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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가(鄭世家)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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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세가(鄭世家)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태사 백(伯)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867. 及侵周禾(급침주화),

정장공(鄭庄公)이 군사를 보내

주나라 경계를 침략하여 벼이삭을 베어오자


868. 王人是議(왕인시의).

주나라 백성들과 신하들의 의론이 분분하며

정나라의 행위를 비난하였다.


869. 祭仲要盟(제중요맹),

제중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하여 맹세를 함으로써


870. 鄭久不昌(정구불창).

정나라는 강국으로서 오래가지 못했다.


871. 子産之人(자산지인),

후에 자산이 나타나 정나라의 정치를 일신하자


872. 紹世稱賢(소세칭현).

후세 사람들은 잊지 않고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873. 三晋侵伐(삼진침벌),

삼진이 번갈아 가며 정나라를 쳐들어오니


874. 鄭納于韓(정납우한).

정나라는를 망하여 결국은 한나라 땅이 되었다.


875. 嘉厲公納惠王(가려공납혜왕),

정려공이 왕자 퇴(頹)의 란으로

쫓겨난 혜왕을 복국시킨 공로를 칭송하여


876. 作<鄭世家>第十二(작<정세가>제십이)

<정세가>제십이를 지었다.



정환공(鄭桓公) 우(友)는 주려왕(周厲王)의 어린 아들로써 주선왕(周宣王)의 서제(庶弟)1)다. 선왕 즉위 22년 째 되는 해에 선왕이 우를 정(鄭)2) 땅에 봉했다. 우(友)가 피봉(被封)되어 33년 동안 정나라를 다스리자 그곳의 백성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여 따르게 되었다. 주유왕(周幽王)이 우를 주왕실의 사도(司徒)에 임명했다. 우로 하여금 주나라 백성들을 서로 화목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래서 하수(河水)와 락수(洛水) 유역에 살던 백성들은 그가 왕실의 사도로 부임하기 위해 정나라를 떠나자 우(友)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가 왕실의 사도에 임명된 지 1년 후에 유왕이 포사를 얻어 넋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왕은 포사와 즐기느라 조정의 정사를 모두 팽개치고 추호도 유념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나라의 정사는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었고 제후들은 유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정백 우가 태사(太史) 백(伯)에게 물었다.

「왕실에 매우 엄중한 재난이 닥치게 될 텐데 내가 이곳 사지에서 빠져나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태사 백이 대답했다.

「오로지 낙수(洛水)의 동쪽이며 하수의 남안(南岸)에 해당하는 땅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인가?」

태사백이 대답했다.

「그 일대에는 괵국(虢國)3)과 회국(鄶國)4)이 있는데 그 군주들이 탐욕스럽고 이(利) 만을 밝히는 자들이라 백성들이 따르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의 직에 계시고 백성들로 부터 사랑을 받고 계시니 공께서 그곳 주변의 땅을 성심껏 청하신다면 괵국과 회국의 군주들은 주왕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공을 두렵게 생각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흔쾌히 그들의 봉지를 떼어 줄 것입니다. 경께서 그곳에 자리 잡으시면 괵국과 회국의 백성들을 모두 공의 백성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라를 남쪽 변경의 강수 유역으로 옮기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오?」

「옛날에 축융(祝融)이라는 사람이 고신(高辛) 씨를 위해 화정(火正)의 벼슬을 담당하여 큰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주왕실에서 번성하지 못했습니다. 초나라가 축융 후손들입니다. 주나라가 쇠약해지면 초나라는 필시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나라에게는 이롭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왕도의 서쪽으로 가면 어떻겠소?」

「서쪽의 사람들은 모두가 탐욕스럽고 이(利)만을 밝혀 나라를 오래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주나라가 쇠하게 되면 어느 나라가 흥성하게 되겠소?」

「제(齊), 당진(唐晉), 섬진(陝秦), 초(楚) 등의 나라들입니다. 제나라는 강성(姜姓)이며 백이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백이는 옛날 요임금을 도와 나라의 법도와 예절을 제정했습니다. 섬진은 영성(嬴姓)이며 백예(伯翳)의 후손들입니다. 백예는 순임금을 도와 많은 부락을 회유하여 귀순시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나라의 조상들도 역시 천하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그의 아들 성왕은 뒤를 이었습니다. 성왕은 그의 동생 숙우(叔虞)를 당(唐) 땅의 제후로 봉했습니다. 당 땅은 산천의 지세가 험하여 이곳에서 덕 있는 후손이 태어나 주나라가 쇠퇴하게 되면 병존하게 되어 당진은 틀림없이 흥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괵나라를 (虢)과 회(檜) 땅 근처로 나라를 옮기겠소.」

환공이 즉시 서둘러 유왕에게 청하여 그가 다스리고 있던 백성들을 락수(洛水)의 동쪽으로 옮기는 것을 하락 받았다. 괵과 회 두 나라의 군주들이 과연 10여개의 성을 환공에게 바쳤다. 환공은 결국은 새로운 땅에다 정나라를 건국하고 도읍을 신정(新鄭)이라고 불렀다.

환공 2년 기원전 771년, 견융(犬戎)이 쳐들어와 유왕을 여산(驪山) 밑에서 죽였다. 환공은 유왕을 호위하다 같이 견융의 군사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정나라 국인들이 환공의 아들인 굴돌(掘突)을 옹립하여 정백으로 세웠다. 이가 정무공(鄭武公)이다.

무공 10년 기원전 761년, 신후(申侯)의 딸을 데려와 부인으로 삼아 무강(武姜)이라고 불렀다. 무강이 세자 오생(寤生)을 낳았다. 그녀가 오생을 낳을 때 난산하여 고생을 했기 때문에 후에 오생을 미워하게 되었다. 다시 무강이 작은아들인 단(段)을 낳았다. 단을 낳을 때는 고생을 하지 않아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무공 27년 기원전 744년 무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무강이 무공에게 청하여 오생을 패하고 단을 세자로 세우려고 했다. 무공이 듣지 않았다. 그해에 결국은 무공이 죽고 오생이 정백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정장공(鄭庄公)이다.

장공 원전 기원전 743년 장공의 동생 단을 경성(京城)에 봉하고 태숙(太叔)이라고 불렀다. 제중(祭仲)이 장공에게 간했다.

「경성의 대성이라 다른 사람을 봉하면 안 됩니다.」

「모친께서 원하시니 내가 감히 그에게서 경성을 빼앗을 수 없소.」

경성에 봉해진 단은 병장기를 수선하고 갑병들을 훈련시키며 그의 모친인 무강과 모의하여 정성을 기습하려고 하였다.

장공 22년 기원전 722년, 단이 과연 정성을 습격하자 무강이 성안에서 호응하려고 하였다. 장공이 군사를 내어 단을 공격하였다. 단은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쳤다. 장공이 추격하여 경성으로 진격하자 경성의 국인들이 단에게 등을 돌렸다. 단은 할 수 없이 언성(鄢城))으로 몸을 피했다. 계속해서 장공이 언성을 공격하여 파하자 단은 도망쳐 공성(共城)으로 달아났다. 단의 반란을 진압한 장공은 그의 모친인 무강을 영(穎) 땅으로 옮겨 살게 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맹세하였다.

「내가 황천(黃泉)이 아니면 결코 얼굴을 대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몇해가 지나자 장공은 그 모친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영곡(穎谷)에 살던 고숙(考叔)이라는 사람이 장공을 알현하고 헌상품을 바쳤다. 장공이 고숙에게 음식을 하사했다. 고숙이 음식을 보자 장공에게 청했다.

「신에게는 늙은 모친이 계시는데 주군께서 내려주신 음식을 싸가지고 가서 모친을 드리려고 하니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역시 모친을 그리워하고 있으나 내가 이미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하여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어찌하면 모친을 데려와 모실 수가 있겠는가?」

「땅 밑으로 굴을 파서 물이 나오면 그곳에서 모친을 상견할 수 있습니다.」

장공이 영고숙의 말을 따라 땅 밑에서 모친을 만나뵙고 정성으로 모셔왔다.

장공 24년 기원전 720년, 송목공(宋穆公)이 죽고 그의 아들 이(夷-殤公)가 뒤를 잇자 목공의 형이며 선공(宣公)의 아들인 공자풍(公子馮)이 정나라로 망명해 왔다. 그 해에 정나라가 주나라의 변경을 쳐들어가 벼이삭을 베어 수레에 싣고 왔다.

