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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28.유무(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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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

세가28.


양효왕 유무(劉武)는 효문황제(孝文皇帝)의 아들이고 효경제(孝景帝)의 동모제로 모친은 두태후(竇太后)다.

효문제는 모두4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태자로 효경제고2자는 유무, 3자는 유참(劉參), 4자는 유승(劉勝)이다.

효문제가 즉위하고2년 되는 해인 기원전178년 유무를 대왕(代王)에, 유참은 태원왕(太原王)에 유승은 양왕(梁王)에 봉했다. 그리고 다시2년 후에 유무를 대왕에서 회양왕(淮陽王)으로 옮기고 대나라의 모든 땅은 태원왕에게 속하게 했으나 부르기는 대왕으로 칭하게 했다. 유참은 제후왕으로 선지17년 만인 효문황제 후원년2년 기원전162년에 죽었고 시호는 효왕(孝王)이다. 아들 유등(劉登)이 뒤를 이어 대왕의 자리에 오르고 재위한지29년 만인 원광(元光) 2년 기원전133년에 죽었다. 이가 대공왕(代共王)이다. 공왕의 아들 유의(劉義)가 대왕의 자리에 올라 재위19년 되는 해에 한나라 조정은 관(關)을 확충하여 상산(常山)을 경계로 삼아 대왕을 청하왕(淸河王)으로 개봉했다. 청하왕(淸河王)으로 개봉된 해는 한무제 원정(元鼎) 3년으로 기원전114년이다.

그 전에 유무가 회양왕이 된지10년 만인 기원전169년에 양왕 유승(劉勝)이 죽으니, 이가 양회왕(梁懷王)이었다. 양회왕 유승은 한문제의 막내아들로서 문제의 총애가 다른 아들보다 더 각별했다. 그 이듬해에 회양왕 유무를 양왕으로 옮겼다. 유무가 양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해는 한문제12년으로 기원전168년이다. 이에 양효왕이 처음 왕으로 봉해진 해는 이미 통산11년이 되었다.

양왕14년 기원전165년, 경사로 가서 황제에게 조현을 올렸다. 양왕17년, 18년 계속해서 경사로 들어가 황제를 배알하고 머물렀다가 그 이듬해에야 비로소 봉국으로 돌아왔다. 21년인 기원전158년에 다시 입조하였다. 22년에 한문제가 죽었다. 24년인 한경제2년 기원전155년에 입조했다. 25년인 기원전154년에 재차 입조했다. 이때 황제는 아직 태자를 책봉하지 않고 있었다. 일찍이 황제는 연회 석상에서 양효왕을 보고 슬며시 말한 적이 있었다.

「짐이 죽을 때 제위를 너에게 전해주리라!」

그때 양왕은 사양했다. 황제가 비록 진심에서 우러나와 한 말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내심으로는 기뻐했다. 두태후도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해 봄, 오(吳)․초(楚)․조(趙)․교동(膠東)․교서(膠西)․제남(濟南)․치천(菑川) 등의7국(七國)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초의 연합군은 먼저 양(梁)나라로 쳐들어가 극벽(棘壁)을 공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양효왕은 수양(睢陽)을 지키며 한안국(韓安國)과 장우(張羽)를 대장군으로 삼아 오초의 연합군에게 항거하였다. 오초의 연합군은 양나라가 막고 있었기 때문에, 양나라의 영토를 넘어 서쪽으로 진공할 수 없었음으로 태위 주아부(周亞夫)와3개월 동안 대치했다. 오초 연합군이 격파되자, 양나라가 죽이거나 포로로 삼은 오초의 군사는 대략 한나라 조정의 군사들이 죽이거나 포로로 삼은 숫자와 대등하였다.

한경제4년 기원전153년, 한나라 조정은 황태자를 세웠다. 이후로도 양나라는 한나라 조정과 가장 친근했고, 오초의 반란을 평정하는데도 가장 큰 공이 있었다. 또 양나라는 큰 나라이면서도 천하의 비옥한 땅에 위치해 있었다. 그 지역의 북쪽으로는 태산(泰山)이 연접하였고 서쪽으로는 고양(高陽)에 이르렀으며, 40여 개 성이 모두 큰 현이었다.

