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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49:517301 
진세가(晉世家) 9. 진(唐晉)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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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9. 진(晉)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봉했다.

828. 君子譏名(군자기명),

그러나 문후 때에 이르자 이름의 순서가 바뀌어

829. 卒滅武公(졸멸무공).

결국은 분봉된 동생의 나라 출신인

무공이 본국을 멸하고 말았다.

830. 驪姬之愛(려희지애),

후에 진헌공은 여희(驪姬)에 빠져

831. 亂者五世(란자오세);

다섯 군주의 치세 동안 진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832. 重耳不得意(중이부득의),

중이는 오랫동안 뜻을 얻지 못하다가

833. 乃能成覇(내능성패).

19년 동안의 유랑생활 끝에 결국은 패업을 이루게 되었다.

834. 六卿專權(육경전권),

진나라가 강성하게 되자 육경이 권력을 독점하여

835. 晉國以秏(진국이모).

진나라는 끝내는 그 힘을 다하게 되었다.

836. 嘉文公錫珪鬯(가문공석규울),

진문공이 주천자로부터 옥으로 만든

규(珪)와 울창주(鬱鬯酒)를 하사 받은 것을 칭송하여

837. 作<晉世家>第九(작<진세가>제구).

<진세가>제구를 지었다.

당진(唐晉)의 당숙우(唐叔虞)는 주성왕의 동생으로 주무왕의 아들이다. 옛날 무왕과 숙우의 모친1)이 서로 만났을 때 꾼 꿈을 무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했었다.

「내가 너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여 이름을 우(虞)라 하고 당(唐) 땅에 그를 봉하도록 하겠다.」

이어서 숙우의 모친이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손바닥에 ‘우(虞)’라는 글자가 써있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하늘의 명에 따라 우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고 성왕이 뒤를 잇자 당이 반란을 일으켰음으로 주공이 멸했다. 성왕과 숙우가 서로 장난치며 놀다가 오동잎을 따서 규(珪)2) 모양으로 만들어 숙우에게 주면서 말했다.

「내가 이 규로써 너를 당에 봉하노라!」

곁에 있던 사일(史佚)이 듣고 택일하여 숙우를 당에 봉하라고 청했다. 성왕이 사일에게 말했다.

「나는 단지 동생과 놀이를 하면서 장남 삼아 한번 해 본 것뿐입니다.」

사일이 대답했다.

「천자에게는 희언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은 바로 사서에 기록되며 말씀하신 것으로써 예를 완성하며 또한 음악을 만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성왕이 사일의 청에 따라 숙우를 당에 봉했다. 당은 하수(河水)의 동쪽에 있으며 분수(汾水) 유역의 사방 백리의 땅이다. 그래서 숙우를 당숙우(唐叔虞)라 부르게 되었다. 당숙우의 성은 주왕실과 같은 희(姬) 성이며 자는 자우(子于)다.

당숙의 아들은 섭(燮)인데 이가 진후(晉侯)다. 진후의 아들은 영족(寧族)인데 이가 무후(武侯)이다. 무후의 아들은 복인(服人)이며 이가 성후(成侯)이다. 성후의 아들은 복(福)이다. 이가 려후(厲侯)이다. 려후의 아들은 의구(宜臼)인데 이가 정후(靖侯)이다. 정후 이후로는 재위 연대를 추정할 수 있으나 당숙우부터 정후에 이르기까지의 5대는 그 연기(年紀)를 알 수 없다.

정후 17년 기원전 842년 주나라 려왕(厲王)이 정신이 혼미할뿐만 아니라 포학하여 국인들이 란을 일으켰다. 이에 주려왕은 도망쳐 체(彘) 땅으로 몸을 피했다. 왕이 없는 주나라는 대신들이 상의하여 다스렸다. 이 시기를 공화3)라고 한다.

정후 18년 기원전 841년 정후가 죽고 그의 아들 리후(釐侯)가 뒤를 이었다. 리후는 주나라의 사도(司徒)4)가 되었다.

리후 14년 기원전 827년 주선왕(周宣王)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리후 18년 기원전 823년 희후가 죽고 그의 아들 헌후(獻侯) 적(籍)이 뒤를 이었다.

헌후가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812년에 죽고 그의 아들 목후(穆侯) 비왕(費王)이 뒤를 이었다.

목후 4년 기원전 808년 제나라 군주의 딸을 데려와 부인으로 삼았다.

목후 7년 기원전 805년 조(條)5)를 정벌했다. 태자를 낳아 이름을 구(仇)라고 지었다.

목후 10년 기원전 802년 천무(千畝)6)를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이 해에 작은아들을 낳아 이름을 성사(成師)라고 지었다. 당진 사람 사복(師服)이 이 일을 두고 말했다.

「괴이한 일이로다, 군왕의 명이여! 태자의 이름을 원수라는 뜻의 구(仇)라 하고 작은아들의 이름을 성사(成師)라 했으니 성사는 대명(大名)이라 후에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에게 이름은 그 사람 자신의 운명을 뜻하고, 사물의 이치란 스스로의 규정을 갖고 있는 법이다. 지금 적장자와 서자가 취한 이름이 서로 상반되었으니 이는 후에 당진국에 변란이 일어날 단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목후 27년 기원전 785년 목후가 죽고 그의 동생 상숙(殤叔)이 태자 구를 대신하여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태자 구(仇)는 몸을 피해 나라 밖으로 도망쳤다.

상숙 3년 기원전 782년 주선왕이 죽었다.

상숙 4년 기원전 781년 목후의 태자 구가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상숙을 습격하여 죽이고 당진국의 군주 자리를 찾았다. 이가 문후(文侯)이다.

문후 10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周幽王)은 어리석고 무도했기 때문에 견융(犬戎)이 쳐들어와 살해하였다. 주나라는 동쪽의 낙읍으로 나라를 옮겼다. 섬진의 양공(襄公)이 피봉 되어 제후의 반열에 서기 시작했다.

문후 35년 기원전 746년, 문후 구(仇)가 죽고 그의 아들 소후(昭侯) 백(伯)이 즉위하였다.

소후 원년 기원전 745년 문후의 동생 성사(成師)를 곡옥(曲沃)에 봉했다. 곡옥이 번성하여 당진의 도성인 익성(翼城)보다도 더 커졌다. 성사가 곡옥에 피봉 되자 환숙(桓叔)이라고 불렀다. 정후(靖侯)의 서손(庶孫)인 란빈(欒賓)이라는 사람이 환숙을 보좌하여 곡옥을 잘 다스렸다. 당시 환숙의 나이는 이미 58세였는데 덕을 숭상하고 백성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당진의 백성들 마음은 모두 환숙에게 쏠리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를 두고 말했다.

「당진의 동란은 곡옥에서 일어나게 되어있다. 말(末)이 본(本)보다 커져 백성들의 마음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어찌 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소후 7년 기원전 739년 당진의 대신 반보(潘父)가 자기의 군주인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의 환숙을 불러들여 당진의 군주로 세우려고 했다. 환숙이 반보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진의 도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당진의 국인들이 군사를 일으켜 환숙을 공격하였다. 환숙은 어쩔 수 없이 익성(翼城)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곡옥으로 다시 돌아갔다. 당진의 국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소후의 아들 평(平)을 옹립하여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효후(孝侯)다. 당진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효후가 반보를 죽였다.

효후 8년 기원전 732년 곡옥의 환숙이 71세의 나이로 죽고 그의 아들 선(鱓)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의 장백(庄伯)이다.

효후 15년7) 기원전 725년 곡옥의 장백이 익성으로 들어가 효후를 살해했다. 당진의 국인들이 군사를 일으켜 장백을 공격하했. 장백은 다시 익성에서 후퇴하여 곡옥으로 돌아갔다. 당진의 국인들이 의논하여 다시 효후의 아들 극(郄)을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악후(鄂侯)다.

악후 2년 기원전 722년 노은공(魯隱公) 강(剛)이 즉위했다.8)

악후가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718년에 세상을 뜨자 곡옥의 장백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익성을 공격했다. 주평왕(周平王)이 괵공(虢公)에게 군사를 주어 곡옥의 장백을 토벌하게 했다. 장백은 익성에서 철수하여 곡옥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당진의 국인들이 극(郄)을 다시 군주로 세웠다. 이가 애후(哀侯)9)이다.

애후 2년 기원전 716년, 곡옥의 장백이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 칭(稱)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 무공(武公)이다.

애후 6년 기원전 712년, 노나라 사람이 자신들의 군주인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애후 8년 기원전 710년, 당진이 형정(陘廷)10)을 침범하자 형정의 백성들이 곡옥의 무공과 힘을 합하여 반격해왔다.

애후 9년 기원전 709년, 형정과 무공의 연합군은 당진을 공격하여 분하(汾河)의 강변에 이르러 애후를 사로잡아 갔다. 당진의 국인들은 애후의 아들은 소자(小子)를 군주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소자후(小子侯)다.

소자 원년 기원전 708년 곡옥의 무공이 한만(韓萬)을 시켜 포로로 잡혀있는 애후를 죽이게 했다. 곡옥은 더욱 강성해졌다. 본국이지만 힘이 약한 당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당진의 소자 원년 기원전 706년, 곡옥의 무공이 소자(小子)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주환왕(周桓王)이 괵중(虢仲)에게 명하여 곡옥의 무공을 토벌하라고 하였다. 무공은 다시 곡옥으로 돌아갔다. 애후의 동생 민(緡)이 그 뒤를 이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진후(晉侯) 민(緡) 4년 기원전 703년 송나라가 정나라의 제중(祭仲)을 잡아서 가두고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자돌(子突)을 앉히라고 위협했다.

진후(晉侯) 19년 기원전 688년 제나라 사람 관지보(管至父)가 그 군주인 제양공(齊襄公)을 살해했다.

진후 28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패자를 처음으로 칭하기 시작했다. 곡옥의 무공이 다시 진후 민을 공격하여 익성의 당진국을 멸하고 당진의 보기와 재물을 모두 가져가 주리왕(周釐王)에게 뇌물로 바쳤다. 이에 주리왕은 무공을 당진의 국군에 봉했다. 이로서 곡옥의 무공은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무공은 당진의 영토를 모두 합병하여 자기의 소유로 했다.

곡옥의 무공은 장백의 뒤를 잇은 지 37년 만에 당진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무공이 비로소 그 도성을 진성(晉城)으로 옮겼다11). 옛날 모공이 곡옥에서 즉위한 기간을 통산하여 38년 되던 해였다.

무공 칭은 당진 목후(穆侯)의 증손(曾孫)이고 곡옥에 봉해진 환숙의 손자이다. 그리고 장백의 아들이다. 환숙이 처음에 곡옥에 봉해진 이래 통산 67년만에 무공은 당진을 멸하고 대신하여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무공이 당진을 대체한지 2년만에 죽고 그의 아들 헌공(獻公) 궤(詭)가 뒤를 이었다. 무공은 곡옥에서 즉위하여 통산 39년을 재위에 있었다.

헌공 원년 기원전 676년, 주혜왕(周惠王)의 동생 퇴(頹)가 반란을 일으키자 혜왕은 도망쳐 정나라의 력읍(櫟邑)에 머물렀다.

헌공 5년 기원전 672년, 헌공이 여융(驪戎)12)을 정벌하여 그 군주의 딸인 여희(驪姬) 자매를 얻었다. 헌공이 여희 자매를 모두 모두 총애하였다.

헌공 8년 기원전 669년 당진의 대부 사위(士蔿)가 헌공)에게 간했다.

「당진은 원래 공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죽이지 않으면 후에 필시 나라에 동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헌공은 사람을 보내 공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을 새로 쌓아 백성들을 모이게 하여 당진의 도성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이름을 강성(絳城)이라고 짓고 처음으로 강성을 당진의 도성으로 삼았다.

헌공 9년 기원전 668년, 수많은 당진의 공자들이 도망쳐 괵국(虢國)으로 망명했다. 괵공이 망명한 당진의 공자들과 함께 당진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헌공 10년 기원전 667년, 헌공이 괵국을 정벌하려고 하자 사위가 간하며 말렸다.

「괵국에서 필시 란이 일어날 예정이니 그때까지 잠시 기다리십시오.」

헌공 12년 기원전 665년, 여희가 아들을 낳아 해제(奚齊)라고 이름 지었다. 헌공이 태자를 폐하고 해제를 세우려는 생각에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곡옥(曲沃)은 우리들의 종묘가 있는 곳이고, 포(蒲) 땅은 섬진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고을이다. 또한 굴(屈) 땅은 적(翟) 땅에 임해있다. 이 세 곳에 공자들을 보내어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다.」

그래서 태자 신생(申生)은 곡옥로, 공자 중이(重耳)는 포 땅으로, 다른 공자 이오(夷吾)는 굴 땅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헌공과 여희는 그 어린 아들 해제만을 강성에 머물게 했다. 당진의 국인들은 이로써 태자가 군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태자 신생의 모친은 제환공의 딸이며 제강(齊姜)이라고 불렀으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다. 신생의 동모 여동생은 섬진의 목공(穆公)에게 시집가서 그의 부인이 되었다. 중이의 생모는 적국 호씨(狐氏)의 딸이고 이오의 모친은 중이를 낳은 호녀(狐女)의 동생이다. 헌공은 아들을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중 태자 신생과 중이 및 이오가 모두 현능하고 덕이 높았으나 헌공이 여희를 얻고 나서부터는 이 세 아들과는 거리가 소원해지게 되었다.

헌공 16년 기원전 661년 헌공이 당진의 군사 조직을 상하 이군(二軍)으로 나누었다. 헌공은 상군을 맡고 태자 신생에게는 하군을 맡게 했다. 조숙(趙夙)을 자기가 타는 수레의 어자로 삼고 필만(畢萬)은 차우장군(車右將軍)을 시켰다. 헌공이 출정하여 곽(霍), 위(魏), 경(耿)을 멸하고 돌아왔다. 태자 신생을 위해 곡옥에 성을 축조하고 조숙(趙夙)과 필만을 대부로 삼고 각각 경(耿)과 위(魏) 땅을 봉지로 하사하였다. 사위가 태자 신생을 찾아가 간했다.

「어쨌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시지 못할 태자님에게 도성에 버금가는 대성과 경에 해당하는 작위를 받았으니 그 지위는 극에 달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어찌 이보다 더 높은 지위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다른 나라로 도망쳐 죄가 미치지 않은 곳으로 몸을 피하심이 어떻겠습니까? 주문왕의 형 되시는 오태백(吳太伯)과 우중(虞仲)13)의 전례를 따르신다면 그것도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생이 사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무인(巫人)들의 일을 관장하는 대부 곽언(郭偃)이 점을 쳐보더니 말했다.

「필만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크게 번성할 점괘다. 만(萬)이라는 말은 꽉 찬 숫자를 말한다. 위(魏)라는 말은 크고 높다는 뜻이다. 위(魏) 땅을 필만(畢萬)에게 주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필만을 돕기 때문이다. 천자는 조(兆)에 해당하는 백성들을 다스리며 제후들은 만인(萬人)의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오늘 하늘이 필만에게 대명(大名)을 내렸으니 이것은 조만 간에 그 수를 가득 채우게 되어 필시 많은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

일찌기 필만이 당진에서 평민으로 살고 있을 때 자기의 관운에 대해 산가지 점을 쳐서 둔순(屯淳)의 괘(卦)와 변성(變成)으로 비괘(比卦)를 얻었다. 신료(辛廖)라는 사람이 점괘의 뜻이 풀이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점괘는 매우 길하다. 둔(屯)이라는 말은 견고하다는 말이다. 비(比)라는 말은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어떤 괘가 이보다 길하겠는가?14) 그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번성한다는 점괘다.」

헌공 17년 기원전 660년 당진이 태자 신생을 시켜 동산(東山)씨를 정벌하게 하였다. 리극(里克)이 헌공에게 간했다.

「태자는 종묘에 지내는 총사(冢祀)15) 및 사직에 올리는 제품과 군주가 드는 음식을 아침저녁으로 검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태자를 부르기를 총자(冢子)16)라 합니다. 나라의 군주가 도성 밖으로 출행을 나갈 때는 태자는 마땅히 도성에 남아 나라를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이 대신 도성을 지키게 되면 태자는 군주를 뒤따라가서 수종(隨從)하여야 합니다. 군주의 뒤를 따르는 일을 무군(撫軍)이라 하며 도성에 남아 나라를 지키는 것을 감국(監國)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도입니다. 군사를 통수하는 일은 필히 온 마음을 다하여 도모하고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이며, 군사들에게 호령을 발하는 것은 군주와 정경의 고유한 권한과 직책이지 태자가 상관한 일은 아닙니다. 군사의 일이란 명을 내리고 받드는 일에 달려 있으니 명령을 받아 행하면 위엄을 갖추기 어렵고 제멋대로 행하면 불효가 됩니다. 그래서 군주의 뒤를 이를 적장자는는 군사를 지휘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군께서 그 군사를 통솔하는 지위를 태자에게 넘겨 군사들을 부릴 때 위엄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면 장차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헌공이 말했다.

「나에게 아들이 여럿이 있는데 누구를 태자로 봉해야 하겠소?」

리극이 헌공의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당에서 물러 나와 태자를 찾았다. 태자가 리극을 보고 물었다.

「내가 장차 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겠는가?」

리극이 대답했다.

「태자께서는 오로지 노력하시어 군사의 일만을 배우시고 공경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게 노력하신다면 어찌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되겠습니까? 동시에 태자께서는 불효를 행하게 되는 경우만을 걱정하시고 절대 군위에 오르지 못할까하는 걱정을 하시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몸을 수양하시고 남을 원망하시지 않으시면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자가 군사를 통솔하는 장수로 취임하자 헌공이 태자에게 좌우 색갈이 다른 옷17)과 병권을 상징하는 금결(金玦)18)을 하사하였다. 리극(里克)은 병을 핑계로 태자를 따라 종군하지 않았다. 태자는 군사들을 이끌고 동산씨(東山氏)를 정벌(征伐)하여 군공을 세웠다.

헌공 19년 기원전 658년 헌공이 말했다.

「옛날 우리들의 선군이신 장백(庄伯)과 무공(武公)께서 당진의 동란을 평정하실 때 괵국은 항상 당진을 도와 우리를 공격했다. 그리고 도망친 당진의 공자들을 숨겨두고 후에 란을 일으키려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 우리가 정벌하지 않으면 후에 우리나라에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

이어서 순식(荀息)을 시켜 굴(屈) 땅의 명마(名馬) 네 마리를 우공(虞公)에게 선물로 주어 빌린 길을 이용하여 괵국을 정벌하고 그 도성인 하양성(下陽城)을 점령했다.

