마천이 공자를 위해서 세가를 지은 이유는 공자가 학술, 사상, 문화, 교육 등의 방면에서 지대한 공적을 세웠고, 그 학문이 오래 전수되어 쇠퇴하지 않아, 후세에 유가에 의해 받들어졌기 때문에 세가에 포함시켜 그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서였다.

2)평창향(平昌鄕) : 춘추 때 노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남.

3)공방숙(孔方叔) : 춘추 때 노나라 대부다. 자(子) 성에 공(孔) 씨이며 이름은 방숙(防叔)이다. 일설에 의하면 노나라의 방읍(防邑 :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의 대부로 봉해졌기 때문에 이름을 방숙(防叔)이라 지었다고 했다.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방숙의 증조부였던 공보가(孔父嘉)가 내란을 일으킨 화독에 의해 송상공(宋殤公)과 함께 기원전 710년에 피살당해 공씨 집안은 몰락하고 공보가의 아들 목금보(木金父)는 화독에게 투항하여 그의 가신이 되어 연명했다. 계속해서 송양공(宋襄公), 송성공(宋成公) 치세 때까지 공씨들에 대한 화씨들의 핍박이 멈추지 않자 송성공(宋成公 : 재위 전636-620년) 치세시 공방숙은 일족을 이끌고 노나라에 망명하였다. 노희공(魯僖公)에 의해 방읍 대부에 봉해졌다. 즉 공보가는 공방숙의 숙량흘을 낳았고 숙량흘은 공자를 낳았다.

4)야합(野合) : 세가지 설이 있다. ①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는 설. ②정식으로 결혼은 했지만 그 것에 요구되는 예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설. ③ 두 사람의 연령 차이가 너무 큰 결혼이라는 설 등이 있다.

5)니구(尼丘) : 니산(尼山), 혹은 니구산(尼丘山)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 동남 쪽에 있는 산이다.

6)중니(仲尼) : 공자에게는 맹피(孟皮)라는 이모(異母) 형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자에 둘째를 의미하는 중(仲)을 넣었다.

7)숙량흘이 죽을 때 징재(徵在) 즉 안씨는 나이가 어린 과부였다. 당시 사회 풍습으로서 그녀가 죽은 남편의 장례행렬을 끝까지 따라가는 행위는 무리였다. 그런 이유로 징재는 남편의 묘가 어디 있는지 몰랐을 가능성이 있었고 따라서 공자에게 그 부친의 묘가 있는 위치를 알려줄 수 없었을 것이다.

8)조두(俎豆) :제사를 지낼 때 희생을 바치는 제기(祭器)를 말한다. 조(俎)는 네모난 것, 두(豆)는 원형의 것을 말한다.

9)당시의 풍습으로는 부부는 죽으면 반드시 합장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묘소가 어디 있는지 몰랐던 공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염을 하고 입관은 하였으나 매장하지 못하고 임시로 빈소를 마련했다가 그 부친의 묘소를 알게 된 후에 비로소 합장한 것이다.

10)계씨(季氏) : 당시 노나라의 국정을 좌우했던 삼환씨(三桓氏) 중의 한 가문인 계손씨(季孫氏)를 지칭한다. 삼환씨는 계손씨 외에 숙손씨(叔孫氏)와 맹손씨(孟孫氏)를 말한다. 제나라에 문강과 같이 들렸다가 제양공에 의해 살해당한 노환공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다. 노후(魯侯)의 자리를 잇게 된 적자 노장공(魯莊公) 외에 서형 공자경보(公子慶父), 경보의 동모제 숙아(叔牙), 장공의 동모제 계우(季友)가 있었다. 후에 세 사람의 후예인 삼환씨들은 서로 작당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공실은 허수아비가 되었다.

11)양호(陽虎) : 춘추 때 노나라 사람으로 양화(陽貨)라고도 한다. 계손씨의 가신으로 계평자(季平子) 즉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받들었다. 평자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노정공(魯定公) 5년 기원전 505년, 계손씨들의 적자인 계환자(季桓子) 사(斯)를 붙잡아 감금하고 자기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삼환씨(三桓氏)들의 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사이가 좋은 그들의 서자들을 대신 세우려고 란을 일으켰으나 삼환씨들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공실의 보물들과 대궁을 가지고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동남쪽에 있던 양관(陽關)으로 도주했다. 노정공 9년 기원전 501년 다시 삼환씨들의 공격을 받아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제나라에 의해 체포되어 노나라오 호송되던 도중에 탈출하여 당진으로 도망가 조간자(趙簡子) 앙(鞅)의 가신이 되었다.

12)맹리자(孟釐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35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정경(正卿)으로 맹손(孟孫) 씨에 이름은 확(貜)이다. 『춘추(春秋)』에는 중손확(仲孫貜)으로 되어 있다. 노양공(魯襄公) 31년 기원전 542년, 부친인 맹손갈(孟孫羯)로부터 사위를 받아 노나라의 정경이 되었다. 노소공(魯昭公) 5년 기원전 537년, 그는 계손씨 및 숙손씨와 함께 노나라를 사분하여 공실과 삼가가 각각 나누어 가지고 다시 노나라의 군사들을 삼군으로 만든 다음 공실의 군사들을 폐하고 삼가가 각각 일군씩을 소유했다. 삼가는 모두 도읍을 따로 가지고 군역과 전세를 거두어 그 일부만을 공실에 바쳐 노나라 공실은 더욱 이름뿐인 군주로 전락했다. 노소공(魯昭公)과 함께 초나라에 갔다가 공식석상에서 상례(相禮)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노나라에 귀국해서 그의 아들 맹의자(孟懿子)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공자로부터 예(禮)에 대해 공부하라고 명했다.

