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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서(書)》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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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기(史記)·서(書)》의 팔서(八書) 명칭과 유래, 사상적 배경

김원중

서(書)는 《사기》중에서도 어렵기로 정평이 나 있는 부분으로 예악(禮樂), 제도(制度), 과학(科學), 민생(民生), 치수(治水) 등과 같은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기록하고 있어 제도사의 성격을 갖는다. 즉 《사기·서(書)》여덟 편은 사마천의 학문적 입장과 그가 주목한 제도와 사상, 이상과 현실, 그리고 변혁과 민생문제 등을 보여주는 명편들로써 상당히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갖는다.

※《사기·서》는 《사기》의 척추에 해당하는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그리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표된 연구성과는 대부분 전장제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으며, 문화사적 시각에서 접근한 시도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사실상 예(禮), 악(樂), 율(律), 력(歷), 천관(天官), 봉선(封禪), 평준(平準), 하거(河渠) 등의 여덟 가지 방면에 대한 연구는 적어도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분야이다.

‘팔서(八書)’라는 명칭의 유래를 살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거론된다. 우선 청대(淸代)의 왕명성(王鳴盛)은 그가 편찬한《십칠사상각(十七史商榷)·팔서소본(八書所本)》에서 “《사기·서》가 《예기(禮記)》, 《대대례기(大戴禮記)》, 《순자(荀子)》, 가의(賈誼)가 지은 《신서(新書)》 등의 책들을 채록하여 지었다.”라고 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내용이 기존 서적들의 해당 부분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라고 했다. 그의 설에 따르면 국가의 정치는 천(天), 지(地), 춘(春), 하(夏), 추(秋), 동(冬) 등의 육관(六官)에 의해 주관된다고 했다. 천관(天官)이란 나라의 다스림을 장악하고, 모든 관리를 총괄하는 업무를 주관하며, 지관(地官)은 사도(司徒)를 지칭하는데 백성들을 교화하고 옳은 길로 이끄는 일을 맡는다. 또한 춘관(春官)은 종백(宗伯)이라고 하는데 나라의 예를 관장하여 종교와 문화사업을 주관하며, 하관(夏官)은 사마(司馬)라고 하는데 나라의 정치를 주도하고, 제후를 통제하며, 군사의 일과 오랑캐를 정벌하는 일을 맡는다. 그리고 추관(秋官)은 사구(司寇)인데 나라의 금령(禁令)을 맡아 형벌과 송사를, 동관(冬官)은 사공(司空)인데 모든 공인(工人)과 건축과 토목사업을 주관한다. 이 6관들이 주관하는 권한 내에는 적지 않은 여덟 방면의 정무가 있다. 예컨대 천관에는 관청을 다스리는 팔법(八法), 도성을 다스리는 팔칙(八則), 군신들을 제어하는 팔병(八柄)과 백성들을 다스리는 팔통(八統) 등이 있다.
다른 견해로는 서를 여덟 편으로 한 이유는 《상서(尙書)》의 팔정(八政) 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또한 타당성이 있다. 사마천은 팔정 중에서 식(食), 화(貨), 사(祀), 빈(賓), 사(師) 등을, 평준, 예(禮), 병(兵), 봉선(封禪) 등의 네 부분으로 나누고, 팔정의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등의 세 부문을 악(樂), 천관(天官), 역(曆), 하거(河渠) 등의 네 부문으로 나누어 ‘팔서(八書)’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서(尙書)》의 팔정과 사마천의 팔서(八書)는 시대적 상황의 차이로 인해 성격상 상당히 큰 차이점을 갖고 있다. 팔정은 서주 시기에 쓰였는데 이때는 먹고사는 문제가 핵심 과제였기에 농업을 우선시하고 먹는 문제를 근본으로 삼았다. 치국의 근본으로서 농사짓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상서》에서 말하는 팔정 중에서 식(食)과 화(貨)를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여겼으며, 사(祀)는 세 번째 위치에 두고, 사(師)는 맨 마지막에 두었으니 사마천 시대와는 그 우선순위 면에서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팔서가 분명 팔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 민생문제에 주목하여 천하의 다스림을 밝혀보려는 사마천의 경제 우선주의적 면모와 의도는 시대적 맥락을 고려하더라도 대단히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점으로 이 팔서의 명칭이《주역(周易)》의 팔괘(八卦)에서 착안하여 삼라만상의 제 문제를 여덟 가지로 압축하여 기술했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이는 사마천이 한무제 때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면서 황로사상(黃老思想)을 받들고 당대의 저명한 지식인들에게 천문학과《주역》 및 음양의 원리 등을 배운 학문 역정과도 상당부분 연관된다. 사마천은 열 살 때 아버지 사마담을 따라 수도인 장안으로 가서 당시 경학의 대학자인 동중서(董仲舒)와 공안국(孔安國)에게 고문(古文)을 배웠고, 아버지가 죽은 후 3년이 지나 한무제 원봉(元封) 3년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한무제를 시중하면서 천제(天帝)에 제사 드리는 봉선(封禪) 의식에 참여하기도 하고 역법을 개정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험들이 중요한 집필의 근거로 작용했다.

