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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8-24 16:01:346004 
진수의 정사삼국지 해제
양승국


1. 삼국지의 구성과 체제

사실을 존중하던 중국인들은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고 편찬하는 것을 영예로 삼았다. 물론 사실을 존중하고 현실에 관심을 둔다는 것 자체가 역사서의 저술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서 전범을 구하는 자세와 과거의 의례나 제도를 보존하려는 복고주의적 성향은 사실(史實)을 전하려는 의도를 나타낸다. 중국 고대 역사학자들이 창조한 사서 편찬 체제는 편년체(編年體),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기전체(紀傳體)의 세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기전체는 서한(西漢)의 사마천이 편찬한 사기에서 시작된다. 기전체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전자는 시대의 순서에 따라 제왕의 언행과 행적 및 그 당시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외교 등 중대한 사건을 서술하고, 후자는 주로 전기로 이루어져 한 권의 사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또한 기전체 역사서에는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역사 기술 혹은 평가가 그 체제 속에 분산되어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무제(漢武帝)는 사마천이 역사를 저술하면서 본기에서 그의 부친 경제(景帝)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보자, 매우 노여워하며 이 두 본기를 폐기하도록 했다. 그러나 무제에 대한 사마천의 비판은 <봉선서(封禪書)>, <평준서(平準書)> 등을 시작으로 하여 열전 곳곳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이것은 역사가의 사서 편찬에 대한 진실된 의도를 독자가 알려면 책 전체를 주의 깊게 읽어나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술상의 특징은 동시대 혹은 가까운 과거를 묘사할 경우에 더욱 유효하다. 역사가는 멀리 있는 과거 시대의 것을 취할 경우는 신변에 대한 위험 요소가 거의 없지만, 그 시대, 특히 정치적 혼란이 극심한 당대에서는 자유로운 집필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 점을 절감한 역사가들은 기전체를 교묘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대혼란의 시기에 살았던 역사가들은 기전체라는 역사서술 방법을 교묘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대혼란의 시기에 살았던 진수 역시 기전체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불후의 명작 정사 <삼국지(三國志)>를 저술했다. 삼국지는 후한 말의 혼란을 시작으로 하여, 사실상 삼국정립(三國鼎立), 후한에서 위(魏)로의 선양, 촉의 멸망, 위에서 진(晉)으로의 선양, 오의 멸망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삼국지>는 총 6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이다. <위서(魏書)>는 기(紀), 전(傳)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기(紀)에는 <무제기(武帝紀)>, <문제기(文帝紀)>, <명제기(明帝紀)>, <삼소제기(三少帝紀)> 등 네 편이 있다. 전(傳)에는 후비전(后妃傳)을 앞에 두고, 마지막 한 편에는 우리 한민족을 비롯한 소수 민족에 관해 기록한 오환선비동이전(烏桓鮮卑東夷傳)이 있다. 촉서와 오서에는 전(傳)만 있고 기(紀)는 없다. 전(傳)은 순서 배열 상에 있어서 마치 하나의 독립된 기전체로 이루어진 역사책 같이 앞에는 두 나라 군주의 전기 및 촉과 오의 계승과 관련된 사람들의 전기를 두고 있다. 촉서에서는 유언(劉焉)과 유장(劉章)의 전이 가장 앞에 있고, 그 뒤에 선주전(先主傳), 후주전(後主傳)이 있으며, 이어서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이 있다. 오서에서는 손견과 손책의 전기가 앞에 있고, 뒤에는 오주전, 삼사주전(三嗣主傳)이 있다. 위서, 촉서와 다른 점은 오서는 한 편의 일반 인물의 전기를 배열한 다음 후반부에 비빈전(妃嬪傳)이 있다는 점이다. 삼국지는 구성상에 있어서 후세의 기전체 사서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첫째는 황제의 기(紀), 전(傳)의 뒤에 후비전을 둔 것이다. 이것은 한서가 외척전(外戚傳), 원후전(元后傳)으로 하여 찬탈자 왕망(王莽)의 전을 없애고 마지막에 둔 것과는 매우 다른 점이다. 아마 사기가 외척세가(外戚世家)라고 하여 한대의 세가를 맨 앞에 두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구성인 것이다.




둘째는 어떤 항목을 표제로 해서 기술한 전(傳)이 없다는 점이다. 사기에서 유림열전, 화식열전 등 표제를 중심으로 한 전(傳)이 있는 것은 그 묘사하는 시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삼국지에서는 몇몇 사람들의 전을 합치거나,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인물들을 같은 전에 넣고 있음으로 표제를 세우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직 화타(華佗) 등의 인물을 기술한 방기전(方技傳)외는 표제로 기술한 전(傳)은 볼 수 없다. 이것도 본문에서는 방기전이라고 했지만, 송간본 등의 목록에서는 기록된 다섯 명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 점은 삼국지에서 선발한 인물이 정말로 정치가나 관료들에 국한되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 삼국지는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에 비견되는 탁월한 역사서이다. <문심조룡(文心雕龍)>을 저술한 유협(劉勰)이라는 인물은 그 책의 <사전(史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나라 시대의 세 영웅에 대해서는 편년체나 기전체의 사서로 여러 가지가 나와 있지만, <위씨춘추(魏氏春秋)>와 <위략(魏略)>, 또는 <강표전(江表傳)>과 오록(吳錄) 등은 어떤 것은 감정의 고조 때문에 징거(徵據)를 잡기가 어렵고, 어떤 것은 소략하여 요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진수의 삼국지만이 실질과 수사가 융합을 이뤄 정돈과 분석이 잘 되었음으로 문(文)과 질(質)이 제대로 합치되었다. 순욱(荀勗)과 장화(張華)는 진수를 사마천과 반고에 비견했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찬사가 아니다.




