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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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0:22:197107 
제19회. 擒將復國(금장복국), 殺頹反正(살퇴반정)
양승국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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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19회擒將復國 殺頹反正(금장복국 살퇴반정)

부하(傅瑕)를 사로잡아 나라를 다시 찾은 정려공 돌과

왕자퇴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에 복귀한 주혜왕

1. 금장복국(擒將復國)

- 적장을 포로로 잡아 정백의 자리에 다시 오른 정려공 -

송나라 정벌을 나갔다가 귀국한 제환공에게 관중이 상주했다.

「주왕실이 동쪽의 낙읍으로 천도한 이래 중원에는 정나라만큼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정나라가 옛날 동괵(東虢)①을 멸하고 그곳을 도읍으로 삼았습니다.② 신정성(新鄭城)의 전면에는 숭산(嵩山) 버티고 있고, 그 뒤로는 하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락수(洛水)가 왼쪽에는 제수(濟水)가 있으며 서북에는 호뢰(虎牢)가 있어 그 험함을 의지하여 천하의 돌아가는 형세를 살피고 있습니다. 옛날 정장공은 이런 지리상의 이점을 믿고 송나라를 정벌하였으며 허나라를 병탄했을 뿐만 아니라 천자의 군사들에게 감히 대항했습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지금 형만의 초나라 편에 서서 중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참람하게 왕호를 칭하고 있는 초나라가 그 넓은 영토와 강한 군사들로 한수(漢水) 주변의 나라들을 삼킨 여세를 몰아 북상하여 주나라와 중원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왕실을 보호하고 제후들을 아우르려고 하신다면, 초나라의 세력을 중원에서 몰아내야만 합니다. 중원에서 초나라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정나라를 먼저 얻지 않고는 불가합니다.」

「정나라가 중원의 가장 중요한 나라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오래 전부터 취하려고 하였으나 단지 그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영척(寧戚)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정려공 돌(突)이 정백의 자리에 오른 지 2년 만에 제족에 의해 쫓겨나고 소공 홀(忽)이 다시 섰었습니다. 그러나 고거미가 소공을 죽이고 공자미를 세우자 우리의 선군이신 양공께서 공자미와 고거미를 유인하여 그 죄를 물어 죽이셨습니다. 그러나 제족은 려공을 복위시키지 않고 다시 공자의(公子儀)를 불러다 군위에 앉혔습니다. 제족은 신하의 몸으로 자기의 군주를 쫓아내고 공자의는 동생으로서 자기형의 자리를 찬탈하였으니, 제족은 신하로서 자기의 분수를 넘어섰고 공자의는 형제간의 윤리에 어긋난 행위를 했습니다.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그 죄를 물어야 합니다. 지금 려공 돌은 력성(櫟城)에 있어 하루도 빠짐없이 정나라를 공격하여 나라를 다시 찾을 궁리에 몰두해 있습니다. 또한 제족이 마침 이미 죽고 없어 정나라에는 국정을 맡아서 다스릴 만한 인재가 없습니다. 주공께서 한 명의 장수를 임명하여 력성으로 보내어 려공이 정나라 군위에 복위하는 일을 돕게 하면 려공은 반드시 주공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고 북면(北面)하여 제나라를 받들 것입니다.」

환공은 크게 기뻐하며 영척의 의견을 쫓아 빈수무에게 명하여 병거2백 승을 이끌고 력성으로 가서 려공의 복위를 돕도록 하였다. 력 땅에 당도한 빈수무가 성 밖 20리 되는 곳에 영채를 세우고 사자를 려공에게 보내어 제후의 뜻을 전했다.

그 때 정려공은 제족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복을 비밀리에 정성에 잡입시켜 성내의 소식을 정탐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후가 군사를 보내 자기를 정나라에 들여보내 정백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쁜 마음에 력성 밖으로 달려 나간 정려공은 빈수무의 군사들을 영접하고 잔치를 크게 차려 제나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였다.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에 정나라에 간 밀정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제족은 이미 죽고 지금은 숙첨(叔詹)이 상대부가 되어 정나라 정사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빈수무가 물었다.

「숙첨은 어떤 사람입니까?」

려공이 대답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재목이지 군사를 지휘하는 장수의 재목은 아닙니다.」

밀정이 계속해서 아뢰었다.

「정나라 도성에 기이한 일이 하나 일어났는데 남문의 안쪽에서는 길이가 팔 척이 넘고 푸른색의 머리에 꼬리는 노란색인 뱀이, 그 바깥쪽에서는 길이가 한 장이 넘고 붉은 머리에 꼬리는 녹색인 뱀이 나타나, 두 마리의 뱀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남문을 사이에 두고 3일 밤낮을 싸웠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두 마리의 뱀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그 주위는 마치 장이 선 것처럼 번잡하였으나 그 싸우는 모습이 매우 흉맹하여 아무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두 뱀이 싸운 지 17일이 지나서야 성안의 뱀이 성 밖의 뱀에게 물려서 죽었습니다. 성 밖의 뱀은 성안으로 들어와서는 태묘 안으로 들어가더니 갑자기 그 행방을 감추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빈수무가 몸을 일으켜 정백에게 경하의 말을 건넸다.

「정나라 군위는 이미 군후님에게 정하여 진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정나라의 성문 밖 뱀은 즉 길이가 한 장이니 군후 전하를 말하고 성안의 뱀이 길이가 팔 척인 것은 군후님의 동생인 공자의를 의미합니다. 17일 동안의 싸움 끝에 성안의 뱀이 상처를 입어 죽고 성 밖의 뱀이 성안으로 들어 왔다는 이야기는 군후께서 갑신(甲申)년 여름에 정나라를 떠나서 신축(辛丑)년 여름철인 지금은 그때부터 정확히 17년이 되는 해를 말합니다.③ 성안의 뱀이 상처를 입고 죽었다는 것은 공자의가 군주의 자리를 잃게 됨을 말하고, 성 밖의 뱀이 태묘에 들어갔다는 말은 군주께서 종사를 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제나라의 군주께서 바야흐로 대의를 천하에 펴시고자 장차 군후 전하를 정나라의 군위에 올리려고 시도하는 것도, 정나라 도성의 남문에서 뱀들이 싸운 것도 모두가 공자의를 몰아내고 군후님이 다시 복국하게 되는 일을 의미하니 이것이야말로 바로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장군의 말대로만 된다면 네가 어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빈수무와 정백이 곧바로 계책을 세워 부하(傅瑕)가 지키고 있던 대릉성(大陵城)을 야습했다. 부하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려공의 군사들과 서로 크게 싸우는 틈을 이용해 빈수무가 일단의 제군을 이끌고 부하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비어 있는 대릉성을 먼저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성루에 제나라 깃발을 꽂았다. 대릉성을 빼앗긴 부하가 제군의 지원을 받은 려공의 군사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병거에서 내려 려공에게 항복했다. 려공은 부하가 17년 동안 자기를 력성에 가두어 그 앞을 막아 왔던 것에 원한을 품고, 이를 갈며 좌우에게 명하였다.