13)불보하(弗父何) : 서주 때 송나라 공족. 공자의 선조이다. 송민공(宋愍公)의 장자이며 송려공(宋厲公)의 동복형이었다. 민공이 죽을 때 군위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동생 자희(子熙)에게 물려주었다. 자희가 양공(煬孔)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송민공의 차자 부사(鮒祀)가 양공을 시해하고 형 불보하를 추대하려고 했으나 불보하가 받아들이지 않았음으로 부사가 군위에 앉았다. 이가 송려공(宋厲公)이다. 송려공은 불보하를 상국으로 임명하여 송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14)정고보(正考父) : 정고보(正考甫)라고도 한다. 불보하의 증손자이며 공보가의 부친이다. 송나라의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 삼세 70년을 거쳐 보좌했다. 참고로 대공의 재위연도는 기원전 799년-766년, 무공 765년-748년, 선공 747-729년이다.

15)남궁경숙(南宮敬叔) : 맹리자의 아들이며 의자(懿子)의 동생이다.

16)계무자(季武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35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정경(正卿)이다. 계손씨(季孫氏)에 이름은 숙(宿)이다. 『국어(國語)』에는 숙(夙)으로 되어있다. 노환공의 증손인 계문자(季文子) 행보(行父)의 아들이다. 노양공 5년 기원전 568년 문자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었다. 그 2년 후인 기원전 566년 노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당진이나 위(衛)나라에서 열렸던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하여 각국의 사절들을 대하는 예를 주재했다. 이 일로 당시 사람들은 계무자를 ‘지례(知禮)’라고 호칭했다. 양공 11년 기원전 562년 원래 이군(二軍)이었던 노나라 병력을 삼군(三軍)으로 만들어 삼환씨들이 각기 일군씩 갖도록 했다. 계손씨들에 속한 식읍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었으며 병역에 응하는 자에 대해서는 부세를 면제해 주고 병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 세금을 배가시켰다. 양공 19년 기원전 554년 당진의 평공(平公)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같이 종군하여 노획한 병기와 종(鐘)에 노나라가 세운 공로를 새기게 했다. 후에 노양공이 국내를 떠나 있는 틈을 타서 변대부(卞大夫)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구실을 삼아 변읍을 습격하여 계손씨들의 사읍으로 만들었다. 양공이 알고 계무자를 매우 원망했다. 양공이 죽자 그는 소공(昭公)을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노소공 5년 기원전 537년 그는 노나라 공실이 갖고 있던 중군(中軍)을 폐하고 공실을 4분하여 계손씨가 2분을 갖고 나머지 2분을 맹손씨와 숙손씨에게 각 1분씩 나누어 주었다. 이후로 노나라의 공실을 더욱 쇠약해 지고 계손씨가 전권을 휘둘렀다. 노소공 7년 기원전 535년 병으로 죽고 시호를 무자(武子)라 했다.

17)계평자(季平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5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 정경으로 계손씨에 이름은 의여(意如)이다. 계무자의 손자이다. 그의 부친 계도자(季悼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무자(武子)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노나라의 국정을 독단했다. 노나라의 백성들은 그 군주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거(莒)나라를 정벌하여 잡은 포로를 박사(亳社)에 제사를 올리는데 희생(犧牲)으로 썼다. 후에 노나라 공실 출신들인 후(郈)씨 및 장(臧)씨들과 다투다가 노소공(魯昭公)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숙손씨와 맹손씨들의 도움을 받아 노소공을 나라밖으로 쫓아냈다. 이어서 당진의 육경(六卿)들에게 뇌물을 바쳐, 당진이 노소공을 노나라에 귀국시켜 군주의 자리에 복위시키려는 기도를 막았다. 결국 노소공은 계평자의 방해로 나라밖에서 유랑하다가 객사했다.

18)사공(司空) : 춘추 때 토목과 건축을 관장하던 관리의 장이다.

19)9자6치 : 춘추 때 대척과 소척이 있었으며 대척은 한자에 22.5cm에 10치에 해당하고 소척은 18cm에 8치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자의 키는 대척으로 말한다면 2m 16cm이며 소척으로 말한다면 175.5cm이다. 공자의 키는 소척으로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 같다.

20)원문은 다음과 같다.

「吾聞富貴者送人以財, 仁人者送人以言. 吾不能富貴, 竊仁人之号. 送者以言, 曰 ‘聰明深察而近于死者, 好議人者也. 博辯廣大危其身者, 發人之惡者也. 爲人子者毋以有己, 爲人臣者毋以有己.’」

21)백리해(百里亥) : 백리해는 원래 우(虞)나라 사람이었으나 당진이 우나라를 멸하자 그는 당진의 포로가 되어 진목공에게 시집가는 목희의 노비가 되었다. 목희의 행렬을 따라 당진으로 가던 도중 탈출하여 초나라의 완(宛) 땅을 지나다 초나라 사람들에게 잡혀 소를 기르는 목부가 되었다. 후에 섬진의 목공이 백리해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숫양피 가죽 5장을 속죄금으로 내고 섬진으로 데려가 대부로 삼았다. 그런 이유로 백리해는 오고대부(五羖大夫)라 고 불렸다..

