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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57:534659 
제105회 茅焦諫孝(모초간효) 堅壁抗秦(견벽항진)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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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105회 茅焦諫孝 堅壁抗秦(초모간효 견벽항진)

진왕에게 효의 도를 간한 제나라의 빈객 모초와

보루에 의지하여 진군을 물리쳐 조나라를 지킨 이목.

1. 모초간효(茅焦諫孝)

- 죽음을 무릅쓰고 진왕에게 효를 간한 모초 -

진나라의 대부 진충(陳忠)이 태후의 일로 진왕에게 간하다가 죽었으나 그의 뒤를 이어 계속 간하는 신하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왕은 간하러 오는 자들은 미처 말도 꺼내기도 전에 모두 죽여 그들의 시신을 대궐 문 밖에 전시하도록 했다. 진충 이후로 간하러 왔다가 죽은 사람들은 모두 27명에 달해 그들의 시신은 마치 작은 산을 이루었다. 그때 제왕과 조왕이 동시에 조현을 올리기 위해 진나라에 들어왔다. 진왕이 대단히 기뻐하며 함양궁 안에 잔치를 열고 같이 술을 즐겼다. 그러나 대궐 문 밖에 산처럼 높이 쌓여 있는 시신을 본 두 나라의 왕들은 의아하여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두 나라 왕들은 그것들은 모두가 태후의 일을 간하다가 죽은 사람들의 시체라는 사실을 알자 탄식을 금하지 못하며 마음속으로 진왕의 불효를 욕했다.

그때 제나라의 창주(滄州)1) 출신의 모초(茅焦)라는 사람이 진나라에 놀러와서 여사에 묵다가 같은 방을 쓰던 사람들에게서 우연히 진왕의 난폭한 행동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모초가 듣고 의분에 싸여 말했다.

「아들 된 자가 그 어미를 가두니 이는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모초가 여사의 주인에게 달려가 끓는 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

「내가 목욕으로 몸을 깨끗이 한 후에 내일 새벽에 대궐을 찾아가 진왕을 뵙고 간하여 태후가 풀려 날 수 있도록 하겠소!」

방을 같이 쓰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나라의 신하들이 간하다가 벌써 27명이나 죽임을 당했소. 그들은 모두 평소에 진왕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을 모두 물리치고 다짜고짜로 전부 죽이고 말았소! 그런데 그대와 같은 일개 평민이야 오죽하겠소?」

「간한 사람이 27명에서 그쳤기 때문에 진왕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음이요. 만약 간한 사람이 27명에서 끊이지 않고 계속 줄을 이었더라면 어찌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소?」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모초가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시간을 알리는 북소리가 다섯 번이 울리자 여사의 주인을 깨운 모초는 밥을 달라고 해서 배불리 먹은 후에 대궐을 향해 길을 나섰다. 여사의 주인은 모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말렸으나, 그는 그의 손길을 단호히 뿌리치고 궁궐을 향해 걸어갔다. 방을 같이 쓰던 사람들은 모초가 틀림없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행낭을 풀어 그 안에 들어 있는 물품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윽고 궁궐의 대궐 문 밖에 당도한 모초가 작은 산을 이루고 있던 시체 위에 엎드려 큰 소리로 외쳤다.

「소인은 제나라에서 온 과객 모초라는 사람입니다. 원컨대, 대왕께 올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는 진왕의 명을 받은 내시가 와서 모초에게 물었다.

「손님께서는 무슨 일로 대왕께 간언을 올리려고 하십니까? 혹시 태후의 일과 관련된 일이 아닙니까?」

「바로 그 일로 해서 찾아왔습니다.」

내시가 달려와 진왕에게 고했다.

「제나라에서 온 객이 과연 태후의 일로 간하기 위해 찾아 왔다고 합니다.」

「너는 다시 나가서 궐 밖에 쌓인 시체들이 어째서 생겼는지를 그에게 알려주어라!」

진왕이 보낸 내시가 궐 밖으로 나가서 모초에게 말했다.

「그대는 저기 죽은 사람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대는 죽음이 두렵지도 않소?」

「나는 하늘에 별이 28수가 있어 땅에 참된 사람을 내려 보낸다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 죽은 사람은 이미 27명이라고 했지만 아직 한 사람의 자리가 남아 있으니 내가 진왕에게 간하여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옛날 성현들이라 할지라도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내시가 돌아와 진왕에게 모초의 말을 전했다. 진왕이 대노하며 말했다.

「어떤 미친놈이 나의 명을 범하려고 하는가?」

진왕은 즉시 좌우의 측근에게 명을 내렸다.

「궁중의 뜰에 가마솥을 걸고 불을 떼어 물을 끓여라! 내가 그 놈을 마땅히 삶아 죽이리라! 어찌 내가 그의 시신을 대궐 문밖에 쌓아 나머지 28수룰 채울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없겠는가?」

진왕은 칼을 빼어 땅에 짚고 의자에 앉아 눈썹을 치켜세우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가 입에서 침을 튀기면서 계속해서 호통을 치며 말했다.

「빨리 미친놈을 끌고 와서 가마 솥 안에 끓는 물에 삶아 죽이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시가 모초를 부르기 위해 달려 나갔다. 모초는 일부러 총총걸음으로 시간을 끌며 천천히 걸었다. 내시가 뒤에서 빨리 걸으라고 재촉을 하자 모초가 말했다.

「왕을 알현하는 순간 바로 죽게 될 텐데 내가 잠시 걸음을 천천히 걷는다 해서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내시가 듣고 동정하는 마음이 생겨 모초를 부축했다. 모초가 이윽고 진왕이 앉아 있는 전당의 계단 밑에 당도하여 절을 올린 후에 다시 땅에 엎드려 말을 했다.

「소인은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되고, 나라를 보존하려고 하는 자는 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없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생명을 부지할 수 없음입니다.2) 대저 인간의 생사 문제와 나라의 존망에 대한 계책은 밝은 임금들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일진대, 대왕께서는 한번 자세히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진왕이 안색을 조금 누그러뜨리더니 물었다.

「그대가 생사존망(生死存亡)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니 한번 말해보라!」

「무릇 충신이란 아첨하는 말을 올리지 않으며 밝은 임금은 도리에 어긋나는 패륜의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임금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행함에도 그 신하가 간언을 올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신하가 임금에게 죄를 짓는 일이며, 신하가 충언을 올림에도 그 임금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임금이 그 신하에게 죄를 짓게 되는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하늘의 도리에 벗어나는 패륜의 일을 행하시고도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십니다. 그런 대왕께 귀를 거슬릴 충언을 소인이 드리고 싶으나, 대왕께서는 한사코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참으로 이후의 진나라 장래가 걱정됩니다.」

진왕의 마음에 두려운 생각이 들어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안색이 더욱 온화해 지며 물었다.

「그대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보라! 내가 한 번 들어보겠노라!」

「대왕께서는 지금 천하의 일을 도모하시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다!」

「지금 천하가 진나라를 우러러 받드는 일은 단지 진나라의 위세를 두려워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대왕께서 천하의 패주로 받들려지고 있는 이유는 진나라의 조정에 충신열사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태후께서 사랑하고 있던 의부를 거열형에 처했으니 그것은 곧 인자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태후가 낳은 두 동생을 부대자루에 넣어 때려 죽였으니 그것은 곧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또한 그 생모를 역양궁으로 옮겨 유폐시켰으니 곧 불효를 말합니다. 또한 충간을 올리는 충신들을 도륙하여 궐 밖의 대문에 그 시신을 늘어놓았으니 걸주(桀紂)의 정치를 본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대저 천하에 뜻을 두고 있다 하시면서 그 소행은 이와 같이 패륜에 폭정을 행하고 있으니 어찌 천하가 대왕에게 복종하겠습니까? 옛날에 순임금은 그 어미가 비록 어리석고 모질었지만, 자식된 도리를 다해 결국은 일개 평민의 신분에서 제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이 용봉(龍逢)을 죽이고 은나라의 주왕이 비간(比干)을 죽이자 천하가 모두 반하여 나라가 망했습니다. 오늘 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죽은 후에 다시는 28명의 뒤를 따라 충간을 올리는 사람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 사이에 원망과 비방하는 소리가 비등하게 됨에도 충신과 모신들은 입을 꾹 다물어 충간하는 신하들이 끊어짐으로 해서 진나라가 안팎으로 인심을 잃게 되고 이어서 천하의 제후들은 진나라에 반기를 들것입니다. 이제 진나라가 바야흐로 제업을 성취하려는 마당에 대왕의 대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신은 이제 대왕께 하고 싶은 말을 다 올렸으니 청컨대, 가마솥에 삶아 죽이시기 바랍니다.」

모초가 땅위에서 일어나더니 즉시 옷을 벗어 던져 알몸이 된 상태로 가마솥을 향해 뛰어갔다. 진왕이 황급히 전당에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 왼손으로는 모초를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좌우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빨리 가마솥을 치우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

「대왕께서 이미 간언을 올리지 못하도록 방을 걸어 놓으셨는데, 간언을 올린 자를 팽살(烹殺)하지 않는다면 신하들에게 신의를 잃게 되실 것입니다.」

진왕이 즉지 명을 내려 방문을 떼어 내고 다시 내시에게 명하여 옷을 가져와 모초에게 입혀주라고 했다. 진왕은 모초를 끌고 전당으로 올라가 자리를 권하며 사죄의 말을 했다.

