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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세가(楚世家) 10-1(춘추편)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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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초세가(楚世家)1

- 춘추편 -

1. 초국연원(楚國淵源)

초(楚)나라의 선조는 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다. 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①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稱)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권장의 아들 중려(重黎)는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를 위해 화정(火正)이라는 벼슬에 맡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게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이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 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오회가 육종(六終)을 낳고 육종은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여섯 아들을 낳게 하였다. 장남은 곤오(昆吾), 이남은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으로 미성(羋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다②. 곤오씨(昆吾氏)는 하왕조 때 이미 후백(侯伯)으로 봉해졌다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 때 망하고 팽조씨(彭祖氏)는 은나라 때 제후로 봉해졌다가 은나라 말 때 주왕(紂王)에 의해 멸망당했다. 한편 계련(季連)이 부저(附沮)를 낳고 부저는 혈웅(穴熊)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중도에 쇠락하게 되어 어떤 자들은 중국에 또 어떤 자들은 만이(蠻夷)의 나라에 흘러가 살게 되어 그들의 족보를 제대로 셀 수 없게 되었다.

주문왕 때 계련(季連)의 후손들 중 죽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죽웅이 주문왕을 모시다가 일찍 죽었다. 죽웅에게는 웅려(雄麗)라는 아들이 있었고 웅려는 웅광(熊狂)을 낳았다. 웅광은 또 웅역(熊繹)을 낳았다.

웅역(熊繹)은 주성왕(周成王) 때 사람이다. 성왕이 문왕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 죽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도읍을 단양(丹陽)③에 두었다. 초자(楚子) 웅역은 노공(魯公) 백금(伯禽), 위강숙(衛康叔) 자모(子牟), 진후(晉侯) 섭(燮), 제태공(齊太公)의 아들 여급(呂伋) 등과 함께 성왕을 모셨다.

웅역이 아들 웅애(熊艾)을 낳았다. 웅애는 다시 웅담(熊黵)을 낳고 웅달은 웅승(熊勝)을 낳았다. 웅승이 초자(楚子)의 자리를 그의 동생인 웅양(熊楊)에게 물려주었다. 웅양은 웅거(熊渠)를 낳았다.

주석

①창의(昌意) : 황제(黃帝)와 누조(嫘祖)의 소생 중 둘째 아들이다. 황제(黃帝)의 비(妃)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養鬻)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先鬻)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②여섯 아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次順

封地

爵位

特 記 事 項

長男

昆吾 樊

衛墟

夏伯

은나라의 탕(湯)임금이 걸(桀)을 정벌할 때 같이 종군했다.

次男

參胡

韓墟

주나라 때 호국(胡國)으로 되었다가 후에 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三男

彭祖

韓墟

商伯

상나라 말에 망했다.

四男

會人

鄭墟

회(鄶)국을 말하며 후에 정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五男

曹姓 安

邾墟

六男

季連

荊蠻

子爵

후손 중 죽웅(鬻熊)이 초나라를 세운 웅씨(熊氏)들의 시조(始祖)다

③초나라 최초의 도읍지 단양은 설이 분분하나 대체로 4가지 설이 있다.

1) 지금의 호북성 자귀현(姊歸縣)으로 사천성과의 경계다.

2) 지금의 강소성 丹陽市 경내의 當塗 설이다.

3) 지금의 호북성 江陵市 서쪽의 枝江市 설이다.

4) 지금의 하남, 호북, 섬서 경계지역을 흐르는 淅川과 丹水가 합류하는 淅川市 일대 등이다.

2. 초자참왕(楚子僭王)

- 초나라가 왕호를 참칭하기 시작하다. -

웅거는 세 아들을 두었다. 그때는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져 제후들 중에 래조하지 않는 자도 생겨나기 시작하고 제후들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웅거가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지간의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용(庸)①과 양오(楊奧)②에서 악(鄂)③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熊渠)가 말했다.

「우리는 남쪽 오랑캐인 만이다. 중국의 시호를 구태여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즉시 그의 장자인 강(康)을 구단왕(句亶王)④으로 둘째 아들 홍(紅)을 악왕(鄂王)으로 막내아들 집자(執疵)를 월장왕(越章王)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주나라에는 포학한 려왕(厲王)이 즉위하여 혹시나 왕호를 참칭한다는 구실로 정벌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왕호를 버렸다. 웅거가 죽었을 때는 큰아들인 웅무강(熊毋康)은 젊은 나이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작은 아들 웅집홍(熊執紅)이 웅거의 뒤를 이었다. 집홍(執紅)이 죽고 그의 아들이 섰으나 집홍의 동생 집자(執疵)가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초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웅연(熊延)이다. 웅연이 웅용(熊勇)을 낳았다.

웅용(熊勇) 6년 기원전 841년에 주나라에서 국인들이 란을 일으켜 려왕(厲王)을 공격하자 려왕은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웅용이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837년에 죽고 그의 동생 웅엄(熊嚴)이 뒤를 이었다.

웅엄이 재위 10년 만에 죽었다. 웅엄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장자는 백상(伯霜), 차자는 중설(仲雪), 삼자는 숙감(叔堪), 막내는 계순(季徇)이라고 했다. 웅엄의 뒤를 장자인 백상이 이었다. 이가 웅상(熊霜)이다.

웅상 원년 기원전 827년 주선왕이 즉위하였다. 웅상이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822년에 죽고 세 동생이 초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중설은 살해당하고 숙감은 도망쳐서 복(濮)⑤ 땅에 몸을 피했다. 초자의 자리는 결국 막내인 계순의 차지가 되었다. 이가 웅순(熊徇)이다.

웅순 16년 기원전 806년, 정환공(鄭桓公) 희우(姬友)가 정(鄭) 땅에 피봉(被封)되었다.

웅순 22년 기원전 800년 웅순이 죽고 그 아들 웅악(熊鄂)이 뒤를 이었다.

웅악이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791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의(熊儀)가 뒤를 이었다. 웅의가 약오(若敖)다.

약오 20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었다. 주나라는 동천하고 섬진의 양공(襄公)이 제후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약오가 재위 27년 만인 기원전 764년에 죽고 그 아들 웅감(熊坎)이 뒤를 이었다. 이가 소오(霄敖)다.

소오가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758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현(熊眴)이 섰다. 이가 분모(蚡冒)다.

분모 13년 기원전 745년, 당진에서 내란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당진에서 분봉된 곡옥의 세력이 본국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주석

①용(庸) :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②양오(楊奧) : 양우(楊雩) 혹은 양월(陽越)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미상이나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일대라는 설도 있다.

③악(鄂) : 지금의 호북성 악성현(鄂城縣) 부근. 악성현은 무한시 동 약 50키로다. 악(鄂)은 현재 호북성을 뜻하는 간칭으로 쓰이고 있다.

④구단(句亶) : 지명으로 지금의 호북성 강릉현 경내에 있던 고을을 말한다.

⑤복(濮) : 지금의 호북성을 가로 지르는 한수(漢水)의 하류 지방을 말한다.

3. 초왕도패(楚王圖覇)

분모가 재위 17년 만인 기원전 741년에 죽었다. 분모의 동생 웅통(熊通)이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초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이가 초무왕(楚武王)이다.

무왕 17년 기원전 724년 당진의 곡옥백(曲沃伯)인 장백(庄伯)이 그의 군주 효후(孝侯)를 살해했다.

무왕 19년 기원전 722년 정장공(鄭庄公)의 동생 단(段)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왕 21년 기원전 720년 정장공이 상경 채중(祭仲)을 시켜 천자의 경작지를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게 했다.

무왕 23년 기원전 718년 위(衛) 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그의 형인 위환공(衛桓公)을 시해했다.

무왕 29년 기원전 712년 노나라의 국인들이 그들의 군주인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무왕 30년 기원전 711년,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그의 군주 상공(殤公)을 시해했다.

무왕 35년 초나라가 수(隨)나라를 공격했다. 수후(隨侯)가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쳐들어 왔는가?」

초왕이 대답했다.

「우리는 만이(蠻夷)다. 오늘날 제후들이 반목하여 서로 싸움을 벌이면서 어떤 자들은 서로 죽이기까지 하고 있다. 나에게 얼마간의 갑병과 병장기들이 있으니 한번 중원 제후국들의 정정(政情)을 떠보고 나의 칭호를 주왕에게 청하여 왕으로 높이고 싶다.」

수후가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 초나라가 왕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청했다. 주나라 천자가 허락하지 않자 수나라의 사자가 돌아와 초무왕에게 고했다.

무왕 37년 기원전 704년, 초왕 웅통이 천자가 자기에게 왕호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수나라로 부터 전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나의 선조는 죽웅인데 문왕의 스승이었다가 젊은 나이로 죽었다. 성왕이 우리 선조들의 공을 높이 사서 자작에 책봉하고 남작에 해당하는 땅을 봉지를 주어 만이들을 교화하여 복종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만이들을 복종시켜 주왕실에 공을 많이 세웠지만 작위를 올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작위를 올리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무왕이라고 칭하고 수나라 사절에게 맹세를 시킨 후에 돌려보냈다. 무왕이 복(濮)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무왕 51년 기원전 690년, 주나라가 수후를 소환하여 왕호를 참칭한 초나라를 방조했다고 질책했다. 초왕이 노하자 수후가 초나라에 등을 돌렸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수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출정했으나 도중에 죽어 군사들이 중도에서 돌아왔다. 아들 웅자(熊貲)가 뒤를 이었다. 이가 초문왕(楚文王)이다. 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즉시 초나라의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다.