22)후소백(郈昭伯)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17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대부로서 노효공(魯孝公 : 재위 기원전 795-769년)의 후예다. 노소공 25년 기원전 517년 계손씨에게 원한을 품고 싸웠다. 노소공 역시 계손씨가 노나라의 정권을 전단하는데 원한을 품고 있다가 후소백을 도와 공실의 군사를 동원하여 계손씨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숙손씨 및 맹손씨의 지원을 받은 계손씨에 의해 싸움에 지고 소공은 국외로 망명하고 후소백은 맹리자(孟釐子)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23)건후(乾侯) : 지금의 하북성 성안현(成安縣) 동남에 있던 땅으로 춘추 때 당진(唐晉)의 땅이다. 그러나 『좌전(左傳)』에는 노소공이 제나라에 망명하여 처음에 거주한 곳은 운(鄆) 땅이라고 했다. 노소공은 자기가 복위하는데 제나라의 도움을 발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기원전 514년 당진(唐晉)으로 들어가 자기의 복위를 호소했다. 당진의 경공은 노소공을 건후(乾侯)에 살게했다. 즉 이 기사는 운(鄆)의 잘못이다.

24)고소자(高昭子) : 춘추 때 제나라의 정경(正卿). 강성(姜姓)에 고씨(高氏)이며 이름은 장(張)이다. 정경(正卿) 고언(高偃)의 아들이다. 제경공(齊景公) 말년에 그 부친의 작위를 이어 받아 정경이 되자,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에 들어가 그의 가신이 된 공자를 경공에게 데려가 접견하게 만들었다. 경공이 죽자 그는 국혜자(國惠子)와 함께 경공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어린 아들 도(荼)를 제나라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안유자(晏儒子)다. 고소자는 국혜자와 함께 제나라의 국정을 전단하다가 대부 전걸(田乞)에 의해 살해당했다.

25)태사(太師) : 서주 때 처음으로 둔 관직으로, 원래는 고급 무관을 의미했다. 춘추 때 당진, 초 등의 나라가 이 관직 이름을 계속 사용하여 국왕을 보좌하는 관직이 되었다. 동주 때에는 음악을 담당하는 관리를 태사라고 일컬었다.

26)소(韶) : 순임금이 지어 전해졌던 고대의 악곡 명.

27)계환자(季桓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92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귀족으로 이름은 사(斯)다. 노정공 5년 기원전 505년 계평자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노나라의 정권을 담당했다. 같은 해 란을 일으킨 그의 가신 양호(陽虎)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후 양호로부터 그를 받들겠다는 맹세를 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다음 해 정공(定公)을 따라 정나라 정벌전에 참가했으며 양호의 명을 받들어 정나라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당진에 데리고 가서 바쳤다. 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양호가 삼환씨들을 주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국외로 달아나자 계환자가 다시 노나라의 정권을 잡았다.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를 불러 계손씨들의 가재(家宰)로 삼고 공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삼환씨 종읍의 성벽을 허물게 했다. 당시 삼환씨들의 종읍을 다스리고 있던 읍재(邑宰)들의 권력이 비대해져 오히려 삼환씨들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郈)와 비(費) 읍의 성벽을 허물려고 했다. 숙손씨의 종읍인 후읍(郈邑)의 성벽은 허물었으나 비읍(費邑)은 복종하지 않고 란을 일으켰다. 계환자가 이를 진압하고 비읍의 성벽도 허물었다. 노애공 3년에 죽었다.

28)기(夔) : 고대 전설에 나오는 다리가 하나이고 뿔이 달리지 않은 소의 형상을 한 동물이다.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의 뜰에서 군신(軍神) 치우(蚩尤)와 싸울 때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기(夔)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수(雷獸)의 뼈로 북채를 만들었다. 우렁찬 북소리에 힘을 얻은 황제가 거느린 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치우를 물리칠 수 있었다.

29)망랑(罔閬) : 망량(魍魎), 망양(罔兩), 방량(方良)이라고 한다. 『회남자(淮南子)․범론훈(氾論訓)』에 「산에는 효양(梟陽)이 산다. 산의 정령(精靈)이며 사람의 모습을 하고, 키가 크며, 얼굴은 흑색이다. 몸에는 털이 있으며 발은 반종(反踵)이다.」라고 했다.

30)망상(罔象) : 용의 모습을 하고 물속에 살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귀신으로 용망상(龍罔象)이라고도 한다.

31)분양(墳羊) : 양의 모습을 하고 땅속에 사는 귀신으로 자웅동체의 괴물이다. 토정(土精)이라고도 한다.

32)방풍씨(防風氏) : 지금의 절강성 덕청현(德淸縣)에 있었던 중국 고대의 부족국가 이름. 일설에 의하면 방풍씨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과 해안가 일대에 있던 여러 성을 가르킨다고 했다.

33)왕망씨(汪罔氏) : 사기집해에 의하면 지금의 절강성 무강현(武康縣) 부근이라고 하며 사기지명고는 지금의 산동성 제성현(諸城縣) 서북과 안구현(安丘縣) 남쪽 경계에 있던 중국 고대 국가 이름이라고 했다.

34)초요씨(僬僥氏) : 서남쪽 변경 밖에 살던 대진국 북족의 만이족의 이름이다(사기집해).

35)공산불뉴(公山不狃) : 계손씨의 가신으로 비읍의 읍재였다. 양호는 원래 공산불뉴의 가신이었으나 후에 양호의 세력이 더 커져 그에게 복종했다. 양호가 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나라 밖으로 달아나자 비읍에서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오나라로 도망쳤다.

36)중도(中都) :춘추 때 노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양산현(梁山縣) 동남에 있었다.

