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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도 내력인가? - 사마천의 사위와 외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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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마천의 사위 양창과 외손자 양운

1. 사위 양창(楊敞)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궁형을 받게 된 사마천으로 인해 그의 사위 양창(楊敞)은 평소에 근신하고 매사를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삼갔다. 그러나 그도 또한 슬픔을 못이긴 나머지 죽고 말았다. 사마천의 외손 양운(楊惲)도 단 한 번의 불만에 찬 편지로 인해 요참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3조에 걸쳐 사마천 자신은 궁형을 당하고 사위는 말로 제대로 목하고 폭사하고 외손은 요참형에 처해졌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라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단지 그의 사위 양창과 외손 양운이 당한 비운에 대해 이야기한다.

양창은 화음(华阴) 사람이다. 화음은 화산의 북쪽에 있는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 위수(渭水)와 락수(洛水)가 합류하는 곳의 남쪽에 있었던 고을이다. “ 평소에 근신하고 매사를 조심했다(素谨畏事)”,소제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가 음란했음으로 대장군 곽광(霍光)과 거기장군(车骑将军) 장안세(张安世)가 협력하여 폐위시키기로 결정하고 대사농(大司农) 전연년(田延年)을 시켜 그 사실을 양창(杨敞)에게 통지하도록 했다. 그때 양창은 승상(丞相)으로 평통후(平通侯)의 작위를 갖고 있었다.

《한서·양창전(汉书·杨敞传)》에 “그 소식을 들은 양창은 놀라 매우 두려운 태도로 어떻게 말을 할지 모르고 등 뒤에 식은땀만 흘리면서 단지 예예 소리만 연발했다.”라고 했다. 이때 사마천의 딸인 양창의 부인이 나와 그에게 말했다. “이는 나라의 대사입니다. 지금 대장군이 이미 뜻을 정해 구경(九卿)에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을 보내 군께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군께서 즉시 대장군의 뜻과 같다고 응답을 하지 않고 머뭇거린다면 먼저 거사를 끝낸 다음 군을 죽일 것입니다. ” “양창은 부인과 전연년에게 거사에 참가하기로 허락하고 대장군의 령을 받들어 창읍왕을 폐하고 선제를 세웠다.” “선제(宣帝)가 즉위하고 한 달 만에 양창은 죽고 말았다. ”

이 기사를 보면 양창의 부인은 사마천의 기질을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으나 사위는 중요할 시점에서 결단을 하지 못해 결국은 그때 얻은 놀람병으로 죽었다고 할 수 있다.

2. ‘보회종서(報會宗書) ’로 필화를 당해 요참형에 처해진 외손자 양운(楊惲)

사마천의 외손 양운(杨恽) 역시 그의 외조부의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재상의 아들이란 신분에 일찍이 곽씨들의 모반을 고발한 공을 인정 받아 평통후에 봉해진 양운은 어렸을 때부터 뜻을 얻어 교만한 자세로 남을 능멸하고 성격이 각박하고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했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샀다. 일구지학(一丘之貉)은 '같은 언덕에 사는 너구리'라는 뜻으로 얼핏보아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동류라는 말이다. 일구지학의 뜻은 그저 같은 종류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놈들이 올망졸망 모인 무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흔히 푸념하는 말에 '그 나물에 그 밥'이 있고 인사이동이 있는 철이면 '회전문 인사'라는 말이 떠돌곤 하는데 그에 해당한다. 일구지학(一丘之貉)이라는 성어는 후한의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에서 나온다.