장공 25년 기원전 719년 위(衛)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그의 군주인 위환공(衛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위후의 자리에 올랐다. 주우가 위나라의 민심을 돌려볼 생각으로 송나라와 힘을 합하여 정나라를 쳐들어왔다. 송나라가 쳐들어온 목적은 정나라에 망명중인 공자풍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장공 27년 기원전 717년, 장공이 주나라의 왕성에 가서 환왕에게 조현을 드렸으나 환왕이 3년 전에 베어간 벼이삭으로 인하여 노하여 장공의 조현을 받지 않았다.

장공 29년 기원전 715년, 장공은 주환왕이 자기의 조현을 받지 않고 무례하게 대하자 화를 내며, 노나라의 태산 근처에 있던 정나라 소유의 팽전(祊田)5)과 정나라 경계에 있던 노나라 소유의 허전(許田)6)을 교환해 버렸다.

장공 33년 기원전 711년 송나라의 태재 화독(華督)이 공보(孔父)를 죽였다.

장공 37년 기원전 707년 장공이 주나라에 조현을 드리러 가지 않자 주환왕(周桓王)이 진(陳), 채(蔡), 괵(虢), 위(衛) 사국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출정했다. 장공이 제중(祭仲), 고거미(高渠弥)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천자의 군사에 대항하였다. 천자의 군사들이 정나라 군사들에게 대패하고 정나라 장수 축담(祝聃)은 활을 쏘아 환왕의 어깨를 맞추었다. 축담이 추격하여 환왕을 사로잡으려 했으나 장공이 말리며 말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범하는 일도 참기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천자를 잡아 감히 능멸할 수 있겠는가?」

축담이 추격을 멈추고 돌아왔다. 밤이 되자 제중에게 명하여 천자를 찾아가 뵙고 상처의 정도를 살펴보게 하였다.

장공 38년 기원전 706년, 북융(北戎)이 제나라를 침입하였다. 제나라가 사자를 보내와 구원군을 청했다. 정나라가 세자 홀(忽)를 보내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제희공(齊釐公)이 세자홀을 자기 딸과 혼인을 시키려고 하였다. 홀이 사양하며 말했다.

「우리 정나라는 소국이라 감히 대국인 제나라와는 세력이 맞지 않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때 제중 등 일반 군신들은 제나라의 혼인 신청을 받아드리라고 권하며 말했다.

「지금의 주군에게는 사랑하는 공자들이 많이 있어 세자께서 대국의 후원이 없이는 군주의 자리에 오르기 어렵습니다. 세 공자 모두가 정나라의 군주 자리를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 공자란 바로 세자홀, 동생 돌(突), 그 다음 동생 미(亹)를 말한다.

장공 43년 기원전 701년, 장공이 죽었다. 옛날에 제중이 장공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정나라의 상경이 되었다. 장공이 제중을 등(鄧)나라에 보내어 등녀(鄧女)를 데려오게 하여 부인으로 삼고 그 사이에서 세자홀을 낳았다. 그래서 제중이 세자홀을 받들어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소공(昭公)이다. 다시 장공이 송나라의 옹씨(雍氏)의 딸을 취하여 려공(厲公) 돌(突)을 낳았다. 옹씨 들은 송나라에 출사하여 송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제중이 세자홀을 정백의 자리에 옹립했다는 소식을 들은 송장공은 사자를 보내 제중을 유인하여 붙잡아 감금한 후에 위협하였다.

「돌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살아가지 못하리라!」

송장공은 돌(突)도 함께 붙잡아 뇌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며 협박했다. 제중이 송나라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장공과 같이 돌을 정백의 자리에 세우겠다고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 제중이 돌을 데리고 귀국하여 그의 즉위를 위해 준비했다. 소공은 제중이 송군의 협박을 받아 자돌을 정백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해 9월 정해(丁亥) 일에 소공은 위나라로 도망쳤다. 기해(己亥)일에 돌이 정나라에 들어와 정백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려공(厲公)이다.

려공 4년 기원전 697년 제중이 정나라의 정사를 전단하자 려공이 이를 꺼려하여 아무도 몰래 제중의 사위인 옹규(雍糾)를 시켜 제중을 죽이려고 하였다. 옹규의 부인은 제중의 딸이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자기의 친정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모친을 찾아가 물었다.

「부친과 남편 중 누가 더 중합니까?」

그녀의 모친이 대답했다.

「부친은 오로지 한 분뿐이지만 남편은 여러 사람 중에서 고를 수 있으니 부친이 더 중하다고 할 수 있다.」

제중의 딸이 자기의 남편이 꾸미고 있는 일을 그 부친에게 고했다. 그래서 제중이 오히려 옹규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시정에 내다버리게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다. 려공은 제중에게 어찌하는 수가 없어 죽은 옹규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나라의 운명에 관한 일을 자기의 부인과 상의하다니 죽어 마땅한 놈이다!」

그해 여름 려공이 정성을 빠져 나와 정나라의 력성(櫟城)의 부근에 거하면서 복국의 기회를 노렸다. 제중이 다시 소공을 위나라에서 불러와 그해 6월 을해(乙亥) 일에 정백의 자리에 옹립하였다.

그해 가을 정려공은 력성의 백성들이 자기들의 성주인 대부 선백(單伯)을 죽이자 그곳으로 들어가 차지했다. 려공이 정나라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후들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려공을 위해 정나라를 정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송나라가 려공에게 많은 군사들을 주어 력성의 방비를 굳게 지키게 했다. 정나라는 이 일로 해서 력성을 점령하고 있던 려공을 공격하지 못했다.

소공이 옛날 세자 시절, 부군 장공이 고거미를 경(卿)으로 삼으려 했으나 고거미를 싫어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장공은 소공의 말을 듣지 않고 고거미을 경으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소공이 정백의 자리에 오르자 고거미는 소공에게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

소공 2년 기원전 695년, 겨울 10월 신묘(辛卯) 일에 고거미와 소공이 함께 사냥을 나갔다. 고거미가 소공을 교외에서 죽였다. 제중과 고거미가 감히 려공을 모셔오지 못하고 그의 동생 미를 정나라의 군주로 삼았다. 이가 자미(子亹)이며 시호는 없다.

자미 원년 7월 제양공(齊襄公)이 제후들을 수지(首止)7)에 모이게 하여 회맹 하였다. 정나라의 자미가 회맹에 참석하기 위해 수지로 행차했다. 고거미가 예를 행하는 상(相)으로 수행하고 제중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따라가지 않았다. 제중은 자미가 옛날 제양공이 공자였을 때 서로 씨름을 하다가 원수를 진 일이 있었던 것을 상기시키며 그에게 회맹에 참석하지 말라고 권했다. 자미가 말했다.

「제나라의 군주는 강포한 자이며 또한 자돌은 력읍에 있으면서 정나라에 복국하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소. 그런데 내가 가지 않으면 제후들은 작당하여 정나라를 정벌하고 려공을 복귀시키려고 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가서 참석함이 안 가는 것보다는 낫소. 그리고 내가 간다고 해서 반드시 욕을 본다고 할 수만은 없소. 게다가 내가 어찌하여 그대가 말한 그런 처지에 빠진다고 확신할 수 있겠소!」

결국 자미는 제족의 말을 듣지 않고 회맹에 참석하기 위해 수지로 출발했다. 자미와 같이 회맹에 참석할 경우 모두 살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제중은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회맹장에 당도한 자미가 옛날의 일에 대해 사죄하지 않자 분노한 제양공이 갑사들을 매복시켜 자미를 잡아서 죽였다. 고거미는 도망쳐 정나라에 돌아와 제중과 함께 상의하여 자미의 동생 공자영(公子嬰)을 진(陳)나라에서 데려와 정백의 자리에 올렸다. 이가 정자(鄭子)다. 그 해에 제양공이 공자팽생(公子彭生)을 시켜 노환공(魯桓公)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후에 껴안아 허리를 부러뜨려 죽이게 하였다.

정자 8년 기원전 686년, 제나라에서 관지보(管至父)라는 장수가 란을 일으켜 그의 군주인 양공을 시해하였다.

정자 12년 기원전 682년, 송나라 사람 장만(長萬)이 그의 군주인 민공(湣公)을 시해하였다. 제중이 죽었다.