37)원문은 역계이등(歷階而登)이다 : 한 걸음에 한 계단씩 제단에 오르는 의식을 말한다. 고대 예법규정에 따르면 제단에 오를 때는 한 계단씩을 오른 다음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시 두 번째 계단을 올랐다. 두 발을 모으지 않고 한 걸음에 한 계단씩 오르는 방법을 역계라 하며 공자가 한 걸음에 한 계단씩 성큼성큼 올랐다는 말은 상황이 급하여 예법을 행할 겨를이 없었음을 뜻한다.

38) 小人之其過, 謝之以文, 君子之其過, 謝之以質

39)운(鄆) : 동운(東鄆)과 서운(西鄆)이 있다. 지금의 산동성 기수현(沂水縣) 북쪽의 운(鄆)을 동운(東鄆)이라 하고 지금의 산동성 운성현(鄆城縣) 동쪽에 있던 운(鄆)을 서운(西鄆)이라 했다. 제나라가 돌려 준 운(鄆) 땅은 서운(西鄆)을 말한다. 서운은 노나라 영토였으나 기원전 516년 제경공이 빼앗아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노소공(魯昭公)에게 주어 살게 했다. 노소공은 제경공이 자기를 신하로 취급하자 운 땅에서 당진의 건후(乾侯)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이후로 운성(鄆城)은 제나라 땅이 되었다가 기원전 500년 제경공과 노정공이 협곡산(俠谷山)에서 회맹하고 맺은 수호조약에 따라 환(讙) 및 구음(龜陰)과 함께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이것은 회맹에 참석했던 공자의 활약 덕분이다.

40)문양(汶陽) : 산동성 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태안시 서쪽을 우회하여 문상시(汶上市)와 제녕시(濟寧市)를 거쳐 미산호(微山湖)로 흘렀던 춘추 때 제와 노 두 나라를 갈랐던 문수(汶水) 남안의 땅을 총칭한 지명이나 제경공이 돌려준 문양의 땅은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 서남쪽의 땅을 말한다.

41)귀음(龜陰) : 귀산(龜山) 북쪽의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동북에 있던 고을을 말한다. 몽산(蒙山)과 이웃하고 있다. 춘추 때 귀산(龜山)과 몽산(蒙山)으로 따로 부르다가 후세에 들어서 귀산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모두 몽산(蒙山)으로 부르고 있다. 몽산의 주봉은 귀몽산(龜蒙山)이다.

42)치(雉) : 고대의 성벽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높이 1장, 길이 3장을 1치라고 했다. 지금의 미터법으로 말하면 성벽의 높이가 한 장인 2.25미터라면 둘레가 670여 미터에 해당하는 성을 말한다.

43)비읍(費邑)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 서북에 있었던 고을로 노나라 삼환씨 중 계손씨들의 종읍이다.

44)성읍(郕邑) :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동북에 있던 고을로 노나라의 삼환씨 중 맹손씨들의 종읍이다.

45)후읍(郈邑) :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에 있던 고을로 노나라의 삼환씨 중 숙손씨(叔孫氏) 들의 종읍니다.

46)강락무(康樂舞) : 강락은 무곡에 맞춰 추는 춤을 말한다.

47)교제(郊祭) : 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교제(郊祭)라하고 성의 북쪽 교외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사제(社祭)라 했다.

48)둔(屯) : 위군(魏郡) 관내의 관도(館陶)를 말한다. 하수(河水)의 지류(支流)로 둔씨하(屯氏河) 강변이다. 관도(館陶)는 지금의 산동성 관도현(館陶縣) 서남 40리에 있었던 고을의 이름이다.

49)광(匡) :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에 있던 춘추 때 위나라 령의 고을이다.

50)영무자(寧武子) : 진문공에 의해 쫓겨난 위성공(衛成公)을 위후(衛侯)의 자리에 복위시킨 위나라의 대부 영유(寧兪)를 말한다. 위성공(衛成公)은 기원전 634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600년에 죽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노희공(魯僖公)과 문공(文公) 조에 위성공과 영무자의 행적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들어간 해는 기원전 496년으로, 공자가 사자를 영무자에게 보내 광인(匡人)들로부터 빠져 나온 본문의 사건은 시기적으로 1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이는 사마천의 착오이다.

51)거백옥(蘧伯玉) : 춘추 때 위나라 대부. 이름은 원(瑗)이고 자가 백옥(伯玉)이다. 위헌공(衛獻公) 18년 기원전 559년 위헌공이 그 신하에게 쫓겨나자 그도 란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위나라에 돌아와 위상공(衛殤公), 위양공(衛襄公)을 모시며 어진 이름을 얻었다. 영공이 서자(庶子)인 사어(史魚)의 추천으로 다시 조정에 나와 영공의 총애를 받았다. 오나라의 계찰(季札)이 중원을 유람하기 위해 위나라에 들려「거백옥이야 말로 군자로다!「라고 말했다.」공자와 교유하였고 공자 논어에 두 번 나온다. 처음은 헌문(獻文) 26편에 나오고 두 번 째는 위영공 6편에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에 나아가고, 도가 없을 때는 거두어 물러나는 구나!(君子再擧伯玉. 邦有道 則仕. 邦無道 則可卷而懷之)라고 평했다.

52)환퇴(桓魋) : 춘추 때 송나라의 관리. 송경공(宋景公) 때 사마직에 있었다. 경공 25년 기원전 492년 공자가 열국을 주유할 때 송나라를 지나다가 큰 나무 밑에서 예에 대해 강론한 것을 환퇴가 싫어하여 공자를 살해하려고 했다. 환퇴는 공자가 밑에서 강론하던 큰 나무를 뽑아 버리자 공자는 미복으로 변장하여 송나라를 탈출했다.

