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론에서 남북국론으로

김 영 하(성균관대 인문학부 교수)

1. 7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동아시아의 7세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로 성장한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력각축전을 벌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수와 당이 다시 통일왕조로 등장함으로써 주변 국가와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열도의 대화정권(大和政權)은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통해 국가체제의 변모를 꾀하는 동시에 대륙과 한반도의 동향에 귀추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 동아시아의 삼국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을 계기로 서로 만남으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국제적 연동성(連動性)을 처음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수가 고구려원정의 여파로 멸망한 뒤, 당도 역시 중국 중심적 세계질서의 구축을 완수하려고 고구려에게 부단한 압력을 행사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삼국은 무엇보다 국내의 권력을 집중하는 일이 필요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막리지체제(莫離支體制)를 수립했으며, 의자왕도 친위적 성격의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강화했다. 한편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왕의 추대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차기의 왕위계승에 대비하고 있었다. 삼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추진한 국내에서의 권력 집중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예고하는 전조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직접적인 계기는 당의 고구려원정과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에서 비롯되었다. 당 태종과 고종의 요동 공략은 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으나, 의자왕이 추진한 신라의 서쪽 변경에 대한 파상적 공세는 신라로 하여금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다. 이에 김춘추는 아예 백제를 통합할 목적으로 당에 건너가 적극적인 청병외교(請兵外交)를 펼쳤고, 당도 요동공략의 실패로 말미암아 평양을 직접 공격하기 위한 전략 거점의 확보가 절실하던 시점이었다. 쌍방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가운데 나·당연합이 결성되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화정권이 백제 구원의 명분으로 자위적 차원에서 파견한 왜군을 백강 전투에서 패배시켰다. 당은 백제의 옛 땅을 신라에 귀속시키기로 한 본래의 약속을 저버린 채 그곳에 기미주(羈　州)인 웅진도독부를 설치했다. 이를 근거로 당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공격했지만 역시 대패하고 말았다. 요동 공략과 평양 직공의 두 전략이 모두 실패한 다음, 당은 연개소문 사후에 자제간의 내분을 틈탄 마지막 원정에서 비로소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원정에는 백제에 대한 당의 관심을 고구려로 돌리려는 신라의 외교적 책략이 작용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고구려 유민의 반당운동(反唐運動)을 지원하는 한편 웅진도독부를 상대로 싸우는 양동작전을 구사하여 실질적인 백제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당은 고구려 유민의 반당운동을 진압하고, 신라와의 본격적인 나·당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두 나라가 백제 통합과 고구려 점령이라는 서로의 기본 전략을 관철시키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나·당전쟁에서 이긴 신라는 마침내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확보할 수 있었고, 당의 안동도호부가 요동의 고성으로 물러남으로써 고구려의 옛 땅에서는 그 계승을 표방한 발해가 건국되었다.
7세기의 한반도에서 일어난 동아시아의 국제전에 대한 시각은 일찍부터 두 가지가 있어왔다. 그 하나는 전쟁에서 차지하는 신라의 역할만을 강조하여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해하는 통일신라론의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 제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국제전의 결과로 신라와 발해의 성립으로 파악하는 남북국론의 관점이다. 여기에서는 7세기 이후의 한국사에서 두 관점이 어떠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생성되어 변화하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역사학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를 통해 진실을 찾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2. 통일신라론의 정체는 이데올로기이다.

