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781 
· 어제 :  2,839 
· 최대 :  3,298 
· 전체 :  1,849,368 
 
  2009-02-17 18:38:566207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6. 전제(田齊)
운영자
 손방투지.jpg  (261.0K)   download : 149
 사본 - 田單s.jpg  (303.7K)   download : 87
일반

세가16. 전경중완(田敬仲完)



1. 진완분제(陳完奔齊)

진(陳)나라의 공자 진완이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가다 전씨로 개성하다.-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진타(陳他)의 아들이다. 완이 태어날 때에 주나라 태사가 마침 진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진려공이 그에게 진완의 장래에 대해 서죽(筮竹)으로 점을 쳐보게 청했다. 점괘가 《관괘(觀卦)》①에 변괘(變卦)로는 《비괘(否卦)》②가 나왔다. 태사가 점사를 풀이했다.

「점괘에 국가의 풍속과 민정을 살핀다고 했으니 이것은 군왕의 상빈(上賓)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는 장차 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세자의 신분임에도 군왕의 상빈이 된다는 점괘는 이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일도 자신이 아니라 그의 자손들 신상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만약에 그가 타국에 머문다면 필시 강씨(姜氏) 성의 나라일 겁니다. 강성은 사악(四岳)③의 후예라 양쪽이 동시에 크게 되는 세상 이치는 없습니다. 진(陳)나라가 쇠하게 되면 그의 후손은 강성(姜姓)의 나라에서 번성하게 된다는 점괘입니다.」

진려공은 진문공(陳文公)의 작은아들이다. 그의 모친은 채후(蔡侯)의 딸이다. 문공이 죽자 려공의 형인 세자 포(鮑)가 진후(陳侯)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환공(陳桓公)이다. 환공과 타는 배다른 형제이다. 이윽고 환공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채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 환공과 태자 면(免)을 죽이고 려공(厲公) 타(他)를 세웠다. 진후(陳侯)의 자리에 오른 려공은 다시 채나라 여인을 데려와 부인을 삼았다. 채녀(蔡女)는 려공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미 정을 통하고 있던 채나라 사람이 있었다. 채녀가 수시로 채나라에 드나들며 채인과 통정했다. 려공도 역시 채녀를 따라 채나라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환공의 작은아들 진림(陳林)이 자기의 부친과 형을 살해한 려공에게 원한을 품고 채나라 사람과 공모하여 려공을 채나라로 유인하여 죽였다. 진림이 스스로 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장공(陳庄公)이다. 그런 이유로 려공의 아들 진완은 진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단지 진나라의 대부가 되었다③. 려공이 음행을 저지르고 있던 그의 부인을 따라 나라 밖으로 나가 살해되었기 때문에 춘추에는 ‘채나라 사람들이 진타를 죽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려공의 죄악을 비난하기 위해 포폄(褒貶)을 행한 춘추필법의 기록이다.

진장공이 죽고 그의 동생 저구(杵臼)가 즉위하였다. 이가 진선공(陳宣公)이다. 선공 21년 기원전 672년, 희첩 사이에 낳은 어린 아들 관(款)을 후계로 삼기 위해 태자 어구(御寇)를 죽였다. 평소에 어구와 가깝게 지냈던 진완은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진나라에서 도망쳐 제나라로 갔다. 제환공이 진완을 제나라의 경(卿)으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말했다.

「고국을 떠나 오랫동안 객지에 살고 있는 몸이라 군주께서 마다하지 않으심도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일인데 어찌 감히 높은 벼슬자리까지 바라겠습니까?」

제환공이 진완을 공정(工正)에 임명하여 공인들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진완이 아직 진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제나라의 대부 의중(懿仲)이 진나라와 와서 자기의 딸을 진완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면서 그 일의 길흉에 대해 점을 쳤다. 점을 친 사람이 점괘를 풀이했다.

「이것은 봉황이 비상하며 내는 쟁쟁한 소리입니다. 그의 부인이 되어 태어나는 자식들과 후손들은 강씨 성의 나라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5세에 이르러 종족이 번창하게 되어 그 나라의 정경(正卿)의 자리에 오르고 8세에 이르면 그 지위가 더 오를 데가 없을 만큼 높아 질 점괘입니다.」

의중은 자기의 딸을 출가시켜 진완의 처로 만들고 얼마 후에 죽었다. 그리고 또 얼마 후에 진완은 자신과 가까이 지낸 세자 어구가 살해되자 곧바로 도망쳐 제나라로 들어가 살았다. 그때 제나라에서는 환공이 즉위하여 14년이 되는 해였다(기원전 672년).

진완이 죽자 그에게 경중(敬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경중은 치맹이(穉孟夷)를 낳았다. 경중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받은 봉읍 전(田)을 진(陳)과 함께 성씨로 삼았다.


주석

① 관괘(觀卦) : 坤(곤:☷)하 巽(손:☴)상의 괘로 관은 응시한다는 뜻이다.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여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행위다. 이 괘는 음이 양을 밀어내는 형상이다. 또 땅(坤) 위에 바람(巽)이 거칠게 불어오는 상태를 나타낸다. 군자의 도가 쇠하고 이욕(利慾)이 서로 다투어질서가 붕괴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심사숙고해서 현상의 깊은 곳까지 투철하게 봐야 한다. 이런 태도가 진실로 몸에 붙는다면 덕이 되어 사람들을 감화시킬 수 있다.

2)비괘(否卦) : 坤(☷)하, 乾(☰)상의 괘로 하늘은 위로 자꾸만 오르고 땅은 계속 밑으로 내려간다. 무슨 일이나 엇갈리고 배치(背馳)되어 잘 들어맞지 않는다. 주위의 모든 사람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팔방이 꽉 막힌 상태이다. 빈약한 기반 위에 강한 것이 올라타고 있어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모래 위의 누각과 같다.

3))사악(四岳) : 요순(堯舜) 때 사시(四時)를 관장하고 사방을 순수하면서 지방장관을 감시했던 관리들의 장이다.

3) 진완(陳完)의 계보도는 다음과 같다.

①陳文公 → ②桓公(鮑) → 世子 免

→ ③厲公(他)▶(자) 陳完(奔齊)

→ ④庄公 林

→ ⑤宣公 杵臼→태자御寇



2. 대두출소두진(大斗出小斗進)

-양식을 큰되로 빌려주고 작은되로 받아 제나라 민심을 사다.2.


전치맹이(田穉孟夷)는 민맹장(湣孟庄)을 낳고 전민맹장은 전문자(田文子) 수무(須无)를 낳았다.

전문자는 제장공(齊庄公)에게 출사하여 대부의 벼슬을 살았다.

당진의 대부 란영(欒盈)이 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제나라로 도망쳐 왔다. 제장공은 그를 맞이하여 매우 극진하게 대우하였다. 안영과 전문자가 힘써 간하여 란영을 받아드리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전문자가 죽고 그의 아들 전환자(田桓子) 무우(無宇)가 뒤를 이었다. 무우는 힘이 세고 용기가 있어 장공을 따라다니며 곁에서 모셨다. 장공이 무우를 매우 총애하였다.

무우가 아들 전무자(田武子) 개(開)와 전리자(田釐子) 걸(乞)을 낳았다. 전리자 걸은 대부가 되어 제경공(齊景公)을 모셨다. 그는 백성들에게 부세를 걷을 때는 작은되를 사용하고 백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줄 때는 큰되를 사용하여 은연중에 시혜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사려고 했다. 그러나 제경공은 전걸의 그런 행위를 금하지 않았다. 이 일로 해서 전씨들은 제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잡을 수 있었으며 전씨 종족들은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성들의 마음은 전씨들에게 쏠리게 되었다. 안영이 여러 번 경공에게 간했으나 경공은 듣지 않았다. 안자가 당진에 사자로 갔을 때 대부 숙향(叔向)에게 비밀리에 말했다.

「제나라의 국권은 머지않아 전씨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①


주석

①다음은 제경공(齊景公)의 재상 안영(晏嬰)이 당진에 사자로 가서 당진국 상대부인 숙향(叔向)에게 제나라의 국권은 장차 백성들의 민심을 산 전씨들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언한 《좌전(左傳)》 노소공(魯昭公) 3년(기원전 539년) 기사다.

「제나라는 지금 말세입니다. 제가 세상일을 모두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나라는 장차 진씨들 수중에 떨어질 겁니다. 군주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이 모두 진씨들에게 달려가 의탁하고 있습니다. 우리 제나라는 옛날부터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로 네 가지가 있었었습니다. 그것은 두(豆), 구(區), 부(釜), 종(鍾)입니다. 승(升)으로부터 차례대로 각기 네 배_씩 더하여 두, 구, 부로 규정하고 종만은 10배로 하고 있습니다. 즉 4승은 1두, 4두는 1구, 4구는 1부이고 10부를 1종이 됩니다. 그러나 진씨들은 두, 구, 부 세 가지 규격은 각기 하나_씩을 더하여 각기 다섯으로 사용하여 5승을 1두, 5두를 1구, 5구를 5부로 해서 결국 진씨들이 규정한 1종의 양은 1,250승이 되어 국가가 정한 640승_보다 거의 두 배가 많습니다. 그는 진씨 종족들이 사용하는 단위로 농민들에게 양식을 대여했다가 후에 나라에서 규정한 단위를 사용하여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또한 산에서 나는 목재나 땔감을 시장에 내다 팔 때도 비용이나 이문을 붙이지 않고 현지에서 파는 가격대로 팔고, 물고기, 소금, 큰 조개, 작은 조개 등도 시장에서 팔 때는 바닷가 현지에서 받는 가격만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나라의 백성들은 자기가 생산한 재화 중 2/3는 군주에게 바치고 나머지 1/3만으로 자신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습니다.군주가 거둬 놓은재화들은 썩고 곰팡이가 피고 있으며,가난에 찌든백성들 중에서 존경받는 삼로일지라도 추위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나라의 시장에는 짝을 지어 파는 정상적인 신발의 가격은 싸고 오히려 형벌을 받아 한쪽 발이 짤린 사람들이 신는 짝신의 가격이 비쌉니다. 혹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로라도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백성들은 그 사람을 마치 부모처럼 여기며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이치처럼 민심이 그 사람에게 쏠리게 되는 법입니다. 비록 그 사람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싶지 않다고 해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진씨들의 먼 선조인 기백(箕伯), 직병(直柄), 우수(虞遂), 백희(伯戲) 등의 신령이 진(陳)나라를 세운 호공(胡公)과 대희(大姬)의 후손들을 돕고 있어 종내에 제나라는 장차 진씨들의 수중에 떨어질 겁니다.」

※승(升): 춘추 때는 1홉에 해당하는 0.2리터였으나 점차로 증가하여 송원(宋元) 때는 1리터, 명나라 때는 1.8리터가 되었다가 현대는 반 되에 해당하는 1리터로 규정했다.



