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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0:23:327074 
제20회. 違卜立妃(위복립비), 子文相楚(자문상초)
양승국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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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제20회 違卜立妃 子文相楚(위복립비 자문상초)

점괘를 무시하고 여희를 부인으로 세우는 진헌공과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부흥시킨 자문 투곡오토(鬪穀於兎)

1. 봉명취뢰(奉命取賂)

- 천자의 칙명을 빙자하여 위나라의 뇌물을 취한 제환공

주혜왕10년 기원전 667년 서(徐)①와 융(戎)②이 모두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 신하의 예를 갖추어 복종하겠다고 맹세했다.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제나라를 보고 정문공 첩(捷)도 제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혹시 정벌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회맹하기를 청했다. 정나라의 청을 받아들인 제환공이 다시 송(宋), 노(魯), 진(陳), 정(鄭) 네 나라의 군주들을 유(幽) 땅으로 불러 회맹을 주재하자 천하의 인심은 모두 제나라에 쏠리게 되었다. 제환공이 회맹을 끝내고 귀국하여 군신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 연희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술이 어느덧 거나하게 되었을 때 포숙아가 술잔을 잡고 환공에게 바치며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환공이 술잔을 받아 들고 말했다.

「오늘의 술자리는 매우 즐겁구나.」

포숙아가 듣고 간언을 올렸다.

「신이 듣기에‘밝은 입금에 어진 신하라면 비록 즐거움 속에 있다 하더라도 지난날의 어려웠던 시절을 결코 잊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은 원컨대 주군께서는 절대 거나라에서 망명생활 할 때의 어려웠던 시절을, 관중은 노나라에서 끌려올 때 타고 왔던 함거를, 영척은 주군의 수레 앞에서 소를 치던 때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제환공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포숙아를 향해 엎드려 연거푸 절을 하며 말했다.

「과인과 여러 대부들 모두는 결코 그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경의 말은 제나라의 사직에 더 없이 큰 홍복입니다.」

그날, 제환공은 신하들과 마시기를 심히 즐겨한 후에 잔치를 파했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이 지내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달려와 보고하였다.

「주나라 천자의 명을 받아 사자로 온 소백요(召伯寥)가 당도하여 주공의 알현을 청하고 있습니다.」

제환공이 밖으로 나가 소백요를 영접하여 역관에 모셨다. 소백요는 제환공에게 여러 제후들을 감독할 수 있는 방백(方伯)의 직을 내려 태공(太公)의 직무를 이어받아 정벌의 일을 전결하여 처리할 수 있다는 천자의 칙명과 함께 혜왕이 별도로 내린 명을 전했다.

「위후 삭(朔)이 왕자퇴를 도와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역적을 돕고 순리를 범한 짓이었다. 짐이 그 일을 가슴속에 품고 살기를 이미 10년이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직 천자의 이름으로 토벌하지 않아 그 위엄을 밝히지 못했다. 백구는 번거롭겠지만 짐을 위해 위나라를 토벌하여 그 죄를 물어주었으면 한다.」

주혜왕11년 기원전 666년, 제환공은 친히 전차와 보병을 인솔하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위혜공 삭은 죽고 그 아들 적(赤)이 뒤를 이은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적이 바로 위의공(衛懿公)이다. 위의공은 제환공이 쳐들어 온 이유도 묻지 않고 군사를 몸소 이끌고 성문을 열고 출전했다. 제군과 한바탕 크게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싸움에서 패한 의공은 성안으로 다시 쫓겨 들어갔다. 제환공이 뒤를 추격하여 위나라 도성 밑에 이르자 천자의 명을 공포하고 위혜공의 죄상을 열거했다. 위의공이 듣고 말했다.

「말인즉 부군이 저지른 잘못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위의공은 즉시 그의 장자 개방(開方)에게 금은과 비단 다섯 수레를 주어 사자로 제환공에게 보내 강화를 청하도록 하여 부친이 저지른 죄의 용서를 빌었다.

위나라가 보내온 재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제환공이 말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법에 아비가 지은 죄는 그 자손에게 물을 수 없다고 했으며, 또한 다행히 위후가 왕명을 받들어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과인이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위나라의 사자로 온 공자 개방이 제나라 군사들의 강성함을 보고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제환공을 받들어 모시기를 원했다. 개방의 청을 받은 제환공이 말했다.

「그대는 곧 위후의 장자라, 때가 되면 순서에 의해 마땅히 위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데 어찌하여 군주의 자리를 마다하고 과인을 섬기는 신하가 되고자 하는가?」

개방이 대답했다.

「군후 전하께서는 곧 천하의 어진 패주이십니다. 단지 좌우에 서서 모시면서 말고삐라도 잡을 수 있다면 저로서는 더 없는 영광입니다. . 어찌 조그만 나라의 군주가 된다고 해서 그보다 기쁨이 더 하겠습니까?」

제환공이 개방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제나라의 대부에 봉하고 수초(竪貂), 이아(易牙)와 함께 총애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삼귀(三貴)’라고 불렀다. 후에 개방은 제환공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기의 고모이며 위후의 작은 여동생이 대단한 미인이라고 고했다. 제환공은 사자에게 폐백을 들려 위후에게 보내어 그 여동생을 희첩으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옛날 위혜공이 그의 딸을 제나라에 잉첩(媵妾)의 신분으로 보내 제환공의 첩실로 들인 적이 있었는데 이번의 여인은 그녀의 작은 동생이었다. 위의공은 감히 제환공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즉시 위희를 제나라로 보냈다. 제나라는 언니를 장위희(長衛姬), 동생을 소위희(小衛姬)라 불러 구별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제환공의 행위를 비난했다.