헌공이 여희에게 말했다.

「내가 태자를 폐하고 해제(奚齊)를 대신 세우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는가?」

여희가 듣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신생을 태자로 세운 일은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또한 태자는 이 나라의 군사 절반을 휘하에 두고 있으며 백성들은 즐거이 태자를 즐거이 따르고 있는데 어찌 천한 계집의 소생으로 인하여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려고 하십니까? 주군께서 기어이 태자를 폐하시려 하신다면 소첩은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여희가 마음과는 달리 입으로는 태자를 칭찬하였으나 암암리에 사람들을 시켜 태자를 참소하도록 하여 자기의 소생인 해제를 세우려고 하였다.

헌공 21년 기원전 656년 여희가 곡옥에 있는 태자에게 사람을 보내 말을 전하게 했다.

「부군께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제강을 보셨소. 태자는 속히 곡옥에서 모친께 제사를 올리고 그 음식을 부군께 드시도록 하시오.」

태자가 여희의 말을 믿고 그의 모친인 제강에게 제사를 올리고 그 고기와 술을 헌공에게 바쳤다. 그 때 헌공은 사냥을 나가 궁 안에 없었기 때문에 제사고기는 궁중에 보관했다. 그 사이에 여희가 사람을 시켜 제사고기와 술에 독약을 넣었다. 이틀 후에 헌공이 사냥터에서 돌아왔다. 궁중의 요리사들이 제사고기와 술을 헌공에게 바쳤다. 헌공이 술을 따라 마시려고 하자 여희가 가까이 다가와 제지하며 말했다.

「제사를 지내고 보내온 음식은 멀리서 왔음으로 마땅히 검사를 해보고 드셔야 합니다.」

여희가 헌공이 마시려던 술잔의 술을 땅 위에 쏟자 땅바닥의 흙이 부풀어 올랐다. 이어서 제사고기를 개에게 던지자 개가 줏어 먹고 죽었다. 다시 내시에게 고기를 먹이자 내시가 죽었다. 여희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태자가 어찌 이리 잔인하단 말입니까? 그 부친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하려고 하니 다른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주군께서 이미 나이가 들어 조석지간에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어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독약을 먹여 시해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다시 헌공을 향해 말을 이었다.

「태자의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 생각하면 이 첩과 어린 해제의 운명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습니다. 원컨대 저희 모자를 먼 타국으로 몸을 피하게 해주십시오. 아니면 우리 모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후에 태자에게 잡혀 어육(魚肉)이 되는 신세나 면하겠습니다. 옛날에 주군께서 태자를 폐하신다고 할 때 첩이 말렸던 일이 한이 됩니다. 이제 일이 오늘에 이르니 이 소첩이 스스로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자가 전해 듣고 신성으로 달아났다. 헌공이 노하여 태자의 태부였던 두원관(杜原款)을 죽였다. 어떤 사람이 태자에게 말했다.

「음식 속에 넣은 독약은 여희의 소행이라! 태자는 어찌하여 부군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 결백을 밝히지 않습니까?」

「부군께서는 여희가 없으면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음식도 맛있게 드시지 못합니다. 또한 내가 용서를 구하면 부군께서는 크게 노하실 것이니 결코 결백을 밝힐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태자 앞으로 나와 권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로 일단 몸을 피했다가 후일을 기약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가 죄를 지어 악명이 높은데 어느 나라가 나를 받아 주겠소?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 외는 다른 수가 없겠소.」

결국 신생은 그해 12월 무신(戊申) 일에 신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중이와 이오는 헌공에게 조례를 드리기 위해 강성에 들어와 있었다. 어떤 자가 여희에게 말했다.

「두 공자는 신생을 죽게 만들었다고 부인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여희가 듣고 두려워하여 두 공자를 헌공에게 참소하였다.

「신생이 제사 음식에 독약을 넣은 일을 두 공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중이와 이오가 듣고 각기 자기가 지키던 포성과 굴성으로 달아나 그곳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키려고 하였다. 옛날에 헌공이 사위를 시켜 두 공자를 위해 포성과 굴성에 성곽을 축조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현장에 간 사위는 성곽 공사의 시행을 게을리 했다. 이오가 헌공에게 고하자 헌공이 노하여 사위를 불러 질책했다. 사위가 사죄를 하며 말했다.

「변경에 사는 작은 도적 때문에 대성을 쌓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이어서 헌공 앞에서 물러 나온 사위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狐裘蒙茸(호대몽용)

여우털로 만든 갖옷이 어수선하구나!

一國三公(일국삼공)

한 나라에 주인이 셋이 있으니

吾誰適從(오수적종)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꼬!

사위는 결국 굴성으로 돌아가 성곽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신생이 죽자 두 공자가 각기 자기들의 성으로 돌아와 헌공의 토벌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헌공 22년 기원전 655년, 헌공은 자기에게 인사도 없이 두 성으로 달아난 것은 두 공자가 신생과 함께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헌공이 군사를 우선 포성으로 보내 중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포성의 토벌을 위해서 이름을 발제(勃鞮)라고 부르던 환관을 보냈다. 그는 포성에 군사를 끌고 가서 중이에게 스스로 자결을 하라고 재촉했다. 중이는 자기가 살던 집의 담장을 넘어 도망쳤다. 발제가 뒤를 쫓다가 중이의 옷소매를 베었을 뿐 잡지 못했다. 중이가 간신히 달아나 적(翟) 땅으로 몸을 피했다. 헌공은 다시 군사를 보내어 굴성을 토벌하게 했다. 굴성에 살던 사람들이 온 힘을 다하여 지켰기 때문에 결국은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해에 당진이 다시 우나라 군주에게 괵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우나라의 대부 궁지기(宮之寄)가 우공에게 간하며 말했다.

「당진에 길을 빌려주시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당진에게 길을 빌려주어 괵국이 멸망당한다면 다음에는 우리 우나라가 차례로 망하게 됩니다. 」

우공이 말했다.

「당진과 우나라는 동성의 희성(姬姓) 제후국이다. 어찌 그들이 우리들을 공격하겠는가?」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은 모두 주나라 태왕(太王)19)의 아들입니다. 태백이 도망쳤기 때문에 주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괵중(虢仲)20)과 괵숙(虢叔)21)도 모두 왕계(王季)22)의 아들입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주문왕을 위해 경사(卿士)의 일을 맡아 주나라에 큰공을 세웠기 때문에 그들의 공훈은 기록되어 왕실에 보관되어 있고 또한 맹약의 서류를 만들어 맹부(盟府)에 보관하도록 하였습니다.23) 그들이 괵국을 정벌하여 멸망시키는데 어찌 우나라라고 해서 애석하게 생각하겠습니까? 하물며 당진이 우리 우나라와 친하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선조인 환숙(桓叔)과 장백(庄伯)의 가족들보다야 더 친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환숙과 장백의 가족들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당진의 군주는 그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였겠습니까? 그리고 괵나라와 우나라와의 관계는 입술과 이빨 사이입니다.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린 법입니다.」

우공이 궁지기의 말을 듣지 않고 당진에게 괵나라의 정벌로를 빌려주었다. 궁지기는 그 가족들을 데리고 우나라를 떠났다. 그해 겨울에 당진이 괵국을 멸했다. 괵공은 도망쳐 주나라로 갔다. 당진의 군사들이 개선하여 돌아오던 중에 기습하여 우나라를 멸했다. 우나라 군주와 그 대부인 정백(井伯) 백리해(百里奚)를 포로로 잡았다. 두 사람은 신생의 누이이며 나중에 진목공(秦穆公)의 부인이 되는 목희(穆姬)의 몸종이 되어 섬진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우나라에는 별도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순식이 옛날에 길을 빌리기 위해 우공에게 준 명마 굴산지마(屈産之馬) 네 마리를 찾아와 헌공에게 다시 바치자 헌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돌아온 말은 나의 말이 틀림없는데 애석하게도 나이가 먹었구나!」

헌공 23년 기원전 654년 헌공이 가화(賈華) 등을 보내어 굴성을 공격하게 하자 굴성의 백성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오는 중이가 있는 적국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기예(冀芮)가 말했다.

「적국(翟國)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중이가 이미 그곳에서 몸을 피하고 있는데 공자께서 가신다면 당진은 틀림없이 대군을 발하여 적국을 정벌할 것입니다. 적국은 당진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화가 공자의 몸에 닥치게 될 것입니다. 차라리 양국(梁國)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양국은 섬진과 가까운 나라이며 섬진은 큰나라라 주군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섬진의 힘을 빌려 군주의 자리에 오르실 수 있습니다.」

이오의 일행은 결국은 양나라로 달아났다.

헌공 25년 기원전 652년 당진이 적국을 정벌하였다. 적국이 중이를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당진의 군사들을 설상(齧桑)24)에서 기습하자 당진군은 싸움에서 패하여 물러갔다. 이때 당진은 국세가 강대해져 서쪽으로는 하서(河西)에 이르러 섬진과 국경을 접하고 북쪽으로는 적국과 국경이 마주 닿았고 동쪽으로는 하내(河內)까지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여희의 동생이 아들을 낳아 도자(悼子)25)라 했다.

헌공 26년 기원전 651년 여름 제환공이 제후들을 불러 규구(葵丘)에서 회맹 하였다. 헌공이 회맹장에 가던 도중에 병이 들어 행차가 늦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헌공의 일행은 미처 회맹일에 맞추어 당도하지 못했다. 그때 마침 회맹을 끝내고 돌아오던 주나라의 재공(宰孔)을 로상에서 만났다. 재공이 헌공을 보고 말했다.

「제환공이 날이 갈수록 교만하게 되어 덕도 쌓지 않고 먼 장래를 내다보는 계획을 세우는데 힘쓰지 않으니 제후들이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군주께서 가시지 않는다 해도 제나라는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헌공이 늦게나마 회맹장에 가다 말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헌공의 병이 더욱 깊어지자 순식을 불러 말했다.

「내가 해제를 후계로 삼으려고 하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여러 대신들이 복종하지 않고 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되오. 경은 능히 어린 해제를 지킬 수 있겠소?」

「지킬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킬 수 있겠소?」

「주공께서 다시 살아 돌아오셔서 보신다 해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써 한 점 부끄럼 없이 지켜드리겠습니다.」

헌공이 해제의 뒤를 순식에게 맡겼다. 순식이 재상이 되어 당진의 국정을 맡아보았다. 그해 가을 9월에 헌공이 죽었다. 리극(里克)과 비정(邳鄭)이 중이를 옹립하기 위해 국내에 남은 세 공자의 남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란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순식을 만나 그 의중을 떠보았다.

「세 공자의 무리들이 원한에 사무쳐 밖으로는 섬진의 도움을 받고 안으로는 당진의 백성들의 호응을 받아 들고일어나려 하는데 경은 어찌 하실 계획이십니까?」

순식이 대답했다.

「나는 선군과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그해 10월 리극이 헌공의 장례를 다 치르기도 전에 식장에서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해제를 지키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책하여 목숨을 끊으려고 하자 곁에 있던 사람이 해제의 동생 도자를 세워 보좌하라고 권했다. 순식이 다시 도자를 세워 헌공의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동년 11월 리극이 다시 조당에서 도자를 시해하였다. 순식도 도자의 뒤를 따라 죽었다. 군자가 이를 두고 평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흰 구슬 반점은 오히려 갈면 없어지지만 한번 잘못한 말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네(白珪之玷, 猶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26)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순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순식은 자기가 약속한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

옛날에 헌공이 여융을 정벌할 때 점을 쳤는데 점괘에 ‘치아(齒牙)가 변하여 화가 될 것이다.27)’라고 되어 있었다.

헌공이 이어서 여융을 파하고 여희를 얻어 총애를 한 관계로 결국은 당진에서 변란이 일어난 원인이 되었다.

해제와 도자를 살해한 리극 등의 무리가 공자 중이를 적(翟) 땅에서 데려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세우려고 했다. 중이가 사양하며 말했다.

「부친의 명을 어기고 나라 밖으로 도망쳐 나온 자식 된 자가 부친이 죽었는데도 달려가 장례를 받들지도 못한 불효자인 주제에 어찌 감히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앉을 수가 있겠는가? 대부들은 나 말고 다른 공자들을 골라 추대하기 바라오!」

사자가 돌아와 중이가 한 말을 리극에게 전했다. 리극은 할 수 없이 이오를 양(梁)나라에서 영접하여 군위에 앉히려고 했다. 이오가 리극의 청을 받아들여 입국하여 군위에 앉으려고 했다. 여성(呂省)과 극예(郤芮)가 말했다.

「나라 안에 군주의 자리를 잇게 할 공자들이 많이 있는데 오히려 나라 밖에서 구하려고 하니 이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섬진과 같은 강국의 도움을 받아서 입국해야 군위에 오르시더라도 위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오가 즉시 극예를 섬진으로 보내 많은 뇌물을 바치고 다음과 같이 약속을 했다.

「이오 공자께서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자리에 앉게 해주신다면 당진 소유의 하서 땅을 섬진에 할양해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사자를 리극에게 보내 편지를 전하게 했다.

「진실로 나를 보위에 앉게 해준다면 그대를 분양(汾陽)에 봉하겠소.」

섬진의 목공(穆公)이 군사를 동원하여 이오를 당진으로 호송하게 했다. 당진에서 내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제환공도 역시 제후들과 군사를 이끌고 당진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오와 섬진의 군사들이 먼저 당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환공은 행군을 멈추고 습붕(隰朋)을 섬진의 군영으로 보내 같이 강성(絳城)에 입성하도록 하여 이오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묵인하였다. 이가 당진의 혜공(惠公)이다. 제환공은 당진의 고량(高粱)28)까지 이르렀다가 제나라로 물러갔다.

혜공 이오 원년 기원전 650년. 비정(邳鄭)을 섬진에 사자로 보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국서를 전하게 했다.

「처음에 이오께서 입국하실 때 하서의 땅을 섬진에게 할양하기로 약속하여 다행히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진의 대신들이 말하기를 ‘나라의 영토란 선군들께서 힘들여 개척한 땅인데 주군께서 외국에 망명한 신분으로 어찌 자기 마음대로 할양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까?’ 말하여 저희 군주께서는 대신들을 설득시키지 못하여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소신으로 하여금 상국에 사죄의 말씀을 올리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혜공은 리극에게 주기로 한 분양의 땅도 주지 않고 오히려 리극의 관직을 빼앗았다. 그해 4월 주양왕(周襄王)이 주공(周公) 기보(忌父)를 시켜 제(齊)와 섬진의 대부들과 회동하여 혜공을 회견하도록 했다. 혜공은 중이(重耳)가 아직 나라 밖에 있고 나라 안에는 리극이 변란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혜공이 리극에게 죽음을 명하면서 말했다.

「경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내가 군주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경은 또한 두 임금과 한 사람의 대부를 죽였으니 그대의 임금으로써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죽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도다.」

리극이 혜공을 보고 말했다.

「제가 두 임금을 죽였다고는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주군께서 보위에 오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저를 죽이시려고 하시는데 무슨 이유인들 없겠습니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신은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리극이 말을 마치고 칼 위에 엎드려 스스로 죽었다. 그때 섬진에 사자갔던 비정은 미처 돌아오지 않아 난을 면할 수 있었다.

혜공이 태자 신생을 공경하여 그 무덤을 개장했다. 그 해 가을 호돌(狐突)이 신성(新城)에 갔다가 꿈속에서 신생을 만났다. 신생의 마차에 올라 어디론가 가던 중에 호돌은 신생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이오가 나에게 무례하게 구니 내가 상제에게 청하여 장차 당진을 망하게 하여 섬진에게 주어 섬진으로 하여금 나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겠다. 」

호돌이 듣고 신생에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귀신은 자기 종가가 바치는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태자께서 어찌하여 당진의 제사를 끊으시려고 하십니니까? 태자께서는 부디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신생이 호돌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상제에게 청해 보겠다. 지금부터 10일 후에 신성의 서쪽 편에 살고 있는 무당을 통해 내 말을 전하겠다.」

신생이 호돌에게 허락하더니 이윽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꿈에서 깨어난 호돌은 신생이 이야기한 기일이 되자 신성의 서쪽 편으로 가서 무당을 만나 태자가 전한 말을 들었다. 무당이 호돌에게 말했다.

「상제께서 이오에게 죄가 있다고 허락하시어 그는 한원(韓原)에서 죽게 된다고 하셨다.」

이어서 아이들 사이게 동요가 널리 퍼져 부르고 다녔다.

恭太子更葬矣(공태자경장의),

태자를 공경하여 개장했다지만

后十四年(후십사년)

그 14년 후에

晉亦不昌(진역불창)

당진은 크게 꺾이고

昌乃在兄(창내재형)

당진을 번성하게 하는 자는 그 형이니라!

비정이 사자의 임무를 띄고 섬진에 있다가 리극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섬진의 목공에게 말했다.

「여성(呂省), 극칭(郤稱), 기예(冀芮) 등이 하서(河西)의 땅을 할양하는데 반대한 자들입니다. 만약 많은 재물을 주어 이곳으로 유인해서음 잡아서 죽이고, 이오를 축출하고 중이를 대신 앉힌다면 뜻하신 바를 필시 얻을 수 있습니다.」

목공이 허락하고 사자를 귀환하는 비정에게 딸려 당진에 보내 세 사람에게 후한 뇌물을 주고 그들을 섬진으로 초빙하였다. 세 사람이 모여 상의하며 말했다.

「폐백은 많고 초빙하는 말은 달콤하니 이것은 필시 비정이 우리들을 섬진에게 팔아먹었음이 틀림없소.」

이어서 리극의 뒤를 이어 칠여대부(七輿大夫)29)와 함께 비정도 죽였다. 비정의 아들 비표(丕豹)는 죽음을 피해 섬진으로 도망쳐 당진을 정벌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목공이 듣지 않았다.

당진의 군주자리에 오른 혜공이 섬진과의 약속을 배반하고 리극과 칠여대부를 모두 죽인 일에 대해 당진의 국인들은 마음속으로 불복했다.

혜공 2년 기원전 649년 주나라가 소공(召公) 과(過)를 보내어 혜공에게 례를 올리게 하였는데 혜공은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소공이 혜공을 비난했다.

혜공 4년 기원전 647년, 당진에 흉년이 들어 기아가 발생했다. 이에 당진은 섬진에게 곡식의 대여를 청했다. 목공이 백리해(百里奚)에게 그 의견을 묻자 백리해가 말했다.

