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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왕세가(三王世家)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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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30. 삼왕(三王)ⓐ

【사마천이《태사공자서(太史公自書)》에서, "황제의 세 황자가 왕이 되었으니, 황제가 봉토와 작위를 주고 삼공을 임명하는 문서인 책문(策文)의 글이 볼만하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본 편을 지은 의도는 책문(策文)에 있다고 여겨진다. 본편 《삼왕세가》는 한무제의 세 아들인 제왕(齊王) 유굉(劉閎), 연왕(燕王) 유단(劉旦),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가 제후왕에 책봉될 때의 책문과 그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이 세 명의 왕들이 책봉된 시기는 원수(元狩) 6년 4월 을사일로 기원전 117년 한무제 재위 24년 되는 해다. 그 당시 세 황자의 나이가 너무 어려 그들의 사적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마천은《봉책문서(封策文書)》만으로《삼왕세가》편을 지었다.《삼왕세가》는 예로부터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태사공왈」과「저선생왈(褚先生曰)」사이의 관점에 상당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즉 본 편의 맨 뒷 편에 저소손이 덧붙여 쓴 왕부인의 일이라든지 책문에 대한 해석 등은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억지적인 평론이고, 문사 역시 천박하여, 나머지 앞부분마저도 사마천이 쓴 글이 아니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본편의 서지학적인 신빙성에 심각한 의문을 일으키게 하고 있다. 사마천이 본 편을 짓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또 다른 이유로, 본편의 문장이《세가(世家)》30편 중에서 가장 독특한 데,「태사공왈」에서 보인 의도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우선 첫 문장부터 등장하는 곽거병(霍去病)의 논조가 ‘충성(忠誠)’을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첨(阿諂)’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뒤를 이은 문장에서도 어사대부가 논의하고 다시 승상과 토론을 주고받으며, 황제에게 비준을 청하고, 또 황제는 겸허하고 신중하게 ‘대공무사(大公無私)’ 의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즉 신하들은 ‘헛된 글인 허문(虛文)’을 지어서 통치자들에게 바치고 통치자들은, ‘사양(辭讓)’이니 ‘선양(禪讓)’이니 하는 말을 하지만 결국은 못이기는 척하며 봉국을 이어받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이 편의 책문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이 있는 문장의 품격은 기존의 다른 편에서 보기 힘든 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삼왕세가》는 세가(世家)의 마지막 편이다.】

「대사마(大司馬) 신(臣) 거병(去病 : 미주①)은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하면서 황제폐하께 상소장을 올립니다. 폐하께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못 들으시고 대사마와 표기장군(標騎將軍)의 직책에 있는 신 거병을 군중에서 대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마땅히 변방의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 매진하다가 싸움 중에 죽어 해골이 황야에서 굴러다닌다 해도 황상의 은혜에 보답을 다 했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군려(軍旅) 이외의 다른 일로 직분을 벗어나서 정사를 주관하는 있는 관원의 일에 간섭하려고 하는 이유는 천하를 걱정하느라 자신을 잊으시고, 백성을 가엾게 여기시느라 음식도 줄이시며, 오락도 절제하시며, 낭관의 수를 줄여 비용을 절약하는 폐하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황자님들은 하늘의 보살핌을 받아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절을 올릴 수 있을 만큼 장성하셨음에도 봉호나 작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부도 없습니다. 와중에 폐하께서는 겸양하시느라 황자들을 돌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군신들 모두가 개인적인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히 직분을 벗어나 진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은 견마와 같은 충정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엎드려 황제 폐하께 아뢰옵게 되었습니다. 원하옵건대 담당 관원에게 명을 내리셔서 이번 성하(盛夏)에 길일을 정해 황자들의 작위와 봉호를 정하옵소서! 신 곽거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재배를 올리며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원수(元狩) 6년 3월 28일 을해일에 어사 곽광(霍光 : 미주②)이 상서령(尙書令)을 대신하여 미앙궁(未央宮)에 머물던 황제에게 곽거병의 상소문을 올렸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명했다.
「어사에게 내려 보내 의논하도록 하라!」
원수(元狩) 6년 3월 초하루 무신일에, 어사 겸 상서령(尙書令) 곽광과 상서승(尙書丞) 비(非)가 어사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를 하달했다.
「승상 장청적(莊靑翟 : 미주③),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 : 미주④), 태상(太常) 조충(趙充), 대행령(大行令) 이식(李息), 태자소부 겸 종정(宗正) 임안(任安 : 미주⑤)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대사마 곽거병이 상소를 올려 아뢰오기를 “폐하의 분에 겨운 은총을 입은 신 곽거병은 군중에서 직(職)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온 마음으로 변방을 지킬 근심을 하고, 설사 해골을 황야에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신은 폐하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이 감히 다른 논의거리로 천하의 일을 간섭하려고 하는 이유는 진실로 폐하께서 천하를 위하여 근심하며 수고로우시며,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자신을 잊으시고, 음식을 아끼고 오락을 자제하며, 시종관과 낭관(郞官)까지 줄이시는 근검절약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황자(皇子)들은 하늘의 도움으로 능히 조복(朝服)을 입고 폐하를 배알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장성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봉호(封號)도 없고 작위(爵位)도 없으며 사부(師傅)조차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겸양하여 황자들을 돌보지 않고 계시지만 여러 신하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히 자신의 직분을 넘어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 곽거병이 견마의 심정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진언을 올리오니 폐하께서는 담당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리셔서 성하(盛夏)의 길일을 택해 황자의 봉호와 작위를 정하옵소서. 오로지 폐하께서는 밝게 살펴 주시길 바라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황제폐하께서는 “어사에게 하달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들은 삼가 중이천석(中二千石) 및 이천석(二千石 : 미주⑥)의 고관들인 공손하(公孫賀) 등과 의논하기를 “옛날에 봉토를 찢어서 나라를 세우고 더불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제후들을 세운 목적은 종묘와 사직을 중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신(臣) 곽거병(霍去病)이 그의 직책을 잊지 않고 올린 상소는 폐하의 은덕을 선양하면서 천자가 자신을 낮추고 사양하는 자세로 천하를 위하여 노심초사하느라 경황이 없어 황자들에게 미처 봉호와 작위를 내리시지 못하고 있음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 장청적(莊靑翟), 장탕(張湯) 등은 의례를 받들고 직책에 충실했어야 마땅하오나 어리석은 생각에 이 일을 미처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마침 성하(盛夏)의 길일(吉日)이오니 신 장청적과 장탕 등은 죽음을 무릅스고 황자 유굉(劉宏), 유단(劉丹), 유서(劉胥) 등을 제후왕(諸侯王)에게 봉해 나라 이름을 세워주시기를 청하옵나이다.」
황제가 분부했다.
「짐이 듣기에 주나라는 800의 제후들을 봉했는데 희성(姬姓)의 왕족들을 나란히 세워 각기 경중에 따라 자작, 남작, 부용(附庸) 등의 작위를 내렸다고 했다. 또《예기(禮記)》에 ‘서자는 제사를 받들 수 없다’고 했다. 그대들이 제후왕을 세우는 목적은 사직이 중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짐은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하늘은 결코 군주를 위해 백성들 내려주지 않았다. 짐이 부덕하여 해내(海內)가 아직 안정이 되지 않는 터에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어린 황자를 억지로 넓은 땅과 수많은 성채를 다스리는 군주를 시킨다면 보필하는 신하들은 어떻게 그들을 이끌 수 있겠는가? 황자들을 열후(列侯)에 봉해 식읍을 내리는 방안으로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3월 29일 병자일에 군신들이 의논한 바를 미앙궁(未央宮)에 거처하는 황제에게 상주했다. 