「전에 나에게 간언을 올린 자들은 단지 나의 잘못만을 나열하였지 선생과 같이 생사존망에 대한 계책은 언급하지 않았소. 하늘이 선생을 시켜 과인의 길을 밝혀 주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그 말에 귀를 기우리 지 않겠소?」

「대왕께서 이미 신의 말을 들으시기로 하셨다면 한시라도 빨리 어가를 준비하여 역양궁으로 나가시어 태후를 맞아들이시고 대궐 문밖에 늘어놓으신 시신들은 모두가 충성스러운 신하들이니 거두어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 주시기 바랍니다.」

진왕이 즉시 관리들을 불러 27구의 시신을 거두어 각각 관곽(棺槨)3)에 안치하여 용수산(龍首山) 자락에 같이 묻고 묘역의 이름을 <회충묘(會忠墓)>라고 지었다. 이어서 좌우에게 명하여 어가를 준비시킨 진왕은 태후를 맞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모초로 하여금 마부로 삼아 어가를 몰게 하여 옹성을 향해 출발했다. 남병(南屏) 선생이 사서를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시를 한 수 지어 노래했다.

이십칠 구의 시신이 작은 산을 이루었음에도

모초는 옷을 벗고 끓는 가마솥을 향해 뛰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날 운명이었으니

천고에 빛나는 충신들의 지표가 되었도다.

二十七人尸累累(이십칠인시누누)

解衣趨鑊有茅焦(해의추확유모초)

命中不死終須活(명중불사종수활)

落得忠名万古標(낙득충명한고표)

이윽고 어가를 타고 옹성의 역양궁에 당도한 진왕은 먼저 사자를 보내 자기가 왔음을 알리게 하고, 자기는 어가에서 내려 무릎걸음으로 걸어 태후가 있는 곳에 가서 상면하고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통곡했다. 태후도 역시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진왕은 모초를 불러 태후에게 인사를 시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나의 영고숙(穎考叔)4)입니다. 」

곧이어 날이 저물어 밤이 되자 진왕은 역양궁에 거처를 마련하여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진왕은 태후를 어가에 태우고 수천 대의 수레와 수 만 명에 달하는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함양을 향해 출발했다. 진왕과 태후가 탄 어가를 앞뒤에서 호위하는 천군만마의 모습이 마치 구름과 같이 장관을 이루었다. 진나라 백성들 중 지나가는 행차를 보고 진왕이야말로 효자라고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행렬이 함양에 당도하자 감천궁으로 들어가 잔치를 마련하여 술을 내와 모자가 즐겨 술을 마셨다. 태후는 다시 별도로 모초를 위해 연회를 마련하여 친히 술잔에 술을 따라주며 감사의 말을 했다.

「우리 모자가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음은 모두 선생의 노력 때문이오.」

진왕은 모초를 태부로 삼고 상경의 작위를 내렸다.

2. 不謹招亡(불근초망)

- 근신하고 뉘우치지 않아 몸을 망친 왕국의 장사꾼 여불위 -

동시에 여불위가 태후와 다시 사통하지나 않을까 걱정한 진왕은 여불위를 도성 밖으로 내보내 하남(河南)5)에 있던 자기의 봉지에 가서 살게 했다.

문신후 여불위가 자기의 봉지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열국의 제후들은 각기 사자를 보내어 문안을 묻고 서로 다투어 자기나라에 와서 상국의 자리를 맡아 달라고 청했다. 하남 땅에 기거하고 있던 문신후를 만나기 위해 제후들이 파견한 사자들의 왕래가 잦아 하남으로 가는 길을 가득 메웠다. 진왕은 여불위가 열국의 제후에게 부름을 받고 기용되면 진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즉시 붓을 들어 편지 한 통을 써서 봉한 후에 여불위에게 전하게 했다.

「그대는 우리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다고 십만 호의 식읍에 봉해졌단 말인가? 그대는 우리 진나라 왕실하고 어떤 친척관계에 있다고 그 호칭을 상보(尚父)라고 하는가? 진나라가 그대에게 대접을 너무 과대하게 했음이라! 노애(嫪毐)의 반역 사건은 그대로 인해 발생했음에도 과인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그대를 식읍으로 내려가게 했다. 그러나 그대는 스스로 뉘우쳐 근신하지 않아 화를 불러들이고, 또한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서로 내통하니 과인은 이 일로 해서 더 이상 그대를 관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대와 그대의 가권들은 모두 촉군으로 옮겨 살기 바란다. 내가 비성(郫城)6)을 식읍으로 내어 주겠으니 그대는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기 바란다.」

여불위가 진왕의 편지를 받아 읽고는 분노에 떨며 말했다.

「나는 가산을 털어 선왕을 진왕의 자리에 앉혔다. 이 나라에 나보다 더 큰공을 세운 사람이 누가 있는가? 또한 태후는 나를 먼저 섬기다가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왕은 곧 나의 소생이니 진나라의 왕실과 나보다 더 친한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왕은 어찌하여 나의 은혜를 저버린단 말인가? 」

말을 멈추고 얼마동안 조용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어서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원래 일개 장사꾼에 불과한 주제에 음모를 꾸며 남의 나라를 빼앗으려 했고, 남의 부인과 간통했으며, 남의 임금을 죽여 그의 후사를 끊어지게 했다. 하늘이 어찌 나 같은 사람을 용납하겠는가? 나는 진즉 죽었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 」

말을 마친 여불위는 술잔에 짐독을 타서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평소에 그에게서 은혜를 입은 문객들은 서로 상의하여 여불위의 시신을 훔쳐 북망산(北邙山) 밑에 있던 그의 부인 무덤에 아무도 몰래 합장하였다. 지금도 낙양 북쪽의 북망산으로 통하는 길목 서쪽에 큰 무덤이 하나 있는데 민간의 전설로는 그것을 여모총(呂母冢)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여불위의 문객들이 아무도 그가 묻힌 곳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덤이 과연 여불위의 진짜 무덤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3. 諫逐客令(간축객령)

- 이사가 진왕의 축객령을 간하다. -

진왕은 여불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시신을 구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자 그것은 모두 여불위의 빈객들 소행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다. 진왕은 즉시 명령을 발하여 나라 안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다른 나라 출신의 사람들은 아무도 함양에 머무는 해위를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나라 출신으로서 진나라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관직을 모두 빼앗고 3일 내에 모두 진나라 국경 밖으로 나가라고 명하고, 만약에 그들을 재워주는 집이 있다면 그들도 함께 죄를 묻겠다고 했다. 그때 초나라의 상채(上蔡)7) 사람으로 이사(李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현 순경(荀卿)의 제자로 깊은 학문을 닦은 후에 진나라에 유세 와서 여불위의 사인으로 있었다. 여불위가 이사의 재능을 알아보고 진왕에게 천거하자, 진왕은 그를 객경에 임명했다. 그러나 진왕이 축객령을 발하자 이사도 역시 관리들에게 붙들려 함양성 밖으로 추방되었다. 이사는 함양성 밖으로 쫓겨나던 도중에 표장을 써서 왕에게 바쳐야 할 기밀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역참에게 맡겨 급히 진왕에게 달려가 바치라고 했다. 진왕이 표장을 받아 읽었다.

「신은 ‘태산이 높은 원인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바닷물이 깊은 이유는 작은 냇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이치로 또한 왕이 그 덕을 베풀 수 있음은 아무리 하찮은 백성들 일지라도 결코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8)라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 목공께서 패업을 이루실 때 서쪽으로는 융나라에 가있던 요여(繇余)를 데려왔고, 동쪽에서는 완(宛)의 땅에서 백리해(百里奚)를, 송 땅에서는 건숙(蹇叔)을 얻었고, 당진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枝)를 구했습니다. 효공(孝公)은 위(衛)나라 출신의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진나라의 법률을 세웠으며, 혜왕은 위나라의 장의를 등용하여 육국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습니다. 이어서 증조부이신 소양왕 역시 위나라 사람 범수를 채용하여 육국을 병합하는 계책을 얻었고 그 후임으로는 연나라 출신 강성군 채택을 등용했습니다. 그리고 육국의 사군자(四君子)들도 모두 천하의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문객들의 힘을 빌려 공을 이룰 수가 있었는데, 어찌하여 다른 나라 출신의 빈객들이 진나라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두 쫓아내십니까? 대왕께서 진나라에 와있는 빈객들을 모두 쫓아내신다면 그들은 모두 타국으로 가서 그들의 쓰임을 당해 진나라는 오히려 해를 입게 되고 이후로는 진나라를 위해 충성스러운 계책을 바칠 사람은 더 이상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의 표장을 읽고 크게 깨달아 즉시 축객령을 취소한 진왕은 사람을 시켜 수레를 몰고 달려가 이사를 데려오도록 했다. 진왕의 사자는 여산 밑에 이르러 이사를 만나 데려올 수 있었다. 이사가 다시 함양성에 들어와 진왕을 알현하자 진왕은 그를 옛날처럼 객경의 자리를 돌려주었다.

