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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세가(五宗世家)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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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효경황제(孝景皇帝)의 아들은 왕태후 소생인 태자 유철(劉徹)을 제외하고 모두 13명으로 그들의 모는 5명이었고 동모제를 종친으로 여겼다.
율희(栗姬)의 아들을 유영(劉榮), 유덕(劉德) 및 유연오(劉閼於)이다.
정희(程姬)의 아들은 유여(劉餘)、유비(劉非)、유단(劉端)이다.
가부인(賈夫人)의 아들은 유팽조(劉彭祖)、유승(劉勝)이다.
당희(唐姬)의 아들은 유발(劉發)이고
왕부인(王夫人) 아후(兒姁)의 아들은 유월(劉越)、유기(劉寄)、유승(劉乘)、유순(劉舜)이다.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은 효경제 전원2년 기원전 155년, 황자의 신분으로 하간왕에 책봉되었다. 유학을 좋아했음으로 입고 다니는 복장이나 행동거지도 모두 유자를 본받았다. 산동의 여러 유생들이 찾아와 교유를 맺었다. 재위 26년 만인 기원전 130년에 죽었다. 아들 공왕(共王) 유불해(劉不害)가 뒤를 이었다가 재위 4년 만인 기원전 126년에 죽었다. 공왕의 아들 강왕(剛王) 유기(劉基)가 섰다. 강왕은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113년에 죽고 그의 아들 경왕(頃王) 유수(劉授)가 섰다.

임강애왕(臨江哀王) 유연오(劉閼於)는 효경제(孝景帝) 전2년(기원전155년) 황자의 신분으로 임강왕으로 봉해졌다. 재위 3년 만에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나라는 없어지고 군이 되어 조정에 편입되었다.

임강민왕(臨江閔王) 유영(劉榮)은 효경제 전4년(기원전 153년)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4년 후에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원래의 임강왕으로 돌아갔다.
민왕 4년 기원전 147년, 종묘의 담장을 침범하여 궁궐을 증축한 죄로 황제에게 소환되었다. 유영이 강릉의 북문에게 로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길을 떠나기 위해 수레에 올라탄 순간 갑자기 굴대가 부러지고 수레가 망가지고 말았다. 강릉이 부로들이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몰래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 왕은 이번에 가시면 돌아오시지 못하실 것이다」
황도에 당도한 유영은 중위부에 가서 심문을 받았다. 중위 질도(郅都)가 심하게 심문하자 민왕은 놀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남전(藍田)에 장사지냈다. 수만 마리의 제비가 흙을 물어다 봉분 위에 쌓자 백성들이 애처롭게 생각했다. 유영은 한경제의 장남이다. 후사가 없었음으로 그이 봉국은 없어졌고 봉지는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어 남군(南郡)이 되었다.
이상 위의 삼국의 왕은 모두 율희의 소생들이다.

노공왕(魯共王) 유여(劉餘)는 효경제 전2년 기원전 155년 황자의 신분으로 회양왕(淮陽王)에 봉해졌다. 회양왕 2년인 한경제 전3년(기원전 154년), 오초(吳楚)의 반란이 평정된 직후 노왕(魯王)으로 옮겼다. 궁실과 원유(園囿)를 짓고 구마(狗馬)를 기르는 일을 좋아했다. 말년에 음악을 좋아했으나 언사가 좋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은 말을 더듬었다. 재위 26년 만에 죽고 아들 유광(劉光)이 뒤를 이었다. 즉위 초에 유광도 음악과 훌륭한 말과 좋은 수레를 좋아했으나 만년에는 인색해져 오로지 재물이 많지 않을까만 걱정했다.

