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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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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27. 주발(周勃)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패인(沛人)이다. 그의 선조들은 원래 권(卷)1)에서 살다가 패로 이주했다. 주발은 누에바구니를 엮어 판돈으로 살면서 항상 다른 사람이 상가에 가서 피리를 불어 주었다. 후에 힘이 쎈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재관(材官)2) 부대의 궁노수가 되었다.

고조가 처음 패에서 기의했을 때 주발은 중연(中涓)3)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호릉(胡陵)을 공격하고 방여(方與)를 함락시켰다. 방여가 다시 반기를 들자 그들과 싸워 물리쳤다. 풍(豐)을 공격하고 진군을 탕(碭)의 동쪽에서 공격했다. 돌아와 유(留)와 소(蕭)에 주둔하다가 다시 탕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하읍(下邑)을 함락시킬 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그 공으로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몽(蒙)、우(虞)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고조가 장한(章邯)의 전차와 기병 부대를 공격할 때 그는 군사를 이끌고 후진에 있었다. 위나라 땅을 평정한 후에 다시 원척(爰戚)과 동민(東緡)을 공격하고 이윽고 율(栗)에 이르러 함락시켰다. 설상(齧桑)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또 동아성 밑에서 진군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후퇴하는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복양(濮陽)에 이르렀으며 견성(甄城)을 함락시켰다. 도관(都關)과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며 완구(宛朐)를 기습하여 함락시키고 선보(單父)의 현령을 사로잡았다. 임제(臨濟)를 야습해서 점령하고 장현(張縣)을 공격했으며 계속 선봉에 서서 권(卷)에 이르러 적군을 무찔렀다. 삼천군 태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옹구(雍丘)의 성 밑에서 무찔렀다. 동진하여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 성 밑에 먼저 당도한 그의 군사들이 다른 부대원보다 많았다. 후에 장한이 항량을 공격하여 살해하자 패공은 항우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회군하여 탕(碭)에 이르렀다. 그 기간은 모두1년2개월이 걸렸다. 초회왕(楚懷王)은 패공을 안무후(安武侯)에 봉하고 탕군(碭郡)의 수장으로 임명했다. 패공은 주발을 호분(虎賁)4)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호분의 장수로 패공의 군대에 종군하여 위(魏)나라 땅을 평정했다. 동군의 군위(郡尉)를 성무(城武)에서 무찔렀다. 왕리(王離)가 이끌던 진나라 군사를 공격하여 격파했다. 장사(長社)를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성벽에 올랐다. 영양(潁陽)、구지(緱氏)를 공격하여 하수를 건너는 나루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조분(趙賁)의 군사를 공격하여 시향(尸鄕)의 북쪽에서 격파했다. 남쪽으로 진군하여 남양(南陽)의 수장 의(齮)를 공격하여 무관(武關)과 요관(嶢關)을 함락시켰다. 진나라 군사를 남전(藍田)에서 무찌르고 함양(咸陽)에 입성하여 진나라를 멸했다.

항우가 관중으로 들어와 패공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한왕은 주발에게 위무후(威武侯)라는 작위를 내렸다. 한왕은 한중(漢中)으로 들어간 주발을 장군으로 삼았다. 관중으로 다시 돌아와 삼진을 평정한 한왕은 주발에게 회덕(懷德)을 식읍으로 내렸다. 괴리(槐里)와 호치(好畤)를 공격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이어서 함양으로 진공한 한군에 종군하여 조분(趙賁)과 내사(內史) 보(保)를 공격할 때도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북쪽으로 진공하여 칠(漆)을 공략하고 장평(章平)과 요앙(姚卬)의 군사를 무찔렀다. 진군 방향을 서쪽으로 바꾸어 견(汧)을 평정했다.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여 미성(郿城)과 빈양(頻陽)을 함락시키고 폐구(廢丘)의 장한을 포위하고 서현(西縣)의 현승을 무찔렀다. 상규(上邽)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동쪽으로 나아가 요관(嶢關)을 지켰다. 다시 진군하여 항적을 공격했다. 곡역(曲逆)을 공격할 때는 그 공이 가장 컸다. 다시 돌아와 오창(敖倉)을 지키다가 항적의 뒤를 추격했다. 항적이 죽자 동쪽으로 진군하여 초나라 땅의 사수군(泗水郡)과 동해군(東海郡)을 평정하여 관하의22개 현의 항복을 받아냈다. 서쪽으로 돌아가 낙양(雒陽)、역양(櫟陽)을 지켰다. 고조는 종리현(鐘離縣)을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에게 공동으로 식읍으로 하사했다. 장군이 되어 고조의 군대에 종군하여 연왕 장도(臧荼)의 반란군을 역수(易水)의 하류에서 무찔렀다. 치도(馳道)에서 반군을 공격할 때 휘하의 장졸들 공이 가장 컸다. 열후(列侯)에 책봉되어 부절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했다. 식읍은 모두8,180호이고 강후(絳侯)라는 칭호를 받았다.

