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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세가10-2(전국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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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초세가(楚世家)10-2

- 전국편(戰國篇) -




1. 위왕파제(威王破齊) 위진제후(威震諸侯)

- 서주에서 제군을 대파한 초위왕이 제후들을 떨게하다. -


간왕(簡王) 원년 기원전 431년 북쪽으로 군사를 보내어 거(莒)나라를 멸했다.

간왕 8년 기원전 424년 위문후(魏文侯) 사(斯), 한무자(韩武子) 계장(啓章), 조환자(趙桓子) 가(嘉) 등 당진의 삼가(三家)가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의 책봉을 받아 제후의 대열에 섰다.

간왕이 재위 24년 만인 기원전 408년에 죽고 그의 아들 당(當)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성왕(楚聲王)이다.

성왕 6년 기원전 402년, 강도들이 성왕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그의 아들 의(疑)가 즉위하였다. 이가 초도왕(楚悼王)이다.

도왕 2년 기원전 400년, 삼진(三晋)이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고 승구(乘丘)①에서 돌아갔다.

도왕 4년 기원전 398년, 초나라가 주나라를 정벌하였다②. 정나라가 그들의 재상(宰相) 자양(子陽)을 죽였다.

도왕 9년 기원전 393년, 한나라를 정벌하여 부서(負黍)③의 땅을 취하였다.

도왕 11년 기원전 391년, 삼진(三晋)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량(大梁)의 유관(楡關)④에서 대파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많은 뇌물을 섬진에게 바쳐 강화조약을 맺었다.

도왕 21년 기원전 381년, 도왕이 죽고 그의 아들 장(藏)이 뒤를 이었다. 이가 숙왕(肅王)이다.

숙왕 4년 기원전 377년, 촉(蜀)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와 자방(玆方)⑤을 빼앗아 갔다. 초나라가 그곳에 관새를 수축하여 촉나라의 진격을 막았다.

숙왕 10년 기원전 371년, 위(魏)나라가 쳐들어와 노양(魯陽)⑥의 땅을 빼앗아 갔다.

숙왕이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370년에 죽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 웅량부(熊良夫)가 뒤를 이었다. 이가 초선왕(楚宣王)이다.

선왕 6년 기원전 364년, 주천자가 당시 국력이 크게 신장되기 시작한 섬진의 헌공(獻公)에게 사자를 보내 축하의 말을 전하게 했다. 삼진(三晋)의 세력도 더욱 강성해지고 그 중에 위혜왕(魏惠王)과 제위왕(齊威王)의 세력이 더욱 컸다.

선왕 30년 기원전 340년, 섬진의 효공(孝公)이 위앙(衛鞅)을 상(商)⑦에 봉하고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초나라를 침범하였다. 그 해에 선왕이 죽고 아들 웅상(熊商)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위왕(楚威王)이다.

위왕 3년 기원전 337년, 주현왕(周顯王)이 주나라의 개국조인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진혜왕(秦惠王)에게 보냈다.

위왕 7년 기원전 333년 제나라의 재상은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었다. 전영이 초나라를 속이자⑧ 위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군을 서주(徐州)에서 격파하고 전영을 제나라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내도록 위협하였다. 전영이 두려워하여 장축(張丑)을 시켜 거짓으로 초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

「대왕께서 서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원인은 제나라가 전반자(田盼子)⑨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반자라는 사람은 제나라에 공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위해 힘을 다하려고 합니다. 정곽군이 전반자를 싫어하여 초나라의 싸움에서 신기(申紀)를 대장으로 등용했습니다. 신기라는 위인은 제나라의 대신들과 사이가 나쁘고 백성들도 또한 그를 위해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께서는 서주에서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왕께서 정곽군을 쫓겨나게 하면 전반이 제나라 재상에 임용되어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왕과 교전하게 된다면 왕께는 이로운 점이 없을 것입니다.」

초왕이 이후로는 전영(田嬰)을 쫓아내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주석

①승구(乘丘) : 현 산동성 연주현(兗州縣) 서

②원전(元典)은 도왕(悼王) 2년 楚伐周로 되어있으나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에 주(周)는 정(鄭)의 오기(誤記)라고 하였다. 《사기연표(史記年表)》 주안왕(周安王) 4년 기원전 398년, 초나라 항목에도 ‘敗鄭師,圍鄭.鄭人殺子陽’라고 되어있다.

③부서(負黍) : 전국 때 한나라 성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경내다.

④대량(大梁)은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로 전국 때 위나라의 도성이었고 유관(楡關) 대량성(大梁城) 서쪽의 관문이다.

⑤자방(玆方) : 지금의 호북성 송자현(松滋縣) 서쪽의 고을로써 양자강 남안에 있었다.

⑥노양(魯陽)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경내의 노산현(魯山縣)을 말함.

⑦상(商) : 지금의 섬서성 상주시(商州市) 단봉현(丹鳳縣)을 말하며 하남성과의 접경지역에 있음.

⑧전영(田嬰)은 맹상군(孟嘗君)의 부친으로써 제위왕(齊威王)의 막내 서자(庶子)이며 제선왕(齊宣王)의 서제(庶弟)이다. 전영이 거짓으로 초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것처럼 꾸민 다음 몰래 월나라 왕을 부추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 일을 말한다..

⑨전반자(田盼子) : 전국 때 위혜왕을 만난 제위왕이 제나라의 국보를 논했을 때 언급된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신하 중에는 반자(盼子)라고 있는데 고당(高唐)을 지키게 하자 조나라 사람들은 감히 하수 동쪽 지역에서는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기원전 333년 제위(齊魏)간의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대장 전기(田忌) 휘하에서 전영(田嬰)과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정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숙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마릉의 싸움 이후 손빈은 은퇴하고 전기는 추기와의 정쟁으로 타국으로 도망치자 전분은 제나라의 군정을 혼자 담당했다.



2. 화사첨족(畵蛇添足)

- 다리가 있는 뱀은 뱀이 아니다. -


위왕이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32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괴(熊槐)가 뒤를 이었다. 이가 회왕(懷王)이다. 위나라가 초나라에 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쳐들어와서 초나라의 군사들을 형산(陘山)에서 파하였다.

회왕 원년 기원전 328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으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혜문군(惠文君)을 모셨다.

회왕 4년 기원전 325년, 섬진의 혜문군이 왕호를 칭했다.

회왕 6년 기원전 323년, 초나라가 주국(柱國)① 소양(昭陽)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소양이 위나라 군사들을 양릉(襄陵)②에서 격파하고 8개의 성읍을 빼앗았다. 다시 군사들을 동쪽으로 이동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두려워했다. 그 때 마침 진진(陳軫)이라는 사람이 진나라의 사절로 제나라에 와 있었다. 한 해 전에 왕위에 오른 제민왕(齊湣王)이 진진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칠 좋은 방법이 있는가?」

진진이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왕의 명을 전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진진이 말을 마치고 즉시 초나라의 군중으로 들어가 소양을 접견하고 말했다.