2. 위정통론(魏正統論)에 입각한 집필 태도

진수가 벼슬했던 촉나라와 시종 적대 관계에 있던 위나라가 멸망한 것은 진수의 나이 30여 세 때인 서기 265년의 일이었다. 진수는 기전체의 체제에 따라 삼국의 역사를 서술하려 했으나 ,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마천이나 반고의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 상황에 있었다. 즉 위, 촉, 오 삼국의 군주가 저마다 황제라 칭했으며, 특히 후한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나라와 후한 천자와 같은 유씨 일족임을 내세운 유비에 의해 다스려진 촉이 서로 정통성을 주장했다. 중국 봉건사회에서 몇 개의 정권이 정립할 때면, 항상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됐다. 원래 천하를 지배하는 천자는 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세 명이 공존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각자 분명한 정치 채도와 사상 경향을 갖고 있으며, 사서를 편찬할 때 또한 정통 관념을 분명하게 표출시킨다. 그러면 진수는 위, 촉, 오 세 나라 중에서 어떤 나라에 정통성을 부여했는가? 진수가 정통성을 부여한 나라는 위(魏)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수는 위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촉과 오는 비정통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지에 보이는 다음 몇 가지 점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첫째, 서진(西晉)의 관리 신분이었던 진수는, 유비가 한왕실의 후예로써 자칭했음에도 불구하고 위서를 촉서나 오서보다 앞의 위치에 놓았으며, 분량면에서도 삼국지 전체의 절반을 할애했다는 점이다.




둘째, 기전체 사서의 일반적인 통례에 의하면, 위, 촉, 오 삼국의 군주는 모두 제기(帝紀)를 두어야 하지만, 진수는 위의 황제에 관한 기록은 기(紀)라 하고, 촉과 오의 군주에 대한 사적은 전(傳)이라고 하는 체제로 묘사하여 촉과 오의 제(帝)의 위치를 일반 왕후와 같이 낮췄다.




셋째, 삼국의 황제에 대한 표현 방식에 차이를 두었다. 즉 위의 황제를 제라 했지만, 촉의 황제는 선주, 후주라 하여 주(主)라고 칭했으며, 오의 황제를 주(主)라고 하고, 심지어는 그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삼국 황제의 죽음에 대한 용어 선정에 있어서도 세심하게 구분을 했다. 즉 위나라 황제의 경우 모두 붕(崩)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반면, 촉의 경우 조(殂)를 사용하고 오의 경우는 훙(薨)이라 쓴 것이다. 진수가 위를 정통으로 삼았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정권 계승 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사마씨의 서진 정권은 위나라로부터 찬탈한 것이다. 위명제(魏明帝) 사후, 당시 여덟 살인 조방(曺芳)이 제위를 계승하자, 249년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당시 실권자 조상(曺爽)을 죽이고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251년, 사마의가 죽고 그의 큰아들 사마사(司馬師)가 뒤를 이었다. 255년, 사마사가 죽자 그의 동생 사마소(司馬昭)가 권력을 계승한 다음 몇 년에 걸친 권력투쟁의 과정을 거쳐 위나라의 친위 세력을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사마씨의 왕조를 세우는데 기초를 닦았다. 265년, 사마소가 죽고 아들 사마염(司馬炎)이 승상 겸 진왕(晉王)의 자리를 이은 다음 얼마 후에 조환(曺奐)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라 하며 진왕조를 세웠다. 사마씨의 진왕조(晉王朝)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위(魏)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물론 촉을 정통으로 내세운 사서(史書)인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라는 책이 전해져 내려오고는 있다. 그러나 촉에서 벼슬까지 했던 진수가 촉을 비정통으로 삼는 것은 주위의 비난을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진수는 천하의 2/3를 점유하고 있었던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아야 한다는 기본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위를 정통으로 보고 삼국정립의 상황을 제대로 나타내 보려는 진수의 임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진수가 위를 정통의 위치에 놓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촉과 오나라에게 독립된 역사적 위치를 부여한 의도이기도 했다.