문왕 2년 기원전 688년, 신국(申國)을 정벌하기 위해 등(鄧)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등나라의 국인들이 등후에게 말했다.

「초왕의 청을 허락하고 길을 빌려준 후에 그가 우리 경내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문왕 6년 기원전 644년, 문왕이 채나라를 정벌하여 채애후(蔡哀侯)를 사로잡은 후에 개선했다. 초나라에 잡혀와 억류생활을 하던 채애후는 얼마 후에 방면되어 귀국했다. 초나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강수와 한수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들 위에 군림하자 작은 나라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문왕 11년 기원전 639년, 제환공의 처음으로 패자를 칭했다. 초나라 역시 강대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문왕 12년 기원전 638년, 등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문왕이 재위 13년 만인 기원전 637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간(熊艱)이 뒤를 이었다. 이가 장오(庄敖)다.

4 . 성왕중흥(成王中興 )

장오(庄敖) 5년 기원전 672년, 장오가 그의 동생 웅운(熊惲)을 죽이려고 했다. 웅운이 수나라로 몸을 피했다가 수후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와서 장오를 습격하여 죽이고 초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이가 초성왕(楚成王)이다.

성왕 웅운 원년 기원전 671년,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제후들과 수교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이로써 사절을 주천자에게 보내 조공품을 바치자 천자가 제사를 지낸 고기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초나라가 남방의 만이와 남월(南越)을 진압했기 때문에 우리 중국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초나라 영토는 사방 천리에 달했다.

성왕 16년 기원전 656년, 제환공(齊桓公)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여 형산(陘山)에 이르렀다. 초성왕이 굴완(屈完)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제환공을 막으라고 명했다. 굴완은 제환공과 강화를 맺고 회맹의 의식을 행했다. 제환공은 초나라가 주왕실에 조공을 드리면서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굴완은 초나라는 앞으로는 거르지 않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제환공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성왕 18년 기원전 654년, 성왕이 군사를 일으켜 북쪽의 허나라를 정벌하였다. 웃통을 벗고 스스로 결박을 지은 허군(許君)이 성왕 앞으로 나와 자기의 잘못을 빌었다. 성왕이 허군을 방면했다.

성왕 22년 기원전 650년, 성왕이 황(黃)① 나라를 정벌하였다.

성왕 26년 기원전 644년, 영(英)을 멸했다.

성왕 33년 기원전 637년, 송양공(宋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초왕을 소집했다. 초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송나라 군주가 감히 나를 소환하다니 내가 기꺼이 가서 그를 습격하여 욕을 보이겠다.」

성왕이 즉시 출발하여 회맹지인 우(盂)②에 당도하였다. 성왕이 군사들을 회맹장에 매복시켜 놓고 있다가 송양공(宋襄公)을 습격하여 사로잡은 후에 욕을 보이고 풀어주었다.

성왕 34년 기원전 636년, 정문공(鄭文公)이 조현을 드리기 위해 초나라의 영도에 들렸다. 같은 해 성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송나라 정벌군을 일으켜 송나라 영토인 홍수(泓水)③에서 싸워 송군을 크게 무찔렀다. 송양공은 팔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어서 팔의 상처가 덧나 몇 년 후에 죽었다.

성왕 35년 기원전 635년,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섬진으로 가던 길에 초나라에 들렸다. 성왕이 중이를 제후를 대하는 예로써 후하게 접대하고 군사를 내어 섬진으로 호송시켰다.

성왕 39년 기원전 631년, 노희공(魯釐公)이 초나라에 와서 제나라를 정벌해달라고 청했다. 초나라가 신후(申侯)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제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신후가 제나라의 곡(谷) 땅을 빼앗아 환공의 아들인 공자 옹(雍)을 데려다가 다스리게 했다. 당시 제환공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중 일곱 명이 초나라에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초나라는 그들 모두를 대부로 삼았다. 기(夔)④를 멸했다. 기국이 축융(祝融)과 죽웅(鬻熊)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송나라가 당진에게 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당진이 구원군을 보냈다. 성왕이 이를 알고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장군 자옥(子玉) 성득신(成得臣)이 당진과의 회전을 주장했다. 성왕이 자옥에게 말했다.

「당진의 군주 중이는 십수 년간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마침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하늘이 그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으니 우리는 결코 당할 수 없다.」

자옥이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기를 청했음으로 소수의 군사들만을 자옥에게 남겨놓고 자기는 대부분의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당진이 결국 성복(城濮)⑤에서 자옥이 이끄는 초나라의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성왕이 노하여 자옥을 죽였다.

주석

①황(黃) : 하남성 황천현(潢川縣) 서남쪽에 있었던 춘추 시 군소 제후국.

②우(盂) :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북

③홍수(泓水) : 지금의 하남성 자성(柘城) 북으로 당시 송나라를 북서에서 동남으로 관통해서 흐러든 수수(睢水)의 지류였다.. 이곳에서 기원전 638년 송양공(宋襄公)이 이끄는 송군과 초장 성득신(成得臣)이 이끄는 초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송군이 대패했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싸움이다.

④기(夔) : 지금의 호북성 자귀시(秭歸市) 동남에 있었던 파인(巴人)의 군소 제후국으로 웅거(熊渠)의 둘째 아들 웅지(熊挚)의 봉국이다.

⑤성복대전(城濮大戰) :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문공(晉文公)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5 . 피격찰기(被激察機)

- 고모를 격분시켜 기밀을 알아내다. -

성왕 46년 기원전 626년, 옛날 성왕은 적장자 상신(商臣)을 태자로 세우려고 성득신의 뒤를 이어 영윤(令尹)에 임명한 자상(子上) 투발(鬪發)과 상의하였다. 자상이 말했다.

「대왕의 연세는 아직 여유가 있으며 궁중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태자를 바꾼다면 변란의 원인이 됩니다. 초나라는 옛날부터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그 후사를 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신의 생김새를 살펴보니 눈은 벌처럼 동그랗고 목소리는 시랑과 같아 잔인한 성격이라 태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성왕이 자상(子上)의 말을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마음이 변한 성왕은 그의 아들 중에 직(職)을 태자로 세우고 상신을 폐하려고 했다. 상신이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아 미심쩍어 했다. 그래서 그의 태부 반숭(潘崇)과 상의했다.

「어떻게 하면 그 소문을 확인할 수 있겠소?」

반숭이 말했다.

「음식을 준비하여 부왕이 사랑하는 여동생 강미(江羋)를 초대 하십시오. 그런 다음 식사 중에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해 그녀로 하여금 노하게 하십시오.」

상신이 반숭의 말을 따랐다. 강미가 식사를 하다가 상신의 무례함에 노하여 말했다.

「네가 이렇듯 무례하니 왕께서 너를 죽이고 직을 대신 세우려고 하신다.」

상신이 강미가 한 말을 반숭에게 전하며 말했다.

「나를 폐하고 직을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찌해야 됩니까?」

6. 웅장난숙(熊掌難熟)

- 곰발바닥 요리는 쉽게 익지 않는다. -

반숭이 상신에게 물었다.

「직을 신하의 신분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소.」

「그렇다면 도망쳐서 몸을 의탁할 만한 데가 있습니까?」

「없소.」

「그렇다면 대사를 치를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소.」

그해 겨울 10월 상신이 궁중의 위병들을 동원하여 성왕이 묶고 있는 궁궐을 포위했다. 성왕이 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죽기 전에 곰발바닥 요리를 먹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성왕이 정미(丁未) 일에 스스로 목에 줄을 감아 졸라서 죽었다. 상신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목왕(穆王)이다.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런 목왕이 옛날 자기가 살던 태자궁을 반숭에게 하사하고 그를 태사(太師)로 삼아 초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목왕 3년 기원전 623년 강(江)①을 멸했다.

목왕 4년 기원전 622년 육(六)②, 요(蓼)③를 멸했다. 육(六)과 요(蓼)는 고도씨(皐陶氏)④의 후예들이 세운 제후국이다.

목왕 8년 기원전 618년,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다.

주석

①강(江) : 영(嬴)씨 성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식현(息縣) 서남에 있었다.

②육(六) :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六安市)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③요(蓼) : 지금의 하남성 고시현(固始縣)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④고도씨(皐陶氏) : 언(偃) 성의 동이(東夷) 족의 부족장. 순임금 때 형벌을 관장장하는 벼슬에 임명하고 우(禹) 임금 때는 그이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그 뒤를 잇지는 못했다.

7. 삼년불명(三年不鳴) 삼년불비(三年不飛)

- 3년을 동안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는 대붕 -

목왕이 재위 12만인 기원전 614년에 죽고 그 아들 장왕(庄王) 려(侶)가 초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장왕이 즉위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정사롤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은 령을 내렸다.