「신 승상 장청적, 어사대부 장탕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신 등이 삼가 열후(列侯) 영제(嬰齊)와 간대부(諫大夫)이며 박사(博士)인 안(安)ⓑ, 중이천석의 신하인 공손하 등이 의논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가 듣건데 주나라는 800의 제후들을 봉했는데 주로 희성이 왕족들을 나란히 세워 천자를 받들게 했습니다. 위강숙(衛康叔 : 미주⑦)은 조부와 죽은 부친의 은덕으로 현달하게 되었고 백금(伯禽 : 미주⑧)은 주공의 공업으로 노(魯)에 봉해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제후국을 이루어 상국과 사부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백관들은 법규를 준수하여 각기 그들의 직분을 지켰음으로 나라의 법통을 완비할 수 있었습니다. 신들은 제후국을 세우는 방법만이 사직을 중하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천하의 제후들은 각기 그 직분에 따라 공물(貢物)과 제물(祭物)을 바칠 겁니다. 서자가 종묘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받들 수 없는 것이 예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서자들을 제후왕을 봉해 번국(藩國)의 역할을 맡기면 제왕(帝王)으로써 은덕을 베풀고 교화를 행하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하늘의 법통을 받드시어 성스러운 실마리를 밝게 여시고 어진 이를 높이고 공로를 세운 자들을 드러내며, 멸망한 제후국을 일으키거나 끊어진 후사를 다시 이어주었습니다. 문종후(文終侯) 소하(蕭何 : 미주⑨)의 후손을 찾아 끊어진 찬후(酇侯)에 봉하여 가문을 이어주었고, 평진후(平津侯) 공손홍(公孫弘 : 미주⑩) 등의 대신들을 포상하고 격려했습니다. 육친(六親)의 서열을 밝히시고 천자의 은혜가 미치는 친족들의 범위를 표명하시어 제후왕(諸侯王)과 봉군(封君)들에게 저마다 각각 개인적인 은택을 널리 베풀어서 자제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봉호(封號)를 내려 세운 봉국(封國)은 1백여 개가 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황자에게 열후(列侯)의 작위를 내린다면 이것은 신분의 존비관계가 흐트러지는 일이 되고, 지위관계의 순서가 뒤바뀌는 것이니, 자손만대에 물려줄 전통이 될 수 없습니다. 신들은 황자인 유굉과 유단과 유서를 제후왕에 책봉해 주시옵소서!」
황제가 조서를 내려 분부했다.
「강숙(康叔)의 동모제는 10명이었는데 유독 그만이 존귀하게 된 까닭은 주문왕(周文王)께서 덕있는 자를 포상했기 때문이었다. 주공은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교제(郊祭)를 행했음으로 그의 후손들인 노나라는 흰색과 붉은 색의 수소를 희생으로 썼다. 그런데 다른 공후(公侯)들은 털빛이 순수하지 않은 희생을 사용했으니 이는 어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자연히 밝혀진 것이다. 공자께서는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을 따라간다.”ⓒ 하셨다. 짐은 그런 주나라의 제도를 매우 우러러보고 있다. 그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황자들을 식읍을 주어 열후로 봉해 눌러두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4월 초하루 무인일에 다시 신하들이 미앙궁에 상소문을 올렸다.
「승상 장청적, 어사대부 장탕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진 청적과 열후, 이천석의 관료, 간대부들이 박사 경(慶)ⓓ과 상의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책봉해주기를 청했었습니다. 하나 황제폐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강숙(康叔)의 동모제는 10명이 있었지만 오직 강숙만이 존중받게 된 것은 주문왕께서 덕 있는 자를 기렸기 때문이다. 주공이 교천(郊天)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음으로 노나라는 하얀색과 붉은색의 수소를 희생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다른 공후들은 털빛이 일치하지 않은 소를 사용하니 이는 어진 자와 불초한 자가 구분되는 것이다.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 길을 따라간다.’라고 했으니 짐은 주나라의 제도를 매우 경모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황자들을 식읍을 주어 열후로 봉해 눌러두어야 좋다고 생각한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신 장청적, 신 장탕, 박사 신 장행(將行) 등은 삼가 듣건데 강숙의 동모제는 10명이 있었는데 주무왕은 천자의 법통을 계승했고, 주공은 주무왕과 주성왕을 보필했으며, 장자 백읍고(伯邑考)는 일찍이 은주(殷紂)에게 인질로 갔다가 살해당했습니다. 나머지 7형제는 모두 조부와 죽은 부친의 존귀함에 의지하여 큰 나라에 봉해졌습니다. 강숙이 나이가 어렸을 때는 주공은 삼공(三公)의 자리에서 천자를 보좌했기 때문에 그의 장자 백금(伯禽)이 대신 노나라에 봉해졌습니다. 백금과 강숙이 노나라와 위나라에 봉해졌을 때는 그들은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을 때였을 겁니다. 그러나 후에 강숙은 녹보(祿父)의 난을 평정했으며, 백금은 반란을 일으킨 회이(淮夷) 족들을 섬멸했습니다. 옛날 상고시대의 오제(五帝)는 각기 제도를 달리 운영했고, 주나라는 오등급의 제도를, 춘추 때는 삼등급ⓔ으로 고쳤던 바, 그것은 모두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존비의 순서가 정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황제께서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올바르게 돌려놓음으로써 지극한 덕을 밝히셨으며 해내를 평정하고 제후들을 세우셨는데 그 작위는 두 등급이었습니다.ⓕ 황자 중에는 어떤 이는 강보에 쌓여 있었음에도 제후왕으로 책봉되어 천자를 받들게 되었으며 이는 만세가 지나도 바꿀 수 없는 법입니다. 황제폐하께서는 몸소 인의를 행하시고 성덕(聖德)을 실천하셨으며 문무(文武) 두 성왕의 덕을 갖추셨습니다. 자애롭고 효성스러운 행동을 표창하셨고, 어질고 재능있는 자들이 임용될 수 있는 길을 넓히셨습니다. 안으로는 덕이 있는 자들을 포상했고, 밖으로는 강포한 오랑캐들을 토벌했습니다. 아득히 먼 북해(北海), 서쪽으로는 월지국(月氏國)과 흉노, 서역에 이르기까지 온 천하가 모두 나서서 황제의 군사를 받들었습니다. 전차와 무기를 만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국고에 쌓아 두었던 재물들을 비워 전쟁에 나간 군사들을 포상했고 황실의 창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제했으며 변방을 지키는 수졸들을 반으로 줄였습니다. 수많은 남쪽 오랑캐의 군장들은 하나같이 우리 한나라의 교화를 우러러 받들고 조정의 뜻에 화합했습니다. 풍속이 다른 먼 나라는 통역을 이중으로 바꿔가며서까지 달려와 조현을 올릴 정도로 황제 폐하의 은택이 나라 밖에가지 미쳤습니다. 이로 인하여 진기한 짐승들이 여러 곳에서 출현하고 상서로운 곡식들이 자라났습니다. 이것은 황제폐하의 어진 정치에 하늘이 감응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제후들의 서자들은 제후왕을 봉하고서 황실의 황자들은 열후로 삼는 처사는 진 장청적과 신 장탕 등은 가만히 생각해본 바로는 모두가 존비귀천(尊卑貴賤)의 순서를 잃게 되는 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키게 되니 절대 불가합니다. 신 등은 굉(宏), 단(旦), 서(胥) 등의 세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세워주시기를 청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미앙궁(未央宮)의 황제에게 상주했으나, 황제는 궁중에 있으면서 조서를 내리지 않았다. 4월 6일 계미일에 신료들이 의논하여 다시 황제에게 상주했다.