3. 전걸위상(田乞爲相) 전제지정(專齊之政)

전걸이 제나라 상국이 되어 정권을 오로지 하다. -

안영이 죽었을 때 당진에서는 범(范) 씨와 중행(中行) 씨가 란을 일으켰다. 당진이 재빨리 범씨과 중행씨를 공격하자 두 종족은 제나라에 양식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전걸(田乞)이 란을 일으킬 생각으로 대부들과 결당하여 범씨와 중행씨를 돕고자 했다. 그래서 경공에게 말했다.

「범씨와 중행씨는 우리 제나라에 많은 덕을 베풀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경공이 전걸에게 양식을 주어 두 종족을 도우라고 했다. 경공의 태자는 어려서 일찍 죽었다. 경공에게는 사랑하는 궁녀가 있었는데 이름을 예자(芮子)라 했다. 예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도(荼)라고 지었다. 경공이 노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상경 국혜자(國惠子)와 고소자(高昭子)를 불러 도를 태자로 세우라고 명했다. 경공이 이윽고 죽자 고소(高昭)와 국혜(國惠) 두 상경이 도를 제후(齊侯)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안유자(晏孺子)다. 그러나 전걸은 안유자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경공의 서장자 양생(陽生)을 세우려고 하였다. 양생은 평소에 전걸과 가까이 지내어 교분이 두터웠다. 안유자가 제후의 자리에 오르자 양생은 노나라로 몸을 피했다. 전걸이 겉으로 고소자와 국혜자에게 복종하는 체하고 매일 아침 조회에 두 사람의 참승(驂乘)이 되어 말하곤 했다.

「처음부터 여러 대부들이 안유자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제 유자가 이미 섰고 또한 대감께서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대부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을까 스스로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다시 대부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 속였다.

「고소자가 그대 대부들을 두려워하여 공격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으나 아직 실행해 옮기기 전이니 대부들께서 먼저 손을 써야 합니다.」

여러 대부들이 전걸의 말을 듣고 따랐다. 전걸과 포목 및 여러 대부들이 자기들의 가병을 이끌고 공궁으로 진입하여 안유자를 공격하였다. 고소자가 알고 국혜자와 함께 안유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병력수가 부족한 공실의 군사들이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전걸이 군사들을 이끌고 국혜자의 뒤를 추격했다. 국혜자는 추격군을 따돌리고 거나라로 도망쳤다. 전걸이 다시 공궁으로 돌아와 고소자를 죽였다. 안영의 아들 안어(晏圉)는 노나라로 도망쳤다.①

전걸이 사람을 노나라에 보내 양생을 모셔왔다. 양생이 제나라에 돌아와서 전걸의 집에 가서 숨어 지냈다. 전걸이 기회를 엿보다가 여러 대부들을 청하며 말했다.

「오늘 밤 나의 아들 상(常)의 모(母)가 어숙지제(鱼菽之祭)②를 마련했으니 왕림하시어 음식을 즐겨주시면 저로써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여러 대부들이 전걸의 집에 모여 음식을 즐겼다. 전걸이 양생을 전대에 넣고 좌중의 한 가운데에 두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무르익자 전걸이 전대를 풀어 양생을 나오게 하고는 외쳤다.

「제나라의 군주가 여기 계시다!」

여러 대부들이 모두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이어서 양생이 여러 대부들에게 맹세를 하려는 순간 전걸이 거짓말로 크게 외쳤다.

「나와 포목(鮑牧)이 공모하여 양생을 제후(齊侯)로 세우기로 했습니다.」

포목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대부들은 선군이 당부하신 말씀을 벌써 잊었는가?」

자신을 추대하려고 생각했던 여러 대부들이 후회하는 기미를 보이자 양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나를 제위에 올릴만하면 울리고, 아니라면 그만 두어도 괘념치 않겠소.」

화가 자기에게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포목이 다시 말을 바꾸어 말했다.

「모두가 경공의 아들인데 어찌하여 불가하다고 합니까?」

결국 양생은 전걸의 집에서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제도공(齊悼公)이다. 제도공은 즉시 사람을 시켜 안유자를 태(駘)로 옮겨가 살도록 했으나 안유자는 태에 도착도 하기 전에 도중에서 살해되었다. 도공이 제후의 자리에 오르고 전걸이 상국이 되어 제나라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다.


주석

①원전에는 ‘晏孺子奔魯’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제태공세가》의 ‘晏圉奔魯’를 착각한 사마천의 잘못이다. 《제태공세가》에 안유자(晏孺子)는 고·국(高國) 두 상경이 대부들과의 싸움에서 진 후에도 계속 살아있다가 후에 전걸(田乞)이 노나라에서 몰래 데려온 양생을 옹립할 때 살해되었다. 안어(晏圉)는 안영의 아들이다.《춘추좌전(春秋左傳)》의 애공 6년 조에도 ‘晏圉奔魯’의라는 기록이 있다.

②어숙지제(魚菽之祭) : 물고기와 콩과 같은 일상적인 음식을 준비하여 행하는 제사로 간소하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4. 德施人之所欲君其行之(덕시인지소욕군기행지), 刑罰人之所惡臣請行之(형벌인지소오신청행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덕과 시혜를 군주께서 행하시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형벌은 신하인 제가 행하겠습니다. -


도공 4년 기원전 485년, 전걸이 죽고 그의 아들 전상(田常)이 뒤를 이었다. 이가 전성자(田成子)이다.

포목과 도공사이에 틈이 생겨 포목이 도공을 시해했다. 제나라 국인들이 도공의 아들 임(壬)을 제후로 세웠다. 이가 간공(簡公)이다. 전성자와 감지(闞止)는 제나라의 좌상과 우상을 각각 맡아 간공을 보좌하였다. 전상은 마음속으로 감지를 매우 꺼려했다. 감지는 간공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 권력으로써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상은 옛날 전리자(田釐子)의 행위를 따랐다. 백성들에게 양식을 빌려 줄 때 큰되로 양식을 빌려주고 받을 때는 작은되로 받았다. 제나라 백성들이 노래를 불러 전성자의 은혜를 노래했다.


嫗乎采芑(구호채기)

풀을 뜯는 노친네여



歸乎田成子(귀호전성자)

전성자에게 가보시구려!


대부들이 조례를 드릴 때 간공의 어자 전앙(田鞅)이 간공에게 간했다.

「전상과 감지 두 사람은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택하시어 정사를 맡기십시오.」

간공이 전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전상(田常)과 전씨의 종족들 사이에 틈이 생기자 전씨들의 먼 방계 족인인 전표(田豹)가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자아가 전표에게 말했다. 자아(子我)는 감지의 자다.

「내가 전씨의 적손들을 모두 죽이고 그대를 전씨들의 수장으로 만들어 준다면 어떻겠는가?」

「신은 전씨들의 먼 방계 지족일 뿐인데 어찌 그들의 수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전표가 자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어서 전씨들의 부중으로 달려가간 전표는 자아가 전씨들을 모두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장차 자아가 전씨들을 모두 죽이려하고 있습니다. 전씨들이 먼저 선수를 쓰지 않으면 머지않아 화가 미칠 겁니다.」

자아는 공궁에서 계속 머물렀다. 전상의 4형제가 수레를 타고 공공으로 달려가 자아를 죽이려고 하였다. 자아가 문을 굳게 닫아걸고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그때 부인과 함께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간공은 전상이 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보내 전상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했다. 태사 자여(子余)가 말리며 말했다.

「전상의 행위는 감히 란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라에 해를 끼치는 간적(奸賊)을 잡아서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간공이 전상을 죽이려는 생각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공궁에서 물러 나왔으나 간공이 여전히 노기가 풀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살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나라밖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전자행(田子行)이 도망치던 전상을 향해 말했다.

「의심하여 일을 지체시키는 자는 일을 망치는 주범입니다.」

전상이 도망치다 말고 돌아와 자아를 공격하였다. 자아가 그의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전씨들과 대항하였으나 당해 낼 수 없었다. 이윽고 자아가 싸움에 져서 도망쳤다. 전씨의 가병들이 자아의 뒤를 추격하여 잡아 죽였다.

와중에 간공이 나라밖으로 도망쳤으나 전씨들의 가병들이 뒤를 추격하여 서주(俆州)에서 잡았다. 간공이 한탄하였다.

「내가 일찌기 어자 전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일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간공이 제후(齊侯)의 자리에 다시 오르게 되면 자기들을 모두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전씨들이 간공을 죽였다. 간공은 제후의 자리에 선지 4년 만에 죽었다. 간공의 동생 오(驁)를 제후로 세운 전상은 스스로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오가 제평공(齊平公)이다.

간공을 시해한 전상은 제후들이 자기의 죄를 묻기 위해 토벌하러 오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노와 위 두 나라에는 옛날에 침략하여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고 서쪽으로는 당진(唐晉)의 유력한 세가인 한(韓), 위(魏), 조(趙) 등의 삼가와 맹약을 맺었으며, 남쪽의 오나라와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 수호했다. 그리고 안으로는 공덕을 쌓고 은혜와 상을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을 샀음으로 비로소 제나라의 인심은 회복되었다.

전상이 평공에게 말했다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덕은 모두 주군께서 행하시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형벌은 모두 신이 행하겠습니다.[德施人之所欲 君其行之, 刑罰人之所惡 臣請行之]」

그렇게 행하기를 5년이 되자 제나라의 모든 정권은 전상이 장악하게 되었다. 전상은 이어서 포씨(鮑氏), 안씨(晏氏), 감씨(闞氏) 등의 종족들과 공족들 등의 제나라의 강성한 세력을 모두 죽여 제거하고 제나라 땅을 두 쪽으로 갈라 안평(安平)의 이동에서 랑야산(琅邪山)에 이르는 지역을 전씨들의 봉지로 삼았다. 이로써 전씨들의 봉읍은 평공이 다스리는 공실의 영지보다 더 넓게 되었다.

전상은 제나라에서 키가 7척 이상의 여인들 백 수십 명을 선발하여 관사를 지어 살게 하고 전씨들의 종족이면 아무나 드나들게 하여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이어서 전상이 죽었는데 그가 낳은 자식들 중 아들만 70여 명이나 되었다.



5. 전씨대제(田氏代齊)

전씨가 강씨의 제나라 국권을 차지하다. -

전상이 죽고 그의 아들 양자(襄子) 전반(田盤)이 후사를 물려받아 제나라 상국의 자리에 올랐다. 전상의 시호는 성자(成子)다.

전양자가 제선공(齊宣公)의 상국이 되었다. 당진의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힘을 합하여 지백(智伯)을 죽이고 그의 영지를 나누어 가졌다.① 전양자는 자신의 형제들과 종인들을 모두 제나라의 크고 작은 읍의 대부로 임명하고 삼진과는 사절을 보내 통교했다. 이로써 제나라의 국권은 이미 전씨들의 수중에 들어간 것과 같이 되었다.