3. 배송지(裵松之) <삼국지주해(三國志注解)>의 가치

삼국지 원전 못지않게 배송지의 주해도 두드러진 업적을 갖기에 충분하다. 배송지는 그 방대한 자료의 섭렵을 통한 적절한 주석과 인용예문의 정확성과 풍부함, 문맥에 대한 시의적절한 단평을 진수의 삼국지에 가했다. 삼국지의 흥미로운 독서행위를 앞당기는 매력은 거의 원서와 동일한 분량 -어떤 이는 원서의 두세 배라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에 걸쳐 끊임없이 등장하는 주해이다. 물론 번잡스럽거나 불필요한 주해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주해는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권위를 확립시켜주는 계기를 설득력 있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배송지의 주해로 인해, 대부분의 정사가 따분하고 진부하게 도덕주의적이고 무미건조한 것과는 달리, 삼국지 자체가 흥미있는 읽을거리가 된 것이다. 즉 배송지는 그 당시 있었던 역사 사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역사가의 안목에서 재구성하였다. 그는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에 의해서 나름대로 체계화된 지식을 갖고, 정사에서 빠진 내용이나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골라 재치있는 언어 구사를 발휘함으로써 정사 외적인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삼국지주해에는 배송지 개인의 견해도 적지 않다. 특히 합리성을 존중하고, 논리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판하다는 태도로 시종일관했다. 물론 배송지의 주해가 <삼국지연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유비를 다룬 <선후전(先后傳)> 등과 같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역사적 사실이 왜곡돼있다. 이쨋든 배송지의 <삼국지주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미비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통해 유문(遺文)과 일사(逸事)를 주로 실어 재구성한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될 만한 것이기도 하다.




4. 진수의 경력과 역사편찬

진수는 자가 승조(承祚)이며 위, 촉, 오 삼국이 대립하던 시대에 파서군(巴西郡) 안한현(安漢縣) - 지금의 사천성 남충시(南充市)로 중경시(重慶市) 북 약 100키로 -을 본관으로 하여 촉나라 땅에서 서기 233년에 태어나서 297년에 죽은 사람이다. 진수 부친의 이름은 알 수 없다. 단지 촉나라 마속(馬謖) 휘하에서 참군(參軍)으로 있다가, 마속이 참수 당하자 제갈량에게 머리를 깎이는 곤형(髡刑)을 받는 불명예스러운 사적만이 전할뿐이다. 진수가 태어난 촉 땅은 삼국시대에 앞서 한대의 사마상여(司馬相如), 엄군평(嚴君平). 양웅(揚雄) 등 유명한 문학자나 사상가들을 배출한 풍요로운 문화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진수의 나이 31세 때 촉은 위에 정복되었고, 그 위(魏)도 수년 후에는 진에게 빼앗겨, 진수는 망국의 백성이 되었다. 진수는 일찍이 같은 군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초주(譙周)에게 수학하면서 상서(尙書), 춘추(春秋),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을 읽었고 글을 잘 지었다. 초주는 촉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대표적인 역사학자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정도로 촉나라의 학술의 전통이 된 참위설(讖緯說), 예언기(預言記)를 주체로 하는 신비사상에도 정통했다. 진수는 촉서(蜀書)에 초주전(譙周傳)을 두어 ‘초주는 사리에 통하는 세상의 뛰어난 유학자로 동중서(董仲舒)나 양웅(揚雄)의 수준에 이르렀다.’라고 기술하며 극찬했다. 진수는 초주를 촉나라의 태학에서 만났다. 그 당시 태학은 한경제(漢景帝) 때 촉군태수 문옹(文雍)이 성도에 세운 학당으로, 후주시대에 이르러서는 초주가 익주권학종사(益州勸學從事)가 되었고, 또 전학종사(典學從事)가 되어 주관했다. 그러나 초주에 대한 후세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위(魏) 경원(景元) 4년, 서기 263년 등애(鄧艾)가 이끌던 위나라 군대가 국경을 뚫고 들어와 촉나라를 공격했을 때 그는 후주 유선에게 항복을 적극적으로 권유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진수는 촉한 때 일찍이 위장군주부(衛將軍主簿), 동관비서랑(東觀秘書郞), 산기황문시랑(散驥黃門侍郞)이 됐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해 환관들이 전힁하는 것을 보고는 조정에 나가지 않아 결국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질병이 있어 시비에게 환약을 만들어 오도록 했는데, 이는 당시의 봉건 예교의 규범에 따르면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향당(鄕黨)으로부터 폄하를 받게 되었다. 촉한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배척을 받아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사마염이 정권을 탈취하여 진나라를 세웠을 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당시 사공(司空) 장화(張華)는 재능 있는 자를 아끼는 사람으로 진수의 자질을 십분 이해했다. 진수는 곧 효렴에 추천되고 파군중정(巴郡中正), 좌저작랑(佐著作郞),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진수가 삼국지 편찬작업을 완성하자, 장화는 그의 학식과 인품에 대해 감동한 나머지 그를 중서랑으로 승진시키기 위해 추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평소에 장화를 미워하고 시기했던 순욱(荀勗)이 장화의 극진한 총애를 받고 있던 진수에게도 불만을 갖게 되었다. 게다기 <위서(魏書)> 기술 내용이 순욱의 견해와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순욱은 진수를 더욱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그 결과 진수는 중서랑이 아닌 장광태수(長廣太守)가 되어 외지로 부임하게 했다. 장광군(長廣郡)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벽지였다. 그래서 진수는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관직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후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가 수도를 떠나 부임할 때, 진수의 지식이 깊고 넓음을 알고 표를 올려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추천함으로 해서 그는 다시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황제는 진수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공로를 치하하며 치서어사(治書御史)로 임명하여 황제 곁에 두었다. 이것은 진수가 일생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은 것이다. 후에 모친이 세상을 떠났음으로 관직을 버렸다. 그이 모친은 임종하면서 시신을 수도 냑양에 매장하라고 유언했다. 진수는 유언에 따라 처리하여 세인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들은 모친을 고향 촉 땅에 매장하지 않은 것은 예교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진수는 또다시 향당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기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병사했다. 진수는 이처럼 평탄하지 못한 일생을 살아왔지만,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 50편, <관사론(官司論)> 7편, <석휘(釋諱)>, <광국론(廣國論)> 등을 편찬하여 후대의 사학연구의 초석을 마련했다.