위혜공 삭이 지은 죄는 산처럼 무거운데

왕명으로 죄를 묻는다 하면서 뇌물을 받고 돌아섰는가?

천자를 높이고 대의를 천하에 편다고 말했으나

결국은 공명심과 이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던가?

衛侯罪案重如山(위후죄안중여산)

奉命如何取賂還(봉명여하취뢰환)

漫說尊王申大義(만설존왕신대의)

到來功利在心間(도래공리재심간)

2. 曲沃簒晉(곡옥찬진)

- 분국 곡옥(曲沃)이 본국 당진(唐晉)의 국권을 찬탈하다. -

한편 당진(唐晉)③은 주나라 왕족이 봉해진 희성(姬姓)의 제후국으로 작위는 후작(侯爵)이였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오동잎을 따서 그의 동생 당숙우(唐叔虞)와 놀다가 그것을 부절로 삼아 당진에 봉하고 강(絳)④에 도읍을 정하도록 했다. 성왕이 오동잎으로 동생 숙우를 당(唐) 땅에 봉한 일을 동엽봉제(桐葉封弟)⑤라고 한다. 당숙우가 당진에 봉해진 이래 9대 째 목후(穆侯)에 이르렀다. 목후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장자는 구(仇)라하고 차자는 성사(成師)라 했다. 목후가 죽자 장자 구가 뒤를 이었다. 구가 진문후(晉文侯)다. 진문후는 주유왕 때 주나라가 견융에게 침입을 당하자 군사를 일으켜 섬진(陝秦), 정(鄭) 및 위(衛) 등의 제후국과 함께 출전하여 구원했다. 문후가 죽고 그 아들 소후(昭侯)가 뒤를 이었다. 소후는 그의 숙부인 환숙(桓叔) 성사(成師)의 강대한 세력을 두렵게 생각하여 그를 곡옥(曲沃)⑥의 땅에 봉하고 곡옥백(曲玉伯)으로 삼았다. 이어서 소후가 국호를 진(晉)에서 익(翼)으로 바꾸었음으로 당진은 본국 익(翼)과 곡옥(曲沃)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졌다. 소후 7년 기원전 739년에 대부 반보(潘父)가 소후를 시해하고 곡옥백을 불러들여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히려고 했다. 익인(翼人)들이 불복하여 반보를 죽이고 소후의 동생 평(平)을 세웠다. 이가 효후(孝侯)다. 효후 8년 기원전 731년, 환숙 성사가 죽고 그의 아들 선(鱔)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의 장백(莊伯)이다. 효후 15년 기원전 724년, 장백이 익을 공격했다. 효후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대적하였으나 싸움에서 크게 지고 자신은 장백에게 살해되었다. 익인들은 효후의 동생 극(郤)을 세웠다. 이가 악후(顎侯)다. 그리고 2 년 후인 기원전 721년, 악후가 군사를 이끌고 곡옥을 공격했다. 그러나 악후도 역시 곡옥의 군사들에게 크게 패하고 자신은 수(隨)⑦나라로 도망쳤다. 악후의 아들 광(光)이 뒤를 이었다. 이가 애후(哀侯)다. 애후 2년 기원전 716년, 곡옥의 장백이 죽고 그의 아들 칭(稱)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곡옥의 무공(武公)이다. 애후 8년 기원전 710년에 무공이 곡옥의 장수 한만(韓萬)과 양굉(梁宏)을 이끌고 익을 공격했다. 애후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맞이해 싸웠으나 싸움에서 지고 자신은 싸움 중에 죽었다. 주환왕이 경사(卿士) 괵공(虢公) 림보(林父)를 보내 애후의 동생 민(緡)을 당진의 군주로 세우라고 명했다. 이가 당진의 소자후(小子侯)다. 소자후 4년 기원전 706년, 소자후를 곡옥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두 나라를 하나로 합친 무공은 익(翼)의 강성(絳城)을 도읍으로 정해 나라 이름을 옛날처럼 진(晉)이라고 했다. 무공은 당진의 국고에 있던 금은보화를 모두 수레에 싣고 주나라에 가져가 주리왕(周釐王)에게 바쳤다. 뇌물을 탐한 리왕이 마침내 곡옥의 무공을 당진의 군주로 승인했다. 무공이 진후(晉侯)로 칭한 지 39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궤제(詭諸)가 뒤를 이었다. 이가 당진의 헌공(獻公)이다.⑧

헌공은 환숙과 장백의 자손들이 혹시 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들을 미워했다. 대부 사위(士蔿)가 계책을 올려 그 족속들을 분산시켜 살게 하고 후에 유인하여 모조리 죽였다. 사위가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한 헌공은 그를 대사공(大司公)에 임명하여 강읍(絳邑)을 대성으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증축공사를 벌리게 했다. 이윽고 강성의 증축공사가 끝나자 그 모습은 극히 장려하여 대국의 도성에 비견할 수 있게 되었다.