전양자가 죽고 그의 아들 전장자(田庄子) 백(白)이 뒤를 이어 상국의 자리에 올라 제선공을 모셨다.

제선공 43년 기원전 413년, 당진을 공격하여 황성(黃城)②을 파괴하고 양호(陽狐)②를 포위하였다. 다음 해에 노나라를 정벌하고 갈(葛)과 안릉(安陵)③을 점령하였다. 또 다음해에 노나라를 정벌하여 성 한 개를 빼앗았다.

전장자가 죽고 그의 아들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사위(嗣位)했다. 제나라 상국인 된 화(和)가 제선공을 모셨다.

선공 48년 기원전 408년, 노나라를 쳐들어가 성읍(郕邑)을 빼앗았다. 다음해인 기원전 407년 제선공과 정나라 사람이 서성(西城)에서 회합했다.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여 관구(毌丘)④를 점령하였다. 제선공이 재위 51년만인 405년에 죽었다. 전회(田會)가 늠구(廩丘)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선공이 죽고 그의 아들 강공(康公) 대(貸)가 섰다.

강공 14년 기원전 391년, 강공이 주색이 탐닉하여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다. 태공 전화가 강공을 동해의 해변으로 보내 식읍으로 성 한 개만을 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면서 조상에게 제사나마 끊어지지 않고 지내게 했다. 그 다음해에 노나라가 쳐들어와 평륙(平陸)에서 제나라 군사들을 패주 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인 기원전 388년에 태공과 위무후(魏武侯)가 탁택(濁澤)에서 회견하고 자신이 제후의 반열에 설 수 있도록 주왕에게 상주해 주도록 부탁했다. 위무후가 사자들을 주천자와 제후들에게 보내어 제나라 상국 전화를 제후(齊侯)로 인정해 달라고 청했다. 주천자가 위문후의 청을 허락했다.


주석

1)당진국(唐晉國)의 권력을 육경(六卿)이 다투다가 먼저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가 탈락하자 나머지 4가 중에서 지씨(智氏)가 가장 강력했다. 지씨의 수장 지백(智伯)이 한(韓), 위(魏) 이가(二家)를 강압하여 조씨(趙氏)를 진양(晉陽)에서 포위해서 멸하려고 했으나 중도에 한위(韓魏) 이가의 배신으로 지씨들은 멸망하고 당진국은 한위조 삼가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기원전 453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진양성(晉陽城) 싸움이라고 하고 이 싸움 이후 당진국의 정권을 차지한 삼가가 후에 당진국을 삼분하여 독립한 사건을 사가들은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고 한다. 이후로 중국 역사는 춘추시대를 마감하고 삼진과 제나라의 전제정권에 나머지 진(秦), 초(楚), 연(燕) 3국의 7국이 합종연횡으로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들어갔다. 이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한다.

2)황성(黃城)은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관현(冠縣)이고 양호(陽狐)역시 조나라 성읍으로 지금의 하북성 대명현(大名縣) 동북이다.

3)원문은 ‘伐魯葛及安陵’이다. 노(魯)는 노성(魯城)으로 춘추 때 지금의 하남성 장갈시(長葛市) 언릉현(鄢陵縣)에 있었던 노나라의 탕목읍(湯沐邑)으로 전국 때는 위나라에 땅이 되어 안릉(安陵)으로 개칭했다. 후에 위양왕(魏襄王)이 그의 동생을 안릉군(安陵君)에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육국연표》에는 ‘伐魯葛及安陽’이라고 했다. 안양은 전국 때 위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 서남이다.

4)관구(毌丘) : 관(毌)은 관(貫)의 잔결자(殘缺字)다. 춘추 초기 때 지금의 산동성 조현(曹縣) 서남쪽에 있었던 소제후국이 있던 곳을 말한다.

5)늠구(廩丘) : 전국 때 제나라 성읍으로 지금의 산동성 범현(范縣)과 견성시(甄城市) 사이의 땅이다.

6))평륙(平陸) :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북 10키로

7)탁택(濁澤) : 지금의 산서성 운성시(運城市) 경내 서쪽이다. 기원전 389년 전화가 산동성 임치성(臨淄城)에서 직선거리로 약 700키로 떨어진 먼 거리의 탁택에서 위무후를 만난 목적은 자신을 제나라 군주로 책봉해주기를 주왕에게 상주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369년 한·조(韓趙) 연합군이 위혜왕이 이끄는 위군을 탁택에서 대파하자 위혜왕은 패잔병을 이끌고 안읍(安邑)으로 들어가 농성했다. 한조 두 나라의 군주는 전후 처리에 이견이 생겨 안읍에 대한 포위를 풀고 철수했기 때문에 위나라는 간신히 멸망의 위기에 벗어날 수 있었다.




6. 익수원수(溺水援手)

물에 빠진 사람은 죽기 직전에 구하라! -


제강공 19년 기원전 386년, 주왕이 전화(田和)를 제나라의 군주로 책봉했다. 이로써 제나라의 전화는 주왕실에서 인정하는 제후들의 반열에 섰다. 이로써 제나라는 기년(紀年)을 새롭게 시작하였다.

제후(齊侯) 태공 화(和)는 즉위 다음 해인 기원전 385년에 죽고 그의 아들 환공(桓公) 오(午)가 뒤를 이었다.①

환공 오 5년 기원전 380년②, 섬진과 위(魏)가 힘을 합하여 한(韓)나라를 공격하였다.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환공(桓公)이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빨리 구하는 것과, 시간을 두고 정세를 보아가며 구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우리에게 이롭겠는가?」

추기(騶忌)가 말했다.

「구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간붕(段干朋)이 말했다.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분할되어 위나라의 땅이 될 겁니다. 반드시 구해야만 합니다.」

전신사(田臣思)가 말했다.

「두 분의 말씀은 모두 지나침이 있습니다. 섬진과 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한다면 초(楚)와 조(趙)는 틀림없이 구원병을 보낼 겁니다. 이것은 즉 하늘이 연(燕)나라를 우리에게 주는 경우가 됩니다.」

환공이 듣고 말했다.

「좋은 의견이오!」

환공은 그 즉시 은밀히 한나라 사자에게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통고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한나라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제나라의 구원병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섬진과 위나라에 대항하여 교전에 들어갔다. 초와 조가 듣고 과연 한나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제나라가 한나라를 군사를 일으켜 한나라를 돕는다고 행군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연나라를 급습하여 상구(桑丘)를 차지하였다.③


주석

1)《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태공의 뒤를 이은 군주는 환공(桓公) 오(午)가 아니라 제후 섬(剡)이라고 했다. 태공이 죽은 해인 기원전 385년에 즉위한 섬은 재위 11년 째인 기원전 374년 동생인 환공에게 시해당했다. 환공 오는 18년 동안 재위하다가 기원전 356년에 죽었다.

2)제후(齊侯) 섬(剡) 5년이다.

3)상구(桑丘)는 경성(敬城)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하북성 서수현(徐水縣) 경내다.. 원전의 ‘齊因起兵襲燕國, 取桑丘’ 이 기사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양관(楊寬)의 《전국사(戰國史)·부록(附錄)》 3권에 《전국책·연책》과 《맹자(孟子)·양혜왕》및 《공손축(公孫丑)》에 의거 ‘齊國趁秦魏攻韓, 趙楚救韓之機, 起兵伐燕一事, 應在齊宣王6年’ 즉 ‘제나라는, 진위 두 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조초 두 나라가 군사를 도원하여 한나라를 구원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정벌한 일은 제선왕 6년의 일이다.’라는 기사는 제후 섬 5년인 기원전 380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제선왕 6년인 312년의 일이라고 했다.



7. 즉묵대부(卽墨大夫), 아읍대부(阿邑大夫)

평판이 나쁜 즉묵대부는 상을 주고 평판이 좋은 아듭대부는 팽살하다.


환공 6년 기원전 379년, 위나라를 구원했다. 환공이 죽고 그의 아들 위왕(威王) 인제(因齊)가 섰다.① 이해에 제강공(齊康公)이 죽어 제나라 강씨들의 후사가 끊어졌다. 제강공에게 주었던 식읍은 모두 전씨들이 차지했다.

제위왕 원년 기원전 378년②, 삼진이 힘을 합하여 제나라에 국상이 일어난 틈을 이용하여 쳐들어와 영구(靈丘)③를 공격했다.

위왕 3년 기원전 376년, 삼진이 당진이 공실을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위왕 6년 기원전 373년④, 노나라가 제나라를 정벌하여 양관(陽關)⑤에 이르렀다. 삼진이 다시 제나라를 공격하여 박릉(博陵)⑥을 빼앗아 갔다. 다시 위(衛)나라가 쳐들어와 설릉(薛陵)⑦을 빼앗아 갔다.

위왕 9년 기원전 370년, 조나라가 쳐들어와 견(甄)⑧ 땅을 빼앗아 갔다.

위왕이 처음에 즉위하자⑨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모든 일을 경대부(卿大夫)들에게 맡겼다. 위왕이 즉위하여 9년이 되도록 제후들이 줄을 이어 제나라를 침략해 왔으나 제나라의 사대부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위왕이 즉묵(卽墨)⑩의 대부를 불러 물었다.

「그대가 즉묵의 대부로 봉한 이래로 매일 그대를 헐뜯는 상소가 빗발 치 듯 했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 즉묵의 정세를 한번 살펴보고 오게 했더니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으로 만들고 백성들은 생활이 풍족하게 되었으며 관리들은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아 우리 제나라의 동방을 안녕하게 했다. 이것은 그대가 나의 좌우의 사람들을 매수하여 환심을 사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왕이 말을 마치고 즉묵대부에게 만 호의 고을에 봉했다. 다시 아읍(阿邑)⑪의 대부를 불러 말했다.

「그대를 아읍의 대부로 봉한 이래로 그대에 대한 칭찬이 매일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사람을 시켜 아읍을 한번 살펴보라고 했더니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으로 바꾸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옛날에 조나라가 견읍(甄邑)을 침공해 왔을 때 그대는 능히 그들을 물리치지도 못했고, 위나라가 쳐들어와 설릉(薛陵)을 빼앗아 갔을 때는 그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이것은 그대가 폐백으로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매수하여 좋은 말만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왕이 그날로 아읍의 대부를 가마솥의 끓은 물에 삶아 죽였다. 다시 자기의 좌우의 사람들 중 아읍 대부로부터 뇌물을 받은 자들을 모조로 색출하여 모두 함께 삶아 죽였다.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조와 위나라를 격파하여 빼앗긴 땅을 찾아오고 다시 위나라 군사들을 패주 시키고 그 뒤를 추격하여 탁택(濁澤)⑫의 땅에서 위혜왕(魏惠王)을 포위하였다. 위혜왕이 관(觀) 땅을 바치면서 화의를 청해왔다. 조나라는 장성(長城)을 돌려주었다. 제나라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떨게 만들었다. 제나라의 백성들은 아무도 감히 거짓을 말하지 않게 되었으며 주어진 일은 온 정성을 다하여 행했다. 제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제후들이 듣고 이후 20여 년 동안은 감히 제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 못했다.