5. 삼국지의 여인들

1) 견황후(甄皇后)와 곽황후(郭皇后)

<역경(易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남자는 집 밖에서 바른 위치를 얻고, 여자는 집안에서 바른 위치를 얻는다. 남자와 여자가 바른 위치를 얻으면, 천지의 대의에 합치되는 것이다. 삼국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남성들이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세계 속에서 끼여 희생적인 생활을 하는 미미한 존재였다. 위문제 조비(曺丕)의 후비였던 견부인(甄夫人)과 곽후(郭后)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과거 역사를 창조한 주체는 남성이고, 역사서는 거의 남성들의 세계였다. 개인의 개성과 행동을 기록하는 전기가 한 여성을 위해 씌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위서(魏書)> ‘ 후비전(后妃傳)’도 그녀들의 개성을 자세하게 기록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견부인은 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끊이지 않는 혼란의 연속선상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비극적인 여성이다. 그녀는 황건의 난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2년에 태어났다. 한나라 태보(太保) 견감(甄邯)의 후예이며 집안 대대로 2천 석의 녹을 받는 벼슬을 지냈다. 아버지 견일(甄逸)은 당시 상채(上蔡)의 현령이었다. 견황후는 3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부유한 집에서 성장한 그녀는 북방의 영웅 원소(袁紹)의 차남 원희(袁熙)에게 시집을 갔고, 후에 원희가 유주태수(幽州太守)로 지방에 있게되자 업(鄴)에 남아 그 모친을 모셨다. 그녀의 운명은 관도(管渡) 싸움에서 원소가 조조에게 패했을 때부터 바뀌게 되었다. 조조를 따라 업까지 원정 나온 조비가 이전부터 소문을 듣던 절색의 견부인을 찾아 마음에 두었던 것이다. 조조가 나라를 세워 처음으로 왕후를 정하고 그 아래에 부인(夫人), 소의(昭儀), 첩여(婕女), 용화(容華), 미인(美人)의 다섯 등급을 두었다. 이어서 위문제(魏文帝) 조비(曺丕)가 이 다섯 등급에 귀빈(貴嬪), 숙원(淑媛), 수용(脩容), 순성(順成), 양인(良人)을 더했고 다시 위명제(魏明帝) 조예(曺叡)는 숙비(淑妃), 소화(昭華) 수의(脩儀)를 더하고 순성(順成)을 뺐다. 태화(太和) 연간에 처음으로 부인의 명칭을 회복시키고 그 서열을 숙비보다 높은 위치로 올리도록 명했다. 부인 이하의 작위를 모두 12등급으로 하고 귀빈과 부인을 황후 다음에 두었으나 그에 상당하는 작위는 없었다. 그 당시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패자의 처와 첩을 취하는 일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여성들이 금은이나 무기와 같이 일종의 전리품 취급을 받았음을 뜻한다. 삼국지에는 지아비가 죽은 후 재가를 거절하여 자살한 여성을 찬탄한 글이 많이 실려 있다. 그러나 부득이 두 남편을 섬기게 된 여성을 결코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주군을 바꾼 신하가 불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고, 과부나 홀아비가 증가하고, 경제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시대에는 혼자 살아가는 것을 덕으로 장려할 수만은 없었다. 조조가 원소를 멸망시키자, 공융은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주무왕이 은의 주(紂)를 토벌했을 때, 주(紂)의 총비(寵妃)인 달기(妲己)를 동생 주공(周公)에게 주었습니다.’라고 했다. 조조는 공융의 학식이 넓었음으로 이 말을 어떤 책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후 그는 견부인을 자기 아들인 조비에게 주었다. 당시 견부인은 23세였고, 조비는 18세였다. 견부인은 조비의 총애를 받았고, 그의 장자를 낳았지만, 황후로 책봉되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는 곽후가 대신 앉았다. 곽후는 견부인보다 두 살 아래였으며,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전란으로 떠돌다가 몸을 의탁하기도 했는데, 조조의 눈에 띄어 조비에게 주어졌다. 그녀는 처음부터 조비 측근에서 총애를 받는 첩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그녀가 황후로 세워지기까지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는 명제를 낳은 견부인의 존재이고 둘째는 곽후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신하들의 반대였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견부인의 죽음에 대해 곽후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비와 조식이 태자의 자리를 두고 다툴 때, 조비가 조식에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곽후가 짜낸 지략에 의한 것임을 볼 때, 곽후는 견부인을 궁지에 몰아넣고도 남을 여인인 것이다. 견부인이 죽은 다음해, 문제는 곽후를 황후로 세우려 했다. 그때, 신하들은 상주하여 ‘ 첩으로 부인을 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춘추(春秋)의 말을 인용하여 ‘ 지금 후궁의 대열에 들어선 첩들은 항상 수레를 타는 제왕의 지위에 근접해 있습니다. 만일 총애 때문에 이런 사람 중에서 황후에 오르게 한다면, 비찬한 사람이 갑자기 고귀한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후세에 아랫사람이 제왕을 능멸하여 제왕의 권위가 떨어지고 전제(典制)가 느슨해지고 법도가 없어져서 화란이 위로부터 일어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신하의 눈으로 보아도 곽후는 황후가 될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비는 신하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곽후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고, 견부인의 아들 조예를 양자로 삼도록 했다. 문제는 임종이 다가옴을 느끼자, 사랑하는 비 곽후의 장래가 불안했다. 황자들이 너무 어리고 힘이 없어 그녀를 돌볼 수 없었음으로 죽기 며칠 전까지도 견부인의 아들인 명제를 태자로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사사로운 감정을 누르고 위왕조의 안위를 위해 명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문제는 재위에 오른 지 불과 5년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곽후의 운명은 이때부터 비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생모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계모에게도 효행을 다해야만 했다. 또 첩의 아들은 본처를 적모(嫡母)라고 해서 생모 이상으로 존중할 것을 강조했다. 명제의 경우, 양모이며 적모인 곽후가 생모를 죽인 여성이었다는 것이 불행이었으며, 곽후에게도 불운이었다. 그때까지 겉으로는 곽후에게 예의를 갖추어 응대했던 명제도 부친의 죽음과 함께 견부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드러냈다. 제위에 오른 후에는 생모에게 문소황후(文昭皇后)라는 시호를 추증했고, 곽후에게는 생모를 죽인 것을 힐문했다. 곽태후는 그 때문에 걱정하다가 급사했는데, 혹은 명제에게 살해됐다고 전하기도 한다. 명제는 견부인이, 총애가 곽후에게 옮겨지는 것을 질투한다는 이유로 해서 죽음을 명 받아 장례의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었기 때문에 곽후의 장례의식 또한 견부인과 똑같이 하도록 했다. 명제는 즉위한 후 문제 사후의 틈을 타서 침공해온 오와 촉을 무찌르고, 국내의 반란 등을 제어하는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화로운 궁전을 지어 수천 명의 궁녀와 창기를 두어 향락적인 생활에 빠져들었다. 명제는 그의 아들딸들이 잇따라 요절하여 후사가 끊어진 것을 절망하면서 죽은 생모인 견부인에 대해 추모했다. 게다가 문제의 전철을 밟아 정부인 우씨(虞氏)를 버리고 애첨 모씨(毛氏)를 황후로 삼았으며, 후에 또 총애가 곽씨로 옮겨졌고, 그 곽씨를 질투한다는 이유로 하여 모후(毛后)에게 죽음을 내리고 곽씨를 황후로 세웠다. 물론 시집가기 전에는 부친의 소유였고, 출가한 후에는 남편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왕조에 있어서 황후의 지위는 중요하며, 가볍게 폐위할 수 없는 법이다. 후궁의 질서는 나라의 기본이며, 첩이 본처를 능멸하는 일은 어느 왕조가 되었던 그 사회의 기본적인 질서가 무너짐으로 해서 결국은 이 때문에 위왕조는 멸망할 것이라고 우(虞) 부인은 예언했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위나라는 명제 사후 27년에 그 신하인 사마의(司馬懿) 일족에게 망했다.