백제를 아우른 신라의 중대사회는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지향함으로써 삼국시대와는 사회의 기본적 성격을 달리했다. 그것은 한국 전근대사회의 전형이 마련된 이른바 중세사회의 시작으로서, 이 시기에 성립된 일련의 제도와 관념은 후대의 한국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신라 중대사회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형성된 이후,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통일신라론의 원천이 된 일통삼한론(一統三韓論)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신라가 9주 5소경을 정비한 다음 해에 서원경(西原京) 소재지에 세운 「청주시운천동사적비」(686)에는 "삼한을 통합하니, 나라의 땅이 넓어졌다"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여기의 삼한은 바로 삼국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수도 경주에 거주하는 골품귀족은 물론 소경인 서원경 사람들도 일통삼한의식에 젖어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당시의 지배체제 아래에서 일정한 이익을 누리던 골품귀족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신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신라의 골품체제에 대해 회의를 품었던 최치원(857∼?)조차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삼국이 이제서야 장하게도 한 집안이 되었구나"라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찬양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일통삼한론이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의 피지배층 모두로부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말기에 궁예와 견훤이 각각 나·당연합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 멸망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계승을 표방했을 때, 해당 지방세력이 호응하여 태봉과 후백제를 세울 수 있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일통삼한론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영역의 일부를 통합한 이후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운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이 짙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신라 말기의 사회적 모순을 일정하게 해소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재편한 고려는 가문 중심의 귀족사회였다. 고려사회에서의 인식 내용은 김부식(1075∼1151)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삼국사기}에 집약되어 있다. 김부식은 잘 알다시피 신라 출신의 개경 문벌귀족으로서 고구려의 옛 수도인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삼국사기}의 편찬을 완수했다. 그런 만큼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신라 출신과 문벌귀족이라는 자신의 현재적 입장의 반영은 불가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문벌귀족이 견지하고 있던 역사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역시 {삼국사기}에서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인식의 전환을 유발할 만한 사회구조의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개경에 거주하는 문벌귀족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인식의 변화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 일통삼한의식은 문무왕이 김유신을 문병했을 때, 김유신이 "이제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은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되었다"라는 답변 속에 잘 나타난다. 이 부분은 당시 김유신의 발언을 그대로 편찬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 김부식 자신이 "신라는 당과 함께 도모하여 세 나라를 한 집안으로 만들었다"라고 평가함으로써 신라 중대 이래의 일통삼한론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도 당시 독서층의 범위를 고려할 때, 그것이 갖는 공감대의 광범위성에 대해서는 의심스러운 바가 있다. 고구려가 아닌 신라의 계승의식으로 상징되는 고려사회의 취약성은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외관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러한 데에 회의를 느낀 이규보(1168∼1241)는 {구삼국사}를 얻어 고구려의 시조 주몽에 관한 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었으며, 이승휴(1224∼1300)는 역사시인 {제왕운기}를 지어 민족사의 시원을 단군에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신진사대부가 건국에 참여한 조선시대에는 신라 중심의 역사인식에 대한 회의적 인식 경향을 수렴하여 한국사의 시간적 상한을 단군조선으로 소급시키는 진전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 사서로서 노사신(1427∼1498), 서거정(1420∼1488) 등이 편찬에 참여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서의 신라와 발해에 대한 인식은 {삼국사기}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동국통감}은 발해를 한국의 역사가 아닌 신라의 인접 국가로만 파악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고려시대의 유학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갖는 통치이념으로서의 경직성이 강하게 투영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고려와 같은 중세사회의 지배층인 조선시대의 양반관료가 역사학을 학문의 대상이기보다 정치의 수단으로 파악하는 정통론적 사고의 한계를 고려할 때,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과 발해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세적 이데올로기로서의 통일신라론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안정복(1712∼1791)의 {동사강목}과 개화기의 사학자인 김택영(1850∼1927)의 {역사집략} 등으로 계승되어 갔다. 다만 이들 사찬 사서에서의 인식이 조선 전기의 관찬 사서와 달랐던 점은 발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경향을 수렴하여 발해사를 신라사에 병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일통삼한론에서 근대적인 통일신라론으로의 전환조차 불행하게도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일제는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효율적인 식민 경영을 목적으로 식민사학의 논리를 개발했다. 그 가운데 하나인 타율성론의 만선사관(滿鮮史觀)은 한국사를 만주사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한국사에서 발해의 역사를 배제하려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사실을 강조했다. 이 만선사관에 입각한 통일신라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인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의 기본 방침이었으며, 발해를 만주사에 편입시키는 대신에 한국사에는 허울좋은 '통일신라'만을 남겨 놓았다. 식민사학의 통일신라론은 우리 중세사학의 일통삼한론과 또 다른 차원의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3. 남북국론은 비판정신의 소산이다.