장군의 신분으로 대(代)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을 토벌하기 위해 출격한 고제의 군대에 종군하여 곽인현(霍人縣)을 함락시켰다. 선봉을 맡아 무천(武泉)에서 흉노의 기병을 공격하여 무천의 북쪽에서 격파했다. 진공 방향을 바꾸어 한신의 군대를 동제(銅鞮)에서 깨뜨렸다. 돌아와서 태원(太原) 관할의6개 성의 항복을 받아내고 한신이 이끌던 흉노의 기병을 진양성 밑에서 공격하여 무찌르고 진양성을 함락시켰다. 한신의 뒤를 북쪽으로80리까지 추격했다. 다시 돌아와 누번(樓煩)의 세 성을 공격하고 흉노의 기병을 평성(平城) 밑에서 공격할 때 휘하의 장졸들 공이 가장 컸다. 주발은 태위가 되었다.

진희(陳豨)의 반군을 공격하고 마읍(馬邑)을 도륙했다. 휘하의 장졸들은 진희의 장수 승마치(乘馬絺)를 베었다. 한신과 진희 및 조리(趙利)의 군대를 누번에서 공격하여 무찔렀다. 진희의 장수 송최(宋最)와 안문(雁門)의 수장 환(圂)을 사로잡았다. 진군 방향을 바꾸어 운중군의 태수 속(遬)과 승상 기사(箕肆)、장군 훈(勳)을 포로로 잡았다. 안문군17개 현과 운중군12개 현을 평정했다. 진희의 군사를 영구(靈丘)에서 다시 공격하고 진희의 승상 정종(程縱)과 장군 진무(陳武)、도위(都尉) 고사(高肆)를 생포했다. 대군(代郡) 관할의9개 현을 평정했다. 연왕 노관(盧綰)이 반하자 주발은 번쾌를 대신한 상국의 신분으로 계성(薊城)을 함락시키고 노관의 대장 저(抵)、승상 언(偃)、군수 경(陘)、태위(太尉) 약(弱)、어사대부 시(施)를 포로로 잡고 혼도(渾都)롤 도륙했다. 상란(上蘭)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했고 다시 노관의 군대를 저양(沮陽)에서 무찔렀다. 계속해서 노관의 군대를 장성까지 추격하여 상곡군(上谷郡) 12개 현과 우북평(右北平) 16개 현,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29개 현, 어양군(漁陽郡) 22개 현을 평정했다. 고제를 따라 종군하여 세운 공로는 상국1명, 승상2명, 장군과 이천석의 고관3명을 포로로 잡고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2개의 군대를 격파하고3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5개의 군에 속하는79개의 현을 평정하면서 승상과 대장 각1명을 포로로 잡았다.

주발은 사람이 원래 강인하며 돈후했다. 그래서 고제는 주발에게 큰 일을 맡길만하다고 생각했다. 주발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제생들과 유세객들을 불러서 이야기할 때마다 항상 동쪽을 향해 앉아 그들을 책망하면서 말하곤 했다.

「빨리 말하지 않고 무엇하시오!」

그의 질박하고 꾸밈이 없는 행동거지는 이와 같았다.

