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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8:08:584616 
사마천의 전기문학- 3.사기의 예술적 성과 및 영향
양승국
일반

 

제3절 <사기(史記)>의 예술적 성과 및 영향 

사기는 사상성이 높을 뿐 아니라 예술적 성과도 아주 높다. 사기는 고대 사회의 다양한 계급, 계층의 인물들을 부각했다. 제왕(帝王)과 장상(將相), 귀족과 관리, 학자와 문인, 농민과 상인, 은사(隱士)와 자객(刺客), 부녀와 배우 및 점복과 의원 등을 망라하고 있다. 역사 저작으로서의 사기는 아주 제한된 문헌과 전기에 의해 정리되었음으로 해서 생활의 세부묘사도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작자의 고도의 예술적 기교로 서술된 사건, 묘사된 인물이 모두 잘 개괄되고 전형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인물 형상의 부각에 있어서 계급 집단에 따라 상이한 유형의 특성을 성공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같은 집단 내부에서도 상이한 인물에 따라 그의 개성을 아주 두르러지게 묘사함에 성공하였다. <항우본기(項羽本紀)>의 홍문연(鴻門宴)에 참석한 인물 형상들이 바로 그러하다. 항우(項羽), 범증(范增), 항백(項伯), 항장(項莊), 유방(劉邦), 장량(張良), 번쾌(樊噲)를 보면 모두 반진 봉기에서 공로가 있는 군주, 모사, 장군들이다. 반진이란 목표는 공통성을 띤 인물들을 등장하게 했지만 그 인물들은 또 제각기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다. 항우와 유방을 본다면 재기가 비범하고 강퍅(剛愎)하고 잔악한 개세(蓋世)의 영웅인 항우와, 부하를 사랑하고 대인(大人)의 풍격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방랑적 습관을 가진 개국 황제 유방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심오한 계책을 갖고 있으나 성격이 조급한 범증과 대업을 계획함에 있어서 슬기롭고 침착한 장량도 완전히 대조적인 개성을 지닌 형상들로 등장하고 있다. 또한 항장은 맥이 없고 번쾌는 죽음도 겁내지 않는 장사로써 대조가 된다.

전국 시기의 4공자인 맹상군, 평원군, 춘신군, 신릉군은 모두 귀족 출신으로써 현사들은 끌어 모아 먹여 살렸다는 점에서 명망이 높았다. 그런데 신릉군을 제외한 세 사람은 사실 이름뿐이다. 이를테면 맹상군은 도량이 좁고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기며 심지어 자기를 졸장부라 한다고 하여 한 고을을 몽땅 도륙을 낸 위인이다. 평원군은 개인 향수만 일삼고 모공, 설공 같은 현사를 두고도 시기하고 사귀지 않는 위인이다. 춘신군은 초나라 사람으로써 초나라를 구하려는 뜻을 품었지만 나중에 국권을 찬탈하려다가 멸족의 화를 받는다. 오직 신릉군만이 현사들을 진심으로 대하여 국가의 위기 존망지추(存亡之秋)에 결연히 일어나서 외적을 물리치고 조국을 보위하고 강자의 침입에서 약자를 구원해 내는 거룩한 일을 하였다고 찬송하였다. 사마천은 이렇게 4공자의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였다.