3. 위복립비(違卜立妃)

- 점괘를 무시하고 여희를 정비로 세워 당진에 변란을 불러들이는 진헌공(晉獻公) -

헌공은 옛날 세자로 있을 때 가희(賈姬)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으나 오래도록 소생이 없어 다시 견융주(犬戎主)의 질녀(姪女)인 호녀(狐女)를 취하여 아들 중이(重耳)를 낳았다. 다시 소융(小戎)의 윤성씨(允姓氏) 딸을 취하여 이오(夷吾) 낳았다. 헌공의 부군 무공이 만년에 제나라에 혼사를 청하여 제환공의 종녀 제강(齊姜)를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때는 무공이 나이가 너무 들어 제강과는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다. 제강은 아직 젊고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다웠기 때문에 헌공이 사모한 끝에 범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을 몰래 신씨(申氏) 성의 사가에 맡겨 기르게 하였는데 이런 연유로 이름을 신생(申生)이라고 했다. 헌공이 즉위할 때에 가희는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제강을 부인으로 세웠다. 당시 중이는 이미 21세의 성년이 되었고 이오 역시 신생보다는 나이가 많았으나 신생은 곧 정부인의 소생이라 하여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적서를 논하여 신생이 세자가 되었다. 대부 두원관(杜原款)과 리극(里克)을 각각 태부(太傅)와 소부(少傅)로 임명하여 세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제강은 딸을 하나 더 낳고 바로 죽었다. 헌공은 다시 가희의 동생을 취하여 첩으로 삼고 가군(賈君)이라 불렀다. 가군 역시 소생이 없어 제강이 낳은 여아를 맡아 길렀다. 헌공 15년, 여융(驪戎)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여융의 군주가 즉시 강화를 청해 오면서 자기의 두 딸을 헌공에게 바쳤다. 그래서 여융주의 장녀를 여희(驪姬)라 하고 차녀는 소희(小姬)라 불렀다.

여희라는 여자는 용모가 태어날 때부터 아름다워 자태는 식규(息嬀)와 같았고, 요염하기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비였던 달기(妲己)를 닮았는데 지략이 천 가지가 넘어 교활한 거짓말은 한입으로도 백 가지를 넘게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여희가 헌공 앞에 있을 때는 충성과 신의를 말하며 갖은 아양을 떨어 헌공의 환심을 얻은 결과 항상 정사에 참여하였는데 그녀가 열 가지 참견을 하면 그 중 아홉 가지는 헌공이 들어주었다. 그래서 헌공이 총애하기를 그지없이 하여 음식을 먹을 때는 항상 그녀와 같이 했다. 몇 해가 지나가자 여희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해제(奚齊)라 했다. 또 해가 바뀌어 소희도 아들을 낳아 탁자(卓子)라 했다. 헌공의 마음은 이미 여희에게 혹해 있어 자연히 그의 소생인 해제를 사랑하게 되었다. 헌공은 죽은 제강의 부인 자리에 여희를 세우고 싶은 마음에 태복(太蔔) 곽언(郭偃)을 시켜 거북등에 점을 치게 하여 여희를 부인으로 삼을 경우 길흉을 알아보게 했다. 곽언이 점괘를 헌공에게 바쳤다.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전횡하면 변이 나서

그대의 아름다움을 빼앗기니

하나는 향기가 나고, 하나는 악취를 풍겨서

10년이 지나도 그 냄새가 없어지지 않으리라!

專之渝(전지유)

攘公之羭(양공지유)

一薰一蕕(일훈일유)

十年尙有臭(십년상유취)

「어떻게 풀이하는가?」

「전(專)은 마음대로 한다는 말이고 유(渝)는 생각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즉 전지유(專之渝)는 마음먹는 대로 생각이 변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양(攘)은 탈(奪)이고, 유(羭)는 곧 아름다운 것입니다. 즉 양공지유(攘公之羭)란 말은 공으로부터 아름다운 것들을 빼앗아 간다는 말입니다. 향풀에서 나는 향기를 훈(薰)이라 하고 악풀에서 나는 악취를 유(蕕)라 합니다. 악취가 향기를 누르니 더러운 기운이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아 당진의 궁실은 십 년이 넘도록 악취로 뒤덮이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헌공의 마음속에는 여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 곽언의 말을 선뜻 믿지 못하고 다시 사소(史蕭)를 불러 시초(蓍草)⑨를 사용하는 점을 치게 했다. 사소는 관괘(觀卦)⑩를 뽑아 육이효(六二爻)⑪를 얻어 효(爻)에 따라 나온 점괘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엿보는 자는 여자의 정절에 이로운 일이다.』

헌공이 듣고 말했다.

「내궁에서 살면서 바깥세상을 넘보는 행위는 여자로서 올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길한 점괘가 있겠는가?」

곽언이 헌공에게 간했다.

「천지가 열린 이래 모양이 먼저 생기고 후에 수(數)가 생겼습니다. 거북은 모양이고 시초는 수입니다. 거북점을 따르지 않고 시초점을 따르는 일은 잘못입니다.」

사소가 헌공의 시초점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고 지적했다.

「예(禮)에 두 사람의 적실은 없기 때문에 제후들은 정실을 두 번 두지 않는 다고 하였습니다. 즉 시초의 괘에 나타난 점괘를 보면 엿본다고 하여 이것은 부인을 또다시 취한다는 뜻인데 어찌 올바른 태도라고 하십니까? 올바르지 않으니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역서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엿보지 않으니 길하다’고 했습니다.」

헌공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거북등과 시초의 점괘가 이미 그리 정해졌다면 그것은 모두가 귀신들의 소행일 뿐이다.」

결국 헌공은 사소와 곽언의 점괘를 무시하고 길일을 택해 태묘에 고하고 여희를 정비로 소희는 차비로 삼았다. 사소가 대부 리극에게 말했다.