주발이 연나라를 평정하고 귀환했을 때는 고조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그래서 열후의 신분으로 효혜제를 받들었다. 효혜제6년 기원전189년, 한나라 조정은 태위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주발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효혜제10년 기원전185년, 고후가 죽었을 때 여록(呂祿)은 조왕의 신분으로 한나라 상장군이었고 여산(呂產)은 여왕(呂王)의 신분으로 한나라 상국이었다. 두 사람은 한나라의 정권을 잡고 유씨들을 해치려고 했다. 그때 주발은 태위의 직에 있었지만 군문에 들어가 병력을 지휘할 수 없었고 진평은 승상이었지만 또한 일을 뜻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평과 주발이 모의하여 마침내는 제려(諸呂)들을 주살하고 효문황제를 세웠다. 그 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여후본기와 효문본기에 나와 있다.

문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주발은 우승상에 임명하고 황금5천 금을 상금으로 주고 식읍1만 호를 내렸다. 그리고 한 달이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주발에게 말했다.

「제려들을 주살하고 대왕을 천자로 추대한 장군의 위엄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장군께서는 많은 상금과 식읍을 하사 받아 신분이 더할 수 없이 높아지고 황제의 총애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오래 간다면 화가 몸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주발은 두려운 생각이 들고 또한 스스로 위험하다고 느껴 승상의 인장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황제가 허락했다. 그리고1년여 후 승상 진평이 죽자 황제는 다시 주발을 불러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리고10여 개 월 후 황제가 주발에게 말했다.

「옛날 내가 열후들에게 조칙을 내려 봉국에 부임하라고 했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부임하고 어떤 사람은 부임하지 않고 있소. 승상이 내 말을 중하게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이시오.」

그래서 주발은 승상의 자리에 면직되어 봉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1년 여 후 하동군의 태수와 군위가 관하의 현을 순시하다가 강현(絳縣)에 이를 때마다 강후 주발은 스스로 주살되지나 않을까 항상 두려워하여 항상 자신은 갑옷을 입고 병장기로 무장시킨 가병들의 수행시켜 그들을 만났다. 후에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주발이 모반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고변했다. 그래서 황제는 주발을 정위에게 넘겨 조사하게 했다. 정위는 그 사건을 장안으로 넘겨 그를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했다.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매우 두려워한 주발은 옥리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옥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주발을 강박했다. 그래서 주발은 천금을 옥리에게 주자 옥리가 목간의 뒤에 글을 써서 보여주었다.

「공주로 하여금 증인을 서게 하시오.」

공주는 효문제의 딸로써 주발의 장남 주승지(周勝之)의 아내였다. 그래서 옥리는 주발에게 증인으로 공주를 세우라고 깨우친 것이다. 주발은 평소에 황제에게 받았던 봉록과 하사금을 모두 들어 박태후의 동생 박소(薄昭)에게 바쳤다. 이윽고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박소는 박태후를 찾아가 주발을 위해 변명했다. 박태후 역시 주발이 반역을 꾸미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아침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들린 문제에게 박태후는 두건을 던지며 말했다.

「강후는 제려의 란 때 황제의 옥새를 보관했고 북군의 군사들을 장악했음에도 모반을 꾀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 개의 작은 현에 의지하여 반란을 꾀했겠소?」

강후가 옥리에게 답한 내용을 알고 있었던 문제는 태후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옥리의 심문이 비로소 끝났으니 곧바로 석방시키겠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옥리에게 보내 강후를 사면하도록 했다. 옥에서 가까스로 풀려난 강후가 말했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던 장군의 신분이었던 나는 옥리 한 사람의 권세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감옥에서 석방되어 다시 봉국으로 돌아간 주발은 효문제11년 기원전169년에 죽었다. 시호는 무후(武侯)다 아들 주승지가 후의 작위를 이었다. 그리고6년 후에 주승지는 사이가 벌어진 공주와 별거하고 다시 살인사건에 연좌되어 후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1년 후 문제는 강후 주발의 아들들 중 현능하다고 생각되는 하내태수(河內太守) 주아부(周亞夫)를 뽑아 조후(條侯)에 봉하고 강후의 후사를 잇도록 했다.

주아부(周亞夫)가 아직 후에 봉해지지 않고 하내태수로 있을 때 허부(許負)라는 사람이 그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태수께서는3년 후에는 후로 봉해질 것입니다. 후로 봉해지고8년 후에는 장상(將相)이 되어 나라의 권력을 손안에 쥐게 되어 고귀하게 중한 신분이 되어 남의 신하된 자로써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 후9년 후에는 태수께서는 굶어 죽을 상입니다.」

주아부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의 형님이 이미 부친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다시 형이 돌아가시면 그 아들이 대신할 것인데 이 주아부가 어떻게 후의 작위를 잇는단 말이오. 그리고 나의 신분이 당신의 말대로 귀하기가 그지없게 된다면 어찌 또한 굶어죽게 된단 말이오? 자세하게 알려주시오!」

허부가 주아부의 입을 가르키면서 말했다.