「진나라가 그저 자잘한 놈들만 임용하고 충신과 양신을 죽이는 바람에 결국 멸망했지만 훌륭한 사람을 신임하고 임용했더라면 오늘날까지 이어졌을 게다. 예나 지금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구나. 若秦時但任小臣(약진시단임소신)/誅殺忠良(주살충량)/竟以滅亡(경이멸망)/令親任大臣(영친임대신)/卽至今耳(즉지금이)/古與今如一丘之貉(고여금여일구지학)'」

이렇게 위험한 발언을 한 사람은 사마천의 외손자 양운이다. 그는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은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고발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대장락은 바로 양운을 머리속에서 떠올렸고 결국은 양운이 이렇게 말했다고 역공을 펼쳤다. 이 일로 인해 양운은 목숨은 건졌지만 작위를 빼앗기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작위를 잃은 양운은 집에 들어앉아 산업을 일으켜 큰 집을 짓고 모은 재산으로 스스로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자 안정태수로 있었던 그의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그의 그러한 생활태도를 나무라는 글을 써서 보냈다. 이에 양운이 손회종에게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는데 역사상 유명한 《보회종서(報會宗書)》다. 한선제가 그의 고변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를 얻어 읽고 매우 노하며 정위(廷尉)를 시켜 치죄케 하여 요참형(腰斬刑)에 처하고 그 처자들은 주천군(酒泉郡)으로 유형을 보냈다.

보회종서라는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양운이 관직을 잃은 후 집에서 산업을 일으켜 지은 큰 집에서 벌어들인 재물로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 년 남짓 지난 후에 서하(西河)의 안정태수(安定太守)로 재직 중인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양운에게 삼가도록 권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손회종은 지략(智略)을 갖춘 선비였다. 그는 말하기를 선비가 대신을 지내다가 쫓겨났을 때는 마땅히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운 자세로 임해 다른 사람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도록 해야지 오히려 산업에 열중하고 빈객들과 교유하며 남으로부터 칭송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원래 소제 때 승상을 지낸 양창의 아들로 재주가 뛰어나 어린 나이에 조정에서 대신을 지낸 바 있던 양운은 유언비어로 인해 죄를 받게 되었다고 마음속으로 불복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손회종의 편지를 받은 양운은 답장을 써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양운에게 근신하라는 권고를 받은 후에 다시 안평후(安平侯) 양담(楊譚)이 다시 그에게 경고했다. 양담은 양운의 형인 양충(楊忠)의 아들로 그의 형의 작위를 물려받고 있었다.

“ 숙부의 죄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또한 나라에 공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근신하며 지내시다보면 다시 임용될 기회가 찾아 올 것입니다. ”

양운이 대답했다.

“ 나라에 세운 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황제를 위해 온 힘을 다 했음에도 아무 소용이 없었지 않느냐?

“황제께서는 일의 처리를 확실히 하셨습니다. 사례교위(司隶校尉) 개관요(盖宽饶)와 좌풍익(左冯翊) 한연수(韩延寿)도 모두 관리로써 직분을 다하기 위해 진력했으나 사건에 연좌되어 모두 주살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일식이 발생하자 이름이 규성(叫成)이라는 마부가 상서를 올려 양운을 고발하면서 말했다.

“평소에 교만하고 사치를 일삼고 옛날의 과오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번에 발생한 일식의 현상은 양운의 그와 같은 행동과 관계가 있습니다."

황제가 고발장을 정위에게 넘겨 양운의 잘못을 조사하도록 했다. 조사하는 과에서 양운이 손회종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발견되었다. 편지를 읽어 본 한선제는 양운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정위는 양운을 대역무도한 죄를 적용하여 요참형에 처하고 그의 가족들은 주천군으로 유배보냈다. 양담도 함께 연좌되어 그의 작위는 폐해지고 평민이 되었으며 평소에 양운과 가까이 지내던 몇몇 인사도 피해를 입었다. 미앙위위(未央衛尉) 위현성(韋玄成)과 손회종 등은 모두 관직에서 파면되었다.

다음은 보회종서 본문이다.

『보회종서(報會宗書)』


惲材朽行穢(운재후행예)

이 운의 재능을 썩고 더럽습니다.


文質無所厎(문질무소지)

문채와 글의 내용도 또한 저속하기 짝이 없습니다.


幸賴先人餘業(행뢰선인여업)

다행히 선인께서 남기신 공업의 은혜를 입어


得備宿衛(득비숙위)

황제의 숙위(宿衛)가 되었습니다 .


遭遇時變(조우시변)

이때 변란을 만나


以獲爵位(이획작위)

작위를 얻었었습니다.