이사가 진왕에게 말했다.

「옛날 목공께서 패업을 이루실 때 제후들은 수 없이 많았고 주나라의 덕은 아직 쇠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하를 겸병할 계책을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선군이신 효공 이후부터 주왕실은 쇠락하기 시작하고 제후들은 서로 합병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육국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 진나라가 그들을 휘하에 두고 속국으로 삼은 지도 몇 대가 지났습니다. 대저 진나라의 강한 세력과 대왕의 지혜로움을 사용하여 중원의 제후국들을 소탕한다면 그것은 마치 부뚜막의 먼지를 털어 내는 일처럼 쉽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도록 진나라는 마음만 급할 뿐 아무 공도 이루지 못하고 앉아서 좌시만 하고 있는데 만약에 제후국들의 국세가 다시 회복되어 서로 힘을 합하여 합종이라고 맺게 된다면 그때는 후회한다 한들 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인이 육국을 병탄하려면 무슨 계책을 써야 하겠소?」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한나라는 육국 중 국력이 제일 약한 나라입니다. 먼저 한나라를 공격하여 점령한다면 다른 나라들은 우리 진나라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진왕이 이사의 계책에 따라 내사 등(騰)을 장수로 삼아 10만의 군사를 주어 한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4. 膏以香消 麝以臍死(고이향소 사이제사)

- 짐승은 고기의 향기로 인해 죽고, 노루는 배꼽의 사향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

그때 한나라는 환혜왕(桓恵王)이 얼마 전에 죽고 태자 안(安)이 그 뒤를 잇고 있었다. 한나라의 공자 중에는 비(非)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형명학과 법률학에 조예가 깊었다. 그가 보기에 한나라가 진나라에 영토를 빼앗겨 나라가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여러 차례에 걸쳐 표장을 써서 상주했으나 한왕은 그 계책을 받아들일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윽고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략해오자 한왕이 두려워하여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고 했다. 스스로 자기의 재능을 믿고 있던 한비가 진나라에 들어가면 진왕이 자기를 임용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왕에게 진나라에 친선사절로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청했다. 한왕의 허락을 받은 한비가 진나라에 당도하여 진왕을 알현하고 한왕이 나라를 들어 진나라에 바치고 자기는 진나라의 동쪽 변경을 지키는 외신이 되겠다는 뜻을 전했다. 진왕이 듣고 크게 기뻐했다. 한비는 계속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계책을 진왕에게 말했다.

「신에게는 진나라가 천하를 병탄시키는데 제후국들의 합종을 깨뜨릴 방책을 갖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신의 계책을 채용하신다면 조나라는 나라를 들어 항복할 것이며, 한나라는 망하고 초와 위나라는 신하의 예를 갖출 것이며, 제와 연나라는 진나라에 복속될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대로 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신의 목을 베어 효수하시어 불충한 신하가 어떤 벌을 받는 가를 경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한비는 자기가 저술한 <세난(説難)>,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림(説林)> 등 10여 만 자로 된 책9)을 바쳤다. 진왕이 한비의 책에 몰두하여 다 읽고 그 내용에 반하여 한비를 객경으로 임명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이사가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진왕에게 참소했다.

「제후 소생의 공자들은 각기 그들의 공실과 관계를 끊지 못하는데 어찌 그들을 쓰시려 하십니까? 우리가 한나라를 공격하니 한왕이 황급히 한비를 보낸 것은 혹시나 옛날 소진이 사용했던 반간계를 쓰기 위함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한비는 결코 진나라가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비를 진나라에서 추방해야 하겠소?」

「옛날 진나라에 머물던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 위나라의 신릉군 무기,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 등을 진나라가 등용을 하지 않고 모두 자기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결과 후에 결국 그들은 진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었습니다. 한비는 재능이 있는 선비라 차라리 죽여 한나라의 날개를 잘라 뒷날의 후환을 없애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진왕이 즉시 한비를 운양(雲陽)10)으로 보내 옥에 가두게 한 후에 별도로 날짜를 정해 죽이려고 했다. 한비가 알고 옥리를 향해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어야 한단 말인가?」

옥리가 대답했다.

「날아다니는 새도 한 둥지에는 암수가 같이 살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인심은 재능이 있는 사람이 쓰임이 당하지 않게 되면 죽게 되어있습니다. 구태여 꼭 죄가 있어야만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한비가 비분강개하여 시를 지었다.

<세난(說難)>을 말하기란 과연 어려운 일이로다!

<고분(孤憤)>을 이미 읊었어도

가슴속의 울분은 억제할 수 없도다!

<오두(五蠹)>를 없애지 못했으니

<세림(說林)>으로 무엇인들 얻을 수 있겠는가?

고기의 향기로 인해 짐승은 죽고

배꼽의 사향으로 인해 노루는 목숨을 잃는구나!

説果難(세과난)

憤何已(분하이)

五蠹未除(오두미제)

説林何取(세림하취)

膏以香消(고이향소)

麝以臍死(사이제사)

그날 밤, 한비는 관 끈을 풀어 스스로 자기의 목을 졸라 죽었다.11)

한왕은 한비가 진나라에 가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게 되어, 스스로 나라를 들어 진나라에 바치고 신하가 되겠다고 청했다. 진왕은 내사등에게 조서를 보내 군사를 한나라에서 철수하도록 명했다.

5. 蜂鼻长目 鶻膺豺聲(봉비장목 골응시성)

- 우뚝헌 콧널에 긴 눈꼬리, 송골매의 가슴에 시랑의 목소리를 갖춘자. -

그러던 어느 날 이사와 국사를 의논하던 진왕이 한비의 재능이 생각났으나 그때는 이미 죽고 없음을 애석해 했다. 이사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신이 천거할 사람이 있습니다. 성은 울(尉)이고 이름은 료(繚)라 하며 위나라 대량인(大梁人)으로서 병법에 통달해 있어 그의 재주는 한비보다 10배는 더 낫습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소?」

「지금 이곳 함양성 내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부심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라 부름에 응하게 하여 모시기 위해서는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진왕이 울료(尉繚)를 손님을 모시는 예를 갖추어 불렀다. 울료가 당도하여 진왕을 알현하였으나 두 손을 높이 들어 길게 읍만 행할 뿐 엎드려 절은 올리지 않았다. 진왕이 개의치 않고 울료의 읍에 답례하고 상석에 앉히고 선생이라고 불렀다. 울료가 입을 열어 진왕에게 말했다.

「지금 육국과 진나라의 국세를 비교한다면 그 것은 군(郡)과 현(県)을 비교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들을 흩어지게 한다면 병탄할 수 있고 그들이 합치게 된다면 공략하기 어렵게 됩니다. 옛날 삼진이 힘을 합하자 지백(智伯)이 멸망했고, 오국이 힘을 합하자 제민왕(齊湣王)이 싸움에서 패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이점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과인이 육국을 흩어지게 하여 다시는 서로 합치지 못하게끔 하고 싶은데 선생께서는 좋은 계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날 육국의 정사는 모두 권신들이 맡아서 전결하고 있어 호신(豪臣)들은 더 이상 충성스러운 마음과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있으면서 단지 많은 재물을 얻어 즐거운 생활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는 부고에 쌓여있는 재물들을 아까워하지 마시고 육국의 권신들에게 뇌물을 후하게 나누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계책을 어지럽게 만들어 육국의 땅을 진나라에 합칠 수 있는 데는 불과 30만 금의 황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울료를 상객으로 삼아 군신의 관계를 따지지 않고 동등하게 예를 행했다. 울료에게 내어주는 의복과 음식은 모두 자기와 같게 하고 시시때때로 울료가 묵고 있는 공관에 들려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했다. 울료가 보고 말했다.

