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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10-04 16:39:324262 
해하의 싸움과 항우의 도주로
양승국

기원전 208년부터 시작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싸움은 줄곧 항우의 공세로 인해 유방은 패주만 하다가 기원전 202년 성고(成皐)에서 홍구(鴻溝)를 양분한다는 휴전협정을 맺고 팽성전투에서 항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 태공과 여후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유방은 곧바로 협정을 파기하고 서쪽으로 퇴각하는 항우의 뒤를 추격했으나 한군은 고릉(固陵)에서 항우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 패하고 후퇴하여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의 군사가 당도할 때까지 굳게 지켰다.

이윽고 당도한 한신과 팽월의 군사들이 유방을 도와 해하(垓河)에서 항우군을 궤멸시켰다. 싸움터에서 벗어나 패주하는 항우의 뒤를 추격한 유방은 장강(長江) 북안의 오강(烏江)에서 항우를 패사시킴으로써 한초쟁패는 그 종지부를 찍고 400년 유씨의 한왕조(漢王朝)가 시작되었다.

다음은 항우본기에 나오는 항우의 최후장면이다.

한신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제에서 나오고 유가(劉賈)는 수춘(壽春)에서 진격하여 성보(城父)를 전멸시키고 한신군과 합류하여 해하(垓河)에 당도했다.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이 초나라를 배신하고 서(舒) 땅의 군사를 이끌고 육(六)을 도륙하고, 이어서 구강(九江)의 모든 병졸들을 규합하여 팽월을 따라 해하로 진격했다. 한왕(漢王)에게 속한 모든 제후군은 항우를 향해 진격하여 해하에 집결했다.

항우는 해하에 보루를 구축하고 주둔하고 있었으나 군사는 적고, 양식은 다한 상태에서 한군과 제후군들에게 여러 겹으로 포위당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군이 사방에서 초가(楚歌)를 불렀다. 항우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항우는 한 밤중에 일어나 장중에서 술을 마셨다. 항우는 우(虞)라는 미인을 사랑하여 싸움 중에도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추(騅)라는 준마가 있었는데 항상 타고 다녔다. 이에 항우는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시를 지어 노래했다.


力拔山氣蓋世 (역발산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온 세상을 덮을 수 있지만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시운을 못 만나니, 오추마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나하)

오추마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거나!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나약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그대 또한 어찌할거나!


항우가 여러 차례 노래 부르니 우미인도 따라 같이 불렀다. 항우의 뺨에 눈물이 몇 줄기 흘러내리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히 얼굴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다.

이윽고 항왕이 말에 올라타니 휘하의 부하 장사들 중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그날 밤 곧바로 한군의 포위망을 남쪽에서 뚫고 달아났다. 날이 밝자 한군은 비로소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기병대장 관영(灌嬰)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를 수 있는 군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항우의 일행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고 밭을 가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가 항우를 속여 왼쪽이라고 가르쳐줬다. 항우의 일행은 결국은 커다란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한군은 항우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항우가 즉시 일행과 함께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따르는 군사들은 겨우 28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수천의 한나라 기병은 항우의 뒤를 계속 추격했다. 한군의 추격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가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공항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겠다.」

항우는 그를 따르던 기병을 4대로 나누어 네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그때 한군은 항우와 그 일행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항우가 그 기병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저 한군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가 그 수하 기병들에게 사면으로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게 되면 산 너머 동쪽의 세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항우가 드디어 큰 고함소리를 지르며 한군을 향해 돌격하자 한군은 모두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지리멸렬했다. 항우가 그 와중에 한군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다. 그때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가 기병대장이 되어 항우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항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적천후를 꾸짖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가 그 기병들과 함께 약속한 세 곳에서 만났다. 한군은 항우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추격군을 3대로 나누어 초군이 달아난 곳을 멀리서 포위했다. 항왕이 다시 한군을 향해 돌격하여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백여 명의 군사들 죽였다. 초군이 다시 모이니 그 중 죽은 군사는 단지 2명에 불과했다. 항우가 그 군사를 향해 물었다.

「자 내가 한 말이 어떠냐?」

항우의 군사들이 모두 말했다.

「과연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왕은 계속 남쪽을 도망쳐 이윽고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강 언덕에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에게 말했다.

「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천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수효가 수십 만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항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었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천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우가 계속해서 정장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장자(長者) 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

항우가 이어서 그 부하들에게 모두 말을 버리고 걷도록 하고 손에는 짧은 무기만을 들고 한군을 향해 돌격했다. 항우 혼자만 죽인 한군의 숫자는 수백 인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 자신도 역시 몸에 십여 군데에 부상을 입었다. 항우가 지쳐서 앉아 있다가 한군의 기사마(騎司馬)인 여마동(呂馬童)을 보더니 소리쳤다.

「너는 옛날 내 부하였던 놈이 아니더냐?」

여마동이 항우와 얼굴을 마주치자 곁의 왕예(王翳)를 향해 손가락으로 항우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항왕(項王)입니다.」

그러자 항왕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천금과 만호(萬戶)의 봉지로 사려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겠노라!」

항우가 말을 마치고 곧바로 쥐고 있던 단검으로 자기의 목을 찔러 죽었다. 왕예가 달려가 항우의 목을 취하자 여러 기병들이 달려들어 서로 짓밟으며 항우의 시신을 다투다가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마지막에 가서 낭중기(郎中騎)양희(楊喜), 기사마(騎司馬) 여마동(呂馬童), 낭중(郎中)여승(呂勝), 기병(騎兵) 양무(楊武) 등이 각기 항우의 시체를 갈라 하나씩 차지했다. 그 다섯 사람이 모여 항우의 조각 난 시체를 맞춰보니 일치했다. 이에 항우에게 걸었던 만 호의 봉지는 모두 다섯으로 나누어 여마동은 중수후(中水侯)에, 왕예는 두연후(杜衍侯)에, 양희는 적천후(赤泉侯)에, 양무는 오방후(吳防侯)에, 여승은 열양후(涅陽侯)에 각각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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