終非其任(종비기임)

그러나 결국 직을 감당할 수 없어


卒與禍會(졸여화회)

끝내 재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足下哀其愚蒙(족하애기우몽)

당신께서 저의 우매함을 불쌍히 여겨


賜書敎督以所不及(사서교독이소불급)

서신을 보내 저의 잘못을 가르쳐 주시고 바로 잡아주시니


殷勤甚厚(은근심후)

당신의 사랑이 매우 지극하십니다.


然竊恨(연절한)

그러나 제가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足下不深惟其終始(연절한족하불심유기종시)

당신께서 일의 본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시고


而猥隨俗之毁譽也(이외수속지훼예야)

세상에 떠도는 비방과 칭찬의 말에 귀를 기울이신 것입니다.


言鄙陋之愚心(언비루지우심)

저의 비루한 생각을 말씀드리면


若逆指而文過(약역지이문과)

당신의 뜻에 거스르고 제 잘못을 감추려하는 것 같아


黙而息乎(묵이식호)

침묵을 지키고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恐違孔氏各言爾志之義(공위공씨각언이지지의)

그러나 공자께서 말씀하신 ‘각자 너희들 뜻을 이야하라.②’라고 하신 말씀에 어긋날까 걱정이 되어


故敢略陳其愚(고감략진기우)

감히 저의 우매한 생각을 간략히 말씀드리고자 하니


唯君子察焉(유군자찰언)

다만 잘 살펴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惲家方隆盛時(운가방륭성시)

저의 집안이 융성할 때는


乘朱輪者十人(승주륜자십인)

저의 집안이 융성할 때는 주륜거(朱輪車)③를 타는 사람이 열 명이나 되었습니다.


位在列卿(위재열경)

저 역시 구경(九卿)에 속하는 광록훈(光祿勳)④의 직위와


爵爲通侯(작위통후)

통후(通侯)⑤의 작위로


總領從官(총령종관)

관속의 총사령으로서


與聞政事(여문정사)

정사에 돌봤습니다.


曾不能以此時有所建明(증불능이차시유소건명)

그러나 이때 건의하고 명백히 밝힌 바로써는


以宣德化(이선덕화)

임금의 덕화를 널리 세상에 퍼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又不能與羣僚同心幷力(우불능여군료동심병력)

또 많은 관리들과 힘을 합하여


陪輔朝廷之遺忘(배보조정지유망)

조정의 잘못된 것을 도와 바로잡지도 못했습니다.


已負竊位素餐⑥之責久矣(이부절위소찬지책구의)

아무런 공로나 재능도 없이 높은 지위에 앉아 녹을 타먹는다는 비난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懷祿貪勢(회록탐세)

녹과 권세를 마음에 두고 탐하면서


不能自退(불능자퇴)

스스로 물러나지도 못했습니다.


遭遇變故(조우변고)

이때 변란을 만나고


橫被口語(횡피구어)

참소를 당하게 되어


身幽北闕(신유북궐)

저는 북궐⑦에 갇히고


妻子滿獄(처자만옥)

처자는 갇혀 감옥을 가득차게 만들었다.


當此之時(당차지시)

이때를 당하여


自以夷滅不足以塞責(자이이멸불족이색책)

저의 가족은 멸족을 당해도 죄 값을 치를 수 없었는데


豈意得全首領(기의득전수령)

어찌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여


復奉先人之丘墓乎(복봉선인지구묘호)

선인의 묘소에 제사를 지낼 수 있겠습니까?


伏惟聖主之恩(복유성주지은)

고개 숙여 생각해 보니 성왕의 은혜가


不可勝量(불가승량)

끝없이 넓습니다.


君子游道(군자유도)

군자는 도의에서 노닐며


樂以忘憂(락이망우)

우환을 잊고 인생을 즐기나


小人全軀(소인전구)

소인은 생명을 보존하면서


說以忘罪(설이망죄)

기뻐하며 죄과를 잊어버립니다 .


