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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7-08 09:32:265299 
수와 당의 시조가 모두 만주 선비족 출신이라면?
운영자

Founders of the Sui and Tang Dynasties

수 나라 시조 양견은, 명확하게 선비족 출신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만주의 선비족이 세운 북위, 서위, 북주 등을 대대로 섬겨온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양견의 아내인 문헌황후는, (拓跋鮮卑) 북위의 황실 및 대 호족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온 선비 씨족 출신인 독고신(獨孤信)의 딸이다. 독고신은 우문선비(宇文鮮卑) 씨족의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서위(후에 북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독고신의 맏딸은 북주의 첫 번째 황제인 (宇文泰의 아들) 명제와 결혼을 했고, 일곱 번째 딸은 수 문제와 결혼을 했고, 넷째 딸은 당 고조 이연(李淵)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이씨 가문은 (후에 당 조정이 漢族 명문가의 후예로 조작을 했지만) 선비족 혈통의 씨족 이었다 (Wechsler, 1979: 151) 이연의 할아버지는 북위의 유명한 장수의 후예이며, 우문태가 자립하여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워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이연의 모친과 수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인 것이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 Sui in 609 Twitchett (1979: 129)

수(隋)와 당(唐) 시조(始祖)들의 혈통을 추적


수와 당의 시조가 모두 만주 선비족 출신 이라면?



홍원탁 (서울대 교수)



선비족의 언어를 배우는 북중국 한족(漢族)들



북위(北魏, 386-534)는 서위(후에 北周가 됨)와 동위(후에 北齊가 됨)로 갈라졌다. 변경지역의 한족들 대부분은, 초원 지역에서 왔건 삼림 지역에서 왔건 그 당시에 우세한 종족에 빌붙어서 삶을 영위하였다. 이들 한족들의 전형적인 처신을 확인해주는 중국의 자료들이 있다. 북제 (550-77) 시대에 쓰여진 기록 중, “조정의 사대부(士大夫) 하나가 나에게 어느 날 ‘내게는 이미 17살이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서신과 공문서 작성을 꽤 잘한다. 나는 지금 그에게 선비족의 언어와 비파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 아들이 이런 것들을 잘 배워 조정의 공경(公卿)들에게 쓸모가 있게 되면 그들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내 아들이 이런 것을 배우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는 기록이 있다.
1



선비(鮮卑)적인 요소가 가장 강하게 남아있던 서위는 557년에 북주가 되어, 577년에는 북제를 멸하고, 579년에는 진(陳)의 강북 땅을 빼앗아, 잠시 북중국을 재통일하였다. 수(隋, 581-618) 왕조는 우문선비 북주의 후계자로서 천하를 통일 한 것이다.

수의 중국 본토 통일과 돌궐 연맹체의 출현

402년, 몽골은 유연(柔然) 카간의 영도 하에 중앙집권적 국가를 세웠으나, 북위는 국경지대에 대규모의 수비대를 주둔시킨 다음, 오히려 몽골을 침략하여 양껏 사람과 가축들을 잡아갔다. 탁발선비 조정은, 494년에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고 완전히 중국화되어 버린 후에야 비로서 유화정책을 채택하기 시작하여, 몽골의 지배자와 (처음에는 유연의 제후 노릇을 하던) 돌궐족에게 뇌물을 바치기 시작했다. 2

유연의 몽골은 결국 552년에 돌궐에 의해 멸망되었다. 알타이산맥 인근 지역에서 유래하는 이 돌궐 족들은 6세기 말에 이르러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돌궐은 훗날 카라코룸이 위치하게 되는 오르콘 강 상류에 도읍을 정하고, 카간이라는 황제칭호를 사용하였다. 서돌궐은 그보다 낮은 야브쿠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제국을 알타이 산맥으로부터 페르시아와 카스피해까지 넓혔다. 중국 본토가 수 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어갈 즈음, 북방 전선에는 돌궐 연맹체가 형성되어, 마치 한 나라가 흉노를 대치했던 상황을 연상하게 되었다. 3