「공의 얼굴에 나있는 선이 수직으로 입 가장자리까지 뻗어있습니다. 이 상은 아사할 운명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3년이 되자 과연 그 형 주승지가 죄를 얻어 후의 작위를 잃게 되자 효문제가 신하들에게 강후의 아들 중에서 현능한 자를 천거하라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주아부를 추천했음으로 주아부는 조후(條侯)에 봉해져 강후의 후사를 잇게 되었다.

문제 후원6년 기원전158년, 흉노가 대거 한나라 변경을 침략해왔다. 그래서 종정 유례(劉禮)를 장군으로 삼아 패상(霸上)에 주둔하게 하고 축자후(祝茲侯) 서려(徐厲)를 장군으로 삼아 극문(棘門)에 주둔시켰다. 또 다시 하내태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세류(細柳) 주둔시켜 흉노의 침공에 대비하게 했다. 황제가 군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패상과 극문에 이르렀을 때 곧바로 수레를 달려 군영 안으로 들어가자 장군들과 기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와 영접했다. 그리고 다시 황제가 수레를 달려 세류의 군영에 당도했을 때는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익고 예리한 병장기를 들고 화살을 당겨 겨누었기 때문에 천자의 수레를 인도하던 선발대는 군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천자의 선발대가 소리쳐 말했다.

「천자께서 곧 도착하십니다.」

군문을 지키던 도위가 말했다.

「장군께서 군령을 내리시기를『군중에는 장군의 명령만 있을 뿐이고 천자의 조칙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선발대는 군문에 들어갈 수 없었고 그 사이에 황제가 당도했으나 황제 역시 군영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장군에게 조명을 전하게 했다.

「내가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군영에 들어가려고 함이다.」 주아부가 명령을 전하여 군영의 문을 열게 했다. 군문을 지키던 군사들과 군리들이 황제를 시종했던 기병들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명을 내리시기를 군중에서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없다고 하셧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고삐를 잡고 서서히 모는 수레를 타고 군영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천자의 일행이 장군 막사에 이르자 주아부가 병장기를 잡은 채로 문제에게 읍을 올리고 말했다.

「갑옷을 압고 무장한 군사들은 큰 절을 올릴 수 없습니다. 청컨대 군례로 인사를 올리게 해 주십시오.」

주아부의 그런 행동에 대해 매우 감동한 천자는 얼굴색을 엄숙히 한 후에 수레를 타고 횡목에 의지하여 식례(軾禮)를 행한 후에 사람을 보내 주아부의 행동을 칭송했다.

「황제는 장군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오.」

이윽고 군례의 의식을 끝낸 황제는 군영을 나갔다. 황제가 군문을 나서자 여러 신하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그런 신하들에게 문제가 말했다.

「아아! 참으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그 전에 보았던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마치 어린아이 장난과 같아 그 장수들을 기습하여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 주아부의 군영은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도 천자는 오랫동안 주아부의 행동을 칭송했다. 그리고 한 달쯤 후에 세 군영을 모두 파하고 주아부는 중위(中尉)가 되었다.

죽음에 이르게 된 효문제가 태자에게 유언했다.

「나라에 급한 일이 생길 경우 주아부는 진실로 군사의 일을 맡길만 한 장군이다.」

문제가 죽자 효경제는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했다.

효경제3년 기원전154년, 중위에서 태위로 직위가 오른 주아부는 동쪽으로 출동하여 오초의 반군을 공격했다. 그는 출전하기 전에 황제게게 청했다.

「초나라 군사들은 사납고 날렵하여 그들와 예봉을 겨루기 어렵습니다. 원컨대 오초의 반군을 양나라에게 맡기고 그들의 양도를 끊어버린다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황제가 허락했다.