양효왕은 두태후의 작은 아들로서 매우 총애를 받아서 하사받는 재물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당시 양효왕은 동원(東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둘레가300여 리나 되었다. 또 증축한 수양성(睢陽城)은 성벽의 둘레가70여 리에 이르렀다. 거대하게 지은 궁전의 복도는 궁전에서부터 평대(平臺)까지가 장장30여 리에 달했다. 조정이 하사한 천자의 깃발을 받았으며, 출입하는 관원이 타는 수레는 천여 대가 넘었고 수레를 끄는 만여 마리의 말로 가득하였다. 동서로 수레를 달리며 사냥하면 그 위세가 천자와 같았다. 외출할 때에는 미리 길을 치워 행인을 차단시켰고 돌아와서는 경계를 강화했다. 사방의 호걸지사 등을 불러들여 효산(崤山) 이동의 유세객들이 다 몰려들었다. 제(齊)나라의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공손궤는 기이한 계책을 많이 냈는데, 처음 양효왕을 알현하자, 양효왕은 그에게 천금을 하사하고 중위(中尉)의 관직을 맡겼다. 양나라 사람들은 그를 공손장군이라고 불렀다. 양나라는 노(弩), 활, 창 등의 병기를 수십만 개나 제조하였고, 창고에 저장해놓은 금전이 근1억전에 달하였으며 주옥과 보기도 한나라 조정보다 많았다.

한경제7년 양효왕29년은 기원전150년이다. 그해10월 양효왕이 입조했다. 경제는 사자를 파견하여 부절을 가지고 사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관(關)에까지 마중 나가 양효왕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조현을 마친 양효왕은 상소를 다시 올린 후에 수도에 머물렀는데, 이는 두태후가 총애했기 때문이었다. 양효왕은 황궁에 들어가서는 곧 경제와 같은 수레에 앉았고, 궁 밖에서는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하였으며, 상림원(上林苑)에서는 새와 짐승을 사냥했다. 양나라의 시중(侍中), 낭관(郎官), 알자(謁者)들은 모두 명부에 등기해야만 천자가 거하는 궁궐의 금문(禁門)을 출입할 수 있었으나 그들만은 한나라 조정의 환관과 다름없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그해11월에 황제가 율태자(栗太子)를 폐위시키자, 두태후는 속으로 양효왕을 후계자로 삼기를 원했다. 원앙(袁盎)을 위시한 대신들이 옛날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목공(穆公)이 아들 대신 동생 선공(宣公)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가 후에 몇 대에 걸쳐 내란이 일어난 일을 예로 들어 경제에게 그만 두도록 간했다. 이에 두태후도 생각을 중지하고 이후로는 양효왕을 후계자로 세우는 일은 다시 논의하지 않았다. 이 일은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양효왕은 인사를 올리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다음 해인 한경제8년 기원전149년, 경제는 교동왕(膠東王) 유철(劉徹)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자기가 황태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간한 원앙을 위시한 대신들을 원망한 양효왕은 몰래 양승, 공손궤 등과 모의하여 자객을 장안으로 파견하여 원앙을 포함한 대신들10여 명을 살해했다.

한나라 조정은 살인자를 색출하려고 했으나 오랜 동안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양효왕을 의심하게 된 천자는 살인한 하수인을 체포하니 그들은 과연 양나라에서 파견한 자들이었다. 조정에서는 곧 사자를 끊임없이 파견하여 양나라로 가서 조사하여 공손궤와 양승을 체포하였다. 공손궤와 양승은 양효왕의 후궁에 숨어 있었다. 한나라 조정에서 파견한 사자가 양나라의 재상을 심하게 꾸짖었다. 양나라의 재상 헌구표(軒丘豹)와 내사(內史) 한안국(韓安國)은 양효왕에게 간하였다. 양효왕은 그때야 비로소 양승과 공손궤를 자살하게 하고 그들의 시신을 한나라의 사자에게 넘겨주었다.

한경제는 이 일로 인해 양효왕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이를 두려워한 양효왕은 한안국을 파견하여 장공주(長公主)를 통해 투태후에게 사죄했다. 이 일로 해서 양효왕은 비로소 두태후와 한경제의 용서를 받았다.