팔서에 드러나는 주도적 사상은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취지와도 연결된다.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사마천의 사상이 총체적으로 보면 황로와 도가의 사상에 속한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바다. 사마천이 말하는 도는 노자의 도를 발선지킨 것인데, 이는 국가의 흥망과 성쇠와 연관된다. 사마천이 말하는 왕도 즉 ‘제왕의 도’는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에도 나온 바와 같이, 국가는 아무 일도 없이 편안하며 백성은 편안하게 살면서 일을 즐거워하는 그러한 다스림을 말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무위의 정치관은 곧 그의 사상이며 무불위(無不爲), 즉 ‘하지 않음이 없는’ 정치 이상은 바로 진나라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의 사회발전을 주도하는 데에는 황로가 유리하다고 보았으며 아울러 사회가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사상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사마천이 팔서의 첫머리에 예를 존중한 것은 더떤 맥락을 지니고 있는가? 사마천의 사상적 궤적이 분명 도가 계열이기는 하나 유가에서 말하는 예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신상필벌과 개혁사상이 강한 법가류를 예로써 비판하려했던 의도가 상당부분 작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사마천의 황로를 숭상하고 《주역》과 《예기》를 존중한 데에는 가학(家學)이 그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 사마담의 뜻을 계승하였는데 그가 쓴 《논육가요지(論六家要志)》라는 글에서도 음양가를 첫머리에 두고 도가로써 끝맺은 데서 가학(家學)의 밑바닥에 자리 잡힌 도가적 성향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사마천의 삶은 한무제의 통치시기와 상당부분 겹치지만, 한고조 시기의 궁핍했던 문제들을 극복한 고후(高后), 문제(文帝), 경제(景帝) 등이 시행했던 무위지치(無爲之治)의 정치사상이야말로 사마천이 추구한 이상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혹리열전(酷吏列傳)》에도 나와 있듯이 사마천은 한무제가 혹리를 임용하고 무단정치를 위한 중앙집권을 강화하면서 오히려 경제적문제가 심화되었다는 점을 드러내려고 의도했다.

  《사기·서(書)》는 모두 여덟 편인데 각기 두 편씩 짝을 이루고 있다. 우선 처음 짝을 이루는 《예서(禮書)》와 《악서(樂書) 》는 사마천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정치질서를 다룬 것이고, 《율서(律書)》와《역서(曆書)》는 전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현실을 거론했다. 세 번째 짝 《천관서(天官書)》와《봉선서(封禪書)》는 사마천이 추구하는 변화와 개혁의 문제를 짚어 낸 것이고, 마지막  《평준서》와 《하거서》는 치수와 경제라는 민생문제를 거론한 서편(書篇)이다. 이런 구분의 근저에는 위로는 사계절과 여덟 방위라는 천하의 기강에 부합되고 아래로는 옛날과 오늘의 시대적 변용에 맞추고자 한 의도가 담겨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여덟 편의 의미를 간단히 탐색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예서(禮書)》와《악서(樂書)》
- 제국의 이상적인 질서 확립을 위한 이념적, 제도적인 문제를 제시하다.-

중대한 문화권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악은 유가의 정치윤리 사상의 핵심이다. 예가 인간의 성정을 융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악은 엄숙한 종법과 등급에 중점을 두었다.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로써 모두 상하의 관계를 조율하고 종법사회를 유지하는 초석이다.