「우리 당진국은 장차 망하게 되었습니다.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리국(里克)이 크게 놀라 물었다.

「우리 당진국이 어째서 망한다고 하십니까? 」

「여융 때문입니다. 」

이극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사소가 다시 자세히 설명했다.

「옛날 하나라 걸왕이 유시(有施)를 정벌하자 유시 사람들이 말희(妺姬)를 걸왕에게 바쳤습니다. 걸왕이 말희를 총애한 결과 하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은(殷)나라의 주왕(紂王) 신(辛)이 유소(有蕭)를 정벌하자 유소씨가 자기의 딸 달기(妲己)를 주왕에게 바쳤습니다.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자 곧이어 은나라가 망했습니다. 또한 주유왕이 포성의 성주를 감옥에 가두자 포인이 포사(褒姒)를 바쳤습니다. 포사를 총애한 유왕의 서주는 견융에 의해 망하고 그 나라를 동쪽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공께서 여융을 정벌하고 그 여인들을 얻고 또한 더욱 총애를 하니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마침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걸어오던 태복 곽언을 보고 이극이 사소가 한 말을 전했다. 곽언이 듣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변란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래도 망할 정도의 운세는 아닙니다. 옛날 성왕의 동생이신 당숙우(唐叔虞)께서 이 땅에 봉해졌을 때 점을 쳐 ‘하(夏) 땅을 바르게 다스려서 왕국을 다시 일으키시다’라는 점괘를 얻었습니다. 당진의 백업(伯業)이 바야흐로 크게 일어나려 하는데 어찌 망국의 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리극이 물었다.

「만약이 란이 일어난다면 그때가 언제이겠습니까?」

「선과 악의 업보는10년이면 모두 나타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십(十)이라는 숫자는 가득 참을 의미합니다.」

이극이 그 말을 죽간에 기록하여 보관했다.

4. 소리장도(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감추다. -

한편 여희를 정비로 세우고 계속해서 그 소생 해제도 세자의 자리에 올리려고 결심한 헌공이 어느 날 여희에게 그 뜻을 전했다. 마음속으로는 해제를 세자로 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신생이 이미 세자로 책봉되어 아무런 이유 없이 바꿀 경우 여러 신하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여희는 본마음과는 달리 오히려 세자를 바꾸기에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을 서투르게 진행했다가 그르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다. 또한 중이와 이오도 신생과 서로 우애하고 모두 헌공의 좌우에 있어, 만약에 세자를 바꾸려다가 성공하지 못하면 오히려 긁어 부스럼만 만들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우려했다. 이런 이유로 여희는 마음속의 생각과는 달리 곧바로 헌공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했다.

「신생을 태자로 세운 사실은 모든 제후들이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태자는 지혜롭고, 더욱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군께서 신첩의 모자 때문에 태자를 폐하려고 하시니 첩은 마땅히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합니다.」

헌공이 여희의 말을 진심으로 알고 세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그만두었으나 여희에게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5. 一國三公 吾誰適從(일국삼공 오수적종)

- 한 나라에 군주가 셋이니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 -

그때 헌공에게는 아첨을 해서 총애를 받고 있는 대부 중에 이름이 양오(梁五)와 동관오(東關五)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외부의 일을 무슨 일이든지 모두 헌공에게 일러바치고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려 당진의 백성들은 그들을 이오(二五)라 불렀다. 또 연극을 하는 사람 중에 이름을 시(施)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린 나이의 자색이 고운 동자였다. 사람됨이 영리하고 꾀가 많을 뿐만 아니라 달변에 말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헌공이 특별히 총애하여 여자들만 사는 궁궐에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자 그는 아무 데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은 못 가는 데가 없었다. 마침내 우시(優施)는 여희와 간통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의 정은 더욱 깊어졌다. 여희로부터 가슴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듣게 된 우시는 세 공자들과 헌공 사이를 이간시키고 세자의 자리를 빼앗을 계략을 서서히 도모했다. 우시가 계책을 여희에게 말했다.

「우선 세 공자를 멀리 보내어 주공의 곁에서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땅한 명분을 찾아 세 공자를 변방의 땅에 봉해 도성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연후에 별도의 계책을 마련하기로 하고 우선 이번 일은 반드시 외신의 입을 빌려야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일을 맡기기에는 동관오와 양오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오(二五)를 이용하기 위해 부인께서 성의를 다하여 황금과 비단을 후하게 하사하여 그들과 인연을 맺고 그들로 하여금 주공에게 나아가 진언하게 하면 주공께서는 듣지 않을 리 없습니다.」

여희가 즉시 황금과 비단을 내어 우시에게 주면서 이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우시가 먼저 양오를 찾아가 만나서 말했다.

「군부인께서 대부와 친숙하게 지내고자 변변치는 않지만 경의(敬意)를 표하는 징표로 이 예물을 저로 하여금 전달하게 하였습니다.」

양오가 크게 놀라 말했다.

「군부인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가? 나에게 반드시 부탁하실 일이 있으실 것이오. 그대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받지 않겠소.」

우시가 여희의 생각을 양오에게 모두 고했다. 우시의 말을 들은 양오가 말했다.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동관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야 하오. 어찌 할 생각이오?」

「부인께서는 대부께 드린 선물을 동관오에게도 똑 같이 준비하셨습니다.」

우시와 양오 두 사람은 여희가 별도로 준비해준 선물을 가지고 동관오의 집을 같이 찾아갔다. 의기가 투합한 세 사람은 여희의 계책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서로 상의한 후에 헤어졌다. 다음날 조회가 서자 양오가 나아가 헌공에게 아뢰었다.

