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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27 12:41:565115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양승국
일반

혜시(惠施)의 역물십사(歷物十事)

사물을 보는 열 가지 방법


<장자> '천하'편에는 혜시가 말한 열 가지 명제가 나옵니다. 역물(歷物)이라는 말은 사물을 관찰한다거나 또는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혜시는 명제만 제시했을 뿐 아무런 논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혜시의 논제는 '장자(莊子)' 에서 소개되고 있는 소위 '역물십조'(歷物十事條)입니다. 즉 모든 사물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오직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 진리가 결정된다는 것으로, 예를 들면 하늘과 땅은 같은 높이에 있고 산과 연못도 같은 높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큰 것은 밖이 없으니, 이를 일러 '큰 하나'(大一)라 하고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일러 '작은 하나'(小一)라 합니다.. 역물십조의 첫번째 명제로서 어떤 사고이든 테두리를 긋는 순간 그 사고는 그 테두리의 바깥을 포용할 수 없는 운명에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큰 것에 대해 말할 때는 '이것이다' 라는 긍정의 내용을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명제는 노자(老子)가 말한 '길을 길이라 하면 늘 그러한 길이 아니다' 라는 명제와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설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열 가지 명제를 하나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지극히 켜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大一)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小日)이라고 한다.

이 명제는 가장 크다는 것과 가장 작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형식 명제입니다. <장자> '추수'편에는 항상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자부하던 황하의 물귀신이 황하가 홍수로 넘치는 바람에 바다로 떠밀려 내려가서 바다의 신을 만나는 얘기가 나옵니다. 처음으로 자기보다 큰 것을 만나서 놀라는 황하의 신에게 바다의 신은 자기도 천지와 비교하면 커다란 창고에 들어 있는 곡식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경험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자기가 본 가장 큰 것을 크다고 하고 가장 작은 것을 작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모두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큰 것은 밖이 없는 것이며 정말 작은 것은 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경험 세계에만 근거를 갖는 상식을 부수는 것입니다.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가 천리가 된다.

두께가 없는 물건은 아무리 쌓아도 놓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어 놓으면 그 넓이는 굉장할 수 있습니다. 두께와 넓이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께가 없다고 하면 넓이도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얼굴이 번듯하고 옷을 잘 입으면 대접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얼굴도 못생기고 옷도 허름하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상식이 갖기 쉬운 맹점입니다. 고정된 상식은 곧 편견을 의미합니다.




3.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은 위에 있으니까 높고 땅은 아래 있으니까 낮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은 쑥 올라와 있고 연못은 움푹 패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나라에 가서 지구를 보면 그런 차이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서 볼수록 더욱 평면에 가까워 보일 테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재능이나 지위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두 사람이 차이가 많아 보이더라도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보면 도토리 키재기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의 위치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남쪽이라고 하면 그 연장선의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면 대구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입니다. 물론 대구에서 보면 경주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이 됩니다. 남쪽이라는 개념은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남쪽과 대구에서의 남쪽, 대구에서의 남쪽과 부산에서의 남쪽, 이 문제는 멀고 가까운 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바람직한 사람, 바람직한 세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말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세상이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성실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준 없이 막연히 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말들은 모두 틀린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그곳이다.

연나라는 중국 북쪽에 있던 나라이고 월나라는 남쪽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은 서로 다른 방향이어서 겹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명제가 갖는 의미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이 명제대로라면 중심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더 비약하면 어디든 중심이라는 말이 됩니다. 지구를 봅시다. 지구의 중심이 어디일까? 북극인가, 아니면 남극인가? 사실은 내가 딛고선 이 자리가 바로 중심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는 무한합니다. 따라서 무한한 공간에서는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중심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자기 삶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중심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6.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상식에서는 오늘 갔으면 내일이나 모레 돌아와야 합니다. 사실 어제, 오늘, 내일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편의상 빈틈없이 이어져 있는 시간을 나누어 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어제에서 보면 내일이 되지만 내일의 시점에서 보면 어제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인 나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이 예의이고 5분 늦은 것이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전체 우주의 역사에서 보면 몇 만 년도 잠깐이 됩니다.




7.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상대성 원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관찰자의 위치입니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 보입니다. 이제 겨우 다섯 개 남았다는 말과 아직도 다섯 개나 남았다는 말은 내용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은 큰 차이가 납니다.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포장이 끝난 통조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반대편 끝에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소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혜시의 논리는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어버리고 한 면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8.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

'같다'와 '다르다'는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같아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돌멩이까지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다 같습니다. 그러나 돌멩이들조차도 같은 돌멩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체를 강조하면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을 침해하는 전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런 문제가 모두 관념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가변적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강조할 때도 있고 개인을 강조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고정시키면 그 나머지는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명제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고정 관념에 대한 부정인 셈입니다.




9.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둥근 고리를 풀어 보라고 하면 우리는 무슨 마술을 떠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고리를 자른다거나 부수는 것은 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둥근 고리 그 자체는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그에 앞서 부수면 안 된다는 머리 속의 고정된 생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쪼개서 책상을 만드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나무에서 보면 부수는 것이지만 책상에서 보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순다와 만든다, 푼다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고정 관념은 언제나 현실을 왜곡하거나 억누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30미터 높이의 장대를 밟고 올라서서 안 떨어지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라는 불교의 명제는 바로 발상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의 틀을 부수는 발상의 전환이 이 명제의 목적입니다.




10.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이 명제는 앞에서 본 명제들의 결론인 셈입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명제는 공간 개념의 명제들이며, 6번과 7번은 시간 개념의 명제들입니다. 그리고 8번과 9번은 현상계의 존재들과 고정 관넘에 관한 명제입니다. 혜시는 이 명제들을 통해 존재든 관념이든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차별성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이렇나 지향과 통일을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혜시는 명가(名家)에 속하는 제자 백가에 속하는 학자로서 장자(莊子)와 같은 시대의 사람이고,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으로 유명한 공손룡(公孫龍)보다 약간 앞 시대의 사람이다. 위(魏)의 혜왕(惠王)) ·양왕(襄王) 밑에서 재상이 되었으나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에게 쫓겨 초(楚)로 갔다가 후에 고향인 송나라로 돌아가서 생애를 마쳤다. 박학한 사람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는 수레로 다섯이나 되었다고 하나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없다. 그의 주장은 《장자》에서 가끔 찾아볼 수 있으며, 명가 중에서 궤변이 가장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형식과 현실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하고 치세(治世)의 이상상(理想像)을 설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네이버 지식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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