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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0.유교(劉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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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20.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한고조(漢高祖)의 친동생으로 자는 유(游)이다. 한고조는 4형제였다. 맏형 유백(劉伯)은 요절했다. 한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항상 빈객들과 무리지어 다니면서 때때로 큰형수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형수는 그런 고조를 싫어했다. 고조가 손님들과 함께 오면 거짓으로 밥과 국을 다 먹은 체하고 주걱으로 솥을 긁었고, 그것 때문에 손님들은 돌아가곤 했다. 빈객들이 돌아간 후에, 솥에 아직 남아있는 국을 보게 된 고조는 그 일로 형수를 원망하게 되었다. 이윽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조는 그의 형제들을 모두 제후왕에 봉했으나 유백의 아들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태상황이 그 일을 말하자 고조가 대답했다.


「제가 형님의 아들을 제후로 봉하는 일을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모가 후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장조카 유신(劉信)을 후에 봉하고 국물의 일을 빗대어 갱힐후(羹頡侯)로 불렀다. 그리고 둘째형 유중(劉仲)은 대왕(代王)에 봉했다.


한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초왕(楚王) 한신韓信)을 진(陳) 땅으로 유인하여 사로잡은 고조는 그의 막내 동생 유교(劉交)를 대신 봉하고 팽성(彭城)에 도읍하게 했다. 초왕 유교는 재위 23년인 기원전 17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이왕(夷王) 유영(劉郢)이 뒤를 이었다. 유영은 재위 4년 만인 기원전 174년에 죽고 아들 유무(劉戊)가 왕위를 이었다.


초왕 유무 재위 20년 기원전 155년 겨울, 유무는 박태후(薄太后)의 복상(服喪) 기간에 사간(私奸)의 죄를 범하여 초나라 영지에서 동해군(東海郡)을 빼앗겼다. 그 일로 인해 원한을 품은 유무는 다음 해인 기원전 154년 오왕(吳王) 유비(劉鼻)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재상 장상(張尙)과 태부(太傅) 조이오(趙夷吾)가 간언했으나 유무는 듣지 않고 즉시 두 사람을 살해한 후에 오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양(梁)을 침공하여 극벽(棘壁)을 함락시켰다. 창읍(昌邑)의 남쪽에 이르러, 한나라 조정이 보낸 장수 주아부(周亞夫)가 이끄는 관군과 접전하였다. 한나라는 오초(吳楚)의 군량보급로를 차단했음으로 오초의 반군은 기아에 허덕였다. 마침내 오왕은 도망치고 초왕 유무는 자결하여 휘하의 반군들은 모두 한나라 조정에 투항했다.


오초의 란을 평정한 한경제는 덕후(德侯) 유광(劉廣)1)의 아들을 오왕에, 초원왕의 아들 유례(劉禮)를 초왕에 봉하여 그 후사를 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두태후(竇太后)가 반대하며 말했다.


「오왕 유비는 나이가 많은 종실의 원로로써 마땅히 종실이 화합하도록 이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칠국에 앞장서서 천하에 분란을 일으켰는데 어찌 나라를 그의 후손들에게 잇게 만들 수 있겠는가?」


두태후는 오왕을 세우는 일은 반대하고 초왕을 세우는 일은 허락했다. 그때 유례는 한나라 황실의 종정(宗正)의 자리에 있었다. 한나라 조정은 유례를 초왕에 봉하여 초원왕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초문왕(楚文王)이다.


 문왕은 재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기원전 150년에 죽어 아들 안왕(安王) 유도(劉道)가 뒤를 이었다. 안왕이 재위 22만인 기원전 129년에 죽고 아들 양왕 유주(劉注)가 뒤를 이었다. 양왕이 재위 14년만에 죽고 아들 유순(劉純)이 뒤를 이었다.


초왕의 자리에 오른 유순은 지절(地節) 2년 기원전 68년, 태감(太監)이 상서하여 초왕이 모반한다고 고변하자 자살했다. 초나라는 없어지고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어 팽성군(彭城郡)이 되었다.2)





조왕(趙王) 유수(劉遂)의 부친은 고조의 가운데 아들 유우(劉友)로 조유왕(趙幽王)이다. 유왕이 여후(呂后)의 핍박을 받아 울분에 차서 죽었음으로 시호를 유(幽)라 했다. 여록(呂祿)을 조왕에 봉한 여후는 1년 만에 죽었다. 기원전 180년 대신들이 여록을 포함한 여씨 일족들을 주살하고 조왕의 자리에 유왕의 아들 유수를 세웠다.