경제의 노기가 조금 풀어진 후 양효왕은 상서를 올려 조현을 올리겠다고 청했다. 이윽고 양효왕의 일행이 함곡관에 당도하자 양나라의 모신 모란(茅蘭)은 양효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낮추어 천으로 치장한 수레를 타고 두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경사에 들어가 장공주의 원유(園囿)에 숨어있도록 권했다. 한나라 조정은 사자를 파견해서 양효왕을 영접하려고 하니 양효왕은 이미 관문을 통과하여 들어왔는데 타고온 수레와 말은 관 밖에 있었고 양효왕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두태후는 울면서 말하였다.

「황상이 내 아들을 죽였구려!」

경제는 걱정되고 두려웠다. 그러자 갑자기 양효왕이 대궐 문 앞에 나타나 부절(斧質) 위에 엎드려 사죄하였다. 두태후와 경제는 기뻐하며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이로써 양효왕와 두태후 및 경제와의 사이는 예전과 같이 좋아졌다. 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양효왕의 수행원들은 모두 관문을 통과하여 경사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경제는 양효왕을 소원하게 대하여, 이전처럼 같은 수레에 타지 않았다.

양효왕35년 기원전144년, 양효왕은 경제에게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들어왔다. 양효왕이 상소하여 수도에 머무르려고 하였으나 경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봉국으로 돌아간 양효왕은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북쪽의 양산(梁山)에 올라 사냥하는데 어떤 사람이 소 한 마리를 헌상했다. 그 소는 발이 등 위에 있었으므로 양효왕은 그 소를 매우 싫어하였다. 6월 중순 양효왕이 열병에 걸려6일 만에 죽었는데, 시호는 효왕(孝王)이다.

양효왕은 평소 모친에게 매우 효성이 지극해서, 모친 두태후가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였고 편안히 잠자지 못하였다. 그리고 항상 장안에 머무르며 봉양하고 싶어했다. 두태후 역시 항상 양효왕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했다. 이윽고 양효왕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두태후는 통곡하며 비탄에 잠겨 음식을 먹지 못하며 말했다.

「황제가 과연 내 아들을 죽였구나!」

경제 또한 슬프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경제는 장공주와 상의하여, 양나라를 다섯 개의 나라로 나누어 양효왕의 다섯 아들을 전부 왕으로 봉하고, 다섯 딸들에게는 탕목읍(湯沐邑)을 주고 그 결과를 두태후에게 고했다. 두태후는 그때야 비로소 기뻐하며 경제를 칭찬하며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양효왕의 장남 유매(劉買)가 작위를 이어 양왕(梁王)이 되었다. 이가 양공왕(梁共王)이다. 차남 유명(劉明)은 제천왕(濟川王)에, 삼남 유팽리(劉彭離)는 제동왕(濟東王)에, 사남 유정(劉定)은 산양왕(山陽王)에, 막내아들 유불식(劉不識)은 제음왕(濟陰王)에 각각 봉해졌다.

양효왕이 죽기 전에 그 재산은 억만(億萬)으로 계산될 정도로 많아 정확히 파악할 없었다. 양효왕이 죽은 후에 부고에 남은 금전은 황금이40만여 근에 달했으며, 그 밖의 재산도 이와 대등하였다.

양공왕(梁共王)3년에 경제가 붕어하였다. 양공왕은 재위7년 만에 죽고 그 아들 유양(劉襄)이 작위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양평왕(梁平王)이다. 양평왕은 재위14년은 한무제 원삭6년으로 기원전123년이다. 이해에 양평왕이 입조했다. 양평왕의 모는 진태후(陳太后)고 양공왕의 모는 이태후(李太后)다. 즉 이태후는 양평왕의 친할머니다. 그리고 평왕의 비는 임(任)왕후다. 양평왕은 임왕후를 매우 사랑했다. 옛날 양효왕이 살아 있을 때 황금으로 만든 뇌준(罍樽)이라는 천금의 가치가 있는 술항아리가 있었다. 효왕은 후세들에게 뇌준은 절대 남에게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임왕후가 알고 뇌준을 갖고 싶어하자 이태후가 평왕을 불러 당부했다.