53)환퇴가 공자를 살해하려고 했던 이유는 환퇴가 사치하여 그의 노비들과 장인들을 시켜 자기가 죽어서 들어갈 관을 돌로 만든 행위를 공자가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54)고요(皐陶) : 중국 고대 신화 상의 인물로, 동이족(東夷族)의 우두머리로 순임금 밑에서 형법을 관장하였다. 일찍이 우임금 밑에서 그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우임금보다 일찍 죽었다.

55)자산(子産) :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522년에 죽었다. 공자보다 약 50년 앞선 사람이며 제나라의 안영(晏嬰)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본명은 공손교(公孫僑)이며 자산(子産)은 그의 자(字)이다. 시호(諡號)는 성자(成子)다. 정나라 간공(簡公) 때 상경의 직책을 맡아 나라의 국정을 쇄신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미신을 타파하고, 전답의 경계를 정돈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안무정부(按畝征賦) 제도를 정립하여 부세의 혁신을 꾀하고, 성문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법률에 따라 다스렸다. 또한 교육을 장려하여 향교(鄕校)를 창시하였다. 정나라는 자산이 등장함으로 해서 과거 7-80년 간 당진과 초나라 사이에 끼어 패권 다툼의 와중에서 끊임 없는 전란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공자(孔子)는 자산에 대해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산에게는 군자다운 점이 네 가지가 있었으니 자기가 일을 행할 때는 공손했으며, 윗사람 섬길 때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했으며 백성들을 다스릴 때는 은혜를 베풀고 또한 의를 행하게 하였다.( 子謂子産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56)조앙(趙鞅) : 조간자(趙簡子)를 말한다. 당진의 육경(六卿) 중의 한 사람으로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의 란을 제압하고 조씨들의 봉지를 확대하여 전국 칠웅 중의 하나인 조나라의 건국에 대한 토대를 마련한 사람이다. 조나라를 실질적으로 세운 조양자(趙襄子)는 그의 아들이다.

57)서하(西河) :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과 활현(滑縣) 일대를 가르킨다.

58)불힐(佛肹) : 춘추 때 당진의 범씨(范氏)들의 가신. 중모의 읍재에 임명되었다. 당진의 정공 22년 기원전 490년 조간자가 범씨와 중행씨를 공격하고 중모를 포위했다. 그는 중모에 들어앉아 조간자에 항거하면서 공자를 불러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59)경(磬) : 돌이나 옥으로 만든 고대의 타악기

60)문왕조(文王操) : 주문왕이 작곡했다고 전해지는 거문고 곡을 말한다.

61) 두명독(竇鳴犢) : 춘추 대 당진의 대부. 이름은 주(犨)이고 자기 명독(鳴犢)이다. 일찍이 어진 이름을 얻어 조간자를 도와 당진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했으나 후에 조간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당진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황하의 나루에서 두명독이 살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면서 『추조(陬操)』라는 노래를 작곡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62)순화(舜華) : 춘추 때 당진(唐晉)의 대부. 두명독(竇鳴犢)과 함께 어진 이름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간자를 도와 당진의 정권을 장악하도록 했으나 후에 조간자가 뜻을 얻은 후 살해했다. 공자가 듣고 두명독(竇鳴犢)과 함께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추조(陬操)』라는 곡을 만들었다.

63)원문은 다음과 같다.

刳胎殺夭則麒隣不至郊, 竭澤涸魚則蛟龍不合陰陽, 履巢毁卵則鳳凰不翔

64)추향(陬鄕) : 사기색은에 의하면 노나라의 추읍(郰邑)과는 다른 곳인 위나라 땅이나 그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65)괴외(蒯聵) : 위영공(衛靈公)의 아들로 위장공(衛庄公)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78년에 죽었다. 괴위가 태자였을 때 영공이 총애하는 남자(南子)를 죽이려고 하다가 미수에 끝나자 죽음을 피하여 송나라로 달아났다가 다시 당진으로 들어가 조간자(趙簡子)에 몸을 의탁했다. 조간자는 괴외를 척읍(戚邑)에 머물게 했다. 영공이 죽자 그의 아들 첩(輒)이 뒤를 이었다. 첩이 위출공(衛出公)이다. 그는 위나라에 들어가 군위를 빼앗으려고 했으나 위나라 국인들의 저항으로 싸움에서 패하고 다시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동북에 있던 숙(宿) 땅으로 도망쳐 그 땅을 의지하여 지켰다. 기원전 480년 공회(孔悝) 등의 지원을 받아 위나라로 들어와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아들 출공(出公)은 노나라로 달아났다. 장공이 즉위하자 즉시 당진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조간자가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 도성을 포위하자 싸움 중에 살해되었다. 이 와중에 공회의 가신이었던 자로가 피살되었다.

66)척읍(戚邑) : 춘추 때 위나라 대부 손림보(孫林父)의 봉읍이었으나, 손림보가 위나라에 쫓겨나자 당진으로 망명하면서 척읍을 당진에 바침으로서 당진 땅이 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 북 10키로에 있었으며 당시 척읍은 황하의 남안에 있었다.

67)주래(州來) : 지금의 안휘성 봉대현(鳳臺縣)으로 춘추 때 줄곧 초나라 땅이었다가 기원전 519년 오나라 령이 되었다. 채나라가 주래로 그 나라를 옮긴 이유는 기원전 493년 오왕 부차(夫差)가 채나라 소후(昭侯)에게 압력을 가한 결과이다. 주래로 옮긴 채나라를 하채(下蔡) 라 한다.