「신 승상 장청적, 태복(太僕)ⓖ 겸 어사대부 대리 공손하(公孫賀), 태상(太常)ⓗ 조충(趙充), 태자소부(太子少傅) 겸 종정(宗正) 대리 임안(任安)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신 장청적 등은 전에 대사마 곽거병이 황자들이 아직 봉호가 없다고 올린 상소문을, 신은 삼가 어사대부 장탕, 중이천석, 이천석, 간대부, 박사 경(慶) 등과 의논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굉을 위시한 세 황자들을 제후왕으로 세워달라고 상주했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문무 두 성왕들의 겸양하는 덕을 따르고 또한 스스로에 엄격하셨을 뿐만 아니라 황자들이 아직 배움이 모자라다고 하시면서 제후왕으로 세우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으로써는 유가(儒家)도 자신의 학설을 말할 때 경우에 따라서는 속마음과는 다른 말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한사코 허락하지 않으시면서 황자들을 굳이 열후에 봉하시려고 하십니다. 신 장청적 등이 삼가 열후 수성(壽成)ⓘ 등 27명의 신하들과 의논한 결과 그것은 존비귀천의 순서를 잃는 처사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천하를 세우시고 한왕조의 시조가 되신 고황제께서는 자손들을 제후왕에 봉하시고 지족들의 보좌를 넓히셨습니다. 선제들의 만든 법제를 고치지 않고 준수하는 이유는 선제들이 그것을 지존의 도리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청하옵건대 사관을 시켜 길일을 택해 의식을 갖추 다음 어사로 하여금 지적도를 바치게 하시고 다른 것들은 옛날 관례에 따라 처리하시기 바라옵니다.」
황제가 마침내 조명을 내렸다.
「허락하노라!」
이윽고 4월 19일 병신일에 미앙궁에 상소를 올렸다.
「태복 겸 어사대부 대리 공손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태상 조충(趙充)이 점을 친 바 4월 28일 을사일이 제후왕으로 봉하는 데 길일이라고 했습니다. 죽을 죄를 무릅쓰고 지적도를 올리며 봉국의 이름을 세워 주실 것을 청합니다. 관계되는 의례에 대해서는 따로 올리겠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청원하옵나이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명했다.
「황자 유굉(劉宏)을 제왕(齊王)에, 황자 유단(劉旦)을 연왕(燕王)에, 황자 유서(劉胥)를 광릉왕(廣陵王)에 책봉하노라!」
원수(元狩) 6년 4월 20일 정유일에 제후왕을 책봉하는 의례와 절차를 미앙궁에 상주했다. 4월 초하루 무인일에 이어 4월 26일 계묘일에 어사대부 장탕은 황제의 명을 승상에게 하달했고 승상은 중이천석 관리에게, 이천석 관리들은 군태수와 제후왕들의 상(相)들에게, 승서종사(丞書從事)ⓙ는 담당관리들에게 하달했다. 모두를 율령에 따라 시행했다.
「원수(元狩) 6년 4월 6일 을사일에, 황제께서 어사대부 장탕을 시켜 태묘(太廟)에 황자 유굉(劉宏)을 제왕에 봉하셨다. 황제께서 이르시기를 ‘오호라! 아들 굉아, 이 청사(靑社)ⓚ를 받아라! 짐은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옛 제도를 참고하여 너에게 나라를 세워주고 동쪽의 땅에 봉하니 자손대대로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도록 하라! 아아, 명심할지어다. 짐의 조서를 공손히 받들어 천명은 항상 고정불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사람이 덕을 좋아하면 밝은 빛을 능히 밝힐 수 있겠지만, 도의를 펼치지 않으면 군자는 게을러지리라! 너의 마음을 다하고 중용의 도를 잡으면 하늘이 내려주는 봉록은 영원하리라! 잘못을 저지르면서 선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의 나라에는 위태롭게 되고 너 자신을 해치게 될지어다. 아,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다스리려면 어찌 공경한 마음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된 자들은 이 점을 유의하여 경계로 삼을지어다!’」
이상은 유굉(劉宏)을 제왕에 봉하는 책문이다.

「원수 4년 4월 28일 을사일에 황제께서 어사대부 장탕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황자 유단(劉旦)을 연왕으로 삼으시면서 당부하셨다. ‘오호라 아들 단(旦)아! 현사(玄社)를 받아라! 짐은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옛 제도를 참고하여 너에게 나라를 세워주고 북쪽의 땅에 봉하니 자손대대로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도록 하라! 아아, 노인을 학대하는ⓛ 금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훈육(葷粥)ⓜ이 한나라의 북변 땅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더욱이 변방의 백성들을 꼬드겨 끌고 가고 있다. 아아, 짐이 장군들에게 명하여 그들의 죄를 물어 정벌하게 했더니 만부장(萬夫長), 천부장(千夫長) 등의 32명에 달하는 군장들이 항복해오니 그들의 깃발은 떨어지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마침내 훈육이 한나라 북변에서 멀리 달아났음으로 북방의 주군(州郡)은 평안하게 되었다. 너는 온 마음을 다하여 원한을 하지 말며 은덕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전쟁에 대한 대비를 소흘히 하지 말고 훈련받지 않은 사람을 군사로 징발하지 말라. 아아,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어찌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이 된 자는 이 점을 삼가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상은 유단(劉旦)을 연왕(燕王)에 봉하는 책문이다.

「원수 4년 4월 28일 을사일에 황제께서 어사대부 장탕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황자 유서(劉胥) 광릉왕(廣陵王)으로 삼으시면서 당부하셨다. ‘오호라 아들 서(胥)야! 적사(赤社)를 받아라! 짐은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옛 제도를 참고하여 너에게 나라를 세워주고 북쪽의 땅에 봉하니 자손대대로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도록 하라! 옛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으니, 장강(長江)의 남쪽과 오호(五湖) 사이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이 경박하다고 했다. 양주(楊州)는 중원을 지키는 변경이고, 하은주(夏殷周) 삼대에는 왕기(王畿)에서 먼 요복(要服)ⓝ의 땅으로 교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라고 했다. 아아, 너의 온 마음을 다하고, 두려워하고 신중한 태도로 은혜롭고 공손하게 따르고, 경거망동하거나 향락에 빠지지 말고, 소인배들을 가까이하지 말고, 법과 원칙을 지킬지어다.《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된 자는 위세를 부리지 않으며, 상(賞)을 함부로 내리지 않아야 뒷날 부끄러움이 없다고 했다. 아아,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려고 하는 데 어찌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광릉왕은 부디 경계로 삼을지어다.’」
이상은 유서(劉胥)를 광릉왕(廣陵王)에 봉하는 책문이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사람을 아끼면 그가 잘살게 되기를 바라게 되고, 친하면 고귀하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때문에 옛 왕들은 땅을 나누어 국가를 세우고 자제들을 봉했다. 친족들을 포상하고, 골육의 친소를 정하거나, 조상을 존중하고, 지족들을 현귀하게 만드는 목적은 동성의 세력을 천하에 넓히기 위해서이다. 이로 인해 왕실의 형세가 강해지고 안정되었다. 이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특별한 점이 없으니 따로 평론할 필요가 없다. 연국과 제국의 사적은 따로 채록할만한 기사가 없다. 다만 삼왕이 책봉되는 과정에 있어서 천자는 겸양하고 신하들은 도의를 굳게 지켜 그 문사가 찬연하여 실로 감상할 만하다. 그래서 세 왕을《세가》에 포함시켰다.」

저선생(褚先生)ⓞ이 말한다.