「저 놈을 빨리 끌고 가서 목을 베어 그 수급을 가져 오라!」

부하가 크게 소리쳐서 말했다.

「군께서는 정나라에 복국하여 정백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려공이 부하를 불러 그 연유를 묻자 말했다.

「군께서 만약 신의 목숨을 살려 주신다면 신은 자의의 머리를 베어 군께 바치겠습니다.」

「너는 무슨 방법으로 자의를 죽일 수 있다고 하는가? 감언으로 나를 속이고 몸을 빼내어 정나라로 도망가려고 함이 아닌가?」

「지금 정나라 모든 정사는 모두 숙첨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신과 숙첨은 평소에 가깝게 지낸 사이입니다. 군께서 만일 저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제가 정나라에 몰래 들어가서 숙첨과 계책을 궁리하여 자의의 머리를 폐하께 반드시 바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려공이 부하의 말을 듣고 크게 꾸짖었다.

「늙은 도적이 간사하기가 매우 심하구나!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내가 지금 너를 놓아 정나라로 들여보낸다면 너는 숙첨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나에게 대항하려는 수작이 아니겠느냐?」

빈수무가 옆에서 듣고 있다가 말했다.

「부하의 처와 가솔이 현재 이 곳 대릉에 있으니 력성으로 잡아가 인질로 삼으십시오.」

부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목숨을 애걸하였다.

「만일 신이 배신한다면 신의 처와 자식들을 죽이십시오!」

려공이 포승줄을 풀어 주라고 명하자 부하는 몸을 일으켜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가리키면서 려공에게 맹세의 말을 했다. 정려공이 즉시 부하의 석방하여 정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부하가 정나라 도성으로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숙첨을 찾아갔다. 뜻밖에 찾아온 부하를 숙첨은 크게 놀라 물었다.

「그대는 대릉을 지키고 있어야 하거늘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것이오?」

「제후가 정나라의 군주자리를 바로 잡고자 하여 빈수무를 대장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와서 자돌을 정백의 자리에 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대릉성은 이미 제나라 군사들의 손에 떨어지고 저는 밤을 도와 이렇게 목숨을 구해 도망쳐 왔습니다. 제나라 군사들의 도움을 받은 자돌이 조석지간에 이곳 신정성에 당도할 예정이니 일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대감께서는 자의의 머리를 벤 후 성문을 열고 자돌을 맞이해서 부귀를 계속 보전하고 여러 백성들을 도탄으로부터 구하십시오. 정나라의 화복은 이 순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돌에게 항거하여 일이 잘못될 경우에는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숙첨이 부하의 말을 듣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어 말했다.

「내가 옛날 원래는 자돌을 모셔다가 자미의 뒤를 잇자고 주장하였지만 제족이 반대하여 자의가 군위에 앉게 되었소. 지금 제족은 이미 죽고 없으니 이것은 하늘이 자돌을 돕고 있다고 할 수 있소. 하늘의 뜻을 어긴다면 반드시 벌로 재앙을 내릴 것이나, 단지 나로서는 어떤 계책으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오.」

「력성에 편지를 띄워 속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진격하라 전하고 상국께서는 적군을 막으로 간다고 군사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출전하면 자의는 필시 성루에 올라 싸움을 관전할 것입니다. 제가 자의의 옆에 서 있다가 기회를 엿보아 그의 목을 베겠습니다. 상국께서는 자돌을 영접하여 성안으로 들어오시기만 하면 대사는 이미 정해져 어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숙첨이 부하의 계책을 따라 밀사를 시켜 편지를 력성의 자돌에게 보냈다. 이어서 부하가 자의를 배알하고 제나라 군사들이 자돌을 도와 정나라를 쳐들어와 대릉성은 이미 제나라 군사들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자의가 크게 당황하며 말했다.

「마땅히 많은 뇌물을 초나라에 바치고 구원병을 요청하고, 나는 군사들과 이곳에서 농성전을 벌리다가 초나라 구원병이 당도하기를 기다려, 성문을 열고 나가 제나라 군사들을 앞뒤에서 협공한다면 제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숙첨은 고의로 일을 늦추며 이틀이 지나도록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군졸이 달려와 고했다.

「력성에 있던 자돌의 군사들이 이미 성 밑에 당도하였습니다.」

숙첨이 앞으로 나와 자의에게 말했다.

「신이 군사들을 끌고 성을 나가 그들을 막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부하와 함께 성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자의가 믿고 숙첨의 말을 따랐다. 한편 군사들을 이끌고 정성 밑에 당도한 정려공 돌은 군사를 이끌고 성밖으로 나온 숙첨과 거짓으로 몇 합 싸우는 척 하였다. 그 사이에 빈수무가 이끄는 제나라의 대군이 뒤따라 당도하여 자돌을 돕자, 숙첨은 못 당하는 척하고 자기의 병거의 방향을 돌리게 하여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부하가 보고 성루 위에서 크게 외쳤다.