「원컨대 초나라는 싸움에서 이기고 적장을 죽인 사람에게 얼마나 높은 관직을 주는지 알고 싶습니다.」

소양이 대답했다.

「그 관직은 상주국에 이를 것이고 높은 작위에 봉해져 규(珪)③를 들고 다닐 수 있소.」

「그 위에 더 귀한 관직은 무엇입니까?」

「영윤이오.」

「그렇다면 장군께서는 이미 이룩한 공적만으로도 영윤의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 말씀하셨듯이 영윤의 자리는 초나라의 가장 높은 관직입니다. 제가 옛날 일로 이 일을 비유하여 말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문객들에게 술 한 잔을 보내주자 그 문객들이 모여 상의하며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두 이 한 잔의 술을 두루 마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땅에 뱀 그림을 그려 먼저 완성한 사람이 전부 마시기로 합시다.’ 그래서 문객들이 땅에다 뱀을 그리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며 외쳤습니다. ‘뱀의 그림이 이미 완성되었다.’ 말하고는 술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나는 능히 뱀의 발까지도 그릴 수 있다.’ 하면서 자기가 그린 뱀에다 다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 다음으로 뱀의 그림을 완성한 사람이 먼저 사람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습니다. ‘뱀에 다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당신은 다리 달린 뱀을 그렸으니 이것은 뱀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술을 들이켰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들의 장수를 베었으니 그 공적 또한 막대하려 초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인 영윤에 이미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작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비록 제나라를 파하여 공을 세우신다 해도 더 이상 오를 관작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가신다면 몸은 죽고 관작은 빼앗기게 되어 초나라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뱀의 그림에 다리를 그려 넣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군사를 물리쳐 돌아가신다면 제나라에는 은혜를 베풀게 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이미 도달한 최고의 지위를 보전하는 일입니다.」

「깨우침에 따르겠습니다.」

소양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주석

① 주국(柱國) : 초나라 무관(武官)의 최고 관직으로써 상주국(上柱國)이라고도 하며 직위는 영윤(令尹) 다음이다.

② 양릉(襄陵) :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이다.

③ 규(珪) : 초나라가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릴 때 주는 신표. 일설에는 전국 때 신설된 최고의 관직명이라고도 한다.




3. 장의기초(張儀欺楚)

- 장의가 거짓 땅으로 초나라를 속이다. -

연(燕)과 한(韓)의 두 나라 군주들이 왕호를 칭했다.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초(楚), 제(齊), 위(魏)의 군주들을 교상(嚙桑)①에서 만나 회맹하기를 청했다.

회왕 11년 318년, 소진(蘇秦)이 산동 여섯 나라를 연합하게 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② 초회왕이 맹주가 되어 6국의 군사들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군사들이 함곡관의 관문을 열고 나와 육국의 연합군을 요격하였다. 6국의 병사들은 싸움에서 패하여 군사를 물리쳐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 군사들만이 그 후로 오랫동안 대치하다가 물러갔다.

회왕 12년 기원전 317년, 제민왕(齊湣王)이 조·위 두 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자 진나라도 역시 한나라를 공격하여 이겨 진·제가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다.

회왕 16년 기원전 313년, 초와 제 두 나라가 수호하였다. 진나라가 걱정하여 즉시 장의를 재상의 자리에서 면직시켰다고 공표한 후에 장의를 남쪽의 초나라로 보내 초왕을 알현하게 하였다. 장의가 초왕을 보고 말했다.

「저희 나라 군왕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분은 대왕이시며 또한 소신 장의도 문지기가 되어 주인으로 모셔 지켜드리고 싶은 분도 또한 대왕이십니다. 그리고 저희 군왕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제왕이며 이 장의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제왕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제나라와 강화를 맺으셨으니 이것은 저희 군왕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대왕을 받들 수 없게 만들었으며 이 장의도 또한 역시 대왕을 주인으로 모시는 문지기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이 장의를 위해 관문을 닫아걸고 제나라와 단교를 하신다면 저는 대왕의 사자와 함께 즉시 귀국하여 진나라 서쪽의 상(商) 땅 600리를 떼어 초나라에 주도록 저희 군왕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제나라를 약화시키는 방법이며 동쪽의 제나라가 약화되면 우리 진나라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또한 초나라는 상 땅을 얻게 되어 나라의 재정이 풍부해지니 제가 드린 말씀대로 한다면 세 가지의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있는 길입니다.」

회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초나라 재상의 인끈을 장의에게 맡기고 술을 내와 잔치를 벌려 장의를 접대하면서 여러 군신들 앞에서 장의가 한 말을 공포하였다.

「옛날 우리의 땅이었던 상 땅을 되찾게 되었다. 」

여러 신하들이 듣고 회왕에게 경하의 말을 올렸으나 진나라에서 돌아온 진진(陳軫)만은 조의를 표하였다. 회왕이 그 연고를 묻자 진진이 대답했다.

「진나라가 우리를 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에게 제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 땅은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제나라와 강화조약을 파기시키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우리 초나라만 고립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고립된 우리 초나라를 틀림없이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진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으신 후에 제나라와 단교를 하겠다고 통고하면 진나라의 계책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나라와 먼저 단교를 하시고 진나라에 상 땅의 할양을 요구하면 장의는 결코 그 땅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장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왕께서는 필시 장의를 원망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일을 걱정하는 진나라는 초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서쪽의 진나라로부터 화근을 불러일으키고 북쪽의 제나라로부터는 절교를 당하게 되니 이것은 양쪽 나라의 군사들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신은 조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회왕이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장수 한 사람을 장의에게 딸려 보내 상 땅을 받아오도록 했다.

장의가 진나라로 귀국해서 거짓으로 술에 취한 척하면서 수레에 굴러 떨어져 몸을 다쳤다고 핑계를 대고 석 달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의를 따라간 초나라의 장수는 결국은 땅을 받지 못하고 초나라에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초왕이 보고를 받고 말했다.

「장의는 제나라와 단교한 우리의 태도가 단호하지 않아 이를 미심쩍게 생각해서 우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사 송유(宋遺)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로 쳐들어가게 한 후에 제왕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며 모욕을 주었다. 제왕이 듣고 분노하여 초나라의 수호조약의 징표인 부절을 꺾어 버리고 진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진·제(秦齊) 두 나라가 연합을 하게 되자 장의가 비로소 조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초나라 장수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땅을 받아가지 않았오! 상 땅의 어디에 해당하던 상관없이 사방 6리의 땅 말이요!」

초나라 장수가 말했다.

「저는 사방 600리의 땅을 받아오라는 명을 받았지 6리의 땅을 받아 오라는 명은 받지 못했소.」

초나라 장수가 돌아와 장의의 말을 전했다. 회왕이 대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진진이 나와 말했다.