주석

1)태공의 전화의 뒤를 이은 군주는 환공 오(午)가 아니라 제후(齊侯) 섬(剡)이다. 즉 환공 오 6년은 제후 섬(剡) 6년으로 기원전 379년이다. 제후 섬 재위 11년인 기원전 374년에 동생 환공 오가 섬을 시해하고 자립했다. 환공 오는 재위 18년인 기원전 356년에 죽고 아들 위왕(威王) 인제(因齊)가 섰다. 제강공(齊康公)은 제후 섬(剡) 6년에 죽었다.

2)제후(齊侯) 섬(剡) 7년이다.

3)영구(靈丘)는지금의 산동성 고당현(高唐縣) 남이다. 이해에 제나라에는 국상이 없었다.

4)환공 오 원년이다.

5)양관(陽關) :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동북. 원래 노나라 영지였으나 제나라가 빼앗아 간 땅이었다.

6)박릉(博陵) :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서북

7)설릉(薛陵) :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경내 서

8)견(甄) : 춘추 때 위(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북

9)제위왕의 즉위년은 기원전 355년이다.

10)즉묵(卽墨) : 지금의 산동성 평도현(平度縣) 경계의 동남

11)아읍(阿邑) :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아성진(阿城鎭)이다.

12)탁택(濁澤) : 전목(錢穆)의 설에 따르면 탁택은 관택(觀澤)으로 관은 지금의 하남성 청풍현(淸豊縣)으로 《육국연표》에 탁택에서 위왕(魏王)을 포위한 나라는 조나라라고 했다. 또 양관(楊寬)의 《전국연표》369년 조의 ‘한조(韓·趙)가 위나라의 공주(公主)완을 도와 왕위에 올리기 위해 위혜왕(魏惠王)을 탁택에서 포위했다’라는 기사는 제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8. 논금치국(論琴治國)

- 거문고의 이치로 치국을 논하다. -


추기자(騶忌子)라는 선비가 북과 거문고를 들고 위왕의 알현을 청했다. 위왕이 기뻐하며 추기자를 자기가 묶고 있던 방의 오른 쪽 방을 내주면서 머물게 하였다. 이윽고 위왕이 거문고를 타자 추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 말했다.

「정말로 거문고를 잘 타십니다.」

위왕이 돌연히 얼굴색을 바꾸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서 거문고를 던져버리고 허리에서 칼을 뽑으면서 말했다.

「그대가 나의 거문고 소리를 언제 들어봤다고 감히 잘 탄다고 하는가?」

「무릇 대현(大弦)의 소리는 봄과 같이 온화하고 느긋함은 군주의 마음과 같고, 소현(小弦)은 맑고 청렴하니 재상의 마음과 같으며, 잡을 때에는 깊숙이 하고 놓을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니 이것은 정령(政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로써 모두 함께 하며 대소의 음들이 서로 얽혀 아름답고 묘한 소리를 내니 꺾이고 똑바르지 못한 음들이라고는 하나 다른 음들은 해치지 않으니 이것은 사계절이라 할만 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군께 거문고를 제법 잘 타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음을 제법 아는 구나!」

「어찌 음만 이겠습니까?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이치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위왕이 다시 발연이 화를 내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그대와 오음(五音)의 이치에 대해 토론한다면 나는 그대보다 못하다고 인정하겠소.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 어찌하여 한낱 거문고 위에 달린 줄 사이에 있다고 말 할 수 있단 말이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봄과 같이 온화하고 느긋한 대현의 소리는 군주의 마음에, 맑고 청렴한 소현의 소리는 재상의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을 잡을 때에는 깊숙이 하며 놓을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행하니 이것은 정령(政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리로써 모두 함께 하며 대소의 음들이 서로 얽혀 아름답고 묘한 소리를 내니 꺾이고 똑바르지 못한 음들이라고는 하나 다른 음들은 해치지 않으니 이것은 사계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무릇 반복해서 연주해도 어지럽히지 않음은 나라가 잘 다스려져서 창성하게 됨을 의미하며, 앞과 뒤가 쉴 사이 없이 재빠르게 연결되는 것은 옛날에 이미 망했거나 앞으로 망하게 될 일을 보존시킬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 연유로 거문고의 음률을 다스릴 줄 알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저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일은 오음을 잘 다스리는 거문고를 타는 일과 같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옳은 말이오!」




9. 지용은어시상국(智用隱語試相國)

- 순우곤이 은어로 추기의 지혜를 시험하다.-


추기자가 위왕을 접견한지 3개 월 만에 제나라 상국의 인끈을 받았다. 순우곤(淳于髡)이 보고 말했다.

「그대는 참으로 말을 잘 합니다! 이 곤(髡)이 비록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몇 마디 드릴까 합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신하된 자가 국군을 모실 때에는 몸과 마음을 다해 주도면밀하게 모셔 절대 잘못됨이 없게 하면 그대의 몸과 명성은 흥성할 것이고, 만약에 불초하여 만전을 기하지 못하여 일을 잘못되게 한다면 그대의 몸과 명성은 모두 잃게 될 것이오.」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가슴속에 새겨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돼지기름을 수레의 굴대에 바르는 이유는 수레바퀴를 잘 구르게 하기 위해서이나, 굴대의 구멍을 네모나게 뚫으면 수레가 굴러갈 수 없는 법이오.」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군주의 측근들을 잘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활을 만들기 위해 오래되어 잘 마른나무를 골라 아교로 붙이는 행위는 나무들이 잘 붙게 하기 위해서이나, 나무의 속이 비고 나무가 서로 잘 맞지 않아 틈이 생기면 나무들을 잘 붙일 수가 없는 법이오.」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만백성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여우가죽으로 만든 갖옷이 비록 헤졌다고 개가죽으로 깁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오.」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군자들을 잘 선택하여 소인들이 끼지 못하도록 조심하겠습니다.」

「비록 커다란 수레라 할지라도 균형을 잡지 못하면 평소에 실을 수 있는 짐을 싣지 못하는 법이며, 금(琴)과 슬(瑟)도 서로 화음을 맞추지 못한다면 오음(五音)을 이룰 수 없는 법이오.」

「삼가 법률을 개선하고 간사한 관리들을 감독하는데 온 힘을 쏟겠습니다.」①

순우곤이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자기를 따라오고 있던 종자를 향해 얼굴을 돌리더니 말했다.

「내가 은유적으로 다섯 가지를 말했는데 저 사람은 모두 그 말에 부합하는 대답을 했다. 저 사람은 필시 머지않아 후(侯)에 봉해지리라!」

그로부터 일년 후에 추기자는 하비(下邳)②에 봉해지고 성후(成侯)의 작위를 받았다.


주석

1) 원문은 다음과 같다.

淳于髡 「得全全昌, 失全全亡」

騶忌子 「謹受令, 請謹毋離前」

淳于髡 「狶膏棘軸, 所以爲滑, 然而不能運方穿」

騶忌子 「謹受令, 請謹事左右」

淳于髡 「弓膠昔干, 所以爲合, 然而不能附合疎罅」

騶忌子 「謹受令, 請謹自附于萬民」

淳于髡 「狐裘雖敝, 不可褓以黃狗之皮」

騶忌子 「謹受令, 請謹擇君子, 毋雜小人其間」

淳于髡 「大車不較, 不能載其常任, 琴瑟不較, 不能成其五音」

騶忌子 「謹受令, 請謹修法律而督奸吏」

2)하비(下邳)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비주시(邳州市) 경내 남. 서주(徐州)시 동 50키로.



10. 위왕지보(威王之寶)

- 제위왕의 보물 -


위왕 23년 기원전 356년, 조왕과 평륙(平陸)①에서 회견했다.

위왕 24년 기원전 355년, 양혜왕(梁惠王)과 교외에서 회동하여 같이 사냥을 하였다. 양혜왕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무슨 보물을 가지고 계십니까?」

위왕이 대답했다.

「저는 아무런 보물도 없습니다.」

「우리 위나라는 비록 소국이나 그 지름이 일 촌이 넘는 구슬을 달고 다니면서 앞뒤를 밝히는 수레가 12대가 있습니다. 12대의 수레에는 각기 10개씩의 구슬을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만승지국의 국왕이신 대왕께서 보물이 없다 하십니까?」

「과인이 가지고 있는 보물은 대왕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과인의 신하들 중에 단자(檀子)라고 있는데 그로 하여금 남쪽의 변경을 지키게 했더니 초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동쪽으로 쳐들어올 생각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상(泗上)의 12제후국들은 모두 단자로 인하여 우리 제나라에 래조하게 되었습니다. 단자 외에 반자(肦子)라는 신하가 있는데 이 사람으로 하여금 고당(高唐)을 지키게 했더니 조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 변경으로 와서 하수의 고기를 감히 잡지 못하게 했습니다. 내 신하 중에는 검부(黔夫)라는 관리가 있는데 서주(徐州)를 지키게 했더니 연나라는 우리 제성(齊城)의 북문을 조나라는 서문을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며 우리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검부를 따라 다니는 무리들은 무려 7천 호에 이르고 있습니다. 또한 종수(鍾首)란 신하가 있는데 그로 하여금 나라 안의 도적을 잡게 했더니 백성들은 길거리에 떨어진 물건도 주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종수라는 보물은 나라 안의 1000리 길을 밝히고 있는데 어찌 12승에 수레에 비견할 수 있습니까?」

양혜왕이 무참하게 되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1) 제위왕 23년은 기원전 332년이고 기원전 356년은 제환공 18년에 죽고 제위왕 군위에 오른 해다. 이 해에 위혜왕, 조성후, 제위왕, 송환후와 평륙(平陸)에서 회합하고 연문공(燕文公)과는 아읍(阿邑)에서 회견했다. 평륙은 현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경내다. 진나라가 상앙(商鞅)을 좌서장(左庶長)에 임명하여 변법을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2)사상(泗上)의 12제후국 : 사수(泗水) 유역에 있던 군소제후국으로써 추(鄒="주(邾))," 노(魯), 송(宋), 진(陳), 등(滕), 설(薛), 임(任), 예(郳), 담(郯), 거(莒), 비(邳), 비(鄪), 등의 소국




11.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 -


위왕 26년 기원전 353년①, 양혜왕이 조나라의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조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제위왕은 대신들을 불러 그 대책을 물었다.

「조나라를 구하는 것과 구하지 않는 것 중 어느 편이 우리에게 유리하겠소?」

추기자가 대답했다.

「구하지 않는 편이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단간붕이 말했다.