「내가 진왕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풍채가 준수하고 긴 눈꼬리에 코가 높고, 가슴은 독수리의 것과 같고, 목소리는 시랑(豺狼)과 같다.인정머리가 없어 남에게 각박하게 대하고, 잔인한 마음을 가슴에 숨기고 궁하면 쉬이 남에게 굽신거리고, 뜻을 얻고 나면 또한 남을 업신여긴다. 나는 관직을 갖지 않는 백두(白頭)임에도 불구하고 진왕은 나를 지극히 겸손한 태도로 접대한다. 진왕이 뜻을 얻어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천하는 모두 그에게 포로가 되어 어육(魚肉)의 신세가 되리니 진왕이야말로 오래 사귀지 못할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울료는 진왕에게 간다는 인사의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관사의 관리가 달려가 진왕에게 고했다. 진왕은 마치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간 듯이 가슴아파하며 초거를 사방으로 내보내 울료의 뒤를 추적하여 데리고 오게 하였다. 그는 울료의 앞에서 결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며 태위(太尉)12)에 제수하고 병사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이어서 진왕은 울료의 제자들을 모두 대부로 삼았다. 울료는 진왕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되어 비록 장래가 두렵기는 했지만 진나라를 떠날 수는 없었다.

6. 遺之諛臣, 以亂其謀(유지유신, 이란기모)

- 아첨하는 신하를 부추겨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히다. -

진왕은 울료의 건의에 따라 진나라 궁정의 내탕금 대거 풀어 빈객들에게 들려 열국에 사자로 보내 그 나라의 총신들이나 국정을 맡아보고 있는 권신들을 찾아 뇌물로 바치며 그 나라의 정세를 정탐하도록 시켰다.오

진왕은 다시 울료에게 물어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서 해야 할 순서를 물었다. 울료가 대답했다.

「열국 중에서 제일 약한 나라는 한나라입니다. 마땅히 제일 먼저 공격하여 멸하시고, 그 다음은 조와 위입니다. 삼진을 모두 멸하고 이어서 온 나라의 군사를 들어 초나라를 공략하여 멸망시키면 연이나 제나라인들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한왕은 이미 진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번신이 되겠다고 항복을 해 왔고, 조왕도 예전에 이미 함양성에 들려 내조하고 잔치를 벌려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무슨 명분으로 다시 군사를 일으키겠소?」

「조나라는 땅은 넓고 군사는 강합니다. 또한 한나라와 위나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일격에 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나라가 항복하여 우리의 번신이 되었으니 조나라는 이미 그들을 돕는 원군의 반을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조나라를 정벌하는데 명분이 없음을 걱정하고 계신다면 먼저 위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조왕에게는 곽개(郭開)라는 총애하는 신하가 있습니다. 그는 재물을 탐하며 염치를 모르는 자입니다. 신의 제자 왕오(王敖)라는 자가 있는데 제법 유세술에 밝습니다. 그를 위왕에게 보내 설득하여 위왕으로 하여금 곽개에게 뇌물을 주고 원군을 보내달라고 청하게 한다면 곽개의 건의를 받은 조왕은 틀림없이 위나라에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우리는 위나라에 원군을 보낸 조나라를 문책한다는 명분을 얻어 위나라를 공격하던 군사들을 조나라로 돌려 공격하면 됩니다.」

「좋은 계책이오.」

진왕은 즉시 대장 환의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함곡관을 나가면서 위나라를 공격하러 간다고 세상에 알리게 했다. 다시 울료의 제자 왕오에게 황금 5만 근을 주어 위나라에 보내면서 그 사용처를 스스로 알아서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했다.

당시 위나라는 안리왕이 죽고 경민왕(景湣王)이 뒤를 이어 재위 6년째 되던 해였다. 이윽고 왕오가 위나라에 당도하여 위왕을 만나 말했다.

「삼진이 능히 진나라에 대항 할 수 있음은 순치(脣歯)의 관계로 서로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한나라는 나라를 들어 진나라에 항복하고 그들 스스로를 번신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왕은 몸소 함양에 들려 술자리를 진왕과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한과 조 두 나라는 서로 앞서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진나라를 받들고 있어 아무도 위나라를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진나라의 군사들이 몰려오니 위나라는 참으로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대왕은 어찌하여 업성(鄴城)을 떼어 조나라에 바치며 구원군을 청하지 않으십니까? 조나라가 군사를 내어 업성을 지키게 되면 그것은 곧 조나라를 시켜 위나라를 지키게 하는 일과 같습니다.」

「선생은 조왕이 업성을 받고 우리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줄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왕오가 경민왕에게 거짓으로 고했다.

「조왕이 국정을 맡긴 사람은 곽개라는 사람입니다. 신과 곽개는 평소에 교분이 있어 제가 가면 그가 조왕에게 말해 위나라에 구원군을 보내게 할 수 있습니다.」

위나라의 경민왕이 왕오의 말을 따라 업군에 속하는 세 성의 경계를 나타내는 지적도와 함께 위나라의 국서를 그에게 주어 조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청하게 했다.

왕오는 황금 3천 근을 먼저 곽개에게 주고 교분을 쌓은 후에 위나라가 업군의 세 성을 조나라에 바치려고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미 위나라의 황금을 뇌물로 받은 곽개는 도양왕에게 즉시 진나라의 침략을 받고 조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고 있다고 고하며 말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는 것은 위나라를 병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위나라가 망하게 되면 그 다음 차례는 조나라가 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가 업군의 세 성을 들어 우리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구원군을 청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위나라의 청을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7. 一飯三矢(일반삼시)

- 한 끼 식사에 세 번 용변을 보다. -

도양왕이 곽개의 말을 듣고 장군 호첩으로 하여금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업군을 인수하라고 명했다. 진왕은 환의에게 명하여 위나라로 향하던 군사들의 진로를 바꿔 업군으로 진공하라고 명했다. 호첩이 업성에서 나와 진나라 군사들을 중도에서 막아 동고산(東崓山)에서 조우하여 큰 싸움이 벌어졌다. 호첩의 조군이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하자 환의는 승세를 타고 조군의 뒤를 추격하여 업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조나라의 아홉 개의 성을 연달아 떨어뜨렸다. 호첩은 북쪽으로 계속 달아나 의안(宜安)13)으로 들어가 농성전을 벌리며 조왕에게 사자를 보내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도양왕이 군신들을 불러 모아놓고 의견을 묻자 모든 신하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날 우리나라에 진나라 군사들을 물리친 장수로는 염파와 조사 두 사람뿐이었고, 방씨와 악씨들은 그런대로 잘 버텨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방훤은 이미 죽고 악한과 악승도 없습니다. 단지 염파만이 아직 위나라로 도망가서 살고 있는데 어찌하여 불러와 진나라 군사들을 막지 않으십니까?」

곽개는 염파와 원래 원수지간이었기 때문에 염파가 다시 중용 될까 두려워하여 즉시 도양왕이 혼자 있을 때 찾아가 염파를 참소했다.

「염파장군은 올해 나이가 70에 가까워 근력이 예전과 같지 않아 노쇠해졌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옛날 악승 장군과 틈이 벌어져 만약 그를 불러놓고 쓰지 않으면 그의 원한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잠시 사람을 시켜 그가 옛날처럼 근력이 여전한지를 살펴보고 나서 불러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양왕은 곽개의 말에 혹하여 내시 당구(唐玖)에게 당예(搪猊)라는 곳에서 나오는 특산의 철제 갑옷 한 벌과 좋은 말 네 필을 가져가서 염파에게 주고 그의 근황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당구가 위나라로 길을 떠나기에 앞서 곽개가 아무도 몰래 자기집으로 초청하여 송별연을 벌려 술을 마시다가 황금 20일을 내와 당구에게 뇌물로 주었다. 당구가 너무 많은 황금에 의아해하며 자기는 그 많은 황금을 받을만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다고 겸양하며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곽개가 말했다.

「제가 영감에게 한 가지 번거로운 일을 부탁하려고 하는데 이 황금을 받지 않으시면 내가 감히 입을 열어 부탁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구가 그때서야 황금을 받아서 품에 넣고 물었다.

「대감께서 저에게 이르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염파 장군과 나는 원래 사이가 나빠 서로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영감도 아시고 계시는 일입니다. 이번에 영감께서 왕명에 따라 염파 장군을 만나 그의 용태를 살피러 가시는데 만약 그의 근력이 노쇠하게 되었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아직도 기력이 정정하다면 영감께서 몇 마디의 말을 덧 붙여 단지 나이가 너무 들어 싸움에 임할 수 없을 것이라고만 고하신다면 조왕은 틀림없이 염파를 다시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을 해 주십사고 영감에게 후사하는 것입니다.」

곽개의 밀명을 받은 당구가 위나라에 가서 염파를 상면하고 조왕의 명을 받아 안부를 살피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염파가 당구에게 물었다.