「하늘의 재난은 옮겨 다녀 나라가 대신하여 기아를 구해야 합니다. 재난을 당한 이웃 나라 사람을 구하는 일은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입니다.」

목공이 백리해의 의견을 받아들여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진에 흉년이 들이 민심이 흉흉할 때 정벌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목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웃 나라의 군주 된 자가 비록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나 그 백성들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어서 곡식을 배에 실어 당진에 보내는데 선박의 행렬이 섬진의 도성인 옹성(雍城)에서 당진의 도성인 강주(絳州)까지 줄을 잇게 되었다.

혜공 5년 기원전 646년, 이번에는 섬진에 기근이 들었다. 이에 섬진에서 당진에게 곡식의 원조를 청했다. 혜공이 그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자 경정(慶鄭)이 말했다.

「주군께서는 섬진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랐으나 그 군주와 한 약속을 저버렸으며 우리나라에 기근이 들자 섬진은 옛날의 원한을 잊고 곡식을 보내 도왔습니다. 지금 섬진에서 기근이 들어 곡식을 청하고 있는데 무슨 의심이 있어 우리들의 의견을 묻습니까?」

그러자 괵석(虢射)이 나와 말했다.

「옛날에 하늘이 당진을 섬진에게 주었으나 섬진이 이를 취할 줄 모르고 우리에게 곡식을 보내 주었습니다. 오늘 하늘이 다시 섬진을 우리에게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찌 우리가 하늘의 뜻을 거스르겠습니까? 즉시 섬진을 정벌해야 합니다.」

혜공이 괵석의 의견을 택하여 섬진에게 곡식을 빌려주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동원하여 섬진을 정벌하려고 했다. 목공이 대노하여 섬진도 역시 군사를 동원하여 당진에 대한 정벌군을 일으켰다.

혜공 6년 기원전 645년, 봄에 섬진의 목공이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진혜공이 듣고 경정에게 의견을 물었다.

「섬진의 군사들이 우리나라 경내에 이미 깊숙히 들어왔으니 이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경정이 대답했다.

「옛날 섬진은 주군을 도와 우리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나 주군은 그들에게 하서의 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섬진은 다시 당진에 기근이 들자 곡식을 보내주어 우리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섬진이 그 땅에 기근이 들어 우리에게 곡식을 청했으나 우리는 다시 섬진을 배반하고 오히려 그 기근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정벌하려고 하니 그것은 너무 심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혜공이 섬진의 군사를 막기 위해 누구를 차우장군(車右將軍)에 임명해야 할 것인지 점을 치게 하자 경정을 삼으면 길하다고 나와 그를 임명해야한다고 했다. 혜공이 듣고 말했다.

「경정은 불손한 자다.」

혜공이 령을 내려 보양(步陽)을 어융(御戎)에 가복(家僕)을 차우장군으로 바꿨다. 그 밖의 부서를 정한 혜공은 군사를 이끌고 섬진군을 을 막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해 9월 임술(壬戌)일에 섬진의 목공과 당진의 혜공이 한원에서 조우하여 교전상태로 들어갔다. 혜공의 수레를 끌던 말이 수레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진흙탕 속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섬진의 군사들이 다가왔다. 혜공이 마음이 다급해져 지나가는 경정을 보고 자기를 구하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경정이 혜공을 보고 말했다.

「점괘에 나를 차우장군에 임명하면 길하다고 나왔음에도 나를 쓰지 않았으니 싸움에 패한다고 해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경정이 혜공을 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벼렸다. 혜공이 다시 명하여 양요미(梁繇靡)를 어융으로 삼고 괵석을 차우장군으로 삼아 마침 대열에서 이탈하여 앞장서서 달려오고 있던 목공을 공격하여 거의 사로잡으려고 할 순간에 목공을 뒤를 따라 전장으로 달려온 3백 야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당진군을 물리쳤다. 당진군은 싸움에서 패하여 목공을 사로잡지 못하고 오히려 당진의 혜공이 섬진군의 포로가 되었다. 섬진의 군사들이 당진의 혜공을 포로로 잡아 개선했다. 목공이 혜공을 죽여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였다. 그때 목공의 부인은 혜공의 누이였던 목희(穆姬)였다. 그녀는 몸에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목공에게 혜공의 용서를 빌자 목공이 말했다.

「당진의 군주를 사로잡아 그를 상제에게 바쳐 즐거움으로 삼으려 했건만 오늘 부인이 이와 같이 슬피 울며 청하니 내가 어찌 모르는 척 하겠소. 나는 옛날 기자(箕子)가, 우리 당진국의 개국조이신 당숙우가 피봉 될 때 말하기를 ‘그 후손들인 필시 번성하게 되리라!’ 했다고 들었는데 당진이 망하면 되겠소?」

목공이 혜공과 왕성(王城)30)에서 회맹하고 그를 석방하려고 했다. 혜공이 여성을 먼저 당진국으로 보내 국인들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과인이 비록 섬진의 군주로부터 복국을 허락받기는 했지만 사직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면목이 없으니 점을 쳐 길일을 택하여 태자어(圉)를 세워 나를 대신하게 하라!」

당진의 국인들은 혜공이 전하는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당진으로부터 사자의 임무를 띠고 섬진으로 다시 들어온 목공이 여성을 향해 물었다.

「내가 당진을 군주를 새로 세운다면 신군은 국인들과는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소인들은 자기들의 군주와 친척들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태자어(圉)를 세운다 해도 꺼리지 않으면서 ‘비록 우리가 융적(戎狄)을 받들지언정 우리의 원수를 기필코 갚고 말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진의 대신들은 그 군주를 사랑하나 자기들이 지은 죄를 알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섬진의 명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우리는 언젠가는 그 은혜를 갚을 때가 있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진에는 두 가지의 의견이 있어 화목하게 지낼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진의 목공은 혜공을 다시 석방하여 칠뢰(七牢)의 예로 접대한 후에 귀국을 허락했다. 그해 11월 목공은 혜공을 귀국시켰다. 이윽고 복국하여 경정을 죽이고 국정을 쇄신시킨 혜공이 군신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 나라 밖에서 살아 있는 중이를 귀국시켜 나를 대신하게 하면 이득이 많을 것이라고 제후들은 생각하고 있다.」

혜공은 즉시 사람을 시켜 적국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를 죽이려고 했다. 중이가 듣고 적국에서 도망쳐 제나라로 갔다.

혜공 8년 기원전 643년, 당진의 혜공이 태자어(圉)를 인질로 섬진에 보냈다. 옛날 혜공이 양국에 망명했을 때 양백(梁伯)이 자기의 딸을 주어 그의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혜공은 양녀와의 사이에 일남일녀를 낳았다. 양백이 점을 쳐 두 아이의 장래를 알아보게 했는데 남아는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고 여아는 다른 사람의 첩이 된다는 점괘를 얻었다. 그래서 남아의 이름은 어(圉)라하고 여아의 이름은 첩(妾)이라고 지었다.

혜공 10년 기원전 641년 섬진이 양국을 멸했다. 양백이 평소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여 성과 해자를 만드는 공사를 크게 벌려 백성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백성들은 여러 번 자기들끼리 서로 소란을 피우며 놀라며 외치곤 하였다.

「섬진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

양나라의 백성들이 미혹되어 스스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섬진의 군주가 양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혜공 13년 기원전 638년, 혜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당시 나라 안에는 여러 명의 공자가 있었다. 섬진에 인질로 잡혀있던 태자어가 소식을 듣고 말했다.

「나의 외가는 양국인데 얼마 전에 섬진에 의해 멸망당했다. 섬진이 나의 외가인 양국을 멸한 행위는 나를 가볍게 여겨서이다. 외국은 나를 가볍게 여기고 나라 안에서는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만일 부군께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대부들이 나를 가볍게 보아 다른 공자를 세우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이렇게 생각한 어는 그의 부인과 의논하여 같이 도망쳐 당진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진녀가 말했다.

「당신은 일국의 태자 몸인데 이곳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자체가 굴욕스러운 일입니다. 섬진이 비첩으로 하여금 당신을 모시게 한 목적은 당신의 마음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은 도망쳐 당진의 군주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저는 당신을 따라가지 않겠으나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태자어가 섬진에서 도망쳐 당진에 귀국하였다.

혜공 14년 기원전 637년, 9월 혜공이 죽고 태자어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당진의 회공(懷公)이다. 태자어가 몰래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섬진의 목공은 노하여 공자 중이를 데려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회공이 즉위하자 섬진이 자기가 도망친 죄를 물어 정벌하러 오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즉시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중이를 따라다니며 나라 밖에 머물고 있는 자들에게 기한을 정하여 모두 귀국하라고 하고 기일을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 국내에 남아있는 그의 가족들을 멸족시키겠다고 했다. 중이를 수행하던 호돌의 아들 호모(狐毛)와 호언(狐偃)은 그때 섬진에 머물고 있었다. 호돌이 회공의 명령을 듣지 않자 회공이 노하여 호돌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호돌이 회공을 향해 말했다.

「신의 자식들이 중이를 십 수 년을 따라다녔습니다. 오늘 내가 그들을 부른다면 그들에게 십 수 년 동안 따라다닌 그 주인을 배신하라고 하는 말과 같으니 제가 무슨 말로 그들을 가르치겠습니까?」

회공이 결국은 호돌을 죽였다. 마침내 군사를 내어 중이를 당진으로 환국시키려고 결심한 섬진의 목공이 먼저 사람을 당진 국내의 란씨(欒氏)와 극씨(郤氏)들에게 보내 그들로 하여금 안에서 내응하도록 했다. 그들은 회공을 고량(高粱)에서 회공을 죽이고 중이를 받아들였다. 중이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았다. 이가 당진의 문공이다.

당진의 문공은 헌공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부터 선비들을 좋아하여 나이가 17세 때 이미 당진의 오현(五賢)이라고 일컫던 선비들과 교분을 맺고 있었다. 오현이란 조쇠(趙衰), 문공의 외삼촌인 자를 구범(咎犯)이라고 하던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후에 시호가 위무자(魏武子)인 위주(魏犨)였다. 헌공이 태자였을 때 중이는 장성하여 이미 성인의 나이였고. 헌공이 군위에 올랐을 때는 21살의 나이였다. 헌공 13년, 34세 나이의 중이는 여희의 음모로 섬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포성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헌공 21년 중이의 나이 42세가 되던 해에 헌공이 태자 신생을 죽였다. 여희가 자신을 헌공에게 참소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중이는 헌공에게 인사도 올리지 못하고 포성으로 돌아갔다. 헌공 22년 헌공이 환관 이제(履鞮="勃鞮를" 말함)를 보내 중이를 죽이도록 했다. 중이가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고 하자 이제가 추격하여 중이를 칼로 베었으나 중이의 옷소매만을 베었을 뿐이었다. 중이가 포성에서 탈출하여 적(翟)으로 달아났다. 적국은 중이의 외가 나라였다. 중이의 나이가 43세였을 때였다. 그 때 당진의 오현이라고 불린 사람들과31) 그밖에 이름 없는 사람들 수 십 명이 중이의 뒤를 따라 적국에 당도하였다. 구여국(咎如國)을 정벌하여 그 수장의 두 딸을 얻은 적주(翟主)가 장녀는 중이에게 주고 그 동생은 조쇠에게 주어 각각 그 처로 삼게 하였다. 조쇠는 적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돈(盾)이라 지었다. 중이의 일행이 적국에 산지 5년이 되었을 때 당진 본국에서는 헌공이 죽고 여희의 소생인 해제와 여희의 동생 소생인 도자가 차례로 섰으나 모두 리극(里克)에 의해 차례로 시해 당했다. 리극 등이 즉시 사람을 적국으로 보내어 중이를 데려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자신의의 세력이 약해 당진의 중신들에게 시해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중이가 고사하여 감히 귀국하여 보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당진의 대신들은 그의 동생인 이오를 불러 그들의 군주로 삼았다. 이가 혜공이다. 혜공 7년 기원전 644년, 혜공이 그의 형인 중이를 불안하게 생각하여 환관 이제(履鞮)와 장사들을 적국으로 파견하여 중이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중이가 듣고 조쇠(趙衰) 등의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며 말했다.

「옛날 내가 도망쳐 올 때 적국의 도움을 기대했기 때문이 아니고 이곳이 본국과 가깝고 또한 다른 곳으로 용이하게 옮길 수가 있다고 생각해서였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머물러 생활한 시간이 오래 지났으니 나는 원컨대 큰 나라로 옮겨 살고 싶소! 지금 제환공이 인재를 사랑하고 패왕(覇王)에 뜻을 두고 있어 제후들을 도우며 보살피고 있다합니다. 더욱이 지금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죽어 자기를 보좌할 어진 신하를 찾고 있다하니 어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겠소?」

중이의 일행이 적국을 떠나 제나라로 행차하려고 하였다. 중이가 길을 떠나면서 그의 처에게 말했다.

「내가 이곳을 떠나서 25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때는 개가하도록 하시오.」

그의 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25년 후라면 제가 죽어 묻힌 무덤에 심은 측백나무도 자라 무성하겠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중이는 적국에 모두 합쳐 12년을 살았다.

중이의 일행이 위(衛)나라를 지날 때 위문공(衛文公)은 중이 일행을 반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이 일행은 위나라에서 문전박대 당하고 길을 걷다가 오록(五鹿)32)이라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일행은 식량이 떨어져 허기가 져서 밭에서 일하는 야인(野人)들에게 구걸했다. 야인들이 중이 일행의 그릇에 흙을 가득 담아 주면서 희롱했다. 중이가 노하여 야인들을 꾸짖으려 하자 조쇠가 만류하며 말했다.

「흙은 곧 영토라! 흙을 준다는 것은 나라를 준다는 뜻입니다. 주군께서는 절을 하고 두 손으로 받으십시오.」

중이의 일행이 제나라에 당도하자 제환공이 극진히 대하고 그의 종녀를 뽑아 중이에게 주어 처로 삼게 하고 20승에 해당하는 말을 딸려 보냈다. 중이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중이가 제나라에 와서 살림을 차린 지 2년 만에 제환공이 죽었다. 다시 수조(竪刁) 등이 일으킨 내란을 진압하고 제효공(齊孝公)이 환공의 뒤를 이었다. 제나라의 내란의 여파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여러 번 제나라에 침입하였다. 중이의 일행이 제나라에 머무른지 5년이 되자 중이는 이윽고 제녀(齊女)를 사랑하게 되어 아무 데고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조쇠와 구범 등이 뽕나무 밑에서 중이를 데리고 제나라를 탈출하는 계획에 대해 의논하였다. 제녀의 시녀들이 그 때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뽕을 따다가 두 사람이 하는 말을 엿듣고 그 일을 자기 여주인에게 고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시녀들을 모두 죽이고 중이에게 제나라를 떠나라고 권했다. 중이가 듣고 말했다.

「인생이란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을 구하는 일인데 하필이면 다른 것에서 찾을 필요가 어디에 있겠소? 나는 필히 이 제나라에서 살다가 죽으려고 하니 다른 곳으로 결코 떠날 수 없소!」

제녀가 말했다.

「당신은 한 나라의 공자 신분에 처지가 궁하게 되어 이곳까지 흘러오면서 수많은 인사들이 당신에게 생명을 맡기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루라도 빨리 당진에 돌아가 당신을 따르는 신하들의 노고에 보답해야 할 생각을 해야지 한낮 여색만을 밝혀 움직이려하지 않으니 첩은 참으로 당신을 대신하여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으려고 하니 언제나 공을 이루겠습니까?」

조쇠와 모의한 제녀가 중이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만들어 수에 태워 제나라를 떠나게 했다. 일단은 제나라를 출발하여 오랜 시간이 흘러서 먼 곳까지 왔을 때 중이가 술에 깨어 그간의 사정을 알고서는 크게 노하여 수레에 싣고 가던 과를 들고 구범(咎犯)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구범이 중이를 보고 말했다.

「소신을 죽이시어 주공이 뜻한 바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일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내가 삼촌의 고기를 씹어 먹겠소!」

「그때가 되면 이 늙은 몸의 고기는 말라비틀어져 비린내가 날텐데 어떻게 잡수실 수 있겠습니까?」

중이가 이어서 과를 거두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중이의 일행이 조(曺)나라를 지나가게 되었을 때 조공공(曹共公)이 무례하게 중이의 신체적인 특징이었던 변협(騈脇)33)을 보려고 했다. 조나라 대부 희부기(釐負羈)가 말했다.

「당진의 공자는 어질고 또한 우리 조나라와는 동성으로써 지금 그가 어려운 처지에 우리나라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그렇듯 무례하게 구십니까?」

공공이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고 중이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희부기가 아무도 몰래 음식을 준비하여 그 속에 벽옥을 넣어 바쳤다. 중이가 음식을 받아서 먹고 벽옥은 다시 돌려주었다.

다시 중이의 일행은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당도하였다. 송양공(宋襄公)은 그 당시 얼마 전에 있었던 초나라와 홍수(泓水)에서 싸워 패하고 팔에 부상을 입고 자리에 누워 있다가 중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제후들에게 행하는 예를 갖추어 맞이하였다. 원래 구범과 교분이 있었던 송나라 사마(司馬) 공손고(公孫固)가 말했다.

「송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더욱이 얼마 전에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공자의 환국을 도와드릴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대국으로 가시어 도움을 청하도록 하십시오.」

중이의 일행이 다시 송나라를 떠났다.

중이의 일행이 정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정문공(鄭文公)이 예를 갖추어 중이를 맞이하지 않았다. 정나라 대신 숙첨(叔詹)이 정문공에게 간했다.

「당진의 공자는 어진 사람이며 또한 그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나라를 다스릴만한 인재들입니다. 또한 우리와는 동성입니다. 우리 정나라를 세운 환공(桓公)은 주려왕(周厲王)의 소생이며 당진(唐晉)을 세운 당숙우(唐叔虞)는 주무왕의 작은아들입니다.」

정문공이 숙첨의 말을 듣지 않고 말했다.

「천하의 제후국들 사이를 도망쳐 다니는 공자들이 하나둘이 아닌데 어찌 그들 모두에게 예를 갖추어 접대할 수 있겠소?」

숙첨(叔詹)이 다시 말했다.

「주군께서 예를 갖추어 맞이하지 않으시려거든 차라리 죽이십시오. 후에 우리 정나라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정군이 역시 듣지 않았다.