「감히 나에게 간하려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고 죽이리라!」

오거(伍擧)①가 간하기 위해 장왕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자 장왕은 그때 왼쪽 손으로는 정희(鄭姬)를, 오른 손으로 월희(越姬)를 껴안고 있으면서 종과 북 사이에 앉아 있었다. 오거가 장왕을 보고 말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 혹시 왕께서 아시고 계시지 않으신가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토산 언덕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데 3년이 가도록 날지도, 울지도 않고 앉아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장왕이 듣고 말했다.

「3년을 날지 않다가 한 번 날게 되면 하늘 끝까지 오를 것이다. 3년을 울지 않고 있다가 일단 한 번 울게 되면 천하가 그 소리에 놀랄 것이다. 그대는 물러가 있으라! 내가 그대의 말을 알아들었노라!」

그리고 나서도 몇 달 동안을 계속 음락에 더욱 탐닉하였다. 대부 소종(蘇從)이 다시 장왕의 처소로 들어와 음락을 그만 중지하고 정사를 돌보라고 간했다. 장왕이 소종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내가 내린 령을 듣지 못했는가?」

소종이 대답했다.

「제가 죽어 주군께서 깨달음을 얻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바라던 바입니다.」

장왕이 듣고 즉시 음락을 파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장왕은 부패한 관리 수백 명을 주살하고 다시 새로이 임용한 관리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오거와 소종을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자 초나라의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에 용(庸)②을 멸했다.

장왕 6년 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정벌하여 그들의 병거 500승을 노획했다.

주석

①오거(伍擧) : 오거는 오자서(伍子胥)의 조부로써 장왕의 장자인 강왕(康王)과 차자인 영왕(靈王)을 모신 사람이다. 후에 장왕을 따라 종군하여 필(邲)에서의 싸움에서 주전론을 주장하여 큰공을 세운 사람은 오거의 부친인 오참(伍參)이다. 오거가 장왕에게 간하는 사기의 이 부분은 오참(伍參)의 잘못된 기록이다. (오자서 열전 참조)

②용(庸) :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죽산현은 호북성의 서북의 섬서성(陝西省)과의 경계에 있다.

8. 문정규주(問鼎窺周)

- 구정의 무게를 물러 천자의 자리를 엿보다. -

장왕 8년 기원전 606년, 육혼융(陸渾戎)①을 정벌하고 주나라 왕성의 교외에서 열병식을 하였다. 주정왕(周定王)이 왕손만(王孫滿)을 시켜 장왕의 노고를 치하하게 하였다. 장왕이 왕손만에게 구정(九鼎)②의 크기와 무게에 관해 물었다. 왕손만이 대답했다.

「천자의 자리는 정(鼎)이 아니라 덕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어찌 정에 대해 물으십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주나라는 이제 쇠미해져 구정에만 의지하여 천하를 지배할 수 없소! 우리 초나라는 도검과 갈고리에 붙어 있는 날 만을 꺾어 녹여도 구정을 주조할 수 있소!」

왕손만이 대답했다.

「오호라! 군왕께서는 옛날 일을 잊으셨습니까? 옛날에 순임금의 우(虞)나라와 우(禹)임금이 세운 하(夏)나라가 창성했을 때 멀리 있는 변방의 국가들도 모두 도래하여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천하 구주의 장관들이 쇠붙이들을 모두 모아 공물로 바쳐오자 우임금은 그것들을 녹여 구정을 만들었고 그 정들 표면에 온갖 세상의 수많은 기괴한 것들을 모두 그려 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기괴한 것들이 세상을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세상의 도리를 무너지게 하자 구정은 은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은나라는 그 후로 600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은의 주왕(紂王)이 광포하고 잔학한 행위를 저질러 구정은 다시 주나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덕이 밝혀지게 되면 정은 비록 작아지나 무게는 무거워져서 옮기기가 어렵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세상의 도덕이 어지럽게 되면 정은 비록 커지나 가벼워져서 옮겨가기 쉽게 됩니다. 옛날 성왕께서 구정을 겹욕(郟鄏)③에 안치하고 점을 친 결과 주왕실은 30대에 걸쳐 700 년을 간다는 하늘의 명이 있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하다고는 하나 하늘의 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정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하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초왕이 듣고 즉시 군사들을 거두어 물러갔다.

주석

①육혼융(陸渾戎) :지금의 하남성 숭현(嵩縣) 동북쪽에 있었던 이민족의 이름. 동주의 왕도였던 락양(洛陽)과 가깝다.

②구정(九鼎) : 아홉 개의 정으로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눈 후에 각 주에 쇠를 바치게 하여 각기 정(鼎) 한 개씩을 만들었음으로 모두 아홉 개가 되었다고 했다. 정의 표면에는 그 주에 사는 사람의 수효와 특산물의 이름 및 매년 바쳐야 할 세금의 액수와 전답의 크기를 새겼으며, 두 귀와 세 발에는 용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정을 부르기를 《구룡신정(九龍神鼎)》이라고도 했다. 이후로 구정은 하왕조에서 상왕조로 전해져 나라의 위엄을 나타내는 전국(傳國)의 보기(寶器)로서 소중하게 간직되었다. 이어서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하자 구정은 낙읍으로 옮겨졌다. 구정을 옮길 때 수많은 군사들과 인부들을 동원하여 밧줄로 묶어 끌어 올려, 수로에서는 배로, 육로에서는 수레를 이용하였다.

③겹욕(郟鄏) : 지금의 하남성 락양시 서왕성(西王城) 공원에 있었던 고을의 이름.

10. 혜전탈우(蹊田奪牛)

- 소가 밭을 밟아 농작물을 망쳤다고 소를 빼앗을 수는 없다. -

장왕 9년 기원전 605년, 약오씨(若敖氏)①를 영윤으로 삼았다. 어떤 자가 약오씨를 참소하자 약오씨는 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왕이 약오씨를 정벌하여 그의 종족들을 멸족시켰다.

장왕 13년 기원전 601년, 서(舒)②나라를 멸했다.

장왕 16년 기원전 598년 진(陳)나라를 정벌하고 하징서(夏徵舒)를 잡아서 죽였다. 하징서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 무찌른 장왕은 즉시 진나라의 종사를 폐하고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군신들이 모두 그 일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제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신숙시(申叔時) 만은 경축의 말을 올리지 않았다. 장왕이 그 연고를 물었다. 숙시가 대답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다가 타인 소유의 밭에 들어가 그 밭을 망치자 그 밭 주인이 소를 빼앗아 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밭에 소를 끌고 간 사람의 행위는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 소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한 한 행위는 그 보다 더 심한 일이 아닙니까?③ 왕께서는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의 반란을 진압하신 일은 의(義)를 행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땅을 탐해 현으로 만들었으니 어찌 천하 사람들이 이런 일을 이해하겠습니까?」

장왕이 듣고 즉시 진나라를 복국시켜 주었다.

장왕 17년 기원전 597년, 봄 초장왕이 원정을 나가 정성을 포위하여 3개월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정양공(鄭襄公)은 정성의 외문인 황문(皇門)을 통해 손에는 양을 끌고 육단(肉袒)의 몸으로 나와 장왕을 맞이하며 말했다.

「제가 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여 대왕을 받들지 않아 대왕께서는 노여움을 품으시고 저희나라에 임하시게 했으니 이는 저의 죄입니다. 어찌 감히 대왕의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저를 남해로 보내시고 신의 첩들을 제후들에게 나누어주시더라도 오로지 대왕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부디 저의 선조이신 주려왕(周厲王), 주선왕(周宣王), 환공(桓公), 무공(武公)의 공업을 생각하시어 사직에 제사나마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면 저는 뉘우치고 대왕을 받들겠습니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은 감히 바랄 수 없는 지나친 욕심이라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큰마음을 먹고 대왕을 향하여 저의 생각을 한 번 말해 봤을 뿐이옵니다.」

초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대왕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마십시오!」

장왕이 말했다.

「군주 된 자가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있으니 틀림없이 자기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어찌 그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장왕이 말을 마치고 스스로 깃발을 휘둘러 좌우의 군사들을 휘몰아 정성 밖 일사(一舍)의 거리에 해당하는 30리 밖에 주둔하고 정나라의 화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정나라 대부 반왕(潘尫)이 초나라 진영에 가서 맹약을 행하고 자가 자량(子良)인 공자거질(公子去疾)이 초나라에 들어가 인질이 되었다. 그해 여름 6월, 당진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켜 하상(河上)에서 초나라 군사들과 조우하여 회전에 들어갔다. 초장왕의 초군은 당진군을 대파한 후에 형옹(衡雍)을 거쳐 영도(郢都)로 돌아왔다.

장왕 20년 기원전 594년, 송나라가 초나라의 사자를 죽였다.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송도 수양성(睢陽城)을 포위하였다. 수양성은 초군에 포위되어 5달이 넘도록 봉쇄되어 마침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어린 자식들을 바꾸어 잡아먹고 죽은 사람 시체의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땔 정도로 처참하게 되었다. 송나라 우사(右師) 화원(華元)이 성 위에서 몰래 내려와 초나라 진영에 가서 송성의 실정을 토로하였다. 장왕이 듣고 말했다.