정자 14년 기원전 680년, 정나라의 망군 려공 돌이 력읍에 거하면서 사람을 시켜 정나라의 대부 보하(甫瑕)를 유인하여 사로잡았다. 려공은 보하를 협박하며 자기가 정나라에 복국하는데 돕도록 했다. 보하는 력읍의 려공을 막기 위해 정자가 보낸 장수였다. 보하가 려공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저를 놓아주신다면 제가 주군을 위해 정자를 죽이고 재위에 오르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려공이 보하에게 맹세를 시키고 놓아주었다. 6월 갑자(甲子) 일에 보하가 정자와 그의 두 아들을 살해하고 려공을 맞아 들였다. 려공 돌이 력읍에서 다시 정나라로 들어가 정백의 자리에 복위하였다. 옛날에 려공이 꿈을 꾸었는데 성안의 뱀이 성밖의 뱀과 정성의 남문에서 싸웠는데 결국은 성안의 뱀이 죽었다. 력읍에서 17년 간을 머물다가 과연 려공이 복위하였다. 려공이 복국하여 그의 백부인 공자 원(原)을 책망하며 말했다.

「내가 나라를 잃고 나라 밖에서 살고 있었는데 백부께서는 나를 입국시키려는 생각도 하시지 않으셨으니 나무 심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공자원이 말했다.

「군주를 모시는데 두 마음을 가지 않음은 신하된 자들의 직분입니다. 이 원이 그 죄를 알고 있습니다.」

원이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려공이 다시 보하를 보고 말했다.

「너는 임금을 모시는데 두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그런 다음 그를 죽였다. 보하가 죽음에 임하여 후회를 하며 말했다.

「너무 큰공은 보답을 받지 못한다고 했는데 과연 내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려공 돌 원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패자를 칭하기 시작했다.

려공 5년 기원전 675년, 연과 위(衛)나라가 주혜왕(周惠王)의 동생인 왕자 퇴(頹)를 도와 주혜왕을 공격했다. 주혜왕이 쫓겨나 온(溫) 땅에 거했다. 왕자퇴가 스스로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려공 6년 기원전 674년, 혜왕이 주나라의 사정을 정려공에게 고하자 려공은 군사를 동원하여 주나라 왕자퇴를 공격했다. 그러나 싸움에 이기자 못하자 혜왕은 돌아와 력읍(櫟邑)에 머물렀다.

려공 7년 기원전 673년 봄에 정려공과 괵숙(虢叔)이 군사를 일으켜 왕자퇴를 공격하여 죽이고 혜왕을 주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해 가을에 려공이 죽고 그 아들 첩(捷)이 뒤를 이었다. 이가 문공(文公)이다.

려공은 처음에 정백의 자리에 4년 동안 있다가 쫓겨나 력읍(櫟邑)으로 가서 그곳에서 17년간 머물렀다. 다시 정나라에 복국하여 7년 간 재외에 있다가 죽었다. 려공은 력읍에 망명한 기간을 합하여 28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문공 17년 기원전 656년 제환공(齊桓公)이 군사를 일으켜 채(蔡)나라를 파하고 군사들을 계속 남쪽의 초나라로 진격시켜 소릉(召陵)에 이르렀다.

문공 24년 기원전 649년, 문공의 천비 출신의 연길(燕姞)8)이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사람이 내려와 한 줄기의 란(蘭)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꿈을 꾸었다.

「나는 피라미들의 왕인 백조(伯鯈)로 너의 조상이다. 이것으로 너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니 장차 이 나라는 이 란의 향기로 가득 차리라!」

연길이 자기의 꿈 이야기를 문공에게 고했다. 문공이 기뻐하여 연길에게 란초를 주어 부절로 삼게 했다. 이어서 문공과 잠자리를 같이한 연길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란(蘭)이라고 지었다.

문공 36년 기원전 637년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길을 가다가 정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문공이 중이에게 례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문공의 동생 숙첨(叔詹)이 말했다.

「중이는 어진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와는 동성입니다. 곤궁한 처지의 그가 이곳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결코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하를 종횡하고 다니는 제후들의 공자들이 수도 셀 수 없이 많은데 내가 어찌 그들 모두에게 예를 갖추어 모시겠는가?」

「주군께서 중이에게 예를 갖추고 싶으시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잡아서 죽이십시오. 죽이지 않고 그가 만일 복국하여 당진의 군주자리에 오른다면 후에 필시 우리 정나라의 우환 거리가 될 것입니다.」

문공은 그 말도 역시 듣지 않았다.

문공 37년 기원전 636년, 당진의 공자 중이가 복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그해 가을 정나라가 활국(滑國)을 쳐들어갔다. 활국의 군주가 정나라의 명을 받들었다. 그러나 정나라가 물러가자 활국은 배반하고 위(衛)나라에 붙었다. 그래서 정나라가 다시 활국을 정벌하였다. 주양왕(周襄王)이 백비(伯犕)를 정나라에 보내 활국과 화의를 맺도록 권유하였다. 옛날 주나라의 천자 자리에서 쫓겨나 정나라 땅인 력읍으로 도망쳐 왔었던 주혜왕을 그의 부군 정려공은 극진히 모셨었다. 또한 괵공과 힘을 합하여 혜왕을 복위시켜 주왕실에 큰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혜왕이 려공에게 아무런 상급을 내리지 않았던 처사에 대해 정문공은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는 혜왕의 뒤를 이은 주양왕이 일방적으로 활국만을 편들어 화의를 맺으라고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땅치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양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오히려 양왕의 사절 백비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양왕이 노하여 적인(翟人)들을 시켜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해 겨울 적국이 양왕을 공격했다. 양왕이 도망쳐 정나라로 몸을 피했다. 정문공이 양왕을 범(氾)9) 땅에 살게 했다.

문공 38년 기원전 635년, 진문공이 범 땅의 양왕을 모셔다 주나라에 복국시켰다.

문공 41년 기원전 632년,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당진을 공격하였다. 옛날 공자의 신분으로 정나라를 지나가던 진문공을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던 정문공이 진문공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초나라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문공 43년 기원전 630년, 당진의 문공(文公)과 섬진의 목공(穆公)이 힘을 합하여 정성을 포위하였다.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당진을 공격한 일과 진문공이 정나라를 지나갈 때 범한 무례에 대해 죄를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정문공에게는 세 명의 부인에게서 난 다섯 명의 공자들을 총애하고 있었으나 모두 죄를 지어 일찍 죽고 없었다.10) 정문공이 노하여 자하(子瑕)를 위시한 여러 공자들을 나라 밖으로 추방하였다. 그때 공자란(公子蘭)은 당진으로 달아났다. 진문공이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정성을 포위할 때 공자란을 대동하였다. 진문공은 공자란이 당진에 있을 때 자기를 극진한 태도로 모셨기 때문에 그를 매우 총애하였다. 공자란이 당진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음으로 그를 정나라에 귀국시켜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 진문공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온 목적은 그가 옛날 정나라를 지날 때, 정문공에게 그를 죽이라고 조언한 숙첨(叔詹)의 목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정문공이 두려워하였으나 감히 숙첨에게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숙첨이 듣고 정백을 찾아와 말했다.

「신이 옛날 진후(晉侯)가 공자 시절 이곳을 지나갈 때 후대를 하던지 아니면 죽이던지 하라고 간언을 드렸던 이유는 이와 같은 환란이 일어 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군께서 당시 신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결국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진이 우리 정성이 포위되어 우리 정나라의 운명이 경각지간에 달려 있으니 이 숙첨의 한 목숨으로써 나라를 구할 수 있다면 어찌 제가 살기에 연연해하겠습니까?」

숙첨이 말을 끝내고 밖으로 나가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나라 사람들이 숙첨의 시신을 당진의 진영으로 보냈다. 진문공이 말했다.

「내가 반드시 정백의 얼굴을 한 번 보고 내가 당한 치욕을 돌려주어야만 되겠다!」

정나라 사람들이 진문공이 한 말을 전해 듣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섬진의 진영으로 보내어 목공을 알현하여 설득하게 하였다.

「정나라가 함락되면 당진의 세력은 더욱 커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섬진에게는 이로운 점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섬진의 목공이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사를 물리쳐 회군해 버렸다. 진문공이 공자란을 정나라가 세자로 삼는다면 군사를 물리치겠다는 뜻을 통고해 왔다. 정나라 대부 석계(石癸)가 정백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길씨(姞氏)들은 후직(后稷)의 원비가 낳은 후손들이라 합니다. 그 후예들이 당세에 와서 흥성하고 있습니다. 란의 생모인 연길은 길씨들의 후손이니 란을 세워도 무방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부인들이 낳은 공자들은 모두 죽거나 추방당하여 적자 중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남은 서자 중에서 란이 제일 어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정성이 포위되어 사태가 매우 위급한 상황에서 당진이 화의를 청해왔으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정백이 당진의 요청을 받아 들여 맹세를 하고 공자란을 정나라의 세자로 삼았다. 당진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문공 45년 기원전 628년 정문공이 죽고 세자란이 즉위하였다. 이가 정목공(鄭穆公)이다.