「구하지 않는 것은 의롭지도 이롭지도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어떤 연유에서요?」

단간붕이 대답했다.

「대저 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점령하면 우리 제나라에게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조나라를 구원한다고 하면서 조나라의 교외에 군사를 주둔시키면 조나라는 위나라의 공격을 받지 않게 되고 또한 위나라도 한단을 감히 공격할 수 없어 그들의 군사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우리가 군사들을 남으로 이동시켜 위(魏)나라의 양릉(襄陵)②을 공격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피로에 지치게 하면 우리는 그 틈을 이용하여 한단(邯鄲)을 공략할 수 있습니다.」

위왕이 단간붕의 계책을 따랐다.

그후 성후 추기와 전기(田忌)의 사이에 틈이 생기자 공손열(公孫閱)이 추기에게 말했다.

「상공께서는 어찌하여 위나라를 정벌하자는 계책을 내어 전기를 장군으로 삼아 출정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전기가 싸움에서 이겨 전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곧 상공의 계책이 성공하게 됨을 의미하고, 만일 전기가 싸움에서 진다면 전사하던가 아니면 패주해 올텐데 그리되면 그의 목숨은 상공의 수중에 떨어질 겁니다.」

그래서 성후 추기가 위왕에게 상주하여 전기로 하여금 군사를 남쪽으로 이동하여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공격하게 했다. 그해 10월 위나라가 한단을 함락시켰다. 제나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계릉(桂陵)③에서 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제나라는 이후로 제후국들 중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어 스스로 왕호를 칭하며 천하를 호령했다.

위왕 33년 기원전 346년, 대부 모신(牟辛)을 죽였다.④

위왕 35년 기원전 344년, 공손열이 다시 성후 추기에게 말했다.

「시정의 점을 치는 복자(卜者)에게 황금 십금을 주고 ‘나는 전기의 사람이다. 전기 장군께서 자신은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겨 그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켰다고 하면서 대사를 행하면 그 결과가 길할지 아니면 흉할지를 점쳐보라고 했소.’라고 말하게 하십시오 」

이윽고 추기의 명을 받은 사람이 복자(卜者)를 찾아가 그가 시키는대로 했다. 계획대로 추기가 사람을 시켜 복자를 체포하여 왕의 처소로 데려와 점복의 일이 사실임을 증명하며 전기를 모함하려고 했다. 전기가 듣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이끌고 임치성으로 들어가 성후를 공격하여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전기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④

위왕이 재위 36년 만인 기원전 343년에 죽고 그의 아들 선왕(宣王) 벽강(辟彊)이 섰다.⑤

선왕 원년 기원전 342년, 섬진이 상앙(商鞅)을 채용하여 변법을 시행했다. 주천자가 섬진의 효공(孝公)에게 패주의 칭호를 내렸다.⑥



주석

1)제위왕 4년, 위혜왕 17년, 조성후 22년으로 기원전 353년이다.

2)양릉(襄陵) :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경내

3)계릉(桂陵) :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경내 서북

4)원문은 ‘殺其大夫牟辛’ 이라 되어있는데《사기집해(史記集解)》, 《사기색은(史記索隱)》과 양옥승(梁玉繩)의《사기지의(史記志疑)》등의 모든 해설서는 사마천이 잘못 기재한 것이고 마땅히 부인(夫人)으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

5)《죽서기년(竹書紀年)》에 의하면 위왕(威王)이 죽고 선왕(宣王)이 선 것은 기원전 319년이고, 이 해는 기원전 343년 제위왕 14년으로 진효공(秦孝公) 19년, 위혜왕 27년, 한소후(韓昭侯) 20년, 조숙후 7년, 연문후 20년이다.

6)진나라가 상앙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한 해는 진효공(秦孝公) 3년, 기원전 359년으로 환공 오 16년이다. 그리고 주천자가 진효공에게 패자의 칭호를 내린 해는 진효공 19년 기원전 343년으로 제위왕 14년 되는 해다. 사마천의 착오다.



12. 마릉지전(馬陵之戰)

- 마릉(馬陵)에서 위군을 대파하다. -


선왕 2년 기원전 341년①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와 한나라는 사이가 좋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위나라에 반격했다. 조나라는 세가 불리했음에도 남량(南梁)에서 싸웠다.② 선왕이 전기(田忌)를 불러 다시 옛날의 작위를 복위시켰다.③ 한나라가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선왕이 대신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한나라를 빨리 구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시간을 두고 기회를 봐가며 해야 하는가? 어느 편이 우리에게 유리한가?」

추기자가 먼저 대답했다.④

「구하지 말고 그대로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전기가 나서서 반대의견을 말했다.

「우리가 구하지 않으면 한나라는 함락되어 위나라에 합쳐질 것입니다. 그러게 되기 전에 빨리 구원해야 합니다.」

그때 군사의 직에 있던 손빈이 두 사람과 다른 의견을 개진했다.

「대저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군사들이 지치기도 전에 우리가 한나라를 구원하는 행위는 우리가 한나라를 대신하여 위나라 군사들을 맞이하여 싸우게 되어 우리가 오히려 한나라의 명을 받들어 싸우는 경우가 됩니다. 잠시 한나라에 대한 위나라의 공격을 방관하다 보면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몰리게 된 한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을 다시 청하는 사자를 보낼 겁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한나라의 굳게 결맹을 맺고 위나라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서 천천히 구한다면 우리의 실리는 더욱 커지고 명분은 더욱 크게 높아질 겁니다.」

선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매우 타당한 계획이오.」

선왕은 즉시 한나라 사자를 불러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은밀히 전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구원병을 보내준다는 제나라의 약속을 믿은 한나라가 위나라와 다섯 번을 싸웠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한나라는 사자를 급파하여 제나라에 나라를 맡긴다고 하면서 구원을 청했다. 제나라가 대거 군사를 일으켜 전기와 전영(田嬰)을 장수로 삼고 손빈을 군사로 삼아 한나라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를 공격하여 마릉(馬陵)에서 위나라의 장수 방연(龐涓)을 죽이고 태자 신(申)을 포로로 잡았다. 그후 삼진(三晋)의 왕들은 전영에게 불려나와 제왕에게 박망(博望)⑤의 땅에서 조례를 드린 후에 회맹의 의식을 행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선왕 7년 기원전 336년 선왕이 위왕(魏王)과 평아(平阿)⑥에서 회견하였다. 다음해인 기원전 335년 다시 견성(鄄城)에서 회견하였다. 위혜왕이 죽었다.⑦

선왕 9년 기원전 334년 위양왕(魏襄王)과 서주(徐州)에서 회견하였다. 이때부터 제후들은 모두 왕호를 칭하기 시작했다. ⑧

선왕 10년 기원전 333년 초나라가 쳐들어와 서주를 포위하였다.

선왕 11년 기원전 332년 위나라와 힘을 합쳐 조나라를 정벌하였다. 조나라가 하수의 물을 끌어들여 제와 위 두 나라의 진영을 물에 잠기게 하자 두 나라가 군사를 철군시켰다. 마지막으로 진혜왕도 칭왕을 시작했다.


주석

1)위왕(威王) 16년이고 위혜왕 28년, 조숙후 9년, 한소후(韓昭侯) 22년이다.

2)원문은 ‘魏伐趙. 趙與韓親, 共擊魏. 趙不利,戰于南梁’이나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집의(史記集疑)》에 따르면「위나라가 한나라를 정벌하자 조나라는 위나라와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힘을 합쳐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는 불리하여 남량(南梁)에서 한나라에게 지고 한나라는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다[‘魏伐韓, 趙與魏親, 共擊韓, 趙不利, 敗于南梁. 韓氏請救于齊]」과 같이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남량(南梁)은 지금의 하남성 임여현(臨汝縣) 서남이다.

3)원문의 ‘召田忌復故位 ’라는 기사는 사마천의 오기(誤記)이다. 이해는 마릉(馬陵) 전투 직전의 해이기 때문에 전기는 다른 나라에 망명하기 전이었다.

4)추기자(騶忌子) :《전국책(戰國策)·제책(齊策)》1권의 본 단락에 해당하는 부분은 추기자(騶忌子)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사기색은》에 의하면 이때는 추기가 죽은 지 이미 4년이 되었다고 했다.

5)박망(博望) : 지금의 산동성 료성시(聊城市) 경내 북이다.

6)평아(平阿) : 지금의 패군(沛郡) 평아현(平阿縣) 경내다.

7)위혜왕은 이 해에 죽지 않고 재위 35년으로 다음 해에 후원년으로 개원했다. 혜왕은 후원년 16년인 기원전 319년에 죽었다.

8)이때부터 제후들이 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서주상왕(徐州相王)이라고 한다. 기원전 334년은 제위왕(齊威王) 23년, 위혜왕 후원년, 한소후(韓昭侯 ) 29년, 조숙후(趙肅侯) 16년이다.




13. 稷下學士

- 주선왕이 직하에 학자들을 모아 백가쟁명을 일으키다. -


선왕①이 문학과 유세가들을 좋아하자 추연(鄒衍), 순우곤(淳于髡),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등의 무리들 76명이 스스로 찾아왔다. 선왕은 그들 모두에게 집을 주고 상대부로 대우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참여시키지 않고 오로지 의견만 말하도록 했다. 이후로 제나라의 직하(稷下)②에는 학사(學士)들이 계속 몰려들어 그 수효가 수백에서 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선왕 19년 기원전 324년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민왕(湣王) 지(地)가 즉위하였다.③

민왕 원년 기원전 323년④, 진나라가 장의(張儀)를 시켜 제후국 재상들과 교상(嚙桑)⑤에서 회맹하도록 하였다.

민왕 3년 기원전 321년, 전영(田嬰)을 설(薛)에 봉했다.

민왕 4년 기원전 320년, 섬진(陝秦)에서 부인을 맞이하였다.

민왕 7년 기원전 317년, 송나라와 힘을 합친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관택(觀澤)에서 물리쳤다.


주석

1)선왕이 아니라 위왕이다. 위왕은 기원전 319년에 죽고 그 뒤를 선왕이 이었다.

2)직하(稷下) : 제나라의 도성 임치성의 서문(西門) 밖을 직문(稷門)이라 했다. 제나라를 찾아온 학사들을 서문 밖에 모여 살게 하였기 때문에 이곳의 학사들을 직하학사라고 했다.

3)기원전 324년은 제위왕 33년이다. 선왕은 기원전 319년에 즉위해서 재위 19년 만인 기원전 301년에 죽고 그 뒤를 민왕(湣王)이 이었다.

4)기원전 323년은 제위왕 34년으로 진혜문왕(秦惠文王) 갱원(更元) 2년, 초회왕(楚懷王) 6년이다. 이 해의 대사기는 다음과 같다.

⒈초나라의 상주국 소양(昭陽)이 위나라를 공격하여 양릉(襄陵)을 함락시키고 주변의 8개의 읍을 점령했다.

