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유산답사기의 여추우(余秋雨), ‘책을 제대로 가진 사람’

얼마 전에 문고본 크기의 책들을 모아 놓은 작은 책장을 정리하다가, 위치우위[余秋雨]라는 저자의 책을 무려 세 권이나 발견했다. <중국문화답사기>와 <세계문명기행>과 <천년의 정원>이라는 책이었는데, 사다 놓기는 꽤 오래 되었지만 아직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중국 관련서를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경로로 수집해 오기는 했지만, 역사 에세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예전에 웨난이 쓴 <진시황릉>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다. 이전까지는 딱딱한 느낌의 학술서 위주로만 번역이 이루어지더니, 대략 그 책이 나온 즈음, 또는 그 전후로 해서 좀 더 가벼운 느낌의 교양서들도 여기저기서 조금씩 번역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중국 책을 고를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약간의 편견이 작용하게 된다. 가령 중국 저자가 중국 역사나 사회에 관해서 쓴 책이라면 오케이지만, 그쪽 말고 무슨 세계사라든지 점성학이라든지 미국의 연쇄 살인마에 관해서 쓴 책이라면 아무래도 맨 먼저 손이 가지는 않게 마련이다.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도 결국 외국 자료를 뒤적여서 정리한 책인데, 그걸 굳이 다시 우리말로 옮길 만한 가치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실제로도 그 내용은 그리 대단하거나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국내 저자가 같은 주제로 쓴 책이 있더라도, 같은 이유로 어지간해서는 손이 가지 않는 걸 보면, 딱히 중국에 대한 편견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위치우위의 책을 무려 세 권이나 구입해서 쟁여놓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역시나 생각나지 않지만 (노라 에프런의 망령이여!) 어쩌면 웨난의 책을 번역한 두 명의 역자들이 담당한 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먼지만 쌓여 있던 책이어서, 이번 기회에 한 번 후루룩 읽어보고 치워 버리려고 세 권을 모두 꺼내 현관 옆 책더미(조만간 처분될 녀석들)에 올려놓았다. 그러다가 잠 못 이루고 마루를 서성거리던 어느 날 새벽, 우연히 그중 한 권인 <중국문화답사기>를 집어들고 뒤적뒤적 하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 거였다. 바로 "장서의 괴로움"이라는 에세이였다.

제목에서 딱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는 책을 소장하는 일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번거로움을 시시콜콜 토로하고 있는데, 애초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무척이나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특히 지인이 책 빌려달라고 할 때의 난처함, 그리고 빌려준 책을 영영 떼이고 말 때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이 그야말로 구구절절 묘사되어 있어서 더욱 흥미로웠다. 지금까지 책이며 장서에 관한 글을 많이 읽어 보았지만, 가령 삼불 선생의 장서표 같은 일화를 빼면 이렇게 구구절절 공감을 자아내는 글은 처음이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위치우위라는 사람도 정말 책을 "제대로" 가져 본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책을 많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들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나 아는 사람 중에도 책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또는 "내 친구 중에도 책 많이 가진 녀석 있는데."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런 사람 가운데 십중팔구는 장서의 양이나 보관, 그리고 장서가로서의 사고방식 면에서 그리 대단하다고 인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위치우위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서 표현하자면, 진정한 장서가란 자기가 죽은 뒤에 책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사람이며, 나아가 그 사람이 죽은 뒤에 책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주위에서 마찬가지로 관심을 갖고 주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책을 가져 보았다고 할 것이다.