「그대야말로 진실로 군자로다!」

초장왕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주석

①약오씨(若敖氏) : 투(鬪)씨를 말하며 여기서는 투월초(鬪越椒)를 가리킨다.

②서(舒) :지금의 안휘성 려강현(廬江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이름

③혜전탈우(蹊田奪牛)의 어원이다. 소를 몰고 남의 전답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망치게 했다고 해서 그 벌로 소를 빼앗는다는 뜻으로 죄보다 벌이 지나치게 무거운 경우를 말한다.

11. 기주병패(嗜酒兵敗)

- 술에 탐닉하여 전쟁을 망치다. -

장왕 23년 기원전 591년, 장왕이 죽었다. 그의 아들 웅심(熊心)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공왕(楚共王)이다.

공왕 16년 기원전 575년, 당진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와 수교한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가 사자를 보내어 구원군을 청했다. 공왕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두 나라 군사들이 언릉(鄢陵)에서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다. 치열한 접전 끝에 당진이 서전에서 이기고 싸움의 와중에 공왕은 흐르던 화살에 한 눈을 잃었다. 공왕이 장군 자반(子反) 공자측(公子側)을 불러서 앞으로의 작전에 대해 의논하려고 하였다. 원래 자반은 원래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사람이었다. 수양곡(豎陽谷)이란 그의 시종이 자반에게 술을 권하자 자반은 결국은 곤드레만드레 취하도록 마셨다. 공왕이 노하여 자반을 활로 쏴 죽이고 철군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공왕 31년 기원전 560년, 공왕이 죽고 장자인 웅초(熊招)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초강왕(楚康王)이다.

강왕이 재위 15년 만인 기원전 54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원(熊員)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겹오(郟敖)다.

12. 폭군영왕(暴君靈王)

- 조카를 시해하고 왕위을 차지한 초영왕이 천하를 어지립히다. -

강왕에게는 동생이 넷이 있었는데 바로 밑의 공자위(公子圍)를 위시하여, 자비(子比), 자석(子晳), 거질(去疾)이었다.

겹오 3년 기원전 542년, 겹오의 숙부이며 강왕의 동생인 공자위(公子圍)를 영윤으로 삼아 초나라의 정사와 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겹오 4년 기원전 541년, 공자위가 사자의 임무를 띠고 정나라에 가다가 도중에 초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 초나라에 돌아왔다. 그해 12월 기유(己酉) 일에 공자위가 초왕에게 병문안을 드린다고 궁궐로 들어가 겹오가 쓰고 있던 관끈을 풀어 그의 목에 감고 잡아 당겨 시해했다. 다시 겹오의 아들 막(莫)과 평하(平夏)를 죽이고 정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초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고 알리게 하였다. 그때 오거(伍擧)가 정나라에 사자로 가는 사람을 불러 정나라 군주가 묻는 것처럼 질문해 봤다.

「초왕의 자리는 누가 물려받았습니까?」

사자가 대답했다.

「대부 공자위가 즉위하였습니다.」

오거가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바꾸어 대답하도록 하였다.

「공자위는 공왕의 장자이십니다.」

공자위가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자비(子比)는 당진으로 달아났다. 공자위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영왕 3년 기원전 538년, 6월 초나라가 당진에 사자를 보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중원의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 영지인 신읍(申邑)에 모여 회맹의 의식을 거행했다. 오거가 회맹에 관한 전거를 들어 말했다.

「하나라의 계왕(啓王)①은 균대(鈞臺)②에서 제후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은 경박(景亳)③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하여 명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무왕은 맹진(孟津)④에서 제후들을 모아 하늘에 맹세를 시켰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은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또한 성왕의 아들인 강왕은 풍(酆)⑤의 별궁에서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조례를 받았고, 소왕(昭王)을 이은 목왕(穆王)은 도산(涂山)⑥으로 나가 제후들을 접견했습니다. 제환공은 군사들을 이끌고 소릉(召陵)까지 와서 회맹했고, 당진의 문공은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열어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섯 왕과 두 제후가 제후들을 소집하여 행한 회맹을 행한 방식은 같지 않으니 어떤 것이든 대왕께서 택해 시행하십시오.」

영왕이 듣고 말했다.

「제환공이 행한 의식으로 하라!」

그 때는 정나라의 상국 자산(子産)은 신 땅으로 행차하여 회맹에 참석했지만 당진(唐晉), 송(宋), 노(魯), 위(衛) 등의 제후국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영왕이 제후들과 맹약의 의식을 행하면서 얼굴에 교만한 기색을 띄우며 거드름을 피우자 오거가 보고 말했다.

「하나라의 걸왕이 유잉(有仍)⑦에서 회맹을 하자 유민씨(有緡氏)⑧가 반란을 일으켰고 은나라의 주왕이 여산(黎山)⑨에서 회맹을 하자 동이가 반하였습니다. 또한 주나라의 유왕(幽王)이 태실(太室)⑩에서 회맹을 행한 후에 융적(戎狄)이 들고 일어나 나라가 망했습니다. 대왕께서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십시오.」

그해 7월 초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주방(朱方)⑪을 포위했다. 8월에 주방을 함락시키고 제나라의 망명객 경봉(慶封)을 사로잡고 그곳에 살고 있던 경봉의 종족들은 모두 멸족시켰다. 영왕이 경봉에게 자기가 지은 죄를 제후들 앞에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여러 나라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능멸했을 뿐 아니라 제나라 대부들을 위협하여 군주 대신 자신에게 충성을 하도록 하늘에 맹세하게 만든 이 경봉과 같은 사람은 되지 말기 바라오!」

그러나 경봉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 나라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형의 아들 웅미(熊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초공왕의 서자 위(圍)같은 사람은 되지 마시오!」

그래서 영왕이 경봉을 즉시 죽였다.

영왕 7년 기원전 534년, 장화대(章華臺)의 축조를 위해 전국의 도망자들을 색출하여 공사장에 투입시켰다.

영왕 8년 기원전 533년, 영왕이 공자기질(公子棄疾)에게 군사를 주어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다.

영왕 10년 기원전 531년, 초왕이 채후(蔡侯)를 소환하여 잔치를 벌였다. 이윽고 채후가 술에 취하자 초왕은 갑사들을 시켜 사로잡아 죽였다. 자신의 부군을 시해하고 군주의 자리에 오른 채후를 징벌했다는 명분이었다. 기질은 영왕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채나라를 정벌해서 멸했다. 영왕은 기질을 채공(蔡公)으로 책봉하여 진(陳)과 채(蔡) 두 나라 땅을 다스릴 지방관을 알아서 임명하도록 했다.

영왕 11년 기원전 530년, 초왕이 서(徐)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를 위협하려고 했다. 영왕은 건계(乾谿)⑫에 주둔하며 서나라를 점령했다는 첩보를 기다렸다. 영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제(齊), 진(晉), 노(魯), 위(衛)의 네 나라는 피봉 될 때 모두 주천자로부터 보기(寶器)를 하사 받았으나 유독 우리 초나라만 받지 못했다. 내가 금일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어 우리의 선조를 이곳에 분봉할 때 주어야 했던 보기로 주나라가 가지고 있는 구정을 청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우리의 청을 들어주겠는가?」

석보(析父)가 대답했다.

「주왕은 우리에게 정을 내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선왕이신 웅역(熊繹)님께서 먼 형만의 땅에 거하시면서 몸에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변변치 못한 남루한 수레를 타시면서 풀이 우거진 들판에 살고 계시다가 왕실의 부름을 받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왕도로 들어가 주천자를 모셨습니다. 동시에 웅역님께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대추나무 가지로 만든 화살대를 공물로 주왕실에 바치셨습니다. 산동의 여러 나라들은 주나라 왕들의 친척들이 피봉된 제후국이며 특히 당진, 노(魯), 위(衛), 정(鄭) 등의 네 나라는 주천자(天子)의 동생들이 봉해진 나라입니다. 네 나라는 주왕실로부터 보기를 모두 하사 받아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유독 우리만이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주왕실과 네 나라는 모두 군왕을 떠받들며 대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정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왕이 다시 석보에게 물었다.

