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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척세가(外戚世家)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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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19 외척(外戚)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제왕들과 그 제왕들이 이룩한 법도를 계승한 군주들은 내면의 훌륭한 덕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외척의 도움에 힘입은 바도 크다. 하(夏)나라는 도산씨(塗山氏)①의 도움을 받아 흥성했으며 걸왕(桀王)이 쫓겨난 원인은 말희(妺姬) 때문이었다. 후에 은(殷)나라는 유융씨(有娀氏)②의 도움 때문에 일어났으며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를 총애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 이어서 주(周)나라는 강원(姜嫄)③과 대임(大任)④이 있었기 때문에 흥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유왕 역시 포사(褒姒)를 음란하게 탐해 견융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역경(易經)은 건(乾)과 곤(坤) 양괘를 기본으로 했으며 시경(詩經)은 《관저(關雎)》로부터 시작했다. 《서경(書經)》은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낸 요임금을 찬미하고 있으며⑤ 《춘추(春秋)》는 아내를 얻을 때 친히 나가서 맞이하지 않은 행위를 예에 어긋난다고 비난했다. 부부사이의 관계는 사람이 지켜야하는 도리의 가장 큰 규범이다. 또한 혼인을 함에 있어서 예(禮)의 운용은 지극히 조심해서 행해야한다. 무릇 음조가 잘 어울리는 이유는 사계절의 절기가 조화를 잘 이루기 때문이며, 음양의 변화는 만물의 성장을 결정하는 근본이다.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이란 능히 도를 널리 행할 수 있으나 천명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하도다! 부부간의 사랑은 군주라고 해서 신하에게서 얻듯이 구할 수 없으며 부친이 그 아들에게서 구하듯이 할 수 없으니 하물며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있어서랴! 설사 남녀가 마음이 맞아 서로 사랑했을지라도 어떤 때는 자손을 두지 못할 경우도 있으며. 또한 비록 자손을 두더라도 어떤 때는 천수를 누릴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찌 그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공자가 천명을 언급하는 일은 매우 적었는데 그것은 천명을 이야기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변화에 달통하지 않았고 또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능히 판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태사공이 말한다.

「진나라 이전의 외척들 기사는 매우 간략하여 그 정황을 상세하게 기술하기 매우 어렵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여아후(呂娥姁)⑥가 고조의 정비가 되어 아들을 낳아 태자가 되었다. 이윽고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여 고조의 총애를 잃었다. 척부인을 얻어 매우 총애한 고조는 척부인이 낳은 아들 여의(如意)를 여러 번 태자로 대신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윽고 고조가 죽으매 여후는 척씨 일족을 멸족시키고 조왕 여의를 주살했다. 고조의 후궁 중 단지 총애를 받지 않고 소원한 여인들만이 화를 당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여후(呂后)의 장녀 노원공주는 선평후(宣平侯) 장오(張敖)⑦의 처이고 장오의 딸은 효혜제(孝惠帝)의 황후다. 여태후로써는 효혜황후가 며느리에 외손녀였음으로 백방으로 노력하여 후사를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은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후궁에게서 낳은 아이를 취해 효혜황후가 낳은 아들이라고 꾸몄다. 이윽고 효혜제가 죽자 천하가 그때까지 미처 안정되지 않아 후사의 일이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척의 신분을 높이고 여씨 형제들을 후왕으로 삼아 황실신분을 보좌하도록 했고 다시 여록(呂祿)⑧의 딸을 소제(少帝)의 비로 삼아 외척과 연결된 황실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려고 했으나 별로 소용이 없었다.

죽은 여후는 장릉(長陵)에 고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여후가 죽으매 여록과 여산 등은 주살되지나 않을까두려워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키려고 모의했다. 대신들이 힘을 합쳐 여씨 형제들을 토벌했다. 이는 유씨들의 황실을 잇게 하려고 인도한 하늘의 힘으로 결국은 여씨들을 멸했다고 할 수 있다. 오로지 여산의 딸 효혜황후만이 죽음을 면하고 북궁에 안치되었을 뿐이었다. 대신들이 대왕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했으니 이가 효문제로 한나라 황실의 종묘를 받들어 기업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것이야 말로 하늘의 뜻이 아니란 말인가? 이것이 천명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박태후(薄太后)의 부친은 오(吳)나라 사람으로 성은 박씨(薄氏)다. 진(秦)나라 때에 그는 위(魏)나라 왕가의 종녀인 위온(魏媼)과 사통하여 박희(薄姬)를 낳았다. 박희의 부친은 산음(山陰)에서 죽었는데, 그로 인해 산음에 매장되었다.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자 위표(魏豹)가 자립해서 위왕(魏王)이 되었다. 이 때 위온은 그녀의 딸을 궁에 들여보냈다. 그 전에 위온의 부탁으로 박희의 관상을 본 허부(許負)는 그녀는 장차 천자를 낳을 운명이라고 했다. 이때 한왕(漢王) 유방(劉邦)은 형양(滎陽)에서 항우(項羽)와 대치하고 있었음으로 천하는 아직 형세가 정해지기 전이었다. 그 전에 한(漢)나라와 연합하여 초(楚)나라를 공격했던 위표는 박희가 천자를 낳을 운명이라는 허부의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에 위표는 한왕을 배반하고 중립을 지키다가 후에 초나라에 붙었다. 한왕이 한신과 조참(曹參) 등을 시켜 위왕 표를 공격하게 했다. 한나라는 위왕을 포로로 잡고 위나라를 폐해 군으로 삼았다. 이때 박희도 포로가 되어 잡혀와 베를 짜는 부서로 보내져 직녀(織女)가 되었다. 이윽고 위표가 죽자 직녀들이 일하는 곳으로 들어간 고조가 미색이 매우 뛰어난 박희를 보고 조칙을 내려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조는 일 년이 넘도록 박희를 찾지 않았다.

 처음에 박희가 젊었을 때에 관부인(管夫人), 조자아(趙子兒) 등과 친하게 지냈다. 그때 세 사람은 약속했다.