「정나라 군사가 패하였다! 」

원래 담력과 용기가 없는 자의는 숙첨이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는 모습을 보고 일이 이미 틀어졌다고 생각한 나머지 밑으로 달려 내려가 성문 밖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자의의 등 뒤에 서있던 부하가 칼로 등을 찌르자 자의는 성 위에서 죽었다. 숙첨이 소리쳐 성문을 열게 하고 정려공과 빈수무를 영접하여 같이 성안으로 들어 왔다. 부하가 먼저 궁 안으로 들어가 깨끗이 청소를 하러 가는 중에 자의의 두 아들을 발견하고 모두 죽였다. 부하가 자돌을 맞이하여 정백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정나라 사대부들은 원래부터 려공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환호하는 소리가 땅을 진동시켰다. 려공이 빈수무를 정성을 다하여 접대하고 그해 10월에 제나라 땅으로 가서 제후와 회맹을 하기로 약조했다. 빈수무는 즉시 군사를 거두어 제나라로 돌아갔다. 려공이 복국하고 며칠 만에 인심은 크게 안정이 되자 부하를 불러 말했다.

「너는 대릉에서17년 동안 나의 앞을 가로막아 복국을 방해하였다. 가히 옛날의 군주인 자의에게는 충신이라 할 만 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하여, 또다시 나를 위하여 옛날의 군주를 시해하였으니 너의 마음은 가히 예측하지 못하겠다. 과인이 마땅히 자의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어야 하겠다.」

려공이 즉시 장사들에게 소리쳐 부하를 묶어 큰길 밖으로 끌고 나가서 참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처자와 식솔들만은 죽이지 않고 용서하여 주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정백 돌은 세상에 둘도 없는 간웅인데

타인의 힘을 빌리고 다시 그 사람을 죽였다.

부하가 그처럼 짧은 삶을 탐하지 않았더라면

충성스러운 이름이 만고에 전해 졌을 것을

鄭突奸雄世所无(정돌간웅세소무)

借人成事又行誅(차인성사우생주)

傅瑕不愛須臾活(부하불애수유화)

嬴得忠名万古乎(영득충명한고호)

옛날 자의를 세우자고 주장했던 원번(原繁)은 려공으로부터 죄를 추궁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나이가 들어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조당에 나오지 않으며 은퇴를 하겠다고 고했다. 그러나 려공이 사람을 보내 그 잘못을 추궁하자 원번은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메달아 죽었다. 제족을 도와 옹규를 죽였던 강서(强鉏)가 도망쳐 숙첨의 집에 와서 숨었다. 숙첨이 려공에게 강서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강서는 숙첨의 도움으로 죽음만은 면했으나 그 벌로 다리를 잘렸다. 공보정숙(公父定叔)은 위나라 도망쳤다가 3년이 지나자 려공으로부터 용서를 받고 옛날의 작위를 돌려받았다. 려공이 정나라로 돌아온 공보정숙을 보고 말했다.

「어찌 내가 공숙(共叔)④님의 후사를 끊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제족은 이미 죽어 그 죄를 논하지 않았다. 숙첨은 옛날처럼 정경(正卿)으로 하고 도숙(堵叔)과 사숙(師叔)을 대부로 삼았다. 정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량(三良)이라 불렀다.

정려공 돌을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린 제환공은 지난 겨울에 이미 회맹에 참석하겠다고 통고해온 바 있던 위(衛), 조(曹) 두 나라를 포함하여 차제에 제후들을 크게 규합하여 회맹을 주재하려고 하였다. 관중이 환공의 뜻을 헤아려 말했다.

「주군께서 새로이 패업을 이루시려고 하시니 이것은 반드시 그 절차를 간편하게 행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간편하게 해야 합니까?」

「진(陳), 채(蔡), 주(邾) 3국은 북행의 회합 이후 제나라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해왔습니다. 조백도 또한 비록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송나라를 정벌하는데 군사를 내어 도왔습니다. 이 네 나라를 또다시 불러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로지 송과 위 두 나라만이 아직 회합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불러 한 번의 회맹의식을 거행하면 족하다고 하겠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한 마음으로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모두 한꺼번에 불러 맹약을 정하십시오」

관중이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홀연히 밖에서 시자가 들어와 보고하였다.

「주천자께서, 송나라가 왕실에 사신을 보내어 예를 표했다는 사실을 우리 제나라에 알리기 위해 다시 선멸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는데, 선멸은 지금 위나라 경내를 통과 중에 있다고 합니다.」

「선멸이 우리에게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송나라와는 동맹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천자의 사신이 우리나라에 오기 위하여 위나라에 당도하였으니 주군께서는 마땅히 위나라 땅까지 가셔서 천자의 사자를 맞이하여 우리가 천자와 친하다는 모습을 여러 제후들에게 알리십시오.」

제환공은 송, 위, 정 3국에 사자를 보내어 위나라의 견(鄄)⑤ 땅에서 만나자고 날짜를 정하여 통고했다. 이윽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제환공은 위나라의 견 땅으로 나아가 선자(單子) 및 세 나라의 군주들과 회동하여 삽혈과 같은 번잡한 의식을 생략하고 서로 인사만으로 의식을 대신한 후 헤어졌다. 제후들이 크게 기뻐하며 제후가 자기들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따랐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환공은 송, 노, 진, 위, 정. 허 등의 제후들을 크게 규합하여 유(幽)⑥땅에 모이게 하고 회맹을 열고 삽혈의 의식을 행하였다. 제후들은 제환공을 맹주(盟主)로 추대했다. 이때가 주리왕 3년 기원전 678년의 일이었다.

2. 息嬀入楚(식규입초) 脈脈無言(맥맥무언)

- 초나라의 왕비가 되어 가슴 속에 말을 묻고 산 식규(息嬀)

한편 초문왕 웅자(熊貲)는 스스로 식후의 부인이었던 식규를 뺏어와 자기의 부인으로 삼고 사랑하기를 그지없이 하였다. 3년이 채 되지 않아 아들 둘을 낳아 장남은 웅간(熊艱)이라 하고 차남은 웅운(熊惲)이라고 이름 지었다. 식규가 비록 초나라 궁중에서 생활한지가 3년이 되었지만 도무지 초왕과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초왕이 괴이하게 생각하던 중 하루는 식규에게 어찌하여 말을 하지 않고 사느냐고 그 까닭을 물었다. 식규가 눈물만을 흘리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계속해서 재촉하자 식규가 마지못해 입을 열어 말했다.

「저는 여자의 몸으로서 두 지아비를 섬기면서 절개를 지키지 못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무슨 면목으로 사람과 말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식규는 눈물을 끝없이 흘렸다. 호증(胡曾)선생이 이를 두고 시를 지어 노래했다.