「옛날 우리의 먼 조상이신 계련(季連)님의 큰 형님 되시는 곤오(昆吾)님은 원래 허나라에 살았었는데 지금 정나라가 그 땅을 탐하여 점거하고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이 그 땅을 내놓겠는가?」

「주왕실도 정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정나라가 어찌 감히 전답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옛날에는 천하의 모든 제후들은 우리나라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로지 당진의 위세만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진(陳), 채(蔡)를 멸하여 우리의 땅으로 만들고 부갱(不羹)에는 철옹성을 쌓아 세 곳에는 모두 천승의 군사들을 각각 주둔시키고 있다. 어찌 제후들이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제후들은 모두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영왕이 석보가 하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석보야말로 옛날 고사에 정통하구나!」

영왕 12년 기원전 529년 봄에 초영왕이 건계에 머물며 사냥 등의 일로 즐기면서 영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영왕이 벌린 대역사에 동원되어 고생이 참으로 심하였다. 옛날에 영왕이 신성(申城)에서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할 때 월나라의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모욕하고 채나라의 대부 관기(觀起)를 죽였었다. 관기의 아들 관종(觀從)이 도망쳐 오나라로 가서 오왕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권했다. 또한 월나라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고 자기는 오나라를 위한 첩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공자기질의 명이라고 하고 당진에 망명하고 있던 공자비(公子比)를 불러서 채나라로 불러들이고 오와 월 두 나라 군사들과 함께 영왕이 없는 영도를 습격하려고 했다. 관종이 공자비에게 말하여 공자기질을 등(鄧) 땅으로 불러 하늘에 맹세시키고 같이 영도로 진군하도록 했다. 반군은 영왕의 태자 록(綠)를 죽이고 공자비를 왕으로 세우고 공자석(公子晳)은 영윤으로 공자기질은 사마가 되었다. 궁궐에 살던 영왕의 총신과 시종들을 모두 잡아서 죽인 관종은 군사를 이끌고 영왕이 주둔하고 있던 건계로 가서 초나라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나라에 왕이 새로 섰으니 먼저 돌아오는 자들은 옛날의 작록과 전답과 가옥을 돌려주겠으나 나중에 오는 자들은 모두 몰수하고 먼 변방으로 쫓아내겠다.」

영왕이 거느리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영왕 곁을 떠나 영도로 귀환하였다.

영왕은 태자 록이 죽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수레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리고는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이와 같은가?」

영왕의 시종이 말했다.

「부모 된 자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합니다.」

「남의 수많은 아들들을 죽인 내가 어찌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우윤(右尹)이 말했다.

「왕께서는 도성의 교외로 가셔서 국인들의 정세를 한번 살펴보신 후에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데 내가 떻게 도성으로 갈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큰 고을로 가시어 주위의 제후들에게 군사를 빌려 반란군을 진압하시기 바랍니다.」

「큰 고을의 관리들은 모두가 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안 된다면 잠시 제후국으로 몸을 피하신 후에 제후들의 도움을 구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큰 복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제후들로부터 욕됨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왕은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하여 언성(鄢城)⑬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영왕이 자기의 권유를 듣지 않자 우윤은 영왕과 계속 같이 다니다가는 자신도 함께 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영왕의 곁을 떠나 도망쳤다.

영왕은 혼자 몸이 되어 산중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게 되었다. 촌민들은 모두가 새로운 왕을 무서워하여 아무도 영왕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영왕이 길을 계속 가다가 우연히 연인(涓人)을 만나게 되었다. 연인은 옛날 궁중에서 청소를 하던 사람이라서 영왕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영왕이 연인을 향해 외쳤다.

「너는 나를 위해 밥 한 사발만 얻어 오너라! 나는 이미 3일 간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연인이 말했다.

「새로운 왕이 온 나라에 추상같은 조칙을 내려 왕께 음식을 주거나 왕과 함께 도망친 자는 그 삼족을 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디 가서 음식을 얻어올 수 있겠습니까?」

영왕이 할 수 없이 연인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연인이 흙으로 베개를 만들어 영왕의 머리를 옮겨놓고 몸을 빼내어 달아나 버렸다. 영왕이 잠에서 깨어나 연인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허기가 져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신무우(申无宇)의 아들인 신해(辛亥)가 영왕을 찾아다니다가 길거리에 쓰러진 영왕을 발견하고 말했다. 신무우는 우(芋) 땅의 대부였다.

「저의 부친께서는 이미 두 번에 걸쳐 대왕이 세우신 법을 어겨 죽을 죄를 얻었으나⑭ 대왕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어 더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대왕께서 앞으로 곤란에 처하시게 될 때는 반드시 그 입은 은혜를 반드시 갚으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신해는 부친의 유언을 행하기 위해 영왕이 소식을 찾아 지금껏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리택(釐澤)의 부근에서 허기져 쓰러진 영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해가 영왕을 자기의 수레에 싣고 그의 집으로 모셨다. 영왕은 그해 여름철 5월 계축(癸丑) 날에 신해의 집에서 죽었다. 신해는 자기의 두 딸을 죽여 영왕과 함께 순장시켰다.

주석

①계(啓)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의 아들이다. 곰으로 변하여 황하의 치수공사를 하고 있던 우를 본 그의 아내는 도망가다가 돌이 되었다. 그때 우의 아내는 계(啓)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돌로 변한 그녀의 배가 점점 자라더니 갈라져 계가 태어났다.

②균대(鈞臺) : 현 하남성 우현(禹縣) 부근에 있었던 하나라의 별궁

③경박(景亳) : 현 하남성 조현(曹縣) 부근. 상나라는 창건해서 멸망할 때까지도읍을 7번 천도했다. 상나라의 처음 도읍지는 경박(景亳)이고 마지막 도읍지는 현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재 소둔촌(小屯村)이었다.

④맹진(孟津)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북 20키로 되는 맹진현(孟津縣) 부근의 나룻터로 중국고대부터 황하를 건널 수 있던 유명한 도선장(渡船場)이었다. 주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맹진에서 하늘에 맹세의 의식을 치르고 황하를 건너 진군하던 중 군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에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회군하고 그 2년 후에 다시 출정하여 목야(牧野: 현 하남성 신향시(新鄕市) 북)의 들판에서 은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주 나라를 세웠다.

⑤풍(酆) : 주나라 도읍인 호경(鎬京) 옆 서쪽에 세운 별궁이 있던 고을

⑥도산(涂山) : 현 안휘성(安徽省) 방부시(蚌埠市) 부근.

⑦유잉(有仍) :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부근

⑧ 유민씨(有緡氏) : 지금의 하남성 우성현(虞城縣) 북쪽에 있었던 하나라 때의 이민족 국가

⑨여산(黎山) :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 동남에 있던 산 이름.

⑩태실(太室) :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에 해당하는 숭산(嵩山)의 주봉 이름이다. 태실산을 마주보고 있는 봉오리는 소실산(少室山)이다.

⑪주방(朱方) : 오(吳)나라의 방어기지가 있는 성읍으로 지금의 장강 어구인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경내다. 제나라의 대부 경봉(慶封)이 권력다툼에서 패하고 오나라에 망명하자 오왕은 경봉을 주방에 봉해 오나라의 북방을 지키도록 했다.

⑫건계(乾谿) :현 안휘성 박주시(亳州市) 남 와양현(渦陽縣) 부근. 박주시는 안휘성 북부의 하남성과의 접경 지역에 있는 성시(城市)이다.

⑬언성(鄢城) :언영(鄢郢)이라고도 하며 초 나라의 도성인 영성(郢城)과 다른 도성. 지금의 호북성 의성현(宜城縣) 남쪽에 있었다. 의성현은 한수 강안의 도시로 양번시(襄樊市) 남 40키로에 있다.

⑭이 말은 영왕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기의 수레에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旗)를 달고 우읍(芋邑)에 이르자 신무우가 깃발을 압수한 일과 또 한번은 자기 집의 하인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서 나중에는 영왕의 호위병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신무우가 왕궁에 들어가 그 병사를 잡아간 일을 말한다. 영왕은 두 번 다 신무우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13. 살형탈위(殺兄奪位)

- 세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초평왕 -

이때 초나라는 비록 공자비를 초왕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초나라의 국인들은 영왕이 다시 돌아와 자기들을 토벌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으며 다시 영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종이 새로이 초왕의 자리에 오른 공자비에게 말했다.

「공자기질을 죽이지 않는다면 비록 왕께서는 나라를 얻기는 했지만 후에 반드시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초왕이 말했다.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이요?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관종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왕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비는 결국 관종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관종은 공자비의 곁을 떠났다.

기질이 도성에 들어왔으나 도성 안의 백성들은 모두가 밤만 되면 공포에 떨며 외치곤 했다.

「영왕이 돌아와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기질은 을묘(乙卯) 날 밤에 사람들을 배에 태워 노를 젓게 하면서 장강의 강변을 오르내리며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영왕이 쳐들어 온다!」

도성 안의 백성들은 모두 놀랐다. 기질이 다시 만성연(曼成然)을 시켜 신왕 자비(子比)와 영윤 자석(子晳)에게 알리게 했다.

「영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왕과 영윤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사마 기질도 도망쳐 곧 당도할 예정입니다. 두 분께서는 욕을 당하기 전에 빨리 방도를 찾으십십시오. 분노한 수많은 백성들이 마치 밀려오는 홍수처럼, 들판에서 요원하게 번지는 불길처럼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자비와 자석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진(丙辰) 일에 기질이 자비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기질이 이름을 웅거(熊居)로 바꾸었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거짓 계략을 써서 두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초평왕은 초나라의 국인들과 제후들이 그에게 복종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진과 채 두 나라의 후손들을 찾아 옛날과 같이 복국시켜 주었으며 정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은 다시 되돌려주었다. 나라 안의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은 구휼하였으며 정치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오나라가 초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초나라의 다섯 장군①들을 사로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평왕이 관종을 불러 무엇을 원하지를 묻자 그는 복윤(卜尹)을 원한다고 말했다. 평왕이 관종에게 그의 원대로 복윤에 임명했다.