「누가 먼저 부귀하게 되든지 간에 서로를 잊지 말자!」

그리고 얼마 후에 관부인과 조자아가 먼저 한왕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날 하남궁(河南宮)의 성고대(成皐臺)에서 한왕을 모시던 두 미인이 서로 박희와 옛날 했던 약속을 조롱하며 웃었다. 한왕이 듣고 그 까닭을 물었다. 두 미인은 세 사람이 어렸을 때 한 약속을 고했다. 한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박희를 매우 불쌍히 여겨 그 날로 그녀를 불러 잠자리에 들게 했다. 박희가 한왕에게 말했다.

「어제 밤 저는 푸른 용이 저의 배 위에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한왕이 말했다.

「그 꿈은 네가 매우 귀하게 될 징조이다. 내가 너를 도와 그 일을 이루도록 하겠다.」

이윽고 동침을 하자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뒤에 대왕(代王)을 지내다 황제가 된 문제(文帝)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 박희는 고조를 만나는 일이 아주 적었다.

고조가 죽자 고조의 총애를 받았던 척희를 비롯한 여러 비빈들은 여태후의 분노를 사서 모조리 궁안에 유폐시키고 궁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박희만은 고조의 총애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궁밖으로 나가 그의 아들을 따라 대(代)로 들어가 대왕의 태후가 되었다. 태후의 동생 박소(薄昭)도 함께 대나라에 갔다.

대왕이 선지 17년 만에 여태후가 죽었다. 대신들이 그 후사를 잇게 하기 위해 의론했는데 외척으로써 너무 강성했던 여씨들로 인해 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박씨들이 어질고 선하다고 해서 대왕을 맞이해서 효문제로 세웠다. 이로써 태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동생 박소는 지후(軹侯)에 봉해졌다.

그 전에 박태후의 모친 역시 죽었는데 역양(櫟陽)의 북쪽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영문후(靈文侯)로 추존한 부친을 위해 그의 고향 회계군(會稽郡)에 원읍(園邑)을 설치하고 장승(長丞)이하 관리들을 두어 묘역을 지키며 받들게 했다. 그들은 때가 되면 침묘(寢廟)⑨에 음식을 올려 지내는 제사는 모두 한나라의 예제(禮制)에 규정된 법에 따랐다. 그리고 역양의 북쪽에 장사지낸 영문후의 부인 묘역에도 원읍을 설치하여 영문후와 똑같은 예제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박태후의 친가인 위씨 형제들은 조실부모했기 때문에 위씨 일가들이 그녀를 힘껏 받들었다. 그 결과 위씨들은 가세를 회복했으며 또한 그들 각각의 친소에 따라 상을 받았다. 박씨들 중에 후에 봉해진 사람은 단지 1명에 불과했다. 박태후는 문제가 죽고 2년 후인 효경제(孝景帝) 2년에 죽어 남릉(南陵)에 장사지냈다. 여태후가 고조와 함께 장릉에 합장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조의 릉에 합장되지 못하고 효문제의 릉인 패릉(覇陵)과 가까운 곳에 별도로 축조하여 그곳에 묻혔다.

두태후(竇太后)는 조(趙)나라 청하(淸河)⑩의 관진(觀津)⑪ 사람이다. 여태후가 살아 있을 때 두희(竇姬)는 양가의 처녀로 입궁하여 여후의 시종이 되었다. 후에 궁내에 궁녀의 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여후는 그녀들을 내보내면서 제후왕들에게 각각 5명씩을 하사했다. 두희 역시 그 궁녀들 행렬에 끼어 궁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친정이 있는 청하군이 조나라와 가깝다고 생각한 두희는 궁녀의 출궁 일을 맡아보는 환관에게 특별히 간청하며 말했다.

「제 이름을 반드시 조나라로 가는 궁녀들의 대열에 넣어주십시오.」

그러나 두희의 부탁을 잊어 먹은 환관이 그녀를 대(代)나라로 가는 대열에 끼어 넣었다. 이윽고 각 제후왕들에게 하사될 궁녀들의 명부를 상주하자 여후가 조칙을 내려 두희는 대나라로 떠나야만 했다. 두희가 환관을 원망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대나라로 한사코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관리들이 강제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궁녀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이윽고 대나라에 당도한 두희는 대왕(代王)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먼저 표(嫖)란 딸을 낳고 후에 아들 둘을 낳았다. 그때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던 대왕의 왕후는 대왕이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대왕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왕후가 난 네 명의 아들도 모두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효문제가 서고 몇 달 후에 공경(公卿)들이 태자를 세우기를 청하자 그때는 두희의 큰 아들이 가장 나이가 많았음으로 태자가 되었다. 이어서 두희를 황후로 세우고 딸 표는 장공주(長公主)가 되었다. 다음 해 작은 아들 유무(劉武)가 대왕에 봉해졌다가 다시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이가 양효왕(梁孝王)이다.

두황후의 양친은 일찍 세상을 떠나 관진(觀津)에 장사지냈다. 그래서 박태후는 관리에게 조칙을 내려 두황후의 부친을 추존하여 안성후(安成侯)에 봉하고 그 모친은 안성부인(安成夫人)이라고 부르게 했다. 청하군(淸河郡)에 원읍(園邑)을 설치하여 200호(戶)의 민가를 할당하고 장승(長丞)을 두어 지키게 했는데, 영문후의 능원에서 행하는 예의와 똑같이 하게 했다.  