68)공지어(公之魚) : 춘추 때 노나라 대부. 노나라 공족 계손앙(季孫鞅)의 후손이다. 계손앙의 자 공지(公之)를 성씨로 삼았다.

69)염구(冉求) : 자(字)는 자유(子有)다. 공자보다 29년 연하이며 계손씨의 가재(家宰)가 되었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염구는 어진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천호의 백성과 백승(百乘)의 군사가 있는 고을을 다스릴만 하지만, 그가 어진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계강자가「자로는 어진 사람입니까?」라고 묻자「염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염구가 공자에게「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바로 행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자로가 다시「의를 들었으면 바로 행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부형이 계시니 어찌 듣고서 바로 행하겠느냐?」라고 대답했다. 자화(子華)가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여「물음이 같은데 대답이 어찌하여 다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가 「염구는 무슨 일이든 일단 머뭇거리는 사람이라 진취시켜 주었고, 자로는 남을 이기려고 하기 때문에 억제시켜 주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70)자감(子竷) :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다른 자(字)이다. 춘추 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단술사(端沭賜)이다. 기원전 520년에 태어나서 죽은 해는 미상이다. 공자의 제자로 변설에 능했다. 위(衛)와 노(魯)에서 벼슬을 살고 제(齊)와 오(吳) 등에서 유세했다. 후에 벼슬을 버리고 조(曹)와 노(魯)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장사를 해서 수만금을 모았다. 후에 제나라에서 죽었다.

71)섭공(葉公) : 춘추 말 초나라 대부 심제량(沈諸梁)을 말한다. 심윤술(沈尹戌)의 아들이다. 섭공의 봉지 섭읍(葉邑)은 지금의 하남성 섭현(葉縣) 남쪽의 초나라 령이다. 기원전 491년 초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백공(白公) 승(勝)이 영윤(令尹) 자서(子西) 등 초나라 대신들을 살해하고 초혜왕(楚惠王)을 붙잡아 감금하자 섭공이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영성(郢城)으로 진격하여 백공으로 하여금 자살하게끔 만들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72)政在來遠附邇(정재래원부이)

73)성보(城父)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부근의 보풍현(寶豊縣) 동쪽에 있던 춘추 때 초나라의 전략적 요충지다.

74)『시경(詩經)·소아(小雅)』 편 『도인사지습(都人士之什)』 제10편 『하초불황(何草不黃)』의 구절이다. 「노역을 나간 사람이 외뿔소나 호랑이도 아닌데 광야에서 노역을 하며 쉴 틈이 없는가?」라고 한탄한 시이다. 원문은 “무소도 호랑이도 아닌 것이, 저 넓은 들을 헤매나[匪兕匪虎 率彼曠野(비시비호 솔피광야)]/ 슬프다, 우리 노역들은 아침 저녁 쉴틈이 없네[哀我征夫 朝夕不暇(애아정부 조석불가)]”이다.


75)비간(比干) :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숙부로서 주왕의 폭정을 여러 차례 간하다가 주왕이 노하여 성인(聖人)의 심장은 어떻게 생겼는지 본다고 비간을 죽여 그 시체를 갈라 간을 꺼내어 살폈다.

76)강기(綱紀) : 벼릿줄과 가는줄. 즉 국가를 다스리는 대법(大法)과 세칙(細則)을 말한다.

77)자서(子西) :초소왕(楚昭王) 때의 영윤 공자신(公子申)을 말한다. 초평왕(楚平王)의 서제다. 평왕이 죽자 영윤 낭와(囊瓦)가 그를 초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따르지 않고 평왕의 어린 아들 세자 진(珍)을 세웠다. 소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혜왕(惠王) 2년 (기원전 487년)에 그는 오나라에 망명하여 살고 있던 태자건(太子建)의 아들 미승(羋勝)을 불러 소(巢) 땅에 봉하고 백공(白公)으로 호칭하였다. 후에 난을 일으킨 백공(白公) 미승(羋勝)에게 살해당했다.

78)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제후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의 오등급의 작위를 주어 봉했다. 그 중 자(子)과 남(男)은 그 봉지가 사방 오십 리에 불과했다. 초나라는 자작(子爵) 국에 해당한다.

79)접여(接與) :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 「 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공자가 타고 지나가던 수레 옆에서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히 몸을 피해 달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80)증(繒) :지금의 산동성 창산현(蒼山縣) 동북 약 10키로 지점에 있었던 중소제후국

81)제사나 잔치를 벌릴 때 소, 돼지, 양 각 한 마리씩을 잡는 것을 일뢰라 한다. 주나라 예법에 상공은 9뢰, 후백(侯伯)은 7뢰, 자남(子男)은 5뢰로 되어 있으나 오왕 부차가 백뢰를 요구했다는 의미는 주례에 벗어났음을 뜻한다.

82)노나라는 주무왕의 동생 주공 단(旦)이 봉해진 나라이고 위나라는 다른 동생 강숙(康叔)이 봉해진 나라이다. 주공과 강숙은 형제간이라 노와 위 두 나라를 형제국으로 표현했다. 다른 한편 당시 노와 위 두 나라는 그 정치가 부패하여 정국이 매우 불안한 모습이 마치 형제와 같다고 비유했다는 해석도 있다.

83)랑(郞) : 춘추 때 노나라 땅으로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북이라는 설과 춘추좌전의 같은 조에 ‘與齊戰于郊’의 설을 따라 지금의 곡부시(曲阜市) 부근의 교외를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노애공 8년 기원전 484년에는 노나라가 제나라와 싸운 기록이 없다. 『춘추좌전(春秋左傳)』 노애공(魯哀公) 11년 즉 기원전 481년에 ‘師及齊師戰于郊(사급제사전우교)’라는 기사에 따라 염구가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 군사와 싸운 해는 기원전 481년의 일이다.