 태위 주아부가 군사를 이끌고 형양에 당도했을 때 오나라는 바야흐로 양나라에 대해 맹공을 퍼붓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된 양왕이 주아부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주아부는 군사를 이끌고 양나라를 지나쳐 동북의 창읍(昌邑)으로 진군해서 벽루를 높이 세워 굳게 지켰다. 이에 양나라는 매일 사자를 보내 주아부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주아부는 창읍을 굳게 지키려고만 할뿐 군사를 움직여 양나라를 구원하지 않았다. 양나라가 경제에게 상서하자 경제는 사자를 주아부에게 보내 양나라를 구원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주아부는 황제의 조칙을 받들지 않았고 굳게 보루를 지키기만 할뿐 출격하지 않고 경기병과 궁고후(弓高侯) 등을 출전시켜 반군의 양도를 끊었다. 이윽고 군량이 떨어진 오나라 군사들은 굶주림에 못 이겨 여러 차례 도전해 왔으나 절대로 출격하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군중에서 소요가 일어나 군영 내에서 아군끼리 서로 공격하여 일어난 혼란은 태위의 장막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주아부는 꼼짝도 하지 않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리자 잠시 후에 소란스러운 사태는 진정되었다. 후에 오나라가 벽루의 동남쪽 귀퉁이를 급하게 공격했다. 그러자 주아부는 명을 내려 벽루의 서북쪽를 대비시켰다. 결국 오나라 군사들은 벽루를 돌파하지 못했다. 굶주림에 지친 오나라 군사들은 결국 모두 주아부의 진영 앞에서 물러갔다. 그러자 주아부는 정예병들을 선발하여 오나라 군사들의 뒤를 추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오왕 유비(劉濞)는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장사 수천 명과 함께 도망쳐 강남의 단도(丹徒)로 들어가 지켰다. 한나라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그들을 모두 포로로 잡자 나머지 군사들은 항복했다. 한나라는 오왕의 목에 천금의 상금을 걸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월나라가 오왕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바쳐왔다. 모두3달 동안 진행된 공방전이었다. 제장들은 오초의 란을 쉽게 평정할 수 있었던 원인은 태위의 전략이 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아부의 그런 전략으로 인해 양효왕과는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주아부가 개선하여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은 새로 태위관(太尉官)이라는 관직을 설치하여 주아부를 정식으로 임명했다. 그리고5년 후, 주아부는 승상이 되었다. 경제는 주아부를 매우 중히 대했다. 경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하자 주아부는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어쩌는 수가 없었다. 이 일로 인해 주아부와 경제의 사이는 소원해지게 되었다. 더욱이 양효왕이 조현을 위해 경사에 들릴 때마다 황제와 두태후에게 항상 주아부의 단점을 말해 헐뜯었다. 두태후가 말했다.

「황후의 형 왕신(王信)을 후로 봉하시오.」

경제가 난색을 표하면서 말했다.

「모후의 조카 남피후(南皮侯) 두팽조(竇彭祖)와 모후의 동생 장무후(章武侯) 두광국(竇廣國)도 선제께서 후로 봉하시지 않아 제가 즉위한 후에야 그들을 후로 봉했습니다. 저는 아직 그들을 후로 봉할 수 없습니다.

두태후가 말했다.

「다른 사람의 임금 되는 자는 각기 자기가 행해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두장군은 살아 있을 때 후의 작위를 얻지 못하다가 그가 죽은 후에야 그의 아들 두팽조가 후의 작위를 얻었습니다. 그 일을 내가 심히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왕신을 후에 봉하시기 바랍니다.」

경제가 대답했다.

「승상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황제가 승상 주아부에게 의견을 묻자 주아부가 대답했다.

「고황제께서 공신들과 맹약하시기를 『유씨가 아닌 자들은 왕이 될 수 없고 공을 세우지 않은 자들은 후에 봉할 수 없다. 만약 이 맹약을 어긴다면 천하가 함께 그들을 공격하여 주멸해야 한다.』지금 왕신은 황후의 오빠이고 공을 세운 바가 없습니다. 그런 그를 후에 봉하면 맹약을 어기게 되는 일입니다.」

경제는 묵묵히 말을 잇지 못하고 그 일을 중지했다.