  강도역왕(江都易王) 유비(劉非)는 효경제 전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여남왕(汝南王)에 봉해졌다.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비는 15세의 청년이었으나 건장한 체구에 용력이 있어 상서를 올려 반란을 일으킨 오나라를 평정하는 싸움에 종군시켜달라고 청했다. 한경제가 유비에게 장군의 인을 내리고 군사를 주어 오나라 정벌전에 참전시켰다. 오나라가 평정되고 2년 후에 유비는 강도왕(江都王)으로 옮겨 옛 오나라의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유비가 세운 군공을 포상하여 유비에게 천자의 정기(旌旗)를 하사했다. 원광(元光) 5년 기원전 133년,흉노가 대거 한나라 땅을 침범하자 유비는 상서를 올려 흉노를 격퇴하기 위해 출전하기를 청했으나 금상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유비는 무예와 힘쓰기를 좋아했다. 또한 궁실을 축조하고 가꾸는 일을 즐겨했으며 사방의 호걸을 불러들여 오만하고 사치가 심했다.
유비는 제후왕으로 선지 26년 만인 원삭(元朔) 원년, 기원전 128년에 죽고 아들 유건(劉建)이 뒤를 이었다. 유건은 강도왕으로 선지 7년 만인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에 자살했다. 회남(淮南)과 형산(衡山) 두 나라가 모반할 때 유건은 소식을 듣고 이미 알고 있었다. 유건은 일단 회남왕이 반란을 일으키면 회남과 인접하고 있는 자신의 봉국이 병탄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병기를 만들고 황제가 부왕에게 하사한 장군의 인수를 항상 패용하고 궁 밖으로 나갈 때는 어가에 천자의 정기를 달고 다녔다. 유건은 부왕 생전 시에도 부왕이 총애하던 미인 요희(淖姬)를 좋아했다. 이윽고 부왕이 죽어 미처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밤에 사람을 보내 빈소로 불러 관계를 가졌다. 이윽고 회남왕이 음모가 발각되자 조정은 일당들을 적발하여 죄를 추궁했다. 이에 유건도 연좌되었다. 이를 두려워한 유건은 사람을 시켜 많은 재물로 조사하는 관원들을 매수하여 사건을 덮었다. 또한 무당과 귀신을 믿었던 그는 사람을 시켜 기도와 굿을 벌리면서 황당한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유건은 그의 자매들 모두와 통간했다. 유건에 대한 추문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의 공경대신들은 그를 잡아다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황제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대신을 보내 유건을 심문하게 했다. 유건이 자신의 죄를 인정한 후에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봉국은 없어지고 조정은 그 땅에 광릉군(廣陵郡)을 설치했다.

  교서왕(膠西于王) 유단(劉端)은 효경제 전3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이 반란이 평정되자 황자의 신분으로 교서왕에 책봉되었다. 위인이 잔인하고 포악했다. 또한 발기부전의 병이 있어 여인과 한 번 관계를 갖게 되면 몇 달 동안이나 병으로 앓아 누었다. 그래서 어린 동자를 총애하여 근시로 삼았다. 얼마 후에 근시가 후궁들과 어울려 난잡하게 통정했다. 유단이 알고 근시를 잡아서 죽이고 다시 근시와 사통한 후궁들 과 그녀들의 자식까지 모조리 살해했다. 유단이 황제의 법령을 여러 번에 걸쳐 범하자 조정의 공경대신들의 수차에 걸쳐 그를 잡아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천자가 형제의 정리 때문에 차마 어쩌지 못하고 망설이자 유단의 포악한 행위는 더욱 심해졌다. 조정의 해당 관리들이 그의 봉국을 삭탈해야 한다고 두 번이나 걸쳐 주청하자 그의 봉국을 절반을 빼앗았다. 그러나 유단은 마음 속으로 조정의 조치에 승복하지 하지 않고 오히려 조정을 원망하면서 전혀 뉘우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봉국 일을 팽개쳤다. 나라의 창고가 허물어지고 비가 새어 거만금의 재물이 훼손 되었으나 그는 끝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관리들에게 명하여 부세를 걷지 못하게 하고 경호원을 모두 없애버리고 궁문을 폐쇄한 후에 쪽문을 통해서만 출입했다. 여러 번 변성명해 가면서 포의로 다른 지방과 봉국을 나돌아 다녔다.
조정에서 파견한 재상이나 이천석의 고급관리들 중 한나라 법에 의해 일을 처리한 자들이 있게 되면 유단은 그들의 죄를 찾아내어 조정에 고해 처벌하게 했다. 죄가 없으면 거짓으로 조작하여 사약을 내려 살해했다.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기만하는 유단의 수법은 무궁무진했다. 성격이 워낙 고집불통이어서 남의 간언을 전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지모가 뛰어나 자신의 저지르는 간악한 짓을 잘 감추었다. 재상이나 이천석 이상의 관원들 중 유단의 명을 쫓아 정무를 처리한 자들은 한나라 조정의 법에 저촉되어 처벌되었다. 교서국은 비록 작은 나라였으나 이천석의 고관들 중 살해된 자가 매우 많았다.
교서왕이 선지 47년만인 기원전 108년에 죽었으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나라가 없어졌다. 한나라 조정은 그 땅에 교서군(膠西郡)을 설치했다.
이상 세 나라의 왕들은 모두 정희(程姬)의 아들들이다.