식나라가 망하자 초나라로 끌려온 식부인은

되돌아보니 봄바람에 나부끼는 한 송이 꽃이로다!

옛날 생각에 함구하고 눈물만을 흘리기를3년인데

가슴 속의 한이 부귀영화만으로 풀어질 수 있겠는가?

息亡身入楚王家(식망신입초왕가)

回看春風一面花(회간춘충일면화)

感舊不言常掩泪(감구불언상엄루)

只應翻恨有容華(지응번한유용화)

초문왕이 식규의 말을 듣고 말했다.

「이것은 모두가 채후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내가 부인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겠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초문왕은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채나라를 향하여 쳐들어갔다. 채나라 도성의 외곽에 초왕의 군대가 당도하자 헌무가 윗통을 벗고 땅에 엎드려 죄를 청하며 채나라 부고에 있던 모든 재물과 보옥들을 꺼내어 초왕에게 가져다 바쳤다. 초왕이 채후의 항복을 허락하고 군사를 끌고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정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정려공 돌(突)이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자기가 복위되었음을 알려왔다. 초문이 노하여 말했다.

「돌이 정나라의 군위에 다시 앉은 지가 벌써2년이 되었는데 지금에서야 나에게 사자를 보내 고하니 이것은 나를 심히 기만하는 짓이다.」

초문왕은 정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또다시 군사를 일으켜 원정길에 나섰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소흘히 대한 죄의 용서를 빌고 화의(和議)를 청해오자 초왕이 허락하고 군사를 물리쳐 돌아왔다. 주리왕 4년 기원전 678년에 정백 돌이 초나라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제나라에 들어와 감히 조현(朝見)을 행하지 못했다. 제환공이 사자를 보내 정백 돌을 꾸짖자 정백이 상경 숙첨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어 환공에게 고하게 했다.

「저희 정나라는 초나라에 의해서 포위된 이후로 성을 지키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저희가 상국에 조현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군주께서 만약 위엄으로서 초나라를 물리쳐 주신다면 저희들 군주이신 정백께서 어찌 감히 제나라 조정에 입조하여 조현을 들이지 않겠습니까?」

제환공은 정나라가 은혜를 잊었다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숙첨을 군부의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숙첨이 갇혀 있다가 기회를 틈타 도망쳐서 정나라로 되돌아 왔다. 이때부터 정나라는 제나라에 등을 돌리고 초나라를 받들기 시작했다.

3. 육권겁왕(鬻拳劫王)

- 초왕을 겁박하여 황나라를 정벌하게 만든 육권 -

한편 주리왕은 재위5년 만인 기원전 677년에 죽고 그 아들 랑(閬)이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주혜왕(周惠王)이다. 혜왕 원년 기원전 676년 초문왕 웅자(熊貲)가 황음에 빠져 정사를 팽개치고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만을 즐겨 하던 중 그 일 년 전에 파(巴)나라의 군주와 함께 신(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했었다. 그 원정 도중에 초문왕은 파나라의 군사들을 혹사시킨 적이 있었다. 원정을 끝내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파군(巴君)은 그 일에 대해 원한을 품고 초나라 변경 땅을 공격하여 그 원한을 풀었다. 변경을 지키던 장수 염오(閻敖)가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와 헤엄을 쳐서 간신히 도망쳐 영성(郢城)으로 돌아왔다. 초문왕이 염오를 잡아 패전의 죄를 물어 죽였다. 이에 염씨 종족들은 초왕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파군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치려 하자 염씨 종족들은 초나라 안에서 내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윽고 파나라 군사들이 초나라를 공격해 오자 초문왕이 친히 군사를 끌고 나가 진(津)⑦이라는 곳에서 크게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염씨 종족 수백 인이 초군으로 가장하여 진중 안으로 침입하여 뛰어 다니며 초왕을 찾아다니자 초나라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파나라 군사들이 그 틈을 이용하여 초군 진영으로 돌격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크게 물리칠 수가 있었다. 초왕은 싸움 중에 얼굴에 화살을 맞고 도망치기에 경황이 없었다. 파군이 감히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군사를 거두어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염씨 종족들도 파군을 따라가 파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초왕이 싸움에서 지고 영성으로 돌아와 성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육권이 성문 위에서 초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군께서는 싸움에서 이기셨습니까?」

「졌소!」

「선왕 때부터 초나라 군사들은 싸움을 하면 이기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파나라는 대단히 작은 나라인데 왕께서 스스로 장수가 되어 출전하였음에도 싸움에서 졌으니 어찌 세상 사람들이 우리 초나라를 비웃지 않겠습니까? 지금 황(黃)나라가 우리나 초나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만약 황나라라도 정벌하여 승리를 취한다면 스스로 비웃음을 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육권은 성문을 닫아 버리고 초왕을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초문왕이 분연히 일어나 군사들을 향하여 말했다.

「이번에 출동하여 다시 승리를 얻지 못하면 나는 결코 살아 돌아오지 않으리라!」

초문왕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황나라를 정벌하러 갔다. 왕이 친히 북을 두드리자 군사들은 죽음을 겁내지 않고 힘껏 싸워 황나라 군사들을 적릉(踖陵)⑧의 땅에서 크게 무찔렀다. 그날 밤 초왕이 군중의 영채에서 잠을 자는데 노기발발한 모습의 식후가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게 만들었느냐? 그리고 내 나라를 빼앗아 초나라 땅으로 만들고 또한 나의 처는 데려다가 범하여 너의 부인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이 원한을 참지 못하고 상제에게 고해 너를 데리려왔다!」

식후가 말을 마치고 손바닥으로 초왕의 얼굴을 때리자 초왕이 외마디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으나 화살에 맞았던 얼굴의 상처가 터지면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초왕이 군사들에게 급히 명령을 내려 회군하도록 했다. 초문왕은 추(湫)⑨ 땅을 통과하던 중에 죽었다. 육권이 초왕의 운구를 맞이하여 장례를 치르고 장자 웅간을 초왕에 세웠다. 이윽고 후사를 정해 나라가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육권이 말했다.