「진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무모한 짓입니다. 차라리 진나라가 탐내는 대성(大城)을 뇌물로 바쳐 그들과 힘을 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면 우리는 비록 진나라에 땅을 잃을지라도 제나라로부터 보상받으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토는 손상하지 않고 보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제나라와 단교를 하시면서 제왕의 분노를 일으켰고 다시 진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추궁하려 하시니 이것은 진·제(秦齊)가 서로 수교를 맺고 연합하게 만들어 천하의 두 강대국의 군대로 하여금 쳐들어오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초나라는 조만간 큰 전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회왕이 다시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와 다시 단교하고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의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도 역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의 군사들을 요격하였다.

회왕 17년 기원전 312년,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 군사들과 단양(丹陽)에서 회전하여 크게 패했다. 진나라 군사들에게 참수된 갑사들만 8만 명에 달했으며 대장군 굴개(屈匃)와 비장군(裨將軍) 봉후축(逢侯丑) 등 70여 명의 장수들이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한중(漢中) 땅의 여러 군들을 빼앗아 갔다. 회왕이 대노하여 나라 안의 모든 병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다시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여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회전하였으나 역시 크게 패했다. 한(韓)과 위(魏) 두 나라가 초나라가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남진시켜 등(鄧) 땅에 이르렀다. 회왕이 듣고 진나라에 원정 중인 군사들을 철수시켜 한위 두 나라의 군사들을 막게 했다.



주석

①교상(嚙桑)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경내에 있음. 패현은 산동성과의 접경지역인 미산호(微山湖) 좌안(左岸)의 성시(城市)임.

②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에 이때는 소진(蘇秦)이 제나라에서 죽은 지 4년 후이기 때문에 육국을 연합하게 만들어 진나라를 공격하게 한 것은 사마천의 착오다.





4 . 장의피수(張儀被囚)

- 초나라를 속인 장의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다시 석방하는 초회왕 -

회왕 18년 기원전 311년, 진나라가 사자를 보내 초나라에 수호를 청해오면서 예전에 빼앗아 간 한중 땅의 절반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초왕이 듣고 진나라의 사자에게 말했다.

「장의란 놈만 보내주면 땅은 주지 않아도 좋다.」

장의는 사자가 돌아와 초왕이 자기를 땅 대신 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진혜왕이 장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초왕이 그대를 불러 지난날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어찌해야 되겠소?

장의가 대답했다.

「신은 초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근상(靳尙)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으며 근상은 또한 초왕이 총애하는 정수(鄭袖)라는 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초왕은 정수가 하는 말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예전에 상 땅을 준다는 약속을 어기게 되어 진과 초 두 나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싸움에서 패한 초나라는 저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신이 직접 가서 대면하여 옛날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의 수호는 이루어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왕께서 신의 뒤에 계시니 초나라가 감히 저를 어쩌겠습니까? 설사 제 몸에 이상이 있다한들 나라를 위해 죽는 일이니 이는 바로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였으나 회왕이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잡아서 감옥에 가둔 후에 죽이려고 하였다. 장의가 아무도 몰래 근상을 찾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장의의 청을 받은 근상이 회왕에게 말했다.

「장의룰 잡아 가두면 진왕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지금 여러 나라의 왕들이 만약 우리가 진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왕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다시 근상이 정수를 찾아가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는 진왕이 매우 사랑하는 장의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오히려 우리 초나라에 상용(上庸)의 6개 현을 할양하고 진나라의 미인을 우리 초왕에게 시집보내면서 진나라의 궁중의 노래에 능한 미녀들을 딸려 보낸다고 합니다. 장의를 죽이고 진나라와 수호조약이 이루어져 진나라에서 바친 여인을 초나라에 들어와 대왕의 사랑을 얻게 된다면 부인께서는 아마도 쫓겨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인께서는 마땅히 장의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진나라와의 화친을 막고 진나라의 미인이 초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결국은 회왕은 정수의 말을 듣고 장의를 석방하였다. 회왕이 좋은 마음이 되어 접견을 허락하자 장의는 초왕에게 열국 간에 맺어진 합종의 맹약을 파기하고 진나라와 연합하여 친선관계를 수립한 후에 혼인을 맺어 두 나라 사이를 공고히 하자고 약속하였다. 장의가 말을 마치고 물러나 진나라로 돌아가자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굴원(屈原)이 들어와 초왕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굴원의 말을 듣고 장의를 석방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한 회왕이 사람을 시켜 장의의 뒤를 추격하라고 하였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 그해에 진혜왕이 죽었다.

회왕 20년 기원전 309년, 합종의 맹주에 야심이 있는 제민왕이 초나라와 진나라가 수호관계를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것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사자에게 편지를 써서 초왕에게 전하게 했다.

「과인은 자신의 존귀한 칭호를 돌보지 않고 있는 귀국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걱정이 앞섭니다. 작금에 있어서 진나라에서는 혜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새로 서자 장의는 위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장의가 맡고 있었던 진나라의 재상 자리는 저리질(樗里疾)과 공손연(公孫衍)에게 맡겼음에도 초나라는 변함없이 진나라를 받들고 있습니다. 저리질은 한나라와 사이가 좋고 공손연은 위나라와 사이가 좋습니다. 초나라가 변치 않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한과 위 두 나라는 두려워하여 필시 진나라와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연과 조 두 나라도 어쩔 수 없이 진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네 나라가 서로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려고 한다면 초나라는 결국 진나라의 군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대왕은 어찌하여 과인과 같이 힘을 합하여 한(韓), 위(魏), 연(燕), 조(趙) 네 나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합종을 완성하고 주나라를 받들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서 천하를 향하여 호령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누가 감히 대왕의 명을 즐겨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대왕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퍼질 것입니다. 이어서 대왕께서는 무관(武關)과 촉과 한중의 땅을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오와 월 땅을 소유하시어 두 나라의 풍부한 자원을 독차지하고 강수와 동해에서 나오는 이득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韓)과 위(魏) 두 나라는 상당(上党)의 땅들을 공격하여 나누어 갖고 초나라는 서쪽으로 나아가 함곡관에서 진나라를 압박한다면 초나라의 강대함은 지금보다 백 배나 더 커지게 됩니다. 옛날 대왕께서는 장의에게 속으시고 한중의 땅을 빼앗겼으며 계속해서 남전(藍田)에서 초나라의 군사들은 크게 꺾여 대왕의 가슴속에 품고 계시는 분노를 대신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이 세상 천하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왕은 아직도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디 누구의 계책을 따라야 하는지 한 번 더 숙고하십시오.」