「선왕은 뇌준을 절대로 남에게 주지 말라고 유언했다. 다른 물품은 그 가치가 백만전이라도 해도 임의로 처리할 수 있지만 뇌준만은 절대로 남에게 주면 안 된다.」

그 소리를 전해들은 임왕후는 더욱 뇌준을 갖고 싶어 했다. 양평왕 유양이 직접 부고에 가서 사람에게 문을 열게 하고 뇌준을 취하여 임왕후에게 주었다. 이태후가 대노하여 마침 양나라에 와있던 한나라 조정의 사자를 찾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했다. 양평왕과 임왕후는 이태후가 나가지 못하게 문을 걸어 잠그자 이태후는 문을 열려고 하다가 손가락이 끼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태후는 결국 한나라 조정의 사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 전에 이태후는 몰래 식관장(食官長)과 낭중 윤패(尹覇) 등과 간통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알고 있었던 양평왕과 왕후는 사람을 시켜 그 일을 넌지시 암시하여 이태후로 하여금 뇌준의 일을 한나라 사자에게 고하는 행위를 막으려고 했다. 이태후 역시 자기가 저지른 음행으로 인해 그 일을 그만두었다. 이태후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에 죽었다. 이태후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있을 때 임왕후는 문병을 한 번도 가지 않았고 후에 죽었을 때도 거상을 하지 않았다.

한무제 원삭(元朔) 중에 수양(睢陽) 사람에 유안반(類犴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회양태수의 빈객이 양나라에 들어와 어떤 회합에 참석했다가 그의 부친을 모욕했다. 이에 유안반은 그 객과 함께 같은 수레를 타고 밖으로 외출했다가 수레에 내린 그 객을 죽이고 달아나버렸다. 회양태수가 대노하여 양나라의2천석 고위관리들을 비난했다. 그러자 양나라의2천석 이하의 관리들은 유안반을 급히 잡으려고 그의 친척들을 잡아들였다. 유안반은 양나라 왕실의 음란한 일과 비밀스러운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 조장에 양나라의 비밀스러운 일과 함께 왕과 조모가 함께 뇌존을 두고 다투었던 일을 고했다. 그 일로 인해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알게 된 한나라 조정의 승상 이하 관리들은 양나라 관리들에게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상서하여 황제에게 알렸음으로 황제는 관리들에게 그 사건을 조사하도록 조칙을 내려 조사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과연 그 일이 사실로 밝혀졌다. 공경들은 유양을 양왕에서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라고 청했다. 천자가 말했다.

「이태후 또한 음행을 저질렀고 양왕에게는 좋은 스승이나 태부가 없었음으로 그와 같은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지게 되었으니 모두가 그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다.」

천자는 양나라 관할의8개 성을 삭지하고 임왕후를 죽여 저자거리에 효시하도록 했다. 양나라는10여 개의 성을 남겨 유양을 양양으로 계속 머물게 했다. 유양은 재위39년 만인 기원전98년에 죽었다. 시호는 평왕이다. 아들 무상(無傷)이 뒤를 이어 양왕의 자리에 올랐다.

제천왕 유명(劉明)은 양효왕의 차남으로 환읍후(桓邑侯)의 신분으로 제천왕에 봉해졌다. 제천왕 재위7년에 활로 중위를 쏘아 죽인 죄를 지었음으로 한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그를 주살해야 한다고 주청했지만 천자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왕의 자리에서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방릉(房陵)으로 옮겨 살게 하고 그의 봉국은 한나라 조정에 반환되어 군이 되었다.

제동왕(濟東王) 유팽리(劉彭離)는 양효왕의 삼남으로 효경 중원6년 기원전144년, 제동왕으로 봉해졌다. 제동왕으로 책봉되어29년이 지내는 동안 유팽리는 교만하고 포악하여 군주로써의 예의를 상실하고 밤이 되면 몰래 그의 노복이나 도망친 소년 수십 명과 함께 살인을 하거나 남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을 즐겨하였다. 그에서 살해되어 발각된 무고한 사람만도 백여 명에 달했음으로 나라 사람들은 그의 악행을 모두 알게 되어 아무도 밤에는 돌아다니지 못했다. 살해된 사람의 아들이 상서를 올려 그 일을 고변하자 해당관리들은 제동왕을 주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주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를 왕에서 폐하고 서인으로 만들어 상용(上庸)으로 옮겨 살게 한 후에 그의 봉지는 몰수하여 대하군(大河郡)을 설치했다.