사마천은 “예는 사람의 성품에 근거하여 수식을 더하고 대략 고금의 변화에 어울리게 하는 수단”이라고 하면서《예서》를 쓴 목적을 밝혔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사마천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사상의 핵인 황로사상에 입각한 무위의 다스림을 강조했다. 이는 한문제의 대통일 정책의 일환으로 제왕 중심의 통치체계를 확립하려는 현실적 측면과 관련되며 유가에서 말하는 예악의 개념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사마천은 예란 왕도와 통하며 인륜의 버팀목이 된다고 행각했으니 인간의 행위를 인도하는 모든 사회활동의 공동규범이며 아울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수단이다. 사마천은 예의, 질서, 체계로 사회정의를 회복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백성들들을 강제된 법으로 다스리는 자는 예의 제도를 벗어난 행위로써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경고했다. 사마천은 황로사상을 숭상하여 무위의 다스림을 찬양했고 법가에 대해서는 인륜의 질서를 어그러뜨린다고 보아 결과적으로 엄격하기만 하고 은혜가 결핍된 다스림이라 비난했다. 그래서 한때의 계책으로 쓸만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할 수는 없다고 봤다. 중국을 역사상 최초로 통일하고도 여전히 각박한 법가에 의존하면서 예로 다스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13년 만에 멸망한 진왕조가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밝혔다. 한무제의 경우도 또한 그랬다. 《사기열전》에서 사마천이 한비(韓非)와, 효공을 도와 변법을 단행한 상앙(商鞅)에 대해서도 각박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또한 《혹리열전》에서 노자의 말을 인용해 상덕(上德)의 개념을 동원하여 특별히 《주례(周禮)》의 시대를 숭상하고 인성에 바탕을 둔 예의의 문제를 중시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들의 공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인간적인 명을 홀시한 점을 비판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예서》의 첫머리에서 “예가 천하의 인심을 통일하고 모든 백성을 다스린다”라고 하면서 예가 만물을 주재하고 백성들과 신하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고 치국의 방법법으로 예의를 주창했다. 그는 하상주(夏商周) 삼대에 걸쳐 예의 증감을 고찰하여 예라는 것이 감정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인성에 부합하는 기준임을 알았다. 그는 사람을 다스리는 원칙은 수만 가지가 있지만 예의제도야 말로 백성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예서》와 짝을 이루는 《악서》는 악(樂)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음악이란 풍속을 옮기고 바꾸는 수단이다.... 사람이 느끼는 정감은 다 같다. 그래서 음악을 사용하면 풍속이 다른 먼 곳의 사람들도 이에 따른다.”라고 했듯이 음악과 정치의 밀접한 관계에 근거하여 중국의 악의 제도사를 서술했다. 예는 사람의 겉모습에 생겨나고, 악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생겨난다. 그럼으로 바른 교화는 모두 악에서 시작되고, 악이 바르면 인간의 행도 바르게 된다고 했다. 사마천은 유가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설정하고  법가적 체제를 겸비하고 있는 한무제의 치도를 의도적으로 반영하면서 후자의 것을 버리고 국가의 제도의 기본 축의 하나로 악의 문제를 다루었다.

음양의 원리는 대자연의 조화이지만, 이는 마치 사회에 인의와 예악이 있는 것과 같다. 질서가 파괴되면 예악도 붕괴된다. 이 편에서 공자가 노나라의 집정을 풍자한 다섯 편의 이야기들로 결국은 악이 바르게 되어야만 정치도 잘 된다고 강조했다.  군자는 겸양으로써 예를 삼고 절제로서 악을 삼는다. 좋은 음악이란 사람을 바른 데로 이끌며 사악한 것을 버리게 만드는 무한한 힘이 있다는 것이 사마천의 생각이다.