초왕은 이미 진나라와 수호를 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다시 제왕의 편지를 받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미처 결정하지 못하고 군신들을 불러 의론토록 했다. 군신들 중 어떤 자는 진나라와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자들은 제나라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소저(昭睢)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대왕께서 비록 동쪽으로 나아가 월나라를 점령했다고는 하나 우리가 진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아와야만 우리 초나라는 옛날의 치욕을 갚고 제후들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차라리 한과 제 두 나라와 수호하시어 진나라의 승상 저리질(樗里疾)의 권위를 높여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비로소 한·제(韓齊) 두 나라의 지지를 얻어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얼마 전에 한나라의 의양(宜陽)①을 함락시켰지만 한나라는 여전히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나라 국경도시인 무수(武遂)②와는 불과 70여 리 떨어져 있는 평양(平陽)③에 한나라의 선조들의 무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한나라가 진나라를 받들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한나라의 삼천(三川) 지역을, 조나라는 상당(上黨)을, 초나라는 하외(河外) 지역을 공격하여 한나라는 일거에 망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초나라가 한나라를 지원한다면 한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보장은 할 수 없겠지만 비록 명목상이지만 한나라의 명맥을 확실하게 잇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반격을 가하여 이미 무수(武遂)를 탈환하고 하수와 효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음은 모두 우리 초나라의 후원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는 초나라부터 가장 큰 은혜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시 빠른 시간 안에 한나라는 우리 초나라를 섬기게 되리라고 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나라도 역시 한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의 공자 매(昧)를 초빙하여 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나라가 지금 진나라로부터 무수를 탈환한 것은 대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로써 제나라와 한나라가 저리질의 권위를 높여줌으로로써 진나라는 저리질을 더욱 중용하고 결코 그를 내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다시 초나라가 가세하여 제와 한 두 나라의 입장을 강화시킨다면 저리질은 틀림없이 진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땅들을 돌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회왕은 소저의 말을 따라 진나라와 수호를 맺으려는 생각을 바꾸고 결국은 제나라와 합종하고 한나라와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주석

①의양(宜陽) :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宜陽縣) 경내다. 중원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진무왕이 좌승상 감무(甘茂)에게 명해 기원전 308년 한나라의 의양성을 공격하여 삼천으로 가는 길을 뚫으라고 했다. 한나라의 완강한 저항과 진나라 내부의 반대를 극복하고 감무는 의양성을 공격한지 1년여 만에 함락시키고 진무왕을 주나라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감무는 이 전투에서 한나라의 군사 6만의 목을 베고 황하를 건너 무수(武遂)까지 점령했으나 주나라에 들어간 진무왕이 구정을 보고 힘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진나라에서 추방되었다.

②무수(武遂) : 전국때 한나라 영토였다가 섬진에게 빼앗긴 고을로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남

③평양(平陽) : 전국 때 한나라 영토였으며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경내




5. 부회함진(赴會陷秦)

- 무모하게 회맹에 참석하여 진나라의 함정에 빠진 초회왕 -


회왕 24년 기원전 305년 초나라가 제나라 등의 여러 나라와 맺은 합종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진소왕(秦昭王)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많은 재물을 초나라에 바쳤다. 또한 초나라 사신이 진나라에 가서 진녀를 초왕의 부인으로 맞이해 왔다.

회왕 25년 기원전 304년, 회왕이 진나라 땅에 들어가 진소왕과 회견하고 다시 황극(黃棘)①으로 나와서 회맹을 하였다. 진나라가 초나라로부터 빼앗아간 상용(上庸)의 땅을 다시 돌려주었다.

회왕 26년 기원전 303년, 제(齊), 한(韓), 위(魏) 세 나라는 초나라가 그들과의 합종의 맹약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수호를 맺은 행위에 분노하여 세 나라가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진나라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진나라는 즉시 객경 통(通)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삼국의 병사들이 물러갔다.

회왕 27년 기원전 302년, 진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태자가 진나라의 대부 한 사람과 사사로운 싸움을 했다가 결국은 그 대부를 죽이고 도망쳐 초나라로 귀국하였다.

회왕 28년 기원전 301년, 진나라가 제(齊), 한(韓), 위(魏) 세 나라와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와 초나라 장수 당매(唐昧)를 죽이고 중구(重丘)②의 땅을 빼앗아 갔다.

회왕 29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진나라는 이 싸움에서 2만의 전사자를 내고 초나라 장수인 경결(景缺)을 죽였다. 회왕이 두려워하여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잡히고 구원병을 청했다.

회왕 30년 기원전 299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범하여 초나라의 8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진소왕이 초회왕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의 뜻을 전했다.

「옛날 과인과 왕이 만나 형제의 의를 맺고 황극에서 맹약을 하였습니다. 후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양국 간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태자가 과인의 중신을 살해하고 한마디 사과의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쳐 과인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나머지 군사를 시켜 귀국의 변경을 공격했습니다. 오늘 내가 들으니 왕께서 태자를 인질로 하여 제나라에 수호를 구한다고 하는데, 우리 진나라와 초나라는 땅으로 인접한 이웃나라라 혼인관계를 맺고 서로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게 된 것은 바로 제후들에게 우리들의 영이 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인은 원컨대 군왕 전하와 무관(武關)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회맹을 하고 싶습니다. 원컨대 회맹을 맺은 후에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감히 저의 아둔한 생각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초회왕이 진왕의 편지를 보고 나서 마음속으로 근심하였다. 참석하자니 진나라에 속을 것 같고 안 가자니 진나라의 분노를 살 것 같아 주저하였다. 소저가 간했다.

「왕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진왕이 오지 않은 죄를 물어 쳐들어온다면 군사를 내어 막으면 그뿐입니다.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나라라 결코 믿으시면 안 됩니다. 진왕은 제후들을 병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왕의 아들 자란(子蘭)이 회맹의 자리에 참석을 권했다.

「어찌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끊으시려고 하십니까?」

회왕이 할 수 없이 진소왕과 회견을 위해 무관으로 출발했다. 소왕이 초회왕을 속여 장군 한 사람을 무관 주위에 매복시키고 자기의 신호를 기다리라고 했다. 초왕이 회견장에 당도하자 진왕이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신호를 하여 무관의 관문을 닫으라고 명하고 회왕을 함양으로 끌고가 장대(章臺)③에서 회견하였다. 진왕은 회왕을 마치 변방을 지키는 신하 대하듯이 하고 전혀 군왕으로써의 예의를 갖추지 않고 대했다. 초회왕이 대노하며 소저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진나라가 회왕을 함양에 억류시키고 무읍(巫邑)④과 검중(黔中)⑤의 땅을 진나라에 할양하면 귀국시켜 주겠다고 위협했다. 회왕은 먼저 회맹을 하고 자기를 귀국시켜 주면 땅을 할양하겠다고 했으나 진왕은 땅을 먼저 떼어주면 회맹을 하고 초왕을 귀국시켜 주겠다고 했다. 초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진나라가 나를 속이더니 다시 나로 하여금 땅을 바치도록 위협하는구나!」

회왕은 결코 진나라에 땅을 떼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진나라가 회왕을 억류하고 보내주지 않았다.