목공 원전 기원전 627년 봄 섬진의 목공(穆公)이 세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했다. 섬진의 군사들이 활국(滑國)에 당도했을 때 마침 정나라의 상인인 현고(弦高)라는 사람이 지나가다가 섬진의 군사들을 발견했다. 현고가 주나라에서 사서 정나라로 끌고 가던 12 마리의 소를 정백의 하사품이라고 말하고 섬진의 군사들에게 바쳐 호군하였다. 정나라를 기습하려던 섬진의 장수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이미 탄로 난 것으로 생각하고 군사들을 물리쳐 돌아가다가 효산(殽山)의 험지에서 당진의 매복에 걸려 전멸 당했다. 원래 정문공이 죽자 정나라의 사성(司城) 직에 있던 증하(繒賀)라는 자가 정성의 실정을 섬진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넘겼기 때문에 섬진의 군사들이 출동한 것이다.

목공 3년 기원전 625년 군사를 일으켜 섬진을 공격하려는 당진을 돕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당진과 정나라 연합군은 섬진의 군사들을 왕(汪)11) 땅에서 이겼다. 그 전 해인 목공(穆公) 2년에 초나라의 세자 상신(商臣)이 성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목왕(楚穆王)이다.

목공 21년 기원전 607년에 초목왕은 화원(華元)이 이끄는 송나라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정나라에 쳐들어왔다. 화원이 양을 잡아서 초나라 군사들을 호군하였다. 그러나 화원은 양고기를 자기의 수레를 몰던 어자 양짐(羊斟)에게는 나누어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양짐이 화원이 탄 수레를 정나라 진영으로 몰아 정나라는 화원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송나라가 정나라에 뇌물을 바쳐 화원을 구하려고 했으나 화원은 이미 정나라의 감옥에서 탈출한 다음이었다. 당진이 조천(趙穿)에게 군사를 주어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목공 22년 기원전 606년, 정목공 란이 죽었다. 세자 이(夷)가 뒤를 이었다. 이가 정영공(鄭靈公)이다.

정영공 원년 기원전 605년, 봄에 초나라에서 커다란 자라를 영공에게 보내왔다. 자가(子家)와 자공(子公)12)이 영공에게 조현(朝見)을 드리기 위해 조문 밖에서 만났다. 그때 자공은 자기의 식지(食指)가 좌우로 떨리자 자가를 보고 말했다.

「옛날에 나의 식지가 떨리면 그 날은 반드시 별미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조당으로 들어가 영공을 배알하자 영공이 끓인 자라탕을 내오게 하였다. 자공이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과연 오늘도 별미를 맛보게 되는 구나!」

영공이 자공이 웃는 것을 보고 그 연고를 물었다. 자공이 영공에게 자기의 식지에 대한 일을 고했다. 영공이 듣고 자공에게서 자라탕을 거두어가게 하여 먹지 못하게 했다. 자공이 화를 내며 자라탕에 자기의 식지를 한번 담근 다음 꺼내어 맛을 보고 밖으로 나갔다. 영공이 크게 화를 내며 자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자공과 자가가 모의하여 선수를 써서 그해 여름에 영공을 시해하였다.13)

정나라 국인들이 영공의 동생인 거질(去疾)을 정백으로 앉히려고 하였다. 거질이 사양하며 말했다.

「군주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필히 어질어야 하는제 나는 불초하여 자격이 없습니다. 공자 견(堅)은 연장일 뿐 아니라 어진 사람이니 그를 세움이 순리에 따르는 일입니다.」

견(堅)은 영공의 서제이며 거질의 형이다. 그래서 결국은 견이 정백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가 정양공(鄭襄公)이다.

양공이 정백의 자리에 오르자 목씨(穆氏)의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였다. 목씨는 바로 영공을 죽인 자공의 가족을 말한다. 거질이 양공에게 말했다.

「주공께서 만일 목씨들을 반드시 죽이려고 하신다면 나 역시 이곳에서 떠나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겠습니다.」

양공이 그때서야 목씨들을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 두고 그들을 모두 대부로 임명했다.

양공 원년 기원전 604년, 초나라는 정나라가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화원(華元)을 놓아 준 행위에 노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러 군사를 끌고 쳐들어 왔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등을 돌려 당진에 붙었다.

양공 5년 기원전 599년, 초나라가 다시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당진이 구원군을 보내왔다.

양공 6년 기원전 598년, 자가가 죽자 정나라의 국인들이 영공을 시해한 죄를 물어 그의 가족들을 모두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양공 7년 기원전 597년, 정나라와 당진이 정백을 언릉(鄢陵)으로 불러 회맹하였다.

양공 8년 기원전 596년, 초나라가 당진과 회맹한 정나라를 정벌하러 왔다. 초군이 정성을 석 달 동안 포위하자 양공이 성을 바쳐 초나라에 항복하였다. 정양공은 정성의 황문(皇門)을 통하여 입성한 초왕에게 육단(肉袒)14)을 하고 손에는 양을 끌면서 앞으로 나와 항복하며 말했다.

「저는 변방에 살아 대왕을 잘 모시지 못했기 때문에 대왕께서 노여움을 품으시어 폐읍에 임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저의 죄이라 어찌 감히 전하의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저를 강남(江南)으로 옮겨 살게 하시든, 아니면 폐국을 다른 제후들에게 주어버리시든 오로지 대왕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우리들의 선조이신 려왕(厲王)과 선왕(宣王) 그리고 환공(桓公)과 무공(武公)15)의 후손들을 불쌍히 생각하시어 부디 정나라의 사직을 잇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들에게 불모의 땅이나마 남겨 주시면 저희들은 뉘우쳐 대왕을 섬기겠나이다. 단지 저는 대왕의 처분만을 바라올 뿐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어찌 제가 다른 마듬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저의 진심을 말씀 드렸을 뿐 오로지 대왕의 명만을 받들겠습니다.」

장왕이 듣고 즉시 군사들에게 정성의 포위를 풀고 30리 밖으로 물러가 있으라고 했다. 초나라의 군신들이 말했다.

「우리 군사들은 영성을 출발하여 수천 리를 행군하여 이곳에 이르러 군사들과 장수들은 피로에 지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오늘 정나라를 얻고서도 다시 버리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정나라를 정벌한 이유는 그들이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우리에게 복종을 맹세했으니 무엇을 더 이상 바라겠는가?」

이어서 장왕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로 회군하였다. 초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당진이 군사를 보내 정나라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진의 조정은 의견이 분분하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군사들을 출동시키게 되었다. 당진의 군사들이 하수의 나루에 당도하여 도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초나라의 군사들은 이미 물러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진의 장수들 중 어떤 사람은 하수를 건너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건너지 말고 돌아 가야한다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은 하수를 건너기로 하였다. 초장왕은 당진의 군사들이 하수를 건너 정나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군사를 되돌려 당진의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당진에 반하여 초나라를 도왔다. 초정(楚鄭) 연합군은 당진군을 하상(河上)에서 크게 무찔렀다.

양공 10년 기원전 595년, 당진은 정나라가 배반하여 초나라에 돌아 선 죄를 묻기 위해 정나라를 공격해 왔다.

양공 11년 기원전 594년, 초장왕이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켰다. 송나라가 사태의 위급함을 당진에 고하여 구원군을 청했다. 모사 백종(伯宗)이 당진의 군주에게 말했다.

「하늘이 바야흐로 초나라를 돕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어 초나라와 싸우게 되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이어서 자가 자호(子虎)인 곽인(霍人) 해양(解揚)이라는 장사를 얻어 송나라로 보냈다. 해양은 초나라를 속여 송나라로 하여금 항복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해양이 정나라 경계를 지날 때 정나라 군사들에게 잡혔다. 정나라는 해양을 잡아서 초장왕의 진영으로 압송하였다. 초왕이 해양에게 후하게 대접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로 하여금 송나라를 설득하여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세 번에 걸쳐 장왕이 강요하자 해양이 할 수 없이 허락했다. 그래서 초왕이 해양을 망루가 달려 있는 초거(軺車)에 올라가게 하여 송성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을 향하여 외치게 하였다. 그러나 해양은 초왕과의 약속에 반하여 당진의 군주가 전하라고 한 말을 외쳤다.