2. 《율서(律書)》와《역서(曆書)》
- 한무제의 전쟁관을 풍자하고 역법개혁을 반대하다. -

사마천은 전쟁이란 폭력을 제압하고 선량함을 구축하는 도구로써 나라를 일으키게 할 수도 있고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점은 전쟁이란 명분이 있어야 하니 정의에 입각해야 하며 부도덕하거나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당시 한무제는 대외적으로 전쟁에 온 힘을 기우린 탓에 국가와 백성에 해를 끼쳐, 나라의 국고는 피폐해지고 호구 수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사마천이 보기에 강성했던 전한시대가 한무제 때부터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은 바로 무분별한 군사력 확장 때문이었다고 했다.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지은 《율서》는 중국 고대 군사학의 성취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전적이다. 이 편의 전반부에서 사마천이 한문제가 문치를 중시하고 무위의 다스림을 국가정책으로 삼은 일에 빗대 한무제의 무치(武治)를 비판하려고 한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사마천은 《율서》이 첫머리에 “전쟁이란 성인(聖人)이 난폭한 자를 토벌하고 난세를 평정하며 장애가 되는 세력을 없애어 위태로움에서 구하는 행위이다.”라고 하며서 그 구체적인 근거를 “옛날에 황제가 탁록(涿鹿)의 전쟁에서 염제(炎帝)의 재앙을 평정했고, 전욱(顓頊)은 공공(共工)과 싸워 수해를 없앴으며, 성탕(成湯)은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남소(南巢)로 쫓아내어 하왕조의 어지러움을 일소했다. 흥망성쇠는 번갈아가며 일어나는데, 이긴 자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이치는 하늘의 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으니, 이는 바로 전쟁의 효용과 사람의 덕행의 상관성을 밝히고자 한 예다. 즉 하상주(夏商周) 삼대는 무로써 흥성했으나 하상(夏商)의 걸주(桀紂)는 무로써 멸망했으니 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의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사마천은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에서도 “나라가 크더라도 싸움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한다.”라는 경구로써 한무제의 호전주의를 비판했으며, 정의와 명분에 바탕을 둔 전쟁은 지지하면서도 민생을 고려하지 않는 정벌정치에 대해서는 언제나 단호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의 폐단을 이어받아 사회가 매우 곤궁했으나 문제와 경제를 거치면서 천하는 부유하게 되어 덕치가 행해졌고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으니, 오로지 덕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면 나라가 풍성하고 예의가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사마천은 물론 무제를 직접적으로 진시황과 비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행간을 읽어보면 그가 한무제의 정치 스타일에 대히 비판적 입장을 거지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한편《역서》를 보면 역법(曆法)이란 음양과 오행의 운행 원칙에서 나온 것으로 천문학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농사와도 관련되며 전쟁을 일으키는 등 군사작전에도 두루 운용되었고, 왕조의 흥망과 성쇠를 점치거나 국가에서 발생하는 중대한 사건을 예측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악률(樂律)은 음(陰)에 입각하여 양(陽)을 다스리고, 역법(曆法)은 양에 입각하여 음을 다스린다. 율력과 역볍이 서로 다스림으로 그 사이에 조그만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한무제 때의 태초력은 개원(改元)을 필요로 했던 무제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뜻이다. 결국 태초력은 역법의 주기에도 맞지 않아 27년 동안 운용하다가 한소제(漢昭帝)에 의해 폐기되고 그것을 주장한 등평(鄧平)은 하옥되었으니 태생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 《역서》에서 사마천은 등평의 면모나 태초력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관점, 즉 천하의 도가 있고, 그 원칙을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논법을《역서》의 첫머리에서 “왕이 된 자가 성을 바꾸고 하늘의 명을 받으면 반드시 건국의 초석을 닦는데 신중해야만 하며 정삭(正朔)의 역법을 고치고, 복식의 색깔을 바꾸며, 하늘의 원기의 법칙을 살펴 그 뜻을 순수하게 따른다.”라고 밝히면서, 한무제가 개인의 사용 추구를 위해 치밀하지 않게 역법을 개혁하고 하고 민생을 돌보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사마천은 역법이 도덕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기 때문에, 연호를 바꾸고 역법을 제정할 때에는 국가의 운명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3. 《천관서(天官書)》와《봉선서(封禪書)》
- 하늘의 형상과 인간사를 빌려 변혁을 추구하다. -