사기의 인물 부각에 있어서 흔히 그 인물의 일생에서 가장 전형적인 사건과 행동을 파악하고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의 주요한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였다. 그리고 인물 묘사에서 흔히 호견법(互見法)을 취했다. 항우의 특출한 성격적 특징은 비범한 재기, 싸움에서 무적이고 용감하며 사람됨이 솔직하고 술수를 쓰지 않으며 강퍅(剛愎)하고 잔학한 것이다. 이런 항우에 대하여 항우본기에서는 개세의 영웅으로 칭송하여 노래하였다. 그는 거록지전(鉅鹿之戰), 홍문연(鴻門宴), 해하(垓下)에서의 포위돌파와 같은 세 가지 사건을 아주 생생하게 서술함으로써 개세의 영웅다운 그의 성격적 특징을 보는 둣이 부각해 내었다. 거록지전에서 그는 황하를 건너지 않으려는 경자관군(卿子冠軍) 송의(宋儀)의 머리를 베어 들고 호령을 내렸다. 사흘 양식만 짊어지고 가마솥 등을 모두 깨어버리고 일당백 정신으로 황하를 건너서 조나라 거록을 포위하고 있는 진군 주력을 괴멸시키고 거록을 구원해 냈다. 홍문연에서는 항우의 우직하면서 적수를 속이지 않는 성격 특성을 보여주었다. 해하에서의 포위 돌파에서는 실패한 개세의 영웅의 비장한 말로를 두르러지게 묘사하였다. 그는 우희(虞姬)와 비분강개하여 결별하고 용감히 포위망을 뚫고서 갈대를 쓸어 눕히듯 적병을 쓰러뜨리면서 오강(烏江)에 이르렀다. 오강 정장이 빨리 배에 올라 강을 건너라고 권했으나 그는 “내 강동의 자제 8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와 서쪽으로 진군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어여삐 여겨 왕으로 추대한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그들이 아무 말이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고? 라고 하면서 강을 건너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조용히 자결하고 말았다. 항우의 비장한 결말에 대하여 각별히 힘주어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영웅적 성격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강퍅(剛愎), 잔혹함은 <항우본기>에서는 될수록 피하고 <고조본기(高祖本紀)>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서 서술했다. 이렇게 호견법(互見法)을 취함으로써 항우 형상의 완전성을 기하기도 하고 역사적 사실성을 견지하기도 하였다.

사기는 인물 성격을 동적인 상태에서 능란하게 묘사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진섭은 머슴살이를 할 때 친구에게 “ 부귀해져도 서로 잊지 말자!”고 하면서 공동의 운명을 지닌 계급감정을 토로하였다. 그런가하면 그에게는 또 “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겠는가?”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남을 경멸하는 사상도 있었다. 그럼으로 그가 왕이 된 다음 옛친구가 찾아와서 제멋대로 드나들며 자기의 위험에 손상을 주었다고 하여 그만 그 친구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렇게 동적 상태에서 그의 성격은 그의 계급적 지위의 변화에 따라 변화를 가져왔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기는 인물 성격을 두르러지게 하기 위하여 인물의 대화를 통하거나, 측면으로부터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홍문연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처리가 그러하다. 항우, 유방, 범증, 장량은 말할 것도 없고 번쾌의 경우에도 그렇다. 번쾌는 장량의 말을 듣고 “ 군막 안으로 달려들어가 서쪽을 바라보고 서서 눈을 부라리며 항왕을 쏘아보았다. 머리칼은 곤두서고 눈언저리는 찢어질 듯하였다. 항우는 검자루를 쥐며 엉거주춤해 가지고 ‘ 그대는 누군가?’하고 물었다. ‘패공의 참승(驂乘)인 번쾌라는 사람입니다!’하고 장량이 소개하였다. ‘장사로다! 술을 한 잔 주도록 하라!’고 항왕이 령을 내렸다. 말들이 잔에 술을 따라주니 번쾌는 사의를 표하고 그 자리에 서서 쭉 들이켰다. ‘돼지 앞다리를 주라’하고 항왕이 또 령을 내렸다. 생돼지 앞다리를 하나 가져다주니 번쾌는 방패를 바닥에 엎어놓고 검을 뽑아 돼지 앞다리를 저며서 먹은 것이었다. 항왕이 ‘ 장사는 더 마실 수 있는가?’하고 물으니 번쾌가 대답하기를 ‘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데 술 한 잔을 어이 마다하겠습니까?.... 소인배의 말을 듣고 공훈을 세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이미 망한 진나라가 걸은 길을 뒤쫓는 것인가 합니다. 남몰래 대왕으로 인하여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항우는 대답할 말이 없어 ‘거기 앉으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번쾌는 ‘죽움도 피하지 않는 장사’라는 것을 생생한 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 자리에서 항우를 “ 망한 진나라가 걸었던 길을 뒤쫓는다.”라고 책망하는 언사는 그야말로 장사의 기개를 남김없이 떨치고도 남음이 있다. <신릉군열전(信陵君列傳)>에서 신릉군이 후영을 맞으러 갔을 때 후생이 짐짓 흐트러진 의관을 정제하고 거리낌없이 신릉군이 모는 수레의 상좌에 앉았다. 그리고 계속 거드름을 피우며 오만한 태도를 취하였다. 저자 거리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다 볼 수 있었다. 공자의 수종들은 속으로 후영을 욕하였다. 신릉군의 집에 당도하였을 때 한방 가득 모인 빈객들은 공자가 모시고 온 사람이 문지기라는 데 모두 놀랐다. 이렇게 측면으로부터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진심으로 선비를 예의로써 대하는 위공자 신릉군의 품덕을 더 두드러지게 해주고 있다.