조왕(趙王) 유팽조(劉彭祖)는 효경제 전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廣川王)이 되었다. 조왕 유수(劉遂)의 반란이 평정된 후에도 유팽조는 여전히 광천왕으로 있다가 4년 후인 기원전 155년, 조왕으로 옮겼다. 조왕 15년 기원전 141년, 효경제가 붕어했다. 유팽조는 위인이 간특하고 아첨에 능했다. 겉으로는 매우 공손했지만 마음은 각박하고 음험했다. 옥사를 다루는 일을 좋아하여 법률을 농단하여 남을 중상모략 하는데 능했다. 총애하는 희첩과 자녀들이 많았다. 조정에서 임명하는 재상과 이천석의 관리들의 한나라 법에 받들어 조나라를 다스리면 조나라 왕가에 해를 끼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재상이나 이천석의 관리들이 조나라에 당도할 때마다 유팽조는 검은 색의 포의를 입고 스스로 마중 나가 맞아들이고 직접 관사를 청소했다. 그는 일부러 애매한 일들을 제기해 그들의 답변을 유인했다. 그래서 이천석 관리들이 조정의 금기를 어기는 실언을 하면 재빨리 기록해 두었다. 후에 이천석 관리들이 조정의 법에 따라 조정의 정무를 보려고 하면 그는 기록해 둔 문서로 그를 겁박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그 기록을 이용해서 조정에 상소하여 고발하면서 해당 관원이 사욕을 위해 간사한 방법을 동원했다는 죄명을 씌어 무고했다. 팽조가 제후왕으로 책봉 된 이래 50여 년 동안 재상이나 이천석 관리들은 아무도 임기인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늘 죄를 범했다는 혐의를 받고 직책을 잃었다. 크게는 사형에 처해지고, 작게는 형을 받아 옥살이를 했다. 때문에 이천석 관리들은 감히 조나라의 정무를 법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조왕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조왕은 사람을 관할의 현으로 보내 상업에 종사시켜 독점으로 이익을 취했다. 그가 장사로 챙긴 수입은 세금으로 거둬들인 것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 조씨 왕실은 막대한 돈을 소유할 수 있었고, 그 돈은 조왕이 총애하는 희빈이나 여러 아들에게 하사해서 결국은 그 많은 돈을 탕진했다. 유팽조는 옛날 강도역왕 유비의 애첩이었다가 아들 유건(劉建)과 정을 통한 요희(淖姬) 첩으로 삼아 총애했다.
유팽조는 궁실을 크게 새로 짓고 치장하는 일이나 귀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봉국의 관리들이 하는 일을 직접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조정에 나라의 도적을 잡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상서했다. 수시로 밤이 되면 군사들을 데리고 한단성의 저자거리로 나가 순라를 돌곤 했다. 여타 군국의 사자나 과객들은 유팽조의 행패를 두려워하여 막시 한단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유팽조의 태자 유단(劉丹)은 이복누이들이나 동복의 누이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유단과 틈이 벌어진 강충(江充)이란 자가 유단의 음행을 조정에 고발했다. 유단은 그 일로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음으로 조나라는 태자를 다시 세워야 했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은 효경제 전3년 기원전 154년, 황자의 신분으로 중산왕에 봉해졌다. 중산왕 재위 14년인 기원전 141년, 효경제가 붕어했다. 유승은 위인이 술과 여인을 좋아해서 아들만 120여 명을 두었다. 그는 항상 형인 조왕 유팽조를 비난하면서 말했다.
「제후왕이나 되는 고귀한 신분의 형님이 하급관리나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후왕이란 마땅히 음악을 듣고 성색을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왕 유팽조도 역시 응대하며 유승을 비난했다.
「날마다 천자를 도와 백성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음락만을 즐기고 있는 네가 어찌 번신(藩臣)이라고 할 수 있느냐?」
유승이 제후왕으로 선지 42년 만에 죽자 아들 애왕(哀王) 유창(劉昌)이 뒤를 이었으나 1년 만에 죽었다. 유창의 아들 유곤치(劉昆侈)가 중산왕 자리에 올랐다.
이상 두 왕은 모두 가부인(賈夫人)의 아들 들이다.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의 모는 당희(唐姬)로 죽은 정희(程姬) 시녀였다. 경제가 정희를 불렀으나 그때 마침 정희는 월경 중이었기 때문에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녀 당아(唐兒)를 분장시켜 밤을 도와 침실로 들여보냈다. 그때 주상은 이미 술에 취해 당아를 정희인 줄 알지 못하고 일을 치렀다. 당아는 곧 임신했다. 곧이어 당아가 정희를 대신해서 시침을 들었다는 사실도 발각되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황상의 명으로 이름을 발(發)이라 지었다.
효경제 전2년 기원전 155년, 유발은 황자의 신분으로 장사왕에 봉해졌다. 그의 모 당희는 천비출신으로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발은 저습하고 가난한 땅의 장사국을 봉국으로 받은 것이다. 유발은 장사왕으로 선지 27만인 기원전 128년에 죽고 아들 장사강왕(長沙康王) 유용(劉庸)이 뒤를 이었다. 강왕이 재위 28년인 기원전 101년에 죽자 아들 유부구(劉鮒鮈)가 장사왕이 되었다.
위의 장사정왕 유발은 당희(唐姬)의 아들이다.