산양애왕(山陽哀王) 유정(劉定)은 양효왕의 넷째 아들로 효경제 중원6년에 산양왕에 책봉되었다. 산양왕으로 책봉된지9년 만인 기원전136년 죽었으나 후사가 없었음으로 나라는 없어지고 그 땅은 한나라에 편입되어 산양군(山陽郡)이 되었다.

제음애왕(濟陰哀王) 유불식(劉不識)은 양효왕의 막내아들로 효경제 중원6년에 제음왕에 책봉되었다. 재위1년 만인 기원전143년에 죽고 자식이 없었음으로 나라는 없어지고 그 땅은 한나라에 편입되어 제음군(濟陰郡)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은 두태후(竇太后)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경제(景帝)의 동생이다. 양효왕의 봉국은 비옥했다. 더욱이 한나라 황실이 흥성하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했음으로 축적된 재물로 궁궐을 확충하고 거기에 따르는 수레, 말, 복식 등은 천자와 같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본분에 지나쳤다.」


저선생(褚先生)이 말한다.

「내가 낭관(郎官)으로 있을 때 궁궐의 말하기 좋아하는 늙은 낭관에게서 양효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효왕이 원한을 품게 된 원인은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또한 양효왕이 야심을 갖게 된 원인은 한나라 황실이었다. 두태후는 작은아들을 편애한 나머지 황실의 주인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양효왕을 경제의 태제로 삼으려고 했다. 대신들은 그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단호하게 간언하지 못하고 여주의 마음에 영합하여 비위를 맞추어 암암리에 태후의 환심을 얻어 상을 받으려고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충신이 아니었다. 모두가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처럼 올바른 말로 간언했다면 어찌 후에 화란이 발생했겠는가? 경제와 양효왕이 연회석 상에서 같이 태후를 모시고 음식을 먹을 때 경제가 말했다.

『천추만세 후에 황제의 자리를 동생에게 전하겠습니다.』

태후가 기뻐하자 곁에 있던 두영이 땅에 엎드려 간언했다.

『한나라 법에 사위(嗣位)의 방법은 적손(嫡孫)에게 전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황상께서 황제의 자리를 동생에게 전한다고 하신 말씀은 고황제의 맹약을 문란하게 처사입니다.』

그러자 효경제는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태후 역시 불쾌하게 생각했다.

옛날 주성왕(周成王)은 어린 동생과 오동나무 아래에 서서, 그 잎을 따서 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나는 너를 봉해 진(晉)의 제후로 봉하노라!」

이때 곁에 있던 주공(周公)이 그 말을 듣고서 말했다.

「천왕께서 아우를 제후로 봉했으니 훌륭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자 성왕이 말했다.

「나는 단지 그에게 장난삼아 그리 말했을 뿐이오.」

주공이 말했다.

「남의 군주 되는 사람은 행동을 잘못하거나 희롱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군주의 말은 일단 뱉었으면 반드시 실행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왕은 동생 희우(姬虞)를 진(晉)에 봉했다. 그런 일이 있는 후로는 성왕은 일생동안 감히 희롱이 말을 하지 않았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지켰다.

효경(孝經)에『법이 아니면 말하지 말고 도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것은 성인의 말씀이다. 당시 황제는 듣기 좋은 말을 양효왕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두태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양효왕은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것은 경제에게서도 천추만세에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경제의 말은 경제가 죽은 후에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다.

또 제후왕이 천자를 알현할 때, 한나라의 법제에 의하면 모두4차에 걸친 법제에 따라 알현하게 되어 있다. 처음 수도에 도착하여 궁중에 들어가 약식으로 알현하는 의식을 소현(小見)이라 했다. 그리고 정월 초하룻날 아침이 되면 사슴가죽으로 포장한 벽옥(璧玉)을 헌상하여 정월을 축하하고 예의에 따라 정식으로 알현하는 의식을 대현(大見)이라 했다. 3일 후에 천자는 제후왕을 위해서 주연을 베풀고 금전과 재물을 하사한다. 또 이틀이 지나면 다시 궁중에 들어가 소현의 예로 행하고 그 후에 하직한다. 경사에에 체류하는 기간은 모두20일을 초과하지 못했다.