주석

①다섯장군(五率) : 초영왕(楚靈王)이 서국(徐國)을 정벌할 때 파견했던 다섯 명의 장군. 즉, 탕후(蕩侯), 반자(潘子), 사마독(司馬督), 두윤오(蠹尹午), 능윤희(陵允喜) 등을 말한다.

14. 취국오난(取國五難)

- 나라를 얻는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다. -

원래 초공왕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서출이라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산명천의 여러 귀신들에게 망제(望祭)를 올리면서 귀신에게 물어서 결심을 굳혀 사직을 이을 사람을 정하려고 했다. 초공왕은 아무도 몰래 사람을 시켜 태실(太室)의 땅을 파고 벽옥을 묻게 했다. 이어서 다섯 공자들을 목욕재계시키고 제당에 들게 하였다. 강왕은 들어오더니 벽옥을 뛰어 넘고 지나갔으며 영왕은 절을 할 때 벽옥이 묻힌 곳에 팔꿈치가 닿았으며 자비와 자석은 모두 벽옥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져 머물렀다. 그때 평왕은 나이가 어려 유모가 가슴에 품고 들어 와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절을 올리게 했는데 평왕의 옷에 달린 단추고리가 벽옥이 묻힌 곳 위에 닿아 벽옥을 누르면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공왕이 죽자 그 때는 평왕의 나이가 아직 어려 장자인 강왕이 그 뒤를 잇게 되었고 다시 초왕의 자리는 강왕의 아들 겹오(郟敖)에게 전해졌으나 곧바로 영왕에게 살해되었다. 초왕의 자리는 자신의 조카이며 강왕의 아들인 겹오를 죽인 영왕이 스스로 초왕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자비는 기질의 부추김을 받아 영왕이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하여 영도를 급습하고 초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기간은 불과 십 여 일에 불과했으며 그 뒤를 자석이 잇지 못하고 두 사람이 같이 기질의 음모에 걸려 죽고 말았다. 평왕의 4명의 형제들은 모두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오로지 막내인 기질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초왕의 자리에 올라 초나라 조상의 묘당에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옛날 태실에서 대산명천의 귀신에게 제사 지낼 때 받은 신의 계시가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자비가 당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가 초나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에게 물었다.①

「귀국한 자비가 성공하여 초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숙향이 대답했다.

「앉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영왕을 싫어하는 초나라 백성들이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 마음은 마치 마음을 합쳐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꾼의 행동과 같아 쉽게 성공할 수 있을 듯 합니다만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자비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한 자비와 함께 공동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비가 초왕의 자리를 얻을 수 없는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총애하는 사람은 주위에 득실대지만 현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으니 첫 번째 어려움이고, 비록 따르는 사람이 있다 하나 앞장서서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음이 두 번째입니다. 또한 앞장서서 도모할 사람이 있다 한들 지략을 써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세 번째이며, 설사 지략을 갖추어 계획을 짤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호응하는 백성들이 없음이 네 번째이고, 백성들이 비록 호응한다 한들 덕을 갖추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입니다. 당진에 망명해 산지 13년이나 지났어도 당진이나 초나라 사람들 중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린 그를 친척들마저도 배반했으니 그에게는 지지기반이 없습니다. 더욱이 때를 기다려 기회를 타지 않고 오히려 경거망동하니그에게는 심모원려의 장기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단지 혈혈단신으로 해외에 망명하여 오랫동안 타향에 머무르고 있었으니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도 없습니다. 또한 국외로 도망 다녔으나 국내에는 아무도 그의 행적을 좋아서 기록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덕을 베푼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왕이 포학하여 기피할 이유가 없다고는 하지마는 그러나 자비의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스스로 화를 불러들여 몸을 망치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다섯 가지의 어려운 점을 모두 극복하고 그의 군주를 살해하는데 성공은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아 결코 그는 초왕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초나라의 왕위는 기질에게 돌아 갈 것입니다. 기질은 진과 채의 두 나라의 땅을 다스리고 있으며 또한 방성(防城)이 그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땅은 어떤 사악한 일도 발생하지 않고 도적들은 또한 깊숙이 숨어서 감히 망동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있어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 망제를 드릴 때 신의 계시를 백성들은 굳게 믿고 있으니 초나라 왕족들 간에 란이 일어난다면 초왕의 자리는 공왕의 아들 중 막내인 기질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막내 상속은 또한 초나라의 왕위 계승법이기도 합니다. 자비가 감당할 수 있는 관직은 우윤이 최고이고 그의 귀함을 논하자면 서출에 불과할 뿐이며 조상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도 자비는 왕위와는 한 참 떨어져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비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가 초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환공과 진문공도 자비처럼 역시 외국에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제환공은 위희(衛姬)의 소생이며 제희공(齊釐公)의 총애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곁에는 포숙아(鮑叔牙), 빈수무(賓須无), 습붕(隰朋)과 같은 현신들의 보좌를 받았고 거(莒)나라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위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나라 안에서는 제나라의 명문거족들인 고씨와 국씨들의 내응을 받았습니다. 제환공은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흐르는 물처럼 명료하게 꿰뚫어 보고 쫓았으며 백성들에게는 결코 싫증을 내지 않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우리 당진의 선군이셨던 문공께서는 이적(夷狄)의 호(狐)나라 계희(季姬)의 소생인데 역시 진헌공(晉獻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문공께서는 학문을 배우는데 있어 결코 싫증을 내시지 않았으며 그의 나이 겨우 17세 때 당진의 다섯 현인②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자여(子余)와 자범(子犯)를 심복으로 삼고 위주(魏犨)와 고타(賈佗)는 고굉지신으로 삼았으며, 밖으로는 제(齊), 송(宋), 섬진(陝秦), 초(楚) 등의 제후국의 군주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안에서는 란지(欒枝), 극곡(郤穀), 선진(先軫), 호돌(狐突)등의 내응을 받았습니다. 19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면서 문공께서는 계속 마음 속의 뜻을 새롭게 다짐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혜공과 회공이 백성들의 뜻에 반하자 백성들의 마음도 두 사람의 군주에게서 멀어지게 되어 문공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공이 나라를 얻게 되었음은 당연한 귀결이며 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비는 백성들에게 베푼 은혜도 없으며 밖으로는 제후들로부터 도움도 받지 못하며 당진에서 떠나 초나라에 귀국하는데 우리는 그를 환송하지 않고 그가 초나라에 돌아가자 백성들 중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데 어찌 그가 나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비가 과연 숙향이 말한 대로 비명에 죽고 기질이 결국 초나라의 왕이 되었다. 숙향은 진실로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었던 성인이었다.③

주석

①한선자(韓宣子)는 한기(韓起)의 시호(諡號)를 말하며 숙향(叔向)은 양설힐(羊舌肹)의 자(字)이다.

②오현(五賢) : 진문공이 당진국에서 쫓겨난 중원의 여러 나라를 18년 동안 유랑할 때 같이 했던 5섯 명의 어진 신하를 말한다. 조쇠(趙衰), 호언(狐偃), 고타(賈佗), 위주(魏犨), 선진(先軫)이다.

③초공왕(楚共王)과 초평왕(楚平王) 사이의 초나라 왕위 계승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왕(共王) ()재위 기원전 592-560년

당진(唐晉)과 언릉(鄢陵)에서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고 패전하여 부왕인 초장왕이 이룩한 중원의 패권을 잃었다. 슬하에 아들을 다섯 두었다. 장남은 강왕(康王) 초(招) : 차남은 영왕(靈王) 위(圍) : 3남은 자비(子比) :4 남은 자석(子晳) : 5남 막내는 평왕(平王) 기질(棄疾)이다.

강왕(康王)기원전561- 545년

공왕(共王)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강왕의 뒤는 그의 아들 겹오(郟敖)가 뒤를 이었다.

겹오(郟敖) ()기원전 544-541년

자기의 숙부인 영왕에게 재위 4년만에 시해 당했다.

영왕(靈王) ()기원전 540- 529년

조카인 겹오를 죽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라 장화궁을 짓고 대외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진채(陳蔡) 두 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았으며 동생 기질을 채공으로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후에 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기질에 의해 쫓겨났다. 영왕은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신해의 집에서 목을 메어 죽었다.

자비(子比)기원전 529년

영왕을 몰아낸 채공 기질에 의해 초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어서 기질이 꾸민 음모에 빠져 그의 동생 자석과 함께 자살했다.