2) 촉나라 유비(劉備)의 처 감부인(甘夫人)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이 속한 남성의 운명에 따라 부침하며, 역사의 흐름 속에 묻혀 살았다. 유비의 처, 감부인은 미미한 존재로써 종속적 여성의 전형이었다. 유비는 한의 중산정왕(中山靖王)의 마지막 후예라고 자칭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익주(益州)를 손에 넣어 자기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어려운 처지가 생기면 조조, 원소를 비롯한 실력자들 사이를 오갔음으로, 그를 따라 행동하는 처자식은 많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지에 이름이 보이는 유비의 처는, 유비의 뒤를 이은 유선(劉禪)의 모친 감씨, 미축(麋竺)의 여동생 미씨, 손권의 여동생 손씨, 그리고 유언(劉焉)의 아들 유모(劉瑁)의 미망인 오씨 등 네 명이다. 이밖에 유영(劉永)과 유리(劉理)의 모친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음으로 두 사람은 신분이 낮은 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감부인은 유비가 예주목으로 있을 때 첩이 되었고, 미부인은 유비가 처음 여포에게 체포되어 곤궁한 처지가 되었을 때, 미축이 막대한 경제원조와 함께 준 여동생이다. 유비가 절대절명의 어려운 순간이 닥칠 때마다 처자식을 버렸다. 맨 처음에는 여포의 포로가 되었을 때이다. 원술 토벌을 위해 유비가 서주를 떠난 틈을 타서 여포가 공격했다. 그때 유비는 곤궁한 끝에 여포에게 화해를 구하고 돌아왔다. 그후 다시 여포의 공격을 받았는데, 유비는 혼자 도주하고, 처자식은 여포의 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 당시 유비의 가족들 신변보호를 책임자였던 장비가 그 책임을 지고 죽음으로써 사죄하려고 하자, “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식은 옷과 같다.”라고 하면서 처자식의 존재 가치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후에 다시 유비가 “조조를 토벌하라!”는 헌제의 밀명을 받자 그 정보를 입수한 조조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소패(小沛)의 유비를 토벌했을 때, 유비는 싸움에 패한 결과 혼자 원소에게로 달아났고 남은 처자식은 관우와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후의 경과에 대해서 진수는 기록하지 않았는데,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관우와 감부인 일행은 조조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고 이어서 유비에게 다시 돌아갔다고 했다. 장판(長坂)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감부인은 유비가 익주를 손에 넣기 전에 죽었다. 삼국지에서는 그녀의 출생도 즉은 날도 적지 않고 있다. 이것은 진수가 생략했을 수도 있지만, 그녀와 관련된 역사적 자료가 없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6. <오서(吳書)>의 세계