「당진의 군사들이 나라 안의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이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다. 송나라의 처지가 비록 급하기는 하다고 하나 조금만 더 참고 싸워 항복하지 않는다면 당진의 구원군이 조만 간에 당도할 것이다.」

초왕이 대노하여 해양을 초거(軺車)에서 끌어내려 죽이려고 했다. 해양이 장왕을 보고 말했다.

「군주는 신하에게 명을 내릴 때는 의(義)로써 해야 하고 신하는 군왕의 명을 신(信)으로써 받들어야 합니다. 제가 당진의 군주가 내린 명을 받았으니 죽는다 한들 제가 버릴 수는 없습니다.」

장왕이 듣고 말했다.

「너는 나의 명을 받들겠다고 이미 허락하고 다시 그것을 어겼다. 너의 신(信)은 어디에 있는 말인가?」

해양이 대답했다.

「왕의 명을 받들겠다고 제가 허락한 것은 저의 군주의 명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윽고 장왕이 해양을 끌고 나가 참수하라고 하자 해양이 주위에 도열하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신하로써 충성을 다하여 군주의 명을 행한 자는 나처럼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잊지 마시오!」

장왕의 동생들이 모두 해양의 죄를 용서하라고 간하였다. 그래서 해양은 방면되어 당진으로 돌아갔다. 당진의 군주는 해양에게 상경의 작위를 내렸다.

양공 18년 기원전 587년 양공이 죽었다. 그 뒤를 양공의 아들 비(沸)가 이었다.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 원년 기원전 586년, 허나라의 영공(靈公)이 초나라에 가서 정나라를 중상하였다. 도공이 자신의 동생 곤(睔)을 초나라에 보내어 정나라의 입장을 변호하게 하였다. 곤의 변명을 수긍하지 않은 초나라는 오히려 곤을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정도공은 초나라를 버리고 당진과 강화했다. 두 나라 사이는 이로써 옛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였다. 한편 초나라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초나라의 자반(子反)16)과 교분을 쌓게 되었다. 자반이 곤을 위해 초왕에게 간하자 곤은 정나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도공 2년 기원전 585년, 초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당진의 군사들이 출동하여 정나라를 구원하였다. 그 해에 도공이 죽자 곤(睔)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정성공(鄭成公)이다.

성공 3년 기원전 582년, 초장왕의 뒤를 이은 초공왕(楚共王)이 말했다.

「내가 옛날에 정성공으로 부터 은덕을 입은 적이 있다.」

이어서 사람을 보내 정나라와 회맹을 맺도록 했다. 성공이 초나라의 요청을 받아드려 비밀리에 초나라 사신과 회맹을 하였다. 그해 가을 정성공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당진으로 들어갔다. 당진의 군주가 성공을 향해 말했다.

「정나라가 우리 몰래 초나라와 회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어서 당진의 군주가 정성공을 붙잡아 돌려보내지 않고 억류시키고 란서(欒西)를 시켜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성공 4년 기원전 581년, 정나라의 국인들은 당진군이 정성을 포위하고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자 공자 여(如)가 주동하여 성공의 서형인 수(繻)를 옹립하여 정백의 자리에 앉혔다. 그해 4월 당진이 정나라가 새로운 군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을 귀국시키려고 하였다. 성공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 국인들은 다시 공자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아드렸다. 당진의 군사들이 정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성공 10년 기원전 575년, 정나라가 당진과의 맹약을 배반하고 초나라와 회맹을 하여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당진)의 려공(厲公)이 분노하여 군사를 보내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초공왕이 정나라를 돕기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당진과 초가 언릉(鄢陵)에서 회전하였다. 초군이 당진군에게 패하였다. 당진군의 장수가 초공왕을 쏘아 그의 한 눈을 멀게 하였다. 쌍방이 하던 싸움을 멈추고 물러갔다.

성공 13년 기원전 572년 당진의 도공(悼公)이 다시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당진군은 유수(洧水)의 강안에 주둔하였다. 정나라가 성안에 틀어박혀 결사적으로 지켰다. 당진군이 지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성공 14년 기원전 571년,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운(惲)이 즉위하였다. 이가 리공(釐公)이다.

리공(釐公) 5년 기원전 566년, 정나라의 상국 자사(子駟)17)가 리공에게 조배를 올리는데 리공이 예를 갖추어 대하지 않았다. 자사가 크게 분노하여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을 매수하여 음식에 독약을 타서 리공을 독살하였다. 자사가 제후들에게 정나라의 상을 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공이 갑자기 폭질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어서 정나라의 국인들은 리공의 아들 공자 가(嘉)를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정간공(鄭簡公)이다. 정간공은 당시 나이가 5살이었다.

간공 원년 기원전 565년, 여러 공자들이 모의하여 자사를 죽이려고 하자 자사가 미리 알고 무리를 모아 오히려 여러 공자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간공 2년 기원전 564년, 당진이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정벌하고 정나라와 회맹을 하고 돌아갔다. 그해 겨울 정나라가 당진을 배반하고 초나라와 다시 맹약을 맺었다. 여러 공자들에게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자사가 당진과 초나라를 번갈아 가며 회맹을 행했기 때문이었다.

간공 3년 기원전 563년, 정나라의 상국 자사가 스스로 정군의 자리에 오르려고 하자 공자 자공(子孔)이 위지(尉止)를 시켜 자사를 죽이고 자기가 상국의 자리에 대신 올랐다. 자공도 역시 간공을 폐하고 자기가 스스로 군위에 오르려고 하자 자산(子産)이 말했다.

「자사가 자기 스스로 군위에 오르려다가 당신에게 살해당했는데 오늘 다시 당신이 자사의 뒤를 따르려 하십니까? 그렇게 되면 정나라의 혼란은 끊일 날이 없게 됩니다.」

자공이 자산을 말을 듣고 정백의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간공 4년 기원전 562년, 당진의 군주는 초나라와 회맹을 한 정나라에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출동시켰다. 초공왕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와서 당진의 군사들과 회전하였다. 당진의 군사들이 초나라 군사들에게 싸움에서 졌다. 정간공이 당진과 수호를 맺으려고 하자 초나라가 알고 정나라의 사자를 가두었다.

간공 12년 기원전 554년, 간공은 제 멋대로 정나라의 국권을 휘두른 자공을 죽이고 자산을 경(卿)으로 삼았다.

간공 19년 기원전 547년, 간공이 당진에 들려 당시 당진국에 억류 중이던 위후(衛侯)의 방면을 청했다. 자산을 6개의 고을에 봉했으나 자산이 사양하며 받지 않다가 3개의 고을만을 받았다.

간공 22년 기원전 543년, 오나라에서 사절로 연릉(延陵) 계자(季子)가 들려 자산을 보더니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즐거워했다. 계자가 자산에게 말했다.

「정나라의 정사를 맡고 있는 사대부들은 모두 요사스러운 사람들뿐이라 머지않아 재난이 닥쳐와서 나라의 대권은 장차 선생의 손안에 떨어 질 것입니다. 선생께서 만일 나라의 정권을 맡게 된다면 반드시 예의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십시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정나라는 필시 참담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자산이 계자를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간공 23년 기원전 543년, 정나라의 여러 공자들이 군주의 총애를 다투다가 란을 일으켜 서로 공격하여 죽였다. 그들이 작당하여 자산까지 죽이려고 하자 공자 중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자산은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정나라가 능히 망하지 않고 사직을 유지할 수 있음은 바로 자산으로 인해서인데 그를 죽이는 일은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공자들이 결국은 자산을 죽일 생각을 거두고 물러갔다.

간공 25년 기원전 541년, 정나라가 자산을 당진에 사절로 보내어 병들어 누워 있는 평공(平公)을 문안하게 하였다. 평공이 자산에게 물었다.

「나의 병에 관하여 점을 쳤는데 점괘가 ‘실심(實沈)과 대태(臺駘)를 받들라’라고 나와 사관도 그 뜻을 모르는데 경은 혹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소?」

자산이 대답했다.