"대개 서재는 학자의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꾸며지기 때문에, 진정한 서재의 생명은 극히 짧다고 할 수 있다."(455쪽) 아울러 장서는 손쉽게 다른 사람에게 통째로 물려주고 물려받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그런지 궁금하다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람(부모님, 또는 배우자, 또는 자녀)에게 물어보시라. 내가 죽으면 이 책들을 다 어떻게 할 거냐고. 십중팔구는 몇 가지 필요한것만 골라내고 처분한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서재 하나를 계승하는 것은 마치 자기와는 다른 생명에 접근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아무리 해도 쉽게 하나로 융화되질 않는다."(455쪽). 왜냐하면 장서에는 소유주의 개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서를 사후까지도 고스란히 보관하는 일은 모든 장서가의 꿈이게 마련이며, 꿈인 까닭에 실현이 어렵고 종종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가 위치우위의 책에 수록된 또 한 편의 에세이 "한 장서가의 꿈이 깃든 천일각"이다. 명나라 때의 장서가 범흠이 평생에 걸쳐 모은 장서를 보관했던 개인 도서관인 천일각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장서를 흩어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보전한 것으로 명성이 높다. 그 비결은 바로 범흠 본인이 생전부터 여러 가지 기발한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자신의 장서를 이후 수백 년간 사실상 봉인 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범흠은 애초부터 장서를 별도의 재산으로 간주해 물려주었다. 즉 장서를 상속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재산을 주지 않는 식으로 해서, 정말 책의 수집과 보존에 관심이 많은 후손만이 사명감을 가지고 장서를 관리할 수 있게 했다. 후손들 역시 조상의 뜻을 받들어 점점 더 엄격한 장서 관리 규정을 정했으며, 심지어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도 여러 사람이 나눠 가져서, 그중 누구 한 사람이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나중에 가서는 아예 장서 자체가 금기의 대상이 되어서, 장서를 멋대로 구경한 사람은 아예 호적을 파 버리는 극단적인 규정까지 둘 정도로 보존에 철두철미 신경을 썼다.

위치우위의 말에 따르면, 이런 극단적인 조치로 인해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기도 했다. 인근의 재녀로 소문난 한 처녀는 천일각에 소장된 장서의 소문을 듣고, 책을 마음껏 읽고 싶은 마음에 범씨 집안으로 일부러 시집을 왔다. 그러나 집안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천일각 장서는 구경조차도 못한 채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실 범씨 집안의 장서 보관은 현명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석다고 여겨질 법하다. 책이란 사람이 읽기 위한 것인데, 무작정 자물쇠를 걸어놓고 활용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과연 범흠이 장서를 수집하고자 한 뜻이 이런 역설을 위해서였을까?

물론 예외는 있었다. 당대의 대학자인 황종희의 요청을 받고, 가족 회의를 거친 끝에 예외적으로 천일각을 개방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외는 역시나 예외였다. 그때 이후로도 천일각 문을 열고 들어가 본 대학자는 2백 년 동안 차마 1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다가 청대의 건륭제 때에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널리 도서 진상 명령이 내려오자, 그때 천일각의 장서 가운데 상당수가 황실로 옮겨져서 편찬 작업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자칫 유실될 수도 있었던 유일본들이 방대한 총서의 일부로 편입되어 더 많은 독자를 만나게 되었으니, 이것 역시 성과라면 성과라 하겠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천일각은 한 도서 절도범에게 철저히 약탈당했으며, 이때 장서 가운데 무려 절반이 고서점으로 유출되어 그중 상당수가 이후 행방을 감추었다. 요행히 피해를 면한 나머지 장서도 전쟁 중에 또다시 상당수가 유실되어 버렸다. 개인 장서가 소유주의 사후 한두 세대 만에 대부분 끝장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천일각의 사례야말로 책의 역사에서는 놀라운 성공 사례인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책의 유한성이라는 불가피한 속성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애초에 장서에 대한 글이 이렇게 슬프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454쪽) 위치우위의 한탄은 세상 모든 장서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하다.

물론 이 세상에 유한한 것이 어디 책뿐이겠는가. 한 사람이 죽고 나면 그의 재산이며 업적이며 이름조차 순식간에 잊혀지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이다. 그러니 책에든 다른 소유에든 집착하는 것 자체가 속되고도 부족한 사고방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거물급 장서가의 경우에는 국보급 소장품을 도록으로라도 제작해서 기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꿈도 꾸지 못할 중급의 장서가라면 차라리 생전에 속 시원하게 자기 책을 처분하여 다른 누군가의 기쁨이나 횡재로 삼아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위치우위의 책 세 권을 버리려고 꺼냈다가 결국 못 버린 내 경우처럼, 뭔가를 놓아버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출처 :http://blog.aladin.co.kr/budapest/5830559/ 나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