삼국지 <위서(魏書)>에 묘사된 것이 법가(法家)의 세계이고, 촉서(蜀書)가 유가(儒家)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면, <오서(吳書)>는 무인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세 나라가 각각 갖추고 있는 특징은 그 나라의 군신관계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조조가 신하들의 능력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자신의 수족으로 삼아 십분 기용한 예라든지, 유비가 신하들의 개인적인 은의(恩義) 관계를 중요시하며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기본방침으로 삼은 예는 대조적인 면이 있지만, 양자는 군신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에 비해서 오나라에서의 주군과 신하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군신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나라를 개국한 손씨는 조조처럼 후한 왕조의 권력자의 자손도, 유비처럼 한왕실의 피를 이어 받지도 않았다. 손씨 집안은 당시 아직 미개한 요소를 갖고 있던 강동의 토착호족 중 하나였다. 비빈전(妃嬪傳)에서는 손견이 소주(蘇州)의 오씨 딸이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아내로 맞으려고 했을 때, 오씨 친척들은 손견의 경박하고 교활함을 들어 모두 반대했다. 그렇지만 손씨가 오나라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강동 호족의 힘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손견의 손씨 종족의 지도자로의 인간적인 매력이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다. 그 집단은 원래 정치제도 속에 고정된 군신관계와는 무관하다. 이 점은 특히 삼국지 <오서(吳書)>에 잘 나타나 있다. 가령 손견과 손책이 다 같이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손견은 형주의 유표를 토벌하는 도중에 혼자 말을 달려 산 속으로 들어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고, 손책은 오군태수 허공(許貢)의 식객에 의해 죽었다. 손책은 허도를 급습하여 한의 황제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영접할 준비를 하다가 예전에 손견에 의해 살해된 허공의 부하들에게 죽은 것이다. 손권의 경우는 천수를 마치긴 했지만, 부친이나 형과 똑같이 주군의 신분임에도 그다지 안전을 중시하지 않고 위험한 곳에 몸을 두었다. 예를 들어, <오서(吳書)> 장소전(張昭傳)을 보면, 손권은 말을 달려 호랑이 사냥을 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어떤 때는 호랑이가 손권이 타고 있던 말을 향해 달려 어 위험에 빠질 때도 있었다고 했다. 장소가 그런 위험한 행동을 멈추도록 간언했지만, 손권은 말을 수레로만 바꾸어 호랑이 사냥을 여전히 즐겼다. 손권에게도 이러한 만용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오나라 초창기에는 주군관계가 위나 촉과 같이 제 위치를 찾지 못했음으로 서로간에 두터운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오나라가 성립되자 손권과 무장들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나라 주군과 무장들의 특징적인 관계는 이 나라의 병제(兵制)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나라 무장들은 직접 병사를 모집하거나, 손씨로부터 병사들을 받아 그 병사들을 자신들 소속으로 해서 평상시에는 농경에 사용하고, 일이 있으면 직접 병사를 지휘해 전투에 참가했다. 무장이 죽으면 아들이나 동생이 그 수하에 있는 병사들을 물려받았다. 그래서 오나라 병사들은 무장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다분했으며 위나 촉에 비해, 오나라 무장들이 지휘하는 군단은 독립성이 강했다. 손권 말년에는 태자 손화와 노왕 손패의 다툼으로 오나라의 유력자들은 파별을 형성하여 항쟁하게 되어 오나라를 쇠망하게 했던 것이다.