「고신씨(高辛氏)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장자는 이름을 알백(閼伯)이라 했고 차자는 실심(實沈)이라고 했습니다. 두 사람은 깊은 숲속에서 살았는데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매일 창과 칼을 들고 서로 싸웠습니다. 요임금이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알백을 상구(商丘)18)로 옮겨 살게 하고 신성(辰星)19)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습니다. 상(商) 땅의 백성들이 그 제사를 이어 받아 계속 지냈기 때문에 신성을 상성(商星)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요임금이 실심은 대하(大夏)20)로 보내어 삼성(參星)21)에 제사지내도록 했습니다. 당(唐) 땅의 백성들이 이어 받아 삼성에 제사지내며 하(夏)와 상(商)나라를 받들어 오다가 그 말대(末代)를 당숙우가 이어 받았습니다. 무왕의 정비 읍강(邑姜)이 당숙우를 회임 했을 때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천제가 말씀하시기를 ‘ 그대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우(虞)라 짓고 그를 당에 봉하여 삼성의 제사를 계속 지내게 하면 그 자손들을 내가 번성하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윽고 읍강이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갓난아이의 손바닥에 우라는 글자가 써 있어 이름을 우라고 짓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성왕이 당을 멸하고 당숙우를 그곳에 봉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삼성은 진성(晉星)이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실심은 곧 삼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옛날에 금천씨(金天氏)의 후손에 매(昧)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물을 다스리는 신인 현명(玄冥)들의 우두머리로써 윤격(允格)과 대태(臺駘)를 낳았습니다. 대태가 현명의 관직을 이어받아 분수(汾水)22)와 조수(洮水)23)를 통하게 하고 대택(大澤)24)에 제방을 새로 쌓고 태원(太原)에서 살았습니다. 전욱(顓頊) 임금이 대태의 공적을 칭찬하여 포상을 하였습니다. 그에게 상으로 분수 유역의 땅을 분봉하였습니다. 전욱 임금이 계속해서 심(沈), 사(姒), 욕(蓐), 황국(黃國)등의 네 나라 군주에게 명하여 대태의 제사를 관장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지금은 당진이 분수 유역을 통치하면서 그 유역의 국가들을 멸망시켜 자기의 영토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을 헤아려보면 대태는 분수와 조수의 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실심과 대태 두 신령은 모두 군후의 몸을 해칠 수 없습니다. 산천의 신령들에게는 수재나 한발의 재해가 났을 때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의 신들에게는 폭설이 내리고 서리가 때 이르게 내리며 , 폭풍우가 몰아 칠 때 제사를 지내면 됩니다. 군주께서 지금 몸에 병이 나신 이유는 음식을 알맞게 맞추어 드시지 않으시고 기쁨과 슬픔에 너무 빠지시며 여색을 너무 가까이 하셨기 때문에 생긴 병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

평공이 숙향(叔向)을 향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오. 자산이야 말로 진실로 박물군자(博物君子)라 말할 수 있겠소!」

이어서 평공이 좌우에게 명하여 자산을 후하게 대접하게 하였다.

간공 27년 기원전 539년, 여름 정간공이 당진에 조배를 드리러 갔다. 그해 겨울에 포학한 초영왕을 두려워한 정간공이 초나라에 들어가 조현을 올렸다. 자산이 호종하였다.

간공 28년 기원전 538년 정간공이 병이 들었다. 자산이 간공을 대리하여 제후들의 회맹장에 나가서 초영왕과 신성에서 회맹하였다. 초영왕은 회맹장에서 제나라의 경봉(慶封)을 오나라의 주방(朱方)에서 잡아와 여러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시군의 죄를 물어 죽였다.

간공 36년 기원전 530년, 간공이 죽고 그의 아들 녕(寧)이 뒤를 이었다. 이가 정공(定公)이다. 그해 가을에 정공이 당진에 들어가 소공(昭公)에게 조현을 올렸다.

정공 원년 기원전 529년 초나라의 공자 거질(去疾)이 그 군주인 초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초평왕이 중원의 제후들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초영왕이 정나라에게서 빼앗아간 땅을 돌려주었다.

정공 4년 기원전 526년 당진의 소공이 죽었다. 이어서 당진에서는 6경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공실의 힘은 더욱 약해졌다. 자산이 한선자(韓宣子)에게 말했다.

「나라는 반드시 인의와 도덕으로써 다스려야만 그 정권이 공고해지는 법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오!」

정공 6년 기원전 524년, 정나라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정공이 제사를 지내 불을 끄려고 하였다. 자산이 보고 말했다.

「제사를 지내지 말고 몸을 수양하고 덕정을 베푸십시오.」

정공 8년 기원전 522년, 초나라의 태자 건(建)이 정나라로 도망쳐 왔다.

정공 10년 기원전 520년, 초나라의 태자건이 당진과 모의하여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정나라가 미리 알고 태자건을 잡아서 죽였다. 태자건의 아들 미승(羋勝)이 정나라에서 도망쳐 오나라로 갔다.

정공 11년 기원전 519년, 정공이 당진으로 들어가 조현을 올리고 두 군주가 상의하여 주왕실에 반란을 일으킨 역신들을 잡아서 죽이고 주경왕(周敬王)을 호송하여 왕성으로 보냈다.

정공 13년 기원전 517년 정공이 죽었다. 그 아들 채(蠆)가 뒤를 이었다. 이가 헌공(獻公)이다.

헌공이 재위 13년 만인 기원전 510년에 죽고 그의 아들 승(勝)이 뒤를 이어 정백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성공(聲公)이다. 바로 이때 강성해진 당진의 육경이 정나라의 변경을 침략하여 빼앗아 갔다. 이 후로 정나라의 세력은 더욱 쇠미해 졌다.

성공 5년 기원전 496년, 정나라의 상국 자산이 죽었다. 정나라 백성들은 모두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마치 자기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자산을 애도했다. 자산은 정성공의 막내 아들이다. 위인이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의 군주를 충성스럽고 진실 된 마음으로 모셨다. 공자(孔子)가 옛날에 정나라를 지나갈 때에 자산과는 마치 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다. 자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자는 비통하게 곡을 하시면서 말했다.

「자산의 인자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로 고대의 성인들 유풍을 따른 것이다!」

성공 8년 기원전 493년, 당진의 6경 중 범씨(范氏)와 중항씨(仲行氏)가 나라에 반기를 들고 정나라에 도움을 청해 왔다. 정나라가 그들을 도왔다. 당진은 그 일을 인해 정나라를 공격하여 철(鐵)25)이라는 곳에서 정군을 대파하였다.

성공 14년 기원전 487년 송경공(宋景公)이 조(曹)나라 멸하고 송나라 영토로 삼았다.

성공 20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군주인 제간공(齊簡公)을 시해하고 자기 스스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성공 22년 기원전 479년 초혜왕(楚惠王)이 진(陳)나라를 멸했다. 공자가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성공 36년 기원전 465년, 당진의 지백(智伯)이 정나라를 공격하여 9개의 성읍을 빼앗아 갔다.

성공 37년 기원전 464년 성공이 죽었다. 그의 아들 이(易)가 즉위하여 뒤를 이었다. 이가 애공(哀公)이다.

애공 8년 기원전 455년 정나라의 국인들이 애공을 시하고 성공(聲公)의 동생 추(醜)를 정군으로 세웠다. 이가 공공(共公)이다.

공공 3년 기원전 453년, 당진의 한(韓), 위(魏), 조(趙) 삼가가 지백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공공 31년 기원전 424년, 공공이 죽고 그의 아들 이(已)가 즉위하였다. 이가 유공(幽公)이다.

유공(幽公) 원년 기원전 423년 한무자(韓武子)가 정나라를 공격해와서 유공을 죽였다. 정나라 국인들이 유공의 동생 태(駘)를 받들어 정군으로 삼았다. 이가 수공(繻公)이다.

수공 15년 기원전 408년, 한경후(韓景侯)가 정나라를 공격해와 옹구(雍丘)26)의 땅을 빼앗아 갔다. 정나라가 경성(京城)을 수축하였다.

수공 16년 기원전 407년, 정나라가 한(韓)나라를 공격하여 부서(負黍)27)에서 한군을 패주시켰다.

수공 20년 기원전 403년, 한위조 3가가 주왕으로부터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수공 23년 기원전 400년 정나라가 한나라의 양책(陽翟)28)을 포위하였다.

수공 25년 기원전 398년, 정군이 상국 자양(子陽)을 죽였다.

수공 27년 기원전 396년 자양의 잔당이 란을 일으켜 수공(繻公) 태(駘)를 죽이고 유공의 동생 을(乙)을 세웠다. 이가 정군이다.

정군 을(乙) 재위 2년에 부서(負黍) 사람들이 란을 일으켜 그 땅을 한나라에 바쳤다.

정군 11년 기원전 385년, 한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하여 양성(陽城)을 빼앗아 갔다.