이른바 소현이라는 행사는 궁중의 깊은 곳에서 연회를 마련하고 황족만이 모여서 음식과 술을 같이 즐기는 의식으로써, 일반 사민(士民)들은 참석할 수 없는 자리다. 그런데 양효왕은 천자를 알현한다는 명목으로 경사에 들어와서는 기회를 틈타 머물러 거의 반년 가까이 거주했다. 궁중에 들어가서는 천자와 함께 수레를 탔고 외출할 때에도 천자와 함께 큰 수레를 탔다. 천자는 일상적인 말투로 제위를 계승해주겠다고 양효왕에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제위를 물려주지 않았다.

그런 정황 하에서 양효왕의 입에서는 원망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고 결국은 반역을 도모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 뒤를 따라 양효왕은 한나라 조정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사리에 크게 벗어난 일이 아니겠는가? 현명하고 덕이 높지 않으면 겸손하고 사양할줄 모르는 법이다[非大賢人 不知退讓]. 지금 한나라 예법에 황제를 알현하고 정월을 축하는 방법은 항상 왕 한 명에 제후4명이 함께10여 년에 한 번씩 행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당시 양효왕은 항상 매년 입경하여 조현을 행하고 오래 머물렀다. 속담에 『교만한 자에게는 효심이 없다.』 라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제후왕들은 마땅히 좋은 스승을 두고 충언을 올릴 수 있는 인사들을 임용하여 나라를 맡겨야하는 것이다. 급암(汲黯)과 한안국(韓安國)과 같은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직언과 극간을 감히 행할 수 있었더라면 어찌 화란이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양효왕이 입조하면 우선 두태후를 알현하고 연회에 참석하여 경제와 함께 두태후 앞에서 앉아 말을 나눌 때는 마치 사적인 관계처럼 다정 했다. 태후가 황제를 보고 말했다.

「내가 들으니 은나라 제도는 형제들이 친하고 주나라 제도는 조상을 받든다고 했는데 그 뜻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거든 양효왕에게 제위를 물려주도록 하라!」

경제가 방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을 세우고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주연이 끝나고 물러나온 황제는 경전과 술법에 정통한 원앙(袁盎)을 포함한 대신들을 소집하여 물었다.

「태후께서 한 말씀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오?」

대신들 모두가 대답했다.

「태후께서는 양왕이 제위를 물려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황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그 이유를 묻자 원앙 등이 대답했다.

「은나라의 제도가 형제끼리 친하다는 뜻은 동생을 후계로 세우는 법을 말하고 주나라의 제도가 조상을 숭배한다는 뜻은 아들을 후계로 세우는 법을 말합니다. 은나라는 질박함을 숭상했고 질박함이란 하늘의 도를 본받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대상을 친하게 여겼음으로 동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문채(文采)를 숭상함은 주나라의 제도입니다. 문채는 땅의 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조상을 경배하니 경배하는 대상은 그 시작과 근본입니다. 그래서 후계를 장자로 세웁니다. 주나라의 법도는 태자가 죽으면 적장손이 뒤를 잇습니다. 은나라의 제도는 태자가 죽으면 그 동생을 후계로 세웁니다.」

황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공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모두들 한 입으로 말했다.

「바야흐로 지금 한나라 황실은 주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제도는 동생을 후계로 세울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아들을 후계로 세워야합니다. 춘추에 송선공(宋宣公)의 행위를 비난한 이유는 바로 이런 일 때문입니다.① 송선공이 죽자 그의 아들 여이(與夷)를 세우지 않고 동생 목공(穆公) 화(和)를 세웠습니다. 목공이 죽을 때 다시 그의 아들 풍(馮)을 세우지 않고 선공의 아들 여이를 후계로 삼았습니다. 이에 동생의 아들이 군위를 탐내어 자신이 부친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되겠다고 하면서 형의 아들을 찔러 죽였습니다. 이것이 송나라의 내란의 원인이 되어 그 화가 끊어지지 않게 된 연유입니다. 그래서 춘추에『군주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바른 곳에 머무는 일이다. 송나라의 화란은 모두 선공으로 기인했다.』라고 기록하여 선공을 비난했습니다. 신등이 태후를 뵙고 이 일을 명백히 밝히겠습니다.」

원앙등이 태후를 알현하고 말했다.