「진나라의 군사들이 조나라의 국경을 침범했습니까?」

「장군께서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조나라에서 도망쳐 몇 년 동안이나 위나라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동안 조왕은 나에게 단 한 줄의 글도 주지 않고 무심하게 대했습니다. 지금 갑자기 당예의 그 유명한 철제 갑옷과 훌륭한 말들을 나에게 선물로 내리니 이는 필시 제가 필요한 곳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진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장군은 조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매일 밤 조나라가 나를 불러주기만을 고대하며 잠을 못 이루고 있는 사람인데, 어찌 내가 조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겠습니까?」

염파는 당구를 자기 집에 며칠 머물게 하고는 매일 그와 함께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일부러 그의 앞에서 정력이 왕성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한 말의 밥을 지어 고기 십여 근과 함께 혼자서 모두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우곤 했다. 그리고는 조왕이 보내온 당예산의 철제 갑옷을 몸에 걸치고는 단숨에 말에 뛰어 올라 마치 비호처럼 종횡으로 내 달리더니 말 위에 앉아서 장극을 휘두르며 한 바탕 자기의 무예 솜씨를 자랑하고 나서 말에서 내리며 당구를 향해 말했다.

「저의 모습이 젊었을 때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모습을 그대로 조왕에게 전해주시면 그 은혜 잊지 않겠소. 나는 남은여생이나마 조나라에 바치고 싶을 뿐이오!」

당구는 염파가 정신은 말짱하고 기운은 왕성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으나 조나라에서 떠나올 때 곽개로부터 뇌물을 받아 챙긴 관계로 그가 한단에 돌아와서 조왕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염파 장군은 그 나이에 식욕은 왕성하여 고기와 밥을 많이 드셨으나 비장에 이상이 있어 신과 같이 잠시 앉아 있을 때만해도 세 번이나 뒷간에 갔습니다.」

조왕이 탄식하며 말했다.

「적장과 싸움을 하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뒷간을 갈 수 있단 말인가? 염파는 과연 너무 늙어 버렸구나!」

조왕은 결국은 염파를 부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기용하여 호첩을 돕도록 했다. 이 때가 조도양왕 9년의 일로서 진왕 13년에, 기원전 234년에 일어난 일이었다.14)

그 후에 초유왕(楚幽王)이 위나라에 망명한 염파가 위왕에게 기용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사람을 보내 초나라로 불렀다. 염파가 다시 초나라에 와서 장군이 되었으나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도우려고 하지 않는 초왕의 태도를 보고 가슴속에 분노를 끓이다가 결국 자기의 높은 뜻을 펴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죽고 말았다. 사관이 이를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노련한 명장이라고 하면 염파를 말하는데

뒷간에 자주 다닌다는 참소에는 어쩌는 수가 없었네!

옛날 오나라가 망하자 간신 백비도 목숨을 잃었음을 모르는가?

곽개는 어찌하여 황금을 그렇게 밝혔는가?

老成名将説廉頗(노성명장설염파)

遺矢讒言奈若何(유시참언나약하)

請看呉亡宰嚭死(청간오망재비사)

郭開何事取金多(곽개하사취금다)

8. 巨奸郭開(거간곽개)

- 희대의 간신 곽개 -

그때까지 조나라에 머물고 있던 왕오가 곽개를 만나 말했다.

「대감은 조나라가 망하게 되는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조왕에게 권하여 염파를 불러들이지 않습니까?」

「조나라가 흥하거나 망하는 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오. 그러나 염파는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인데 어찌 내가 그가 다시 조나라에 들어오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이오?」

왕오는 곽개가 나라를 위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장차 조나라가 망하게 된다면 대감은 장차 어디로 가시려고 하십니까?」

「나는 제나라와 초나라 중에서 한 나라를 택하여 의탁하면 이 한 몸 편히 지내는 것 쯤이야 문제되겠습니까?」

「진나라가 천하를 집어삼키려는 기세가 천하를 덮고 있는데 제와 초 두 나라라고 해서 조․위(趙魏) 양국과 다를 바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대감을 위해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조나라가 망하게 되면 차라리 진왕에게 몸을 의탁하십시오. 넓은 도량을 갖고 계시는 진왕은 현사에게 스스로 허리를 굽히며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받아주십니다.」

「그대는 위나라 출신인데 어찌 진왕의 마음을 그리 잘 알고 있소?」

「저의 스승은 울료자(尉繚子)라는 분인데 진나라에 갔다가 진왕으로부터 태위라는 벼슬을 받았고 저 역시 스승을 따라 갔다가 진나라에 출사하여 대부가 되었습니다. 대감이 조나라의 권력을 잡게 되리라고 미리 아시게 된 진왕께서는 저에게 명하시어 대감과 교분을 맺으라고 황금을 주면서 조나라에 보내셨습니다. 사실은 제가 바친 황금은 진왕께서 대감에게 내리신 하사품입니다. 만약에 조나라가 망하게 되면 대감은 필히 진나라에 오시기 바랍니다. 대감은 마땅히 상경의 작위를 받으신 후에 조나라의 아름다운 전답과 저택을 대감이 원하시는 대로 차지할 수 있음입니다.」

「그대가 과연 나를 진왕에게 천거하여, 그 결과 진왕의 유지를 내가 받게 된다면 내가 어찌 그 명을 받들지 않겠는가?」

왕오가 다시 황금 7천 근을 꺼내 곽개에게 주면서 말했다.

「진왕께서 저에게 황금 만 근을 주시면서 조나라의 장군이나 상국들과 교분을 맺어 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진왕께서 저에게 맡기신 황금 만 근 중 남은 것을 모두 대감께 드리니 나중에 제가 일이 있을 때는 마땅히 대감께 폐를 끼쳐야 되겠습니다.」

곽개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 사람이 진왕의 후한 선물을 받았는데 만약에 온 정성을 다하여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자식이 아닐 것이오.」

왕오는 즉시 곽개와 헤어져 진나라로 돌아가 남은 황금 사만 근을 진왕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신은 곽개에게 만 금을 주었습니다. 곽개 한 사람이면 조나라의 일은 뜻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진왕은 조나라가 결국은 염파를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다시 환의를 다그쳐 조나라를 향해 군사를 진격시키라고 명했다. 진나라 군사들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도양왕은 결국 그 일로 인해 병이 들어 죽었다.

9. 堅壁敗秦(견벽패진)

- 보루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다가 기회를 틈타 진군을 대파한 이목(李牧) -

도양왕에게는 이름이 가(嘉)라는 적자가 있었다. 후에 조나라에 노래와 춤에 능한 여인이 있어 도양왕이 궁궐로 불러 그녀의 노래를 듣고 사랑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녀를 궁중에 머물게 하고 그 사이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천(遷)이라고 지었다. 도양왕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소생인 조천(趙遷)도 같이 총애했다. 이어서 도양왕은 적자조가(趙嘉)를 태자의 자리에서 폐하여 서자로 삼고 조천을 세웠다. 그때 곽개는 조천의 태부가 되었다. 천은 원래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 곽개가 태자가 된 천을 데리고 다니면서 가무나 여색과 같은 음탕한 짓과 개사육과 승마와 같은 잡기만을 가르쳐 두 사람의 사이는 아주 친하게 되었다. 이어서 도양왕이 죽자 곽개는 태자 천을 받들어 조왕의 자리에 앉히고 3백 호의 조그만 고을에 봉한 조가는 한단성 안에 살게 했다. 곽개는 상국이 되어 조나라의 정사를 전단했다.

한편 진장 환의는 조나라에 상이 난 틈을 타서 의안(宜安)에서 농성하고 있던 조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여 성을 파하고 호첩(扈輒)과 그가 거느리고 있던 조나라 군사 십여 만의 목을 베었다. 승승장구한 환의는 의안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장차 남진하여 한단성을 압박하려고 했다. 진군과의 싸움에서 호첩은 죽고 그 군사들은 모두 복멸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왕 천은 두려움에 떨다가 자기가 태자로 있을 때부터 대군(代君)의 수장 이목이 싸움에 능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조왕이 즉시 사자에게 대장군의 인장을 주며 역참의 파발마들을 이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급히 대군으로 달려가 이목에게 그의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와 한단성을 구하도록 명했다. 이목은 휘하의 군사들 중에서 3백 승의 병거, 3천 기의 기병 및 보졸 만 명을 남겨 대군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1천 5백 승의 병거와, 1만 3천 기의 기병 및 5만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남쪽으로 행군하여 한단성 남쪽 교외에 주둔시키고 자기는 단신으로 성안으로 들어가 조왕을 알현했다. 조왕 천이 이목에게 진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방도를 묻자 이목은 대답했다.

「진나라가 계속되는 승리로 그 예봉의 기세가 매우 높아 쉽게 이길 수 없습니다. 원컨대, 신에게 아무 것도 구애받지 않고 편의에 따라 작전을 펼칠 수 권한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이 명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조왕이 이목의 청을 허락하며 또 물었다.