두황후의 오빠는 두건(竇建)이고 자를 장군(長君)이라 했고, 남동생 두광국(竇廣國)은 자를 소군(少君)이라 했다. 소군이 4-5 살쯤 되었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의 유괴를 당해 팔리게 되었으나 그 집안사람들은 그가 어디로 팔려갔는지 몰랐다. 광국이 10여 집으로 되팔리며 전전하다가 의양(宜陽)⑫에 이르게 되어 그 주인을 위해 산에 들어가 숯을 구었다. 어느 날 저녁 때 강변에서 100여 사람과 함께 절벽 밑에서 자는데 갑자기 절벽이 무너져 모두가 압사당하고 단지 소군 혼자 화를 면하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스스로 점을 쳐보니 후일에 후(侯)의 자리에 오fms다는 점괘를 얻었다. 그래서 소군은 그 주인집에서 도망쳐 장안으로 들어갔다. 광국은 새로 책봉된 황후 두씨의 원래 고향은 관진(關津)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유괴될 때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그래도 자기의 고향과 성은 기억하고 있었던 광국은 당시 어렸을 때 항상 그의 누이를 따라가 함께 뽕밭에 가서 잎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던 일을 상기하고는 그것을 증거로 하여 스스로 서장을 써서 올렸다. 두황후가 그 서장의 내용을 황제에게 이야기했다. 문제가 조칙으로 광국을 불러 물어보니 과연 그의 말이 구체적이고 사실과 부합했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묻자 광국이 대답했다.

「제가 서쪽으로 떠나갈 누이와는 역참에서 헤어지게 되었는데 쌀뜨물을 가져와 제 머리를 씻어 주고 또 밥을 구해와 나에게 먹인 후 헤어졌습니다.」

그러자 두태후는 소군을 부여잡고 통곡을 했는데 눈물과 콧물이 엉켜 빗물처럼 흘러내렸다. 주위에 있던 시자들 모두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려 황태후가 동생을 상봉하는 슬픈 장면을 도왔다. 이어서 소군에게 넓고 화려한 전답과 저택 및 금전을 하사하고 다른 두씨 형제들까지 후에 봉하여 그 가족들을 모두 장안으로 옮겨 살게 했다.

강후(絳侯)와 관장군(灌將軍)⑬ 등이 말했다.

「우리들이 살아 있는 동안 우리들의 운명은 곧 이 두 사람의 손 안에 달려 있소. 그 두 사람은 출신이 미천하므로 그들을 위해서 스승이나 빈객(賓客)을 선택해서 가르치지 않을 수 없소. 그렇지 않으면 또 여씨가 일으킨 대사가 다시 재현될 것이오.」

그래서 나이가 많고 너그러우며 관대한 학자 가운데서 품덕이 훌륭하고 절조를 갖추고 품행이 방정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두 사람과 숙식을 같이하며 가르치게 했다. 장군(長君)과 소군(少君)은 이로써 공손하고 겸손하며 양보하는 군자가 되었으며, 감히 존귀한 지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 면전에서 교만하게 굴지 않았다.

두황후가 중병을 얻어서 두 눈이 실명되었다. 한편 문제는 한단(邯鄲) 출신의 신부인(愼夫人)과 윤희(尹姬)를 총애했으나 그녀들에게서는 모두 아들을 얻지 못했다. 효문제가 서거하자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효경제(孝景帝)는 광국을 장무후(章武侯)에 봉했다. 그때 두장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팽조(彭祖)를 불러 남피후(南皮侯)로 봉했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이 일어나자 협객이나 선비들과 사귀는 것을 좋아했던 두태후의 사촌 동생 두영(竇嬰)은 군대를 통솔하여 군공을 세워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두씨는 이로써 모두 세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두태후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학설을 좋아하였으므로, 경제(景帝)와 태자 및 두씨의 외척들은 모두 황제, 노자의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학술을 공경하여 받들었다. 두태후는 효경제보다 6년 늦게 서거하였는데 문제와 패릉(霸陵)에 합장되었다. 그녀는 모든 동궁(東宮)의 금전 재물을 장공주 표(嫖)에게 주라는 조서를 남겼다.

왕태후는 괴리(槐里)⑭ 사람이다. 그녀의 모는 옛날 연왕 장도(臧荼)의 후손으로 이름은 장아(臧兒)다. 장아가 괴리의 왕중(王仲)에게 시집을 가서 그와의 사이에 아들 신(信)을 낳고 다시 두 딸을 낳았다. 그러나 왕중이 일찍 죽자 장아는 다시 장릉(長陵)의 전(田) 씨에게 개가해서 아들 분(蚡)과 승(勝)을 낳았다. 그 전에 장아가 장녀를 김왕손(金王孫)에게 시집을 보내 그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다. 후에 장아가 그녀의 딸들을 위해 산가지 점을 쳐 두 딸이 후에 귀한 신분이 된다는 점괘를 얻었다. 그래서 그녀는 후에 두 딸이 귀한 신분이 되면 의탁하려는 마음으로 김씨에게서 딸을 빼앗아 왔다. 김씨가 노하여 한사코 자기 아내와 헤어지려고하지 않았으나 장아는 자기 딸을 태자궁으로 들여보냈다. 태자가 장아의 딸을 매우 총애하여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남자 아이를 뱄을 때 왕미인은 태양을 품은 꿈을 꾸었다. 이를 태자에게 고하자 태자가 말했다.

「그대가 낳은 아이가 귀하게 될 징조다.」

왕미인이 아직 아들을 낳기도 전에 효문제가 서거하여 효경제가 즉위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전에 장아는 작은 딸 아후(兒姁)도 함께 입궁시켰다. 아후 역시 효경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 넷을 낳았다.

효경제가 태자 시절 박태후는 박씨 여인을 태자비로 삼았다. 이윽고 경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박씨는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총애를 잃고 이윽고 박태후가 죽자 박황후는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경제의 장남은 이름이 영(榮)으로 그의 모친 율희(栗姬)는 제나라 출신이다. 유영이 효경제의 아들 중 제일 나이가 많았음으로 태자가 되었다. 장공주 표(嫖)는 자기의 딸을 태자의 비로 삼으려고 했다. 율희는 원래 투기가 심했다. 그래서 한경제는 여러 미인들을 장공주를 통해 만났는데 모두가 율희보다 더 총애를 받았다. 원한이 날이 갈수록 깊어진 율희는 장공주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공주가 그의 딸을 왕부인의 아들과 혼인을 청하자 왕부인은 허락했다. 율희에게 원한을 품은 장공주는 경제에게 매일 율희의 잘못된 점을 헐뜯으며 말했다.