⒉진나라가 장의를 제나라에 보내 제후국 재상들과 회맹을 행하도록 했다.

⒊위(魏)나라의 공손연(公孫衍)이 위(魏), 한(韓), 조(趙), 연(燕), 중산(中山) 등 오국상왕(五國相王)을 제창했다. 조, 연, 중산이 왕호를 칭하기 시작했다.

5)교상(嚙桑) :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이다. 설상(齧桑)이라고도 한다.



14. 제나라의 소대(蘇代)가 초나라 사자 전진(田軫)에게 위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진·한(秦韓) 두 나라를 설득하라고 유세하다.


민왕 12년① 기원전 312년, 제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초나라는 한나라를 공격하여 옹지(雍氏)②를 포위했다. 한편 진나라는 굴개(屈丐)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를 단양(丹阳)에서 무찔렀다③. 그때 소대(蘇代)가 사신으로 온 초나라의 사절 전진(田軫)을 보고 말했다.

「저는 어떤 일로 선생을 뵈려고 했습니다. 그 일은 매우 완벽한 계획으로써 초나라가 선생에게 이로움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이 이루어지면 복이 되고,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역시 복이 되는 일입니다. 오늘 제가 제왕의 대궐 문 앞에서 서 있을 때 위나라에서 온 어떤 사람이 위왕(魏王)이 한과 진 두 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한풍(韓馮)과 장의(張儀)에게 한 말을 듣고 저에게 전했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이 장차 자조(煮棗)④를 함락시킨 후에 계속 서쪽으로 행군하여 위나라를 공격한다면 그대 두 선생들은 군사를 끌고 달려와 과인을 구해주어야 내가 우리 위나라 강토를 보존할 수 있소. 만약 두 사람이 과인을 구해주지 않는다면 과인은 그들을 막을 방도가 없소.’

그 객이 저에게 위왕의 말을 전하는 태도는 매우 은근했습니다. 진과 한 두 나라의 군대가 열흘이 되도록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는다면 위나라는 방책을 바꾸어 제나라와 강화를 맺어 돌아설 것이고, 한나라는 어쩔 수 없이 진나라를 추종하면 진나라는 장의를 쫓아낼 겁니다. 쫓겨난 장의는 두 손을 높이 들어 제와 초를 받들게 되어 선생의 일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진이 물었다.

「무슨 방법으로 진과 한 두 나라가 구원군을 위나라로 보내지 않도록 할 수 있겠소?」

소대가 대답했다.

「한풍이 돌아가 한왕에게 위나라를 위해 구원군을 청할 때 틀림없이 자신의 행위는 위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둘러대 말할 겁입니다.

‘제가 장차 진과 한 두 나라의 병력을 동쪽으로 진격시키려고 하는 목적은 제와 송 두 나라 연합군을 격퇴시킨 후에 그 여세를 몰아 진·한·위(秦韓魏) 3국의 군대를 규합하여 굴개의 초나라 군사가 진나라와 싸워 패해 피로에 지친 틈을 이용하여 그 동안 한나라 땅을 빼앗아간 초나라에 대해 반환을 요구하여 한나라가 잃은 옛 땅을 전부 찾아오기 위해서입니다.’

장의 역시 위나라에 대한 구원군을 청할 때 틀림없이 자신의 행위는 위나라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겁니다.

‘제가 장차 진과 한 두 나라의 군대를 동쪽으로 진격시키려고 하는 목적은 제와 송 두 나라의 연합군을 격퇴키고 그 여세를 몰아 진·한·위 삼국의 군대를 규합하여 굴개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가 우리 진나라 군대에 의해 패배해 피로한 틈을 타서 초나라에 할지를 요구하기 위해입니다. 우리가 위나라를 위해 구원군을 일으키는 행위는 망하는 위나라를 보존시키기 위한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삼천(三川)⑤ 지방을 공략하여 찾아오는 책략이니 이는 왕께서 공업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선생께서는 초나라에 귀국하여 초왕으로 하여금 한나라의 영토를 돌려주도록 하고 진왕에게 청하여 한와 초 두 나라가 화의를 맺도록 주선해 달라고 한 다음 진나라에 사자로 들어가 진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청컨대 초나라로 하여금 한나라에게 땅을 돌려주게 하신다면 삼천(三川) 일대에 대왕의 위엄을 떨치시게 되고 한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초나라로부터 땅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전진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구원병을 동쪽으로 진군시키려는 한풍의 말을 진왕에게는 어떻게 설명하겠소?」

소려가 대답했다.

「그럴 경우는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도 삼천(三川) 지방을 얻은 후에 초와 한 두 나라에 군사를 진격시켜 위나라에 위협을 가하면 위나라는 감히 동쪽의 제나라와 연합하지 못해 결국 제나라를 고립시키는 결과가 될 겁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렇다면 위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자는 장의의 말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그때는 진왕에게 ‘진과 한이 영토를 얻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여 주둔시키면 그 위세는 위나라를 진동시켜 위나라로 하여금 초와 제 두 나라와이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고 그들의 힘에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위나라는 진과 한 두 나라에서 돌아서서 제와 초 두 나라를 받들게 되고 한편 위나라를 위성국으로 거느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초나라는 한나라에 땅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게 될 겁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진과 한 두 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땅을 얻을 수 있게 만들어 이는 두 나라에게 베푸는 큰 은혜입니다. 진한 두 나라 왕들은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시켜야 한다는 한풍과 장의의 주장을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께서는 항상 주도권을 잡으시고 진한 두 나라를 움직일 수 있으며, 진한 두 나라 역시 선생의 방책을 기뻐하고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장의의 방책을 싫어할 것입니다.」


주석

1)제선왕(齊宣王) 8년, 위양왕(魏襄王) 7년, 한선혜왕(韓宣惠王) 21년, 진혜문왕(秦惠文王) 후원13년, 초회왕(楚懷王) 17년이다.

2)옹지(雍氏) :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동북으로 전국 때 한나라 성읍이다. ‘楚圍雍氏’ 《한세가(韓世家)》한양왕(韓襄王) 12년(전300년) 기사에 상세하게 나온다.

3)秦敗屈丐 : 진나라가 8만의 초나라 군사를 단양(丹陽)에서 파하고 초군 대장 굴개(屈丐)를 포로로 잡은 후에 초나라의 한중군(漢中郡)을 점령했다.

4)자조(煮棗) : 지금의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경내의 서남이다. 전국 때 위나라 성읍이다.

5)삼천(三川) : 황하 이남의 주나라와 한나라 땅을 통칭하는 지명이다. 낙양 주변을 흐르는 하수(河水), 낙수(洛水), 이수(伊水)의 합칭이다.




15. 진제칭제(秦齊稱帝)

- 진(秦)과 제(齊) 두 나라가 제호(帝號)를 칭하다. -


민왕 13년 기원전 311년,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민왕 23년 기원전 301년,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중구(重丘)①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민왕 24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경양군(涇陽君)이 인질로 제나라에 왔다.

민왕 25년 기원전 299년, 경양군을 진나라에 돌려보냈다. 맹상군(孟嘗君) 설문(薛文)이 진나라에 들어가서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하고 맹상군은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왔다.

민왕 26년 기원전 298년, 제(齊), 한(韓), 위(魏) 삼국이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함곡관(函谷關)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민왕 29년 기원전 295년, 조나라가 주보(主父)②를 시해하였다. 조나라가 중산국(中山國)을 멸할 때 도왔다.

민왕 36년 287년 제왕이 동제(東帝)라 칭하고 진소왕(秦昭王)은 서제(西帝)라 칭했다. 소대(蘇代)가 연나라에서 제나라로 들어와 장화대(章華臺)의 동문에서 알현을 청했다. 제왕이 접견을 하면서 말했다.

「선생이 보니 반가울 뿐입니다. 진나라가 위염(魏冉)을 시켜 나에게 제왕(帝王)의 칭호를 가져왔는데 선생은 과인을 위해 무엇을 가져오셨습니까?」

「대왕께서 하문하시는 일은 너무나 창졸한 일이라 당황스럽습니다. 세상의 화는 모두가 항상 서서히 희미하게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받으신 제왕의 칭호를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진나라가 제호(帝號)를 칭하여 천하가 안정되어 아무 말도 없게 된다면 그때는 대왕께서도 그 뒤를 따라 칭제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제호를 위해 다투지 않는다 해도 잃어버릴 것은 없습니다. 진나라가 제호를 사용하면 천하가 등을 돌리게 되고 대왕께서 칭제하지 않으면 천하의 인심은 모두 대왕에게 쏠릴 겁니다. 이는 대왕의 커다란 재산이 될 겁니다. 그러나 천하에 제왕이 둘이 서게 된다면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를 높이 받들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제나라를 높게 받들겠습니까?」

「진나라를 높이 받들 것이오.」

「제나라가 제호를 버리면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를 좋아하겠습니까? 아니면 제나라를 좋아하겠습니까? 」

「제나라를 좋아하게 되고 진나라를 싫어할 것이오.」

「진과 제 두 나라가 제왕(帝王)의 조약을 맺은 후에 조나라를 정벌하는 것과 송나라의 폭군을 정벌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이로운 일이 되겠습니까?」

「송나라를 정벌하는 편이 이로울 것이오.」

「대저 조약의 성격은 모두 똑같다 하지만 진나라와 같이 칭제를 하게 되면 천하는 진나라만을 받들게 되고 제나라를 가볍게 볼 겁니다. 그러나 제나라가 제호를 버리면 천하는 진나라를 증오하게 되고 또한 조나라를 정벌하는 이로움은 송나라의 폭군을 정벌하는 이로움보다 크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대왕께서는 제호를 사용하시지 마시고 천하의 인심을 모으셔서 진나라와의 조약을 깨뜨려 제호를 위해 헛된 명성을 다투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기회를 엿보아 송나라를 공격하여 차지하십시오. 송나라를 차지하게 되신다면 위(衛)나라의 양지(陽地)③가 위태롭게 되고, 또한 제서(濟西)③를 차지하게 된다면 조나라 아읍(阿邑)의 동쪽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여 회수 이북 땅을 차지하게 된다면 초나라 동쪽의 땅을 위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송나라의 도(陶)⑤와 평륙(平陸)을 차지하면 위나라는 대량성(大梁城)의 동쪽 문을 감히 열지 못하게 될 겁니다. 제호를 버리는 대신 송나라를 정벌하면 제나라의 위엄은 더욱 커지게 되고 제나라의 명분을 세상에 높이게 되어 연나라와 초나라를 복종시켜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천하의 제후들 중 그 누가 감히 대왕의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상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이나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의 치적을 이루시는 일이 될 겁니다. 명분상으로 진나라를 높이 받든다 하고 제호를 쓰지 않으시어 천하의 제후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증오하게 만드십시오. 이 일이야 말로 실로 낮은 것으로 높은 것을 구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대왕께서는 부디 심사숙고하시기 바랍니다.」

민왕이 소대의 말을 받아들여 제호의 사용을 포기했다. 그러자 진나라도 제나라의 뒤를 따라 제호를 버렸다.