 광천혜왕(廣川惠王) 유월(劉越)은 효경제 중2년 기원전 148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광천왕(廣川王)에 봉해졌다가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136년에 죽었다. 아들 유제(劉齊)가 섰다. 광천왕 유제에게 총애했던 상거(桑距)라는 신하가 있었다. 상거가 죄를 짓자 유제가 주살하려고 했다. 상거가 도망치자 광천왕은 그의 종족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왕에게 원한을 품은 상거가 조정에 서장을 올려 유제가 동복누이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고발했다. 이후로 유제도 상서를 올려 조정의 공경대신들과 황제의 총신 소충(所忠) 등을 고발했다.

※ 광천왕 유제는 재위 45년만인 한무제 정화(征和) 원년인 기원전 92년에 죽었다. 유제의 후기가 이곳에서 끊긴 것은 아마도 원문이 없어졌거나 아니면 사마천이 미처 보충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고 여겨진다.
《한서(漢書)·경십삼왕전(景十三王傳)》에 따르면, “여러 번에 걸쳐 한나라 조정에 공경대부와 소충(所忠) 등을 고발했다.” 문장 뒤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또 중위(中尉) 채팽조(蔡彭祖)가 자신의 아들 유명(劉明)을 체포하고는 ‘내가 네 집안의 종자를 몰살시키고 말겠다.’ 라고 협박했다고 고발했다. 해당 관리가 사건을 조사했으나 광천왕의 고발이 사실과 달랐음으로 유제를 무고죄로 탄핵했다. 유제의 죄는 대단히 큰 불경죄에 해당했기 때문에 체포하여 치죄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상주했다. 유제가 두려워하여 서장을 올려 광천국의 용사들을 인솔하여 흉노를 토벌하는데 종군하겠다고 청했다. 황제가 허락했으나 미처 출병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조정의 해당 관리가 광천국을 폐해야 한다고 주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교동강왕(膠東康王) 유기(劉寄)는 광천왕 유월과 같은 해인 효경제 중2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교동왕에 봉해졌다. 재위 28년인 기원전 121년에 죽었다. 회남왕이 모반 할 때 소식을 들은 유기는 아무도 몰래 누거를 제작하고 철로 화살촉을 만들어 회남왕과 함께 거사를 하기 위해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회남앙의 반란을 진압한 조정이 관리들을 파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의 전말이 드러나게 되었다. 유기는 왕태후의 동생 왕아후(王兒姁)의 소생으로 금상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 이 일로 인해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던 유기는 병이 나서 결국 죽고 말았다. 후계자도 감히 정해 놓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황상에게도 전해졌다. 유기에게는 장남 유현(劉賢)이 있었으나 사랑하지 않았다. 유발은 작은 아들 유경(劉慶)의 모를 사랑했음으로 평소에 그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장자를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는 일을 법도에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회남왕의 모반사건에도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뜻을 실행할 수 없었다. 황제가 듣고 유기를 불쌍히 여겨 유현을 교동왕에 봉해 유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유경은 옛 형산국의 땅인 육안(六安)의 왕에 봉했다. 교동왕 유현은 선지 14년 만인 기원전 107년에 죽었다. 시호는 애왕(哀王)이다.
육안왕 유경은 원수(元狩) 2년인 기원전 121년 교동강왕 유기의 아들 신분으로 육안왕에 봉해졌다.