「나는 다행히 문학(文學)으로 시랑(侍郎)이 되어 태사공(太史公)의 《열전(列傳)》을 즐겨 읽을 수 있었다. 《열전(列傳)》에서 《삼왕세가(三王世家)》의 문장이 볼만하다는 기사를 읽었으나 아무리 해도 그 문장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노인들에게서 그가 보관하고 있던 책봉에 관련된 문서를 구할 수 있었다. 이제 그 문서에 적힌 사적들을 편찬하고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이 현명한 군주의 의도를 알리고자 한다.
대체로 듣기에 효무제 때, 같은 날 세 황자를 각각 제왕, 연왕, 광릉왕에 첵봉했다. 황자 저마다의 재능과 지혜, 봉토의 비옥과 척박, 백성들의 경박함과 장중함 등에 따라 책문을 지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계의 뜻을 전했다.
‘대대손손 황실의 번국의 되어 보좌하라!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어찌 공경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들은 이 말을 경계로 삼을지어다.’
무릇 현명한 군주의 문장은 본래 식견이 천박한 자로서는 능히 이해할 수 없고, 박학강기(博學强記)한 군자가 아니고서는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는 법이다. 문장의 순서와 단락, 사구(詞句)의 전후 배치, 책문의 들쑥날쑥한 참치(參差)와 길고 짧은 장단(長短) 등은 나름대로 깊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삼가 해서와 초서로 쓰인 조서들을 다음과 같은 순서로 편집해 놓았다. 읽는 사람들이 그 뜻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을 붙인다.」

『왕부인(王夫人)은 조나라 사람이다. 위황후(衛皇后)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굉(宏)을 낳았다. 유굉이 책봉되어 제후왕이 되었을 때는 왕부인은 병이 들었다. 무제가 친히 문병을 가서 물었다.
「아들이 제후왕에 봉해질 텐데 어디가 좋겠소?」
왕부인이 대답했다.
「폐하의 뜻이 있사온데 제가 무슨 말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설사 그렇다 해도 당신 생각에 어느 곳의 왕이 되었으면 좋겠소?」 「원컨대 낙양에 봉했으면 좋겠습니다.」
「낙양은 국가의 병기고와 곡식을 저장하는 오창(敖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의 요충지이며 한나라의 대도시오. 그래서 선제께서도 아무 아들도 낙양에 봉하지 않았소. 낙양을 제외하고는 어느 곳이든 왕이 될 수 있소.」
왕부인이 대답하지 않자 무제가 말했다.
「관동의 나라 중에 제나라보다 큰 나라는 없소. 제나라의 동쪽으로는 바다를 등지고 있고 성곽은 커서 옛날에는 임치성 안에서만도 10만호가 살았다고 했소. 천하에 제나라보다 비옥한 땅을 보유한 나라는 없소.」
왕부인이 손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감사의 말을 올렸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왕부인이 죽자 매우 슬퍼한 황제는 사자를 보내 위패에 절하고 예물을 올리며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
「황제가 삼가 태중대부 명(明)을 시켜 벽옥(璧玉) 한 개를 바치며 부인을 제왕태후(齊王太后)의 봉호를 하사합니다.」
황자 유굉이 제왕이 되었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자식이 없었다. 그리고 제왕이 된 지 얼마 후에 어린 나이에 죽었음으로 나라가 폐해지고 군이 되었다. 천하 사람들은 제나라를 제후국으로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소위 ‘이 흙을 받으라’라는 말은 제후왕이 처음 봉해질 때 만드시 천자의 사직단(社稷壇)에서 흙을 받아 자신의 영지로 가져와 그것으로 사직단을 짓고 매년 때를 맞추어 조상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뜻한다. 춘추대전(春秋大傳)에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천자의 나라에는 태사(太社)가 있는데 동쪽은 청(靑), 남쪽은 적(赤), 서쪽은 백(白), 북쪽은 흑(黑) 중앙은 황(黃) 등이 색깔이다.」
따라서 동쪽에 봉해질 제후왕은 푸른 흙, 남쪽은 붉은 흙, 서쪽은 흰 흙, 북쪽은 검은 흙에 왕기 지역은 노란 색의 흙을 하사한다. 제후왕들은 각기 해당 색깔의 흙을 하사받아 흰 띠풀에 싸서 봉국에 가져가서 그 흙 위에 사직단을 짓는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천자가 봉한 제후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이것을 ‘주토(主土)’라 하는데 천자가 하사한 흙 위에 제후국의 사직단을을 짓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말한다. ‘짐은 선조의 위업을 계승하였다.’라고 한 말은 조(祖)는 선조(先祖)를, 고(考)는 돌아가신 부친을 말한다. ‘유계고(維稽古)’는 옛 제도를 참고한다는 뜻으로 유(維)는 ‘헤아린다, 참고한다.’는 뜻이며 ‘계(稽’는 ‘마땅히’의 뜻이니 ‘마땅히 고인의 도를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제나라 사람들은 사술(詐術)이 많고 예의가 통하지 않는다. 때문에 천자께서 ‘짐은 선조들의 유업을 계승하고 옛 제도를 참고하여 너에게 나라를 세워주고 동쪽의 땅에 봉하니 자손대대로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 보좌하도록 하라! 아아, 명심할지어다. 짐의 조서를 공손히 받들어 천명은 항상 고정불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사람이 덕을 좋아하면 밝은 빛을 능히 밝힐 수 있겠지만, 도의를 펼치지 않으면 군자는 게을러지리라! 너의 마음을 다하고 중용의 도를 잡으면 하늘이 내려주는 봉록은 영원하리라! 잘못을 저지르면서 선을 따르지 않는다면 너의 나라에는 위태롭게 되고 너 자신을 해치게 될지어다.’라고 훈계하셨다.
제왕이 봉국에 부임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예와 의에 따라 잘 보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제왕은 중년에 일찍 죽고 말았다. 일생에 과오를 저지를만한 시간이 없었음으로 책문이 뜻하는 바와 부합했다고 할 수 있었다.
전(傳)ⓟ에 다음과 같이 이르렀다.
「‘푸른 색은 쪽[람(藍)]에서 채취했으나 쪽보다 더 푸르다.’라고 했는데 이는 교화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견지명을 가진 현명한 군주로써 천자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니 제왕에게는 내부의 일을 신중하게 처리하고, 연왕에게는 남의 원한을 사지 말라고 했으며, 광릉왕에게는 외부의 일에 삼가고 위세를 만들어 복을 구하지 말라고 각자에게 훈계했다.