「곡옥(曲沃)은 우리 당진의 공실이 일어난 땅으로 선군들의 종묘가 있는 곳입니다. 또한 포(蒲)⑪와 굴(屈)⑫ 땅은 융적(戎狄)의 땅과 가까운 고을로써 변경의 요지에 해당합니다. 이 세 고을은 다스릴 사람이 없으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 공실이 흥기한 고을과 변경의 요지를 다스리는 사람이 없다면 백성들이 군주의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융적의 오랑캐 역시 항상 그 틈을 노려 우리의 국경을 침략할 것입니다. 만약에 태자로 하여금 곡옥을, 중이와 이오 두 공자로 하여금 각기 포와 굴을 다스리게 하고 주군께서는 나라의 중앙에 계시어 전국을 다스리신다면 우리나라는 장차 반석처럼 탄탄해 질 것입니다.」

「세자가 도성 밖에서 머물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는가?」

헌공이 묻자 동관오가 나와 말을 받았다.

「태자는 군주 다음으로 중한 신분입니다. 곡옥도 나라에 있어서 두 번째 가는 요지입니다. 태자가 아니고 누가 곡옥을 다스리겠습니까?」

「곡옥은 태자가 나가서 다스리면 된다고 하겠지만 포와 굴은 모두가 황무지와 다름없는 땅이다.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성이 없으면 황야라 하겠지만 성을 쌓으면 모두 성읍이 되는 법입니다.」

이번에는 이오가 나서서 자신들의 말을 강변했다.

「일조에 두 고을이 늘어나니 안으로는 버린 땅을 일궈 두 공자에게 봉하게 되었고 밖으로는 변경의 땅을 개척하여 영토를 넓히니 또한 나라는 더욱 강성해질 것입니다.」

헌공이 이오의 말을 따라 세자 신생을 곡옥으로 보내 당진의 공실이 흥기한 종읍(宗邑)을 다스리게 하고, 태부 두원관(杜原款)을 같이 보내 보좌하도록 했다. 또한 중이는 포읍으로, 이오(夷吾)는 굴읍으로 보냈다. 중이의 외숙 호모(狐毛)는 포읍으로 가서 중이를 모시고, 대부 여이생(呂鈶甥)은 굴읍으로 가서 이오를 보좌했다. 또 조숙(趙夙)에게 명하여 태자를 위하여 곡옥에 성을 더욱 넓고 높게 쌓아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그 이름을 신성(新城)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다시 대사공 사위에게는 굴과 포 두 고을을 오가며 그곳의 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자 사위는 가시덤불을 모아 흙으로 개서 토성을 쌓게 하여 적당히 일을 끝맺게 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성을 튼튼하게 쌓지 못해 후일이 걱정이 됩니다.」

사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몇 년 후면 이 성들은 공실과는 원수지간이 될 터인데 견고하게 쌓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시 한 수를 지어 앞날을 예언했다.

호구가 방용하니

일국에 군주가 셋이라

나는 누구를 따라야 할까?

狐裘尨茸(호구방용)

一國三公(일국삼공)

吾誰適從(오수적종)

호구(狐裘)는 귀인의 복장이며 방용(尨茸)은 어지러운 모습이다. 귀인이 많다고 한 것은 적서나 장유의 구분도 없음을 비유한 말이고 ‘일국에 세 명의 군주’는 장차 당진국의 군주 자리에 번갈아 가며 앉게 되는 해제, 이오, 중이를 지칭한다. 여희가 틀림없이 세자의 자리를 빼앗아 자기의 아들에게 전해 당진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위가 시를 지어 예언한 노래다. 마침내 신생과 두 공자는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으로 쫓겨나게 되어 헌공의 곁에는 오로지 해제와 탁자만이 있게 되었다. 여희가 더욱 헌공의 마음을 미혹시켜 총애를 독차지했다. 염옹이 시를 지어 말했다.

원래 여색은 화근의 시작인데

여희를 총애한 헌공은 실로 혼매한 군주다.

변경의 먼 곳에 헛되이 힘을 들여 토성을 쌓으면서

병겁의 화가 궁궐 안에 숨어 있음을 알지 못했다!

女色從來是禍根(여색종래시화근)

麗姬寵愛獻公昏(여희총애헌공혼)

空勞畚築疆場遠(공노분축강장원)

不道幹戈伏禁門(부도간과복금문)

한편 헌공은 당진의 군제를 상하 양군으로 새로 정비하여 자기는 직접 상군을 거느리고 세자 신생은 하군을 이끌게 했다. 이어서 헌공은 태자 신생에게 명하여 조숙과 필만(畢萬) 두 장군을 이끌고 경(耿)⑬, 곽(霍)⑭, 위(魏)⑮ 등의 3국을 공략하게 했다. 죽기를 각오하고 용감히 싸운 신생은 3국을 멸하고 당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헌공은 그들의 전공을 치하하여 조숙에게는 경 땅에 필만에게는 위 땅의 대부로 봉하여 그들의 채읍으로 삼게 했다. 태자 신생의 공이 높아져 여희가 예전보다 더욱 심하게 시기했다. 여희는 신생을 해칠 생각을 한결 독하게 먹었다.