인물 형상을 부각함에 있어서 흔히 서정의 필치로써 서술과 의론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영탄도 하고 규탄도 하며 선명한 애증과 강렬한 감정을 갖고서 쓰고 있다. <굴원고생열전(屈原賈生列傳)>에 있는 ‘ 왕이 진노하여 굴원을 소원했다.’의 대목에서 사마천은 시인 굴원에 대해서 깊은 동정을 보냈다. “ 신의를 지켰는데도 의심을 받고 충성을 다했음에도 비방을 받았으니 원망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信而見疑, 忠而被謗, 能無怨乎?)”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초회왕(楚懷王)이 굴원을 멀리하고 죽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날카롭게 규탄하고 있다. “회왕(懷王)은 충절과 비충절을 구분할 줄 몰랐기에 안으로는 정수(鄭袖)에게 속고 밖으로는 장의에게 속아 굴평(屈平)을 멀리하고 상관대부와 영윤 자란(子蘭)을 신임하였다. 군사는 좌절당하고 지역은 뜯기어 여섯 군을 잃고 몸은 진나라에서 객사하여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사람을 볼 줄 모르는 탓에 빚어진 화이다.(懷王以不知忠臣之分, 故內惑于鄭袖, 外欺于張儀; 疎屈平而信上冠大夫, 令尹子蘭, 兵挫地削, 亡其六郡, 身客死于秦, 爲天下笑, 此不知人之禍也)”라고 통탄했다. 그리고 굴원의 비극적 종말에 대하여 비통한 눈물을 흘렀다. “일찍 장사에 가서 굴원이 몸을 던진 강을 찾아보고 그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適長沙, 觀屈原所自沉淵, 未嘗不垂涕, 想見其爲人-굴원고생열전)”라고 하면서 작자는 시인 굴원의 불우한 생애에 깊은 동정을 보냈으며 자기도 그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듯이 표현하였다. 사마천은 그 외의 많은 작품에서도 강한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 착한 것을 착하다 하고 악한 것을 악하다 하며, 어진 것을 어질다 하고 불초한 것을 천하다 한다.(善善惡惡, 賢賢賤不肖)”라고 <태사공자서>에서 내세운 시비 선악을 가리는 척도로서 상이한 대상에 대하여 동정, 찬탄, 풍자, 규탄 등 상이한 태도로 서술했다.