선비족 왕조를 섬기던 가문 출신으로 선비족 아내를 얻은 수 문제(文帝) 양견(楊堅)

수 나라를 세운 양견은, 선비족의 북위, 서위(535-56), 북주(556-81) 등을 대대로 섬겨온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양견의 아내인 문헌(文獻)황후는, 북위의 황실 및 대 호족들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어온 선비 씨족 출신인 독고신(獨孤信)의 딸이다. 독고신은 우문태(宇文泰)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우문태가 (文帝를 옹립하여, 후에 북주가 되는) 서위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독고신의 맏딸은 북주의 첫 번째 황제인 (우문태의 아들) 명제(明帝: 557-60)와 결혼을 했고, 일곱 번째 딸은 수 문제(581-604) 양견과 결혼을 했고, 넷째 딸은 당 고조(高祖, 618-26) 이연(李淵)의 아버지와 결혼을 하였다. 4

양견이 581년에 북주를 인수하였을 당시에는 선비족 혹은 선비족과 혼혈관계를 맺고 있는 군(軍) 귀족 씨족들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Twitchett(1979: 81)에 의하면, “북주의 고위 관료 중 65%는 비한족 출신이었다. 수 문제 자신도 이러한 체제하에서 성장하였으며, 그의 친구들과 최 고위 참모들 대부분은 바로 이 비한족 집단 출신이었다.”

수 문제는, 589년에 중국 전체를 통일하자, 북위 말기 이래 막대한 양의 비단을 돌궐 카간에게 바쳐오던 관행을 중단시키고, 초원지대에서의 내부적인 반목과 분열을 적극 조장하였다. 중국 본토는 통일이 되었는데, 돌궐족은 내분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5 수 문제는, 단순히 내분을 교묘히 조작하는 방법으로 돌궐 세력을 분열시키면서, 말을 안 듣는 칸들은 제거하고 나머지 칸들은 신속(臣屬)시킬 수 있었다.

고구려는, 한나라 때 고조선 모양, 요하 동쪽의 만주뿐 아니라 한반도 북부도 차지하고, 수도를 평양에 두었다. 고구려는 먼저 수 나라에 적대행위를 취해, 요하를 건너 공격하였다. 수서(隋書)에 의하면,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에 1만 명의 말갈 기병을 이끌고 영주(榮州, 朝陽)를 공격한 것이다. 6

598년, 문제는 30만 명의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막내 아들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에 대대적인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 원정에서 살아 남아 고국으로 돌아간 수 나라 군대는 20%도 되지 않았다. 605년, 양제(煬帝, 604-18)는 돌궐족 2만 명을 보내 거란족을 쳐부순 다음, 고구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복종하지 않으면 돌궐족을 동원하여 공격 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607년에 돌궐족의 지휘본부를 방문했을 때, 양제는 카간이 고구려에서 온 사신과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7 양제는 서둘러 항주로부터 북경 근처까지 대 운하를 확장하였다. 611년, 수 양제는 (백만 명이 넘었다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대와 막대한 보급물자를 집결시킨 다음, 자신의 불운을 탓하게 된 요동 공격을 개시했다.

요하 동안(東岸)을 따라 설치된 고구려 요새들은, 늦여름의 장마가 시작되어 수 나라의 군사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버텨냈다. 수 나라 군대가 요동성(지금의 요양)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양제는 수 나라 원정군의 1/3인 30만 명을 떼어 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수 나라 군대는 을지문덕 장군의 계략에 말려들어 살수(청천강)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왔던 30만 명의 수 나라 군대 중에서 살아 돌아간 숫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양제는 요동성의 포위를 풀고 낙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8

613년에 수 나라 군대는 다시 요하를 건넜으나,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양제는 또다시 철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614년에 양제의 군대가 세 번째로 요하를 건넜으나, 이번에도 고구려 요새들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는 네 번째로 원정을 떠나기 위해 군에 동원령을 내렸으나, 이미 전국이 반란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매번 거듭 패할 때 마다, 고구려 정복에 대한 양제의 집념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든 출정이 너무나도 비참하게 끝났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전쟁으로 피폐한 제국 자체가 멸망하게 되었다. 9 강력했지만 단명으로 끝난 수 왕조(581-618)는 당 왕조(618-906)로 대체되었다.



