초나라 대신들이 걱정하여 조당에 모여 의론하였다.

「우리나라의 왕이 진나라에 갔으나 그 곳에 억류되어 보내주지 않고 다시 땅을 할양하라고 하나 지금 우리의 태자는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데 만일 진과 제나라가 서로 힘을 합하여 우리를 공격해 온다면 우리 초나라는 이제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왕의 아들들 중에서 나라 안에 있는 왕자를 택하여 초왕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저가 반대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의 왕과 태자가 모두 제후들에게 붙잡혀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오늘 우리가 왕명에 반하여 서자를 세우려고 하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나라 대신들이 사자를 제나라로 보내어 거짓으로 회왕이 세상을 떴다고 통고하고 태자를 귀국시켜 달라고 청했다. 제민왕이 그의 상국을 불러 의론하였다.

「우리가 태자를 보내지 않고 억류시키면서 초나라가 소유한 회수 이북의 땅을 우리에게 할양하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나라의 상국이 말했다.

「불가합니다. 초나라가 자국 내에 있는 왕자를 추대하여 초왕으로 세운다면 우리가 데리고 있는 인질은 허사가 되고 또한 우리는 불의를 행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초나라가 자국 내에 있는 왕자를 추대하여 초왕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초나라의 새로운 왕에게 하동국(下東國)⑥을 할양해 준다면 우리는 초나라의 새로운 왕을 위해 인질로 잡혀와 있는 태자를 죽여주겠다고 하십시오. 만약 초나라가 우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와 진(秦), 위(魏) 3국이 연합하여 태자를 초나라에 입국시켜 초나라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전하십시오. 아마도 초나라의 하동국 땅을 틀림없이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제왕은 상국의 계책을 택하여 초나라 태자를 귀국시켰다. 태자 횡(橫)이 제나라에서 귀국하여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경양왕(頃襄王)이다. 초나라가 국서를 진나라에 보내어 다음과 같이 고했다.

「사직의 신령에 힘입어 우리가 새로운 왕을 세웠습니다.」

경양왕 횡(橫) 원년 기원전 298년, 진나라가 회왕을 붙잡아 두고 땅을 할양하라고 강요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초나라에서 태자를 초왕으로 옹립하여 진나라에 대응하자 진소왕은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무관으로 나아가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대를 크게 무찔러 5만 명의 군사들의 목을 베고 석(析) 땅의 15개 성을 빼앗은 후에 물러갔다.


주석

①황극(黃棘)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신야현(新野縣) 부근

②중구(重丘)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하남성 필양현(泌陽縣) 동북

③장대(章臺) : 진(秦)나라 왕의 이궁(離宮)의 별칭이며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경내의 장안현(長安縣)에 있었음.

④무읍(巫邑)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사천성 무산현(巫山縣) 일대

⑤검중(黔中) : 전국 때 초나라의 땅으로 지금의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귀주성과의 경계지역 일대를 말함. 삼국시대 때 촉나라 가 검중군(黔中郡)을 두었음.

⑥하동국(下東國) : 장강의 하류 유역인 초나라의 동쪽 땅과 회수(淮水)의 북쪽지방 즉 앞서의 회북(淮北)을 말한다.



6. 회왕분사(懷王憤死)

- 진나라에 억류된 초회왕이 분사하다. -


경양왕 2년 기원전 297년, 초회왕이 진나라 도성에서 몰래 도망쳐 초나라에 귀국하려고 했으나 진왕이 알고 초나라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진나라 군사들에게 다시 사로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한 회왕은 산길을 이용하여 조나라로 가서 자기의 귀국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당시 조나라의 조주보(趙主父)는 대(代) 땅에 있었고 조왕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아들 혜왕(惠王)은 회왕의 일에 말려들어 진나라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꺼려했기 때문에 감히 초왕을 초나라에 들여보내지 못했다. 초왕은 다시 위나라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이 뒤를 추격하여 붙잡은 초왕을 진나라에 다시 끌고 갔다. 회왕이 진나라에 끌려온 지 얼마 있지 않아 병이 들어 자리에 눕더니 마침내 초회왕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죽었다. 초경양왕 3년인 기원전 296년의 일이었다. 진나라가 그의 시신을 초나라에 보내 주어 상을 치르게 해주었다. 초나라 백성들이 모두 회왕을 동정하여 마치 자기의 혈육이 죽은 듯이 슬퍼했다. 여러 제후국들이 이 일로 인하여 진나라를 정직하지 못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이후로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경양왕 6년 기원전 293년, 진나라의 백기(白起)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이궐(伊闕)에서 한군과 회전에 들어가 크게 승리를 취하고 24만에 달하는 한군의 목을 베었다. 이어서 진왕이 초왕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의 뜻을 전했다.

「초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배반하고 진나라는 또한 제후들을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여 서로 간에 자웅을 겨루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 남은 군사들을 정돈하여 한번 통쾌하게 싸워봄이 어떻겠습니까?」

편지를 읽고 근심에 쌓인 경양왕은 진나라에 다시 화평을 청하려고 했다.

경양왕 7년 기원전 292년, 초나라가 진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하고 진나라와 수교하였다.

경양왕 11년 기원전 288년, 제(齊)와 진(秦)나라가 각기 제(帝)를 칭했다. 제후들이 수긍하지 않자 한 달만에 제호(帝號)를 버리고 왕호(王號)로 복귀했다.

경양왕 14년 기원전 285년, 초나라의 경양왕과 진나라의 소양왕이 완(宛)② 땅에서 회견하고 우호조약을 맺었다.

경양왕 15년 기원전 284년, 초(楚)가 진(秦), 삼진(三晋), 연(燕)과 공동으로 제나라를 정벌하여 회북(淮北)의 땅을 빼앗았다.

경양왕 16년 기원전 283년, 초왕이 진소왕과 같이 언(鄢)에서 회견하고 그 해 가을에는 다시 진왕과 양(穰)③땅에서 만났다.


주석

①조주보(趙主父) :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을 말하며 기원전 325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295년에 죽었다. 적자인 장(章)을 폐하고 서자인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준 무령왕은 자신을 주보(主父)라고 칭하며 상왕(上王)의 역할을 하려고 하였으나 후에 왕권다툼이 벌어져 자기가 머물렀던 사구궁(沙丘宮)에 갇혀 굶어 죽었다. 무령왕는 조나라 군사들을 호족(胡族)의 풍속에 따라 복식과 궁술 및 기마술 등을 도입하여 전국시대 당시 전투방식을 보병전 위주에서 기마전 위주로 바꾸었다.

