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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17 11:01:066017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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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9년: 개황(開皇) 19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차남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세라 했다.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 599년: 개황(開皇) 19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차남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 했다.







이세민은 개황 19년 (599년)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그 처 두씨(竇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614년에는 장손씨(長孫氏)와 혼인을 올렸다. 617년 수양제 양광(楊廣)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인해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봉기했다. 당시 수왕조에서 당국공(唐國公)의 직위에 있었던 이연도 봉기에 가담했다.




이때 이세민은 이연을 따라 참전하여 수나라의 도성 장안으로 진격해서 함락시켰다. 때마침 수양제 양광마저 강도(江都) 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당의 황제의 위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기를 든 호족은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 설인고(薛仁杲), 유무주(劉武周)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모두 패배시켜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현무문의 변[玄武之變]

이후, 이세민의 권세는 점점 커졌고,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형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막내동생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이세민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파 중에는, 위징(魏徵), 왕규, 배적(裵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장군 이정(李靖), 서세적(徐世勣)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현무문의 변'이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정관의 치[貞觀之治]




서기 626-649년 기간 동안의 당태종의 치세(治世:626∼649)를 말한다. 이때의 연호가 정관(貞觀)이다. 수(隋)나라 말기 전국적인 동란과 백성의 피폐 가운데 굳건히 일어서서, 당나라의 국초(國礎)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율령체제(律令體制)의 정비에 따라 학교·과거(科擧)제도 발달하였다.




안으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위징(魏徵) 등의 명신들이 문치(文治)를 도왔으며, 밖으로는 돌궐(突厥)을 제압하고, 토번(吐審)을 회유하여 국위를 널리 떨쳤다. 결국 돌궐(突厥)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여러 민족의 추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의 존호를 받았다. 이로써 당나라는 번한(蕃漢)의 양 사회를 포용하는 세계제국이 되었다.




이와같이 태종은 통치자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옛 제도를 되살리고 개량했으며, 그의 권위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관리의 선발방법으로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가장 중요한 개혁조치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과거 소수의 귀족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권력은 훨씬 폭넓은 지식인 계급에서 선발된 관료들에게로 점차 옮겨졌다. 중국이 272년 동안이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귀족문벌들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같은 권력구조의 변화를 의도했던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분배한 토지개혁과 조용조(租庸調) 제도의 시행으로 세제개혁을 단행했다. 조용조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을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도 바침으로서, 국가는 풍족해졌으며, 민생은 안정되었다. 군대도 귀족가문에서 기르는 사병(私兵)을 점차 줄이고, 직업 군인을 징집하여 주로 변방에 주둔시켜 국방에 전념하게 했으며, 평범한 가문 출신의 지휘관이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군제는 정권의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후대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태종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교육을 진작시키고 관리가 될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지방행정조직·재정·조세·토지사용 등 거의 모든 방면의 제도를 재정비하게 했다. 당나라의 조정은 그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후대의 중국사가들은 당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칭송해왔다. 그의 치세는 그후 중국의 역사·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溫湯碑, 晉祀碑)는 1,000년 이상이나 각급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8세기의 중당(中唐)시대는 중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의 하나였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구려 원정




정관 19년,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6월 백악성을 함락시킨 당태종은 처음에는 안시성을 우회하려고 했다. 안시성은 그때 양만춘이 지키고 있었다. 양만춘은 고구려의 실질적인 지배자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킬 때 복종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항복시키지 못할 정도로 용기와 지모를 겸한 장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태종의 용병술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한 달 이상에 걸쳐 행한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抛車:투석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木柵)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성벽을 무너뜨리고 튀어나온 고구려군은 재빨리 흙산에 올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 부복애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당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아들인 고종 이치가 신라와 동맹을 맺고 침략을 시작해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 고구려는 8번에 걸친 당군의 원정을 막아냈다.







후계자와 최후

649년, 당태종 이세민은 이 때 이질을 앓고 있었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가 당의 제3대 황제 당고종이다. 당고종은 당태종이 병상에 눕게 되자 황태자의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행했했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태종 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 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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