중이가 초나라에 들어갔다. 초성왕(楚成王)은 중이를 제후에 행하는 예를 갖추어 대하려고 하자 중이는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그러자 조쇠가 말했다.

「주군께서 나라 밖으로 20년이 되도록 유랑생활을 하다가 조그만 나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하물며 대국이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대국인 초나라가 주군을 제후에게 행하는 예로써 접대하려고 함은 우리를 중하게 여겨서입니다. 결코 초나라의 후의를 사양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늘이 주군에게 길을 열어주려고 하는 일입니다.」

중이가 듣고 손님의 예로써 초성왕과 회견했다. 초성왕이 중이를 극진하게 대접하며 말했다.

「귀하께서 환국하여 군위에 오르시게 되면 무엇으로 과인에게 보답하시겠습니까?」

중이가 대답했다.

「진기한 새와 짐승들이나, 아름다운 구슬이나 비단과 같은 물품들은 군왕께서 모두 가지고 있어 남아도는 형편이라 제가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슨 어떻게 해서든지 나에게 보답을 해야하지 않겠소?」

「부득이하여 군왕의 군사들과 평원이나 넓은 늪지대에서 회전(會戰)을 하게 될 경우, 제가 대왕의 군사를 피하여 삼사(三舍)34)의 거리를 뒤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초나라 장수 자옥(子玉)이 중이가 한 말을 듣고 노하여 성왕을 향해 말했다.

「대왕께서 당진의 공자를 후하게 대접하고 있는데 오늘 중이의 말이 심히 불손하니 그를 죽이시기 바랍니다.」

「중이 공자는 어질고 또한 외국에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했으나 그를 따라 같이 다녔던 인물들은 모두 나라를 다스릴 만한 재상 감이다. 이것은 하늘이 그를 돕고 있음을 말하는데 어찌 함부로 그를 죽일 수 있겠는가? 그가 한 말이 불손하다면, 어떤 말을 해야 했었는지 그대가 한번 말해보라!」

중이의 일행이 몇 달 동안을 초나라에 머물던 중, 섬진에 인질로 가있던 당진의 태자어(圉)가 본국으로 달아난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하여 태자어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 섬진의 목공이 중이가 초나라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목공은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 중이를 불렀다. 성왕이 중이에게 말했다.

「초나라에서 당진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우선 길이 멀고 또한 여러 나라를 통과해서 가야 합니다. 섬진과 당진은 국경이 접하고 있고 섬진의 군주는 어진 사람이라 공자께서는 속히 그의 부름에 응하십시오.」

성왕이 중이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환송했다.

중이가 섬진에 당도하자 목공(穆公)은 종녀 다섯 사람을 뽑아 중이에게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다섯 명의 여인 중에는 옛날 태자어의 처였던 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이가 꺼려하여 그 여인들을 물리치려고 하자 사공계자(司空季子)35)가 말했다.

「이번에 그의 나라까지도 빼앗으려고 하는데 한낱 그의 옛날 부인을 가지고 무엇을 그리 고민하십니까? 일단은 종녀들을 받아들여 인척관계를 맺은 섬진의 도움으로 환국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조그만 예에 집착하여 큰일을 잊으시려하는 하십니까?」

중이가 결국은 다섯 명의 종녀들을 받아들였다. 목공이 크게 기뻐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중이를 접대하였다. 조쇠가 『시경(詩經)』의 『서묘(黍苗)』36)라는 시를 노래했다. 목공이 듣고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환국하고 싶은 그대들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노라!」

조쇠와 중이가 자리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재배하며 말했다.

「외로운 저희들은 군주님을 뵈오니 마치 들판의 백곡이 단비를 만난 듯 하옵니다.」

이 때가 당진의 혜공 14년으로 기원전 637년 가을철의 일이었다.

혜공이 그 해 9월에 죽고 그 태자어가 뒤를 이었다. 그 해 11월에 혜공의 장례를 마쳤다. 12월 당진의 대부 란씨(欒氏)와 극씨(郤氏)가 아무도 몰래 섬진으로 와서 중이와 조쇠에게 당진으로 입국하면 많은 사람들이 내응할 것이라고 하면서 귀국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섬진의 목공은 군사를 일으켜 중이를 호송하게 하여 당진으로 환국하게 하였다. 당진의 회공이 섬진의 군사들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진의 모든 백성들은 중이가 당진으로 환국 하여 군위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단지 혜공을 모시며 높이 중용되었던 여(呂)씨와 극(郤)씨 만이 중이가 환국하여 군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중이가 도망쳐 외국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다닌 지 19년 만에 다시 환국했는데 그 때 중이의 나이는 62세였다. 대부분의 당진 백성들은 중이가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원전 636년 봄, 섬진의 목공이 중이를 하수 강변까지 나와 전송하였다. 구범이 하수를 건너던 배 위에 서서 감개가 무량하여 문공에게 말했다.

「신은 주군을 따라 천하를 돌아다니며 주군께 많은 잘못도 범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신도 알고 있었는데 하물며 주군이야 어찌 모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청컨대, 지금이 그 때가 아닌가 합니다.」

중이가 하수의 물을 향해 맹세했다.

「만약에 내가 환국하여 군위에 오르고도 구범과 함께 영화를 누리지 않는지를 하백이시여 지켜보소서!」

중이가 말을 마치고 손에 들고 있던 벽옥을 하수의 강물에 던져 구범에게 맹세하였다. 그 때 개자추(介子推)도 중이를 따라다니며 배 안에 있었다. 그가 구범이 하는 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중이 공자를 위해 길을 열어주고 있는데 오히려 구범은 자기의 공이라고 하면서 공자와 거래를 하려고 하니 참으로 수치스러워 그와 함께 같은 반열에 설 수가 없도다!」

개자추는 이어서 하수를 건너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 숨어버렸다. 섬진의 군사들이 영호(令狐)의 성읍을 에워싸고 당진의 군사들은 려류(廬柳)에 주둔하였다. 2월 신축(辛丑)에 구범과 당진 및 섬진의 대부들이 순(郇)37)에서 만나 맹세했다. 임인(壬寅) 일에 중이가 당진의 군영으로 들어갔다. 병오(丙午) 일에 중이가 곡옥(曲沃)에 입성하고 정미(丁未) 일에 곡옥에 있는 무공(武公)의 묘당에 제를 올리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군신들이 모두 곡옥으로 들어와 경축하였다. 회공 어는 달아나 고량(高梁)으로 몸을 피했다. 무신(戊申) 일에 문공이 사람을 고량으로 보내 회공을 죽였다.

회공을 모시던 대신들인 여성과 극예는 원래부터 문공에게 복종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문공이 군주의 자리에 앉자 죽임을 당할까 걱정하여 그들이 거느리고 있던 무리들과 모의하여 문공이 머물고 있는 궁궐에 불을 질러 혼란한 틈을 타서 문공을 죽이려고 하였다. 문공은 그 음모를 알지 못했다. 옛날에 문공을 살해하려고 했던 환관 이제(履鞮)가 그 음모를 알고 문공에게 고하여 자기의 죄를 용서받으려고 했다. 이제가 문공에게 접견을 청했으나 문공이 허락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꾸짖는 말을 전하게 했다.

「내가 옛날 포성에서 너에게 쫓겨 달아날 때 너는 나를 죽이려고 칼을 휘둘러 나의 옷소매를 베었다. 다음에 내가 적국에서 살면서 적주를 따라 사냥을 나갔을 때 너는 혜공을 위해 나를 따라와 죽이러했다. 너는 혜공에게 3일간의 말미를 달라고 약속을 해 놓고 오히려 하루만에 길을 출발하여 너의 신속한 행동으로 인하여 나로 하여금 낭패를 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 때 일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이제가 말했다.

「저는 궁형을 받은 한낱 미천한 신분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찌 감히 두 마음을 품고 그 군주를 섬겨 그 주인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연유로 제가 주군께 죄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군께서 이미 환국 하시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셨다고 해서 옛날 포성과 적국에서 일어난 일이 끝났다고는 말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관중은 제환공의 허리띠를 활로 쏘아 맞혔으나 오히려 관중을 등용하여 천하의 패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오늘 궁형을 받은 천한 자가 어떤 일에 대해 고하려고 주군의 접견을 청했으나 보시지 않으시겠다니 그 화가 다시 주군의 몸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생각뿐입니다.」

문공이 이제를 불러서 만났다. 이제가 문공에게 여성과 극예의 음모를 고했다. 문공이 두 사람을 소환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무리가 너무 많았고 또한 자기가 군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국인들의 마음이 돌아설까 두려워하여 그 즉시 평민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은 다음 섬진으로 들어가 왕성(王城)에서 목공과 만났다. 그러나 당진의 국인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 해 3월 기축(己丑) 일에 여성과 극예가 과연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태우고 문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극(呂郤)의 반란군들은 궁궐을 지키던 호위병들과 싸움을 벌린 끝에 패하여 남은 잔당들을 거느리고 섬진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섬진의 목공이 그들을 하상(河上)으로 유인하여 죽였다. 당진의 내란은 다시 평정되고 문공은 돌아와 군위에 다시 앉았다. 그해 여름 섬진의 목공이 진녀를 그의 정부인으로 삼았다. 섬진의 목공은 3천 명의 군사를 문공의 호위병으로 딸려 보내 당진의 내란에 대비하게 하였다.

문공이 정치를 쇄신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자기가 유랑할 때 따라다닌 신하들과 그가 군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포상하였다. 공이 큰 자들에게는 고을을 주어 봉하고 공이 작은 자들에게는 작위를 주었다. 신하들에게 논공행상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주양왕(周襄王)이 그 동생이 일으킨 내란으로 말미암아 주나라에서 탈출하여 정나라 땅으로 몸을 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당진도 군사를 동원하여 돕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내란을 진압하고 안정을 취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혹시 내란이 다시 재발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돕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가 유랑할 때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상급을 두루 나누어 주었지만 중간에서 은둔해 버린 개자추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개자추 역시 작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런 상급도 미치지 못했다. 개자추가 옛날에 문공에게서 아무로 몰래 떠나 은거하면서 한 말이 있었다.

「헌공에게는 아들이 9명이 있었는데 오직 지금의 주군에게만 천명이 내렸다. 혜공과 회공은 안으로는 백성들과 멀리 지내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버림을 받았다. 하늘이 아직 당진의 후사를 끊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필시 그 주인을 정해 주어 그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주군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하늘이 주군을 위해 길을 열어주고 있는데 몇몇 사람은 자기가 세운 공이라고 하니 이것 또한 터무니없는 말이 아닌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들을 도적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하늘이 이루어 놓은 일을 자기의 공이라고 훔쳐 자기의 공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신하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자랑하고 군주는 신하들의 간사함을 상주며 군주와 그 신하가 서로 속이고 있으니 내가 어찌 그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후에 숨어사는 개자추에게 그의 모친이 말했다.

「어찌 군주를 찾아가 작록을 구하지 않는가? 네가 아무런 청도 하지 않고 죽어버린다면 원망할 사람도 없지 않겠느냐?」

개자추가 대답했다.

「제가 누구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다시 내가 그들에게 가서 그들의 행동을 본받는다면 나의 죄는 그들보다 더 크게 됩니다. 하물며 내가 이미 그들을 비난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었는데 어찌 다시 그들에게 가서 작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개자추의 모친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네가 한번 너의 주군에게 고해 너의 처지를 알려보거라!」

「말이란 자기 자신을 꾸미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숨기려하는데 자기 몸을 꾸며 어디다 쓰겠습니까? 몸을 꾸미는 행위는 자기 몸의 현달을 꾀하기 위해서입니다.」

개자추의 모가 말했다.

「네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내가 너와 함께 가서 숨어서 살리라!」

그 후로는 결코 그들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개자추를 따라 다니던 사람 중에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하고 은거한 개자추를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현판에 써서 궁궐 문에 걸었다.

「한 마리의 용이 하늘에 오르려고 하여 다섯 마리의 뱀이 도왔다38). 용이 이윽고 승천하자 네 마리의 용은 각기 자기의 굴을 마련하여 들어갔으나 남은 한 마리는 둥지를 얻지 못하여 원망하여 결국은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네!

문공이 궁궐 밖으로 나가다가 현판의 글을 보고 말했다.

「이 글은 개자추의 일을 말한 것이다. 내가 주왕실의 일을 걱정하느라 그의 공에 대한 포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문공이 사람을 시켜 개자추를 불러오라고 했으나 개자추는 이미 도망치고 없어 그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계속해서 개자추의 소재를 탐문하게 하여 그가 면상산(綿上山)의 산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문공이 면상산 일대를 개자추의 봉지로 만들어 그의 공로를 포상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문공은 금상산은 개산(介山)이라고 부르게 하며 말했다.

「이로써 나의 잘못을 역사에 기록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표창하려고 함이다.」

문공이 유랑 생활을 할 때 따라다닌 하급관리 호숙(壺叔)이란 사람이 문공을 찾아와 말했다.

「주군께서 논공행상을 세 번에 걸쳐 했지만 소신에게는 한 번도 이르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문공이 대답했다.

「무릇 인의로써 나를 인도하고 또한 덕을 베풀어 나를 지켜준 사람에게 나는 일등상을 내렸다. 모범 되는 행동으로써 보좌하여 나로 하여금 군왕의 자리에 오르게 한 사람을 나는 이등상을 내렸다. 시석을 무릅쓰며 한마지로(汗馬之勞)39)를 다하여 나의 생명을 시켜준 사람에게는 나는 삼등상을 내렸다. 연후에나 너에게 상이 돌아 갈 차례이니라!」

당진의 백성들이 전해 듣고 모두 기뻐하였다.

문공 2년 기원전 635년 섬진의 목공이 군사를 이끌고 하상(河上)에 주둔하면서 태숙대(太叔帶)의 란을 피해 정나라 경내에 머물고 있던 주양왕을 데려와 주천자의 자리에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조쇠가 문공에게 말했다.

「천하의 패자가 되려면 주나라 천자를 받드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주 왕실과 당진의 공실은 희성의 동성입니다. 주천자를 복위시키는 일을 미루다가 섬진에게 선수를 빼앗긴다면 비록 우리가 패자가 된다해도 천하에 영(令)을 세울 수 없습니다. 천자를 받들어야만 비로소 영을 세울 수 있으며 우리가 패업을 세우는데 의지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삼월 갑진(甲辰) 일에 양번(陽樊)40)에 당도하여 온성(溫城)41)을 포위한 당진군은 주양왕을 호송하여 천자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그 해 4월에 왕의 동생 태숙대를 죽였다. 주양왕은 문공에게 자기를 천자에 자리에 복귀시켜준 공에 보답하기 위해 하내(河內)의 양번 땅을 하사했다.

문공 4년 기원전 633년 초성왕이 제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송성을 포위하였다. 송나라의 공손고가 당진에 달려와 위급함을 고했다. 선진(先軫)이 문공에게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주군께서 입으신 송공의 은혜를 갚고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호언이 옆에서 거들었다.

「초나라가 조(曹)나라를 새로 얻고 위나라와는 혼인관계를 바로 얼마 전에 맺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정벌하러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초나라는 필시 송나라를 버리고 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달려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송나라의 포위는 자연히 풀리게 됩니다.」

문공이 당진의 군사를 삼군으로 나누어 각군에 장수들을 임명하였다. 조쇠의 천거로 극곡(郤穀)을 중군원수로 임명하고 극진(郤臻)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호언(狐偃)은 상군을 그의 형 호모(狐毛)를 그 보좌역에 조쇠(趙衰)는 사마(司馬)의 직에 명을 받았다. 란지(欒枝)는 하군을 통수하고 선진에게 보좌역을 맡겼다. 이어서 순림보(荀林父)를 융어(戎御)에 위주(魏犨)는 차우 장군에게 임명했다. 당진의 삼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출동하였다. 그해 겨울 12월에 당진의 군사들이 산의 동쪽으로 나아갔다. 행군 중에 문공은 조쇠를 원(原) 땅의 대부로 봉했다.

문공 5년 기원전 632년 봄 문공이 조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위나라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위후가 문공의 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당진의 군사들은 다시 하남(河南)으로 돌아 조나라를 공격하고 이어서 위나라를 정벌하였다. 그해 정월에 오록(五鹿)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2월에 당진의 문공과 제나라의 소공(昭公)이 렴우(斂盂)42)에서 만나 회맹 하였다. 위후가 문공(文公)에게 동맹을 청했다. 문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위후는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당진의 침략에 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인들이 반대하고 위후를 쫓아내 문공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위후는 쫓겨나 양우(襄牛)43)로 들어가 그곳에서 머무르고 위나라는 자기의 동생 공자 매(買)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 초나라가 군사들을 보내어 위나라를 구원하려 했지만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 문공이 다시 조성(曹城)을 포위했다. 그 해 3월 병오(丙午) 일에 당진의 군사들이 조성에 입성하였다. 문공이 조공공을 붙잡아 희부기의 말을 듣지 않았던 일과 300 명이 넘는 미녀들을 대부들만이 탈 수 있는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있게 한 죄를 물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희부기의 종가 부근에는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하여 그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초나라가 송나라에 대한 포위망을 풀지 않자 송나라가 다시 구원을 요청하는 사자를 보내왔다. 문공이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초나라 군사들을 공격해야 하나 옛날에 입은 은혜 때문에 그들과 싸울 수가 없었고 또한 송나라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초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그들의 포위망을 풀어주어야 했다. 문공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했다. 선진이 문공에게 계책을 말했다.

「조백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조나라와 위나라 땅을 갈라 송나라에 준다고 하십시오. 초나라가 소식을 들으면 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오면 송나라에 대한 포위망은 저절로 풀리게 됩니다.」

문공이 선진의 계책을 따라 조위(曹衛) 두 나라의 땅을 갈라 송나라에 준다고 공포하였다. 소식은 들은 초성왕은 군사들의 지휘를 자옥에게 맡기고 그 중 일부의 군사를 이끌고 영도(郢都)로 돌아가려고 했다.

초나라 장수 자옥이 군사들을 철수시켜 영도로 돌아가려는 초성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옛날 당진의 군주가 공자 시절 때 유랑생활을 하던 것을 받아들여 후하게 대접했었습니다. 그러나 당진의 군주는 지금 우리 초나라가 조위 두 나라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그들을 공격하여 우리로 하여금 군사를 이동시켜 구원하게 만든 것은 그가 옛날의 은혜를 잊고 우리를 업신여긴 처사입니다.」

초성왕이 대답했다.