②완(宛)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부근

③양(穰)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등현(登縣)



7. 익사지도(弋射之道)

- 주살의 궁술에 빗대 천하를 취하는 방법을 유세하다. -


경양왕 18년 기원전 281년, 초나라 사람이 가벼운 활에 가느다란 실로 연결한 화살을 재어 쏘아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맞추었다. 경양왕이 듣고 불러서 그의 재주에 대해 묻자 대답했다.

「소인은 작은 기러기나 들새들을 작은 활로 쏘아 맞추는 사냥꾼일 일 뿐입니다. 어찌 대왕께서 추구하시는 커다란 도에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항차 강대한 초나라의 힘과 대왕의 현명함에 의지하여 활을 쏜다면 어찌 잡히는 것들이 이렇게 구구하고 조그만 기러기나 들새들뿐 만이겠습니까? 과거 삼왕(三王)①께서는 도덕이라는 명분을 화살로, 춘추오패(春秋五覇)는 무력(武力)이라는 실제적인 힘을 화살로 삼아 천하를 향해 쏘아 맞추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秦), 위(魏), 연(燕), 조(趙) 등과 같은 나라들은 작은 기러기에 불과할 뿐이며, 제(齊), 노(魯), 한(韓), 위(衛) 등의 나라들은 들판 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오리새끼에 해당하고, 또한 추(鄒)②, 비(邳)③, 담(郯)④, 비(費)⑤ 등의 나라는 한낱 작은 들새에 불과하며, 그 밖의 나라들은 화살을 낭비하여 쏠 가치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대왕께서는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6쌍의 작은 새들을 보십시오. 어느 새를 먼저 쏘아 잡으시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성인이라는 활에 용사라는 화살을 재어 적당한 시기를 살펴 활을 잡아당겨 잡으시지 않으십니까? 이 여섯 쌍의 새들을 모조리 잡아서 부대에 넣어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마는 즐거움이 아니며, 잡아 가지고 온 것들은 단지 몇 마리의 들오리나 기러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아침에 일찍 활시위에 화살을 잰 다음 길게 당겨 위나라 대량(大梁)의 남쪽을 향해 쏘면 위나라의 오른쪽 팔을 맞추어 한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으로 진출할 때 지나가야 하는 길이 막히게 되어 상채(上蔡) 지방의 여러 군현들이 다치게 됩니다. 다시 활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위나라의 어(圉)⑥ 지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면 그것은 바로 위나라의 왼쪽 어깨가 절단됩니다. 다시 방향을 더 밖으로 돌려 위나라의 정도(定陶)⑦ 지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게 되면 그것은 바로 위나라가 자기들 동쪽의 땅을 버리게 되어 대송(大宋)⑧과 방여(方輿)⑨ 두 고을을 공략하여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위나라의 양쪽 팔을 자르고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월나라를 멸망시키고 담국(郯國)을 정면에서 치고 올라가면 대량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란대(蘭臺)⑩에 올라 활과 화살을 일단 접어두고 서하(西河)⑪의 물을 말에 먹이면서 위나라의 대량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 활을 쏜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화살에 주살을 꿰어 사냥하는 일에 진실로 좋아하시어 싫증을 내지 않으신다면 다시 보궁을 꺼내어 돌촉으로 만든 화살에 주살을 새롭게 바꿔 달아 동해의 갈고리 모양의 주둥이를 갖고 있는 큰 새를 쏘아 맞춘 다음 몸을 돌려 돌아와 제나라의 장성을 새롭게 수축하여 방어선을 삼으시고 다시 아침 일찍 활을 쏘아 동쪽의 거읍(莒邑)을 차지하고 오후에는 패구(浿丘)⑫를 취하시고 밤을 도와 즉묵(卽墨)을 차지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오도(午道)⑬를 점령하면 제장성(齊長城)의 동쪽과 태산의 북쪽을 거머잡을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조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북쪽으로는 연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제(齊), 연(燕), 조(趙) 세 나라는 새가 비상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합종의 맹약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자연히 맺어지게 됩니다. 북쪽으로 길을 떠나 연나라의 요동 땅을 한번 살펴보신 연후에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월나라의 회계산(會稽山)에 오르시어 다시 활을 쏘는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수(泗水) 유역의 열 두 제후국들은 왼손으로 둘둘 묶어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맨 후에 오른손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하루아침에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를 파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진나라에게는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고 비록 한나라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였지만 능히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는 위나라를 정벌하였지만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 조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오히려 싸움에서 져서 많은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결국 진(秦)과 위(魏) 두 나라는 싸움에 지쳐 국력은 탕진되어 기진맥진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초나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진나라에게 빼앗긴 한중(漢中), 석(析)⑭, 역(酈)⑮ 등의 옛날 고토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보궁을 한 번 더 꺼내시어 주살을 화살에 다시 메시고 맹새(鄳塞)⑯로 나아가 진나라가 지쳐서 쓰러지기를 기다리시면 산동과 하내(河內)⑰를 얻으실 수 있으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남면하여 제호를 칭하십시오.

진나라에 대해 말씀드리면 진나라는 마치 커다란 새의 모습으로 해내의 땅을 등에 업고 동쪽을 노려보고 있는 형상입니다. 왼쪽 날개로는 조나라의 서남쪽을 덮고 오른쪽 날개로는 초나라의 언(鄢)과 영(郢) 땅을 위협하고 있으며 정면으로는 한(韓)과 위(魏)를 공격하고 머리를 숙여 중원의 제후국들을 노려보며 병탄의 기회만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곳의 장점과 지세의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날개를 펴고 훨훨 하늘 높이 사방 3천 리를 날아 오르니 진나라는 결코 하루아침에 혼자의 힘으로 잡을 수 있는 새는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목적은 경양왕을 격앙시키기 위해서였다. 경양왕이 다시 그 사람을 소환하여 자세히 묻자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선왕께서는 진나라에게 속아 타국에서 객사하셨습니다. 진나라에 대한 원한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일개 필부의 원한으로 나라를 상대로 원수를 갚은 사람은 단지 오자서(伍子胥)와 백공(白公) 뿐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는 사방 5천리의 땅에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강국입니다. 그런 국력으로 천 리에 달하는 전쟁터를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음에도 오히려 앉아서 다른 나라의 속박만 받고 있으니 제가 대왕께 그러시지 말라고 아무도 몰래 말씀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경양왕은 그의 말을 듣고 사절들을 제후국에 보내 다시 합종을 맺고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진나라가 듣고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제나라 및 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고 주나라를 도모하려고 했다. 주난왕(周赧王)이 무공(武公)을 시켜 초나라 상국 소자(昭雎)에게 말하게 했다.