「율희와 여러 귀부인들 및 총희들과 함께 모임을 갖곤 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시자들에게 시켜 그들의 등 뒤에서 저주를 행하고 요언과 혹언(惑言)으로 도술을 부리게 하고 있습니다. 」    

경제가 이로써 율희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경제는 옛날부터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항상 편안한 마음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제후왕으로 봉해진 여러 아들들을 모아놓고 율희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후에 내가 죽게 되면 이 아이들을 잘 보살펴주기 바라오.」

율희는 화가 나서 대답도 하지 않으며 그 행동이 매우 불손했다. 경제가 매우 불쾌해 했으나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장공주는 한편으로는 왕부인이 낳은 왕자의 장점을 매일 칭찬하자 경제 역시 그들이 현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옛날 왕미인이 꾼 태몽과도 부합된다고 생각은 했으나 그러나 확실히 태자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정하지 않았다. 율희를 원망하고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여전하다고 생각한 왕부인은 은밀히 사람을 시켜 대신들로 하여금 율희를 황후로 세우라고 부추기게 했다. 대행(大行)⑮이 상주를 올리며 말했다.

「아들은 어미로써 귀해지고 어미는 아들로써 귀해집니다. 지금 태자의 모친이 봉호가 없으니 마땅히 황후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경제가 화를 내며 말했다.

「너의 직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와 같은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단 말인가?」

경제가 대행의 죄를 물어 주살하고 태자를 폐하고 임강왕(臨江王)으로 내렸다. 율희가 더욱 원한에 사무쳤으나 황제를 만나지도 못하고 홧병이 나서 죽었다. 결국 왕부인이 황후가 되었고 그의 아들이 태자가 되었다. 황후의 오빠 왕신(王信)은 개후(侯)에 봉해졌다.

경제가 서거하고 태자가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태후의 모친 장아를 평원군으로 추존하고 왕태후의 동생 전분(田蚡)은 무안후(武安侯)에, 전승(田勝)은 주양후(周陽侯)에 봉했다.

경제는 모두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한 명은 황제가 되고 나머지 12명은 제후왕이 되었다. 그리고 아후(兒姁)는 일찍 죽었으나 그녀의 소생 네 아들도 모두 제후왕이 되었다. 왕태후의 큰 딸은 평양공주(平陽公主)고 차녀는 남궁공주(南宮公主)고 삼녀는 임려공주(林慮公主)다.

  개후 왕신은 술을 매우 좋아했고 전분과 전승은 재물을 탐하고 언사를 교묘하게 꾸밀 수 있었다. 젊어서 일찍 죽은 왕중(王仲)은 괴리(槐里)에 묻혔고 공후(共侯)에 추존되어 원읍을 설치하고 200호의 민가를 할당하여 그 비용으로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어서 평원군 장아가 죽자 전씨를 따라 장릉에 장사지내고 공후와 똑같이 원읍을 설치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태후는 효경제가 죽고 16년 지난 원삭 4년 기원전 125년에 죽었다. 왕태후는 경제와 함께 양릉(陽陵)에 합장했다. 왕태후의 집안에서는 모두 세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위황후(衛皇后)의 자는 자부(子夫)로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친의 성을 따라 위씨(衛氏)로 성씨를 삼았다.⑯ 위온(衛媼)은 평양후 봉읍 출신으로 이다. 위자부는 평양공주 저택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일했다. 무제가 즉위했으나 몇 년이 지나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 평양공주가 양가집의 규수 10여 명을 구해 집에 두고 화장으로 아름답게 치장시킨 후에 대기시켰다. 이윽고 무제가 패상(覇上)⑰에서 불계(祓禊)⑱를 지내고 황궁으로 귀환하하다가 평양공주의 집을 들르게 되었다. 황제는 곁에서 시중을 드는 미인들을 보았으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윽고 식사를 끝내고 노래를 부르기 위해 들어온 위자부를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날 무제가 자리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일어나자 자부가 상의(尙衣)⑲의 역할을 하기 위해 어가로 따라 갔다가 그 안에서 황제의 은총을 입었다. 황제가 환궁하여 위자부와의 일을 매우 기뻐했다. 그래서 황제는 평양공주에게 황금 천 근을 하사했다. 그래서 평양공주는 위자부를 궁으로 들여보냈다. 위자부가 수레에 오르자 평양공주는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궁에 들어가면 식사를 거르지 말고 챙겨먹고 황상의 총애를 얻도록 노력하라. 귀한 신분이 되거든 내 은혜를 잊지 말기 바란다. 」

자부가 입궁해서 1년이 지났으나 황제의 총애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무제는 궁녀들 중 자기에게 총애를 받지 못한 여인들을 궁밖으로 내보내 자기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위자부는 그 일로 인해 무제를 알현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궁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청했다. 황제가 그녀를 애처롭게 여겨 다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위자부는 아이를 갖게 되었다. 이후로 위자부는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1남 3녀의 자식을 낳았다. 아들의 이름은 거(據)다.

그 전에 황제가 태자였을 때 장공주(長公主)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했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태자비는 황후가 되었다. 성이 진(陳) 씨인 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황제가 제위에 오르는 데는 장공주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황비는 황제에게 매우 거만하고 함부로 굴었다.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것을 본 황후는 매우 분격하여 몇 번이나 그녀를 죽이려고 시도했다. 황제가 진황후에 대해 더욱 분노했다. 더욱이 진황후가 몰래 사술을 쓰는 부인을 시켜 위자부를 저주한 일을 무제가 알게 되었다.⑳ 이 일로 인해 진황후는 폐출되고 위자부가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진황후의 모는 대장공주로 경제의 누이다. 여러 번 무제를 비난하며 평양공주에게 말했다.

「황제는 내가 아니었으면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내 딸을 내쳐서 버렸으니 어찌 그것은 스스를 사랑하지 않고 본분을 잃지 않은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평양공주가 대답했다.