「나는 왕을 두 번이나 범했다. 왕께서 나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서 어찌 내가 목숨에 연연하여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지하에 계시는 왕을 따르고자 한다.」

육권은 가솔들을 불러 당부했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질황(絰皇)이라는 곳에 묻어 자손들로 하여금 내가 우리 초나라의 성문을 지키고 있음을 알게 하라!」

육권이 말을 마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육권의 죽음을 슬퍼한 초왕 웅간(熊艱)이 그 자손에게 대혼(大閽)이라는 벼슬을 내려 세습하게 하였다. 옛날 노나라의 유자(儒者) 좌구명(佐丘明)은 자신의 저서 좌씨춘추(左氏春秋)에서 육권은 군주를 사랑한 신하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후세의 사관 한 사람은 그에 대해 논박하는 시를 지었다.

임금에게 간하는데 감히 용병을 강요 할 수 있었던가?

또한 성문을 닫아 들이지 않으니 또한 놀랄 일이 아닌가?

이런 일이 충성스럽고 군주를 사랑하는 일이라면

란신적자들은 이 일을 빗대어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다.

諫主如何敢用兵(간주여하감용병)

閉門不納亦堪驚(폐문불납역감경)

若將此事称忠愛(약장차사칭충애)

亂賊紛紛盡借名(란적분분진차명)

4. 살퇴반정(殺頹反正)

- 왕자퇴의 란을 평정하고 천자를 복위시킨 정려공 -

초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정려공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나의 근심거리가 마침내 없어졌구나! 」

숙첨(叔詹)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신이 듣기에‘군주 된 자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면 위험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모시면 욕됨을 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정나라는 제와 초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에 욕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먼 앞날을 내다본 계책이 아닙니다. 선군인 환공(桓公), 무공(武公), 장공(庄公) 3세에 걸쳐 주왕실에 입조하여 경사의 직을 수행하여 면(冕)을 머리에 쓰시고는 열국의 제후들을 정벌하셨습니다. 오늘 주왕실에는 신왕이 새로 서서 괵(虢)과 당진(唐晉)이 입조하자 신왕은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한 벽옥 다섯 쌍, 말 세 필을 하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주공께서도 만약 주나라에 조공을 바쳐 주왕의 총애를 받게 된다면 다시 선군들의 가졌던 경사의 직을 맡을 수 있으니 그때는 비록 대국이 우리나라를 위협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려공은 숙첨의 말을 따라 즉시 대부 사숙을 주왕실에 보내 조빙을 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사숙이 주나라에서 돌아와서 복명하였다.

「주나라 왕실에는 큰 난리가 일어났습니다.」

려공이 그 이유를 물었다.

「어떻게 난리가 일어났는지 자초지종을 말씀해 보시오,」

사숙이 그 동안 주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옛날에 주장왕이 도희(姚姬)라는 여자를 총애하였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왕요(王姚)라고 불렀습니다. 왕요는 퇴(頹)라는 아들을 하나 낳아 장왕이 매우 사랑했습니다. 장왕은 대부 위국(蔿國)을 퇴의 사부로 삼아 가르치게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를 좋아했던 왕자퇴는 친히 먹이를 주어 일찍이 수백 마리의 소를 길렀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오곡 중에 좋은 것만을 먹이고 수를 놓은 비단으로 옷을 만들어 소에게 입혀 사람들이 소를 부르기를 문수(文獸)라고 불렀습니다. 출입할 때는 항상 종자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모두 소를 타고 행차를 하여 백성들의 전답을 망치기를 함부로 하였습니다. 또한 위국, 변백(辺伯), 자금(子禽), 축궤(祝跪), 첨보(詹父) 등의 오대부와 같이 비밀리에 결사를 맺어 왕래를 긴밀히 했습니다. 그러나 장왕의 뒤를 이은 리왕이 재위 시에는 왕자퇴 일당들은 리왕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대놓고 함부로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리왕이 재위 5년 만에 죽고 지금의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 왕자퇴는 자기가 신왕의 숙부 항렬임 믿고 방자한 태도로 횡포를 부리기를 더욱 심하게 했습니다. 신왕은 왕자퇴의 교만한 행동을 싫어하여 그의 일당들을 억누르고자 자금, 축궤, 첨보의 전답을 빼앗았습니다. 이어서 왕궁 옆에 있던 위국과 변백이 소유한 집과 별장을 몰수하고 그곳을 왕실의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또한 궁중의 요리사 석속(石速)이란 자가 요리를 해서 왕에게 바쳤는데 그 요리가 불결하여 왕이 화를 내고 그 직을 파하자 석속 역시 왕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연들로 인해 왕자퇴를 주왕으로 추대한 오대부와 석속이 란을 일으켜 신왕을 공격했습니다. 주공 기보(忌父)와 소백(召伯) 요(廖)가 죽을힘을 다해 막았기 때문에 오대부와 석속은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자퇴를 모시고 이웃에 있는 소국(蘇國)⑩으로 도망쳤습니다. 옛날 주무왕 밑에서 사구(司寇)의 직을 맡아 공을 세웠던 소분생(蘇忿生)은 소공(蘇公)에 봉해지고 남양(南陽)⑪에 있던 땅을 채읍으로 받이 세워진 나라가 소국입니다. 소분생이 죽고 그 자손이 소국의 군주 자리를 이어 오다가 근자에 들어 오랑캐인 적국(狄國)의 명령을 받들기 시작했습니다. 소국의 군주들은 주나라를 배반하고 적국을 섬기면서도 주나라가 하사한 봉지를 주나라에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주환왕 8년에 소군(蘇君)은 그 채읍을 선군이신 장공과 주나라 경계와 가까이 있던 우리 정나라 땅과 교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소국과 주왕실은 서로 미워하게 되는 사이가 되어 그 틈이 더욱 크게 벌어지게 되었었습니다. 더욱이 위혜공 삭은 옛날 자기가 내란으로 쫓겨 날 때에 주왕실이 부마인 검모(黔牟)를 보내 위후의 자리에 앉혔던 일에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검모는 위후 삭의 이복형이기도 합니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왕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소국으로 몸을 피한 왕자퇴를 소군이 모시고 주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던 위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위후 삭은 연나라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소군과 함께 주나라 왕성으로 쳐들어갔습니다. 주공 기보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싸움에서 패하여 소백요 등의 신하들과 함께 왕을 모시고 우리 정나라 영토인 언(鄢)땅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주왕을 쫓아낸 주나라에서는 오대부 등이 왕자퇴를 받들어 왕으로 세웠으나 백성들은 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만약 군사를 내어 우리 언 땅으로 도망쳐 온 주왕을 모셔 다시 천자의 자리에 복위시킨다면 이것은 만세에 빛나는 공을 세우는 일입니다.』