84)천사(千社) : 고대에 행정 단위로 25가를 묶어 일사(一社)로 해서 호적(戶籍)을 만들었다. 천사란 2만 5천 호를 말한다.

85)공문자(孔文子)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80년에 죽었다. 춘추 때 위나라의 정경(正卿)이며 이름은 어(圉)다. 논어에는 중숙어(仲叔圉)라고 되어 있다. 노애공 원년 기원전 494년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제노 연합군을 도와 당진(唐晉)을 공격하여 당진의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를 구했다. 영공이 죽자 그는 영공의 손자이며 괴외(蒯聵)의 아들인 첩(輒)을 군주로 세우고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정사를 주관했다. 위나라의 현인이라는 명성이 있었다. 공자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학문을 즐겨하고 이해가 빨랐다.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子貢問曰公文子何以謂之文也. 子曰 敏而好學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라고 칭송했다. (論語 公冶長)

86)서전(書典) : 『상서(尙書)』에 대한 해설서다.

87)기(杞)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을 찾아내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인 옹구(雍丘)에 봉했다. 춘추 때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88)아(雅) : 『시경(詩經)』의 일부로서 『대아(大雅)』와 『소아(小雅)』가 있다. 『아(雅)』는 주왕실에서 연주되던 음악으로서 『대아(大雅)』는 조회(朝會) 때 『소아(小雅)』는 연회석상에서 연주되던 음악이다.

89)송(頌) : 시경(詩經)의 일부이다.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연주하던 노래이다. 『주송(周頌)』, 『노송(魯頌)』, 『송송(宋頌)』이 있다.

90)설(契) : 상나라를 세운 상족(商族)들의 시조다.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인 제곡(帝嚳)의 아들이며 모친은 간적(簡狄)이다. 일찍이 우(禹)임금이 순임금 밑에서 황하의 치수 공사를 할 때 그를 도와 공을 세워 순임금으로부터 사도(司徒)로 임명되었다. 설은 사도로써 백성들을 교화시키는 임무를 주관했다.

91)후직(后稷) :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시조다. 제곡(帝嚳)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 모친 강원(姜嫄)이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거인의 발자국을 밟게 된 후에 임신을 하게 되어 후직이 태어났다.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갓난아이를 멀리 내다 버리게 했으나 뭇 짐승들이 기를 보호했음으로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다시 거두어 길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기(棄)라 한 것이다. 기가 성장하면서 농사 짓는 일을 좋아하여 씨을 뿌리고 수확하는 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요임금이 후직을 농사(農師)에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순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했다. 주족은 그가 인류최초로 기장과 보리를 경작했다고 생각하여 그의 이름에 직(稷)자를 붙여 불렀다. 후세에 이르러 농사를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 졌다.

92)소(韶) : 순임금 때의 악곡 이름이다.

93)무(武) : 대무(大武)라고도 하며 서주 때의 악곡명.

94)육예(六藝)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경(禮經), 악경(樂經), 춘추경(春秋經)을 통틀어 칭한 말이다.

95)단(彖) : 괘(卦)의 이름과 사(辭)를 괘의 상(象)과 육효(六爻)의 결합의 결과에 따라 해설한 것이다.

96)계(繫) : 계사(繫辭)를 말하며, 괘효(卦爻)에 계속(繫屬)된 말씀(辭), 즉 괘효를 설명하는 글을 말한다. 주역(周易)의 이론은 괘효사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97)상(象) : 상상(上象)과 하상(下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상은 대상(大象)이라고도 하며 64괘의 매 괘마다 사(辭)가 있다. 처음에 하괘의 상과 상괘의 상과의 관계를 말하여 괘의 구성을 설명하고, 다음에는 주로 유학사상에 의하여 도덕이나 정치적인하여소를 설명한다. 하상 즉 소상은 효사(爻辭)를 해설한 것으로 그 해설의 방법은 단전(彖傳)의 방법과 같다.

98)설괘(說卦) : 설괘전(說卦傳)은 점서자(占筮者)를 위한 점서(占書)라고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모든 상(象)을 모아 논 편이다.

99)문언(文言) : 문언이라는 말은 아름답게 장식하는 말이다. 건(乾)과 곤坤) 두 괘(卦)의 괘효사(卦爻辭)를 함축적으로 해석한 것으로서, 건(乾)과 곤(坤)은 역(易)의 근본이며 정수이기 때문에 특히 이 두 괘를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붙여진 해설이다.

100)공자가 저술한 주역의 해설서인 『역전(易傳)』은 모두 10편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 십익(十翼)이라고 부르고 있다. 십익은 상단(上彖), 하단(下彖), 상상(上象), 하상(下象), 상계(上系), 하계(下界), 문언(文言), 서괘(序卦), 설괘(說卦), 잡괘(雜卦)다.

101)문(文)은 학문(學文)을. 행(行)은 실천(實踐)을, 충(忠)은 충서(忠恕)로 남의 형편을 헤아리는 마음을, 신(信)은 신의(信義)를 말한다.

102)무의(毋意)는 억측하지 말 것, 무필(毋必)은 독단하지 말 것, 무고(毋固)는 고집하지 말 것, 무아(毋我)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지 말 것을 뜻한다.

103)괴(怪)는 기이안 것, 력(力)은 폭력, 란(亂)은 어지러운 것, 신(神)은 귀신에 관한 것을 말한다.

