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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8:07:434089 
강독3-사기의 가치와 영향
양승국
일반

사기는 중국 제일의 통사(通史)이다. 춘추가 노나라의 연대기 중심의 편년사이고 국어(國語)와 전국책이 나라별 제후국들의 사서이며, 상서(尙書)가 정치사라면 사기는 이상의 모든 사서를 종합한 통사로써 가장 완벽하고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그의 저서 사통(史通)에서 역사 서술의 체계를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로 구분했다.


사기는 본기와 열전을 중심으로 한 기전체 사서의 효시이며, 이후 중국 역사 기록의 모범이 되었고, 따라서 모든 정사는 사기의 체제를 모방하게 된다.

소위 중국 정사의 총명이라는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한서(漢書)에서 명사(明史)까지를 볼 때 그 체제가 조금씩은 달라지나 모든 사서가 본기와 열전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한서에서는 서를 지(志)라 개명했다. 또 한서에는 세가부분이 없다. 사기의 세가 부분에 있는 것을 한서에서는 열전에 포함시켰다. 또 진서에서는 세가를 재기(載記)라고 명칭을 바꾸었고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에는 표(表), 지(志), 세가(世家)가 없다. 그러나 본기와 열전은 꼭 들어 있는 기전체들이고, 그 나라의 정사임에는 틀림없다. ‘사기를 읽으면 한서를 절반은 읽은 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서가 사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내용도 많은 부분이 같다는 뜻일 것이다. 사기가 한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지만 몇 가지 면에서는 크게 다르다. 여기서 두 책을 비교하여 사기의 특색을 드러내고자 한다.


- 사기는 통사이고 한서는 단대사(斷代史)이다. 한서와 같은 단대사가 사기의 체제를 본떠 그 후에도 계속 나왔으나 사기만 통사가 없다. 다만 송대에 체제를 달리한 편년체로 사마광의 자치통감(自治通鑑)이 있을 뿐이다.


- 사기의 세가 부분이 한서에는 없다. 그 이유는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은 덕자성이 있었으나 한 대에는 제후의 존재가 형식적이고 전혀 독립성이 없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한서에서는 이를 열전에 포함시켰다.


- 사기와 한서에는 이런 외형적인 차이도 있지만, 더 큰 차이는 지은이의 기본 태도와 처지가 달랐다는 점이다. 사마천은 부형을 당하고 자기 생존의 의의를 오직 사기의 완성에만 두었기 때문에, 그의 격한 감정이 주관성이 강한 기록으로 나타났다. 반면 한서의 저자 반고는 후한의 명족 출신으로 명제(明帝) 때 주로 활약한 학자였으니, 시대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반고는 태평성대에 살면서 20여 년의 장구한 시간을 두고서 한서를 썼다. 뒷날 ‘ 사적으로 나라의 역사를 바꿔 썼다.’라는 누명을 쓰고 옥사했지만, 집필 과정이 사마천과 같은 극한 상황은 아니었다.


- 후한대에 와서는 부(賦)의 영향으로 대우(對偶)와 수사(修辭)에 치중하는 미문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때문에 한서의 표현은 문아(文雅)하고 정선된 언어는 심오하면서도 중후하며, 사기의 기세 있고 질박하며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생경한 문장과는 크게 다르다. 문장이란 측면에서 볼 때 사기에서는 생생함과 힘을 찾을 수 있고, 한서에서는 미문을 접할 수 있다.


이 번에는 문학작품으로서의 사기의 가치와 영향에 대하여 부연코자 한다.

사기를 통해 불 수 있는 사마천의 사관과 역사 인식은 다른 전문서가 많이 출간되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우선 사기의 문장은 지금으로선 문언문이라지만 당시로서는 생생한 구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상서의 문장을 인용하되 당시의 쉬운 구어로 바꿔 기록했다. 구어는 인물의 성격과 여러 상황를 파악하는 데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항우본기에서 홍문지연(鴻門之宴) 후 한고조 유방을 탈출시키고 뒤에 남은 장량이 항우에게 백벽(白璧) 한 쌍을 바치자, 항우는 “ 패공(沛公)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백벽을 받아 두었다. 그러나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고 암시하던 아부(亞父) 범증(范增)은 장량이 바치는 옥두(玉斗) 한 쌍을 땅에 던지며 박살을 내며 한 마디 내 뱉는다.“ 에이! 어린 녀석하고는 계략을 같이 할 수 없구나!” 이 한 마디에 항우와 범증의 모습은 물론 성격까지 그대로 알 수 있고, 도마 위에 올랐다가 탈신한 유방의 모습과 모사 장량까지 함께 연상이 되니 얼마나 생동하는 표현인가?