「지금 당진의 군주는 나라 밖으로 유랑생활을 19년이나 하며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던 끝에 결국은 환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라 재앙과 위험한 일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능히 그 백성들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하늘이 그를 위해 길을 열어주고 있어 우리가 결코 감당하지 못할까 심히 걱정되니 매사에 조심해야만 할 것이다.」

자옥이 물러서지 않고 청했다.

「제가 그와 싸워 필히 공을 세울 수 있다고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하겠지만 원컨대 저 사특한 자를 붙잡아 그 입을 막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성왕이 화를 내며 자옥에게 일부의 군사만을 남겨놓고 자기는 본대를 이끌고 철수해 버렸다. 이윽고 자옥은 완춘(宛春)을 사자로 당진의 군영으로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청컨대 양우에 가 있는 위후를 불러 복위시키고 붙잡아 가두어 놓고 있는 조백을 석방하여 그에게 나라를 돌려주면 저 역시 송나라에 대한 포위망을 풀겠습니다.」

구범이 말했다.

「자옥은 참으로 무례한 자입니다. 군왕에게는 하나를 주고 신하의 신분에 있는 자기는 둘을 받겠다는 말입니다.44). 주군께서는 자옥의 청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선진(先軫)이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백성들의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을 예라 합니다. 초나라의 한 마디 말은 세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나 구범의 한 마디 말은 세 나라 백성들의 인심을 잃게 합니다. 즉 우리가 초나라의 제안을 거절하면 세 나라의 백성들은 우리를 원망하게 되고 또한 송나라를 구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우선 조위 두 나라 군주에게 복국을 허락한다고 아무도 몰래 통고하시고 다시 완춘을 유인하여 트집을 잡아 구금시카면 자옥은 분노하여 우리에게 도발하게 하십시오. 그와 일전을 치른 후에 다시 의논하요 별도의 방도를 찾으시면 됩니다.」

문공이 완춘을 붙잡아 위나라로 보내어 가두고 조위 두 나라 군주에게 복국을 허락한다고 통고한 후에 그들로 하여금 초나라와 단교한다는 편지를 써서 자옥에게 보내게 하였다. 초나라 장수 자옥 성득신(成得臣)이 노하여 송나라의 수양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군사를 움직여 당진의 군영을 향하여 진격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진격해 오는 모습을 보고 당진군은 뒤로 후퇴했다. 군리들이 문공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후퇴합니까?」

「옛날 내가 초나라에 있을 때 초왕에게 삼사(三舍)의 거리를 양보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어찌 내가 한 말을 스스로 어길 수 있겠는가?」

초나라의 장수들이 그만 회군하기를 원했으나 성득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4월 무진(戊辰) 일에 송공 및 제나라와 섬진의 장수가 구원군을 이끌고 차례로 성복의 전장에 당도하였다. 기사(己巳) 일에 당진의 문공이 이끄는 연합군은 성복에서 회전에 들어가 초나라 군사들을 무찔렀다. 싸움에서 패한 성득신은 잔병을 수습하여 회군했다. 갑오(甲午) 일에 당진의 군사들이 형옹(衡雍)45) 지방의 천토(踐土)46)에 주왕을 위해 왕궁을 축조했다.

옛날에 정나라는 당진과 싸웠던 초나라를 도왔었는데 초나라가 성복에서의 싸움에서 패하고 회군하자 당진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문공에게 동맹을 맺기를 청했다. 문공과 정백(鄭伯)이 만나 동맹을 맺었다. 5월 정미(丁未) 일에 문공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얻은 노획물을 주왕에게 바쳤다. 갑옷을 입힌 사마(駟馬) 백 승과 보졸 1000명이었다. 천자가 왕자 호(虎)에게 명하여 당진의 군주를 방백(方伯)으로 임명하면서 황금장식으로 치장한 대로(大輅)47), 100개이 동궁(彤弓)과 적시(赤矢)48), 로궁(玈弓)과 천 개의 흑시(黑矢)49), 거창(秬鬯)50) 한 독, 규찬(珪瓚)51), 3백 명의 호분(虎賁)52) 등을 하사했다. 문공이 세 번을 사양한 후에 머리를 숙이고 받았다. 주왕이 『진문후명(晉文侯命)』53)이라는 글을 지어 읽게 하였다.

王若曰(왕약왈)

왕께서 말씀하신다.

父義和(부의화)

도의로써 제후들을 화목하게 하고

丕顯文武(비현문무)

문무(文武) 두 왕의 공적을 빛나게 하고

能愼明德(능신명덕)

능히 밝은 덕을 닦으시어

昭登于上(소등우상)

상제 님을 감동하게 하고

布聞在下(포문재하)

그 뜻을 백성들에게 알렸다.

維時上帝(유시상제)

그래서 상제님은

集厥命于文武(집권명우문무)

천명을 문무(文武) 두 왕께 내리셨습니다.

恤朕身(휼짐신)

과인을 부디 돌보아 주시오.

繼予一人(계여일인)

나로 하여금 조상님들의 공업을 계승하도록 하여

永其在位(영기재위)

영원히 왕의를 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당진의 문공에게 방백이라고 호칭을 내렸다. 계해(癸亥) 일에 왕자호가 천토에 세운 행궁에서 제후들과 회맹의 의식을 거행하였다.

당진의 군사들이 초나라의 군영을 불살랐다. 불길이 며칠을 계속해서 타올랐다. 문공이 불길을 보며 한탄하였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보고 물었다.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겼는데 무엇을 아직도 걱정하십니?」

문공이 대답했다.

「내가 듣기에 전쟁에 이겨 마음을 편하게 갖을 수 있는 사람은 성인)들 뿐이라고 해서 그 일로 두려워하고 있다. 더욱이 자옥이 아직 살아 있는데 내가 어찌 즐거운 마음을 갖을 수 있겠는가?」

자옥이 성복에서 당진과의 싸움에서 지고 초나라에 돌아갔으나 초성왕은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전공을 탐하여 제멋대로 도발한 끝에 싸움에 지고 돌아온 자옥의 행동에 분노하였다. 초성왕이 자옥을 질책하자 자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공이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내가 밖에서 자옥을 공격하니 초나라가 안에서 그를 죽여 안팎에서 호응한 경우가 되었다. 」

그 해 6월 당진이 위성공(衛成公)을 복위시켰다. 임오(壬午) 일에 문공이 하수를 건너 당진으로 귀환하여 성복에서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을 행했다. 문공은 호언의 공이 으뜸이라고 했다. 신하 중에 한 사람이 말했다.

「성복의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선진입니다.」

문공이 듣고 말했다.

「성복에서 싸울 때 나로 하여금 신의를 잃지 않게 하고 선진은 ‘군사의 일은 승리를 취하는 것을 가장 중하게 여긴다.’라고 하여 내가 그의 계책을 따라 승리를 취했다. 그러나 그런 승리는 일시적이나 호언의 말은 만세에 전해지는 공로이다. 어찌하여 일시적으로 얻은 이가 만세에 이르는 만세에 전해지는 공로보다도 중하다고 하는가? 그래서 호언의 공로를 앞에 두었다.」

그 해 겨울 문공이 제후들을 온(溫) 땅에 소집하여 그들이 이끌고 왕도로 가서 조례를 드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제후들 중에 이반하는 자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주나라 천자에게 보내어 하양(河陽)으로 사냥을 나와 달라고 청했다. 임신(壬申) 일에 문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천토에서 주왕에게 조례를 드렸다. 공자가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후가 어찌 왕을 부르는가?」

공자가 이 일을 꺼려 춘추에 ‘왕이 하양으로 나가 사냥하다.’ 라고 적었다. 정축(丁丑) 일에 문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허나라를 포위했다. 조백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문공에게 권했다.

「제환공이 제후들과 회합하여 회맹을 행했으나 그들은 모두 이성의 제후국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군주께서는 제후들과 회합을 한 다음 동성의 제후국을 멸하려고 합니다. 조나라는 숙진탁(叔振鐸)의 후손들이며 당진은 당숙우(唐叔虞)의 후예들입니다. 제후들과 회합하여 형제국 들을 멸하려 하니 이것은 예가 아닙니다.」

문공이 듣고 기뻐하며 조백을 복위시켰다.

이 해부터 당진은 군사의 조직을 삼행(三行)54)으로 증편하였다. 순림보(荀林父)는 중행(中行)을, 선곡(先穀)은 우행(右行)을, 선멸(先蔑)은 좌행(左行)을 지휘하게 하였다.

문공 7년 기원전 630년 당진의 문공(文公)과 섬진의 목공(穆公)이 연합하여 정나라를 포위하였다. 문공은 옛날 유랑생활을 할 때 정나라를 지나던 자신에게 례하게 대한 일과 다시 후에 초나라와 성복에서 싸울 때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운 행위에 대한 죄를 물으려고 했다. 문공이 정나라를 포위하고 자기를 문공에게 죽이라고 권한 숙첨을 잡아서 자기에게 보내라고 했다. 숙첨이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나라가 숙첨의 시체를 문공에게 보냈다. 문공이 정나라 사신에게 말했다.

「내가 필히 정백의 얼굴을 한번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다.」

정문공이 두려워하여 사람을 섬진의 목공에게 보내어 설득하게 하였다.

「정나라가 망하면 당진에게 유리하게 될 뿐이며 섬진에게는 결코 이득이 될 수 없습니다. 군주께서 정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어 은혜를 베푼다면 정나라는 섬진을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섬진은 동쪽으로 진출하는 거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섬진의 목공이 기뻐하며 당진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버렸다. 당진도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쳤다.

문공 9년 기원전 628년 겨울에 문공이 죽었다. 그 아들 환(歡)이 뒤를 이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양공(晉襄公)이다. 같은 해에 정나라 문공도 죽었다. 정나라 사람 중에 자기의 나라를 섬진에게 팔아먹으려고 하는 자가 있었다. 섬진의 목공이 군사를 내어 정나라를 기습하여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 해 12월 섬진의 군사들이 당진의 영토를 통과했다.

양공 원년 기원전 627년, 봄에 섬진의 군사들이 주나라 왕도의 성문을 통과하여 지나가면서 무례했다. 왕손만(王孫滿)이 보고 섬진의 군사들을 비난하였다. 섬진의 군사들이 주나라를 통과하여 활국(滑國)에 도착하여 숙영했다. 그 때 마침 정나라의 상인인 이름이 현고(弦高)라는 사람이 주나라에서 소를 사가지고 정나라에 돌아가던 중에 섬진의 군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현고가 자기가 끌고 가던 소 12 마리를 섬진의 군사들에게 바쳐 노고를 치하했다. 정나라를 기습하려던 작전이 노출되었다고 생각한 섬진의 장수들은 놀라 활국을 대신 멸하고 회군하였다.

당진의 선진이 양공에게 말했다.

「섬진의 군주가 건숙(蹇叔)의 간언을 듣지 않고 여러 사람들의 생각에 반하여 군사를 출동시켰으니 우리가 이번 기회에 회군하는 그들을 중도에서 요격하면 공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란지(欒枝)가 반대하며 말했다.

「돌아가신 선군께서 섬진으로부터 받으신 은혜를 아직 갚지 못했는데 그들을 공격하는 일은 불가합니다.」

선진이 물러서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고집했다.

「섬진이 우리의 새로운 군주가 어린 나이임을 업신여겨 우리와 동성 제후국인 활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는데 무슨 은혜를 입었다고 하십니까?」

양공이 섬진의 군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검은 색의 상복을 입고 질(絰)55)을 두른 채로 싸움터에 임했다. 그 해 4월 당진의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회군 중인 섬진의 군사들을 기습하여 궤멸시키고 섬진의 장수 세 사람을 포로로 잡아 개선하였다. 섬진의 세 장수들이란 맹명시(孟明視), 백을병(白乙丙), 서걸술(西乞術) 등이었다. 싸움을 승리로 이끈 양공이 검은 상복을 입고서 문공의 장례를 치렀다. 회공의 부인이었다가 다시 문공의 부인이 된 목공의 딸 회영이 말했다.

「섬진의 군주가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를 모조리 잃어버린 세 장수를 잡아 육시하여 분을 풀고 싶어 할 텐데 섬진으로 돌려보냄이 어떠한가?」

양공이 회영의 말을 듣고 섬진의 세 장수를 풀어 주어 돌아가게 했다. 선진이 듣고 와서 양공에게 말했다.

「우환 거리를 살려서 보냈으니 장차 당진에 재난을 몰고 올 것입니다.」

선진이 섬진의 세 장수들의 뒤를 쫓았으나 그들은 이미 하수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타고 강 가운데에 있으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올리며 결국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섬진의 장수가 돌아간 지 3년 후에 과연 섬진이 맹명시를 시켜 당진을 정벌하게 하여 효산(殽山)에서의 패배를 갚고 당진의 왕(汪)56)을 빼앗아 돌아갔다.

양공 4년 기원전 624년 섬진의 목공이 군사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당진을 정벌하였다. 섬진군은 하수를 건너 왕관(王官)57)을 함락시키고 효산에서 전사한 섬진군의 시신들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후에 돌아갔다. 당진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성밖으로 나와서 응전하지 못하고 단지 성만을 굳게 지켰다.

양공 5년 기원전 623년 당진이 섬진을 공격하여 신성(新城)58)을 탈환하여 왕관의 싸움에서 당한 패배를 갚았다.

양공 6년 기원전 622년 조성자(趙成子) 쇠(衰), 란정자(欒貞子) 지(枝), 구범(咎犯) 즉 호언(狐偃), 곽백(霍伯) 선차거(先且居)등이 모두 죽었다. 조돈(趙盾)이 부친 조쇠의 뒤를 이어 당진의 정사를 맡았다.

양공 7년 기원전 621년 양공이 죽었다. 그 때는 태자 이고(夷皐)가 아직 나이가 어렸다. 당진의 국인들은 어린 태자를 군주로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양공의 아들 중에 나이가 든 사람을 택해 군위에 올리려고 하였다. 상경 조돈이 말했다.

「지금 섬진에 가 있는 양공의 동생 옹(雍)을 세운다면 다른 사람과도 사이가 원만하고 나이도 이미 지긋할 뿐만 아니라 선군도 평소에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섬진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이도 호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이가 원만한 그를 군위에 올리면 나라는 공고해 지고, 연장자를 모시게 되면 하늘의 도리에 순종하는 일이고, 선군이 사랑하는 사람을 받드니 효(孝)라고 할 수 있으며, 이웃해 있는 옛날의 우호국과도 다시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으니 이는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도입니다.」

자가 가계(賈季)인 호석고(狐射姑)가 조돈의 말을 반대하며 말했다.

「차라리 공자 락(樂)이 세움이 어떻겠습니까? 진영(辰嬴)이 우리의 두 분 군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는데59) 그의 아들을 세운다면 섬진과의 사이도 개선시킬 수 있어 백성들의 마음을 필시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조돈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진영은 서열이 제일 낮은 부인입니다. 선군이 총애한 10명의 부인 중 서열이 가장 낮은 열 번째입니다. 그런 부인의 소생이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녀는 두 지아비를 섬겼으니 음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락은 선군의 아들로써 대세에 속하지 못하고 소국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고립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모는 음란하고 그 아들은 고립되어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위엄도 보일 수 없고, 또한 진(陳)나라는 작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세울 수가 있단 말이오?」

조돈이 즉시 사회(士會)와 선멸(先蔑)을 섬진으로 보내어 공자옹을 모셔오도록 했다. 그러자 가계(賈季)도 역시 사람을 진나라에 보내 공자락을 데려와 군주의 자리에 올리려고 하면서 양처보(陽處父)를 죽였다. 조돈이 가계에게 죄를 물어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그 해 10월 양공의 장례식을 끝냈다. 11월 가계가 적(翟) 땅으로 달아났다. 그해 섬진의 목공이 죽었다.

영공(靈公) 원년 기원전 620년 4월에 섬진의 강공(康公)이 말했다.

「옛날 나의 외숙부이신 당진의 문공께서 환국하실 때 아무런 호위병도 따라가지 않아 극예와 여성의 란을 당하시게 되었다.」

이어서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공자옹을 호위하게 하여 당진으로 촐발 시켰다. 태자 이고의 모인 목영(穆嬴)은 밤낮으로 어린 태자를 품에 안고 조당에 나와 통곡을 하면서 외쳤다.

「선군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는가? 그리고 그의 적자인 태자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적자를 폐하고 나라 밖에서 군주를 모셔오는가? 그렇게 되면 장차 태자를 어찌하려고 하는가?」

목영이 태자를 안고 조당 밖으로 나와 조순이 묵고 있는 처소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하소연하였다.

「선군께서 살아 계실 때에 이 어린아이를 상국에게 부탁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가 쓸모 있는 재목이 된다면 내가 비록 지하에 있겠지만 그대에게 감사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쓸모없는 재목이 된다면 나는 그대를 원망하겠소!’라고 하셨소. 지금 주군께서 돌아가셨다 하나 그 말씀이 아직 귓가에 쟁쟁한데 오히려 선군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반하여 이 아리를 버리려고 하니 이는 어찌 된 일입니까?」

조돈과 여러 대부들은 모두 목영을 두려워하였으며 또한 그녀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걱정하여 공자옹을 모셔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히려는 생각을 바꾸어 다시 태자 이고를 옹립하였다. 이가 당진의 영공(靈公)이다. 이와 동시에 군사를 출동시켜 공자옹을 호송하기 위해 당진의 도성을 향해 행군 중에 있는 섬진의 군사를 중도에 막으려고 했다. 조돈은 스스로 대장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섬진의 군사들을 기습하여 영호(令狐)의 땅에서 섬진군을 패주시켰다. 선멸과 사회는 목숨을 건져 섬진으로 돌아갔다. 그 해 가을 제(齊), 송(宋), 위(衛), 정(鄭), 조(曹), 허(許) 등의 나라 제후들이 당진으로 도성에 와서 영공에게 조례를 드린 후에 조돈과 호(扈)60) 땅으로 나가 회맹을 행했다. 이렇게 되어 영공이 가까스로 당진의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영공 4년 기원전 617년, 당진이 군사를 일으켜 섬진을 공격하여 소량(少梁)61)을 빼앗았다. 섬진 역시 반격하여 당진이 빼앗아간 효산(殽山)의 땅을 되찾아 갔다.

영공 6년 기원전 615년 섬진의 강공이 당진을 정벌하여 기마(羈馬)62)의 땅을 빼앗아 갔다. 당진이 분노하여 조돈, 조천(趙穿), 극결(郤缺) 등을 장수로 삼아 대군을 일으켜 하곡(河曲)에서 크게 싸웠다. 그 싸움에서 조천(趙穿)은 큰공을 세웠다.