「좋습니다. 왕자퇴는 유약한 위인이라 오직 믿고 의지하는 것은 위와 연 두 나라의 군사들과 오대부들 뿐이오. 또한 왕자퇴를 따르는 오대부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무능한 자들뿐이라 크게 근심할 필요가 없소. 과인이 사자를 다시 보내 이치로서 왕자퇴를 타일러, 만약에 그가 반정을 후회하게 된다면, 병화를 면하게 되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소?」

정려공은 한편으로는 언 땅으로 사자를 보내어 왕을 영접하여 력성으로 모tu 당분간 거처로 삼게 하였다. 력성은 과거 려공이 17년간 머물던 곳이라 궁실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왕자퇴에게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왕자퇴가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이 돌(突)이 듣기에 ‘신하의 신분으로서 임금을 범한 자는 불충이라 하고 형제로서 그 형을 간한 자는 불순이다’라고 했습니다. 불충불순(不忠不順)한 사람은 하늘로부터의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왕자의 신분으로서 간신의 말을 듣고 그 군주를 추방하였으니 미구에 그 화가 미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인데 그것을 두려워한다면 마땅히 반성하여 천자를 맞이하고 스스로를 몸을 굽혀 죄를 고하여야 일신의 부귀를 잃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시겠다고 한다면, 차라리 어느 변방에 구석진 곳에 파묻혀 오랑캐의 복식을 입고 살아 천하 사람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오로지 왕자께서 뜻을 정하여 속히 행하는 것만이 세상에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왕자퇴가 편지를 받아 읽어보았으나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오대부가 입을 모아 모두 말했다.

「호랑이 등에 탄 사람은 절대 내려올 수 없습니다.⑫ 또한 어찌 만승의 존귀한 신분으로 있다가 또다시 물러나서 무릇 신자들의 반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정백이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말이니 따르면 안 됩니다.」

왕자퇴가 오대부의 말이 그럴듯하게 여겨 정나라 사자를 나라 밖으로 쫓아내도록 했다. 력성에 있는 왕을 찾아가서 조현을 드린 정려공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왕성을 기습하여 전국의 보기들을 탈취하여 다시 력성으로 돌아 왔다.

그때가 혜왕3년 기원전 674년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 정려공이 사자를 서괵(西虢)⑬에 보내 괵공에게 같이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복위시키자고 제의했다. 괵공이 허락했다. 혜왕 4년 기원전 673년 봄에 정(鄭)과 괵(虢) 두 나라 군주가 군사를 이끌고 미(弭) 땅에서 만나 그해 여름 4월에 같이 왕성을 공격했다. 정려공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왕성의 남문을 공격하자 괵공은 북문을 맡아 공격했다. 위국이 당황하여 궁궐로 달려가 사태의 급박함을 왕자퇴에게 보고하려고 했으나 왕자퇴는 그때 마침 소에게 먹이를 주는 일 때문에 곧바로 만날 수 없었다. 위국이 혼자말로 하였다.

「일이 매우 급한데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구나!」

위국은 만나기를 포기하고 돌아가 즉시 왕자퇴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변백, 자금, 축궤, 첨보로 하여금 군사들을 이끌고 성의 성가퀴에 올라가서 쳐들어오는 괵과 정 두 나라의 군사들을 막게 하였다. 주나라 백성들이 왕자퇴에게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혜왕이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고 모두 환성을 천둥소리와 같이 지르고서 서로 다투어 성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위국이 국서를 써서 위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서도 다 쓰기 전에 종소리와 북소리가 밖에서 나더니 시자가 달려와 고했다.

「전왕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조당의 왕좌에 앉았습니다.」

위국이 듣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축궤와 자금은 란군 중에 군사들의 칼에 맞아 죽고 변백과 첨보는 주나라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포승줄에 묶여 주왕 앞에 바쳐졌다. 그러나 왕자퇴는 석속과 함께 비단 옷을 입힌 소를 앞세우고 요행히 서문을 통하여 무사히 성을 빠져나갔으나 소가 너무 살이 쪄서 잘 걷지 못하는 바람에 추격하는 군사들에게 사로 잡혀와 변백과 첨부 두 대부와 함께 참수되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왕자퇴의 어리석음을 말했다.

총애를 믿고 횡행하기를 끝간 데가 없었고

사사로운 도당을 결성하여 간사한 꾀임에 빠졌도다!

일 년 남짓한 왕 노릇에 무슨 일을 이룰 수 있었던고?

단지 관문 밖으로 나가 소나 길렀으면 좋았을 것을

挾寵橫行意未休(협총횡행의미휴)

私交乘釁起奸謀(사교승흔기간모)

一年南面成何事(일년남면성하사)

只合關門去飼牛(지합관문거사우)

또 하나의 시는 제환공은 이미 맹주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마땅히 의병을 일으켜 천자를 복위시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백과 괵공에게 공을 양보한 행위를 비난했다.

천자가 몽진하게 된 것은 왕실의 크나큰 수치인데

정과 괵이 충성스러운 계책을 세워 공을 세웠다.

어찌하여 관중은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않고

천하제일공을 정과 괵 두 나라에게 양보하였는가?

天子蒙塵羞九廟(천자몽진수구묘)

紛紛鄭虢效忠謀(분분정괵효충모)

如何仲父无遣策(여하중보무유책)

却讓當時第一籌(각양당시제일주)

주혜왕이 복위하여 정백에게는 호뢰(虎牢) 이동 땅을 상으로 주고 이어 반감(鞶鑒)⑭)을 하사했다. 괵공에게는 주천(酒泉)⑮의 고을을 상으로 내리고 제후들이 사용하는 주기(酒器)를 하사했다. 두 나라의 군주가 감사의 말을 올리고 자기나라에 돌아갔다. 정려공은 돌아오던 길에 병이 들어 정나라에 당도하자 곧바로 죽었다. 정나라 군신들이 세자 첩(捷)을 받들어 그 뒤를 잇게 하였다. 이가 정문공(鄭文公)이다. 기원전 700년에 소공 홀(笏)을 쫓아내고 스스로 정백의 자리에 올랐으나 4년 만인 기원전 697년에 제족에게 쫓겨난 정려공은 17년 동안 정백의 자리를 노리면서 력성에 머물다가 제환공의 도움으로 기원전 679년에 정백의 자리에 복위하였다. 그는 정백의 자리에 다시 오른 지 7년 만인 기원전 673년에 주왕을 복위시키고 정나라로 돌아오던 중에 죽은 것이다.