104)당(黨) : 500가를 일 당(黨)이라 했다.

105)자뢰(子牢) : 정현(鄭玄)에 따르면 공자의 제자라 하나 중니제자 열전에는 없다.

106)대야(大野) : 노나라 소택지의 이름으로 지금의 산송성 거야현(巨野縣) 북쪽에 있었다.

107)유하혜(柳下惠) : 노나라의 대부로써 전(展) 성에 이름은 획(獲)이다. 식읍(食邑)이 유하(柳下)이고 시호(諡號)가 혜(惠)다. 노나라에서 형옥(刑獄)의 일을 관장하는 사사(士師) 벼슬을 살았다. 노희공(魯僖公) 26년 기원전 634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자 그는 사람을 제나라 진영으로 보내 제나라 군사들을 물러나게 했다. 변설에 능하고 예절에 밝아 이름이 높아 공자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08)소련(少連) : 춘추 때의 현사(賢士), 동이족(東夷族)으로 자세한 신상은 미상이다. 계련(季連)이라고도 한다. 부모가 죽어 상을 당하자 상복을 벗을 때까지 일체의 오락과 교제를 끊고 슬퍼하였다.

109)우중(虞仲) : 중옹(仲雍)이라고도 한다. 주문왕은 고공단도의 손자이다. 고공단보의 장자는 태백(太伯)이고 차자는 우중(虞仲)이다. 태강(太姜)이 셋째 아들 계력(季歷)을 낳고 계력은 태임(太任)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태임도 태강과 마찬가지로 덕이 높은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조짐이 있었다. 태백과 우중은 고공단보가 셋째 아들인 계력을 후사로 세워 그 아들인 창(昌)에게 주족의 종주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은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그들의 습속을 따라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아 계력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하였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태백과 우중의 후손을 찾아 제후에 봉하려고 했으나 태백은 후사가 없었고 우중의 후손들 중 장손인 주장(周章)은 스스로 오나라의 족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 동생인 우중(虞仲)을 찾아내어 지금의 하남성 평륙현(平陸縣) 북쪽에 봉했다.작위는 공작이다. 이 나라가 가도멸괵(假道滅虢)이라는 고사성어에 나오는 우(虞)나라이다. 즉 우중(虞仲)이라는 이름은 태백(太伯)의 동생이기도 하고 그 손자인 주장의 동생이기도 하다.

110)이일(夷逸) : 중국 고대의 은사(隱士)로 세상일에 대해 관심을 끊고, 자포자기한 행위로 화난이나 근심을 피하려고 했다. 공자는 그의 소극적인 생활태도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평했다.

111)원문은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이다. ‘공자는 이미 작록을 구하기 위해 몸을 굽혀 욕됨을 입지 않았으며, 또 역시 세상의 일을 피함으로서 세상사에 등을 돌려 은거하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112)공자의 춘추(春秋)가 시작되는 해는 정확히 노은공(魯隱公) 원년 기원전 722년이다.

113)노애공(魯哀公) 14년은 기원전 481년으로 공자가 죽기 전 2년 전의 일이다.

114)춘추경(春秋經)의 노나라 12군주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재위 순)

은공(隱功), 환공(桓公), 장공(庄公), 민공(閔公), 희공(僖公), 문공(文公), 선공(宣公), 성공(成公), 양공(襄公), 소공(昭公), 정공(定公), 애공(哀公)이다.

115)천토지회(踐土之會) : 당진의 문공이 기원전 632년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 쪽에 있던 천토(踐土)라는 땅에 주천자와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하고 중원의 패권을 확립했다.

116)하양(河陽) : 지금의 하남성 맹현(孟縣) 서남 쪽에 있었던 춘추 때의 지명.

117)원문은 余一人(여일인)이다.

118)향음례(鄕飮禮) : 고대의 제례 또는 향학의 졸업의식을 말한다. 옛날 향학을 3년 만에 졸업할 때 반드시 학생의 덕행과 기예(技藝)를 시험하여 현자(賢者)와 능자(能者)를 구분한 다음 추천하였다. 향대부(鄕大夫)는 주인이 되어 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신 후에야 그들을 추천했는데 이것을 향음주례(鄕飮酒禮)라고 했다.

119)일경(一頃) : 춘추시대 때 일경은 백 무(畝)에 해당하고 일 무(畝)는 55평 즉 180a다. 즉 일 경(頃)은 5,500 평이다.

120)공안국(孔安國) : 전한 때의 학자로, 무제 밑에서 간대부(諫大夫), 태수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노공왕(魯恭王) 유여(劉餘)가 공자의 옛 집의 벽을 허물어 고문상서(古文尙書)을 얻었는데 공안국이 이를 정리하고 주해를 달았다.

121)금상(今上) :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을 말한다.

122)임회(臨淮)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사홍현(泗洪縣)에 있었던 고을 이름.

129)『시경(詩經)·소아(小雅)』『상호(桑扈)』 중 거할(車舝 : 수레의 빗장) 마지막 구다. 거할은 수레의 빗장을 말하며 舝(할)은 轄(할)과 통한다. 다음은 車舝(거할)의 마지막 단원이다.


高山仰止 景行行止(고산앙지 경행행지)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걸어가네.




四牡騑騑 六轡如琴(사모비비 육자여금)

네 필 말 씩씩하게 달리는데 여섯 줄 고삐는 비파 줄과 같구나.




覯爾新昏 以慰我心(구이신혼 이위아심)

그대와 혼인하는 내 마음은 즐겁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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