「3국이 주나라의 교외를 분할하여 나누어 갖고 물자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고, 또한 주나라의 보기를 남쪽으로 옮겨 초나라의 위세를 높이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천하의 제후들이 받드는 공주(共主)를 시해하고 대대로 이어오던 천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대국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군사의 수가 많음을 기화로 군사가 적은 나라를 위협하면 소국들도 따르지 않게 됩니다. 대국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소국들은 뒤를 따르지 않으니 세상에서 명분과 실리 중어느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얻지 못하니 비록 무력을 동원하여 정벌전에 나서지만 결국은 백성들만 상하게 만들 뿐입니다. 주나라가 지니고 있는 명성을 대신 얻으려는 생각만으로는 천하에 호령을 발 할 수 없습니다.」

소저가 대답했다.

「우리는 주나라를 도모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하여 주나라를 점령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적군보다 5배가 넘지 못하는 병력으로는 공격하여 성공하기 어렵고 적군보다 10배가 넘지 않는 병력으로 적의 성을 포위하게 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주나라 왕조는 20개의 진(晉)⑱에 상당한다는 것은 상국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나라가 이미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의 진성(晉城)을 포위했으나 결국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치욕만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한나라의 정예병들은 싸움 중에 모두 죽고 일반 사병들은 부상을 입었으나 진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한나라보다 백배가 많은 병력으로 주나라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게 된 것입니다. 무릇 서주와 동주의 원성을 사게 되면 노나라와 추(鄒)나라의 마음을 잃게 되고, 계속해서 제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로부터 초나라의 명성은 없어지게 되고 이어서 초나라의 운명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대왕께서 동주와 서주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삼천의 주인인 한나라의 국력을 강성하게 하여 방성 밖의 초나라 땅은 틀림없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결과가 그렇게 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주나라의 땅은 이러저리 맞추어 보아도 사방 백리가 못되는 나라입니다. 주나라의 이름은 천하의 제후들이 떠받드는 주인이지만 그 땅을 차지하여 나누어 봐도 가져간 나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주나라 백성들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 나라의 군사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는 도움이 별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초나라가 비록 주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군주를 시해했다는 죄명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며 옛날에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던 제후들이나 전쟁을 즐겨 공을 탐하던 장군들⑲이 호령을 발하여 군사를 동원하였으나 아직까지 주나라에는 창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라고 생각합니까? 주나라에 있는 제기를 보고 단지 그것을 옮기려고 했을 뿐 시군의 란을 일으키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나라가 제기를 초나라로 옮기려고 하는데 저는 그 제기로 인하여 초나라가 천하의 제후들과는 원수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호랑이의 살은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습니다만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하여 자기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먹을 수도 없는 사나운 호랑이를 힘들여 즐겨 사냥합니다. 만약에 늪지에 사는 미록(麋鹿)에게 호랑이 가죽을 입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한다면 그 즐거움은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 보다 만 배나 더 할 것입니다. 제후들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나누어 갖는다면 그 땅으로 자기들의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으며, 초나라를 정벌하는 행위는 공주(共主)를 높인다는 명분도 있게 됩니다. 오늘 상국께서 천하의 공주인 주왕을 죽이고 삼대(三代)⑳에 전하여 온 제기와 구정을 가져가 홀로 독차지하여 다른 제후들 위에 오만하게 서려고 하니 이것은 제후의 신분을 벗어난 탐욕스러운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서(周書>』에 ‘일가를 세우려고 정치를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앞장서서 혼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만약이 초나라가 제기와 구정을 남쪽으로 옮겨간다면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바짝 따라 오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경양왕이 무공의 말을 듣고 주나라의 제기와 구정을 초도로 옮기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경양왕 19년 기원전 280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막았으나 대패하고 상용(上庸)의 땅과 한수 이북의 땅을 내주었다.


주석

① 삼왕(三王) : 하우(夏禹), 상탕(商湯), 주문왕(周文王)을 말함.

②) 추(鄒) : 주(邾)라고도 하며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비현(費縣), 등현(滕縣) 일대에 걸친 소 제후국.

③) 비(邳) : 지금의 강소성 비현(邳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

④) 담(郯) :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郯城縣) 동북에 있었던 소 제후국

⑤ 비(費)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을 말하며 계손씨의 봉읍으로 전국시대 때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⑥ 어(圉) :전국 때 위(魏)나라 땅으로써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남

⑦ 정도(定陶) : 전국 때 위나라 영토로서 지금의 하남성 정도현(定陶縣)

⑧ 대송(大宋) :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邱市). 즉 춘추 때 송나라의 땅을 말한다.

⑨ 방여(方輿) :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서북

⑩ 란대(蘭臺) : 환산(桓山)의 별칭. 현 강소성 동산현(銅山縣) 서북

⑪ 서하(西河) : 위나라 경내에 있던 황하를 가리킨다.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동쪽 일대

⑫ 패구(浿丘) :전국 때 제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박흥현(博興縣) 동남

⑬ 오도(午道) : 오도(午道)라는 말은 종횡으로 통하는 네거리를 말하나 여기서는 제나라와 초나라와의 국경지대를 뜻하는 말임.

⑭ 석(析) : 지금의 섬서성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하남성 서협향(西峽鄕)을 말하며 진나라의 무관(武關)에서 약 30키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초나라의 전략적 요충지 임. 즉 진나라의 초나라 공격로는 육로의 경우는 진령(秦嶺)을 넘어 무관으로 나오는 길과 수로의 경우는 서쪽의 대산관(大散關)으로 나와 촉(蜀)에서 배를 이용하여 장강의 물살을 타고 초나라로 진격한 두 가지 공격로가 있었음.

⑮ 력(酈) : 전국 때 초나라 땅이었다가 진나라에게 빼앗긴 지역으로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북. 남양시는 춘추 때 초나라의 중원 진출의 전초기지 였던 신성(申城)으로써 전국 때는 그 명칭이 완성(宛城)으로 바뀌었다. 력읍(酈邑)은 완성(宛城)의 방어를 위해 세운 위성도시임.

⑯ 맹새(鄳塞)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서남쪽의 평정관(平靖關).

⑰ 산동(山東) 하내(河內) : 산동(山東)은 산서성과 하북성을 가르는 태항산맥(太行山脈) 동쪽의 지방을, 하내(河內)는 황하유역을 말한다. 중국의 지역은 대체적으로 북쪽은 태항산맥을 기준으로 그 서쪽은 산서(山西), 그 동쪽은 산동(山東)이라 칭했고 황하의 북쪽은 하북, 황하의 남쪽은 하남이라 했고 장강 이북은 강북, 이남은 강남이라 했다.

⑱ 진(晉) : 경영왕 18년 기원전 281년 당시는 진(晉) 즉 당진이라는 나라는 기원전 374년에 한위조 삼가에 의해 해체된지 백년 가까이 지난 후다. 여기서이 진(晉)이라는 말은 원래 당진이 일어났던 산서성 하곡부(河曲部)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사용했다. 안읍은 전국 초기 위나라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⑲ 원전은 ‘ 호사지군(好事之君), 희공지신(喜功之臣)’이며 호사지군은 정(鼎)의 무게를 물은 초장왕(楚庄王), 주나라에 정(鼎)을 달라고 요구한 초영왕(楚靈王), 그리고 주정(周鼎)을 초나라에 옮겨야겠다고 한 경양왕(頃襄王)을 말하며 희공지신(喜功之臣)은 성복대전(城濮大戰)의 패장 자옥(子玉) 성득신(成得臣)과 경양왕(頃襄王) 때의 초나라 대부 소저(昭雎)를 말한다.

