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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6-25 09:04:084643 
평준서(平準書) 이야기
양승국

사마천의 사기 130권 중에는 경제에 관한 기사가 3권이 있다. 표서(表書) 편의 하거서(河渠書)와 평준서(平準書) 그리고 열전(列傳) 편의 화식열전(貨息列傳)이 그것이다. 하거서가 다루는 기사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고, 수운이 가능하기 위한 하천의 준설이나 운하의 굴착, 육로수송을 위한 도로 공사,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리시설의 확충에 대한 것이고, 화식열전은 거부를 이룩한 사람들과 재화의 생산과 유통에 관한 이야기이며, 평준서는 국가가 그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사용해 왔으며 확보한 재정은 어떻게 소진되었던가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준서는 간단히 말하면 인류최초의 재정과 경제에 관한 국가정책의 총괄서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중국을 처음으로 중앙집권적인 나라로 통일한 진나라는 엄격한 법률을 통치철학으로 삼아 수많은 법률을 제정하여 양산했다. 또한 반량전이라는 화폐를 동으로 주조하여 전국적으로 통용시켰다. 그러나 진나라는 통일제국을 세운지 15년 만인 기원전 206년에 망하고 말았다. 이에 진나라가 달성한 통일제국의 기반을 이어 받은 한고조 유방이 엄격한 법률에 의해 시달리고 있던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기 위해 유화정책을 펼쳤다. 약법삼장(約法三章)은 한고조가 시행한 유화정책을 대표한다.

'살인한 자는 죽인다,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남의 몸을 상하게 한 자는 죄를 준다'가 약법삼장의 내용이다. 그 밖의 모든 법은 폐기했다.


한나라 초기에는 경제가 피폐하여 국가나 백성들이 모두 어렵게 살았다고 사마천의 평준서(平準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국가의 재정이 고갈됨으로 인하여 황제는 같은 색의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닐 수가 없었으며, 장군과 높은 관리들은 말 대신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녀야 했다. 또한 백성들의 집에는 한 톨의 쌀도 여유를 가지고 살지 못했다.'


그러나 작은 정부를 지향한 한고조의 기본정책을 이은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40년간의 치세와 자유로운 사회환경으로 활성화된 백성들의 경제활동에 힘입은 한나라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이윽고 경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한무제 초기의 한나라의 경제상황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 한나라가 창건 된지 70년 동안, 나라에는 커다란 변고가 없이 태평무사 했고 한발이나 큰홍수와 같은 재해도 발생하지 않아 백성들은 모두가 여유 있게 살게 되었다. 도시 외곽의 창고에는 곡식으로 가득하고 정부의 부고에는 온갖 재화가 넘쳐 났다. 경사(京師)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돈은 거만금(巨萬金)에 달했는데, 그 돈을 묶은 줄이 삭아서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태창(太倉) 안에 쌓아 둔 곡식의 크고 작은 통가리들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 마치 군사들이 연이어 세워 놓은 병영처럼 보였고 결국은 태창 안의 창고가 넘쳐 담장 밖의 노천에 쌓아 보관했다가 다 썩어 버려 먹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일반 서민이 사는 거리의 골목에는 말이 메어져 있었고, 교외의 들판에서는 무리를 지어 말을 사육했음으로 인해 돈이 없어 암말을 타고는 손님의 신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마을 어귀를 지키던 문지기들도 기름진 곡식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국력이 크게 강해진 시기에 등장한 한무제는 그 경제력을 기반으로 건국 이래로 계속해서 시달려왔던 흉노와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리고, 점령한 지역의 수비를 위해 성을 쌓고, 그곳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도로와 수로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였다. 더욱이 흉노 정벌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비뿐만 아니라 전공을 세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상금과 한나라에 투항한 수만 명의 흉노족에 대한 의복과 음식을 포함해서 정착금까지 공급해야 했었다. 또한 기원전 132년과 120년에는 관(觀)이라는 지방의 황하 남쪽 제방이 터져 지금의 산동성, 안휘성, 절강성 일대에 기근이 들어 굶주린 수백 만 명의 백성들을 구휼하느니라 이윽고 한나라의 재정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기 위해 한나라 조정은 관직을 팔거나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자 소금과 철의 전매제도를 시행하게 된다. 또한 지금의 자동차세에 해당하는 초거세(<車+召>車稅), 재산세에 해당하는 민전세(緡錢稅)등과 같은 법을 양산하여 다각도로 부족한 정부의 재정적자를 메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양가(楊可)라는 관리의 주장으로 고민법(告緡法)이 제정되었다. 재산을 속여 신고한 사람은 신고하지 않은 재산을 몰수하고 그 사람을 고발한 사람에게는 몰수한 금액의 반을 포상금으로 준다는 내용의 법이다. 이 법이 시행됨으로 해서 한나라의 상업자본은 붕궤 되었고 정부의 부고는 몰수된 재화로 넘쳐났다고 했다. 고민법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한 한무제는 조선을 침략하고 그 곳에 한사군을 설치할 수 있었다.


평준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1.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2. 정부의 간섭이 줄어들고 민간부문이 활성화되면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3. 대대적인 토목공사나 대외원정에 징발되지 않은 한국과 같이 작은 정부에서 태어난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었고,


4.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을 갖을 수 있었던 것은 고민법(告緡法)에 의해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하여 군비를 확충한 결과였으며,


5. 특정의 경제정책을 추진할 때 그 책임자를 행정관료보다는 현장에서 실무경험을 쌓은 사람이 발탁되었다는 사실이다.


* 번역문은 사마천의 사기, 서(書).표(表) 방에 올려져 있는 평준서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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