효문제 재위 2년 기원전 178년, 유수의 동생 유벽강(劉辟彊)을 조나라의 하간군(河間郡)을 떼어내어 하간왕(河間王)에 봉했다. 유벽강의 시호는 하간문왕(河間文王)이다. 하간문왕이 재위 13년만인 기원전 166년에 죽고 아들 하간애왕(河間哀王) 유복(劉福)이 뒤를 이었다. 하간애왕이 1년 만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후사가 끊어졌음으로 나라는 없어져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었다.


유수가 조왕의 자리에 오른 지 26년 되는 해인 기원전 154년은 효경제 전3년이다. 어사대부 조조(晁錯)가 조나라에서 상산군(常山郡)을 떼어 한나라 조정으로 편입시키자 조나라의 영지가 줄어들게 되었다. 이윽고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왕 유수가 군사를 일으켜 그들의 반란에 가담하려고 했다. 그의 상국 건덕(建德)과 내사(內史) 왕한(王悍)이 간했으나 듣지 않고 두 사람을 불에 태워 살해하고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의 서쪽 경계에 주둔시키고 후에 오나라의 군사들과 합류하여 함께 서쪽으로 진공하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쪽의 흉노에게 사자를 보내 그들과 연계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한나라 조정이 곡주후(曲周侯) 역기(酈寄)을 대장으로 삼아 조왕을 토벌하도록 했다. 조왕이 회군하여 한단성으로 들어가 성에 의지해서 7개 월 동안 항거했다. 이윽고 오초의 반군이 양(梁)나라에서의 싸움에서 패하여 물러갔음으로 유수는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흉노 역시 그 소식을 듣고 한나라 경계로 진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제(齊)나라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돌아오던 난포가 역기의 군사와 연합하여 물을 끌어다 한단성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한단성은 무너지고, 조왕 유수는 자결하였으며,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한나라에 투항했다. 이로써 조유왕의 후대는 끊어지고 나라는 없어졌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라가 장차 흥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타고 군자는 등용되고 소인배는 배척당한다. 그리고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현인들은 숨고 란신들은 귀하게 된다. 초왕 유무(劉戊)가 신배공(申培公)3)을 형도로 만들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고, 조왕이 방여(防與)4) 선생의 충언을 들었더라면 어찌 반역의 음모를 저질러 천하의 죄인이 되었겠는가? 『현인이여, 현인이여! 왕후(王侯)의 내면에 아름다운 소질이 없었다면 어찌 능히 그대 현인들을 임용할 수 있었겠는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국가의 안위는 정령에 있고 국가의 존망은 임용하는 대신들에게 달려있다고 한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주석

1) 유광(劉廣)/ 유비의 동생으로 고후 2년 기원전 186년에 죽었다.

2) 우선 이 구절은 저소손이 보찬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사망연도는 한무제 재위 51년인 정화(征和) 3년인 기원전 90년 혹은 한무제 재위 53년인 기원전 88년에 사이가 정설이고 지절은 한선제의 연호다. 또한 한서 초원왕전에 의하면 유순은 원정(元鼎) 원년 기원전 116년에 유주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라 16년 동안 재위에 있다가 한무제 태초(太初) 4년인 기원전 101년에 죽었고, 유순의 뒤를 이은 유연수(劉延壽)가 모반을 획책하자 한선제(漢宣帝) 지절(地節) 2년 기원전 68년 그의 후모의 부친 조장년(趙長年)에 의해 고변당해 유연수는 자살하고 초나라는 없어져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어 팽성군이 되었다고 했다. 보찬한 저소손의 착오다.

3) 신배공(申培公)/노나라 사람이다. 고조가 몸을 일으켜 노나라를 지나갈 때 신공은 스승 부구백(浮丘伯)을 따라 제자의 신분으로 고조를 노나라의 남궁(南宮)에서 알현했다. 여태후가 집정시 신공은 장안으로 유학와서 유영(劉郢)과 함께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다. 이윽고 유영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신공은 초왕의 태자 유무(劉戊)의 사부가 되었다. 유무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공을 매우 싫어했다. 이윽고 유영이 죽고 초왕의 자리에 오른 유무는 신공을 서미(胥靡)로 만들었다. 서미는 노예에 대한 호칭으로 밧줄로 몸을 묶어 강제노역을 시키는 한 대의 일종의 형벌이었다. 신공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노나라에 돌아와서는 집에 은퇴하여 머무르며 제자들을 가르치며 평생토록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손님들도 일체 사절하며 만나주지 않았으나 오로지 제후의 명이 있을 때만 초청에 응했다.(유림열전 참조)

4) 방여(防與)/ 어떤 인물인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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