정군 21년 기원전 375년 한애후(韓哀侯)가 정나라를 멸하고 한나라의 영토에 복속 시켰다.


태사공이 말한다.

「속담에 ‘권세와 이해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는 것은 결국은 권세와 이해가 다하면 그 관계도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보하(甫瑕)를 두고 한말이다. 보하가 비록 정자를 속인 다음 그를 죽이고 안에서 려공에게 내응하였지만 려공은 오히려 보하를 배신하고 죽였다. 이것은 당진의 리극(里克)과 같은 경우이다. 그러나 순식은 절개를 지켜 몸은 희생시켰지만 그 역시 주인인 해제(奚齊)를 보존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변란이 발생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라고 하는 것이다.」


<정세가 끝>



미주 : 춘추초기 정나라의 군주 계보표


환공(桓公) 정백(鄭伯) 우(友)

기원전 806년 정백으로 시봉

기원전 771년 유왕과 함께 견융의 침입으로 전사했다. 주선왕(周宣王)의 동모제(同母弟)로써 원래는 섬서성(陝西省)의 화현(華縣) 부근에 있던 정(鄭)에 봉해졌다. 후에 환공은 주나라에 환란이 일어 날 것을 예상하고 자기의 봉지를 지금의 하남성 신정시(新鄭市) 부근으로 옮겼다. 서주(西周)의 마지막 왕 유왕(幽王) 밑에서 사도(司徒)의 직에 있다가 침입한 견융(犬戎)과 싸우다 유왕과 함께 전사했다.


무공(武公) 굴돌 (掘突) : 재위 기원전 770- 744

환공(桓公)의 아들로써 정나라에서 봉지를 다스리다가 자기의 부친인 정백(鄭伯) 우(友)가 유왕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주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유왕이 죽자 신국(申國)으로 망명해 있던 폐세자(廢太子) 의구(宜臼)를 데려와 천자의 자리에 즉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주나라의 경사(卿士)의 직에 제수되었다. 의구(宜臼)가 주평왕(周平王)이다. 이어서 정무공은 회국(鄶國)과 동괵을 차례로 멸하여 정나라를 중원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장공(庄公) 오생(寤生) : 재위 743 - 기원전 701년

춘추시대(春秋時代) 초기의 패권(覇權)을 장악하여 일명 소패왕(小覇王)이라고도 불린다. 자기의 생모인 무강(武姜)이 차자인 공숙단과 모의하여 자기를 몰아내고 그를 정백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자 정백이 단을 죽이고 무강을 영(穎) 땅으로 보내 유폐시켰다. 영 땅의 지방관리인 고숙(考叔)이 찾아와 무강을 유폐시킨 것을 잘못이라고 간하여 장공은 무강을 다시 정성(鄭城)으로 데려와 모셨다. 영고숙이 올빼미를 잡아 장공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 새의 이름은 올빼미라 하는 낮에는 태산과 같이 큰 것도 볼수 없지만 밤이 되면 실오라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어 사소한 것에는 밝지만 커다란 대의에는 어두운 새입니다. 어렸을 적에는 그 어미의 적을 먹고 자라지만 크면 그 어미의 몸통을 쪼아 먹습니다. 그래서 이 새를 불효새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잡아서 먹고 있습니다. 鳥名鴞, 晝不見泰山,夜能察秋毫, 明于細而暗于大地,小時其母哺之,旣長 乃啄食其母,此乃不孝之鳥,故捕而食之」

장공은 영고숙의 말을 듣고 유폐시킨 모친을 도성으로 데려와 다시 모셨다.

장공은 슬하에 아들을 넷을 두었는데 그가 죽고 네 아들 사이에 후계자 분쟁이 일어나 정나라의 국세가 기우러져 그 후로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후에 당진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과 초나라로 대표되는 남방 세력간에 벌어진 패권싸움에 휘말려 기원전 375년 전국 칠웅 중 하나인 한(韓)에 멸망당할 때까지 정나라 땅에는 전운이 멈출 날이 없게 된다.


소공(昭公) 홀(忽) : 재위 기원전 701년, 696년-695년

기원전 701년에 정장공의 뒤를 이었으나 그 해에 송나라의 지원을 받은 려공에 의해 축출되었다. 송나라의 장공(庄公) 풍(馮)이 소공의 즉위를 통고하기 위해 사절로 간 정나라의 상경 제족(祭足)을 협박하여 당시 송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장공의 차남 자돌(子突-후에 厲公)을 즉위시키자 소공은 란을 피해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후에 려공과 제족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 제족이 려공을 쫓아내고 다시 소공을 불러들였다. 려공 돌은 채나라로 망명하였다. 소공은 다시 그의 둘째 동생 자미(子亹)와 고거미(高渠弥)의 음모로 살해당하고 그 뒤를 자미가 이었다.


려공(厲公) 돌(突) : 재위 700-696, 680-673년

다시 제족에 의해 쫓겨나 17년 동안 역성(櫟城)에 거하다 680년에 복위하여 673년까지 재위했다. 송장공(宋庄公)이 제족을 협박하여 려공을 정백의 자리에 올릴 때 정나라의 3개성에 대한 할지 약속과 그 밖의 보물과 식량을 바치기로 하고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려공이 할지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송과 전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제족과 틈이 벌어졌다. 려공이 제족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제족의 사위인 옹규(雍糾)와 모의하였으나 옹규의 부인이 알고 친정아버지인 제족에게 밀고하여 옹규는 살해당하고 려공은 채나라로 다시 망명하였다. 채나라의 도움으로 정나라 소유인 력읍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17년간 살며 기회를 노리다가 제환공이 보낸 빈수무(賓須无)의 도움으로 정성으로 들어가 정군 자의(子儀)를 살해하고 정백의 자리에 복귀하였다. 려공이 송장공에게 한 구체적인 약속은 다음과 같다.

1. 송장공(宋庄公)에게 한 약속

割地三城,白璧百雙,黃金萬鎰, 每年 糧穀三萬鍾

2. 제족(祭足)에게 한 약속

國政盡委祭足


자미(子亹) : 재위 694-693년

기원전 695년에 소공 홀을 시해하였으나 제양공의 유인책에 걸려 그 해에 제나라에서 살해당했다.

제족(祭足)이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국내를 비운사이 장군 고거미(高渠弥)가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던 소공을 살해하고 자미를 추대하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정백의 자리를 차지한 자미와 고거미는 제양공에게 정백의 자리를 인정받을 욕심으로 제나라를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제양공의 유인책에 말려든 결과가 되어 두 사람은 그 곳에서 살해당했다. 본국에 남아있던 제족은 진(陳)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자의(子儀)를 데려가 정백으로 옹립하였다.


자의(子儀) : 재위 기원전 695- 680년

자미가 제나라에서 제양공에 의해 살해당하자 제족에 의해 추대되어 정백의 자리에 올랐으나, 제환공의 도움을 받은 려공의 공격과 부가(傅假="甫瑕)및" 숙첨(叔詹)의 이반으로 려공에게 살해당했다.


려공(厲公)

정나라 변경 지방인 력읍에 17년간 살면서 정백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제환공과 제후들의 도움으로 복국에 성공하여 7년간을 재위에 있다가 죽었다. 그 뒤를 아들 문공(文公) 첩(捷)이 이었다.


주석


1) 정환공(鄭桓公)/ 제후연표(諸侯年表)에는 주선왕(周宣王)의 동모제(同母弟)라 했고 있고 정세가(鄭世家) 본문에는 서제(庶弟)라고 했다.

2) 정(鄭)/ 원래 정환공이 피봉된 정(鄭)이라는 곳은 당시 서주의 왕도(王都)였던 호경(鎬京)에서 동쪽으로 100키로 떨어진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 부근이었다.

3) 괵(虢)

주문왕(周文王)의 동생들인 숙(叔)과 중(仲)이 각각 동괵(東虢)과 서괵(西虢)에 봉해졌다. 서괵이 후에 동천(東遷)하는 주평왕(周平王)을 따라 같이 동쪽으로 옮겨 북괵이 되고 원래 서괵의 자리에는 잔존세력이 나라를 세워 소괵(小虢)이라 했다.

동괵(東虢)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의 동북에 있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졌다. 후에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게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했다.

서괵(西虢)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보계시(寶鷄市) 부근의 제후국으로 주문왕의 동생 중(仲)이 봉해졌다. 주평왕(周平王)이 낙읍으로 동천할 때 지금의 하남성 섬현(陝縣) 이가요(李家窯)인 상양성(上陽城)으로 나라를 옮겼다.