한국 중세사학에서의 일통삼한론과 일제 식민사학의 통일신라론은 현실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독립 학문으로서 역사학의 비판의식은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발해사가 신라사의 편년체계 안에 부수적으로 서술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통삼한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발해의 역사를 민족사의 일부로 파악하는 당위적 인식의 결과는 아니었다. 발해사에 대한 적극적 인식에는 일통삼한론과 통일신라론을 구성하는 사실 자체는 물론이고, 그러한 논리가 가능했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체계적 비판이 필요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 후기에는 사회의 각종 생산 부문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유도할 수 있는 맹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실학사상의 대두를 가능케 한 현실적 토대였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에서 역사인식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상대적 관계에 있는 발해사의 서술에서는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 이종휘가 {동사}(1803)에서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로 포함시킨 이래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도 발해사를 신라사와 동등하게 인식하여 독립적으로 취급했다. 한편 정약용(1762∼1836)은 내각 친시의 시제인 "발해의 옛 땅이 반은 거란에 들어갔으니, 고려 왕조의 통일에 여한이 없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고려가 다시 개척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한탄할 일이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발해사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득공(1749∼?)은 마침내「발해고」의 서문에서 남북국론을 피력하게 되었다.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려의 국세가 떨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 다. 옛날에는 고씨가 북에서 고구려, 부여씨가 서남에서 백제, 박·석·김씨가 동남에서 신라를 각각 세웠으니, 이것이 삼국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삼국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고 려가 그것을 편찬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부여씨와 고씨가 망한 다음에 김씨의 신라 가 남에 있고, 대씨의 발해가 북에 있으니, 이것은 남북국이다. 여기에는 마땅히 남북사가 있어야 할 터인데, 고려가 그것을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유득공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아예 부정하고 삼국에서 남북국으로의 변화만을 인정했다. 이 논리는 김부식이 7세기 이후의 한국사를 신라만으로 구성한 데 대한 비판인 동시에 그것을 고려의 국력이 취약한 사실과 연관지음으로써 사회체제까지 비판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가 병존할 수 있는 남북국론의 논리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의식의 발로와 궤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으며, 남북국론으로의 변화로 인해 한국사의 인식 공간은 확대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역사지리학자 김정호에게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대동지지}(1863)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50년 뒤에 발해가 다시 고구려의 옛 땅을 이어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을 이룬지 200여 년이 되었다. 고려 태조가 남북국을 하나로 통일하였다"라고 하여 신라가 삼한을 아울렀다는 기존의 일통삼한론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 태조에 의한 남북국통일론을 제기함으로써 고려를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왕조로 파악했다.
조선 후기에 일군의 실학자가 발해사에 대한 적극적 인식과 남북국론을 제기했지만, 개화기의 역사가들에 의해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 한국의 근대화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의 근대사학이 왜곡한 한국사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주체적 인식에 장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의 논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식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근대사학으로서의 논리적 비판도 강화되었다.
한국의 근대는 일본에 의한 개항과 동시에 자본주의적 세계질서로의 타율적인 편입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개화·일제시기의 민족사적 과제는 대내적으로는 근대체제로의 전환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국권의 수호와 회복이었다. 그 기본 방향은 국민 주권에 입각한 국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될 일이었다. 이와 같은 개화·일제시기의 현재적 상황은 역사가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을 가능케 한 현실적 조건이었다.
한국의 근대사학은 반식민사학(反植民史學)을 학문적 과제로 삼는 민족주의사학에서 비롯되었다. 그 선구자인 신채호(1880∼1936)는 민중 중심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우선 {삼국사기}의 철저한 비판을 통해 이제까지 높이 평가되고 있던 김춘추의 외교활동과 김유신의 군사활동은 민족사적 의의를 결여한 사대적 행위로 비판했다. 또한 신라 중심의 역사서술에 매몰되었던 백제와 고구려의 개체성을 인정하고, 신라에 의한 한반도 남부의 통합은 전체적 통일은 물론 반변적 통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로써 그는 "고구려가 망하여 발해가 되고, 백제가 망하여 신라에 합하였으니, 이는 삼국이 합하여 양국된 시대"로 이해함으로써 신라와 발해의 병존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兩國時代論)으로 귀결되었다.