평왕(平王) 기질(棄疾)기원전 528 - 514년

공왕의 막내아들로써 영왕이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형인 자비를 앉혔다가 다시 자비를 음모에 빠뜨려 자석과 함께 자살하게 만들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자기의 후계로 채녀(蔡女) 소생인 건(建)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가 장성하자 태자의 부인으로 섬진 애공(哀公)의 동생인 백영(伯嬴)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백영의 미모에 반한 평왕이 며느리로 데려온 백영을 자기의 부인으로 삼고 태자건을 북방의 성보(城父)라는 곳으로 보냈다. 후에 다시 태자건을 세력을 줄이기 위해 세자의 태부인 오사를 소환하여 그 두 아들과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 오사의 장남인 당공(棠公) 오상(伍尙)은 오사의 부름에 응하여 달려와 오사와 함께 죽었으나 자서(子胥)인 오원(伍員)은 이미 망명한 태자건의 뒤를 따라 정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태자건이 정나라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되자 오자서는 태자건의 어린 아들 승(勝)을 데리고 소관(昭關)을 넘고 장강을 건너 오나라로 들어가 합려(闔閭)를 모시게 되었다. 후에 오자서는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쳐들어와 영도를 점령하자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은 란을 피해 수(隨)나라로 몸을 피했다. 신포서(申包舒)의 활약으로 섬진의 애공으로부터 구원군을 얻어 오나라 군사들을 영도에서 몰아내고 초나라는 다시 복국 시켰다.

15. 평왕취식(平王娶媳)

- 며느리를 부인으로 삼은 초평왕 -

평왕 2년 기원전 527년, 비무기(費无忌)를 섬진으로 보내 태자 건의 부인을 맞이하려고 했다. 진녀의 뛰어난 미색을 본 비무기가 진녀의 행렬을 앞질러 달려와서 평왕에게 말했다.

「진녀는 천하절색이라 왕께서 부인으로 삼으시고 태자의 부인은 따로 구해 주면 됩니다.」

평왕이 비무기의 말에 혹하여 진녀를 자기가 취하여 부인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진(珍)이라고 하였다. 태자에게는 여자를 따로이 구해 부인으로 삼게 했다. 그 때 태자의 태부는 오사(伍奢)였고 소부는 비무기였다. 태자가 자기를 싫어하자 비무기는 틈만 있으면 태자를 평왕에게 참소하였다. 태자 건은 그 때 15세였는데 그 모친인 채녀가 평왕에게 총애를 잃었기 때문에 평왕과는 더욱 소원해졌다.

평왕 6년 기원전 527년 태자 건을 성보(城父)①로 보내어 초나라의 변방을 지키게 했다. 무기가 다시 태자를 매일 참소를 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가 진녀를 데려올 때부터 태자는 저를 원망하고 있었으며 폐하에 대해서도 원망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좀더 태자에 대해 방비를 해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 태자는 성보에 있어 병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중원의 제후국들과 관계를 긴밀히 맺은 후에 란을 일으켜 영도에 입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주석

①성보(城父)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부근

16. 부질유자(父質誘子)

- 오사를 인질로 잡아 오자서 형제를 유인하다. -

평왕이 무기의 참소를 듣고 성보에서 태부 오사를 불러 책망하였다. 오사는 무기가 태자를 참소했다는 사실을 알고 평왕에게 간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소인배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골육을 멀리하시려 하십니까?」

무기가 오사의 간하는 말을 전해 듣고 평왕에게 말했다.

「오늘 태자와 태부 오사를 제압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왕은 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평왕이 오사에게 명하여 그의 두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불러오게 하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 사마 분양(奮陽)에게 명하여 태자를 잡아 데려오게 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분양으로부터 평왕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태자는 즉시 송나라로 도망쳤다.

무기는 태자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평왕을 향해 말했다.

「오사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도 같이 죽이지 않는다면 장차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부친의 죄를 용서하여 준다고 하면서 두 형제를 부른다면 효심이 깊은 두 형제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래서 평왕이 사자를 감옥에 있는 오사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너의 두 아들들을 불러 이곳에 오게 한다면 살려주고 오게 할 수 없다면 죽이겠다.」

오사가 듣고 말했다.

「큰아들 상(尙)은 내가 부르면 틀림없이 오겠지만 작은 아들 원(員)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평왕이 말을 전해 듣고 다시 사자를 보내어 물어보게 했다.

「어째서인가?」

오사가 말했다.

「상의 사람됨은 성격이 곧고 절개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고 효성이 지극하며 어집니다. 내가 부르면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하려고 죽음도 불사하고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나 원의 사람됨은 지혜가 뛰어나고 계략을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용기가 뛰어나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초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왕이 사람을 시켜 두 사람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다면 그대들의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겠노라!」

오상이 오원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가면 부친의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데,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불효라! 부친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지략이 없는 것이다. 서로 맡은 바 일을 헤아린다면 그것은 지혜라! 너는 너의 길을 행하고 나는 아버님에게 돌아가 죽음을 택해 나의 길을 택하겠다.」

오상은 즉시 영도로 출발하고 오원은 활에 화살을 재어 왕의 사자를 향해 겨누고는 말했다.

「부친이 죄를 얻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 자식 되는 자들을 부른단 말인가!」

오원이 활을 쏘려고 하자 사자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오자서는 곧바로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사가 듣고 말했다.

「원이 도망쳤으니 참으로 초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었구나!」

초왕이 즉시 오사와 오상 부자를 죽였다.

평왕 10년 기원전 519년, 태자 건의 생모가 소(巢)① 땅에 살면서 오나라와 몰래 통했다. 오나라가 공자 광(光)을 시켜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공자광이 진채(陳蔡) 두 나라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태자건의 모친을 데리고 오나라로 귀환했다.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초나라의 도성을 다시 짓고 옮겼다.

처음에 오나라의 변경 마을인 비량(卑梁)과 초나라의 변경 마을인 종리(鍾離)의 어린아이들이 뽕잎을 따다가 분쟁이 생겨 두 집안이 서로 노하여 공격했다. 종리 사람들이 비량으로 쳐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비량대부가 노하여 비량성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종리를 공격하였다. 초왕이 전해 듣고 노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일으켜 비량성을 공격하였다. 오왕도 전해 듣고 역시 노하여 공자광에게 군사를 주어 종리를 공격하여 멸하고 소(巢) 땅에 주둔하도록 했다.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영도를 다시 개축하였다.

평왕 13년 기원전 516년 평왕이 죽었다. 장군 자상(子常)이 말했다.

「태자 진(珍)의 나이가 너무 어릴뿐 아니라 그 모친은 곧 태자건의 부인으로 데리고 온 여인이다.」

그래서 국인들은 자서(子西)를 초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자서는 평왕의 서제인데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자서가 자상에게 말했다.

「나라에는 전해 내려오는 법도가 있는데 다시 왕을 바꾼다면 내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그와 같은 말을 입에 담는 자는 주살해야 하오.」

주석

①소(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巢縣) 동북

16. 오군입영(吳軍入郢)

- 오자서가 오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영도를 함락시키다. -

그래서 태자 진을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소왕(楚昭王)이다.

소왕 원년 기원전 515년, 초나라의 백성들이 비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무기는 태자 건을 참소하고 오사 부자와 백극완(伯郤宛)을 죽임으로써 오사의 아들 오자서와 백극완의 아들 백비(伯嚭)가 모두 오나라로 도망쳐서 오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초나라 변경을 수시로 침입했음으로 초나라 사람들은 무기를 원망하게 되었다. 초나라 영윤 자상이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무기를 죽였다.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소왕 4년 기원전 512년, 오나라의 세 공자①가 초나라로 망명해 왔다. 초나라가 그들을 대부로 봉하여 오나라를 막게 하였다.

소왕 5년 기원전 511년, 오나라가 초나라의 땅인 육(六)과 잠읍(潛邑)②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소왕 7년 기원전 509년, 초나라가 자상을 시켜 오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오나라가 초나라 군사들을 예장(豫章)에서 크게 물리쳤다.

소왕 10년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闔閭), 오자서, 백비와 당(唐)과 채(蔡) 두 나라 군주들이 초나라를 정벌전에 나섰다. 초나라 군사들은 오나라 군사들과 싸워 크게 패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윽고 영도에 입성하여 평왕의 묘를 파헤쳐 욕보였다. 그것은 오자서가자기 부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오나라 병사들이 공격해오자 초나라가 자상을 대장으로 삼아 막게 하였다. 자상은 오나라 군사들과 한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으나 이어서 벌어진 싸움에서 자상의 군사들이 패주하자 자상은 패전의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정나라로 도망쳤다. 초나라 군사들이 패주하기 시작하자 오나라 군사들은 승세를 타고 초군의 뒤를 추격하였다. 오군은 초군과 다섯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기묘일에 소왕은 영도를 빠져나갔다. 이어서 경진(庚辰) 일에 오나라 군사들은 영도에 입성하였다.

영도를 빠져나온 소왕은 운몽(雲夢)으로 달아났다. 운몽 사람들이 소왕이 그들의 왕인지도 모르고 활을 쏘아 소왕의 팔을 맞추어 부상을 입혔다. 소왕은 운(鄖) 땅으로 달아났으나 운공의 동생 투회(鬪懷)가 소왕을 보고 말했다.