광릉(廣陵)은 오월(吳越)의 땅으로, 그 백성들은 싸납지만 경박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강호(江湖) 지간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경박하다. 양주(楊州)는 중원을 지키는 변방으로써 하은주 삼대 때에 중원의 풍속과 복식을 따르게 만들었으나 크게 교화시키지는 못하고 명목상의 그들을 다스렸을 뿐이었다. 부디 방탕하여 안일에 탐닉하거나 못된 자들을 가까이 하지 말고 모든 것을 법도에 따라 처리하라! 환락이나 사냥에 몰두하거나 음탕한 짓을 즐기며 못된 자들과 어울리지 말라! 항상 법도를 염두에 둔다면 결코 부끄러운 일은 일어나 나지 않을 것이다.」
삼강(三江)과 오호(五湖) 일대는 물고기와 소금이 산출되는 지리적인 이점이 있고 광산에서 채굴되는 동(銅)이 풍부해서 천하가 부러워하는 곳이다. 그래서 천자는 ‘신하로써 함부로 상을 주지 말라[신부작복(臣不作福)]!’라고 경고했는데 그 뜻은 재화를 남용하며 너무 많은 상을 내리고 그로써 명성을 얻어 사방에서 귀순해 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 ‘신하된 자는 위세를 떨지 말라![신부작위(臣不作威)]’라고 했다. 광릉왕에게 그렇게 훈계한 목적은 그곳 사람들의 경박한 마음을 이용하여 정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에서였다.
무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소제(昭帝)는 먼저 광릉왕 유서를 조정으로 불러 3천만 전에 해당하는 후한 상금과 재물을 하사하고 사방 100리의 영토 안의 식읍 1만 호를 보태주었다.
소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선제(宣帝 : 미주⑪)는 골육의 은애와 정의(情意)를 베풀어 본시(本始) 원년인 기원전 73년, 조정의 직할령을 떼어 광릉왕의 네 아들 모두를 각각 후에 봉했다. 유성(劉聖)은 조양후(朝陽侯), 유증(劉曾)은 평곡후(平曲侯), 유창(劉昌)은 남리후(南利侯), 그리고 가장 총해했던 막내아들 유홍(劉弘)은 고밀왕(高密王)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자 유서는 과연 상을 남발하기 시작했고 남쪽의 초왕 유연수(劉延壽)와 결탁했다. 초왕이 마침내 ‘우리의 선왕이신 원왕(元王)께서는 고제의 작은 아들로 초나라 32개 성에 보해지셨다. 그런데 지금은 영토를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에 광릉왕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한다. 광릉왕을 황제로 옹립하고 나는 원왕 때처럼 다시 초나라 원래의 32개 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역모의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공경과 해당 관료들은 광릉왕과 초왕을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천자는 골육의 정으로 광릉왕을 차마 법대로 치죄하지 못하고 사면령을 내려 목숨을 살려주고 초왕만을 주살했다. 《전(傳)》에 이르기를 ‘쑥이 삼밭에서 자라면 붙들어 매지 않아도 저절로 곧게 크고,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모두가 검게 변한다.[《순자·권학》蓬生麻中 不扶自直, 白沙在泥中, 與之皆黑]’라고 한 말은 사는 곳의 풍토와 환경이 교화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후에 닷 유서는 황실을 저주하면서 모반을 꾀했다가 일이 발각되자 자살하고 나라는 없어졌다.
원래 토지가 척박한 연(燕)나라는 북쪽의 흉노에게 핍박을 받아 백성들은 용감하지만 생각이 깊지 않다. 그래서 황제는 연왕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노인을 학대하는 금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는 훈육(葷粥)이 한나라의 북변 땅을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더욱이 변방의 백성들을 꼬드겨 끌고 가고 있다. 아아, 짐이 장군들에게 명하여 그들의 죄를 물어 정벌하게 했더니 만부장(萬夫長), 천부장(千夫長) 등의 32명에 달하는 군장들이 항복해오니 그들의 깃발은 떨어지고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마침내 훈육이 한나라 북변에서 멀리 달아났음으로 북방의 주군은 평안하게 되었다. ‘너의 마음을 다하고 원한을 사지 말라.[悉若心(실약심),無作怨(무작원)]’라고 한 말은 연왕이 흉노의 풍속을 쫓아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말라는 의도였다. 또 ‘은덕을 버리지 말라[무비덕(無俷德)」’이라고 한 말은 연왕에게 패덕한 일을 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전비(戰備)를 폐하지 말라[無廢備(무폐비)]’라고 한 것은 국방을 소흘히 하지 말고 항상 흉노에 대비하라는 경계였다. ‘훈련받지 않는 자들을 병사로 징발해서는 안 된다[非教士不得從徵(비교사부득종징)]’는 말은 예의를 익히지 않은 자는 곁에 두고 중용해서는 된다는 뜻이었다.」
무제가 연로했으나 태자가 무고(巫蠱)의 란에 연루되어 불행히도 먼저 죽었다. 미처 태자를 새로 세우기 전에 유단이 상서를 올려 자신이 입궁하여 숙위(宿衛)를 서겠다고 청했다. 무제가 그 서장을 보고 땅에 던지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제(齊)나 노(魯)와 같은 예의지향(禮義之鄕)으로 보내야 하는데 오랑캐 습속에 젖어있는 연(燕)과 조(趙)와 같은 나라로 보냈더니 과연이 쟁탈의 마음이 생겨 겸양을 모르는 기미가 나타나는구나!」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유단이 보낸 사자를 참수했다.
이윽고 무제가 붕어하고 소제(昭帝) 불릉(弗陵)아 8살의 어린 나이로 뒤를 잇자 유단이 과연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대신들에게 하소연했다. 마땅히 장자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 유단은 옛날 제의왕(齊懿王) 유수(劉壽)의 아들 유택(劉澤) 등과 역모를 꾀하고는 공공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동생 밑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의 황제는 대장군(大將軍)ⓠ의 아들이다.」
이어서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게 되었다. 소제는 골육의 정으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은혜를 베풀어 죄안(罪案)을 억눌러 거론하지 못하게 했다. 공경들이 대신들을 시켜 종정(宗正) 겸 태중대부(太中大夫) 공호만의(公戶滿意)와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을 연나라에 보내 연왕을 풍자해서 계도하게 했다. 이들은 연나라에 당도하여 번갈아 가며 각기 다른 방법으로 연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책망했다. 구경(九卿)에 속하는 종정은 황실에 속하는 유씨들의 호적을 관장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그가 먼저 연왕 유단에게 소제가 한무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제시하며 설명했다. 시어사도 역시 연왕의 접견을 청하고 법에 의거 연왕의 잘못을 추궁하면서 말했다.