竊自思念(절자사념)

가만히 생각해 보니


過已大矣(과이대의)

이미 큰 죄를 짓고


行已虧矣(행이휴의)

행동도 잘못 되었습니다 .


長爲農夫以沒世矣(장위농부이몰세의)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是故身率妻子(시고신솔처자)

이런 이유로 몸소 처자를 거느리고


戮力耕桑(륙력경상)

힘써 밭을 갈고 누에를 치며,


灌園治産(관원치산)

논밭에 물을 대고 산업을 다스려


以給公上(이급공상)

세금을 냈습니다.


不意當復用此爲譏議也(불의당복용차위기의야)

그러나 뜻밖에 이로 인하여 또 비웃음 비난을 받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夫人情所不能止者(부인정소불능지자)

무릇 인정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은


聖人弗禁(성인불금)

성인께서도 금하지 않았습니다


故君父至尊親(고군부지존친)

그래서 임금과 부친은 지극히 존귀하고 가까운 분이시지만


送其終也(송기종야)

임금과 부친의 임종을 맞이하여 보내야할 때가


有時而旣(유시이기)

이미 있는 법입니다.


臣之得罪(신지득죄)

제가 죄 지은 지도


已三年⑧矣(이삼년의)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田家作苦(전가작고)

농가 일은 매우 고생스럽습니다.


歲時伏臘(세시복랍)

복랍⑨ 때가 되면


亨羊炰羔⑩(형양포고)

작은 양과 큰 양을 삶고


斗酒自勞(두주자로)

술을 준비하여 스스로 위로합니다.


家本秦也(가본진야)

저의 가문은 본래 진나라 출신이어서


能爲秦聲(능위진성)

진나라 음악을 할 줄 알고


婦趙女也(부조여야)

집사람은 조나라 여자이어서


雅善鼓瑟(아선고슬)

거문고를 잘 탑니다


奴婢歌者數人(노비가자수인)

노비로서 노래하는 자도 몇 명 있습니다.


酒後耳熱(주후이열)

술을 마신 뒤 불그스레해지면


仰天拊缶⑪(앙천부부)

하늘을 바라보고 질 장군을 두드리며


而呼烏烏(이호오오)

입 속으로 중얼중얼 노래를 부릅니다.


其詩曰(기시왈)

그 시에 노래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田彼南山(전피남산)⑫

저 남산 밑에 개간한 밭떼기


蕪穢不治(무예불치)

황폐해져 돌보지 않는구나!


種一頃豆(종일경두)

백 무의 땅에 콩을 심었는데


落而爲萁(락이위기)

콩 꼬투리 떨어지고 콩깍지만 남았구나


生行樂耳(인생행락이)

인생이 즐겁기만 하니


須富貴何時(수부귀하시)

부귀가 찾아올 때만 기다리기만 하겠는가?


是日也(시일야)

이러한 때는


拂衣而喜(불의이희)

옷을 털고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奮褎低卬(분유저앙)

발분하여 소맷자락을 위 아래로 날리며


頓足起舞(돈족기무)

발을 굴려가며 춤을 춥니다


誠淫荒無度(성음황무도)

진실로 황음함이 너무 심하여


不知其不可也(불지기불가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잊어버립니다.


惲幸有餘祿(운행유여록)

다행히 제게는 남아 있는 돈이 있어


方糴⑬賤販貴(방적천판귀)

값이 쌀 때 사고 비쌀 때 팔아


逐什一之利(축십일지리)

1할의 이익을 얻어


此賈豎⑭之事(차고수지사)

제가 직접 이러한 비천한 장사치가 되어


汙辱之處(오욕지처)

더러운 곳에 몸을 두고 있습니다.


惲親行之(운친행지)

몸소 그런 일을 행한 저를


下流⑮之人(하류지인)

저는 하류와 같은 사람이라


衆毁所歸(중훼소귀)

뭇 사람들의 비방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不寒而栗(불한이율)⑯ :

그러나 몸서리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雖雅知惲者(수아지운자)

평소에 저를 잘 아는 사람도


猶隨風而靡(유수풍이미)

보릿대가 바람에 쏠려 춤을 추듯이 세상풍조에 편승하여 나를 비난하는데


尙何稱譽之有(상하칭예지유)

아직도 칭찬할 만한 명예가 남아있다는 것입니까?