5. 진완분제(陳完奔齊)

- 진(陳)나라의 공자 진완이 제나라로 망명하다. -

진(陳)나라는 주무왕이 순임금의 후손을 찾아 봉한 제후국이다. 주혜왕 5년 기원전 672년, 진선공(陳宣公) 저구(杵臼)는 태자 어구(御寇)를 역심을 품었다고 의심하여 죽였다. 어구와 친하게 지냈던 자가 경중(敬仲)인 공자완(公子完)⑯은 목숨에 위협을 느껴 제나라로 도망쳤다. 공자완의 재주를 알아본 제환공은 그를 공정(工正)⑰에 임명했다. 하루는 환공이 진완(陳完)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매우 즐겨 하다가 날이 어둑해지자 촛불에 불을 키고 계속 마시려고 하였다. 경중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다만 낮 동안만 주공을 모실 수 있을 뿐이지 밤 동안은 모실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촛불을 켜고 계속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경중은 과연 예를 알고 있는 사람이로구나! 」

제환공이 감탄해 마지않으며 술자리를 파하고 궁궐로 돌아갔다. 환공은 경중이 현자라는 사실을 알고 전(田) 땅을 채읍으로 하사했다. 이런 연유로 경중은 후에 제나라의 국권을 차지한 전씨들의 시조가 되었다.

그해에 노장공은 자신의 혼사를 위해 제나라 대부 고혜(高傒)와 방(防)⑱땅에서 만나 제녀와의 혼인을 약속했다.

한편 문강은 제양공이 변을 당하여 죽은 후로 매일 밤 양공과의 일을 생각하여 애통해 마지않다가 해수병에 걸렸다. 내시가 거(莒)나라 출신의 의원을 들여보내 진맥을 보게 했다. 문강이 오랫동안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못한 관계로 발동하는 음욕을 참지 못하고 즉시 거나라 의원을 자기 방에 머물게 하여 식사를 같이하고 곧이어 정을 통했다. 후에 거나라 의원이 자기 나라에 돌아가자 문강이 병을 치료하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두 번이나 거나라에 가서 의원의 집에 묶으면서 정을 계속 통했다. 거나라 의원이 견디지 못하고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들여보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 음탕하게 된 문강은 어떤 사람도 결국에는 양공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그것을 한탄하였다. 문강은 해수병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알마 후에 노나라 별궁에서 죽게 되었다. 그때가 주혜왕 4년 기원전 673년 가을의 일이었다. 문강이 임종을 앞두고 장공을 불러 유언했다.

「너와 약혼한 제녀가 장성하여 이미18세가 되었다. 너는 마땅히 맞이하여 내궁을 다스리는 부인으로 삼아야 한다. 3년 상이 끝나야 혼인을 할 수 있다는 법도에 얽매이지 말고 나로 하여금 구천에서 근심을 하지 않게끔 하고 또한 제나라는 바야흐로 방백의 업을 도모하고 있으니 너는 정성을 다하여 받들어 절대 자자손손 변치 않도록 하라!」

문강이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장공이 문강의 상을 평상시의 예법에 의거하여 행하고 유언에 따라 그해에 제녀와의 혼사를 치르려고 했다. 대부 조귀(曹劌)가 말했다.

「친모가 돌아가신 대상 중에는 혼인을 치를 수 없습니다. 상이 끝나는 3년 후에 혼인하셔야 합니다.」

「모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셨는데 상중에 하면 너무 빠르고 상을 끝내고 하면 너무 늦소. 그 중간쯤을 잡아 행하면 되겠소.」

곧이어 노장공은 문강의 상을 일 년으로 끝내고 방 땅에서 제나라 대부 고혜와 같이 만나 친히 제나라에 가서 빙례(聘禮)⑲를 올리기로 약속했다. 제환공 역시 노나라의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여 그 혼인의 시기를 늦추도록 했다. 그래서 주혜왕 7년에 이르러서야 혼사에 관한 의논이 정해져서 그해 가을의 길일을 잡아 혼례를 올리게 되었다. 장공은 노나라의 군위에 오른 지가 24년 되어 그의 나이는 이미 37세가 넘어 있었다. 제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 노장공은 혼사에 들어가는 비품과 비용 등의 모든 일을 호화롭게 치르도록 명하여 그 사치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의 부친 환공이 제나라에서 죽었음에도 오늘 다시 제나라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장공은 부군의 신위를 모신 환궁(桓宮)을 다시 새롭게 세우고 대들보에는 모두 단청을 칠하고 서까래에는 모두 정묘한 조각을 새겨 죽은 사람의 영혼에 영합하려고 했다. 대부 어손(御孫)이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장공은 듣지 않았다. 그해 여름 장공이 친히 제나라를 방문하여 8월에 제녀를 데리고 와서 부인으로 세웠다. 사람들은 제녀를 애강(哀姜)이라고 불렀다. 노나라 공실 대부들의 부인이 애강을 찾아가 소군(小君)⑳의 예를 행하며 일률적으로 폐백을 올렸다. 어손이 홀로 한탄하며 말했다.

「남자의 폐백으로는 신분이 높은 자 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은 옥구슬을, 제후들의 세자와 부용국의 군주는 비단을, 신분이 낮은 경과 대부들은 가축과 날짐승을 폐백의 물품으로 사용하는 것이 나라의 예법이다. 또한 여인의 폐백은 개암, 밤, 대추 및 육포에 한하여 사용하는 이유는 공경하는 뜻을 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남녀가 같이 물품으로 행하는 폐백은 분별이 없는 짓이다. 남녀가 유별함은 나라의 커다란 절목인데 군주의 부인으로 인하여 법도가 어지럽혀 졌으니 그 끝이 불행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겠다!.」

애강이 노나라에 시집온 후로 제와 노 두 나라의 우호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제환공은 다시 노장공과 군사를 합쳐 서(徐)와 융(戎)을 정벌하였다. 서와 융은 모두 제나라에 복종하여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제나라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모습을 본 정문공은 혹시 제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여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회맹하기를 청했다.