「왕께서 군사를 동원하여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던 죄상이 명백해졌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합니다. 한나라 조정에는 엄연히 법이 있어 왕이 법을 어기면 아무리 사소한 죄일지라도 처벌할 수 있을 뿐입니다.」
법률 조문을 이용하여 연왕을 겁먹게 하자 그는 더욱 위축되어 마음 속으로 두려워했다. 유가 경전에 익숙하여 술수에 밝은 공호만의가 마지막으로 연왕을 접견하고 고금에 통용되었던 도리와 국가의 대체를 인용하여 설법했는데 그 언사가 매우 당당하고 화려했다. 만의는 연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천자의 조정 안에는 언제나 이성의 대부가 있어 골육인 황족들을 바르게 인도했고, 조종 밖에서는 동성의 대부가 있어 이성의 대부들을 바로 잡는 일을 맡았습니다. 주공께서 주성왕을 보좌하면서 그의 두 동생을 주살하자 주나라는 치세가 이루어졌습니다. 무제(武帝)께서 재위에 있을 때에는 동성의 제후왕들을 용서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금상 폐하이신 소제께서는 나이가 어린 앞길이 창창하신 분이시지만 정치에 직접 임하지 못하고 대신들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주살에 해당하는 중죄는 친척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를 안정되게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바야흐로 대신들이 정사를 보좌하면서 법률을 받들어 바르게 형을 올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감히 아부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왕에게 관용을 베풀 수 없을 겁니다. 왕께서는 부디 스스로 삼가시어 몸을 해치고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지 마십시오.」
그러자 연왕 유단은 두려운 마음이 디어 죄를 인정하고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사죄했다. 대신들은 황족들의 화합을 위해 골육지정을 내치지 못하고 차마 법에 따라 처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유단은 다시 좌장군 상관걸(上官傑 : 미주⑫)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하면서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나는 태자 다음의 황자다. 태자가 없으면 내가 마땅히 태자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이 작당하여 나를 탄압하고 있다.」
대장군 보정(輔政) 곽광이 공경대신들과 의논하며 말했다.
「연왕 유단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고 있소.」
대신들은 법률에 따라 주살형에 처하기로 했다. 유단은 자살하고 나라는 없어져 결국은 책문에 우려한 바대로 되었다. 담당 관리가 유단의 처자들을 연좌시켜 처벌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소제는 골육의 정을 생각해서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죽음을 면하게 한 후에 서인으로 만들었다. 전(傳)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난초와 지초(芝草)는 같은 향초이지만 그것들에게 오줌을 스며들게 하면 군자는 가까이 하지 않고 평민도 그것을 차지 않는다.」ⓡ
유단이 연왕에 책봉되어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것은 점차 나쁜 풍습이 스며들어 그리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선제(漢宣帝)가 제위에 오르자 바로 은혜를 베풀고 덕을 선양했다. 그래서 본시(本始) 원년(元年)인 서기 73년 연왕이 두 아들 모두를 열후와 제후왕으로 봉했다. 작은 아들 유현(劉賢)은 안정후(安定侯), 태자였던 유건(劉建)은 광양왕(廣陽王)에 봉해 유단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각주
ⓐ삼왕(三王) : 한무제의 세 아들이다. 2자 제왕(齊王) 유굉(劉宏)은 왕부인 소생이고 3자 연왕(燕王) 유단(劉旦)과 4자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는 이부인(李夫人) 소생이다. 한무제의 장자는 무고(巫蠱)의 란에 연루되어 살해당한 위황후(衛皇后) 소생의 폐태자 유거(劉據)다.
ⓑ영제(嬰齊) : 성은 불상이다. 《사기사전(史記辭典)의 편찬자 창수량(倉修良)은 영제의 작위는 열후이지만 직위는 낭중(郎中)이라고 했다. 《한서·예문지》에 《낭중영제(郎中嬰齊)》라는 제목의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간대부(諫大夫) 안(安) : 임안(任安)이라는 설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전숙열전(田叔列傳)》의 임안 조에 그가 생전에 간대부나 박사를 역임했다는 기사는 없다. 간대부는 광록훈(光祿勳)에 속하는 간관(諫官)이고 박사(博士)는 황제의 측근에서 시종하면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참모나 고문 역할을 하는 관직이다.
ⓒ《시경·소아·거할(車舝)》에 나오는 ‘고산앙지(高山仰止) 경행향지(景行嚮之)’로 사마천이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행적을 평할 때 인용한 시구다.
ⓓ박사(博士) 경(慶) : 만석군 석분(石奮)의 아들 석경(石慶)이라는 설과 소하(蕭何)의 증손자 소경(蕭慶)이라는 설이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춘추삼등(春秋三等) : 《사기집해(史記集解)》의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주나라의 오작제인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을 춘추시대에 이르러 자남(子男) 두 작위를 백(伯)에 포함시켜 공후백(公侯伯) 3등급으로 시행했다고 했다.
ⓕ한나라는 작위를 제후왕(諸侯王)과 열후(列侯) 두 등급으로 정해 시행했다.
ⓖ태복(太僕) : 주왕조 때 하관(夏官)의 속관이었으며 진한(秦漢) 왕조가 전례를 쫓아 설치했다. 황제의 수레와 말을 관리했으며 질록은 2천 석에 구경(九卿)의 한 명이다.
ⓗ태상(太常) :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성과 효성을 갖추고 몸가짐이 조신하며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수성(壽成) : 소하의 현손으로 찬후(酇侯)를 사위했다. 벼슬은 태상(太常)에 이르렀다.
ⓙ승서종사(丞書從事) : 군국(君國)의 문서를 주관하는 하급관리
ⓚ청사(靑社) : 청색의 흑으로 태사(太社) 즉 황제의 사직단(社稷壇)은 5방을 의미하는 다섯 색깔의 흙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청사는 동방을 뜻한다. 황제가 황자를 제후왕으로 봉할 때 방위에 해당하는 흙을 띠풀에 싸서 수여하여 그것으로 사직단을 세우게 했다. 띠풀에 싼 흙을 모토(茅土)라고 했다. 오행설에 따른 각 방위의 색깔은 중앙은 황(黃)이고 동서남북은 순서에 따라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이다.
ⓛ《한서·흉노전》에 의하면 흉노족은 젊은이를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를 천히 여기며, 젊은이는 맛있는 고기를 먹고 늙은이는 그들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고 했다.
ⓜ훈육(薰粥) : 훈육(獯鬻) 혹은 훈육(薰育)이라고도 하며 하(夏)나라 때의 흉노족 선조로써 주나라 때는 험윤(玁狁), 전국, 진한 때에는 흉노(匈奴)라 했다.
ⓝ요복(要服) : 왕성에서 1500-2000리 떨어진 땅의 명칭이다. 옛날에 임금이 살던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천리(千里) 안의 지역을 왕기(王畿)라 했고 그 밖의 역은 다시 아홉 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왕기와 가까운 순서대로 후복(侯服), 전복(甸服), 남복(男服), 채복(采服), 위복(衛 服), 만복(蠻服), 이복(夷服), 진복(鎭服), 번복(藩服)등의 구복(九服)으로 구분했다. 요복은 후복(侯服)에 해당한다.
ⓞ저선생(褚先生) : 성은 저(褚)이고 이름은 소손(少孫)이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이고 한원제(漢元帝 : 기원전 49-33년), 한성제(漢成帝 : 기원전 33-7년) 때에 활약한 역사가 및 문학가이며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인 영천(潁川) 출신으로 어렸을 때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인 패(沛)로 이주하여 살았다. 일찍이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왕식(王式)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원제와 성제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사마천의《사기》에 누락된 부분을 발견하고 보찬(補撰)했다.《효무본기(孝武本紀)》,《삼왕세가(三王世家)》,《외척세가(外戚世家)》,《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日者列傳)》및《골계열전(滑稽列傳)》을 보찬하거나 부록으로 달았다.
ⓟ전(傳) : 《순자(荀子》를 지칭한다. 《권학(勸學)》편의 원문은 ‘靑取之于藍而靑于藍’이다.
