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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8:06:585716 
사기강독1 -사마천의 생애와 사기(史記)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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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전한(前漢) 무제(武帝 : 재위 기원전 141 - 87년) 재위 시 국력과 문화면에서 다대한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무제 이전, 승평시대(昇平時代)인 문제(文帝 : 재위 기원전 202 - 157년), 경제(景帝 : 재위 기원전 188 - 142년) 이래 국부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민생이 안정되었으며,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도 평정되어 국가의 기반이 튼튼해졌다.


무제는 건국 이래의 숙제이던 흉노의 정벌 이외에 남월(南越)의 토벌, 서역의 중국화, 서남이(西南夷)의 평정, 위만조선(衛滿朝鮮)을 치고 사군을 설치하는 등 외정에 막대한 국력을 소모했다. 이에 재정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염철(鹽鐵)의 전매제 및 평준법 실시 등의 새 경제정책을 폈다. 이러한 무제의 통치는 호족에 대한 탄압과 백성들로부터의 철저한 착취 그리고 엄격한 법치주의적 정책을 필요로 하였다.

사마천의 일생은 대부분이 무제 재위 기간과 일치하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위대한 사기(史記)의 편찬이 이루어진 것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경 용문(龍門 :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 부근)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연도도 확실치 않지만 그의 몰년도 역시 확실치 않다.

사마천은 사기 130권 중 맨 마지막에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썼다. 그 속에서 사마천은 선조 및 가문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사마씨는 대대로 주나라의 사관직을 담당하였다. (司馬氏世典周史)”라고 기록하였다. 한대의 사관은 왕실 관계의 기록뿐만 아니라 천문, 제사, 율력까지도 관장했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무제가 즉위한 건원(建元) 원년인 기원전 140년에 태사령(太史令)이 되었다.

사마천이 죽기 전 몇 해 전쯤, 그의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보면 당시의 사관은 천문, 역법을 밭으며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워(近乎卜祝之間) 본디 황제의 희롱하는 바 있고 창우(倡優)처럼 대우받았다는 말이 있으니 권세나 재물과는 처음부터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사마담은 천문과 주역 및 육가의 이론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태사공자서에 부친에게서 들은 육가(六家)의 요지를 기록했는데,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都家)의 주장 및 특장(特長)을 잘 파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마천은 10세에 고문(古文)을 읽고 외웠으며, 19세를 전후해서 공자의 14대 손인 공안국(孔安國)을 스승으로 하여 고문상서(古文尙書)를 배웠다. 20세에 남으로 회수(淮水)와 장강(長江)을 거쳐 회계(會稽) 및 절강(浙江), 그리고 상수(湘水) 지역의 유적을 살피고 제(齊)와 노(魯)에서 학업하며 공자의 유풍을 보고 양(梁)과 초(楚)를 거쳐 돌아왔다고 했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감안할 때 이런 넒은 지역을 여행하였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지역에서 선현(先賢)과 성왕(聖王)의 족적을 더듬고 한(漢)과 초(楚)의 격전지를 탐방한 경험은, 뒷날 <사기(史記)>를 쓸 때 생생한 문장으로 다시 살아났다. 장안에 돌아온 사마천은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에게 출사했다.


다시 36세 전후에 무제의 명을 받아 파촉(巴蜀) 이남의 정벌에 참여하여 공(邛), 착(笮), 곤명(昆明) 등을 공략하고 돌아와 보고하였으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미개지인 변경 지방을 살펴보았다는 것 또한 큰 의의가 있다고 보아야겠다. 지적 탐구심에 불타는 젊은이가 당시의 전 중국을 두 차례에 걸쳐 여행하였으니, 이는 생동하는 기록으로서의 <사기(史記)>의 출현을 예고하는 역사적인 태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이 여행에서 돌아오던 해인 기원전 110년, 무제는 봉선례를 태산에서 거행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 사마담은 주남(周南)에 머물면서 이 중요한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다. 참여하지 못한 사연은 잘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사관으로서 의식에 참여 못한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겼던지 결국 사마담은 발분하여 죽었다. 사마담은 아들 천(遷)에게 사관으로서 <춘추(春秋)>이후를 역사로 편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소자 불민하오나 선인께서 간추려 놓은 구문(舊聞)들을 논술하여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부친 사후 3년에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다. 한대에는 각 지방의 문헌이나 정치 실적이 우선 태사부(太史府)로 보내져 사관으로 하여금 국가기구와 그 역할을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관은 왕실의 서고를 조사하고 궤를 열어 찢어진 비단 쪽이나 목간을 검사하기도 했다. 사마천은 그의 자서(自序)에서 모든 기록과 비장된 석실금궤지서(石室金匱之書)를 읽었다고 했다. 그는 태초(太初) 원년인 기원전 104년에 역서(曆書)를 편찬했는데, 아마 이 무렵부터 부친의 유언에 따라 <태사공서(太史公書)> 즉 사기(史記)의 초고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사마천에게 부친의 죽음보다 더 큰 불행이 찾아온다. 소위 ‘이릉(李陵)의 화(禍)’가 그것이다.