▲ Koguryeo An-ak Tomb No. 3

수 문제의 조카이며, 수 양제의 사촌인, 당 고조 이연(李淵)

Wechsler(Twitchett, 1979: 150-1)에 의하면, 이연(당 고조, 618-26)은 선비족 혈통의 이씨 가문 출신이었다. 이연의 모친과 수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였다. 이연은 수 문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양제의 사촌으로, 당시 가장 세력이 큰 장수들 중의 하나이었다. 이연의 할아버지인 이호(李虎)는, 북위의 유명한 장수의 후예이며, 557년에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운 팔주국(八柱國, 우문태가 556년에 죽기 직전에 자립을 시도할 때 가담한 장수들) 중 한 명이 되어, 558년에는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이연은 할아버지 이호의 당국공 칭호를 물려받았다. 그 당시 이씨 씨족들은, 북위가 오늘날 대동(大同)이라 부르는 지역 부근에 설치한 수비대의 주둔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지역은 바로 우문태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문헌황후 언니의 아들인 이연은 일찍부터 남이 따를 수 없는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원(太原) 수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이연은, 돌궐의 카간과 밀약을 맺은 다음, 큰아들 건성(建成, 후에 황태자로 임명)과 둘째 아들 세민(世民, 후에 형을 죽임)을 데리고 태원에서 군대를 끌고 나와 수 나라의 수도를 점령했던 것이다.

구당서에 의하면, 이연은 동돌궐 카간 시피의 지원을 구할 때 “사람과 영토는 당국공인 나에게 속하지만, 모든 재물, 비단, 금은보화들은 돌궐에 귀속된다”고 선언하였다. 이 기록을 보고, Jagchid와 Symons(1989: 69)는 “간단히 말하자면, 시피 카간은 당 나라 시조로부터 중국에 있는 동산(動産)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아 낸 것”이라고 말한다. 카간이 이연의 거사에 합류한 목적은 중국 땅을 점령하려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재물을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훗날 태종은 무심코 이 비밀을 누설했다: “예전 우리 왕국의 창건 당시, 태상황제(고조)께서 오로지 백성들 때문에 돌궐의 신하가 되었다(稱臣於突厥). 이 (부끄러운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마음속으로부터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는 흉노를 섬멸해야 한다. 10 (전계서: 70). ”























▲ Tang in 639 Twitchett (1979: 204)

북중국 귀족 씨족들의 종족적인 뿌리

북중국 귀족 씨족들의 종족적인 뿌리는 선비족, 돌궐족과 옛 변방 한족들의 혼합이다. 그들은 상무정신을 강조하였고, 직접 전투와 사냥에 참가하는 것을 높게 평가하였다. 11 반면, 대부분 북에서 도망을 해 온 집단인 남조의 지배 씨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한족 문화전통의 후계자라고 믿었다.

태종 이세민은 초원지대의 정치게임에 정통하였으며, 초원지대 문화와 전통에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목민들의 전법에도 숙달하였다. Barfield (1989: 141)는 이세민이 “전략적인 후퇴에 능하여, 공격하기 전에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우선 지치게 만들었다. 그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여했고, 타고 있던 말이 네 마리나 죽었다. 그는 말들의 죽음을 애통이 여겨, 석상(石像)을 만든 다음, 화살을 몇 개나 맞았고 부상이 어떠했는가 뿐만 아니라, 그 말들 하나하나의 신체적 특징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말과 전쟁에 대해 이렇게 세세한 관심을 갖는 것은 유목민 지도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수 나라뿐만 아니라 초기의 당나라 조정도 일찍이 북위 왕조의 지배하에 그 실효성이 증명된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여 제국을 조직하였다. 당나라 초기의 통치제도는 유목민의 군대-문민 이원제를 답습한 것이었다. Barfield(1989: 140, 142)는 북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이민족의 통치를 받으면서 “야만화(野蠻化)”가 철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태종이 중국본토와 목초지대 모두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당나라 깃발 아래의 돌궐족