「대군의 군사들은 싸움을 잘 하는가?」

「나가서 진나라 군사들과 맞서 싸우는 데는 아직 충분치 않으나, 싸우지 않고 지키기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조나라 경내에 제법 싸울 수 있는 군졸들이 아직도 10 만에 달하고 있소. 조총(趙蔥)과 안취(顔聚)에게 각기 5만의 병사들을 주어 장군의 지휘를 받도록 하겠소.」

이목은 조왕의 명을 받들고 성 밖으로 나와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하여 비류(肥纍)라는 곳에 진채를 세우고 진영 주위로 높은 보루를 높이 세워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나와서 진나라 군사들의 도전에 응하지 않았다. 이목은 매일 소를 잡아 군사들에게 배불리 먹이며 군사들을 나누어 교대로 사격 연습을 시켰다. 군사들은 매일 활 시합을 하여 상을 받게 되자 이윽고 서로 앞 다투어 이목에게 달려와 출전을 청했다. 이목은 결코 허락하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기다리다 지친 진나라의 대장 환의가 말했다.

「옛날 염파가 높은 보루에 의지하여 왕흘의 공격을 견디어 냈는데, 지금 이목도 또한 그 전법을 쓰고 있음이라! 나에게는 그 계책을 깨뜨릴 방법이 있다!」

환의는 즉시 군사들을 이대로 나누어 그 중 일대를 이끌고 나가 감천(甘泉)을 공격하였다. 조총이 감천을 구하러 가겠다고 자청했다. 이목이 말했다.

「적군이 공격한다고 해서 우리가 구하러 간다면, 그것은 적군의 작전에 따라 우리가 움직이는 용병임으로 병법에는 금기로 여기는 일이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본영을 기습해야만 하오. 진군의 군사들 대부분은 감천(甘泉)을 공격하기 위해 출전하여 그 본영은 틀림없이 허점이 생겼을 것이며, 또한 그들은 벽루에만 의지하여 굳게 지키기만 우리를 보고 아무런 대비책도 갖추지 않고 있을 것이오. 만약에 우리가 진나라의 본영을 기습하여 점령한다면 환의의 본대는 기세가 꺾여 혼란에 빠질 것이오.」

이목은 조나라의 군사들을 모두 3대로 나누어 밤을 도와 진나라의 본채를 기습했다. 아무런 대비도 하고 있지 않던 진나라 군사들은 뜻밖에 조나라 군사들이 몰려들자 크게 무너지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진나라의 유명한 아장 10 여명이 싸움 중에 전사하였고 또한 셀 수도 없이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싸움에서 패한 군사들이 감천을 공격하고 있던 환의에게 달려가 고했다. 환의가 대노하여 군사들을 모두 거두어 조나라 군사들과 대전을 하기 위해 원래의 본영으로 회군했다. 이목은 좌우에 양익을 펼쳐놓고 환의의 군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목이 대리고 온 대군의 군사들은 앞장서서 용감히 싸웠다. 양군이 접전에 들어가 싸움이 이윽고 무르익었을 때 이목은 좌우의 날개를 앞으로 전진시켰다. 환의는 조나라 군사들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패잔병을 수습하여 달아나 함양으로 돌아갔다. 조왕 천은 이목이 진나라의 군사를 물리친 공을 치하하며 말했다.

「이목 장군은 곧 나의 백기로다!」

조왕은 이목을 백기가 갖고 있던 무안군(武安君)이라는 봉호를 내리고 만 호의 식읍에 봉했다.

한편 환의가 싸움에 패하고 함양으로 도망쳐 오자 분노한 진왕은 그의 작위를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다시 왕전과 양단화를 대장으로 삼아 각기 길을 나누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나라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 제 106회로 계속 >

[주석]

1)창주(滄州)/ 지금의 하북성 창주시(滄州市)를 말하는 것으로 창주란 지명은 명나라 때의 이름이고 전국 때의 지명이 아니다.

2)有生者不諱其死, 有國者不諱其亡; 諱亡者不可以得存, 諱死者不可以得生

3)관곽(棺槨)/ 속널과 겉널

4)영고숙(穎考叔)/ 연의 4회부터 7회에 걸쳐 등장하는 춘추 초기 때의 정나라의 장군으로 정장공(鄭庄公)이 동생 태숙단을 도와 자기를 몰아내려 했던 모친 무강(武姜)을 영(穎) 땅으로 유배시키자 영고숙이 찾아와 장공을 설득하여 무강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5)하남(河南)/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진소양왕이 동주를 멸하고 이곳에 하남군을 설치하였다. 후에 장양왕(庄襄王)이 즉위하자 여불위를 이곳에 봉했다.

6)비성(郫城)/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成都市) 북서 20키로에 비현(郫縣)이라고 있음.

7)상채(上蔡)/지금의 하남성 상채시 서남에 있었던 전국시대 때의 고을로 원래 채읍이다. 주무왕이 자기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을 이곳에 봉했다. 후에 채평후(蔡平侯)가 나라를 신채로 옮기고 채소후(蔡召侯) 때 주래(州來)로 옮기고 주래(州來)의 이름을 하채로 불렀기 때문에 원래의 채읍 이름을 상채로 부르게 된 것이다.

8)泰山不讓土壤 故能成其高, 河海不擇細流 故能取其深, 王者不却衆庶 故能成其德.

9)한비(韓非)가 저술한 한비자(韓非子)를 말한다. 한비는 전국시대 말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 밑에서 이사(李斯)와 함께 배운 동문이었다. 그의 재능은 이사를 능가하였으나 천성이 눌변이었기 때문에 제후들에게 유세를 하지 못하고 저술활동에 몰두했다. 후에 진왕이 한비의 저서를 읽고 한나라에 군사를 보내자 한나라가 한비를 사자로 보내 강화를 청했다. 진왕이 곁에 두고 객경으로 삼으려 했으나 한비의 재능을 시기한 이사가 모함하여 죽였다. 한비자는 모두 55편으로 전한 초기에 정리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유럽 중세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함께 제왕학의 교본으로 인정되고 있다. 본편에 언급된 내용만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난(說難) : 한비자 제12편으로 세(說)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遊說)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의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의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고분(孤憤) : 제11편으로 고분이란 말은 ‘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본장의 내용은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은 대개가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하고 있는 장이다.

오두(五蠹) : 제49편으로 나라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좀벌레에 비유하여 이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섯 가지의 좀벌레에 해당하는 부류로는 유가(儒家), 유세객(遊說客), 종횡가(縦横家), 유협(遊侠)의 무리들, 권문귀족(権門貴族), 상공인(商工人)을 들고 있다.

세림(説林) : 제22편, 23편으로 세(說)란 유세한다는 말이며 각종 사물들이 모여져 있으면 수풀과 같다고 하여 림(林)이라 하였다. 즉 무림(武林)이라 유림(儒林)의 림(林)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때 유세가 횡행하던 풍조에서 한비는 유세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 참고로 쓰이게 하고자 하면서 하나의 편으로 엮어 세림이라 명하고 상하로 나누어 모두 71개의 고사를 담고 있다.

10)운양(雲陽)/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순화현(淳化縣) 서북

11)한비(韓非)가 스스로 자살한 것이 아니고 이사(李斯)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비가 죽은 해는 진왕 14년인 기원전 233년의 일이다.

12)태위(太尉)/ 진한(秦漢) 시대 때 삼공(三公)의 하나. 나라의 군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고 황금으로 된 인장과 자색의 비단으로 엮은 인끈에 봉록은 만석이었다. 한나라 때 대사마(大司馬)로 명칭을 바뀌었다.

13)의안(宜安)/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 동남

14)이 단원은 원저자인 풍몽룡의 착오로 인하여 그 순서가 바뀌었다. 즉 조장 호첩이 진나라 군사들에게 의해 업성에서 패하고 9개의 성을 연달아 빼앗긴 후에 의안(宜安)으로 달아나 농성하다가, 그의 뒤를 추격해 온 진장 환의에 의해 호첩과 그의 군사 10만 대군이 참수된 해는 진왕은 13년인 기원전 234년의 일이고, 조군이 대패한 결과 진나라에 위협을 느낀 한왕 안(安)이 한비(韓非)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강화를 맺으려고 한 해는 그 이듬해인 진왕 14년 기원전 233년의 일이다.

[평설]

기원전 237년 여불위를 재상의 자리에 파면한 진시황은 진나라의 국정을 직접 주관하기 시작했다. “ 거짓 궁형을 당해 진나라 궁정을 어지럽힌 노애” 편에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진시황의 행동은 ‘나쁜 일을 마치 원수대하 듯이 미워하여(疾惡如仇),’ ‘과오를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정도를 지나쳐 일을 망쳤다.(矯枉過正).’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옷을 벗고 진왕에게 간한 모초(茅焦)” 편은 진시황이 노애와 태후의 음란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 본 모초가 고차원적인 세상의 존망지계를 진왕에게 설파하자, 진왕이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바꿔 태후를 연금에서 풀어내서 함양궁으로 데려 오도록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그와 동시에 노애로 인해 내린 외국 출신의 관리들을 모두 나라밖으로 추방하기 위해 내렸던 축객령(逐客令)을 철회하여 여불위가 거느리고 있었던 인재들을 모두 거두어 쓰게 했다. 진시황은 자기의 잘못을 즉시 바로잡은 행동과 인재를 중요시하는 그의 사상은 그로 하여금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게 한 것이다.