ⓠ대장군 : 한무제의 탁고대신 곽광(霍光)을 지칭한다. 한소제 유불릉(劉弗陵)은 구익부인(鉤弋夫人)의 소생으로 무제가 소제를 후계자로 지명한 후에 자기 사후 젊은 나이의 구익부인이 과거 여태후(呂太后)처럼 어린 황제를 끼고 전횡할 것이고 예상하고 죽였다. 유단은 구익부인(鉤弋夫人)이 죽은 이유를 곽광과 사통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전(傳) :《순자·권학》에 나오는 구절이다. 원문은 ‘蘭根與白芷,漸之滫中,君子不近,庶人不服’이다.



미주
①곽거병(霍去病) : 전한 무제 때의 장군으로 기원전 140년에 태어나서 117년에 죽었다. 흉노(匈奴) 토벌에 큰 공을 세웠다. 곽중유(霍仲孺)가 위소아(衛少兒:무제의 비인 위황후의 언니, 大將軍 衛靑의 손윗누이)와 밀통(密通)하여 낳은 아들인데, 무예에 뛰어나고 용감했다. 18세 때 시중(侍中)이 되어 곧 위청(衛靑)을 따라 흉노토벌에 나서 공을 세워 관군후(冠軍侯)로 봉해졌다. 3년 후인 기원전 121년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어 감숙(甘肅)으로 출정하고, 그해 여름에는 북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모두 6회에 걸쳐 출격하여 흉노를 정벌했다. 정예부대를 이끌고 대군(大軍)보다 먼저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는 전법을 써서, 한제국의 영토 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워 위청과 함께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24세의 어린 나이로 죽자 무제는 크게 슬퍼하여, 장안(長安) 근교의 무릉(茂陵)에 무덤을 지어, 일찍이 곽거병이 대승리를 거둔 기련산(祁連山:天山)의 형상을 따게 하여 그의 무공을 기리게 했다.
②곽광(霍光)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8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자는 자맹(子孟)이고 지금의 산서성 임분(臨汾)인 하동 평양(平陽) 출신이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이모동생이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처음에 낭(郞)으로 시작하여 계속 승진하여 광록대부 등으로 올라 항상 무제 곁에서 시봉했다. 한무제가 죽을 때 상홍양(桑弘羊)과 함께 불러 어린 한소제를 보좌하라는 유명을 받았다. 8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소제 밑에서 대사마와 대장군을 맡아 정권을 오로지 하다가 소제가 죽자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바로 폐위시키고 한소제(漢昭帝)를 다시 추대했다 한소제는 무고(巫蠱)의 란으로 억울하게 죽은 폐태자 유거의 손자다. 한소제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서한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시원(始元) 6년 기원전 81년, 한소제의 명으로 승상 전천추(田千秋), 어사대부 상홍양 등과 함께 염철(鹽鐵)의 전매정책에 대해 전국의 학자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지금까지 전해지고 《염철론(鹽鐵論)》은 당시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발언을 기록한 책이다. 국가의 전매제(專買制)에 대한 인류 최초의 학술서다. ③장청적(莊靑翟)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5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한고조의 공신 장불식(不識)이 손자로 무강후(武强侯)를 사위(嗣位)했다.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의 패(沛) 출신으로 한고조와 동향이다. 한무제 건원(乾元) 4년 기원전 162년 어사대부에 임명되었다. 건원 6년, 두태황태후의 상례를 잘못 치뤘다는 일에 연좌되어 면직되었다 후에 태자소부가 되었다가 태자태부로 올랐다. 원수(元狩) 5년 기원전 118년, 승상에 올랐으나 어사대부 장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원정(元鼎) 2년 기원전 115년, 장탕을 두려워한 승상부의 세 장사(長史) 주매신(朱買臣) 등과 공모하여 장탕을 음해하여 함정에 빠뜨렸다. 장탕은 자살했으나 얼마 후에 사실이 들어나 하옥되었다가 자살했다. 이로써 후국은 폐지되었다.
④장탕(張湯) :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부근의 두릉(杜陵) 사람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5년에 죽었다. 무제 밑에서 정위(廷尉)와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백금(白金)과 오수전(五銖錢)의 주조를 건의하여 시행케 했으며 염철(鹽鐵)의 전매제도를 주장했으며 고민령(告緡令)을 제정토록 하여 상인들을 탄압했다. 후에 승상 청적(靑翟) 휘하의 주매신(朱買臣), 왕조(王朝), 변통(邊通) 등의 세 장사(長史)의 모함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장탕의 무죄가 밝혀지자 세 장사는 주살되고 승상 장청적은 자살했다. 무제이 철권통치에 가장 활약이 컸던 혹리(酷吏)의 대표저인 인물이다. 《사기(史記)·혹리열전(酷吏列傳)》 참조
⑤임안(任安) : 자는 소경(少卿)이고 서한왕조 때 지금의 하남성 경내의 형양(滎陽) 출신이다. 어렸을 때 가세가 빈곤하여 대장군 위청(衛靑)의 집에 들어가 사인(舍人)이 되었다. 후에 위청의 천거를 받아 랑중(郞中)으로 발탁되었다. 승진하여 익주자사(益州刺史)가 되었다.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발생한 무고(巫蠱)의 란을 조사를 맡게 된 간신 강충(江充)이 그 기회를 틈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를 모함했다. 태자가 군사를 일으켜 강충을 죽이고 한무제의 명을 받아 진압에 나선 승상 유굴리(劉屈氂)의 관군과 장안에서 큰 싸움을 벌였다. 그때 임안은 장안의 금위북군(禁衛北軍)을 감독하는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의 자리에 있었다. 태자로부터 군사를 동원하여 자기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그는 휘하의 군사를 안정시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태자의 란이 진압되자 한무제는 임안이 태자의 란의 성공 여부에 따라서 거취를 정하려고 해서 사심을 갖고 불충의 죄를 저질렀다고 요참형을 판결했다. 임안은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사마천에게 온힘을 다하여 현능하고 의기있는 선비들을 천거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낸 적이 있었다. 옥중의 임안이 처형되기 직전에야 사마천은 가까스로 편지 한통을 써서 임안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가 유명한 《보임안서(報任安書)》다. 사마천은 그 편지에서 《사기(史記)》를 완성하라는 부친으로부터 받은 유언을 지키기 위해 궁형(宮刑)이라는 치욕스러운 죄를 짓고도 자살하지 않았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⑥이천석(二千石)
1. 만석(萬石)
㉠ 해당직위: 삼공(三公 : 태위(太尉), 승상(丞相), 어사대부(御史大夫)), 소의(昭儀), 첩여(婕妤)
㉡ 월봉/연봉 : 350곡(斛)/4,200곡(1석=1곡=30kg)
㉢ 미터법 환산 중량 : 126,000kg
2. 중이천석(中二千石)
㉠ 해당직위 : 구경(九卿) : 태상(太常), 광록훈(光祿勳), 위위(衛尉), 태복(太仆), 정위(廷尉), 대홍려(大鴻臚), 종정(宗正), 대사농(大司農), 소부(少府), 집금오(執金吾) 및 중앙정부의 주무장관, 지방관 중 삼보(三輔) : 경조윤(京兆尹),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 경아(經娥)
㉡ 월봉/연봉 : 180곡(斛)/2,160곡
㉢ 미터법 환산 중량 : 64,800kg
3.이천석(二千石)
㉠ 해당직위 : 군태수(郡太守), 주목(州牧), 자사(刺史), 미인(美人)
㉡ 월봉/연봉 : 120곡/1440곡
㉢ 미터법 환산 중량 : 43,200kg
4, 비이천석
㉠ 해당직위 : 승상사직(丞相司直), 호군도위(護軍都尉), 사례교위(司隸校尉), 서역도호(西域都護), 봉거도위(奉車都尉), 부마도위(駙馬都尉), 군도위(郡都尉)
㉡ 월봉/연봉 : 100곡/1200곡
㉢ 미터법 환산 중량 : 36,000kg
⑦위강숙(衛康叔) : 주무왕의 10명의 동모제 중 9번 째 동생으로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시봉자(始封子)이며 이름은 봉(封)이다. 주나라의 창건자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처음에는 강(康)에 봉해졌기 때문에 강숙(康叔)으로 불렀다. 주무왕은 은(殷)나라를 멸하고 그 고토에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했으나 후에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뒤를 잇자 무경은 주나라가 감시역으로 보낸 삼감(三監)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무경의 란을 진압하고 은나라 고토를 위(衛), 용(庸), 패(邶) 등의 세 나라로 나눈 후에 강숙을 위에 봉했다. 다시 은나라 유민을 하수 남쪽의 옛날 은나라 발상지 상(商)으로 소개시키고 주왕(紂王)의 서형 미자개(微子開)를 봉하고 나라이름을 송(宋)이라고 부르게 했다. 후에 위강숙의 후예들은 용과 패 두 나라를 병합하여 춘추초기에 잠시 강국으로 등장했다가 전국시대 말까지 중소제후국으로 연명했다.