7. 삼국지의 기초적 사료(史料)

진수는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상당한 역사자료에 의지했다. 위문제(魏文帝) 황초 연간과 위명제(魏明帝) 태화 시기에는 위기(衛覬)와 무습(繆襲)에게 기전체의 위사(魏史)를 편찬하도록 명령을 내렸는데, 당시 몇 해에 걸친 작업에도 불구하고 완성시키지 못했다. 이에 위탄(韋誕), 응거(應璩), 왕침(王沈), 완적(阮籍), 손해(孫該), 부현(傅玄) 등에게 명하여 그 작업을 계속하여 완성하도록 했다. 후에 왕침이 수사(修史) 작업을 계속하여 위서(魏書)를 완성했다. 이것이 위나라 왕조에 관한 최초의 정사기록이다. 이 위서(魏書)를 사통(史通)의 고금정사(古今正史)와 구당서(舊唐書)의 경적지(經籍志)에는 44권, 수서(隋書)의 경적지(經籍志)에는 48권, 신당서(新唐書)의 예문지(藝文志)에는 47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의 동일한 시기에 경조(京兆) 사람 어권(魚眷)이 개인의 신분으로 위략(魏略)을 완성시켜 위명제까지의 일을 기록했는데 왕침의 위서와 마찬가지로 기전체로 이루어졌다. 위략은 원위략(原魏略)에 근거했다고 하며, 전략(典略)과 마찬가지로 산일(散逸) 되었으나, 그 일문(逸文)은 다행히 배송지의 주(注)에 기록되어 일부나마 전하게 되었다. 다만 전략은 삼국지의 위서를 비롯하여 촉서, 오서에도 많이 인용되고 있으나, 동이전(東夷傳)에는 인용되지 않고 있다. 위략은 위나라에 관한 기록인데, 위의 건국 이전에 대한 기록이 절반을 차지한다. 또한 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동이전뿐만 아니라 남만과 서융도 다루고 있다. 손권은 재임 후반기에 정부(丁孚), 항준(項峻) 등에게 오서(吳書) 편찬을 명했지만, 그들은 사학(史學)에 대한 재능 부족으로 그 작업을 완성할 수 없었다. 소제(少帝) 손량(孫亮) 때에 다시 위요(韋曜), 주소(周昭), 설보(薛寶), 양광(梁廣), 화핵(華覈) 등에게 과거의 일을 찾아 공동으로 저술하도록 하여 오서 55권을 만들게 했다. 이 오서에서는 위요의 이름이 앞에 있지만, 사실은 오나라 사관들이 써내려 온 오왕조의 역사를 위소가 최종적으로 엮은 것에 불과하다. 그는 오나라 제일의 학자이며 문장가이고 또 역사가였으며, 국가의 예의제도에도 상세했음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에 중임을 감당했다. 진수는 삼국지 오서를 집필하면서 오서의 원문을 끄집어내어 간결하게 적고 있다. 진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쓰여진 상주문이나 조서나 편지 등을 전기 속에 상당 분량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진수의 역사 집필의 기본 체제이다. 가령 육개(陸凱)의 상소문 이십사(二十事)를 육개전(陸凱傳)에서 인용했는데, 진수 자신은 이 상소의 진위에 의문이 있었지만, 손호(孫皓)의 악행과 그 시대를 가장 잘 상징하고 있었음으로 그 문장을 육개전(陸凱傳) 마지막에 넣은 것이다. 위와 오 두 나라 사학가들이 편찬한 당대 역사는 분량이 방대하고 내용이 풍부하여 진수는 삼국지를 지으면서 위와 오에 관한 부분에 많은 자료를 참조했다. 그러나 촉에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사관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수는 촉서를 집필하면서 의지할 만한 역사서가 없었다. 그러나 진수는 그 자신이 촉나라 사람이었고, 또 촉나라에서 관리 생활을 했음으로 당대의 중대한 역사사건을 직접 보고 들었고, 해당 통치자들의 경력을 누구보다도 잘았으며, 그 시대의 전장제도에도 익숙했다. 게다가 그는 <제갈량집(諸葛亮集)>을 편집, 정리했음으로 제갈량에 대해 심도 있는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촉의 역사를 저술하는 데 하나의 중요한 맥락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진수는 벼슬에 있으면서 앞뒤로 사관의 직책을 담당했었다. 가령 촉에서는 동관비서랑(東觀秘書郞)을 지냈고, 진(晉)에서는 좌저작랑(佐著作郞)과 저작랑(著作郞)을 지냈다. 이런 직책들이 진수에게 국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적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다. 사서를 편찬할 때는 대량의 자료를 갖춘 이후에 성공의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개인적인 사학재능이다. 삼국과 진조(晉朝) 초기의 사학자들 세계에서 진수의 명성은 혁혁했다. 진서(晉書)의 진수전(陳壽傳)에 다음과 같은 평론이 실려 있다. 좌구명(左丘明)이 죽자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태어나 서경(西京)에서 붓을 휘둘러 동관(東觀)에게까지 곧장 달려갔다. 이후 그들의 사업을 이었던 사람은 오직 진수 한 사람뿐이었다.




8. 삼국지의 결점과 역사적 가치

삼국지 역시 중국 역사상의 다른 역사책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결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지(志)가 없다. 기전체 역사서는 바로 기(紀)와 전(傳)이 주체가 되지만 지(志)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경제제도, 화폐제도, 지리, 천문과 율력, 예악, 형법 등과 같은 전제(典制)는 모두 지(志) 속에 기술될 내용이며, 이것은 한 시대의 중대한 사회적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며, 후대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연구의 기초자료가 된다. 기전체 사서의 창시자였던 사마천은 사기에 팔서(八書)를, 반고는 한서(漢書)에 십지(十志)를 넣었다. 그렇지만 진수의 삼국지에는 지(志)라는 부분이 없다.