6. 시형자립(弑兄自立)

- 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좌를 차지한 초성왕(楚成王) 웅운(熊惲) -

한편 초나라의 웅간(熊艱), 웅운(熊惲)은 형제지간으로서 모두 초문왕과 식규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웅운은 재주가 형보다 뛰어나 식규의 총애를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의 사대부들도 역시 따랐다. 이윽고 초문왕이 죽자 이미 세자의 신분으로 초왕의 뒤를 이은 웅간은 마음속으로 자기 동생을 시기하여 항상 트집을 잡아 죽여서 그 후환을 없애 버리려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웅간의 좌우에도 웅운을 받들고자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 웅운을 쉽게 죽이지 못했다. 정사에 태만하고 놀이와 사냥에만 빠진 웅간은 재위 3년 동안 이루어 놓은 일은 하나도 없었다. 웅간의 살해위협에 시달린 끝에 이미 형제사이의 의가 상했다고 생각한 웅운은 자객을 몰래 양성하여 사냥 중인 웅간을 습격하여 살해했다. 웅운은 웅간이 병으로 죽었다고 식규에게 고했다. 문부인이 비록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일에 대해 명백히 밝히지 않고 즉시 여러 대부들을 시켜 웅운을 초왕으로 옹립하게 했다. 웅운이 초성왕(楚成王)이다. 웅간은 나라를 다스렸다고 말할 수 없어 시호를 내리지 않고 단지 도오(堵敖)라고만 부르고 장례도 왕의 신분으로 행하지 않았다.

성왕은 숙부 공자선(公子善)을 영윤으로 삼았다. 공자선의 자는 자원(子元)이다. 자원은 문왕이 죽은 이래로 항상 마음 한편으로 왕위를 찬탈할 뜻을 품고 있었다. 또한 천하절색인 그의 형수 식규를 마음속으로 사모하여 항상 정을 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또한 웅간, 웅운 형제가 나이가 모두 어려, 스스로를 높여 자만하고 안중에는 보이는 것이 없이 오만하게 굴었다. 단지 대부 투백비(鬪伯比)가 정직무사할 뿐만 아니라 재능과 지혜가 많아 감히 함부로 전횡하지 못했다. 주혜왕(周惠王) 11년 기원전 666년, 투백비가 병이 들어 죽었다. 이에 아무도 거리낄 사람이 없게 된 자원은 왕궁과 가까운 곳에 관사를 크게 짓고 매일 사람을 시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악기를 타게 하여 문부인 식규의 마음을 끌려고 했다. 문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시종에게 물었다.

「궁 밖의 노래와 악기 소리는 어디서 나는 것인가?」

「이 소리는 영윤이 새로 지은 관사에서 나는 소리 입니다.」

「선군께서는 창을 들고 춤을 추어 무예를 닦아 제후들을 정벌하여 초나라 조정에는 조공이 끊일 날이 없었다. 오늘 초나라 병사가 중원에 나아가 보지 못한지가 10년이 넘었는데 영윤이 그 수치를 설욕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미망인 옆에서 노래와 춤만을 일삼고 있으니 이것 또한 기이한 일이 아닌가?」

시종이 문부인의 말을 자원에게 전하자 자원이 말했다.

「부인께서 아직 중원을 잊지 못하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정나라를 정벌하지 못한다면 나는 장부가 아니다.」

7. 懸門不發 空城設疑(현문불발 공성설의)

- 성문을 닫지 않고 공성계를 행하여 초군을 물리친 정나라 -

즉시 병거600승을 동원하여 스스로 중군대장이 된 자원(子元)은 투어강(鬪禦疆)과 투오(鬪吾)는 전대로 삼아 대장기를 앞세워 진군케 하고 왕손유(王孫遊)와 왕손가(王孫嘉)는 후대로 삼아 호호탕탕 정나라를 향하여 쇄도해 쳐들어갔다.

초나라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문공은 급히 백관을 불러 그 대책을 상의했다. 도숙(堵叔)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초나라 군사들의 수가 많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화의를 청하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사숙이 나서며 도숙의 말에 반대했다.

「우리가 제나라와 회맹을 한지가 어제라 제나라는 반드시 원군을 보내 우리를 구할 것입니다. 마땅히 굳게 지키고 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나이가 아직 어리고 성질이 괄괄한 세자 화(華)가 앞으로 나서며 자기에게 군사를 맡기면 성에 의지하여 초나라 군사를 막겠다고 청했다. 숙첨이 나와 사숙의 편을 들었다.

「세 사람의 말 중 저는 사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초나라 군사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 갈 것입니다.」

정문공이 물었다.

「초나라 영윤이 스스로 장수가 되어 군사를 끌고 쳐들어왔는데 어찌 스스로 물러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초나라가6백 승에 달하는 많은 병거를 동원하여 쳐들어 왔지만 전력을 다해 싸움에 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원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을 갖고 있는 이유는 식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입니다. 무릇 필승을 바라는 자는 역시 패전도 두려워합니다. 초나라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신에게는 물리칠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정문공이 여러 대부들과 대책을 의논하고 있는데 보고가 들어 왔다.

「길질관(桔柣關)⑯을 넘어 계속 진군한 초군은 우리 신정성 외곽을 이미 돌파하고 순문(純門)⑰을 통하여 머지않아 규시(逵市)⑱에 진입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도숙이 말했다.