영공 7년 기원전 614년 당진의 육경(六卿)들이 당진의 정세에 밝은 사회가 섬진에 머물고 있음이 당진이 겪고 있는 외환의 원인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거짓으로 위수여(魏壽余)로 하여금 당진을 배반한 것처럼 꾸미고 섬진에게 투항하게 하였다. 섬진이 위수여를 데리고 오도록 사회를 보내자 위수여는 사회를 붙잡아 당진의 도성으로 데리고 왔다.

영공 8년 기원전 613년 주경왕(周敬王)이 죽자 주나라에서는 공경대부들이 정권을 다투는 바람에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당진이 병거 800 승을 동원하여 주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광왕(匡王)을 세웠다. 그 해에 초나라에서는 장왕(庄王)이 즉위하였다.

영공 12년 기원전 609년 제나라에서 신하들이 그 군주인 의공(懿公)을 시해하였다63).

영공 14년 기원전 607년 영공이 장성하여 사치가 심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궁궐의 모든 담장에 그림을 그려 채색을 하고 다시 궁궐의 높은 대에 올라 탄궁(彈弓)으로 궁궐 밖에 난 길로 지나가는 백성들을 쏘아 맞추고는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즐겼다. 또한 궁궐의 요리사가 요리하여 바친 곰발바닥이 제대로 익히지 않았다고 노하여 요리사를 살해하고는 그 요리사의 부인을 시켜 시신을 들고 궁궐 밖으로 나가 버리게 했다. 요리사의 부인이 시신을 들고 조당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전에도 조돈과 사회가 여러 번에 걸쳐 영공에게 간했으나 영공은 귀를 기우리 지 않았다. 그날 두 사람은 조당에 나왔다가 요리사의 부인이 들고 나가던 시신에서 튀어나온 손을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두 사람이 영공의 앞으로 나아가 우선 사회가 먼저 영공에게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조돈도 뒤를 이어 영공에게 간했으나 역시 소용이 없었다. 영공이 조돈을 두려워하여 서예(鉏麑)라는 장사를 시켜 조돈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조돈이 내당의 문을 열어 놓고 있었지만 집안에는 절제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서예가 물러가면서 한탄하는 말을 하였다.kd

「충신은 죽일 수 없지만 죽이지 않는다면 군주의 명령을 행하지 않게 되어 죄를 짓는 일이다. 」

말을 마치고 조돈의 집 앞에 있던 큰 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

옛날에 조돈이 시간이 나면 수산(首山)64)으로 사냥을 나가곤 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가던 중에 뽕나무 밑에서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사람을 보았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의 이름은 시미명(示眛明)이었는데 조돈이 불쌍하게 여겨 그에게 음식을 주었다. 시미명이 음식을 먹다가 절반을 남겼음으로 조돈이 음식을 다 먹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시미명이 대답했다.

「외지에 나가 벼슬살이 3년에 모친이 아직 살아 계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인데 남은 음식을 가져가 모친에게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조돈이 그의 말을 듣고 그가 효자라고 생각하여 밥과 고기를 더 주었다. 시미명은 후에 당진의 궁실에 들어가 요리사가 되었으나 조돈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해 9월에 당진의 영공은 조돈을 불러 같이 술을 마시면서 미리 매복시킨 갑사들을 시켜 죽이려고 하였다. 그 음모를 미리 알고 있었던 시미명이 조돈이 취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여 앞으로 다가가서 조돈에게 넌지시 말했다.

「주군께서 상국께 술을 내리셨는데 석 잔을 마시면 가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시미명의 덕분으로 조돈은 술을 적게 마시고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돈이 예상보다 일찍 물러가자 영공은 매복시킨 군사들이 미쳐 준비를 마치지 못하여 출동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영공은 이름이 오(獒)라는 맹견을 풀어 조돈을 물어 죽이려고 하였다. 시미명이 조돈을 위하여 맨손으로 맹견을 잡아서 죽였다. 조돈이 보고 말했다. 조돈이 보고 말했다.

「사람을 죽이려고 개를 풀어놓다니 참으로 무도한 자들이로다!」

그러나 조돈은 그때까지 시미명이 옛날 자기가 행한 음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시미명이 맹견을 잡아서 죽이는 사이에 영공은 갑사들을 모아 조돈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으나 시미명이 뒤따라 달려와 갑사들 앞을 막아서며 공격하자 갑사들을 조돈의 뒤를 추격할 수 없었다. 조돈은 시미명의 도움으로 마침내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돈이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도운 연유를 묻자 시미명이 대답했다.

「나는 옛날 뽕나무 밑에서 허기가 져서 쓰러져 있던 사람입니다.」

조돈이 그의 이름을 물었으나 대답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조돈이 달아나 국경을 벗어나지 않고 그곳에서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봤다. 을축(乙丑) 일에 조돈의 동생 조천(趙穿)이 도원(桃園)에서 영공을 시해(弑害)하고 국경 근처에 머물고 있던 조돈을 맞이하였다. 조돈은 평소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생활해 왔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영공은 나이가 어리고 사치가 심하여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된 것이다. 조돈이 조천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와 당진의 상경 자리에 앉았다. 태사 동호(董狐)가 사서에 ‘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조당에 가지고 나와 사람들에게 보였다. 조돈이 보고 말했다.

「영공을 죽인 사람은 조천이다. 나는 그 때 도성에 있지도 않았는데 어찌 나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가?」

동호가 대답했다.

「대감은 나라의 정사를 집정하고 있는 정경의 신분으로써 도망쳐 국경 근처에 머물면서 시해 사건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와 시역을 행한 반적을 토벌하지 않았으니 시해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공자가 이 대목에 읽다가 말했다.

「동호는 참으로 훌륭한 사관의 귀감이로다. 그의 필법은 아무 것도 감추지 않았다. 조돈 또한 훌륭한 대부로다. 자기를 악평하는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 들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어찌하여 국경을 벗어났다면 시군의 오명을 얻지 않았을 터인데!」

조돈이 조천을 시켜 주나라로 가서 살고 있던 흑둔(黑臀)을 모셔와 영공의 뒤를 잇게 하였다. 이가 당진의 성공(成公)이다. 성공은 문공의 작은아들로써 그 모친은 주나라 왕실의 여인이었다. 임신(壬申) 일에 성공이 무공을 모신 묘당에 들어가 고했다.

성공 원년 기원전 606년, 조씨에게 공족대부의 작위를 내렸다. 정나라를 정벌하여 그들이 당진과의 맹약을 어긴 죄를 추궁하였다.

성공 3년 기원전 604년, 정양공(鄭襄公)이 새로 즉위하자65) 초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당진으로 돌아섰다. 초나라가 노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자 당진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성공 6년 기원전 601년, 섬진(陝秦)을 정벌하고 그 장수 적(赤)을 사로잡았다.

성공 7년 기원전 600년, 당진의 성공이 초장왕(楚庄王)과 중원의 패권을 놓고 서로 다투고자 제후들을 호(扈) 땅으로 모이게 하여 회합하였다. 진(陳)나라가 초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다. 성공이 중항환자(中行桓子) 순림보(荀林父)을 대장으로 삼아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초나라의 공격을 받고 있던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당진의 군사들은 초군과 싸워 그들을 패퇴시켰다. 그 해에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거(据)가 뒤를 이었다. 이가 당진의 경공(景公)이다.

경공 원년 기원전 599년, 진(陳)나라의 대부 하징서(夏徵舒)가 그의 군주인 진영공(陳靈公)을 시해하였다. 경공 2년 기원전 598년, 초장왕(楚庄王)이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하징서를 잡아서 죽였다.

경공 3년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정나라의 도성을 포위하자 정나라가 당진에 위급을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당진이 순림보를 대장으로 사회는 상군을, 조삭을 하군을 지휘하게 하고 극극(郤克), 란서(欒西), 선곡(先穀), 한궐(韓闕), 공삭(鞏朔) 등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그 해 6월 당진의 대군이 하수 강안에 당도하였으나 정나라가 이미 초나라에 항복하고 정백이 육단(肉袒)으로써 복종을 맹세하자 초나라는 군사들을 거두어 물러갔다. 순림보가 회군하려고 하였으나 선곡이 말했다.

「우리가 정나라를 구하러 당진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였는데 일단은 정나라 경계에 가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철군해 버린다면 우리 군사들의 마음이 해이해 질까 걱정됩니다. 」

당진의 군사들은 결국은 하수를 건넜다. 당진의 장수들은 초나라가 이미 정나라의 항복시켰기 때문에 단지 하수의 강안에서 말에 물을 먹이며 군사들의 위세를 떨친 후에 돌아가려고 한 것이다. 결국은 당진과 초나라의 대군이 조우하게 되어 양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정나라가 새롭게 초나라에 항복하였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당진을 배반하고 초나라를 도와 당진군을 공격하였다. 당진의 군사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북쪽으로 달아나 하수를 건너려고 하다가 군사들 간에 배를 타려는 다툼이 벌어져 배 안에는 끊어진 손가락들이 즐비하였다. 초나라가 당진의 장수 지앵(智罃)을 포로로 잡아갔다. 싸움에서 패한 순림보가 돌아와 경공에게 고했다.

「 신이 장수들을 독려하여 싸웠으나 패전하였습니다. 마땅히 그 책임을 통감하오니 죽여주옵소서!」

경공이 순림보를 죽이려고 하였다. 사회가 나와 순림보를 위해 경공에게 간했다.

「옛날에 문공께서 성복(城濮)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무찌르자 초성왕은 초나라 장수였던 자옥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저희 문공께서는 우환거리가 없어졌다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군사들이 초나라에게 패했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장수를 죽인다면 그것은 초나라를 도와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는 결과가 됩니다. 」

경공이 순림보를 죽이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경공 4년 기원전 596년 선곡은 자기가 하상에서 하수를 건너야 된다고 주장하여 결국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졌다고 생각하고 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결국 적(翟)나라 달아나 그들과 공모하여 당진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당진이 선곡의 음모를 알아채고 선곡의 남아 있던 가족들을 모조리 주살 했다. 선곡은 선진(先軫)의 아들이다.

경공 5년 기원전 595년, 정나라가 초나라를 도와 당진을 공격했다는 죄를 물어 정벌하였다. 그 때는 초장왕의 치세로 강성해진 초나라가 정예한 군사를 동원해서 쳐들어오는 당진의 군사들을 하상에서 맞이하여 싸워 물리쳤다.

경공 6년 기원전 594년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송나라가 그 위급함을 당진에 고하고 구원을 청했다. 당진의 군사를 내어 송나라를 구하려고 했으나 모사 백종(伯宗)이 말했다.

「초나라는 지금 하늘이 도움을 받고 있어 아무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양(解揚)이라는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당진의 구원군이 조만간에 출동한다고 송나라를 속여 송나라로 하여금 끝까지 초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항전하도록 했다. 정나라가 자국의 경내를 통과하던 해양을 붙잡아서 초장왕에게 보냈다. 장왕이 해양에게 작록을 후하게 주겠다고 회유하여 송나라 사람들에게 당진의 원군은 오지 않으니 빨리 항복하라고 권유하도록 말하게 했다. 해양이 거짓으로 초왕의 명을 순순히 따르는 체 하고 군영 앞으로 나가 결국은 당진 군주의 명을 그대로 전했다. 초왕이 노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초왕의 신하들 중 죽이면 안 된다고 간하여 해양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경공 7년 기원전 593년, 당진이 사회를 시켜 적적(赤翟)을 멸하고 그 땅을 당진의 것으로 만들었다.

경공 8년 기원전 592년 제경공(齊頃公)의 모친이 누각에 올라 타국에서 온 사자들을 구경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이유는 당진에서 사신으로 온 극극(郤克)은 곱사등이였고, 노나라의 사신 계손행보(季孫行父)는 절름발이였으며, 위나라 사신 손량부(孫良夫)은 애꾸눈이고 조(曹)나라 사신 공자 수(首)는 절름발이 그들을 놀리기 위해 제후가 명하여 각각에 해당하는 장애자들을 뽑아 그들에게 보내 인도하게 했기 때문이었다.66) 극극이 알고 노하여 귀국하다가 황하를 건너는 나루에 이르자 강물을 바라보며 맹세했다.

「내가 저 하백에게 맹세하나니 결단코 이 치욕을 갚으리라!」

이어서 극극 당진의 강도(絳都)로 돌아와 경공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경공이 극극에게 물어 그 이유를 알게 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인하여 어찌 나라를 번거롭게 만들려고 하시오?」

경공은 결국 극극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위문자(魏文子)67)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겠다고 청하여 극극을 천거하였다. 극극이 그 뒤를 이어 당진의 국정을 담당하였다.

경공 9년 기원전 591년 초장왕이 죽었다. 당진의 극극이 주장하여 제(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태자 강(强)을 당진에 인질로 보냈다. 당진의 군사들이 물러갔다.

경공 11년 기원전 589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노나라의 융(隆)68) 땅을 취하였다. 노나라가 위급함을 당진에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당진이 즉시 극극, 란서, 한궐 등에게 병거 800 승을 주어 위나라와 노나라와 힘을 합쳐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 해 여름 제경공(齊頃公)이 이끄는 제군과 안(鞍)69) 땅에서 조우하였다. 제경공은 싸움 중에 상처를 입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제경공과 차우장군이 옷을 바꿔 입은 후에 서로 바꾼 자리에 서있다가 장군으로 변장하고 있던 경공이 제후로 분장하고 있던 차우장군을 위해 물을 떠 온다고 하고는 도망쳐 포로가 되려는 순간을 모면하였다. 제나라 군사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후퇴하자 당진 연합군은 그 뒤를 쫓아 제성의 북문으로 쇄도하였다. 경공이 제나라의 보기를 바치면서 강화를 청했으나 극극은 허락하지 않았다. 극극이 제나라의 사자에게 말했다.

「제나라가 강화를 하고 싶다면 필시 소동(蕭桐)의 질녀를 우리에게 인질로 보내야 할 것이다. 」

제나라 사자가 듣고 말했다.

「소동의 질녀라 함은 우리 군주의 모친을 말한다. 우리 군주에게 모친이 있다함은 당진의 군주에게도 모친이 있는 경우와 같은데 어찌 상대방 나라 군주의 모친을 인질로 요청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예에 어긋난 일이라 결코 들어줄 수 없다. 우리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겠다. 」

당진이 결국은 제나라와 강화를 하였다.

초나라의 신공(申公) 무신(巫臣)이 하희(夏姬)를 훔쳐 대동하고 당진으로 도망쳐왔다. 당진은 무신을 형(邢) 땅의 대부로 삼았다.

경공 12년 기원전 588년 겨울 제경공이 당진에 가서 당진의 경공(景公)을 배알한 후에 그를 왕으로 받들려고 하였다. 경공은 감히 왕호를 사용할 수 없어 사양하였다. 당진이 처음으로 군제를 6군으로 만들었다.

한궐(韓闕), 공삭(鞏朔), 조천(趙穿), 순추(荀騅), 조괄, 조전(趙旃) 등을 각 군의 대장으로 삼고 경의 직에 임명하였다. 그 해에 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지앵이 귀환하였다.

경공 13년 기원전 587년 노성공(魯成公)이 경공에게 조배를 드리기 위해 당진에 왔으나 당진의 군주가 무례하게 굴었음으로 노후가 노하여 돌아가 등을 돌렸다. 당진이 정나라를 정벌하여 범(氾)70) 땅을 빼앗았다.

경공 14년 기원전 586년 양산(梁山)이 무너지자 백종은 경공에게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경공 16년 기원전 584년 초나라 장수 자반(子反)이 당진으로 달아난 무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가 그 가족을 모두 멸족시켰다. 무신이 노하여 자반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가 기필코 그대를 비명에 죽게 만들겠다.」

무신이 당진의 군주에게 청하여 오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청했다. 무신은 오나라에 가서 그의 아들 굴호용(屈狐庸)을 오나라의 행인(行人)으로 남겨두고 오나라의 군사들에게 중원의 용병술을 가르치게 하였다. 오나라와 당진은 통호를 시작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초나라에 대항하기로 약속했다.

경공 17년 기원전 583년 경공이 조동, 조괄 형제를 죽이고 조씨들 종족들을 멸했다. 한궐이 말했다.

「조쇠, 조돈이 세운 공을 망각하고 어찌 그들의 후사를 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조씨들의 유복자인 조무(趙武)를 후계자로 삼은 후에 조씨들의 봉지를 돌려주었다.

경공 19년 기원전 581년, 여름 경공이 병이 들자 그 태자 수만(壽曼)을 세웠다. 이가 당진의 려공(厲公)이다. 경공은 려공이 군위에 오른 지 한 달만에 죽었다.

려공 원년 기원전 580년, 갓 군위에 오른 려공이 제후들과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우선 섬진의 환공(桓公)과 하수를 사이에 두고 회맹을 하였다. 도성으로 귀환한 섬진의 환공은 적주(翟主)와 힘을 합하여 당진을 공격하려고 했다.

려공 3년 기원전 548년, 당진이 여상(呂相)을 보내어 섬진을 비난했다. 이어서 제후들을 소집하고 그들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정벌군을 일으켰다. 당진의 연합군이 경수(涇水)까지 진격하여 마수(麻隧)71)에서 섬진의 군사들과 싸워 패퇴시키고 섬진의 장수 성차(成差)를 잡아 포로로 했다.

려공 5년 기원전 546년 삼극(三郤)72)의 모함을 받은 백종을 려공이 죽였다. 백종이 일찍이 려공에게 삼극의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고 간한 일이 화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다. 당진의 국인들이 마음속으로 려공에게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려공 6년 기원전 545년, 정나라가 당진을 배반하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자 당진이 노했다. 란서가 말했다.

「마땅히 정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우리 대에 이르러 제후들을 호령할 수 있는 패자의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려공이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려공이 스스로 당진군의 대장이 되어 그 해 5월에 하수를 도하했다. 당진의 군사들이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도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구원하려고 했다. 범문자(范文子)가 려공에게 군사를 물리쳐 회군해야 한다고 간했다. 그러나 극지(郤至)가 반대하며 말했다.