주석

1)중구(重丘) : 지금의 하남성 필양(泌陽) 동북이다. 기원전 301년 이곳에서 제(齊), 한(韓), 위(魏) 3국이 연합하여 초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초군 대장 당매(唐眛)를 전사시켰다. 진나라는 참전하지 않았다. 태사공의 잘못이다.

2)주보(主父) : 주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을 말함. 일찌기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자기를 주부라고 부르게 한 다음 사구(沙丘)에 궁을 짓고 살다가 이에 위협을 느낀 공자성(公子成)의 공격을 받아 성에 갇혀 굶어 죽었다.

3)양지(陽地) : 전국시대 때 위(魏)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복양현(濮陽縣) 경내다.

4)제서(濟西) : 제수(濟水) 서쪽의 땅을 말함.

5)도(陶) :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定陶縣) 경내의 서북




16. 제벌걸송(齊伐桀宋)

-송나라의 폭군 송언왕(宋偃王)을 정벌한 제민왕이 자존망대(自尊妄大)했다.-

민왕 38년① 기원전 286년, 제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였다. 진소왕(秦昭王)이 듣고 화를 내며 사자로 진나라에 와있던 소대를 향해 말했다.

「내가 송나라를 중하게 생각하기를 신성(新城)②과 진양(晉陽)③과 같이 했다. 더우기 한섭(韓聶)④과 나는 친구인데 어찌하여 친구인 한섭은 내가 사랑하는 송나라를 공격하는가?」

소대가 제왕(齊王)을 위해 말했다.

「한섭이 송나라를 공격하라고 제왕에게 권한 목적은 대왕을 위해서입니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그 땅을 합치면 강성해질 겁니다. 그리되면 초와 위 두 나라는 틀림없이 제나라를 두려워하게 되어 필시 두 나라는 서쪽으로 몸을 돌려 진나라를 섬길 겁니다. 이것은 대왕으로 하여금 한 명의 병사나 군졸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상함이 없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안읍(安邑)⑤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일입니다. 때문에 이 일은 한섭이 대왕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소왕이 다시 물었다.

「내가 제나라의 태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걱정하고 있소. 제나라가 합종(合縱)과 연횡(連橫)을 반복무상하게 하는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천하의 어느 제후국이 어떻게 제나라의 정황을 잘 알 수 있겠습니까?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여 복속시키려 함은 그들 스스로가 만승지국(萬乘之國)이 되어 진나라를 섬기기 위해서이며, 만일 서쪽으로 몸을 돌려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면 송나라 땅을 안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원의 하릴없는 유세가들은 온갖 머리를 짜내어 제나라와 진나라의 연합을 이간질시키기 위해 수레가 뒤엉키도록 빈번히 서쪽으로 몰아 달려온 사람들 중에는 한 사람도 제나라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또한 동쪽으로 달려간 사람들 중에는 한 사람도 진나라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진나라와 제나라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삼진(三晋)과 초(楚)가 합치는 일은 지혜로운 행위인데 진(秦)과 제(齊)가 연합하면 어리석은 일이 됩니까?삼진과 초가 합종하면 틀림없이 진과 제를 해치기 위해 모의할 것이며, 제와 진이 합종하면 틀림없이 삼진과 초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이러한 도리에서 일을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진소왕이 말했다.

「선생의 말대로 하리라!」

그래서 진나라는 군사를 보내 송나라를 정벌하는 제나라를 도왔다. 송왕(宋王)은 도망쳐 온(溫)으로 들어갔으나 제나라 군사들에게 잡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 남쪽으로 진군하여 초나라의 회수 이북 땅을 차지한 제군은 다시 서쪽으로 진군 방향을 돌려 삼진을 공격하여 주왕실의 땅을 병합하여 천자가 되려고 하였다. 추(鄒)와 노(魯) 두 나라를 포함한 사수(泗水) 강안의 여러 군소 제후국 군주들이 래조하여 신하로써 제나라를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천하의 제후들은 모두 제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했다.

민왕 39년 기원전 284년, 진나라가 공격해와 제나라의 아홉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주석

1)민왕(湣王) 15년으로 기원전 286년이다.

2)신성(新城) : 지금의 산서성 징성현(澄城縣) 동북. 춘추 초기에 섬진의 진목공(秦穆公)이 빼앗아 간 왕성(汪城)의 배후에 있다. 당진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수가 산서성과 섬서성을 가르면서 북쪽으로 꺾어진 부분을 하곡부(河曲部), 하곡부의 동쪽과 남쪽은 하외(河外), 하곡부 내 당진의 땅을 하내(河內)라 불렀다.

3)진양(晉陽) : 전국 때 진(秦)나라 영토로써 하수(河水) 서안(西岸)에 있었던 성읍(城邑)으로서 지금의 산서성 영제현(永濟縣) 경내 남. 하곡부(河曲部)에 있었던 진(秦)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한섭(韓聶) : 전국 때 인물로 제나라 민왕(湣王)의 책사다. 제민왕 15년 기원전 286년 그는 제민왕에게 일거에 송나라를 공격하여 멸하고 그 땅을 점령하여 국세를 크게 떨치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그 결과 위협을 느낀 연, 조, 한, 위, 진 등의 주변 다섯 나라가 연나라의 장수 악의를 총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를 이 일로 인해 제민왕은 피살되고 나라는 거의 멸망직전까지 갔으나 전단(田單)의 활약과 연나라의 자중지란으로 간신히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5)안읍(安邑) : 전국 초기 때 위나라의 도읍지로써 지금의 산서성 하현(厦縣)을 말함. 위나라가 진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양혜왕 31년 기원전 340년 그 도성을 안읍에서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인 대량성(大梁城)으로 옮겼다. 후에 진소왕(秦昭王)이 재위 21년인 기원전 286년에 사마착(司馬錯)을 시켜 안읍을 공격하게 하자 위소왕(魏昭王)이 안읍(安邑)과 하내(河內)의 땅을 진나라에 바쳐 이후로 안읍은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17. 제서지전(濟西之戰)

악의가 5국의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 군사를 제서(濟西)에서 대파하고 즉묵과 거성을 제외한 제나라 전역을 점령했다. -


민왕 40년 기원전 283년, 연(燕), 진(秦), 초(楚) 및 삼진이 자기 나라의 정예군을 출동시켜 제나라로 쳐들어가 제서(濟西)에서 제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제왕이 거느린 군사들은 궤멸되고 제왕은 임치성(臨淄城)으로 달아났다. 제왕의 뒤를 추격하여 임치성에 입성한 연나라의 장군 악의(樂毅)가 제나라의 모든 보물들과 제기들을 약탈해 갔다. 민왕은 나라 밖으로 달아나 위(衛)나라로 몸을 피했다. 위군(衛君)이 자기가 살고 있던 궁궐을 내주어 민왕을 묶게 하면서 스스로 신하라 칭하고 음식과 생활도구를 공급했다. 민왕이 불손하게 위군을 대하자 위나라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민왕을 공격했다. 위나라에서 쫓겨난 민왕은 추(鄒)와 노나라로 전전했으나 두 나라 군주들은 민왕이 너무 교만했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았다. 민왕이 다시 거성(莒城)으로 들어갔다. 초나라가 요치(淖齒)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요치는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나 곧바로 민왕을 살해하고 빼앗은 땅과 약탈한 보기들을 연나라와 나누어 가졌다.

민왕이 살해되자 세자 법장(法章)은 도망쳐 이름을 바꾸고 거성으로 피난하여 살고 있던 태사(太史) 교(敫)의 종이 되었다. 태사교의 딸이 법장을 보고 그 풍채가 기이하게 생겨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가엽게 여겨 옷과 음식을 몰래 훔쳐서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은 아무도 몰래 정을 통했다. 요치가 이미 거성에서 물러가자 거성의 호족들과 임치성에서 도망쳐 나온 제나라의 군신들과 힘을 합하여 민왕의 아들을 찾아 제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법장은 그들이 자기를 찾아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태사교의 집에 숨어 지내던 법장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기가 민왕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거인들과 제나라의 망신(亡臣)들은 힘을 합쳐 법장을 제왕(齊王)으로 세웠다. 이가 제양왕(齊襄王)이다. 양왕은 거성을 기반으로 제나라 전역에 포고하였다.

「새로운 왕이 거성에서 즉위했노라!」

제왕의 자리에 오른 양왕은 태사교의 딸을 맞아드려 왕후로 세웠다. 이가 군왕후(君王后)다. 양왕은 군왕후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아 건(建)이라고 했다. 군왕후의 부친 태사교가 말했다.

「딸이 된 자가 매파도 없이 스스로 출가하여 인연을 맺었으니 이는 나의 종족이 아니다. 그녀로써 가문의 명예가 나의 대에 와서 더럽혀지게 되었다.」

태사교는 그후로 늙어 죽을 때까지 군왕후를 쳐다보지 않았다. 군왕후는 성격이 어질었기 때문에 자기 부친이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자식된 도리를 저버리지 않고 예절을 잃지 않았다.

양왕이 거성에서 살기 시작한지 5년 째 되는 해 전단(田單)이 즉묵(卽墨)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연나라 군사들을 물리치고 거성의 양왕을 맞이하여 임치성에 입성하였다. 제나라는 이로써 예전의 영토를 모두 수복하게 되었다. 양왕은 전단을 안평군(安平君)에 봉했다.

양왕 14년 기원전 270년, 진나라가 강(剛)①과 수(壽)②를 공격하였다.

양왕 19년 기원전 265년, 양왕이 죽고 아들 건이 뒤를 이었다.


주석

1)강(剛) : 지금의 산동성 영양현(寧陽縣) 경내 동북

2)수(壽) : 지금의 산동성 동평현(東平縣) 경내의 서남



18. 제망(齊亡)

- 제나라가 망하다. -

왕건(王建)이 제왕의 자리에 오른 지 6년 째 되는 해인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제(齊)와 초(楚)가 구원하려고 하였다. 진왕이 조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제와 초 두 나라가 조나라를 구원하려고 하면 군사들을 물리치고 그렇지 않고 돕지 않으면 조나라를 공격하라!」

조나라가 식량이 떨어져 제나라에 원조를 청했으나 제왕이 보내주지 않았다. 주자(周子)가 말했다.