  청하애왕(清河哀王) 유승(劉乘)은 효경제 중3년 기원전 147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청하왕에 봉해졌다. 재위 12년 만인 기원전 136년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봉국은 폐지되어 한나라 군현으로 편입되어 청하군(淸河郡)이 되었다.

 상산헌왕(常山憲王) 유순(劉舜)은 효경제 중5년 기원전 145년에 황자의 신분으로 상산왕에 봉해졌다. 효경제의 막내아들로 가장 사랑했으나 교만하고 게을렀으며 매우 음란했다, 여러 번 금법을 범했으나 황제는 언제나 관대하게 그를 용서했다. 왕이 된지 32년 만인 기원전 114년에 죽었다. 태자 유발(劉勃)이 뒤를 상산왕이 되었다.
 옛날 상산헌왕이 사랑하지 않는 희첩이 낳은 유탈(劉梲)이라는 맏아들이 있었다. 유탈의 모가 총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히 유탈도 왕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후에 왕후 수(脩)가 아들 발(勃)을 낳자 태자로 책봉했다. 상산헌왕은 수많은 희첩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 헌왕이 총애하는 첩이 아들 유평(劉平)과 유상(劉商)을 낳자 왕후 수는 왕과 자연히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이윽고 헌왕이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자 여러 희첩들이 곁에서 수발을 들었다. 질투심에 분노한 왕후 수는 항상 곁에서 병간호를 하지 않고 곧바로 자기 처소로 돌아오곤 했다. 의원이 탕약을 바칠 때 태자 유발은 먼저 약을 마셔 시험하지도 않고 곁에서 머물러 시중도 들지 않았다. 이윽고 왕이 죽은 다음에야 왕후와 태자가 당도했다. 헌왕은 평소에 장남 유탈을 아들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죽을 때도 그에게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았다. 시종관이 태자와 왕후에게 여러 공자들과 장남 유탈에게 재물들을 나누어주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태자와 왕후는 듣지 않았다. 태자가 상산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유탈을 거두지 않았다. 유탈은 왕후와 유발을 심히 원망했다. 이윽고 헌왕의 장례를 살피기 위해 온 한나라 조정의 사자가 당도했다. 유탈이 사자을 찾아가 헌왕이 병석에 있을 때 왕후와 왕이 시중을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헌왕이 죽은 지 겨우 6일 만에 빈소를 뛰쳐나와 아무도 몰래 부녀자들과 음행을 저질렀으며, 음주가무에, 내기 박국을 두고, 축(筑)을 타면서 즐겼다고 고변했다. 또한 부녀자들과 함께 수레를 타고 성곽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성안의 길을 지나 감옥에 들려 죄수들을 살펴보았다고 했다. 천자가 대행(大行) 장건(張騫)을 보내 왕후와 새로 왕위에 오른 유발을 심문하게 했다. 장건이 유발과 함께 놀아난 간당들을 붙잡아 증좌를 캐내려고 하자 유발이 그들을 모두 숨겨버렸다. 조정의 관리들이 그들을 찾아 체포하자 다급하게 된 유발이 부하들을 시켜 관리들을 구타하고 자기 멋대로 혐의가 있는 자들을 석방해 버렸다. 이에 해당 관원들은 왕후 수와 유발을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황제는 왕후가 평소에 품행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유탈의 고변을 불러오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유발은 어릴 때부터 좋은 사부를 두어 훈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황제는 차마 왕후와 유발 모자를 죽이지 못했다. 해당 관리가 왕후 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유발은 가속들과 함께 방릉(房陵 : 호북성 방현(房縣)으로 옛날부터 죄인들의 귀양지로 유명했다.)으로 귀양 보내야 한다고 상주했다. 황제가 허락했다.
 유발이 상산왕이 된지 몇 달 만에 쫓겨났고, 봉국은 폐지되어 조정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한 달여 후에 천자는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황족을 위해 해당 관리에게 조칙을 내렸다.
「상산헌왕은 일찍이 요절했고 왕후와 처첩들이 서로 불화하여 적서(嫡庶)가 서로 고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불의한 일로 함정에 빠져 봉국은 없어졌으니 짐은 실로 이를 애처롭게 여기고 있다. 상산헌왕 아들 유평(劉平)에게 삼만 호의 진정왕(眞定王)에 봉하고, 유상(劉商)도 삼만 호의 사수왕(泗水王)에 봉하라!」
 진정왕(真定王) 유평은 원정 4년 기원전 113년, 상산헌왕의 왕자 신분으로 진정왕이 되었다.
 사수사왕(泗水思王) 유상 역시 원정 4년 기원전 113년, 상산헌왕의 왕자 신분으로 사수왕이 되었다. 유상은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104년에 죽고 아들 애왕(哀王) 유안세(劉安世)가 뒤를 이었다. 애왕은 재위 11년 만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사수왕의 후사가 끊어진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황제가 유안세의 동생 유하(劉賀)에게 사수왕의 뒤를 잇게 했다.
 위의 네 나라 왕은 모우 왕부인 아후(兒姁)의 소생이다. 아후는 금상황제의 태후인 왕태후의 동생으로 효경제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낳아 모두 후왕이 되었다가, 그 후손들 중 육안왕과 사수왕 등 두 제후왕에 더해졌다. 아후의 자손들 중 육안왕은 지금도 그 직을 지니고 있다.