「초나라 군사들이 가까이 왔으니 화의를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동구(桐邱)⑲로 잠시 피해야 되겠습니다.」

숙첨이 걱정하는 정문공을 위로하여 안심시켰다.

「초나라 군사들을 너무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즉시 명을 발하여 군사들을 성내 곳곳에 매복시켜 놓은 숙첨은 성문을 크게 열어 놓은 후 시중의 백성들로 하여금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평상시와 다름없이 거리를 왕래하도록 했다. 전대를 이끌고 먼저 정나라 도성에 당도한 투어강이 성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정나라 도성은 성문을 열어 놓고 사람의 왕래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하고 성벽 위에는 군사들의 움직임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마음속으로 의심하는 생각이 든 투어강이 투오를 향해 말했다.

「정나라 도성이 저와 같이 한가하니 아마도 정나라가 위계를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를 속여 성안으로 불러들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작전인 듯하니 경솔하게 진격할 수 없다. 영윤이 당도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대책을 상의해야 하겠다. 」

투어강은 즉시 군사들을 정성에서5리 뒤로 물리쳐 영채를 세웠다. 얼마 후에 자원이 본대의 대군을 이끌고 투어강의 전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 당도했다. 투어강과 투오가 정나라 도성의 정황을 자원에게 보고했다. 자원이 듣고 친히 영채의 높은 망루에 올라가서 정나라 도성 안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초나라의 전대가 뒤로 물러나 영채를 세우고 있을 때는 정나라 진영은 이미 숙첨의 지시에 따라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정나라 도성 안의 정기가 엄정하고 무장한 군사들이 수풀처럼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본 자원이 탄식하여 말했다.

「정나라에 삼량(三良)이 있다고 하던데 그 지모를 측량할 수 없구나! 만일 내가 싸움에서 지고 돌아간다면 무슨 면목으로 문부인을 볼 수 있으리오! 다시 정성의 허실을 정탐한 후에 성을 공격해야 되겠다.」

다음날 후대를 끌고 뒤따라 온 왕손유와 왕손가가 전령을 보내와 보고하였다.

「제후(齊侯)가 송과 노 두 나라의 군주들을 이끌고 정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친히 대군을 휘동하여 이곳으로 진격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투어강과 투오가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군령을 기다리며 적군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자원이 크게 놀라 여러 장수들을 돌아 향하여 말했다.

「중원의 제후연합군이 우리의 퇴로를 끊으면 우리는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되어 낭패를 당하고 말 것이다. 내가 이미 정나라 도성 밖의 큰 거리를 공격하여 전리품 등을 얻은 바가 적지 않으니 그것으로도 가히 싸움에서 이겼다고 할 수 있겠다.」

자원은 즉시 비밀리에 군령을 내려 군사들에게 함매(銜枚)를 물리고 소리가 나는 방울을 말에서 떼어내게 하여 그날 밤으로 병장기들을 정리하여 철군하도록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나라 군사들이 뒤를 쫓을까 걱정되어 군막을 걷지 말고 그대로 두고 큰 대장기를 평상시처럼 세워놓아 정나라 군사들을 속이려고 했다. 초군의 행렬이 정나라 땅의 경계를 벗어나자 자원은 즉시 명을 발하여 종을 울리고 북을 쳐 개선가를 부르면서 행군하게 했다. 자원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문부인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영윤께서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하셨습니다.」

문부인이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말했다.

「영윤께서 만약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면 마땅히 나라의 사대부들에게 널리 알리고 싸움 중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지은 자에게는 벌을 주어 상벌을 명백히 한 후에 사직의 태묘에 고하여 선왕들의 혼령을 위무하여야 하거늘 한낮 미망인에게 고할 것이 무엇입니까?」

자원이 문부인의 전하는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초왕 웅운은 자원이 싸우지도 않고 군사를 끌고 되돌아 온 것을 알고 이때부터 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겼다.

한편 정나라의 숙첨은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성안을 순시하면서 밤을 꼬박 세우며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어둠 속에서 초나라 막사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자 손가락으로 초나라 진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것은 빈 천막이다.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물러갔다.」

여러 사람들이 숙첨의 말을 믿지 못하고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저 군막은 대장이 묶는 곳이다. 쟁이와 징(鉦)을 군막 앞에 설치하는 목적은 대장이 호령에 따라 그것들을 동시에 울리고, 군사들로 하여금 함성을 지르게 하여 천지를 진동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여러 종류의 새들이 군막 위에 앉아서 떠들썩하게 지저귀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군막이 비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짐작컨대 제후들의 구원병이 당도한 사실을 초나라 장수가 먼저 알고 물러갔음이라!」

그리고 얼마 후에 제후 연합군을 맞이하러 보냈던 사자가 달려와 고했다.

「구원병을 이끌고 우리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동한3국의 군주들은 우리 정나라 경계에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초나라 군사들이 퇴각한 것을 알고 해산하여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정나라의 여러 사람들은 숙첨의 지혜에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정나라가 사절을 제환공에게 보내 제후군을 규합하여 정나라를 구원하려 한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올렸다. 이후로 제나라에 감복한 정나라는 감히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8. 자문상초(子文相楚)

- 자원(子元)의 란을 평정하고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크게 일으킨 자문(子文) 투곡오토(鬪穀於兎) -

한편 스스로 정나라 정벌에 나섰다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회군한 초나라의 자원은 불안한 마음이 되어 어린 조카의 왕위를 뺏을 생각을 더욱 급하게 했다. 자원이 문부인을 왕비로 삼기 위해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던 순간 마침 문부인이 병이 나서 몸져눕게 되었다. 자원이 병간호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왕궁으로 들어가 침구를 준비한 후에 가병 수백 명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3일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궁문 안으로 뛰어 들어와 자원이 묵고 있던 침실로 곧장 들어간 투렴은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손질하고 있던 자원을 보았다. 투렴이 자원을 향해 책망했다.