「진황후가 폐위 된 일은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진황후는 애를 낳으려는 생각으로 물경 9천 만 전의 돈을 의약비로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위자부가 황후가 되었을 때는 위장군(衛長君)21은 이미 죽었음으로 위청을 불러 장군이 되게 했다. 위청은 흉노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장평후(長平侯)로 봉해졌다. 아직 강보에 싸여있던 위청의 세 아들도 모두 봉해져 열후가 되었다. 한편 위황후의 언니 위소아가 평양후 봉국의 소리(小吏)였던 곽중유(霍仲儒)와 사통하여 낳은 곽거병(霍去病)이 흉노를 정벌하여 군공을 세우고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지고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다. 이윽고 위황후의 아들 거(據)가 태자가 되었다. 위씨 종족들은 모두 다섯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후에 위황후의 미색이 쇠퇴하자 조나라의 왕부인(王夫人)이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아 제왕에 봉해졌다22. 왕부인이 일찍 죽고 중산(中山) 출신의 이부인(李夫人)이 총애를 받아 낳은 아들은 창읍왕(昌邑王)23에 봉해졌다.

이부인은 일찍 죽었으나 그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음악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협률도위(協律都尉)가 되었다. 협률이란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일을 관장하는 관청이다. 후에 형제들은 모두 간통죄에 연좌되어 멸족당했다. 그러나 그때 맏형 이광리(李廣利)는 이사장군(貳師將軍)24이 되어 대완(大宛)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음으로 주살을 면했다. 이광리가 돌아오자 황제는 이씨들이 멸족된 일을 불쌍하게 여겨 그를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다른 희빈이 낳은 두 아들은 연왕(燕王)25과 광릉왕(廣陵王)26에 봉해졌으나 총애를 받지 못한 모친을 걱정하다가 근심에 차서 일찍 죽었다.

이윽고 이부인지 죽자 윤첩여(尹婕妤)27와 같은 무리들이 다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노래하는 가녀들 출신으로 왕후나 사대부들 집안의 규수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의 정식 배필이 될 수 없었다.

저선생이 말한다.

내가 낭(郎)의 신분이었을 때 한나라 황가의 옛날 일을 모두 알고 있었던 종리생(鐘離生)에게 자주 묻곤 했었다. 종리생이 말했다.

「왕태후가 민간에 있을 때 여자 아이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비는 김왕손(金王孫)이라는 사람이었다. 김왕손이 죽고 다시 경제의 뒤를 이어 무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왕태후는 독신으로 살아있었다. 평소에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이름이 언(嫣)인 한왕손(韓王孫)이 기회를 얻어 태후의 딸이 장릉(長陵)에 살아 있다고 알려주었다. 무제가 말했다.

「어째서 일찍 말하지 않았는가?」

무제는 즉시 사자를 먼저 보내 살피도록 한 바 과연 김왕손의 딸이 집에 있었다. 이윽고 무제가 김왕손의 딸을 맞이하기 위해 직접 행차했다.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명을 발한 후에 무제를 태운 어가는 선두에 정기(旌旗)를 든 기병을 앞세우고 횡성문(橫城門)으로 나가 장릉(長陵)으로 달려갔다. 작은 시장마을을 지나 서쪽으로 돌아 골목길을 들어갔는데 골목 어귀에 있던 대문이 잠겨있었다. 문을 밀어 강제로 열고 수레를 탄 체 곧바로 안으로 들어간 무제는 김씨의 집 대문 밖에서 멈춰섰다. 무제는 기병들을 시켜 김씨의 집을 포위하도록 하여 김씨가 도망치는 사태에을 대처하게 했다. 황제가 친히 갔음에도 김씨녀를 만나지 못할까 걱정해서였다. 이윽고 황제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자기가 왔음을 알리도록 하자 집안의 사람들이 놀라 두려워하고 김씨녀는 도망쳐 침상 밑에 숨었다. 군사들이 김씨녀를 찾아 부축하여 문밖으로 나와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무제가 수레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아! 큰 누님, 어찌하여 이렇듯 깊은 곳에 숨어계셨습니까?」

황제가 명을 내려 김씨녀를 뒷수레에 싣고 궁궐로 돌아와 곧바로 장락궁(長樂宮)으로 들어갔다. 무제가 행차 도중에 조령으로 궁문을 지키는 간수에게 자기의 명첩을 보내 태후에게 통지하도록 했기 때문에 곧바로 달려가 태후를 알현할 수 있었다. 태후가 말했다.

「황제를 번거롭게 했소. 어디서 오는 길이오?」

황제가 대답했다.

「지금 장릉으로 행차하여 저의 누이를 찾아 데리고 왔습니다.」

황제가 김씨녀를 쳐다보며 외쳤다.

「태후께 알현하시오.」

태후가 말했다.

「네가 정녕 내 딸이란 말이냐?」

김씨녀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태후가 흐느껴 울고 김씨녀도 함께 따라 흐느껴 울었다. 무제는 잔에 술을 따라 태후에게 바쳐 축수하고 이어서 천만 전의 돈과 노비 3백 명, 전답 백 경(頃)28, 가장 좋은 저택을 누이에게 하사했다. 태후가 황제에게 감사하며 말했다.

「황제로 하여금 너무 많은 비용을 쓰게 하는구려!」

이어서 평양공주(平陽公主), 남궁공주(南宮公主), 임려공주(林慮公主) 세 공주를 불러 그 누이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하고 수성군(脩成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수성군은 아들과 딸 각각 한 명씩을 두고 있었다. 아들은 수성자중(脩成子仲)이라고 불렀고 딸은 제후왕의 왕후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유씨가 아니었으나 그들을 가엾게 여긴 태후 때문에 후에 봉해졌다. 수성자중은 성격이 원래 교만하고 방자하여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모두 그를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위자부가 황후로 책봉되고 후에 자가 중경(仲卿)인 그의 동생 위청(衛靑)은 대장군에 올라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위청에게는 아들에 넷이 있었는데 장자 위항(衛伉)은 위청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위청의 작위와 봉호를 물려받게 되었고 다시 황제의 시종관(侍從官)인 시중(侍中)에 임명되어 존귀함과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 밖의 3형제는 모두 후가 되어 각기 1천 3백호의 식읍을 받고 음안후(陰安侯), 발간후(發幹侯), 의춘후(宜春侯)의 봉호로 불러져 귀한 신분으로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노래 불렀다.