신채호의 양국시대론은 주체적 자아를 확립한 민중을 중심으로 만주에 일제와 투쟁할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는 현실인식으로부터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형성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만선사관을 비판하기 위해 그와 다른 만주인식에 입각한 신채호의 양국시대론은 유득공의 남북국론을 인지하고 있었던 박은식(1859∼1926)의 발해인식과 더불어 일제시기의 남북국론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이 민족주의사학이 일통삼한론과 통일신라론의 비판을 통해 남북국론을 전개했더라도, 남북국의 성립이 당시 동아시아 제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전의 결과로 인식하는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4. 7세기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상에서 살펴본 바 7세기에 있었던 동아시아 국제전에 대한 인식 방향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인정하는 중세사학의 일통삼한론 및 식민사학의 통일신라론, 그리고 삼국통일을 부정함으로써 발해를 민족사로 파악하는 남북국론의 두 계통이 있음을 알았다. 이 가운데 전자는 지배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속성을 지녔던 반면에 후자는 지배체제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진보적 지식인의 비판으로부터 제기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의 인식 경향과 전망에도 시사점을 제공한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해방 공간에서 좌·우의 대립에 이은 한국전쟁은 남북분단을 초래했고, 분단체제 아래에서 역사학도 이질화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남한학계에서는 일제시기 이래의 통일신라론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남북국론이 제기된 상태이다. 한편 남북국론과 같은 인식 경향을 보였던 북한학계에서는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신라보다 오히려 발해의 역사에 더 비중을 두는 데로 나아갔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에서 신라와 발해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역사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분단체제의 내재화에 따라 다시 체제 유지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는 역기능의 결과였던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지금 동아시아 삼국의 현재 상황은 멀리는 각국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연유한 필연적 결과이겠지만, 가깝게는 지난 세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과 중국을 각각 식민지와 반식민지로 지배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본은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과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기치 아래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관계로부터 벗어나 제국주의적 침략을 자행했다. 이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서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분단체제와 사회주의체제가 수립되었다.
냉전체제가 해체된 요즘의 세계질서에서 주목되는 현상의 하나는 지역공동체의 활성화를 통한 다극화의 조짐이다. 지역공동체의 형성에는 현실적인 조건 이외에도 문화적 동질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향후 동아시아 공동체의 형성을 전망하는 일은 동아시아 삼국이 공유했던 과거의 문화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에 무망한 것만도 아니다. 다만 여기에는 동아시아 국가로서 일본의 자기 반성과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시장경제로의 진전에 더하여 분단된 한국의 통일이 무엇보다 긴요하다. 남과 북은 군사력에 의한 무력 통일과 자본력에 의한 흡수 통일의 어느 쪽도 아닌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의 평화 통일을 모색함으로써 한국의 발전은 물론 동아시아 공동의 번영을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남북의 당국이 한반도의 민족사적 과제가 호혜적 평화 통일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한 시대에 이르렀다. 이러한 때에 신라와 발해의 인식에서 유의할 점은 두 나라에 대해 동등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남북국시대로 파악할 일이다. 만약 전근대사회에서의 정통론과 같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신라와 발해인식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능한다면, 그 역사학은 학문으로서 근대성의 결여에 못지 않게 분단체제를 고착시킨 논리로 작용한 반민족성 때문에 후세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민족의 통일을 전망하는 분단시대에 남과 북의 두 나라 국호가 각각 한국과 조선으로서 상대에게 자기 중심의 북한과 남조선을 강요할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남북국시대에도 어느 일방이 우선하지 않는 '신라와 발해' 이외의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렵다. 두 나라는 모두 한국사가 발전하던 과정의 산물로서 시간상의 선후만이 있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결국 통일신라론과 남북국론 가운데 어느 인식이 역사적 사실에 맞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과도 합치할 것인가의 문제이겠다. 역사에서의 올바른 인식은 현실에서의 실천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