태사공이 말한다.
「고조가 재위에 있을 때 제후들은 봉지 내의 부세를 모두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었고 자기들의 뜻대로 내사 이하의 관원들은 임명할 수 있었다. 한나라 조정은 다만 제후국들의 승상만을 파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승상은 황금의 만든 인장을 소지했다. 제후왕이 스스로 어사, 정위정(廷尉正), 박사(博士)들을 직접 임명했음으로 그 위세가 천자와 거의 같았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 오종(五宗)이 제후왕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한나라 조정은 이천석 이상의 관리들을 파견했고 승상의 직을 버리고 상(相)을 새로 설치하여 은으로 만든 은장을 패용하게 했다. 제후들이 부세를 걷어 독식했던 권리를 빼앗았다. 후의 제후왕들 중에 가난한 자는 말 대신 소가 끄는 수레를 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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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2-08-04
[일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26.진평(陳平)

陳丞相平世家26 승상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1) 호유(戶牖)2) 사람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했다. 집안에 전답
운영자 12-08-04
[일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27

세가27. 주발(周勃)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패인(沛人)이다. 그의 선조들은 원래 권(卷)1)에서 살다가 패로 이주했다. 주발은 누에바구니를 엮어
운영자 12-08-04
[일반] 유후세가(留侯世家) 25.장량(張良)

留侯張良世家25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선조는 한(韓)나라 귀족이다. 그 조부 한개지(韓開地)는 한소후(韓昭侯)1)와 선혜왕(宣惠王)2)
운영자 12-08-04
[일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4.조참(曹參)

세가24. 조참(曹參)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沛) 출신으로 진나라 때 패현의 옥리였다. 그때 소하(蕭何)는 패현 관아의 아전들 중 선임
운영자 12-08-04
[일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3.소하(蕭何)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23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이다. 현내에 그보다 법률에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 현령은 그를
운영자 12-08-04
[일반]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2. 유비(劉肥)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는 고조가 경혼하기 전에 정
운영자 12-08-04
[일반] 형연세가(荊燕世家) 21

세가21. 형연(荊燕) 형왕 유고(劉賈)는 고조와 동성인 유씨다. 그가 언제 처음으로 기의군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왕 원년 기
운영자 12-08-04
[일반]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0.유교(劉交)

세가 20.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한고조(漢高祖)의 친동생으로 자는 유(游)이다. 한고조는 4형제였다. 맏형 유
운영자 12-08-04
[일반] 외척세가(外戚世家) 19

세가19 외척(外戚)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제왕들과 그 제왕들이 이룩한 법도를 계승한 군주들은 내면의 훌륭한 덕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영자 12-08-04
[일반]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이 칭왕(稱王)하고 6달만에 죽으면서 후사가 없어 그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나 사마천이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운영자 12-08-04
[일반] 공자세가(孔子世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①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운영자 09-10-30
[일반]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6. 전제(田齊)

전제세가(田齊世家)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진타(陳他)의 아들이다. 완이 태어날 때에 주나라 태사가 마침 진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운영자 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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