「반역한 도모한 자들을 주살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적군의 세가 강하다고 싸움을 회피한다면 제후들에게 령이 서지 않게 됩니다.」

려공이 계속 진격하여 언릉에서 초군과 만나 교전에 들어갔다. 계사(癸巳) 일에 초공왕이 눈에 화살을 맞고 초나라 군사들은 언릉(鄢陵)에서의 싸움에서 패했다. 자반이 잔병들을 수습하여 다시 싸움에 임하려고 하여 당진은 매우 두려워하였다. 공왕이 자반을 불러 앞으로의 싸움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자반은 그의 시종인 수양곡(豎陽谷)이 올린 술을 마시고 취하여 왕의 소환에 응할 수가 없었다. 공왕이 노하여 자반을 비난했다. 자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왕이 이어서 군사를 물리쳐 회군하였다. 당진은 이후로 천하의 제후들을 호령하여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려공은 사랑하는 희첩을 많이 두었다. 려공이 싸움터에서 돌아와서 대부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총희들의 형제들을 임명하려고 생각하였다. 려공의 사랑을 받고 있던 총희가운데 서동(胥童)이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옛날에 극지와는 원한을 산 일이 있었다. 이어서 란서도 옛날 언릉의 싸움 때 자신이 낸 계책을 채용하지 않은 일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란서가 사람을 보내 초왕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게 했다. 초왕이 다시 사자를 당진에 보내 거짓으로 고하게 했다.

「옛날 언릉의 싸움은 실은 극지가 초나라의 군사들의 출병을 청하여 그 기회를 틈타 란을 일으킨 후에 주나라에 살고 있는 공자 주(周)를 불러들여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극지와 같이 일을 도모할 만한 다른 나라를 찾지 못해 일이 성사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초왕의 편지를 읽어본 려공이 란서를 불러 의논하였다. 란서가 대답했다.

「있을 법한 일입니다. 극지를 주나라에 사절로 보낸 후에 미행을 붙여 한번 살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려공이 란서의 말을 따라 극지를 주나라에 사절로 보냈다. 란서가 다시 공자주에게 사람을 보내 극지를 한번 만나보라고 하였다. 극지는 자기가 함정에 빠진 것도 모르고 공자주의 부름을 받아 만났다. 려공이 시험해 본 결과 과연 사실로 판명되어 이어서 기회를 보아 극지를 죽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려공 8년 기원전 573년, 려공이 사냥을 나가서 총희와 술을 마시는데 극지가 멧돼지를 잡아서 바치려고 가지고 가던 도중에 환관이 빼앗아 가버렸다. 극지가 노하여 멧돼지를 빼앗아 달아나던 환관을 활로 쏘아 죽였다. 려공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극지란 놈이 어찌 나를 이렇게 업신여긴단 말인가?」

이어서 극지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극씨들의 세력이 너무 커서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극기(郤錡)가 려공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비록 죽기야 하겠지만 주군도 역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극지가 려공을 공격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며 말했다.

「군주의 말에 거역하지 않는 것을 신(信)이라 하고, 백성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지(智)라고 하며,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은 것을 용(勇)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잃게 되면 누가 우리와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 해 12월 임오(壬午) 일에 려공의 명을 받은 서동이 갑사 800 명을 이끌고 가서 삼극을 기습하여 죽였다. 서동이 다시 조당에서 나오는 란서와 순언(荀偃)을 붙잡아 려공 앞으로 데리고 오면서 말했다.

「이 두 사람을 죽여야 뒤에 후환이 없게 됩니다.」

려공이 말했다.

「하루아침에 삼경(三卿)을 죽이고 다시 2경 죽이는 일은 과인이 용납하지 못하겠노라!」

서동이 려공에게 대답했다.

「오늘은 주공께서 두 사람을 용납하시지만 후에 두 사람은 주공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려공은 결국은 서동에게 란서와 순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려공이 다시 란서와 순언에게 극씨들의 죄를 물어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란서의 공이라고 치하하고 두 사람에게 대부의 직을 돌려주라고 명했다. 두 사람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참으로 공실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려공이 서동을 죽은 극씨를 대신하여 경의 자리에 앉혔다. 그 해 윤달 을묘(乙卯) 일에 려공이 장려씨(匠驪氏)의 집에 놀러 나갔다. 란서와 순언이 그들의 가병들을 동원하여 려공을 습격하여 구금하고 서동을 잡아서 죽였다. 다시 지앵을 사자로 주나라에 보내 공자주를 모셔와 당진의 군주로 추대하였다. 이가 당진의 도공(悼公)이다.

도공 원년 기원전 572년 정월 경신(庚申) 일에 란서와 순언이 구금하고 있던 려공을 시해하고 그 장례를 일승의 수레만으로 치르게 했다73). 려공이 구금된 지 6일 만에 죽임을 당하고 다시 10일 후인 경오(庚午) 일에 지앵이 공자주를 주나라에서 모시고 와서 강주성에 당도하였다. 도공은 대부들과 닭의 피를 얼굴에 바르고 하늘에 맹세한 후에 당진의 군위에 올랐다. 이가 도공(悼公)이다. 신사(辛巳)일에 도공이 무궁(武宮)에 고하고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도공 주(周)의 조부는 이름이 첩(捷)으로써 양공의 작은아들로써 군주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시호는 환숙(桓叔)이라 했다. 환숙이 혜백(惠伯) 담(淡)을 낳고 담은 주를 낳았다. 주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를 때에는 그의 나이 14세였다. 도공이 당진의 신하들 앞에서 말했다.

「조부와 부친께서 모두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시고 란을 피하여 주나라 살면서 결국은 객사하시었다. 과인은 먼 나라에 있으면서 결코 군주의 자리를 엿보지 않았다. 오늘 여기 모인 조당의 대부들이 문공과 양공의 뜻을 잊지 못하고 환숙의 후손을 군주의 자리에 추대하였다. 종묘와 여러 대부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내가 당진의 종묘사직을 받들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내가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부들도 역시 마음을 한 뜻으로 모아 나를 돕도록 하시오!」

그리고 자기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대부 7명을 쫓아낸 후에 옛날에 이룬 공업을 새로이 하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문공이 환국할 때 데리고 들어온 공신들의 후손을 거두어 보살폈다. 그 해 가을 정나라를 정벌하여 그 군사들을 패주 시키고 이어서 진(陳)나라로 군사들을 이동시켰다.

도공 3년 기원전 570년, 당진의 군주가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제 했다. 도공이 기해(祁奚)에게 조정에 쓸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천거하도록 했다. 기해가 도공에게 해호(解狐)를 천거했다. 해호는 기해와는 원수지간이었다. 도공이 다시 기해에게 물었다. 기해가 이번에는 자기의 아들인 기오(祁午)를 천거했다. 후에 사람들이 기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기해야 말로 가히 불편부당한 사람이라고 하겠다. 밖으로는 자기와 원수진 일에 대해서 개의치 않고 안으로는 자기의 자식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도공이 제후들과 회맹을 가까스로 끝냈으나 회맹 중에 도공의 동생 양간(楊干)이 소란을 피워 위강(魏絳)이 그의 어자를 붙잡아 죽였다. 도공이 듣고 화를 내며 위강을 죽이려고 하였다. 대부 중 한 사람이 도공에게 간하여 도공은 결국은 위강이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당진의 정사를 맡겼다. 위강은 융족(戎族)과 강화를 맺어 회유하자 융적(戎狄)의 백성들이 대거 당진에 귀순해 왔다.

도공 11년 기원전 562년 도공이 말했다.

「내가 위강에게 당진의 정사를 맡긴 이래로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하고 융(戎)과 적(翟)들을 회유하여 그들을 귀순시켰다. 그것은 모두 위강이 애써 힘쓴 덕분이다.」

도공이 위강에게 악공들을 하사하였으나 위강이 한사코 사양하다가 결국은 받아 들였다. 그 해 겨울 섬진이 쳐들어와 역성(櫟城)을 빼앗아 갔다.

도공 14년 기원전 559년 당진의 육경들이 군사를 일으켜 제후들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섬진을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올랐다. 원정군이 경수(涇水)를 건너 섬진의 군사들을 크게 무찌르고 역림(棫林)까지 진격했다가 철군하였다.

도공 15년 기원전 558년 도공이 사광(師曠)에게 치국의 도리에 대해 물었다. 사광이 대답했다.

「오로지 인의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해 겨울 도공이 죽고 그의 아들 표(彪)가 뒤를 이었다. 이가 평공(平公)이다.

평공 원년 기원전 557년, 당진이 제나라를 정벌하였다. 제영공(齊靈公)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미하(靡下)74)에서 당진의 군사들과 회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안영(晏嬰)이 영공에게 말했다.

「주군께서는 결코 만용을 부리시지 마시고 빨리 휴전을 청하여 싸움을 중지하십시오.」

당진의 군사들은 달아나는 제나라 군사들의 뒤를 쫓아 임치성(臨淄城)을 에워싸고 외성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죽이고 성곽들을 모조리 불살랐다. 당진의 군사들은 동쪽으로는 교(膠), 남쪽으로는 기(沂)까지 진출하였으나 제나라의 모든 성시들은 굳게 지키고 고을도 성문을 열고 항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진의 군사들은 결국 철수하였다.

평공 6년 기원전 552년, 노양공(魯襄公)이 당진에 조현을 올리기 위해 들어왔다. 당진의 란영(欒郢)이 죄를 짓고 제나라로 달아났다.

평공 8년 기원전 550년 제장공(齊庄公)이 란영을 몰래 곡옥으로 잠입시키고 자기는 군사들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랐다. 제나라 병사들은 태항산(太行山) 밑에 주둔하면서 란영이 곡옥에서 란을 일으켜 그 군중을 이끌고 강성을 기습할 때를 기다렸다. 강주성은 란영의 습격에 대해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불시에 허를 찔리고 말았다. 평공이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범헌자(范獻子)가 만류했음으로 죽으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범헌자는 자기들 종족들의 가병들을 동원하여 란영의 반란군을 공격하였다. 란영이 범헌자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곡옥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곡옥의 성민들의 공격을 받고 란영은 싸움 중에 죽었다. 이 일로 인해 곡옥에 살고 있던 란영의 종족들은 당진의 군사들에 의해 멸족당했다. 란영은 란서의 손자다. 그가 강주성을 공격한 것은 바로 위씨(魏氏)들의 계획에 의해서였다. 제장공은 란영이 반란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회군하다가 당진의 영토였던 조가(朝歌)를 함락시켜 옛날 임치에서 당한 원한에 대해 앙갚음 했다.

평공 10년 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최저(崔杼)가 제장공을 시해하였다. 당진이 제나라의 내란을 평정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고당(高堂)에서 제나라 군사들을 패주 시키고 개선했다. 그 싸움은 제장공이 조가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

평공 14년 기원전 544년 오나라 연릉(延陵)의 계자(季子)가 사절의 임무를 띠고 당진을 방문하였다. 계자는 조문자(趙文子), 한선자(韓宣子), 위헌자(魏獻子)등과 교분을 나눈 후에 돌아갈 때가 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진의 국권은 장차 그대들 삼가(三家)에 넘어가고 말 것이오!」

평공 19년 기원전 539년 안영이 제나라의 사절로 방문했다. 안영이 숙향(叔向)과 교분을 맺었다. 숙향이 안영에게 당진의 국내 정황에 대해 걱정하며 말했다.

「당진은 말세라! 군주는 부세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높은 고대와 깊은 연못을 만드는 토목공사를 벌리면서 백성들을 전혀 돌보지 않아 모든 정사는 사가(私家)들 손에 있으니 어찌 당진의 정권이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

안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였다.

평공 22년 기원전 536년, 당진이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평공 26년 기원전 532년, 평공이 죽고 그의 아들 소공(昭公) 이(夷)가 즉위하였다.

소공(昭公)이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526년에 죽었다. 육경(六卿)의 세력이 더욱 커지고 공실의 위엄은 더욱 떨어졌다. 소공의 아들 거질(去疾)이 군위를 이었다. 이가 경공(頃公)이다.

경공 6년 기원전 520년, 주경왕(周景王)이 죽었으나 왕자들이 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당진의 육경들이 주나라의 내란을 평정하고 경왕(敬王)을 세웠다.

경공 9년 기원전 517년 노나라의 계씨(季氏)들이 그 군주인 소공(昭公)을 쫓아내자 소공은 건후(乾侯)에 머물렀다.

경공 11년 기원전 515년 위나라와 송나라가 사자를 보내와 노소공을 복위시켜 주기를 당진에 청했다. 계평자(季平子)가 은밀히 범헌자(范獻子)에게 뇌물을 바치자 범헌자는 그 뇌물을 받아들이고 경공(頃公)에게 말했다.

「노나라에의 계씨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우리에게는 노군을 복위시킬 명분이 없습니다.」

과연 당진은 노군을 복위시키지 않았다.

경공 12년 기원전 514년 당진의 종실집안인 기해의 손자와 숙향의 아들이 경공 앞에서 서로 비방하며 싸웠다. 육경들이 공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두 종족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들의 봉지를 10개 현으로 만든 후에 그 땅에 자기들의 자녀들을 대부로 봉해 나누어가졌다. 당진의 공실은 이후로 더욱 약화되었고 육경의 권력은 커졌다.

경공 14년 기원전 512년, 경공이 죽고 그의 아들 정공(定公) 오(午)가 즉위하였다.

정공 11년 기원전 50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당진으로 도망쳐 왔다. 조간자(趙簡子) 앙(鞅)이 양호를 자기의 식객으로 거두었다.

정공 12년 기원전 500년,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정공 15년 기원전 497년, 조앙이 한단대부(邯鄲大夫) 조오(趙午)를 믿지 못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자 오(午)는 오히려 중행인(仲行寅="荀寅)," 범길석(范吉射="范獻子)" 등과 힘을 합하여 조앙을 공격하였다. 조앙은 도망쳐 진양(晉陽)으로 달아나 농성하였다. 정공(定公)이 공실의 군사를 동원하여 진양을 포위하였다. 순력(荀櫟), 한불신(韓不信), 위치(魏侈) 등은 평소에 범씨, 중행씨 등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그들의 가병들을 동원하여 합한 다음에 범씨와 중행씨들을 공격하였다. 범씨와 중행씨가 반하자 정공이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범씨와 중행씨는 조가로 달아나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굳게 지켰다. 한불신과 위치가 조앙을 위해 정공에게 사죄하고 그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정공이 조앙의 죄를 용서하고 그의 직위를 모두 돌려주었다.

정공 22년 기원전 490년 당진의 군사들이 조가를 공격하자 범씨와 중행씨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성을 나와 제나라로 도망쳤다.

정공 30년 기원전 482년 정공과 오왕 부차가 황지(黃池)에서 만나 회맹을 열고 맹주의 자리를 다투었다. 그 때 조앙이 정공을 수행하였으나 맹주의 자리는 결국은 오왕 부차(夫差)가 차지하였다.

정공 31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 군주인 간공(簡公)을 시해하고 간공의 동생인 오(驁)를 세웠다. 이가 제평공(齊平公)이다.

정공 33년 기원전 478년 공자가 죽었다.

정공 37년 기원전 474년 정공이 죽고 그의 아을 출공 착(鑿)이 뒤를 이었다.

출공 17년 기원전 458년 지백(智伯)과 조(趙), 한(韓), 위(魏) 삼가가 범씨와 중행씨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출공이 노하여 제와 노나라의 도움으로 4경을 토벌하려고 했다. 사경이 알고 노하여 힘을 합하여 출공을 공격하였다. 출공이 당진에서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다가 도중에 죽었다. 지백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소공의 증손 교(驕)를 군주로 세웠다. 이가 애공(哀公)이다. 애공의 조부는 대부 옹(雍)이며 곧 소공의 작은아들이며 호를 대자(戴子)라고 불렀다. 대자가 아들 기(忌)를 낳았다. 기는 평소에 지백을 잘 알고 지냈으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백은 평소에 당진을 병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감히 행하지 못하고 기의 아들인 교를 군위에 세운 것이다. 당시 당진의 국정은 모두 지백의 손안에 있었기 때문에 애공은 지백의 전횡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백이 다시 범씨와 중행씨의 땅을 차지하게 되지 사가 중에서 가장 세력이 커지게 되었다.

애공 4년 기원전 453년 조양자(趙襄子), 한강자(韓康子), 위환자(魏桓子) 삼가가 힘을 합하여 지백을 공격하여 지씨 종족들을 멸하고 그 땅을 삼가가 나누어 가졌다.

애공 8년 기원전 449년 애공이 죽고 그의 아들 유(柳)가 뒤를 이었다. 이가 유공(幽公)이다. 유공 당시 공실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어 군주가 오히려 삼경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삼가의 수장들에게 조례를 드리게 되었다. 고 있는 형편이었다. 당진의 군주는 다만 곡옥과 강주성(絳州城)만을 다스렸을 뿐이고 나머지 당진의 광할한 영토는 삼가가 다스렸다.

유공 15년 기원전 423년 위문후(魏文侯)가 위씨 종족들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유공 18년 기원전 420년 유공이 부녀자와 간통하기 위해 밤이 되어 성밖으로 나갔다가 강도를 만나 살해되었다. 위문후가 군사를 보내어 당진의 내란을 진압하고 유공의 아들 지(止)를 당진의 군주로 세웠다. 이가 열공(烈公)이다.

열공 19년 기원전 401년 주위열왕(周威烈王)이 조·한·위 삼국의 수장들을 제후로 명했다.

열공 27년 기원전 393년 열공이 죽고 그의 아들 기(頎)가 뒤를 이엇다. 이가 효공(孝公)이다.

효공 9년 기원전 384년 위무후(魏武侯)가 즉위하자마자 한단(邯鄲)을 습격하였으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효공 17년 기원전 376년 효공이 죽고 그의 아들 구주(俱酒)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정공(靜公)이다.

정공 2년 기원전 374년 위무후(魏武侯), 한애후(韓哀侯), 조경후(趙敬侯)가 당진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삼분하여 나누어 가졌다. 정공(靜公)은 평민이 되어 당진의 종묘사직은 제사가 끊기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진문공은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영명한 군주로써, 나라 밖으로 도망쳐 19년 동안 극도로 곤궁하게 망명생활을 한 끝에 귀국하여 당진의 군주자리에 올랐다. 논공행상을 하면서 비록 개자추를 잊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어찌 그를 교만하고 사치스런 군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포악한 진영공(晉靈公)은 피살되었고, 그 뒤를 이은 성공(成公), 경공(景公)은 매우 엄격하고 사나웠으며 이윽고 려공(厲公)이 서자 다시 가혹한 학정을 펼쳤음으로 주살될까봐 두려워한 대부들이 변란을 일으켰다. 도공(悼公) 이후 당진국의 공실은 나날이 쇠약해져 결국 권력은 육경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 군주가 자기의 신하나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은 원래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 것이다.」

『당진세가 끝』

주석

1) 읍강(邑姜)을 말하며 성왕(成王)과 숙우(叔虞)의 생모로써 태공(太公) 여상(呂尙)의 딸이다.