「지금 왕의 부왕인 평왕이 나의 부친을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여 우리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잘못된 일은 결코 아니다.」

운공이 자기의 동생을 꾸짖어 물리쳤으나 그가 소왕을 죽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왕과 함께 수나라로 들어갔다. 오왕은 소왕이 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수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수나라 군주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주나라가 그들이 자손들을 강수와 한수 사이에 봉했는데 초나라가 모두 멸하고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니 초나라는 희성 제후국인 수나라와는 원수의 나라가 아닌가?」

수나라 군주가 소왕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자 소왕을 따라 나섰던 자기(子綦)가 왕을 깊숙한 곳에다 숨기고 자신을 왕으로 꾸민 후에 수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를 잡아다가 오왕에게 바치라.」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잡아 오왕에게 바치는 일에 대해 점을 치자 점괘가 불길하게 나왔다. 그래서 수나라 사람들이 오왕에게 말했다.

「초왕은 도망쳐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

오나라 군사들이 수나라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소왕을 수색하겠다고 청해 왔으나 수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군사들은 감히 수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석

①왕료(王僚)의 동생 엄여(掩餘)와 촉용(觸庸)을 말한다. 왕료가 합려가 보낸 전제(專諸)에 의해 암살 당하자 염여는 서국(徐國)으로 촉용은 종리(鍾離)로 도망쳐 초나라로 도망쳤다. 이것은 두 공자의 오기(誤記)이다. (史記索隱)

②잠읍(潛邑) :지금의 안휘성 곽산현(霍山縣) 동북

17. 소왕복국(昭王復國)

- 초소왕이 진나라 원군 도움으로 나라를 다시 찾다. -

소왕이 영도를 빠져나가 도망치면서 신포서(申包舒)를 시켜 섬진에 가서 구원군을 청해오게 하였다. 섬진이 병거 500승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초나라도 역시 패잔병들을 다시 규합하여 섬진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오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소왕 11년 기원전 505년, 6월 초진(楚秦) 연합군은 직(稷)① 땅에서 오나라 군사들과 회전하여 승리를 취했다.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오나라 군사들이 싸움에 패한 것을 보고 몰래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가 스스로 오왕이라고 칭했다. 합려가 듣고 초나라에서 철군하여 오나라로 돌아가 부개를 토벌하였다. 부개가 싸움에서 지고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가 부개를 당계(堂谿)②에 봉하고 그의 종족들을 당계씨(堂谿氏)라고 불렀다.

초소왕이 영도로 귀환하던 길에 당나라를 멸하고 그해 9월 영도(郢都)에 입성하였다.

초소왕 12년 기원전 504년, 오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와 초나라의 번(番)③ 땅을 빼앗아 갔다.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초나라의 도성을 영성에서 북쪽의 한수 유역의 약(鄀)④ 땅으로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영도라고 명명했다.

소왕 16년 기원전 500년, 공자가 노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소왕 20년 기원전 496년, 초나라가 돈(頓)⑤과 호(胡)⑥를 멸했다.

소왕 21년 기원전 495년, 오왕 합려가 월나라를 정벌하였다. 전투 중에 월왕 구천이 활을 쏴서 합려에게 부상을 입혔다. 합려는 그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오나라는 이 일로 인해 월나라와 원수가 되어 이후로는 더 이상 서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왕 27년 기원전 489년 봄 오왕 부차가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소왕이 군사를 보내어 진나라를 구원하고 성보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해 10월 소왕이 군중에서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하늘에 붉은 구름이 나타나 해를 끼고 날아가는 새떼처럼 보였다. 소왕이 사람을 주나라에 보내 태사(太史)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태사가 듣고 말했다.

「이것은 초왕의 몸에 이롭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기도하여 재난을 초나라의 장군들이나 대신들에게 돌릴 수도 있습니다.」

초나라의 장군과 대신들이 이 말을 전해듣고 모두 청하여 자기들의 몸을 바쳐 신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하였다. 소왕이 말했다.

「여러 장군들과 대신들은 나의 고굉지신이라 내가 나의 몸에 난 병을 나의 팔다리에 옮긴다 한들 병이 낫겠소?」

소왕이 장군들과 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왕이 점을 치게 하였다. 점괘에 하수의 신에게 제사 지내면 된다고 하였다. 대부들이 소왕에게 하수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해 달라고 청했다. 소왕이 대답했다.

「옛날 선왕들께서 이곳에 피봉된 이래로 나의 대에 이르기까지 강수와 한수에 제사를 올리지 않은 적이 없는데 어찌 하수의 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이어서 대부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진(陳)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가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초소왕이 하늘의 큰 도리에 통했구나! 그가 초나라를 잃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왕의 병이 더욱 심해져 여러 공자들과 대부들을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내가 불초하여 오나라에 두 번이나 욕됨을 입었음에도 나라를 찾고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나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소왕은 초왕의 자리를 자기의 형인 자서 공자신(公子申)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공자신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동생인 공자결(公子結)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그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셋 째 동생인 공자려(公子閭)에게 물려준다고 했으나 그도 역시 받지 않았다. 공자려는 사양하기를 5번이나 하다가 결국은 초왕의 자리를 받아 들였다. 초나라가 오나라와 회전하려는 직전인 경인(庚寅) 날 저녁에 소왕이 군중에서 죽었다. 공자려가 말했다.

「왕께서 병이 들어 자기의 아들들을 제쳐놓고 대신들에게 물려주려고 한 초왕의 자리를 내가 받아들인 이유는 왕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제 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군왕이 되려는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주석

①직(稷) : 지금의 하남성 동백현(桐柏縣) 동남

②당계(堂谿) : 현 하남성 서평현(西平縣) 서남

③번(番) : 현 강서성 파양현(波陽縣)이라는 설과 안휘성(安徽城) 봉대현(鳳臺縣)이라는 설이 있다.

④약(鄀) : 지금의 호북성 의성현(宜城縣)남 약 20키로에 있던 고들로 언영(鄢郢)이라고도 한다.

⑤돈(頓) :현 하남성 항성현(項城縣)에 있었던 제후국. 하남성을 가로질러 흘렀던 영수(穎水) 강안에 있었음.

⑥호(胡) :현 안휘성 부양시(阜陽市)에 있었던 제후국. 하남성을 가로 질러 안휘성에서 회수(淮水)와 만나는 영수(穎水)의 하류 강안에 있었던 군소제후국

18. 혜왕부흥(惠王復興)

- 초혜왕이 여정도치(勵精圖治)로 초나라를 부흥시키다. -

자서와 자기 두 사람과 상의하여 아무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월녀(越女) 소생인 장(章)을 모셔와 초왕으로 세웠다. 이가 초혜왕(楚惠王)이다. 두 공자는 군사를 파하여 회군한 후에 소왕(昭王)의 장례를 치렀다.

혜왕 2년 기원전 487년 자서가 태자건의 아들 미승(羋勝)을 오나라로부터 불러 소(巢) 땅의 대부에 명하고 백공(白公)이라고 불렀다. 위인이 용병을 즐겨하고 선비들을 공경했던 백공은 정나라에서 죽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혜왕 6년 기원전 483년, 백공이 영윤 자서에게 군사를 청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옛날에 백공의 부친인 태자건이 정나라에 머물렀을 때 정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백공은 오나라로 도망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에 자서가 오나라에 살고 있던 백공을 불러 귀국시키자 백공은 그 때의 원한을 갚으려고 한 것이다. 자서가 백공의 청은 허락은 했으나 군사는 내주지 않았다.

혜왕 8년 기원전 481년, 당진이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초나라가 자서에게 군사를 주어 정나라를 구원하게 하자 당진의 군사가 물러갔다. 자서가 보답으로 정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 백공 미승이 노하여 자기가 몰래자객으로 기르고 있던 자객 석걸(石乞) 등을 시켜 조당에서 갑자기 영윤 자서와 자기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혜왕을 납치하여 고부(高府)에 감금했다가 후에 살해하려고 했다. 혜왕을 모시던 시종 굴고(屈固)가 고부에 감금된 혜왕을 등에 업고 탈출하여 소왕비(昭王妃)가 살던 궁궐로 도망쳐 숨었다. 백공이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 달이 조금 넘어 섭공(葉公)① 심제량(沈諸梁)이 군사들을 모아 혜왕을 구하러 영성으로 진격해 오자 혜왕의 신하들이 다시 모여 백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혜왕이 다시 초왕에 복위하였다. 이 해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하고 현으로 삼았다.

혜왕 13년 기원전 476년, 오왕 부차가 오나라의 세력을 강대하게 키워 제나라, 당진 및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혜왕 16년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를 죽였다.

혜왕 42년 기원전 447년,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했다.

혜왕 44년 기원전 445년 초나라가 기(杞)②나라를 멸했다. 초나라가 섬진과 수호하였다. 그때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지만 오나라의 영토였던 북쪽의 강수와 회수 사이의 땅을 통치할 수 없었다. 초나라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사수(泗水) 유역의 땅을 차지하여 그 영토를 넓혔다.

혜왕이 재위 57년 만인 기원전 43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중(中)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간왕(楚簡王)이다.

주석

①섭(葉) : 지금의 하남성 섭현(葉縣) 남

②기(杞) :진기(陳杞)세가 참조.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을 찾아내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인 옹구(雍丘)에 봉했다. 춘추 때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초세가1(춘추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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