⑳ 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왕조




8. 영도실함(郢都失陷) 천도진성(遷都陳城)

- 진나라에게 영도를 빼앗기고 진성으로 도성을 옮기다. -


경양왕 20년 기원전 279년, 진나라 대장 백기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의 서릉(西陵)①를 점령하였다.

경양왕 21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 대장 백기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했다. 백기는 영도에 있던 초나라 선조들의 무덤들이 몰려 있던 이릉(夷陵)을 불태워 훼손시켰다. 경양왕은 초나라 군대가 궤멸되어 다시 싸울 수가 없게 되자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의 동북지방으로 도망쳐 진성(陳城)②으로 들어가 지키려고 했다.

경양왕 22년 기원전 277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과 무군(巫郡)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경양왕 23년 기원전 276년, 경양왕이 동북의 땅에서 병사들을 끌어 모아 10여만이 넘게 되자 그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에게 빼앗긴 장강 연안의 15개 성을 탈환하여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아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경양왕 27년 기원전 272년, 초나라가 3만의 군사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는 삼진을 도왔다. 초나라가 다시 진나라와 강화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초나라가 좌도(左徒)③로 하여금 태자를 따라가 보살피게 하였다.

경양왕 36년 기원전 263년 경양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태자가 진나라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그해 가을 경양왕이 죽었다. 태자가 웅원(熊元)으로 개명하며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나라의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이 좌도 황헐(黃歇)을 영윤으로 삼고 오(吳) 땅에 봉하고 춘신군(春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돌려주는 주(州)④ 땅을 받고 강화를 맺었다.

고열왕 6년 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조왕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초나라가 장군 경양(景陽)에게 군사를 주어 달려가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열왕 7년 기원전 256년, 초나라 군사들이 조나라의 신중(新中)⑤ 땅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이 물러갔다.

고열왕 12년 기원전 251년, 진소왕이 죽자 초왕이 춘신군에게 명하여 진나라에 조문을 가게 하였다.

고열왕 16년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장양왕(庄襄王)이 죽고 진왕의 자리에 조정(趙政)⑥이 올랐다.


주석

① 서릉(西陵): 지금의 호북성 의창시(宜昌市) 서북. 이것은 백기(白起)가 수군을 이끌고 사천성을 경유하여 쳐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의창시는 사천성(四川省)과 인접한 호북성 서쪽의 장강(長江) 연안도시이다.

② 진성(陳城): 원래는 진(陳)나라가 도읍하였던 완구(宛丘)를 말하며 초나라가 멸하고 군현으로 삼아 진성(陳城)이라고 불렀다.

③ 좌도(左徒): 초나라의 관직명. 국가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고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을 가리킨다.

④ 주(州): 초나라 땅 이름.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 경내.

⑤ 신중(新中):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거록현(巨鹿縣) 경내

⑥ 조정(趙政):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을 가리킨다. 영(嬴)씨와 조(趙)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이며 진시황이 조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정이라 한 것이다.


9. 왕전멸초(王翦滅楚)

- 진나라의 장군 왕전이 초나라를 멸하다. -


고열왕 22년 기원전 241년, 초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이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정벌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초나라가 동쪽의 수춘성(壽春城)으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옛날 이름을 따서 영(郢)이라고 불렀다.

고열왕 25년 기원전 238년 고열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한(悍)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유왕(楚幽王)이다. 이원(李園)이 춘신군을 죽였다.①

유왕 3년 기원전 235년, 진과 위나라가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진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죽었다.

유왕 9년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진나라에 병합하였다.

유왕 10년 기원전 228년, 유왕이 죽고 그의 동복동생인 유(猶)가 즉위하였다. 이가 초애왕(楚哀王)이다. 애왕이 즉위한지 두 달여 만에 부추(負芻)를 따르던 무리들이 애왕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부추를 초왕의 자리에 올렸다. 부추는 애왕의 서형이었다. 그 해에 진나라가 조왕 천(遷)을 사로잡았다.

부추 원년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②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부추 2년 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 10여 개 성을 빼앗아 갔다.

부추 3년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부추 4년 기원전 224년, 진나라의 대장 왕전(王翦)이 기(蘄)③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초나라 장수인 항연(項燕)을 잡아서 죽였다.

부추 5년 기원전 223년, 진나라 대장 왕전과 몽무(蒙武)가 초나라 도성을 함락시키고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는 초나라의 옛 땅에 세 개의 군을 설치했다.


주석

① 李園殺春申君(이원살춘신군) : 초나라의 고열왕(考烈王 : 재위 전 263-238년)이 자식이 없자 춘신군이 이것을 걱정하였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그의 여동생을 춘신군에 바쳤다. 후에 그의 여동생이 춘신군의 아이를 배자 이원은 그의 여동생과 모의하여 그녀를 고열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가자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가 후에 유왕(幽王)이다. 이원은 춘신군이 그 사실을 발설하고 자기가 유왕의 부친이라는 것을 기화로 전횡(專橫)할까 두려워하여 죽였다. 《춘신군열전18》 참조

② 형가(荊軻) : 위(衛)나라 사람으로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비수를 집어넣어 두루마기로 만든 연나라 전국지도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에 망명해 왔던 번어기(樊於其)의 수급을 준비하여 진나라에 가서 진왕에게 예물로 바치려고 하였다. 형가가 진왕에게 바치려고 지도를 펴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비수를 집어들고 진왕을 찔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형가는 그 자리에서 피살되었다. 다음 해에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자 태자 단은 그의 부왕에게 피살되어 진왕에게 바쳐졌다. 《자객열전(刺客列傳)26》 참조.

③ 기(蘄):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경내의 동남



태사공이 말한다.

「초영왕이 신성(申城)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경봉을 잡아다 죽이고 장화대를 지었다. 다시 주나라의 구정을 넘보아 그 뜻이 높아 천하를 아주 우습게 여겼으나 결국은 신해(申亥)의 집에서 굶어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절조와 품행을 모두 지키지 못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찌 사람이 권세가 있다하여 남을 대하는데 삼가하지 않았단 말인가? 또 기질(棄疾)이 변란을 일으켜 그 형들을 죽이고 초왕의 자리에 올라 며느리로 데려온 진녀를 탐했으니 너무 도가 심하지 않았는가? 초나라는 이 두 사람 때문에 망했다.


【초세가 끝】


초세가에 속한 열전.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5》,《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6》, 《장의열전(張儀列傳)10》,《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13》,《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18》,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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