<사기>의 서사는 강한 이야기성과 극성을 갖고 있다. 사마천은 역사 사건을 서술함에 있어서 평범하게 쓴 것이 아니라 생생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갈등 속에서 줄거리를 전개함으로써 심금을 울려놓는다. <염파인상여열전>에서는 염파와 인상여가 어떻게 사이가 갈라졌다가 또 ‘ 문경지교(刎頸之交)’가 되어 마음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이 전기에서 완벽귀조(完璧歸趙). 민지회견(澠池會見), 부형청죄(負荊請罪), 등 몇 개의 중대한 사건과 장면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주제를 완성하고 있다.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우와 유방 집단 사이에 직접적인 투쟁을 쓰고 있는데 발단, 발전, 고조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구성이 잘 짜여지고 흥미진진하고 돌발적이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고 있다.

사기의 언어는 세련되고 유창하고 생생하며 구두어에 가깝다. 앞에서 말한, 집섭의 친구가 진섭의 궁전에 찾아들어 갔을 때 경탄한 나머지 내뱉은 말은 전형적인 농민의 어투로써 농민의 소박한 성격과 당시의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에서 한고조가 태자를 폐위하고 조왕 여의(如意)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시도를 알게 된 주창(周昌)이 고조에게 아래와 같은 탄원하고 있다. “ 신은 입으로 말은 잘하지 못하오이다. 그러나 신은 그그..... 그렇게 함은 지당하지 않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태자를 폐위하고자 하시지만 신은 그그.... 그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臣口不能言, 然臣期期知其不可! 陛下雖欲廢太子, 臣期期不能奉詔).” 이 말에서 ‘ 기기(期期)’는 말을 더듬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말을 더듬는 것을 두 개의 글자로 씀으로 해서 당시 주창의 정신 상태와 조급한 심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마천은 인물 형상을 생생하고 비슷하게 묘사하기 위하여 선진 시기의 관련된 역사 자료를 선택하여 직역하거나 의역하거나 혹은 개작하였으며, 언어는 통속적이고도 구두어에 가깝게 하는 데 힘을 기울려 생생한 언어 예술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기의 언어는 문장 구성법이 일정하지 않고 표현의 필요로부터 장단을 정하여 변화가 무궁하다. 때로는 이십여 자를 한 구로 하거나 때로는 한 글자를 한 구로 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허자(虛字)를 이용하여 애증을 표현하고 있다.

사기의 언어에서 주의를 돌릴만한 것은 민요와 속담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에서는 “ 한 자의 포목이라도 기울 수 있고 한 말의 조라도 찧을 수 있지만 두 형제는 용납되지 않는다( 二尺布, 尙可縫; 一斗粟, 尙可舂, 兄弟二人不能相容)”. 이라는 민요를 인용하여 한문제(漢文帝)가 회남왕(淮南王) 유장(劉長)의 변절 사건을 처리한 것을 풍자하고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을 폭로하였다. 또 <이장군열전>에서는 “ 복숭아, 오얏은 조용하여도 나무 아래 오솔길이 절로 생긴다( 桃李不言, 下自成蹊)”라고 한 속담을 인용하여 이광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였다. 관부(灌夫)의 방자하고 무도한 행위는 필연코 화를 받게 될 것이라고 풍자한 동요가 있다. “ 영수물이 맑으면 관씨는 편안하고 영수물이 흐리면 관씨는 멸족한다.(穎水淸, 灌氏寧; 穎水濁, 灌氏族-魏其武安侯列傳)” 또 <화식열전(貨殖列傳)>에서 “천금 부호의 자손은 네거리에서 죽지 않는다.(千金之子 不死于市)”라고 한 것은 부호의 자식은 살인죄를 지어도 참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날카롭게 풍자한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민요, 속담을 많이 이용함으로써 <사기>의 언어를 풍부히 하고 다채롭게 했을 뿐 아니라 인민들의 사상 감정을 직접 반영하고 작자의 애증을 거기에 기탁하였다.