「아들을 얻었다고 기뻐하지 말고 딸을 낳았다고 노하지 말라! 다만 위자부(衛子夫)를 낳아 천하를 제패한 일을 보지 않았는가? 」

그때 평양공주는 남편 평양후(平陽侯) 조시(曹時)가 악질에 걸려 봉국에 상주했음으로 장안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래서 마땅히 열후 중에서 한 사람을 찾아 혼인을 시키려고 했다. 공주의 측근들이 장안성에 거주하는 열후들에 대해 의론한 결과 모두가 대장군 위청(衛靑)이라면 가하다고 말했다. 공주가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위청 대장군은 원래 우리 집의 사인(舍人) 출신으로 항상 말을 타고 나를 호위하던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어찌 그를 나의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좌우에서 모시던 시종들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대장군의 누이는 황후의 신분이고 큰 아들과 세 아들은 모두 열후에 봉해져 그의 부귀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있습니다. 공주께서는 어찌 그를 가볍게 보십니까? 」

그러자 공주가 위청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어서 황후에게 알리고 다시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황제는 그 즉시 조서를 내려 위장군은 평양공주와 혼인하라고 명했다.   

저선생이 말한다.

「남편은 용과 같이 변한다. 좌전에 이르기를 ‘뱀이 변하여 용이 되나 그 무늬는 변하지 않는다. 가장이 변하의 군주가 되나 그 성은 또한 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장부가 부귀할 당시는 모든 나쁜 점을 가려 찬란한 영화만이 빛나지만 빈천할 때는 비록 하찮은 일일지라도 결코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이라!」

 무제 때 부인 윤첩여(尹婕妤)가 총애를 받았다. 형부인(邢夫人)은 형아(娙娥)29의 품계를 갖고 이었는데 사람들은 ‘형하(娙何)’라고 불렀다. 형하는 봉록이 중2천석이고 용화(容華)는 비2천석이다30. 또한 열후와 같은 봉록을 받는 첩여는 언제나 황후로 올랐다.

황제가 윤부인과 형부인을 동시에 총애하면서 조명을 내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윤부인이 무제에게 형부인을 만나보고 싶다고 청하자 황제가 허락했다. 황제는 다른 여인을 형부인으로 꾸미고 수십 명의 시종으로 하여금 받들게 했다. 이윽고 형부인으로 꾸민 여인이 윤부인 앞으로 다가오자 윤부인이 보고 말했다.

「 이 사람은 형부인이 아닙니다.」

무제가 말했다.

「어째서인가?」

윤부인이 대답했다.

「제가 보니 저 여인의 용모와 자태는 황제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다시 형부인으로 하여금 그 옷을 입게 하고 혼자 나오도록 했다. 윤부인이 멀리서보고 말했다.

「이제야 진짜 형부인이 나오는구나!」

그리고는 목을 놓아 흐느껴 울면서 형부인보다 아름답지 못한 자기의 용모를 슬퍼했다. 그래서 속담에 이르기를 ‘미녀가 방안에 들어가면 추녀들의 원수가 된다.‘라고 했다.

  

저선생이 말한다.

「목욕을 하는 데 반드시 강이나 바다에서 할 필요는 없으나 다만 몸에 오물을 씻을 수는 있어야 한다. 선비가 세상에 나와 반드시 현능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도리는 알아야 하는 법이고, 여인은 반드시 귀한 집 출생일 필요는 없지만, 다만 정숙하고 마음이 착해야 한다. 좌전에 말하기를 ‘여자는 아름답거나 추하거나를 불문하고 방에 들어가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는 현능하거나 불초하거나를 불문하고 벼슬에 나아가면 시기를 받게 된다. 아름다운 여인은 추녀들의 원수가 되니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아니겠는가?

구익부인(鉤弋夫人)의 성은 조(趙)로 하간(河間) 사람이다. 무제의 총애를 받아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소제(昭帝)다. 무제가 나이 70세에 소제를 낳았다. 소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는 5살의 아이였다.31 위부인의 소생 유거(劉據)가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연왕 유단(劉旦)이 서장을 올려 도성에 올라가 숙위(宿衛)를 하겠다고 청했다. 무제가 노하여 그의 사자를 북궐(北闕)에서 참수했다. 황제가 감천궁에 머물 때 화공을 불러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업고 있는 모습을 그리라고 명했다. 좌우의 군신들은 무제가 막내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며칠 후, 황제가 구익부인의 잘못을 지적하며 책했다. 부인이 비녀와 귀거리 등의 장식품을 떼어낸 후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황제가 좌우의 시종들에게 말했다.

「그녀를 끌고가 액정옥(掖庭獄)32에 가두어라! 」

구익부인이 고개를 돌려 무제를 쳐다보자 무제가 말했다.

「빨리 가거라! 너는 결코 그곳에서 살아나오지 못하리라!」

구익부인은 결국 운양궁(雲陽宮)에서 죽었다. 그때 폭풍이 불어 먼지가 크게 일어나 세상을 덮자 백성들은 그녀의 일로 인해 가슴 아파했다. 사자가 밤에 관을 들고 가서 그녀를 묻고 그 자리에 표식을 해 두었다. 그 후에 황제가 한가할 때 좌우의 시종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좌우의 시종들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고는 어째서 그 어미 되는 사람은 버렸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의 시비(是非)는 아이들이나 어리석은 사람들도 알 수 있는 일일 뿐이다. 옛날 나라에 란이 일어난 원인을 캐보면 어린 군주에 젊은 모후 때문이었다. 황제의 모후가 젊은 과부에 오만하고 방자하며 더욱이 음란하기가 그지없다면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대들은 옛날 여태후의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래서 무제를 위해 아들을 낳은 여러 비빈들은 사내건 계집아이건 불문하고 모두 견책하여 죽이지 않은 법이 없었다. 어찌 그 일을 현명하고 성스러운 행동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현명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후세를 위한 배려차원의 계책임으로 이것은 확실히 우둔하고 일천한 식견의 유생들이 따를 수 없는 심모원려다. 시호를 무(武)라 했는데 어찌 그것이 헛된 이름이겠는가?