「태후께서 양왕을 황제의 후계로 세우라고 하셨는데 양왕이 죽으면 그때는 누구를 세우려고 합니까?」

태후가 대답했다.

「나는 다시 황제의 아들을 세우겠소.」

원앙 등이 송선공이 올바르게 후계를 세우지 않아 나라에 화란이 발생하여5세에 이르도록 끊이지 않고 계속된 일을 빗대어 작은 일에 집착하여 큰일을 그르치는 경우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태후가 즉시 깨닫고 양왕을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양왕은 대의를 빗대어 자신이 황태제가 되지 못하게 만든 자가 원앙을 위시한 대신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양왕은 자객을 경사로 보내 원앙을 암살하고 말았다. 원앙이 뒤따라오는 자객을 돌아보고 말았다.

「나는 원장군이라는 사람이다. 그대들은 사람을 잘못 알고 있지 않은가?」

자객이 대답했다.

「당신이 맞소!」

자객이 원앙을 찌른 칼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사라졌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새로 주조한 칼이었다. 장안에서 칼을 만드는 장인을 찾아 심문하니 그 장인이 말했다.

「양나라의 어떤 낭관이 와서 이 칼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자객이 밝혀지게 되어 사자를 양나라로 보내 자객을 사로잡았다. 양효왕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한 대신들은 원앙을 포함해서 모두10여 명에 달했는데 심문관이 이 사건을 추궁하자 양효왕의 음모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두태후는 음식을 들지 못하고 밤낮으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경제는 매우 걱정하여 공경대신들에게 처리 방안을 물으니, 대신들은 유학의 경서에 통달한 관리들을 파견하면 잘 매듭지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숙(田叔)과 여계주(呂季主)를 파견하여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이 두 사람은 경서에 통달하고 대례(大禮)를 알았다. 양나라에서 돌아와 패창구(覇昌廐)②에 당도한 그들은 양효왕이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문서를 모두 소각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경제를 알현했다. 경제가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두 사람이 대답했다.

「양효왕은 몰랐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 일으킨 자는 단지 양효왕의 총애하는 신하인 양승과 공손궤의 무리입니다. 그들은 이미 사형(死刑)을 받았고 양효왕은 다치지 않았습니다.」

경제는 기뻐하며 말했다.

「빨리 태후를 뵙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겠다.」

경제로부터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태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기 시작하고 마음의 평정도 되찾았다. 그래서 『경술(經述)을 통하지 못하고 고금의 대례(大禮)를 알지 못하면3공과 측근에서 모시는 근신(近臣)의 직책을 맡을 수 없으며 식견이 부족한 사람은 대롱을 통해서 하늘을 살펴보는 사람과 같다.」라고 했다.

《양효왕세가 끝》

주석

①송선공은 춘추 때 송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력(力)이다. 주평왕23년 기원전748년에 송공의 자리에 올라 재위 19년 만인 주평왕42년 기원전729년 병이 들어 죽을 때 그는 군위를 아들 풍(馮)에게 전하지 않고 동생 목공(穆公) 화(和)에게 전했다. 목공 또한 군위를 아들 여이(與夷)에게 전하지 않고 선공의 아들 상공(殤公) 여이에게 전하자 풍은 정나라로 망명했다. 풍이 존재에 대해 항상 두려원 마음을 갖고 있었던 상공은 풍을 죽이기 위해 정나라와 전쟁을 벌리기를10년 동안11차례나 했다. 결국 빈번한 전쟁에 염증을 느낀 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상공을 시해하고 공자풍을 정나라에서 모셔와 송공의 자리에 올렸다. 이가 송장공이다.

②패창구(霸昌厩) : 지금의 섬서성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 동북38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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