<사기>는 후세에 아주 큰 영햐을 미친 위대한 거작이다. 역사 저작으로서 <사기>는 통사(通史)와 정사(正史)의 전범(典範)이다.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를 비롯하여 그후의 역사가들치고 그들의 저작이 사마천과 <사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다. <사기>는 전기 문학으로써 고대 사실주의 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문학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후세 문학에 아주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은 <춘추(春秋)>, <상서(尙書)>의 진실하고도 소박한 기사법(紀事法)과 <국어(國語)>, <좌전(左傳)>, <전국책(戰國策)>의 단편식의 기전체, 그리고 맹자, 장자의 변화 무궁한 집필 방법, 강한 개괄 능력을 가진 묵자의 필법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풍격을 수립하였는 바 중국 전기 문학을 새로운 경지로 발전시켰다. 그럼으로 <한문학사강요(漢文學史綱要)>에서 노신 선생은 사기를 다름과 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사기는 역사가의 절창이요, 운이 없는 이소(離騷)이다. (史家之絶唱, 無韻之離騷)”

인물 전기로써의 <사기>는 우선 후세의 서사 산문의 전범이 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산문은 남북조 시기의 화려하기만 하고 실속이 없는 형식주의적 문풍을 배격하고 의식적으로 사기를 내세우면서 사기의 전통을 집접 계승하였다. 당대 시기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을 비롯하여 송대의 구양수(歐陽修), 명대의 귀유광(歸有光), 청대의 동성파(桐城派), 양호파(陽湖派) 및 고문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기>의 영향을 받았다. 한유가 분방한 풍격, 서술과 논설을 엇바꾸어 쓰는 방식으로 애국 영웅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에 대해 쓴 글이라든지, 유종원이 능숙하고 세련된 붓으로 하층 인물을 잘 반영했다든지, 구양수가 서정적 필치로 사건을 서술한 것들은 모두 사기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실증해 준다.

사기는 후세의 시, 소설, 회곡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시인들은 사기에서 구가한 영웅들은 창작 소재로 삼아 구가하면서 자기들의 사상 감정을 토로하였다. 이를테면 이백의 <협객행(俠客行)>에서는 신릉군, 후영, 주해 같은 인물을 노래했고 이런 의사들에게서 정신상 큰 영향을 받았다. <병거행(兵車行)>, <영회오백자(咏懷五百字)>, <삼리(三吏)>, <삼별(三別)>과 같이 현실 사회의 암흑상을 폭로하고 통치집단의 죄행을 규탄한 두보의 시도 사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왕유(王維)의 이문가(夷門歌)와 도연명의 영형가(咏荊軻)도 사기의 영향을 받는 것이 틀림없다.

소설면에서 본다면 당대 시기의 전기 소설과 송대 시기의 화본소설(話本小說) 중 강사(講史) 소설은 사기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이다. 사기의 인물의 형상창조, 성격부각, 세부묘사, 이야기의 구성, 구성의 발전 등등 면에서 후세의 소설과 희곡에 미친 영향을 일으켰다. 명대의 수호전과 청대의 포송령(蒲松齡)의 <요재지이(聊齋志異)>는 사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 <서한통속연의(西漢通俗演義)>는 사기에 기록된 역사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나온 것이다.

회곡면에서 본다면 <육십종곡(六十種曲)>에서 10여 종은 사기에서 취한 것이다. 경극(京劇)과 역사극 가운데는 사기에서 취한 것이 적지 않다. 경극으로서 <장상화(將相和)>, <패왕별희(覇王別姬)>, <소하추한신(蕭何追韓信)> 같은 작품과 역사극으로는 <굴원(屈原)>, <호부(虎符)>, <당체지화(棠棣之花)>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2천여 년이래 문인으로서 사기를 읽지 않은 사람이란 거의 없다. 사마천의 인격과 사기의 진보적인 사상 및 사실주의적 정신 그리고 사기가 부각시킨 예술 형상은 사람들의 정면 면에서와 문학예술 면에서 심오한 영향을 주고 있다.


중국문학사
청년사
김영덕, 허용구, 김병수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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