주석

①도산씨 : 중국 고대의 부족 이름이다. 우임금은 도산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계(啓)를 낳았다. 계가 우임금을 계승하여 하(夏)왕조를 열었다.

②유융씨(有娀氏) : 은(殷)나라의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그녀는 유융씨(有娀氏) 부족의 딸이며 제곡(帝嚳)의 둘째 부인이었다. 제곡은 상고시대 전설상의 오제 중의 한 명이며 은나라를 세운 상탕의 선조인 설(薛), 주나라를 세운 주문왕의 선조인 후직(后稷) 기(棄), 그리고 요(堯)임금의 아버지다.간적(簡狄)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 설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禹)임금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③강원(姜嫄) :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제곡(帝嚳)의 정비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놀러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이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후직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이가 주나라 시조다.

④대임(大任) : 계력의 부인이며 주문왕 희창의 모로 태임(太任)이라고도 한다. 빈(豳) 땅의 주족으 이끌고 기산(岐山)으로 나와 정착한 고공단보(古公亶父)는 계력(季歷)을 낳고 계력은 대임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서백 창(昌) 즉 후의 주문왕을 낳았다.

⑤)서경 요전(堯典)에 ‘釐絳二女于嬀汭(이강이녀우규예)’라는 기사를 말한다.

⑥아후(娥姁) : 여태후의 자(字)다. 이름은 치(稚)다.

⑦장오(張敖) : 조왕 장이(張耳)의 아들로 그 뒤를 이어 조왕이 되었으나 후에 그의 부하들에 의해 시도된 고조를 시해하기 위한 음모에 연루되어 조왕의 자리에서 폐위되고 노원공주로 인해 선평후에 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열전 27 장이진여열전 참조

⑧여록(呂祿)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80년에 죽은 서한 초기의 제후왕이다. 여태후의 큰 오빠인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의 아들이다. 즉 여태후의 조카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으나 부르기는 무신후(武信侯)라 했다. 여태후 7년 조왕(趙王)에 봉해지고 8년 여태후가 노환으로 위독하게 되자 그는 여씨들의 안전을 위해 여산(呂産)과 함께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장안의 경비를 담당하는 군대 중 북군은 여록이 남군은 여산이 지휘토톡 했다. 그 해에 여태후가 죽자 여산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주발(周勃)과 진평(陳平) 등에 의해 여씨 일족 등과 함께 멸족되었다.

⑨침묘(寢廟) : 영묘(靈廟), 종묘(宗廟)의 제도에서 앞 건물을 묘(廟), 뒷 건물을 침(寢)이라 한다. 묘에는 조상들의 위패(位牌), 화상(畵像) 등을 안치하고 사시사철 제사를 지냈으며 침(寢)에는 의관(衣冠), 궤장(几杖) 등의 기물들을 비치했다.

⑩청하(淸河)는 지금의 하북성 청하현(淸河縣)이고 관진(關津)은 무읍현(武邑縣)이다. 한나라 초기에 관진은 청하군(淸河郡)의 속현(屬縣)이었다가 후에 신도군(信都郡)으로 관할이 바뀌었다.

⑪관진(觀津) : 1.하남성 청풍현(淸豊縣)(春申君列傳: 客有觀津人朱英‘) ②하북성 武邑縣 동남이다. (穰侯列傳 : 取魏地 卷, 蔡陽, 長社, 趙氏觀津, 樂毅列傳 :趙封樂毅于觀津, 漢置觀津縣于此, 外戚世家: 竇皇后親蚤卒, 葬觀津)

⑫의양(宜陽) : 지금의 하남성 의양시(宜陽市) 서쪽이다.

⑬강후(絳侯)는 주발(周勃)을 관장군(灌將軍)은 관영(灌嬰)을 말한다.

⑭괴리(槐里) : 지금의 섬서성 흥현(興縣)이다.

⑮대행(大行) : 한나라 때의 관명으로 원래는 전객(典客), 지객(知客)이었다가 대행령으로 바꾸었다. 이민족 국가들의 사자를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⑯위자부는 그의 모친 위온(衛媼)의 성을 따라 위씨로 했다. 위온은 평양후 조시(曹時)의 첩실이었다. 조시는 조참의 증손자로 한무제의 누이 평양공주의 남편이었다. 위온이 평양현의 소리인 정계(鄭季)와 사통하여 위청(衛靑)을 낳고 다시 평양후 사이에 4남 2녀를 낳았는데 두 딸 중에 한 명은 위자부이고 다른 딸은 곽거병의 생모인 위소아(衛小兒)다. 위소아는 평앙현의 소리 곽중유와 사통하여 곽거병(霍去病)을 낳고 후에 정식으로 결혼한 곽중유는 곽광(霍光)을 낳았다.

⑰패상(覇上) : 지금의 서안시 동쪽 패수(覇水) 강안의 고을이다.

⑱불계(祓禊) :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행했던 중국 고대의 제사의식이다. 시간, 장소 등에 따라 의식이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연초에 종묘나 단에서 거행했다. 특히 음력 3월 상사(上巳) 일에는 강가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장 중히 여겼다.

⑲상의(尙衣) : 황제가 입는 옷을 담당했던 관직을 말하나 위자부가 그 역할을 맡았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⑳진황후는 초복(楚服)이라는 여자 무속인을 시켜 위자부를 저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일이 밝혀짐으로 진황후는 폐출되어 장문궁에 유폐되었고 초복은 처형되어 효수되었으며 그 사건에 연좌되어 죽은 사람은 300명에 달했다.