董生不云乎(동생불운호)

동중서가 말하기 않았습니까?


明明求仁義(명명구인의)

‘힘써 인의를 구하면서


常恐不能化民者(상공불능화민자)

백성을 교화시키지 못할까 항상 걱정하는 것이


卿大夫意也(경대부의야)

경대부의 마음이고


明明求財利(명명구재리)

힘써 재리를 구하면서


常恐困乏者(상공곤핍자)

가난하여질까 항상 걱정하는 것이


庶人之事也(서인지사야)

서민의 일이다.’라고


故道不同(고도불동)

그러므로 가는 길이 같지 않으면


不相爲謀(불상위모)

서로 계획을 상의할 수 없습니다.


今子尙安得以卿大夫之制(금자상안득이경대부지제)

그런데 지금 그대는 어찌하여 경대부의 법도를 가지고


而責僕哉(이책복재)

저 같은 서민을 질책하시려고 하십니까?


夫西河魏土(부서하위토)

서하⑰ 지방은 윈래 전국시대에 위나라 땅이었고


文侯所興(문후소흥)

위나라 문후께서는 이곳에서 번성하셨습니다.


有段干木⑱․田子方之遺風(유단간․전자방지유풍)

그곳에는 단간목과 전자방의 유풍이 있어


漂然皆有節槩(표연개유절개)

그 지방 사람들은 모두 높은 뜻과 절개를 가지고


知去就之分(지거취지분)

거취를 분명히 할 줄 압니다


頃者(경자)

지금


足下離舊土(족하이구토)

당신께서 고향을 떠나시어


臨安定(임안정)

안정군에 부임했습니다.


安定⑲山谷之間(안정산곡지간)

안정산 골짜기는


昆戎舊壤(곤융구양)

본래 곤융의 옛 지역인데


子弟貪鄙(자제탐비)

그 곳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비루합니다


豈習俗之移人哉(기습속지이인재)

어찌 풍속이 사람을 변화시키겠습니까?


於今迺睹子之志矣(어금내도자지지의)

이제 제가 당신 의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方當盛漢之隆(방당성한지융)

한나라가 융성한 이때에


願勉旃(원면전)

더욱 힘써 일하시고


毋多談(무다담)

공연히 여러 말 마십시오.


주석

①변란:한선제 지절(地节) 4년, 기원전 66년, 곽광(霍光)의 손자 곽우(霍禹) 등이 일으킨 보만 사건을 말한다.

②원문은 각언이지(各言爾志)로 출전은《논어공양장(論語·公冶長》:「공자를 모시고 있었던 안연(颜渊)、계로(季路)에게 공자가 물었다. ‘ 너희가 품고 있는 뜻을 각기 말해보지 않겠느냐?’」

③주륜(朱轮):바퀴를 붉은 색으로 칭한 수레다. 한나라 제도에 공경(公卿)과 열후(列侯)에서 2천석 이상되는 고위 관료만이 탈 수 있었다.

④광록훈(光祿勛) : 진나라가 설치한 낭중령(郎中令)을 한무제가 바꾼 명칭으로 9경 중 한 명이다. 궁궐의 숙위(宿衛), 수문(守門), 궁내사(宮內事) 등 실제적으로 궁내의 일을 총관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속관으로는 대부, 랑, 알자, 기문(期門), 우림(羽林) 등이 있다.

⑤ 통후(通侯):즉 철후(彻侯)다. 진나라가 제정한 20등작 중 가장 높은 작위다. 한나라가 서자 공신들을 봉할 때 유씨 성은 제후로 이성 공신들은 철후로 칭했으나 후에 한무제 유철의 이름을 휘하여 통후로 개칭하게 되었다.