중국에서 가장 빠른 천문의 역사서인 《천관서》는 사마천의 역학(易學)과 황로사상을 유기적으로 반영한 책이다. 이 편에서 사마천은 변혁을 추구하려는 의도를 드러내면서 천도와 덕정이라는 개념을 논의의 핵심으로 다뤘다. 즉 덕을 닦고 형벌을 줄여야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 생각이었기 때문에 수덕(修德)이 최상이고 수정(修政)은 그 아래 단계에 속한다고 했다.
《사기》전체에서 가장 긴 편에 속하는《천관서》는 전체 8107 자에서 논찬 부분이 111자이고 6896자가 점술에 관한 내용이다. 이 편의 중반부에서 사마천은 “무릇 천운은 30년에 한번 작게 변하고, 100년이 지나면 중간쯤 변하며 500년에 또 한번 큰 변화가 있다.”라고 하면서 변화의 문제를 추적했음을 밝혔는데 바로 주공이 죽은 다음 공자에 이르는 기관과 다시 공자에서 사마천 자신에 이르는 기간이 거의 500년이라는 계산법이다. 이 시기는 예악이 붕괴하고 왕도가 쇠락하면서 다양한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천하의 패권을 위해 군웅들이 다투던 시대였다.
천상의 조짐으로 인간의 문제를 예견하고 이런 문제를 덕치와 인정(仁政)으로 연관시켰으니, 천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정책을 변화시키고 조정해야만 비로소 아무런 탈이 없게 될 것이며 그러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재난이 닥친다고 사마천은 생각했다. 특히 사마천이 수덕과 감형을 제시하면서 덕성이 있어야만 나라가 창성한다고 내세운 논범은 바로 한무제에 대한 경고인 동시에 한무제가 설정하고 있는 무치 위주의 정책 전반에 관한 근본적인 수정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사마천은 덕치를 펴야만 비로소 백성들은 보존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사마천이 보기에 한무제이 정치는 진시황과 비견될 정도로 덕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봉선서》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국가 제사의 의미를 정치와 군사, 천문, 지리 등과 함께 국가의 대전(大典)으로 봤다. 사마천은 자신이 직접 한무제의 봉선대전에 참여한 경험으로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봉선에 관해 제대로 다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봉선서》를 통해 성덕(聖德), 수덕(修德), 무덕(無德) 등의 사례를 정치와 긴밀하게 연관시켜, 순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면서 오악을 순행하고 태산에 제사를 지낸 일을 추앙했고,, 우임금과 주나라 성왕 등 삼대에 걸친 성대한 봉선을 찬양했다. 반면 진시황이 폭정을 하면서 덕을 잃어버린 이후에 봉선을 거행했음에도 마침내 멸망했다고 했으며, 시황제가 태산에 올라갔을 때 폭풍우가 들이닥친 기사는 그에게 봉선할 자격이 없었음을 의미한 것으로 이는 무덕의 필연적 결과임을 드러낸다. 결국 사마천은 이 편의 후반부에서 한무제 시대를 다루면서 무제가 봉선을 좋아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인과 방사들을 가까이하고 신선을 찾는 등 민폐를 끼치는 행위만을 열거하면서 한무제를 한낱 방사들에게 속임만 당하는 어리석은 임금으로 폄하했다.