21.위장군(衛長君) : 무제 때 흉노정벌의 명장 위청의 동모이부 형이다. 위청과 그의 모친은 평양공주 집에서 일하던 여종으로 그녀의 남편의 성이 위(衛) 씨였음으로 이름을 위온(衛媼)으로 삼았다. 평양공주는 한무제의 누이로 원래 양신(陽信) 장공주라고 호칭했으나 평양후 曹時(혹 壽)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처가 되었음으로 평양공주라 칭했다. 조시는 한나라 창업공신 조참(曹參)의 증손자다. 위온은 평양후와의 사이에서 장자 長君, 장녀 君儒, 차녀 小兒, 삼녀 子夫를 낳았다. 후에 평양후의 봉국에서 현리로 일하던 鄭季라는 사람과 사통해서 위청을 낳았다.

22.제왕으로 봉해진 왕부인의 아들 이름은 유굉(劉閎)으로 그가 제왕으로 봉해진 해는 원수(元狩)6년 기원전 117년으로 8년 동안 재위하다가 기원전 110년에 죽었다.

23.이부인이 낳은 아들 이름은 유박(劉髆)으로 후에 제위에 올라 소제(昭帝)가 된 조부인의 아들 유불릉(劉弗陵)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으나 한무제가 죽기 1년 전인 기원전 87년에 죽었다. 아들 유하(劉賀)가 창읍왕의 봉호를 이어 받고 이어서 한소제의 태제가 되었으나 황음무도한 행위로 인해 곽광(霍光) 등의 중신들에 의해 폐위되고 폐태자 유거(劉據)의 손자 유병기(劉病己)가 제위에 올라 한선제(漢宣帝)가 되었다. 한선제의 아버지 유진균(劉進均)은 유거가 무고(巫蠱)의 란으로 죽을 때 같이 살해되었었다.

24.이사장군(貳師將軍) : 한무제가 설치한 무장직으로 이사(貳師)는 원래 대완(大宛)을 지칭하던 지명이었다.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이광리가 출정하여 대완국의 마량(馬良)을 점령했다. 무제는 이광리의 공을 기리기 위해 이사장군이라는 무장직을 설치하고 그를 임명했다.

25.연왕(燕王) : 이희(李姬)의 소생으로 이름은 유단(劉旦)이다. 무제 원수(元狩) 6년 기원전 117년 연왕에 봉해졌다. 소제 원봉(元鳳) 원년 기원전 80년 모반죄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있던 중 자살했다.

26.광릉왕(廣陵王) : 역시 이희의 소생으로 이름은 유서(劉胥)다. 원수 6년 광릉왕에 봉해졌다.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 기원전 69년 초왕과 모반을 획책하다가 조성(趙成)의 고변으로 미수에 그쳤으나 선제는 그 죄를 당시에는 묻지 못했다. 오봉(五鳳) 4년 기원전 54년 황제를 저주(詛呪)한 죄를 지어 하옥 중 옥중에서 자살했다.

27.첩여(婕妤) : 한무제가 제정한 비빈들의 작위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상경이나 열후에 해당했다. 서한 왕조의 황후들은 첩여 출신이 대부분이다.

28.경(頃) : 일경(一頃)은 백 무(畝)에 해당하고 진한 시대 때 한 무(畝)는 55평(약 180㎡)이다. 즉 일경은 5,500 평으로 백경은 55만 평에 달하는 광대한 땅이다.

29.형아(娙娥) : 한나라 때 비빈들의 품계로 2천석의 장군이나 어사대부와 같았다.

30.천석 : 서한 때 중앙관의 경우 구경 이상, 지방관의 경우는 태수와 도위 이상의 관리는 봉록 2천석을 받았다. 2천석은 호칭이고 각 직급에 따라 실제로 지급받은 봉록의 양은 달랐는데 中이천석은 월 180곡(斛), 眞이천석은 월 150곡, 이천석은 120곡, 比이천석은 월100곡이었다. 일 곡은 한 말로 20리터에 해당한다.

31.한무제는 71세에 죽었고 그 뒤를 8세의 소제가 섰다. 즉 한무제는 소제를 63세에 낳았음으로 이 기사는 잘못이다.

32.궁중의 비빈이나 궁녀를 가두었던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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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24. 조참(曹參)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沛) 출신으로 진나라 때 패현의 옥리였다. 그때 소하(蕭何)는 패현 관아의 아전들 중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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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3.소하(蕭何)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23 소상국(蕭相國) 하(何)는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이다. 현내에 그보다 법률에 밝은 사람이 없어 패현 현령은 그를
운영자 12-08-04
[일반]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2. 유비(劉肥)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는 고조가 경혼하기 전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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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형연세가(荊燕世家) 21

세가21. 형연(荊燕) 형왕 유고(劉賈)는 고조와 동성인 유씨다. 그가 언제 처음으로 기의군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왕 원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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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0.유교(劉交)

세가 20.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한고조(漢高祖)의 친동생으로 자는 유(游)이다. 한고조는 4형제였다. 맏형 유
운영자 12-08-04
[일반] 외척세가(外戚世家) 19

세가19 외척(外戚) 옛날부터 천명을 받은 제왕들과 그 제왕들이 이룩한 법도를 계승한 군주들은 내면의 훌륭한 덕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영자 12-08-04
[일반]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이 칭왕(稱王)하고 6달만에 죽으면서 후사가 없어 그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나 사마천이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운영자 12-08-04
[일반] 공자세가(孔子世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① 926. 周室旣衰(주실기쇠), 주왕실이 쇠약해 지자 927. 諸侯恣行(제후자행). 제후들이 말을 듣지 않고
운영자 09-10-30
[일반]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6. 전제(田齊)

전제세가(田齊世家)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진타(陳他)의 아들이다. 완이 태어날 때에 주나라 태사가 마침 진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운영자 09-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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