북괵(北虢)

서괵이 상양성으로 옮긴 나라를 북괵이라 부르다가 주혜왕(周惠王) 22년 기원전 665년 당진(唐晉)의 헌공(獻公) 때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의해 멸망당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소괵(小虢)

주나라가 천도할 때 따라가고 남은 서괵의 잔존세력이 세운 나라를 서괵이다. 주장왕(周庄王) 10년 기원전 687년 섬진(陝秦)의 무공(武公)에 의해 멸망당했다.

4) 회국(鄶國)/ 회(檜)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남성 신밀시(新密市) 동남에 있던 제후국으로써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하고 정나라에 병합되었다.

5) 팽전(祊田)/ 세금을 받아 종족의 선조들에게 지내는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는 전답이다. 주선왕이 전환공을 정나라에 봉할 때 태산에 지내는 제사를 맡기고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태산 주위의 전답을 하사한 땅이다.

6) 허전(許田)/ 주무왕이 노에 봉한 주공단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경사에 들릴 때 들어가는 비용을 충당하라고 하사한 탕목읍(湯沐邑)으로 허나라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허전이라고 불렀다.

7) 수지(首止)/ 정나라와 가까운 위(衛)나라 땅.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동남.

8) 연길(燕姞)/ 연 나라 출신의 길(姞) 성을 가진 여인.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동북쪽에 있었던 조그만 제후국으로써 북경 근처의 연(燕)과는 다른 나라이다. 후에 사람들이 연(燕)과 구분 짓기 위해 남연(南燕)이라고 불렀다. 연국의 시조 백조(伯鯈)는 황제(黃帝)의 후예로 전한다.

9) 범(氾)/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부근에 있던 정나라의 영지

10) 춘추좌전(春秋左傳) 노선공(魯宣公) 3년 조의 기사에 다섯 아들 중 두 아들은 죄를 얻어 살해당하고 한 아들은 일찍 요절했으며 또 한 아들은 초나라와의 외교문제로 인하여 짐독(鴆毒)을 먹여 죽였다. 그리고 자하(子瑕)라는 공자만 남았는데 문공이 무척 싫어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처럼 다섯 아들이 모두 총애를 받지도, 모두 요절하지도, 또한 죄를 얻어 살해되지도 않았다. 정문공에게 살해당한 아들들은 세자 자화(子華)와 그의 동생 자장(子臧)이다.

11) 원전은 ‘패진병우왕(敗秦兵于汪)’이다.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집의(史記集疑)에 의하면 ‘진패진팽아(晉敗秦彭衙), 취진왕읍(取秦汪邑)’의 잘못이라고 했다. 즉 ‘당진이 섬진에게 팽아에서 이기고 섬진의 고을인 왕읍을 빼앗았다.’고 했다. 팽아는 지금의 섬서성 동부의 징성현(澄城縣) 북서고 왕읍은 징성현 성구(城區)다.

12) 자가(子家)는 귀생(歸生)의 자이고 자공(子公)은 송(宋)의 자이다.

13)이 고사는 큰 자라를 삶은 솥이라는 뜻의 원정(黿鼎)이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즉 자라탕과 같은 사소한 음식으로 란을 일으킨 다는 뜻이다.

14) 육단(肉袒)/ 고대에 제후나 왕이 상대방에게 항복할 때 윗옷을 벗거 목에는 줄을 동여 메어 자기의 운명을 상대방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

15) 려왕(厲王)은 정환공(鄭桓公)의 부왕이고, 선왕은 동생인 정환공을 정(鄭)에 봉했다. 정나라를 세운 사람은 정환공이고 정무공은 정환공의 아들로써 정나라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다. 즉 이 네 사람은 모두 정나라의 창건에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다.

16) 초장왕과 초공왕 때 사마를 지낸 공자측(公子側)의 자다. 초목왕의 아들로 초장왕에게는 형제가 된다.

17)자사(子駟)등은 목공(穆公)의 후예들인 칠목(七穆)의 하나다. 정목공 란(蘭)에게는 모두 13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영공(靈公) 이(夷)는 살해되고 양공(襄公) 견(堅)이 그 뒤를 이어서 나머지 공자들은 모두 열 한 명이었다. 7목과 나머지 4명의 공자들 이름은 다음과 같다.

자량(子良) 거질(去疾)/ 자한(子罕) 희(喜)/ 자사(子駟) 비(騑)/ 자국(子國) 발(發)/자공(子孔) 가(嘉)/ 자유(子游) 언(偃)/ 자인(子印) 서(舒)의 칠목과 우(羽), 연(然), 지(志) 등이다.

목공 이후의 정나라 군주의 계보를 정리해 보면 목공의 뒤를 이어 그 적장자인 영공(靈公)이 섰으나 자라탕 사건 즉 원정(黿鼎) 사건으로 공자송에게 살해당하고 그의 서형인 양공이 뒤를 이었다. 양공이 그 후사를 아들 도공(悼公) 비(沸)에게 물려주었으나 재위 2년 만에 죽고 양공의 동생 성공(成公) 곤(睔)이 뒤를 이었다. 자사에게 독살 당한 리공(釐公)은 자사의 손자뻘이다.

18) 상구(商丘)/ 현 하남성 상구시 부근. 상나라의 시조 설(契)이 살았던 곳이다. 주공이 은나라의 반란을 진압하고 주왕의 서형인 미자개를 상구에 봉하고 은나라의 종묘를 모시도록 하여 송나라의 기원이 되었다.

19) 진성(辰星)/ 심수(心宿)을 말하며 상성(商星) 혹은 대화(大火)라고 부르며 28 수(宿)의 하나

20) 대하(大夏)/지금의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太原市) 서남. 일설에는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부근이라고도 한다.

21) 삼성(參星)/ 28 수(宿) 중의 하나다. 삼상(參商)은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을 말한다. 요 임금이 알백(閼伯)을 상구로 보내 제사 지내게 한 별은 상성(商星)이고 그 동생인 실심(實沈)을 대하(大夏)로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한 별은 삼성(參星)이다. 상성(商星)은 동쪽을 가리키는 묘(卯) 방향의 별을 말하며 삼성(參星)은 서남쪽의 가리키는 신(申) 방향의 별로 두 별은 동시에 볼 수 없어 「헤어진 후 서로 볼 수 없거나 또는 형제의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2) 분수(汾水)/내몽고에서 발원하여 산서성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황하의 지류.

23) 조수(洮水)/지금의 산서성 강현(絳縣) 서남쪽으로 흐르던 강 이름

24) 대택(大澤)/대태현을 말하며 지금의 산서성 태원시(太原市) 남쪽에 위치했던 지방

25) 철(鐵)/지금의 하남성 복양현(僕陽縣) 서남

26) 옹구(雍丘)/ 현 하남성 기현(杞縣) 부근

27) 부서(負黍)/ 전국 때 한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登封縣) 서남

28) 양적(陽翟)/ 전국 때 한지(韓地)로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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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세가(陳杞世家) 호공(胡公) 만(滿)은 우순(虞舜)의 자손이다. 예전에 순이 평민의 신분이었을 때 요임금이 그의 두 딸을 그의 처로 주어 규예
양승국 04-05-12
[일반] 조세가(趙世家) 13

조세가(趙世家)13 조씨들의 선조들은 섬진(陝秦)과 같은 조상들이다. 중연(中衍)1)의 대에 이르러 은나라의 대무제(大戊帝)2)의 수레를 모는 어자
운영자 08-04-19
[일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4.조참(曹參)

세가24. 조참(曹參)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沛) 출신으로 진나라 때 패현의 옥리였다. 그때 소하(蕭何)는 패현 관아의 아전들 중 선임
운영자 12-08-04
[일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강제(姜齊)

세가2. 강제(姜齊)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양승국 04-05-12
[일반]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2. 유비(劉肥)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는 고조가 경혼하기 전에 정
운영자 12-08-04
[일반] 정세가(鄭世家) 12

정세가(鄭世家)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운영자 08-04-17
[일반]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6. 전제(田齊)

전제세가(田齊世家)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진타(陳他)의 아들이다. 완이 태어날 때에 주나라 태사가 마침 진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운영자 09-02-17
[일반] 유후세가(留侯世家) 25.장량(張良)

留侯張良世家25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선조는 한(韓)나라 귀족이다. 그 조부 한개지(韓開地)는 한소후(韓昭侯)1)와 선혜왕(宣惠王)2)
운영자 12-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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