2) 규(珪)/ 옥으로 만든 기구의 이름으로 길쭉한 장방형이며 상단은 삼각형으로 생긴 것으로써 고대에 귀족들이 조빙(朝聘)을 가거나, 제사나 장례에 참석할 때 사용하던 예기(禮器)이며 천자가 귀족들에게 분봉할 때 하사하는 신표(信標)다.

3) 공화(共和)/ 기원전 841년 주나라의 국인(國人)들이 반란을 일으켜 주려왕은 도망쳐 체(彘) 땅으로 달아나 몸을 피했다. 호경에서는 주공과 소공이 상의하여 려왕 대신 주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왕 대신 대신들이 의논하여 다스렸다고 해서 공화라 했다. 일설에는 공백(共伯) 화(和)가 어린 선왕을 대신하여 주나라를 섭정으로 다스렸다고 해서 공화의 기원이라고도 한다. 주려왕이 체 땅에서 병으로 죽자 주나라의 왕권은 주선왕에게 돌아갔다. 공화원년부터는 중국역사의 연대기가 확실해졌다. 사마천의 사기중 제후연표도 공화원년인 기원전 841년부터 시작된다.

4) 사도(司徒)/ 하(夏)나라 때부터 설치한 6경의 하나로 지관(地官)에 속하며 토지(土地), 교화(敎化), 치민(治民) 등을 담당했다. 농업, 임업, 어업, 목축, 수렵을 담당하는 관리를 예하에 두었다. 서한 말 애제(哀帝)때 승상(丞相)의 명칭을 대사도(大司徒)로 바꿨다.

5) 조(條)/ 진나라 부근의 땅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6)천무(千畝)/ 지금의 산서성 개휴현(介休縣) 남

7) 제후연표에는 곡옥의 장백이 효후를 살해한 해는 효후 16년(기원전 722년)으로 되어 있다. 효후가 재위 15년에 곡옥의 장백에게 살해되었다는 기사는 잘못이다.

8)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의 시작연도이기도하다. 춘추는 이해에 시작하여 공자가 죽기 2년 전인 노애공(魯哀公) 14년 기원전 481년에 끝난다.

9) 『좌전(左傳)』 은공(隱公) 5년 조에 의하면 이 단락은 많은 잘못이 있다. 당시 악후(鄂侯)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그 다음 단락에 「곡옥의 장백이 악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진성을 공격했다 ( 曲玉庄伯聞鄂侯卒, 乃興兵伐晉)」라는 기사도 잘못이다. 장백이 진성(晉城)을 공격한 것과 악후가 죽은 것은 아무 관련이 없다. 또한 주평왕(周平王)은 주환왕(周桓王)의 잘못이다. 애후(哀侯)가 선 것은 주환왕의 명으로 된 것이지 당진의 국인들이 상의하여 옹립한 것이 아니다.

10) 형정(陘廷)/ 당진의 영토였으나 정확한 위치는 미정

11) 晉武公始都晉國/ 『한서(漢書) 지리지(地里志)』에 의하면 ‘숙우가 당(唐)에 피봉 되고 그 아들 섭보(燮父)가 나라 이름을 진(晉)으로 바꾸었다. 섭보의 증손인 성후(成侯)에 이르러 곡옥으로 천도하고 성후의 증손 목후의 대에 곡옥에서 강주(絳州)로 옮겼다. 소후(昭侯)가 다시 그 도읍을 익성(翼城)으로 옮겼다가 본국을 병합한 곡옥의 무공이 도읍을 강주로 옮겼다. 후에 경공(景公)이 다시 신전(新田)으로 천도했다. 당진의 도읍은 여러 번에 걸쳐 옮겼으나 사기(史記)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무공이 진(晉)을 도읍으로 삼고 그의 아들인 헌공이 강주(絳州)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은 사마천의 잘못이다.

12) 여융(驪戎)/여산(驪山)에 거주하던 서융(西戎)의 별족

13) 오태백(吳太伯)과 우중(虞仲)/ 주나라의 시조인 태왕(太王)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아들을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태백(太伯), 차남은 우중(虞仲),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계력이 다시 문왕을 낳자 주나라를 일으킬 사람은 문왕이라고 생각한 고공단보는 계력에게 사위(嗣位)를 시키고 싶어했다. 고공단보의 생각을 알게된 태백과 우중은 주나라를 떠나 형만(荊蠻)으로 가서 그들의 습속을 따라 몸에 문신을 하고 살다가 오나라를 세운 사람들의 선조가 되었다. 후에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자 태백과 우중의 후손들을 찾았으나 태백의 자손들은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상해부근에 스스로 나라를 세웠던 관계로 우중의 우중(虞仲)의 후손들에게 옛날 하나라의 고도에 봉하여 나라 이름을 우(虞)라고 했다. 우나라는 후에 당진의 순식이 펼친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따라 망하고 당진에 편입된다.

14) 둔순괘(屯淳卦)와 변성(變成) 비괘(比卦)

15) 총사(冢祀)/ 고대에 제왕이나 제후들이 종묘에서 거행하던 큰 제사

16) 총자(冢子)/ 고대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서 적장자(嫡長子)를 칭할 때 쓰던 호칭

17) 원전에는 ‘편의(偏依)’로서 좌우의 색갈이 다른 옷을 뜻하는데 그것은 헌공이 국가의 통치권 절반을 태자에게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8) 금결(金玦)/ 결(玦)은 군사들을 통솔하는데 필요한 표식. 양백준(楊伯峻)의 『좌전주(左傳注)』에 따르면 「 한 부분이 이지러진 고리모양의 고대의 몸에 차고 다니던 물건으로써 대부분은 옥으로 만들어 옥결(玉玦)이었으나 금결(金玦)의 경우는 청동(靑銅)으로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19)태왕(太王)/ 주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20)괵중(虢仲)/주문왕 창(昌)의 동생이며 주무왕에 의해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의 서괵(西虢)에 봉해졌다. 후에 서주가 망하고 낙읍으로 동천할 때 서괵도 봉지를 옮겨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와 평륙현(平陸縣)으로 옮겼다. 후에 당진의 헌공에 의해 당진의 영토로 복속되었다. 서괵의 구토에 남아있었던 잔존 세력을 소괵(小虢)으로 부르다가 기원전 687년 섬진의 무공(武公) 11년에 섬진에 멸망당했다.

21)괵숙(虢叔)/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북에 있다가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에 의해 멸망당하고 정나라 영토에 편입되어 경성(京城)이라고 이름 지었다

22)왕계(王季)/ 고공단보의 세 아들 중 막내인 계력(季歷)를 말한다.

23) 주나라 왕실과, 당진, 우, 괵 등의 네 나라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의 막내 아들인 왕계(王季)(계력을 말한다)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태백(太伯)과 우중(虞仲)이다. 고공단보가 주족(周族)의 수장 자리를 계력의 아들인 창(昌)(후에 주문왕)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주나라에서 달아나 형만으로 가서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따라서 주족의 수장 자리는 자연히 계력으로 이어지고 계력이 죽자 그 장남인 창(昌)이 뒤를 이었다. 창에게는 괵중과 괵숙이라는 동생이 있어 경사(卿士)로써 문왕을 도와 공을 세워 괵에 봉해진 것이다. 그리고 당진(唐晉)에 피봉된 당숙우(唐叔虞)는 무왕의 작은아들이며 문왕의 손자이다.』

24) 설상(齧桑)/ 좌전에는 채상(采桑)으로 되어 있으며 지금의 산서성 길현(吉縣)이다.

25) 도자(悼子)/ 『좌전(左傳)』 희공 9년 조, 진본기(秦本紀), 십이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 제세가(齊世家) 등, 모두 탁(卓)으로 되어있다. 도(悼)는 탁(卓)의 잘못이다.

26) 『시경(詩經)』 대아편(大雅篇) 탕지습(蕩之拾) 중 『억(抑)』에 나오는 문구다. 해당 문구가 나오는 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質爾人民(질이인민)그대의 백성을 안정시키고/ 謹爾侯度(근이후도)그대 임금의 법도를 삼가/ 用戒不虞(용계불우) 뜻하지 않은 환란에 대비하고/ 愼爾出話(신이출화) 그대의 언행을 삼가며/ 敬爾威儀(경이위의) 그대 위의를 공경하고/ 無不柔嘉(무불유가) /부드럽고 아름답게 해야하지 않는가?/ 白珪之玷(백규지점) 흰구슬의 반점은/ 尙可磨也(상가마야) 오히려 갈면 없어지지만/ 斯言之玷(사언지점) 한번 잘못한 말은/ 不可爲也(불가위야) 어찌할 도리가 없다네

27) 치아위화(齒牙爲禍)/ 고대에 점을 칠 때 귀갑(龜甲)을 태워 갈라진 무늬가 마치 치아(齒牙)와 같고 중간에 직선이 있으면 이는 참언(讒言)에 의해서 해를 당하는 점괘로 푼다.

28) 고량(高粱)/산서성 임분현(臨汾縣) 동북

29) 칠여대부(七輿大夫)/신생이 당진의 하군(下軍)을 지휘할 때 하군에 속한 대부들. 당시 신생은 7명의 대부들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각각 병거에 타게 하여 하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이를 칠여대부(七輿大夫)라 한 것이다.

30) 왕성(王城)/지금의 섬서성 대려현(大荔縣)이다.

31) 앞서 열거한 오현(五賢) 중 나중에 당진의 군사책임자가 된 선진(先軫)은 중이를 수행하지 않고 국내에 머물렀다.

32) 오록(五鹿)/춘추시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청풍현(淸豊縣) 서북

33) 변협(騈脇)/일종의 기형적이 신체로서 갈빗대가 나란히 붙어서 통뼈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늑골.

34) 삼사(三舍)/ 일사(一舍)는 3십리의 거리이며 3사(三舍)는 90리를 말함. 춘추 때 일사라 함은 군대가 하루에 이동하는 거리로 지금의 거리로는 약 12km에 해당한다.

35)사공계자(司空季子)/ 서신(胥臣)의 별호다. 진문공(晉文公)이 19년 동안 유랑할 때 따라 다녔던 오현(五賢) 중 위주(魏犨) 대신 넣기도 한다. 자는 계자(季子)로써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살았음으로 사공계자(司空季子)라고도 부른다. 진문공이 패자를 칭한 후 성복대전에서 세운 공로로 구읍(臼邑)에 봉해져 성을 구(臼)로 바꿔 구계(臼季)로 불렀다. 유랑 생활 중 진문공에게 목공의 딸 회영(懷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고, 성복대전에서 군사들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워 초군의 말들을 놀라게 하여 승리의 전기를 마련했다. 후에 다시 반역죄로 처형되었던 극예(郤芮)의 아들 극결(郤缺)을 발굴하여 진문공을 설득하여 임용하도록 했다.

36) 서묘(黍苗)/『시경(詩經)』 소아(小雅) 중 도인사지습(都人士拾)에 수록되어 있는 시로써 ‘芃芃黍苗,陰雨膏之(범범서묘 음우고지) 예쁘게 자라는 기장, 장마비가 적셔주네/ 悠悠南行 召伯勞之(유유남행 소백로지) 멀고 먼 남행길, 소백이 수고하시네 ’라고 노래 불러 옛날 주선왕(周宣王)이 외삼촌 신백(申伯)을 사(謝) 땅에 봉하고 소목공(召穆公) 호(虎)에게 명하여 그를 위해 성을 지어주라고 했다. 이에 노역 나간 사람이 소공의 노고를 노래한 시가로써 소목공의 일을 본받아 중이와 자신들이 당진국에 환국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한 시가다.

37) 순(郇)/지금의 산서성 임의현(臨猗縣) 남의 우두진(牛杜鎭)에 있었던 춘추 때 당진의 성읍.

38) 일룡오사(一龍五蛇)/ 일룡(一龍)은 문공을 말하며 오사(五蛇)는 문공을 따라다닌 호언(狐偃), 조쇠(趙衰), 위주(魏犨), 서신(胥臣), 개자추(介子推)를 말한다(史記索隱)

39) 한마지로(汗馬之勞)/ 전쟁터에서 말을 달려 힘을 다하여 싸워 이룩한 공로

40) 양번(陽樊)/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 동남에 있었던 주 왕실의 직할령.

41) 온성(溫城)/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경내. 당시 주양왕의 동생 태숙(太叔) 대(帶)가 반란을 일으킨 다음 왕비 외후(隗后)와 같이 이곳에 머물렀다.

42) 렴우(斂盂)/지금의 하남성 농양현(濃陽縣) 동남

43) 양우(襄牛)/ 지금의 하남성 저현(雎縣) 경내

44) 원전은 ‘君取一, 臣取二 ’이다. 여기서 군(君)은 진문공(晉文公)을 말하고 신(臣)은 초나라 장수 성득신(成得臣-字는 子玉)을 말하며 일은 송 한 나라를 말하고 이는 위(衛)와 조(曹) 두 나라를 말한다.

45) 형옹(衡雍)/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서남에 있었던 정나라의 영지

46)천토(踐土)/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경내에 있던 지명으로 형옹(衡雍)의 서남 쪽.

47) 대로(大輅)/천자가 타고 다니던 황금장식으로 치장한 큰 수레

48) 동궁적시(彤弓赤矢)/ 붉은 칠을 한 활과 화살. 천자만이 사용하여 그 권위를 상징하였다.

49) 로궁로시(玈弓玈矢)/ 검은색을 칠한 활과 화살로 제후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50) 거창(秬鬯)/울금향(鬱金香)을 섞고 검은 기장으로 빚은 술. 울창주(鬱鬯酒)라고도 하며 제사를 지낼 때 신에게 바치는 향기 나는 술을 말한다. 울금향은 백합과의 다년초로써 튤립을 말하며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울창주를 빚는데 그 향을 사용한다.

51) 규찬(珪瓚)/옥으로 만든 자루가 만든 술잔으로 제사를 지낼 때 울창주(鬱鬯酒)를 담는 둥근 모양의 제기(祭器)

52) 호분(虎賁)/ 주나라 시대의 근위병(近衛兵)을 말함.

53) 『진문후명(晉文侯命)』/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의하면 『상서(尙書)』의 『진문후명(晉文侯命)』은 주평왕(周平王)이 글로 써서 당진의 문후(文侯)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양왕(周襄王)이 지어 진문공(晉文公)에게 내린 글이라는 것은 사기(史記)의 잘못이다.

54)삼행(三行)/ 춘추 때 각 제후국들의 군사 조직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당진(唐晉)의 국세가 강해지자 원래 전차로 구성된 상중하 삼군 외에 보병으로 이루어진 삼행을 더 두었다. 이것은 천자국인 주나라만이 둘 수 있는 6군의 군제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55) 질(絰)/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른 요질(腰絰)을 말한다.

56) 왕(汪)/지금의 산서성 징성현(澄城縣) 경내로 당시 섬진의 왕성(王城)과 하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당진의 영토.

57) 왕관(王官)/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남.

58) 신성(新城)/ 지금의 산서성 징성현(澄城縣) 동북. 섬진이 빼앗아 간 왕(汪)의 배후에 있다.

59) 원전은 ‘辰嬴嬖于二君’인데 진영은 회영(懷嬴)으로. 원래 회공(懷公)의 처였다. 회공이 몰래 당진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홀로 되었다가 다시 진문공(晉文公)의 처가 되었다.

60) 호(扈)/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쪽의 원무향(原武鄕) 경내

61) 소량(少梁)/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으로 황하의 서안에 있던 성읍임.

62) 기마(羈馬)/ 지금의 산서성 풍릉도현(風陵渡縣) 북쪽

63) 제의공(齊懿公)이 죽지(竹池)에 피서 갔다가 병융(丙戎)과 용직(庸職)에게 시해된 일을 말한다. 의공이 공자시절에 사냥을 나갔다가 병융의 부친과 사냥감을 사이에 두고 다투었으나 그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에 의공은 앙심을 품고 있다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자 이미 죽은 그 부친의 시체를 파내어 다리를 자른 후에 병융은 자기의 마부를 삼았다. 한편 용직의 아내는 미인이었는데 의공이 궁중에 불러 같이 잠자리를 하면서 용직은 자기의 참승(驂乘)으로 삼았다. 이에 두 사람이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의공이 죽지에서 낮잠을 자는 순간을 이용하여 살해하고 그 시체는 죽지에 던져버렸다.(제태공세가)

64) 수산(首山)/ 산서성 하곡부 황하 북안을 따라 솟아 있는 중조산맥(中條山脈)의 한 산으로 지금의 영제시(永濟市) 동남의 해발 2천 미터의 설화산(雪花山)을 말한다.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이 이 곳이라는 설도 있다.

65) 기원전 605년 공자귀생(公子歸生)과 공자송(公子宋)이 자라탕 사건으로 그 군주인 정영공(鄭靈公)을 살해하고 정양공(鄭襄公)을 세운 사건을 말한다.

66) 본서 사기의 내용과 연의(演義) 및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내용에 차이가 있어 표로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사신들의 인적사항

연의 56회의

내용

사기의 내용

소속국

이름

당진(唐晉)

극극(郤克)

묘(眇), 애꾸눈

루(僂)

노(魯)

계손행보(季孫行父)

독(禿), 대머리

건(蹇)

위(衛)

손량부(孫良夫)

건(蹇), 절름발이

묘(眇)

조(曹)

공자수(公子首)

루(僂), 곱사등이

67) 위문자(魏文子)/ 위문자는 당진의 도공(悼公) 때 위힐(魏頡)의 시호이다. 여기서 나이가 들어 물러났다는 사람은 시호가 범무자(范武子)인 사회(士會)를 말한다. 사회(士會)가 나이가 들었다고 은퇴하고 그의 후임으로 극극(郤克)을 천거한 것이다.

68) 융(隆)/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남 20키로 남

69) 안(鞍)/ 지금의 하남성 제남시(濟南市) 북서

70) 범(氾)/ 춘추 때 정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남

71) 마수(麻隧)/ 지금의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서북

72) 삼극(三郤)/ 극기(郤錡), 극주(郤犨), 극지(郤至)를 말한다.

73) 제후의 장례는 원래 7승의 수레로 치르게 되어 있으나 려공의 장례를 일승의 수레만으로 치르게 한 것은 려공을 군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74) 미하(靡下)/ 미계산(靡笄山) 아래라는 말이며 미계산은 지금의 산동성 제남시 서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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