둘째, 기술 방법이 비교적 간단하다. 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진수가 역사를 정리하면서 사료의 부족함으로 인해 곤욕을 치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건안문단(建安文壇)의 중요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서간(徐干), 진림(陳琳), 응창(應瑒), 정의(丁儀), 정이(丁廙) 등에 대한 전문적인 전(傳)이 없다는 점이다. 위서, 촉서, 오서를 비교해 볼 때, 특히 촉서의 내용이 가장 간략하다. 이것은 촉에서는 사관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믿을 만한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장 유력하다.




셋째, 문장 구성면에 있어서 질박함은 남음이 있지만, 문채는 부족하다. 이 점은 사기, 한서와 비교해 볼 때,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다. 이는 저자 진수가 개인의 사견과 사감을 억제하고 가능한 사실을 기술하는데 정확성을 기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듯한데, 이 역시 촉서의 경우에 특히 두드러진다. 이를테면 유비가 당양의 장판에서 조조의 군대에 무너져 처자를 버리고 도주할 때, 맹장 조운이 후주 유선과 그 생모 감부인을 구한 일은 삼국지연의에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만 정사 삼국지에는 겨우 스무 글자 정도로 간결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몇 가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사로 쓰여진 삼국지는 매우 세련되고 교양있는 독자들을 상대로 하고 있는데, 직접적이고 명쾌하고 때로는 명료한 문장을 구현하면서 흥미진진한 역사 서술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 점은 소설 삼국지연의와 비교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는 갖가지 다양한 인물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과 견해를 거의 완벽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진수가 전기작가로서의 면모를 가진 역사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요컨대 삼국지는 역사서술이면서도 서술자의 주관적 정서와 의식이 상당히 자리매김 되어있다. 대체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듯한 상황이 저자의 표현기교에 의해 재구성되는 것이 바로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는 중국 정사의 관행이 예외 없이 구현되고 있다. 따라서 역사를 단순한 기술의 차원으로 본다면, 삼국지의 독서 행위에 전혀 이롭지 못할 것이다. 삼국지가 풍부한 표현력과 다양한 기법, 흥미진진한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역사 서술과 문학적 표현의 일체감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의 변치 않는 본질은 이야기에 있다. 뼈 둘레에 살이 붙어 있고 피가 흐르듯 이야기의 주변에 많은 상이한 것들이 모여 있어야 한다’라고 한 서양의 한 역사가의 말은 타당성이 있다.




<출전 정사삼국지 서문-신원문화사간 김원중님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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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6-07-31
[] 제갈공명의 남만 정벌로

삼국지 후반부의 칠종칠금의 무대가 되는 남만은 지금의 귀주성과 운남성에 해당한다.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3-16 16:13:05 위진남북
양승국 04-11-27
[] 서진(西晉) 강역도

촉을 병합한 조위로부터 정권을 찬탈한 후 오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서진의 강역 1) 서진의 성립 위나라 명제시대는 군주독재권이 강화되
양승국 06-06-07
[] 동한말 농민 기의도

동한 말 황건적과 농민 기의도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3-16 17:11:48 위진남북(으)로 부터 이동됨]
양승국 05-03-15
[] 위나라의 멸촉전쟁 전개도

서기 263년 촉나라는 위나라에 의해 멸망당함으로써 삼국시대는 끝을 맺고, 이어서 위나라의 국권을 탈취한 사마씨의 서진왕조에서 의해 오나라가 서
양승국 04-12-01
[] 삼국정립도

혼란에 빠진 중국의 대부분은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변경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천에는 촉, 양자강 이남의 강남은 오나라가 차지하여 중국 천하는 3
양승국 04-12-01
[] 서기 221년 촉오의 이릉싸움

유비가 관운장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공격할 때 동원한 군사의 수는 삼국지에는 60만 대군이라고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약 10만 정도에 이에 대
양승국 04-09-07
[] 원소와 조조의 관도싸움

관도지전(管渡之戰) 서기 199년 가을 조조(曹操)는 휘하의 일부 군사를 황하 남안의 군사 요충지 관도(管渡)에 파견하여 보루를 건설하여 향후 벌
양승국 04-11-27
[] 적벽대전

북중국을 통일한 조조가 남중국을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여 형주를 점령하고 그 기세로 오나라로 진군하다가 적벽에서 촉오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이로
양승국 04-11-27
[] 비수대전 전개도(383년)

비수(淝水)는 지금의 안휘성(安徽省)을 동서로 관통하여 흐르는 회하(淮河)의 지류이다. 저족(氐族)이 세운 전진(前秦)의 왕위를 계승
양승국 04-11-27
[] 제갈량의 북벌로

제갈량의 북벌로
양승국 04-12-01
[] 제갈공명의 촉한이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이유

-삼국의 국력 비교- 1) 삼국의 영토 먼저 영토에서는 조위가 가장 광대하여 9개 주와 형주의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동오는
운영자 0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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