「조나라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이시면 진나라의 군사들은 물러가고 원조를 하지 않으면 진나라 군사들은 물러가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나라의 계략에 떨어져서 제와 초두 나라의 전략은 실패하게 됩니다. 제초 두 나라를 위해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 지켜주는 조나라의 역할은 마치 이와 입술과 같은 형세로써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내일은 그 환란이 제와 초에 미치게 됩니다. 또한 지금 조나라를 구하는 일은 마치 구멍 뚫린 항아리로 새까맣게 타고 있는 가마솥에 물을 길러다 부어야하는 경우와 같은 시급한 일입니다. 무릇 조나라를 구하는 일은 명분을 높이고, 진나라의 군사를 물리치는 일은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일입니다. 의로써 망하는 나라를 구하고 위엄으로써 강력한 진나라의 병사들을 물리치는 일임에도 그런 위대한 일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단지 얼마간의 양식만을 아깝다고 생각하시니 이것은 나라를 위한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왕이 주자의 말을 듣지 않고 양식을 조나라에 보내주지 않았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40만 군사들을 장평(長平)①에서 파하고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다.

왕건 16년 기원전 249년, 진나라가 주나라를 멸했다. 군왕후(君王后)가 죽었다.

왕건 23년 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왕건 28년 기원전 237년, 왕이 진나라에 입조하여 진왕 정(政)을 알현하자 진왕이 함양에 잔치를 벌려 술과 음식으로 접대하였다.

왕건 35년 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했다.

왕건 37년 기원전 228년,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했다.

왕건 38년 기원전 227년,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진왕이 눈치를 채고 형가를 잡아서 죽였다.

다음해인 왕건 39년 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연나라를 파하자 연왕이 요동(遼東)으로 도망쳤다.

왕건 40년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하고 진나라 군사는 제나라의 역하성(歷下城)에 이르렀다.

왕건 42년 기원전 223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했다.

왕건 43년 기원전 222년, 진나라가 대왕(代王) 가(嘉)를 포로로 잡고 계속 북진하여 연왕 희(喜)를 잡아서 살해했다.

왕건 44년 기원전 221년, 진나라가 군사들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제왕이 재상 후승(后勝)의 말을 듣고 진나라에 대항하지 않고 제나라의 모든 군사들을 들어 진나라에 항복하였다. 진왕이 포로가 된 왕건을 공(共)②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이어서 제나라를 멸하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윽고 천하는 모두 진나라에 병합되었다. 진왕 정(政)이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옛날에 군왕후가 어질었기 때문에 진나라를 섬기기를 극진히 하였으며 제후들 사이에서도 믿음이 있었다. 제나라 영토는 또한 동쪽 변경의 해변가에 있어서 진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진나라는 계속해서 삼진(三晋)과 연(燕), 초(楚) 를 차례로 공격하여 다섯 나라는 각기 자기 스스로 구하기에 여념이 없어 왕건이 제왕에 오른지 40여년이 넘도록 외국으로부터 병화를 입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군왕후가 죽고 후승(后勝)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자 그는 진나라 첩자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아 챙기고 수많은 제나라 빈객들을 진나라에 들여보냈다. 진나라는 제나라로부터 온 빈객들에게 더 많은 뇌물을 주어 제나라에 돌려보내 그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위해 첩자가 되도록 했다. 진나라의 첩자가 된 제나라의 빈객들은 모두가 왕건에게 권하기를 진나라를 섬기라고 하고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게 했다. 5국이 진나라를 공격하는데 제나라가 돕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진나라는 오국을 멸할 수 있었다. 오국이 이미 망하고 이윽고 진나라의 군사들이 임치성(臨淄城)까지 이르렀으나 제나라 백성들 중 아무도 진나라 병사들에게 대항해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왕건이 즉시 항복하고 다시 공(共) 땅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제나라 국인들은 왕건이 일찍이 제후들과 힘을 합쳐 진나라에 대항하지 않고 간신들과 진나라에 매수된 빈객들의 말을 듣고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원망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松耶柏耶(송야백야)

소나무인가? 잣나무인가?


住建共者客耶(주건공자객야)

건을 공 땅에서 살게 한 사람들은 빈객들이 아닌가?


제나라 백성들이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빈객들을 기용한 왕건을 비방한 노래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즐겨 읽었다. 주역은 술(術)이다. 깊고 밝고 심오하여 보통사람의 재능으로써 비록 세심하게 살펴본다 할지라도 그 경지에 이르겠는가! 그런 연유로 주나라 태사가 진경중(陳敬仲) 완(完)에 대해 점을 쳐서 얻은 점괘로, 그 시점에서 10세 이후의 일까지를 예언할 수 있었다. 후에 전완(田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와 의중(懿仲)도 역시 그와 같은 점괘를 얻었다. 전걸(田乞)과 전상(田常)이 두 사람의 군주를 범하고 제나라의 국정을 전단하였으니 그것은 필시 형세에 의해서가 아니라 점괘의 예언에 따라 그렇게 진행된 것 같다.


주석

1)장평(長平) :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이다. 기원전 260년 진나라 장군 백기(白起)가 이곳에서 20만의 진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조괄(趙括)이 이끌던 45만의 조군을 대파하고 승리했다. 백기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여 만 명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였다.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을 걸쳐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진나라의 천하통일은 시간문제에 불과하게 되었다.

2)공(共) : 서주 때 공백(共伯)이 봉해진 곳으로 춘추 때 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지금의 하남성 휘현(輝縣) 일대






부기(附記)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즉 《전제세가(田齊世家)》편의 환공(桓公) 오(午),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민왕(湣王)의 연대기가 맞지 않아 정정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은 그 밖의 사서인 《죽서기년(竹書紀年)》, 《맹자(孟子)》, 《전국책(戰國策)》 등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다. 청대 이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상기 네 왕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이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첫번째로는 환공(桓公) 오(午) 전에 9년간 재위에 있었던 제후(齊侯) 섬(剡)의 기록이 누락되었다.

두 번째로는 환공 오는 18년 동안 재위에 있었으며 6년은 잘못이다. 그래서 후의 위왕(威王), 선왕(宣王), 민왕(湣王) 세 왕의 재위 연대를 22년을 늘렸고 민왕이 재위한 기간 17년을 40년으로 연장했다. 즉 각 왕의 실제적인 재위 연간은 다음과 같다.


환공(桓公) 오(午)는 기원전 374년에 즉위하여 356년까지 18년 간

위왕(威王)은 기원전 기355년 즉위하여 319년까지 37년 간

선왕(宣王)은 기원전 318년에 즉위하여 301년까지 18년 간

민왕(湣王)은 기원전 300년에 즉위하여 284년까지 17년 간 재위에 있었다.

좀더 상세한 내용은 전백찬(翦伯贊) 주편(主編)의 《중외역사년표(中外歷史年表)》, 양관(楊寬)의 《전국사(戰國史)》, 진몽가(陳夢家)의 《육국기년(六國紀年)》등을 참조 요망.


















































































군주명


재위연도


비고


사기 육국연표


죽서기년


즉위


사망


재위


즉위


사망


재위


太公和


386


385


2


386


385


2


개국조


齊侯剡


누락


384


374


11


태공의 장자로 동생 환공에게 시해


桓公午


384


379


6


373


356


18



齊威王


378


343


35


355


319


37



齊宣王


342


324


18


318


301


18



齊湣王


323


284


40


300


284


17


목록
3213
[일반] 형연세가(荊燕世家) 21

세가21. 형연(荊燕) 형왕 유고(劉賈)는 고조와 동성인 유씨다. 그가 언제 처음으로 기의군에 참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왕 원년 기
운영자 12-08-04
[일반] 한세가(韓世家)15

한세가(韓世家)15 905. 韓厥陰德(한궐음덕). 한궐(韓厥)이 음덕을 쌓아 906. 趙武攸興(조무유흥); 조무로 하여금 망한 조씨 집안을
운영자 08-06-30
[일반]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0.유교(劉交)

세가 20.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는 한고조(漢高祖)의 친동생으로 자는 유(游)이다. 한고조는 4형제였다. 맏형 유
운영자 12-08-04
[일반] 초세가10-2(전국편)

초세가(楚世家)10-2 - 전국편(戰國篇) - 1. 위왕파제(威王破齊) 위진제후(威震諸侯) - 서주에서 제군을 대파한 초위왕이 제후들을 떨게하
운영자 23-08-08
[일반] 초세가(楚世家) 10-1(춘추편)

초세가(楚世家)1 - 춘추편 - 1. 초국연원(楚國淵源) 초(楚)나라의 선조는 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양승국 04-05-12
[일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26.진평(陳平)

陳丞相平世家26 승상 진평(陳平)은 양무현(陽武縣)1) 호유(戶牖)2) 사람이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으나 독서를 좋아했다. 집안에 전
운영자 12-08-04
[일반] 진세가(晉世家) 9. 진(唐晉)

세가9. 진(晉) 826. 武王旣崩(무왕기붕), 주무왕이 죽고 827. 叔虞邑唐(숙우읍당). 그 아들인 성왕이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唐)에
양승국 04-05-12
[일반]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세가(陳涉世家) 18 【진섭이 칭왕(稱王)하고 6달만에 죽으면서 후사가 없어 그 자손이 끊어졌다. 그러나 사마천이 《진섭세가(陳涉世家)》를
운영자 12-08-04
[일반] 진기세가(陳杞世家) 6

진기세가(陳杞世家) 호공(胡公) 만(滿)은 우순(虞舜)의 자손이다. 예전에 순이 평민의 신분이었을 때 요임금이 그의 두 딸을 그의 처로 주어 규예
양승국 04-05-12
[일반] 조세가(趙世家) 13

조세가(趙世家)13 조씨들의 선조들은 섬진(陝秦)과 같은 조상들이다. 중연(中衍)1)의 대에 이르러 은나라의 대무제(大戊帝)2)의 수레를 모는 어자
운영자 08-04-19
[일반]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4.조참(曹參)

세가24. 조참(曹參)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은 패(沛) 출신으로 진나라 때 패현의 옥리였다. 그때 소하(蕭何)는 패현 관아의 아전들 중 선임
운영자 12-08-04
[일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강제(姜齊)

세가2. 강제(姜齊) 739. 申呂肖矣(신려초의) 신(申)과 여(呂) 두 나라가 쇠약해지자 740. 尙父側微(상보측미) 상보(尙父)는 보잘것없는
양승국 04-05-12
[일반]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2. 유비(劉肥)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제도혜왕(齊悼惠王) 유비(劉肥)는 고조 유방(劉邦)의 장남으로 서자이다. 그의 모는 고조가 경혼하기 전에 정
운영자 12-08-04
[일반] 정세가(鄭世家) 12

정세가(鄭世家) 865. 桓公之東(환공지동), 정환공(鄭桓公) 우(友)가 동쪽의 땅으로 봉지를 옮긴 것은 866. 太史是庸(태사시용). 주왕실의
운영자 08-04-17
[일반] 전제세가 기년표 정정

전제세가16 기년표 정정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즉 《전제세가(田齊世家)》편의 환공(桓公) 오(午),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민왕(
운영자 23-08-11
1 [2][3][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