그후에 흉노왕 유서로(唯徐盧) 등5명이 항복해 왔다. 경제가 그들을 후에 봉해 그들의 뒤를 따라 항복해 오려는 사람들을 고무시키려고 했다. 승상 주아부가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배반하고 폐하에게 항복해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그들을 후로 봉하신다면 후에 어찌 남의 신하된 자들이 절개를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가 대답했다.

「승상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소.」

그리고는 유서로 등을 모두 열후에 봉했다. 주아부는 이 일로 인해 병을 칭하고 승상의 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경제 중원3년 기원전147년, 주아부는 병을 이유로 승상의 직에서 면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경제는 주아부를 궁궐로 불러 음식을 내렸으나 주아부의 식탁에는 쌀지도 않은 큰 고기덩어리만 놓여있었고 먹을 수 있는 젓가락도 없었다. 주아는 마음속으로 매우 불평하며 연회석을 주관하는 관원을 쳐다보며 젓가락을 가져오라고 했다. 경제가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그대가 뜻한 바와 같지 않소?」

주아부가 관을 벗으며 사죄했다. 황제가 몸을 일으키자 주아부가 재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물러갔다. 경제가 눈으로 주아보를 전송하면서 말했다.

「이렇듯 앙앙불락하는 자가 어찌 어린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가 되겠는가?」

그리고 얼마 후에 주아부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를 위해 공관(工官)과 상방(尙方)5)에서 황실에서 사용하는 순장용 갑옷과 방패500여 조를 구입했다. 기물을 운반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인해 고생이 많았으나 아들은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또한 기물들을 황가전용의 공방에서 몰래 샀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사람들은 분노하여 주아부의 아들을 관부에 고변했다. 그 일은 주아부에게까지 연루되었다. 상서를 읽어 본 황제는 그 일의 심문을 옥리에게 넘겼다. 옥리가 주아부를 불러 심문했으나 주아보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경제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그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즉시 정위를 불러 주아부를 치죄하라고 했다. 정위가 주아부를 책망했다.

「군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소?」

「내가 기구를 산 것은 내가 죽을 때 묻기 위한 부장품이오. 어찌 반역을 하기 위해서란 말이오?」

「반역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오?」

옥리는 주아부를 더욱 심하게 핍박했다. 처음에 주아브는 자살할 생각이었으나 부인이 막았음으로 결행하지 못하고 정위에게 넘겨져 결국은 음식을 끊은지5일 만에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주아부의 후국은 없어졌다.

주아부의 후사가 끊어진지1년여 후에 경제는 다시 주발의 다른 아들 주견(周堅)을 평곡후(平曲侯)에 봉해 그의 뒤를 잇게 했다. 주견은 후에 봉해진 지19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공후(共侯)다. 아들 주건덕(周建德)이 후의 작위를 잇고, 다시13년 만에 태자태부가 되었다. 후에 주금(酎金)의 양과 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효무제 원정(元鼎) 기원전112년 죄를 받아 후국은 없어지고 말았다.

주아부는 허부의 예언대로 아사하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에 경제는 왕신을 개후(蓋侯)에 봉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강후 주발은 처음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비루하고 소박한 사람이었고 재능은 범용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이윽고 고조를 따라 천하를 누비고 다니다가 장상의 자리에 오르고 다시 제려(諸呂)가 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발은 다시 한 번 나라를 바르게 세웠으니 비록 이윤(伊尹)이나 주공(周公)이라 한들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주아부의 용병은 위엄이 있고 태산과 같이 무거워 견인불발(堅忍不拔)했으니 비록 사마양저라고 한들 그와 같이 했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만족하고 배우지 않아 비록 절개는 지켰으나 겸손하지 않아 결국은 어려운 처지에 빠졌으니 참으로 슬프구나!」 





1)권(卷)/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 북으로 황하의 남안 고을이다.

2)재관(材官)/ 용감하고 힘이 센 궁노수만으로 구성된 일종의 특수부대원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하사관에 해당한다.

3)중연(中涓)/ 알자(謁者)나 사인(舍人) 등으로 군주의 측근에서 수발을 드는 비서에 해당한다. 조참 역시 중연의 신분이었다.

4) 호분(虎賁)/ 경호를 담당하는 군사들이다.

5) 공관(工官)은 황실의 일상용 기구를 제작하는 관서이고 상방(尙方)은 황가가 사용하는 도검이나 병기 및 귀중한 기물을 제작하는 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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