진시황은 나라 안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계속해서 군사행동을 가하여 한과 위 두 나라를 겸병하고 조나라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견지했다.

기원전 236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9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다음 해에 진나라의 명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위나라는 진나라 함께 초나라를 공격했다. 다시 진나라는 한나라를 압박하여 진나라에 대하여 신하의 나라로 칭하게 만들었다. 그와 같은 전략은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한나라가 방해하지 못하게 보장받은 것이다.

기원전 234년부터 3년 동안 진나라는 계속해서 조나라를 공격했다. 첫 해에는 평양을 공격하여 조군 10만의 목을 베고, 다음 해인 기원전 232년에는 다시 의안(宜安)을 공격했다. 셋째 해인 기원전 231년에는 진나라의 일군은 업(鄴)을 공격하고, 또 다른 일군은 태원을 경유하여 조나라 경계로 들어가 파오(番吾)를 공격했다. 나중의 두 번의 공격은 모두 조나라의 명장 이목에 의해 격퇴당했다. “ 견고한 보루에 의지하여 진장 환의의 군대를 물리친 조나라의 명장 이목” 편은 진나라가 두 번에 걸쳐 조나라를 공격할 때의 이야기다. 이목이 비록 두 번이나 진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조군 역시 그 전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전국책(戰國策)ㆍ제책(齊策)>에 따르면 “조나라는 수십 만의 군사를 잃으면서 근근히 한단성을 지켰다.”라고 했다. 이때는 한, 위, 제 삼국이 모두 진나라에 굴복한 상태였고, 초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국경을 서로 접하고 있던 연(燕)과 조(趙) 두 나라는 분쟁을 그치지 않고 서로 이전투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제정세는 더욱 진나라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이목의 존재로 조나라가 비록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취했다고 했으나 결국은 진나라에 의해 멸망을 당할 운명을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다음은 이사가 진시황에게 올린 간축객령 원문이다.

“ 관리들이 객인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의논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 목공께서는 서쪽의 융(戎)으로부터 유여(由餘)를 얻고, 동쪽의 완(宛)에서는 백리해(百里奚)를, 다시 송(宋)나라에서 건숙(蹇叔)을 얻었습니다. 또한 당진(唐晉)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枝)가 찾아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목공께서는 중용해서 서융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효공(孝公)의 대에 이르러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고 풍속을 바꾸어 백성들의 생활은 풍성하게 되었으며 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부역에 임했으며 제후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했습니다. 이어서 밖으로는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천리에 달하는 땅을 얻어 지금까지 정치는 안정되고 나라는 강성하게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혜왕(惠王)께서는 장의(張儀)의 계책에 따라 삼천(三川) 지방을 공격하여 차지했으며,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진나라 땅으로 병탄했습니다. 또한 북쪽으로는 상군(上郡)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구이를 망라하고 초나라의 언영(鄢郢)을 제압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성고(成皐)의 요새를 거점으로 하여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육국의 합종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제후들은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려 진나라를 받들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 공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소양왕께서는 위나라에서 들어온 범수(范睢)를 얻자 진나라 출신 양후(穰侯)를 폐하고 화양군(華陽君)을 내쫓아 공실의 힘을 길러 왕족과 귀족들의 세력을 눌렀습니다. 또한 범수의 계책을 이용하여 제후들의 땅을 잠식함으로 해서 진나라는 제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네 분의 진나라 군주들이 이룬 공업은 모두가 객경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 보건데 어찌하여 객경들이 진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고 하는 것입니까? 네 분의 군주들이 오히려 객경들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상소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부유하게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써의 위명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곤강(昆岡)의 옥을 모으고, 수후지주(隨侯之珠)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야광주(夜光珠)는 몸에 두르시고 보검 태아(太阿)는 허리에 차고 섬리마(纖離馬)가 모는 수레에 취봉기(翠鳳旗)를 꽂고 그 옆에는 우레와 같이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영타(靈鼉)라는 북을 달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보물들은 모두 진나라 산이 아님에도 폐하께서는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라야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초나라에서 바친 야광주로 조정을 장식한다거나, 코뿔소 뿔이나 상아로 만든 기물들을 즐긴다거나 음악과 가무에 특히 뛰어난 정나라나 위나라 여인들을 데려와 후궁으로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결제(駃騠)라는 명마로 궁궐 밖의 마굿간을 어떻게 가득 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밖에 강남에서 산출되는 금과 주석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며 서촉(西蜀)에서 채취한 단청(丹靑)으로 궁궐의 누각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후궁을 장식하고 충당한 희첩들로 인해 기쁜 마음에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히 진나라 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완(宛) 땅에서 나는 진주로 장식한 비녀나 주옥을 박은 귀거리 및 아읍(阿邑)산의 횐 비단으로 만든 의복과 자수를 놓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치장품과 같은 것은 폐하에게 헌상되지 않을 것이며 세속의 유행에 따라 고아하고 아름다우며 화려한 조나라 여인은 폐하의 곁에서 시중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질그룻과 질장군을 두드리고 쟁이를 타면서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어야디야 소리와 함께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진나라의 전통적인 음악입니다. 정(鄭), 위(衛). 상간(桑間),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모두 타국의 음악입니다. 지금 질그릇과 질장군을 두드리는 진나라 고유음악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듣고, 다시 쟁이를 타는 것을 물리치고 소(韶)와 우(虞) 음악을 듣는 것은 어째서인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곧바로 마음에 유쾌해지며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일을 이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됨됨에 대한 가부를 묻지 않고, 일의 옮고 그름을 논하지도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내쳐 객인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와 주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경시하는 것으로써 천하를 굽어보며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신은 듣기에 땅이 넓어야 산출하는 곡식이 많고 나라가 커야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해야 병사들은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산이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큰 산이 되었고 황하는 한 줄기의 실개천의 물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자는 한 명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덕을 능히 밝힐 수 있어 사방으로 끝이 없는 땅을 영토로 삼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백성들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시사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귀신들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오제(五帝)나 삼왕(三王)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버린 백성들은 적국으로 가서 그 나라의 자원이 되고, 축출된 빈객들은 제후들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또한 천하의 재사들로 하여금 감히 서쪽을 향하려는 생각을 못하게 하여 그들의 발을 싸매어 진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무릇 진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 중에서 보배로운 것이 많은 것처럼, 진나라 출신이 아닌 선비들도,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빈객들을 내 쫓는 것은 적국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며, 자국의 백성들을 줄여서 원수의 나라에 보태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라 안은 저절로 비게 되고 나라 밖에서는 제후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어 그때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 관리들이 객인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의논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잘못된 처사입니다. 옛날 목공께서는 서쪽의 융(戎)으로부터 유여(由餘)를 얻고, 동쪽의 완(宛)에서는 백리해(百里奚)를, 다시 송(宋)나라에서 건숙(蹇叔)을 얻었습니다. 또한 당진(唐晉)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枝)가 찾아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목공께서는 중용해서 서융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효공(孝公)의 대에 이르러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고 풍속을 바꾸어 백성들의 생활은 풍성하게 되었으며 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부역에 임했으며 제후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했습니다. 이어서 밖으로는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천리에 달하는 땅을 얻어 지금까지 정치는 안정되고 나라는 강성하게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혜왕(惠王)께서는 장의(張儀)의 계책에 따라 삼천(三川) 지방을 공격하여 차지했으며,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진나라 땅으로 병탄했습니다. 또한 북쪽으로는 상군(上郡)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구이(九夷)를 망라하고 초나라의 언영(鄢郢)을 제압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성고(成皐)의 요새를 거점으로 하여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육국의 합종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제후들은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려 진나라를 받들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 공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소양왕께서는 위나라에서 들어온 범수(范睢)를 얻자 진나라 출신 양후(穰侯)1)를 폐하고 화양군(華陽君)2)을 내쫓아 공실의 힘을 길러 왕족과 귀족들의 세력을 눌렀습니다. 또한 범수의 계책을 이용하여 제후들의 땅을 잠식함으로 해서 진나라는 제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네 분의 진나라 군주들이 이룬 공업은 모두가 외국 출신 객경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 보건데 어찌하여 객경들이 진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고 하십니까? 네 분의 군주들이 오히려 객경들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상소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부유하게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써의 위명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곤강(昆岡)3)의 옥을 모으고, 수후지주(隨侯之珠)4)와 화씨벽(和氏璧)5)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야광주(夜光珠)는 몸에 두르시고 보검 태아(太阿)6)는 허리에 차고 섬리마(纖離馬)7)가 모는 수레에 취봉기(翠鳳旗)8)를 꽂고 그 옆에는 우레와 같이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영타(靈鼉)라는 북을 달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보물들은 모두 진나라 산이 아님에도 폐하께서는 그것을 소유하는 기쁨을 누리고 계시니 무슨 연유에서입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라야만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초나라에서 바친 야광주로 조정을 장식한다거나, 코뿔소 뿔이나 상아로 만든 기물들을 즐긴다거나 음악과 가무에 특히 뛰어난 정나라나 위나라 여인들을 데려와 후궁으로 채울 수도 있습니다. 또한 결제(駃騠)라는 명마로 궁궐 밖의 마굿간을 어떻게 가득 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밖에 강남에서 산출되는 금과 주석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며 서촉(西蜀)에서 채취한 단청(丹靑)으로 궁궐의 누각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후궁을 장식하고 충당한 희첩들로 인해 기쁜 마음에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히 진나라 산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완(宛) 땅에서 나는 진주로 장식한 비녀나 주옥을 박은 귀거리 및 아읍(阿邑)9) 산의 횐 비단으로 만든 의복과 자수를 놓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치장품과 같은 진기한 물품들은 폐하에게 헌상되지 않을 것이며 세속의 유행에 따라 고아하고 아름다우며 화려한 조나라 여인은 폐하의 곁에서 시중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질그룻과 질장군을 두드리고 쟁이를 타면서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어야디야 소리와 함께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진나라의 전통적인 음악입니다. 정(鄭), 위(衛). 상간(桑間)10), 소(昭)11), 우(虞)12), 무(武)13), 상(象)14)은 모두 타국의 음악입니다. 지금 질그릇과 질장군을 두드리는 진나라 고유음악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듣고, 다시 쟁이를 타는 것을 물리치고 소(韶)와 우(虞) 음악을 들음은 어째서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음이 즉시 유쾌해지며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일을 이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됨됨에 대한 가부를 묻지 않고, 일의 옮고 그름을 논하지도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내쳐 객인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와 주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경시하는 태도는 천하를 굽어보며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신은 듣기에 땅이 넓어야 산출하는 곡식이 많고 나라가 커야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해야 병사들은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산이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큰 산이 되었고 황하는 한 줄기의 실개천의 물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자는 한 명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덕을 능히 밝힐 수 있어 사방으로 끝이 없는 땅을 영토로 삼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백성들로 삼게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시사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귀신들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오제(五帝)나 삼왕(三王)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버린 백성들은 적국으로 가서 그 나라의 자원이 되고, 축출된 빈객들은 제후들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또한 천하의 재사들로 하여금 감히 서쪽을 향하려는 생각을 못하게 하여 발을 싸매고 진나라로 들어오는 그들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주는 일’입니다. 무릇 진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보배로운 물품이 많은 것처럼, 진나라 출신이 아닌 선비들도,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빈객들을 내 쫓는 령은 적국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이며, 자국의 백성들을 줄여서 원수의 나라에 보태주는 격입니다. 그 결과 나라 안은 저절로 비게 되고 나라 밖에서는 제후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어 그때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간축객령주석