『제20회로 계속』

주석

①)동괵(東虢)/ 주문왕의 동생 숙(叔)이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북에 있다가 주평왕(周平王) 4년 기원전 767년 정무공(鄭武公)이 멸망시키고 정나라 영토에 편입시켜 경성(京城)으로 명명했다.

②정환공(鄭桓公)이 주나라의 경사(卿士)로 있을 때 견융의 침입을 예상하고 지금의 섬서성 화현(華縣)에 있었던 자기의 봉지를 하남성의 회(檜) 땅으로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신정성(新鄭城)이라고 명명하고 정나라의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자 지금의 형양시(滎陽市)에 일대에 자리 잡고 있던 동괵이 남쪽의 영토를 떼어 정백에게 바쳤다. 정무공 때에 이르러 동괵을 멸하고 그 땅에 지은 성이름이 경성(京城)이다.

③정려공(鄭厲公)이 제족(祭足)에게 쫓겨난 해는 기원전 696년의 일이고 다시 정백으로 복귀한 해는 17년 후인 기원전 679년이다.

④공숙은 정장공(鄭庄公)의 동모제 태숙(太叔) 단(段)을 말하고 공보정숙은 공숙의 손자이며 공손활(公孫滑)의 아들이다.

⑤견(鄄)/ 지금의 하남성 견성현(鄄城縣) 북 10키로

⑥유(幽)/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 동남 20키로의 하남성

⑦진(津)/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지강시(枝江市)에 있던 고을. 초나라의 수도였던 영도(郢都 : 지금의 강릉시(江陵市)) 서 30키로에 있었던 초나라의 전략적 방어기지다.

⑧적릉(踖陵)/ 황국(黃國)은 지금의 하남성 황천시(潢川市)에 있었던 소 제후국이었으며 적릉(踖陵)은 황천시 남 20키로 되는 곳이다.

⑨추(湫)/지금의 호북성 종상시(鍾祥市) 경내로 한수(漢水) 강안의 고을. 초나라 도성이었던 영성(郢城) 북동쪽 120키로 되는 곳에 있음.

⑩소국(蘇國)/ 지금의 하남성 제원시(濟原市) 경내에 있었던 소제후국

⑪남양(南陽)/ 동주의 도성이었던 낙양을 기준으로 하수의 건너편 지역을 통틀어 남양이라고 했다.

⑫騎虎者勢不能復下

⑬서괵(西虢)/ 주무왕 때 주문왕의 동생인 희숙(姬叔)이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근처에 봉해진 나라가 서괵(西虢)이고 주나라가 락읍으로 동천할 때 서괵의 군주도 주나라를 따라 동천하여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陜市)와 산서성 평륙시(平陸市) 근방을 영토로 하였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남쪽의 성을 하양성(下陽城), 북쪽의 성을 상양성(上陽城)이라고 했다. 이를 원래의 서괵과 구분하기 위해 북괵(北虢)이라 칭했다. 여기서의 서괵이란 북괵을 말한다. 후에 진헌공(晉獻公)때인 기원전 658년에 순식(荀息)의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멸망당하고 당진(唐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⑭반감(鞶鑒)/옛날 왕비가 허리띠를 장식하게 위해서 차고 다니던 작은 거울

⑮주천(酒泉)/ 본문에서의 위치는 미상(未詳)이나 한무제(漢武帝)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 흉노의 곤사왕(昆邪王)의 땅에 처음으로 주천군을 설치했다는 기사가 있다. -사기 대완(大宛) 열전.

⑯공자완(公子完)/ 진완(陳完), 전완(田完) 등으로 불리운다. 진완(陳完)은 진려공(陳厲公) 진타(陳他)의 아들이다. 진려공(陳厲公)은 진문공(陳文公)의 작은아들이다. 그 모친은 채후의 딸이다. 문공이 죽자 려공의 형인 포(鮑)가 채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환공(陳桓公)이다. 즉 환공과 타는 배다른 형제이다.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운 진환공을 채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 환공과 태자 면(免)을 죽이고 려공(厲公) 타(他)를 세웠다. 진후(陳侯)의 자리에 오른 려공도 채나라 여인을 데려와 부인을 삼았다. 채녀(蔡女)는 려공에게 시집오기 전에 이미 정을 통하고 있던 채나라 사람이 있었다. 채녀가 수시로 채나라에 드나들며 채인과 통정했다. 려공도 역시 채녀를 따라 채나라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환공의 작은아들 진림(陳林)이 려공이 채나라 사람의 힘을 빌려 자기의 부친과 형을 살해한 일에 원한을 품고 채나라 사람과 공모하여 려공을 채나라로 유인하여 죽였다. 진림(陳林)이 스스로 진후(陳侯)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장공(陳庄公)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려공의 장남인 진완(陳完)이 진후(陳侯)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대부가 된 것이다. 기원전 672년 진완이 제나라로 망명한 이래 그의 후손인 태공 전화(田和)가 제간공(齊簡公)을 바다 가운데의 외딴 섬으로 안치하고 강씨의 제나라 국권을 빼앗은 것은 그 후로 286년 만인 기원전 386년의 일이다.

⑰공정(工正)/ 장인(匠人)들과 과 각종 건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감독하는 벼슬

⑱방(防)/현 산동성(山東省) 성무현(成武縣) 북동 20키로(곡부시 동 20키로)

⑲빙례(聘禮)/ 혼인할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예물을 올리는 의식

⑳소군(小君)/ 제후의 신하가 그 제후의 아내를 부르는 호칭.

울리히
12-04-30 15:23 
제나라 여편네는 어째 중이의 마누라 빼곤 나라 기둥을 시원하게 뽑아버릴 상이네요. 얘기 시작도 안했는데 왠지 비참한 결말이 예상이 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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