⑧ 백금(伯禽) : 춘추 때 노(魯)나라 시봉자로 주공(周公) 단(旦)의 장자다.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하느라 봉국인 노나라에 부임할 수 없었던 주공이 백금을 대신 보내 다스리게 했다. 봉국에 부임한 백금은 주례(周禮)를 정성을 다해 지켜 노나라를 다스렸다. 재위 중 삼감(三監)의 란 진압군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다 융족들이 침략을 물리쳤다.
⑨ 소하(蕭何)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혜제(漢惠帝) 2년인 기원전 193년에 죽은 서한 왕조의 창업공신이다. 강소성 패현(沛縣) 풍읍(豐邑) 출신으로 한고조 유방이 무위도식할 때부터 친교를 맺기 시작했다. 한고조가 풍읍에서 기의하자 일족을 이끌고 참여했다. 한고조가 항우와 형양(滎陽)가 성고(成皐)에서 고전을 하고 있을 때 소하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공신 중 가장 앞자리에 놓았다. 7천 호의 찬후(酇侯)에 봉해지고 그 일족 수십 명도 함께 후가 되었다. 한신(韓信), 장량(張良)과 함께 서한의 개국공신 삼걸(三傑)로 불려진다. 진(秦)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고조 유방이 무위무관(無位無官)일 때부터 친교를 맺었다. 유방이 진나라 토벌군을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따르며 모신(謀臣)으로 활약하였다. 진나라 수도함양(咸陽)에 입성하자 진나라 승상부(丞相府)의 도적문서(圖籍文書)를 입수하여 한(漢)나라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뒤에 한신 등의 반란을 평정하고 최고의 상국(相國)에 제수되었다. 재상 시절 진나라의 법률을 취사(取捨)하여 《구장률(九章律)》을 편찬하였다
⑩공손홍(公孫弘) : 기원전 200년에 태어나서 121년에 죽은 중국 전한(前漢) 때의 재상이다. 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인 치천(菑川) 설읍(薛邑) 출신이다. 자는 계(季)이고 봉호는 평진후(平津侯)다. 집안이 가난하여 40세로 《춘추(春秋)》를 익히고, 한무제 원년(기원전 140년) 현량(賢良)에 추천되어 박사(博士)에 올랐다가 관직에서 물러났다. 원광(元光) 5년(기원전 130년) 다시 현량으로 추천되고, 문학시험에 장원하여 박사에 임관되었다. 내사(內史)와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원삭(元朔) 5년(기원전 124년) 승상(丞相)에 임명되고 평진후(平津侯)에 봉해졌다. 최초의 승상봉후(丞相封侯)였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회남왕(淮南王)과 형산왕(衡山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책임을 지고 사임하려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아 유임하였다. 위인이 근검절약하고 재물을 경시하고 의를 중시한 척하여 겉으로는 너그러워 보이나 속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그와 틈이 생긴 사람과는 사이 좋게 지내는 척하면서 남몰래 그들에게 품은 원한을 갚았다. 주보언(主父偃)을 죽이고 동중서(董仲舒)를 산동의 교서(膠西)로 폄적시킨 일으모두 공손홍이 한 짓이다. 일찍이 급암(汲黯)이 공손송의 사람됨을 간파하고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자라고 비난했다.
⑪한선제(漢宣帝) : 기원전 90년에 태어나서 49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7대 황제로 이름은 유병기(劉病已)이었다가 황위에 오른 후에 유순(劉詢)으로 바꿨다. 한무제의 증손자이며 폐태자 유거(劉據)의 손자아며 한무제의 증손자다. 무고의 란으로 유거와 부친 유진(劉進)이 살해될 때 유순은 강보에 싸인 갓난아이였음으로 죽음을 면하고 몰래 조모 사량제(史良娣)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민가에 섞여 살던 어린 유수은 항상 삼보(三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하층민들의 생활을 몸소 체득하고 관리들이 행하는 정치의 이해득실을 알게 되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남다르던 유순은 황노와 형명학에 심취했다. 기원전 74년 한소제(漢昭帝)가 죽자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제로 추대했으나 곧이어 난잡하다는 이유를 들어 폐위시킨 대장군 곽광은 유순을 찾아 황제로 옹립했다. 재위 기간중 옥사를 줄이고 형벌을 완화시켰으며 현량들을 임용하고 요역과 부세를 줄여 생산을 장려햇다. 과거 한무제의 무단정치로 서한왕조의 붕궤(崩潰)된 경제기반과 피폐해진 사회는 한선제의 18년에 걸친 집정기간 동안 일약 안정을 되찾고 치세를 이루게 되었다. 역사상 일을 선제중흥(宣帝中興)이라고 한다.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여 서역을 중국역사상 최초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⑫상관걸(上官傑)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80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다. 농서 상규(上邽) 출신으로 기사(騎射)에 능해 군대에 들어갔다. 젊었을 때 우림기문랑(羽林期門郞)이 되었고 무제에 의해 감천궁(甘泉宮)에서 발탁되어 북변을 지키는 장수가 되어 흉노를 물리쳤다. 무제 후원 2년 기원전 87년 무제가 병이 들었을 때 좌장군(左將軍)의 신분으로 곽광(霍光)과 함께 어린 나이로 제위를 잇게 된 소제(昭帝)를 보좌하라는 고명을 받았다. 시원(始元) 원년 기원전 85년 안양후(安陽侯)에 봉해져 식읍 3천 호를 받았고 그의 손녀는 소제의 황비가 되어 곽광과 권력을 두고 다투었다. 원봉(元鳳) 원년 기원전 80년 모반죄로 그의 아들이며 표기장군(驃騎將軍) 상관안(上官安)과 함께 살해되고 그의 집안은 멸족되었다.

《삼왕세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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