1)양후(穰侯)/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위염(魏冉)의 봉호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개인적인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결국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2) 화양군/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62년에 죽은 진나라의 대신이다. 미(羋) 성에 이름은 융(戎)이다.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의 동부(同父) 동생으로 소양왕에게는 외삼촌이 된다. 봉지의 이름을 따라서 엽양군(葉陽君) 혹은 신성군(新城君)이라고도 불리웠다. 처음에 진나라에 죄를 짓고 초나라에 망명했다가 소양왕이 즉위하자 권력을 잡은 선태후에 의해 진나라에 돌아와 선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소양왕 8년 기원전 299년 장군이 되어 초나라르 공략하여 신시(新市 : 지금의 호북성 경산(京山) 동북)를 점령했다. 후에 벼슬이 좌승상까지 올라 권세가 더욱 커져 그의 재산은 공실의 것보다 더 많게 되어, 위염(魏冉), 경양군(涇陽君) 공자시(公子市), 고릉군(高陵君) 공자회(公子悝) 등과 함께 진나라의 사귀(四貴)라 불리웠다. 소양왕 41년 범수의 계책을 채용한 소양왕이 그의 권력을 박탈했다. 선태후가 죽자 지위가 강등되어 조정에서 쫓겨났으며 다시 소양왕 45년에는 함양에서 쫓겨나 봉지로 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3)곤산(昆山)/ 고대의 산 이름으로 옥의 산지로 유명하다. 지금의 섬서성 동쪽의 곤이(昆夷)의 땅이라는 설과, 옥의 산출지로 유명한 란전(蘭田)이라는 설 두 가지가 있다. 란전에는 여융(驪戎)이 살았는데 여융은 곧 견융(犬戎) 혹은 곤융(昆戎)으로 그 산을 곤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4) 수후지주(隨侯之珠)/ 수후가 얻은 아름다운 구슬로 수주(隨珠)라고도 한다. 춘추 때 호북성 수주시(隨州市) 일대에 있어던 제후국 수(隨)나라의 군주가 소유했던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수나라의 군주가 놀이를 나가다가 길 위에 한 마리의 커더란 뱀이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수후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싸매준 다음 풀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상처가 아문 뱀이 한 개의 구슬을 입에 물고 수후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말했다. “ 나는 곧 동해 용왕의 아들인데 군주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특별히 와서 보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후지벽은 신령스러운 뱀이 물어다 분 구슬이라는 뜻의 영사지주(靈蛇之珠)라고도 한다.

5)화씨벽(和氏璧)/ 초나라 변화(卞和)가 초왕에 바친 벽옥으로 후에 조왕의 소유가 되자 진나라의 소양왕이 성 15개와 바꾸자했다. 그후로 15개 성읍의 가치가 있는 보물이라고 해서 연성지보(連城之寶)라고도 부른다.

6) 太阿/ 명검의 이름으로 <월절서(越絶書)>에 오나라의 간장(干將)과 월나라의 구야자(歐冶子)가 만들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당시에 저명한 대장장이였는데 초나라와 왕이 풍호자(風胡子)를 오월 두 나라에가서 간장과 구야자를 불러오게 하여 용연(龍淵), 태아(太阿), 공포(工布)라는 이름의 명검 3개를 만들게 했다. 후에 이 명검을 알게 된 진(晉)나라와 정(鄭)나라가 구하고자 했지만 초왕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두 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포위했다. 초왕이 태아를 허리에 차고 성루에 올라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쳤다. 태아도지(太阿倒持)라는 성어는 칼자루를 남에게 넘겨주어 그로 인해 오히려 자기가 해를 입는다는 성어다.

7)섬리마(纖離馬)/ 남북조시대 북위의 지리학자 역도원이 지은 《수경주(水經注)》에 조보(造父)가 호수(湖水)에서 나아가 도림색(桃林塞)의 과보산(誇父山)에 이르렀을 때 야생마 떼를 봤는 데 그 중에서 화류(驊騮)、 녹이(綠耳)、도려(盜驪)、기기(騏驥)、섬리(纖離)라는 명마를 얻어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치자 목왕이 조보를 마부로 삼아 서쪽으로 나아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러 갔다고 했다。

8) 취봉기(翠鳳旗)/ 물총새와 봉황의 깃으로 만든 깃발로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다.

9) 아읍(阿邑)/ 지금의 산동성 요성시(聊城市) 남 관산진(關山鎭)으로 전국 때 제나라의 중요한 성읍이었다.

10)상간(桑間)/ 복양(濮陽) 남쪽 복수(濮水) 강안의 고을 이름이다. 옛날 은나라 주왕(紂王)이 태사(太師) 사연(師延)을 시켜 음란한 내용의 미미지락(靡靡之樂)이라는 음악을 짓게 하여 밤을 지새우며 즐기다가 이로써 은나라는 망하게 되었다. 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사연은 악기를 품고 복수(濮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위(衛)나라의 태사 사연(師涓)이 당시 패권국 晉나라에 조현을 드리기 위해 들어가는 영공(衛靈公)을 수행하여 복수을 건너다가 수중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배우게 되었다. 사연(師涓)이 진평공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자 진나라의 태사 사광(師曠)이 제지하며 말했다. “이 노래는 망국의 노래입니다. 틀림없이 상간이라는 곳에서 복수를 건너다가 들었을 것입니다. 은나라의 주왕이 나라를 잃게 된 것은 이 노래로 인한 것입니다.”

11)소(昭)/ 우순 때의 악곡으로 공자세가에 제나라의 태사(太師)와 음악에 대해 토론하다가 <소(韶)>를 듣고 그것을 배우는 3달 동안은 고기 맛을 잃을 정도로 심취했다고 했다.

12)우(虞)/ 역시 우순 때의 음악이다.

13)무(武)/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토벌한 주무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춤곡이다.

14)상(象) / 무(武)와 같은 춤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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