사기 96권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에 고조가 태자를 폐하려고 할 때 다른 신하들이 고조의 눈치만 보고 있자 주창(周昌)이 노기를 띠며 말했다. “ 신이 입으론 말을 다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기, 기, 기필코 불가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태자를 폐하려 해도 신은 기, 기, 기필코 조서(詔書)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조 앞에서 말을 더듬는 주창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결국 태자를 폐하지 않았고 휘장 뒤에 숨어서 엿들었던 여후는 뒷날 주창에게 사례하며 말한다. “ 그대가 없었으면 아마 태자를 폐하였을 것이오.” 참으로 생생하고 극적인 묘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사기에는 이런 구어를 사용한 부분이 매우 많다. 또 속담 속어 등을 서술이나 논찬 속에 적절히 인용 삽입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구어의 생생한 표현 이외도, 열전을 통한 전기문학의 개척 내지 확립으로 후대 문인에게 빛나고 탁월한 허다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흔히 사마천과 전국시대 초나라의 굴원(屈原)과는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한다. 둘 다 울분을 갖고 살았으며, 자기의 뜻을 각각 사기와 이소(離騷)를 통해 표출하였고, 또 그것들로써 현실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기는 정사기록의 전범(典範)으로 그 후 24사를 탄생케 하였으며, 이소는 초사의 대표작으로 뒷날 한부(漢賦)가 융성하게 되는데 토대가 되었고 칠언시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기의 문장은 사마천 개인의 특수 상황으로 인하여 객관적이어야 할 역사 기록에 너무 강한 개성을 불어넣어 곳곳에서 독자의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격렬함이 있다. 때문에 사마천은 사실을 소재로 한 역사 산문을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으며, 인물과 사건의 묘사에 대단한 문학적 성과를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사기 속의 인물들은 연극의 주제로 많이 채택되었으니 희곡과 통속 연의소설에 끼친 영향도 작다고는 할 수 없다.


끝으로 이 위대한 사기는 시대의 산물이었다는 말을 더하고 싶다. 본래 중국에서는 문(文), 사(史), 철(哲)은 하나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사기는 사서인 동시에 문학이요, 또 당시 사상을 반영해 주는 철학서라고 할 수 있다.

사기라는 불후의 저작은 일차적으로 사마천 개인의 천재성에 연원한다. 확실히 그는 천재였으며, 가문의 전통 위에서 현장 답사를 통해 견식을 확대하고, 독서를 통해 인물과 사건에 대한 통찰력과 혜안을 길렀으며, 부친의 유언을 받았고, 범인으로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부형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던져졌었다. 이런 점을 종합한다면 그의 천재성이 발휘될 수 있는 개인적 여건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여기서 사마천이 살랐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하여야 한다. 천추전국시대란 중국이 성읍(城邑) 국가에서 영토(領土)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상의 혼란기였다. 그에 따른 사회, 문화, 경제 등의 변화는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안정적이지는 못했다. 결국, 새시대의 질서 확립과 새체제의 완성, 고대 문화유산의 총집, 정리는 한왕조라는 새 국가에 주어진 사명이었다.


한무제 때는 건국 이후 100년이 지난 무렵이었으니 정치적으로는 분열과 혼란의 종결, 사상적으로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종식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지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하여 총괄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터전을 창출해야 하는 역사적, 철학적 작업이 요구되던 시대라 할 수 있다. 무제 때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야 할 현실적, 철학적 책임감을 통감하고 있었고, 결국 사마천의 천재성이 이 역사적, 시대적 소임을 다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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