일찍이 흉노 정벌에 명성을 떨쳤던 비장군(飛將軍) 이광(李廣)의 손자인 이릉(李陵)은 무제(武帝)에게 자청하여 출정했다가 흉노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원군도 없고 화살도 떨어진 막다른 상황에서 이릉은 할 수 없이 흉노에게 항복했다. 사마천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쓰여진 이릉의 화에 관한 내용을 발취하면 다음과 같다.


“ 나는 이릉과 같은 시기에 벼슬을 했지만 평소 친하지도 않았으며 문무의 취향이 달라 같이 술을 나눈 적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그 사람됨이 기사(奇士)라 할 수 있었고, 효친(孝親)하며 신의가 있고, 재물에 대해 염치가 있었으며, 분별심도 있고 공검(恭儉)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에 몸을 바치려 하는 국사지풍(國士之風)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이릉이 항복하기 전 그의 승전보가 전해지면 공경왕후가 모두 잔을 들어 축수하였으나, 이릉의 패서(敗書)가 보고되니 주상께선 식사를 하시되 맛을 모르고 조회할 때 불쾌한 표정만을 지으시니 대신들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나의 비천함을 생각지 않고, 주상의 참담함을 보고 나의 충성을 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주상께 이릉을 변호하는 말을 하였다.”

“ 이릉이 평소 사람 사귐이나 사졸을 대함을 보면 능히 타인의 사력까지도 얻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옛 명장이라도 이릉보다 나을 수 없다. 몸은 비록 패전하고 항복했지만 그 뜻은 뒷날 적당한 때에 한나라 황실에 보답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가 쌓은 이제까지의 공적은 천하에 드러낼 만하다.”

사마천이 무제에게 이릉을 변호한 것은 이릉의 공과를 분명히 밝혀 대신들이 그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무제의 큰 노여움을 받아 형벌 중에서도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인 부형(腐刑) 즉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48세쯤으로 여겨지던 때이니 인생의 가장 원숙한 시기에 제일 큰 치욕을 당한 것이다. 2년 뒤, 사면되어 복직은 되었지만 굴욕을 참으면서 궁형을 받은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차라리 죽음보다도 더 큰 고통이었다. 사마천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형을 받은 이후의 심경을 오히려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비장하게 서술하고 있다.


“ 저는 집이 가난하여 형벌을 면할 재물도 없었습니다. 친구 중 누구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으며, 주상 좌우의 근신들 중 그 누구도 나를 위해 말 한 마디 해주지 않았습니다.”

“ 사람은 본디 한 번 죽지만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수도 있고 홍모(鴻毛)보다 가벼울 수도 있습니다.”

“ 형벌 중 제일 치욕적인 것은 궁형입니다.”

“ 맹호가 심산에 있을 때는 백수가 두려워하지만 우리나 함정에 있게 되면 비록 맹호라 할지라도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얻고자 하는데, 이는 주변의 위세에 눌린 까닭입니다.”

“ 감옥 안에서 옥리를 보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옥에서 일하는 노예만 보아도 무서움에 마음이 떨렸습니다.”

“ 제가 법에 따라 형을 받은 것에 대해 세상사람들은 구우일모(九牛一毛)라 생각할 것이고 땅강아지나 개미와 다름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참담한 속에서도 그가 자결하지 않고 버틴 것은 선친의 유언 때문이었다. 사마천은 선현들이 겪은 역경을 생각한 것이다.

“ 서백(西伯)은 제후이면서 유리(羑里)의 옥에 갇혔고, 이사(李斯)는 승상이면서 오형(五刑)을 받았으며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왕이면서 진(陳) 땅에 구금 당했다.

“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周易)을 연역(演繹)했고, 중니(仲尼)는 진과 채 사이에서 곤란을 당하고서도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추방되고 나서 이소(離騷)를, 손빈은 다리고 잘리고 나서 병법을 엮었다.”


사마천이 형을 받은 뒤 얼마나 분발하여 <태사공서(太史公書)>를 썼는가는 이상의 글로써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즉 <춘추(春秋)> 이후 그 뒤를 이을 사서를 엮겠다는 오직 그 일념뿐이었다.

“ 저는 외람되게 무능지사에 자탁하여 천하의 방실된 구문을 망라하고 사실을 약고하며 시종을 종합하고 성패나 승기의 원리를 계고해서 위로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로부터 아래로는 지금까지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모두 130권을 지었습니다.”


“ 저는 천의와 인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지변을 통찰하여 일가지언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초고가 다 이루어지기 전에 이런 화를 만났습니다만, 혹시나 성취하지 못할까 걱정했기에 이 책을 다 써서 명산에 감추었다가 내 뜻을 알아줄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전국에 널리 퍼질 수만 있다면 이전의 치욕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니, 비록 일만 번 죽을 당한다 할지라도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사마천이 55세가 되었을 당시인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에 <태사공서(太史公書)>가 완성되자 그 자신은 자살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남은 혈육인 딸을 출가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몇 년을 더 살았다. 딸을 출가시키고 나서 기원전 86년에 무제가 죽자 그 자신은 자결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태사공자서에서는 “ 정본은 명산에 비장하고 부본은 경사에 두고 후세의 성인 군자를 기다린다”라고 했다. 뒷날 선제(宣帝 : 재위 기원전 73-48년) 때 사마천의 외손인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이 그 원고를 조정에 바침으로써 비로소 사기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출전-진기환의 사기강독 서문(명문당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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