돌궐족들은 당나라 통치 아래로 들어오거나 아니면 서쪽으로 달아났다. 돌궐 군대가 뒷받침 하는 중국식 통치조직은 당나라의 세력을 최고조에 달하게 만들었다. 당나라의 깃발 아래로 들어간 돌궐의 전투전문가들은 중국의 국경을 중앙아시아까지 확장시켰다. 이세민은 중국 땅의 카간인 동시에 중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어, 648년에는 파미르 고원도 당나라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동이족과는 전혀 얘기가 달랐다. 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 Koguryeo Tomb Painting Yak-su-ri, Kang-seo, Nampo City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당나라의 참패

645년, 태종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군대가 요동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태종은 요동성 아래의 해자를 메우기 위해 손수 가장 무거운 흙 자루를 날랐으며, 장수 한 명이 화살을 맞고 부상을 당하자 몸소 상처의 피를 빨아주었다 한다. 그러나 공격군은 안시성에 이르러 진군을 멈추게 되었다. 태종은 장수들을 직접 지휘하며 공격을 독려했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 6-7번이나 공격을 반복 할 정도로 전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두 달에 걸친 공격도 허사로 끝이 나고,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자 이세민은 철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12

647년 초, 태종은 다시 한번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태종은 다음해 648년에 30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완전히 격파하겠다고 선언을 했다. 하지만 자신 생애 단 하나의 참패에 대한 통분의 한을 품고 태종은 다음해에 죽었다.

구당서를 편찬한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수 양제가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요동에 군사를 일으켜 드디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았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도 얻은 것은 적고 잃은 것이 많았다. 태종 자신도 출사(出師)를 후회하였다. 자갈밭인 야만족 땅은 정복하더라도 쓸모가 없으며, 버려두더라도 잃을 것이 없다. 허영심 때문에 쓸데없이 헛고생만을 했구나! 통역을 거쳐서 조정에 오게 하고, 바다를 건너서 들어와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13

이세민의 뒤를 이은 고종(649-683)은 심신이 병약하였다. 황후인 무후(則天武后)는 처음에는 (660-683) 고종을 통해 중국을 다스리다가, 고종이 죽자 자신의 어린 아들들을 내세워 다스렸으며(684-690), 막판에는 아예 새로 주(周, 690-705) 왕조를 세워 여황제가 되었다.

북중국의 귀족 씨족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거의 모두 차지하였다. 비록 수 나라 때 과거제도가 도입은 되었지만, 실제 관리 임용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부터, 당 나라는 세습적 귀족 씨족에 의한 지배체제로부터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에 의한 지배 체제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 Koguryeo Tomb Paintings

(top) Deok-heung-ri, Nam-po City

(bottom) Ji’an Tomb No. 12

당나라의 영광: 역사가들에 만들어 낸 신화

고구려와 전쟁에서의 참패가 태종 자신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역사가들의 마음속에서는 당나라의 영광이 조금도 손상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민의 사후, 특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무후(661-705)의 통치 이후, 당나라 군사력의 쇠퇴 현상은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무적인 귀족 씨족들에 의한 통치는 나약한 관료들에 의한 통치로 전환된 것이었다.

무후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돌궐족의 침입을 회피해 보려고, 공주를 시집 보내고, 선물과 보조금을 제공하였다. 안록산의 난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난(755-63)을 겪은 후, 당 조정의 통치는 유명무실해졌다. Fairbank(1992: 86)는 “중앙정권의 실제 공백기간은 755년의 반란 이후 979년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현대 역사가들이 정성을 들여 창조한 신화와는 반대로, 당 왕조의 정치력과 영광은 그 생명이 매우 짧았었고, 여인의 통치라는 체면 손상도 있었다.

동아시아 역사 강의: 3-1 (2005. 7. 23)

정리: 강현사 박사

2005 by Wontack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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