⑥소찬(素餐) : 소손(素飧)으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고 공을 세우지 못하면 녹봉을 받지 말라!(不劳而食,无功受禄)라는 뜻으로 《시경(诗经)·위풍(魏风)·벌단(伐檀)》에 나오는 말이다. 『저 군자여, 일을 하지 않으니 밥을 먹지 않아야 하지 않은가?(彼君子兮 不素飧兮』

⑦북궐(北阙):궁궐의 북쪽에 세운 망루로 한나라 때 상주문이나 황제의 조칙에 관한 일을 처리한 곳이다. 양운은 이곳에 임시로 구금되었다가 후에 해당관서로 압송되었다.

⑧3년:양운은 한선제 2년(전56) 가을에 서민으로 강등되고 오봉(五凤) 4년(전 54) 여름 4월에 일식현상으로 다시 고발당하여 죄를 얻었다. 햇수로는 3년이라고 표현했으나 실제 상으로는 만 2년도 되지 않는다.

⑨복랍(伏腊):고대 두 계절에 걸쳐 올리는 제사 중 하나다. 하지 이후 3번 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와, 동지 이후 3번 째 술일(戌日)을 랍일(臘日)이라고 하여 추위가 가장 심할 때 각각 제사를 지냈다. 후에 음력 12월 초팔일을 랍일로 정했다.

⑩포고(炰羔):포(炰)는 포(炮)고 고(羔)는 어린 양이다.

⑪부(缶):질장군 모양의 도기로 만든 타악기다. 원래 진나라 지역에 유행했던 악기다.

⑫전피남산(田彼南山) 이하 4구 : 《한서(汉书)·양운전(杨恽传)》의 장안(张晏) 주(注)에 「양지녘에 우뚝 솟은 산은 임금의 기상을 말하고 밭의 잡초는 뽑지 않으니 이는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다는 뜻이다. 일경은 백무에 해당한 밭으로 조정의 백관을 지칭한다. 콩이란 작물은 바는 충실한 물건으로 마땅히 곡식창고에 저장되어 있어야 하나 벌판에 버려졌으니 이는 조정에서 추방된 자신을 지칭하고 기곡(萁曲)은 비뚜러진 콩줄기로 조당에 가득한 아첨꾼을 말한다.」라고 했다.

⑬적(糴) : 곡물을 파고 사는 행위

⑭고수(贾竖):옛날 상인을 비하해서 불렀던 말이다.

⑮하류(下流):대중이 싫어하는 곳을 비유한 말이다. 《논어(论语)·자장(子张)》편에 “자공이 말하기를, ‘주왕의 착하지 않은 정도는 그리 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자가 하류에 처하기를 싫어하는 이유는 천하의 악이 모두 하류에 모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纣之不善不如是之甚也。是以君子恶居下流,天下之恶皆归焉。)” 이는 품행이 천박하고 더러운 것을 비유했다.

⑯불한이율(不寒而栗) : 사마천의 혹리열전(酷吏列傳) 나오는 말로 한무제 때 혹리 의종(義縱)이 정양군(定襄郡)의 태수로 부임했을 때 가혹하고 잔인하게 법을 적용하여 관하의 백성들이 '춥지 않아도 벌벌 떨었다'는 뜻이다.

정양 태수로 임명된 의종이 정양군의 호족세력을 평정하고 2백여 명을 감옥에 가두었으며, 감옥에 면회 온 2백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4백여 명의 죄수들을 처형했다. 소문을 들은 정양군의 백성들은 날씨가 춥지 않았는데도 벌벌 떨었다고 했다.

⑰서하(西河):전국시대 때 위(魏)나라 영토로 지금의 섬서성 동쪽의 하수와 낙수(落水) 사이의 땅을 말한다.

⑱단간목(段干木):전국 때 위나라 사람으로 시정에 숨어서 살았다. 위문후가 알고 그를 초빙하여 재상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그는 항상 담장을 넘어 달아나 몸을 피하곤 했다. 문후가 더욱 그를 존중하여 그가 수레를 타고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는 언제나 식례(軾禮)를 행하여 존경심을 표했다.

⑲안정군(安定郡) : 지금의 영하성 고원현 일대에 설치했던 한나라 때의 군 이름이다. 치소는 고평(高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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