4. 《하거서(河渠書)》와《평준서(平準書)》
- 제국의 진정한 기반은 민생안정에 있다. -

《하거서》는 중국 고대의 역대 수리사업에 대해 서술하면서 치수의 상황 및 한무제 때의 수리와 수해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 편은 “하천을 소통시켜 구주를 안정시킨” 우임금의 치수에서 시작해서 우임금으로 끝맺는다. 이는 물을 잘 다스린 최초의 위대한 황제인 우임금의 공적에 대한 찬사로써 사마천은 조운(漕運)과 관개(灌漑)라는 국가 사업이 바로 민생과 직결된 중대한 사업임을 밝히는데 이 편의 주안점을 두었다.
황하를 다스리는 문제는 중국이 대대로 온 힘을 기우린 사람으로, 통치자의 역량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였다. 황하를 기준으로 벼면 유사이래 1575차례의 범람이 있었으니 대체적으로 3년에 한 번씩 작은 수재가 있었고, 5년에 한 번씩 큰 수재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우임금은 치수에 힘쓰는 동안 세 번이나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온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사마천은 우임금의 치수를 하나의 지표로 삼았으며 우임금 이래 역대 통치자들의 치수와 수리사업에 대한 이해와 득실 등에 대해 평가하면서 한무제 때의 호자(瓠子)를 거론했다.
기원전 132년, 동군(東郡) 관할의 호자(瓠子)에서 황하의 제방이 터져 강물이 범람했음에도, 한무제는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등을 파견하여 제방을 막으려고 했으나 터진 입구가 너무 커서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전횡을 부리던 외척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황하의 범람은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했다. 한무제는 전분의 말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분이한 말의 근본적인 의도는 황하가 터진 곳이 남안이었는데 전분의 식읍지는 북안에 있어 수해의 영행을 받지 않는 곳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홍수가 모두 남쪽으로 빠져 그의 봉지에서는 수확을 더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무제는 점성가에게도 의견을 구했으나 점성가 역시 제방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했음으로 더 이상 복구에 힘쓰지 않았다. 그 이후 20년 동안 황하는 하류의 많은 유역을 몰에 잠기게 하여 백성들에게 거대한 재난을 안겨주었다.
사마천은 이 일에 대한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그런 잘못의 근본이 장상(將相)들을 잘못 뽑은 데에 있다고 표현했다. 사마천은 스무 살에 전국을 유람했는데 그가 다녔던 여행에서 체득한 것은 수리사업이 백성들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팔서의 맨 마지막인 편인 《평준서》는 《화식열전》과 자매편의 성격을 가지는데 민생이라는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되며, 한무제의 지나친 영토 확장정책에서 야기된 백성들의 경제난 등을 거론하면서 한무제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기 위해서 지었다. 한나라 건립때 부터 무제 초기까지 대략 70여 년 동안은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돈이 억만금이나 되었고, 돈을 묶은 줄이 낡아서 셀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조정의 창고에는 묵은 곡식이 넘쳐 노천에 모아 두었다가 썩는 바람에 먹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이러한 풍족함이 한무제 시대의 폐단으로 다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평준이라는 물가 조절정책을 말한다. 상홍양(桑弘羊)이 원봉 원년 기원전 110년에 만든 제도로써 그 목적은 물가를 억제하여 고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가 장악하면서 대량의 물품을 낮은 가격에 사서 높은 가격에 되파는 일종의 매점매석 행위로 발전되는 등 악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사마천은 이와 더불어 당시 권력화 된 거상(巨商)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다루면서 농업, 공업, 상업 등의 분업은 사회생활와 경제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필요악적인 요소임을 피력했으며, 상업 또한 농업, 공업과 함께 중시하는 유연성을 보였다.
《평준서》는 한나라가 흥기하면서부터 한무제 태초까지 100여 년의 경제적 상활을 기록하면서 노자의 무위를 언급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사마천의 사상적 기저라고 할 수 있는 노자에 대한 찬미는 겉으로는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는 무위의 정치를 하면서도 치적을 이룬 한문제와 한경제의 성세를 찬양했다. 그것에 반해 한무제는 즉위하면서 해마다 전쟁을 병력을 동원했고, 사리사욕과 사치에 치우치다보니 날이 갈수록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되어 결국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까지 발생시켰다.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매관매직이나 화폐개혁, 염철의 전매제도 등과 같은 경제정책이 나오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혹리들을 양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복식(卜式)이란 사람이 일어나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 상양홍을 삶아죽여야 한다는 진언할 정도가 되었다.
사마천은 당시의 사회문제였던 매관매직, 보석제도 및 화폐개혁 등 3대 경제정책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면서 이러한 정책들이 합리성이나 형평성 등의 잣대도 없이 무분별하게 진행되어 사회적 모순을 악화시켰고, 불평등한 법률문제로 인해 사회는 양극화로 치닫게 되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돈 있는 자들은 더 부유하게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 못살게 되었으니 이러한 부분은 사마천이 이야기한 대로 결코 공정하지 않은 사회였다고 했다. 사마천이 보기에 정치는 무엇보다도 경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위정자의 의무는 민생의 기본적인 의식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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