「어찌하여 신하된 자로서 이곳에서 머리를 감고 머리에 빗질을 하십니까? 영윤은 빨리 밖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곳은 우리 집안의 궁실인데 어찌 너같이 하찮은 사사(射師)⑳가 왈가왈부 하느냐?」

「지극히 높은 왕의 지위는 비록 형제라 할지라도 같이 나눌 수 없습니다. 영윤께서는 또한 존귀하신 선왕의 동생 신분이라 하시지만 그래도 신하된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하된 자가 궁궐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하며 태묘 앞을 지날 때는 달려가거나 기침을 하고 침을 뱉거나 하는 행위는 모두 불경죄에 해당합니다. 항차 궁궐에서 어찌 침식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한 선왕의 부인께서 이곳에서 지척지간에 살고 계신데 남녀가 유별해야 하거늘 영윤께서는 이것도 모르십니까?」

자원이 투렴의 비난하는 소리를 듣자 크게 노하여 말했다.

「초나라의 국정은 모두 나의 손안에 있는데 네가 어찌 이리도 말이 많으냐?」

자원은 즉시 좌우에 있는 가신에게 명하여 투렴의 손을 결박하여 궁궐의 골방에 가두게 하고 궁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문부인이 알고 시종을 시켜 투백비의 아들인 투곡어토(鬪穀於菟)에게 사태가 급함을 고하게 하고 궁궐에 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자원을 평정하도록 했다. 먼저 초왕을 비밀리에 알현하고 자원의 일을 아뢴 투곡어토는 투오, 투어강과 투장(鬪章)의 아들 투반(鬪班)과 모의하여 투씨 일가의 가병들을 이끌고 날이 어둑해 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왕궁을 포위했다. 자원의 가병들은 모두 놀라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그때 궁녀 한 명을 안고 금방 잠자리에 들었던 자원은 꿈결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나 장검을 찾아 들고 방문 밖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장검을 손에 들고 자원이 자고 있던 침실로 들어오고 있던 투반과 마주치게 되었다. 자원이 크게 소리쳤다.

「란을 일으킨 놈이 바로 어린 네 놈이냐?」

「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란을 일으킨 놈을 잡으러 왔다.」

두 사람이 궁중에서 칼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몇 합을 겨루기도 전에 투어강과 투오가 일제히 달려와서 투반을 도와 싸움에 뛰어 들었다. 세 사람과 싸워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자원은 문 쪽을 향해 달아나려고 몸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 틈을 탄 투반이 칼을 휘둘러 자원의 목을 쳐서 두 동강을 내어 버렸다. 골방에 갇혀 있던 투렴을 꺼내 포승을 풀고 석방한 투곡어토는 일행들을 이끌고 문부인의 침소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원의 란을 진압했다고 고하고 왕궁에서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 어전에서 백관들의 인사를 받은 초왕 웅운은 자원의 집안을 멸하라고 명하고 그 죄상을 적어 성안의 큰 네거리에 방을 붙여 백성들에게 알리게 했다. 염옹은 문부인에게 미혹되어 일을 망친 자원에 대하여 시를 지어 노래했다.

미색에 혹하여 간이 부풀어 몸보다 더 커졌다

왕후의 존귀함도 형수의 신분도 개의치 않았다.

정념으로 날뛰어 란을 꾀했다고 괴이치 생각 말라!

초부인은 바로 천하절색 식규가 아니었던가?

堪嗟色膽大於身(감차색담대우신)

不論尊兮不論親(불논존혜불논친)

莫怪狂且輕動念(막괴광차경동념)

楚夫是市息婦人(초부인시식부인)

9. 호유자문(虎乳子文)

- 호랑이가 버려진 자문을 구해 젖을 먹여 키우다. -

한편 투곡어토의 조부 투백비는 초왕 투약오(鬪若敖) 웅의(熊儀)의 작은 아들이다. 투약오(鬪若敖)는 운(鄖)㉑나라 군주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투백비를 낳았다. 약오가 죽었을 때는 백비의 나이가 아직 어려 모친을 따라 운나라에 가서 살았다. 투백비가 운나라의 궁중에 수시로 드나들어 운부인이 마치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운부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백비와는 이종사촌간의 오빠와 동생의 관계였다. 두 아이는 친구가 되어 짝을 지어 놀면서 자랐다. 장성한 두 사람 사이에 정분이 생기고 결국 정을 통하여 운녀가 애를 갖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운부인은 백비에게 궁중출입을 못하게 조치하고 운녀가 병이 들었다고 소문을 내고 방을 하나 만들어 숨어살게 했다. 이윽고 운녀가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운부인이 아무도 몰래 시종을 시켜 갓난아이를 옷에 싸서 바구니에 담아 몽(夢)이라는 호수 안에 있는 늪지에 버리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운자를 속여 넘기고 또한 그 딸의 부정이 알려져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백비는 그의 모친과 함께 초나라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몽택으로 나아가 사냥을 하고 있던 운나라 군주가 호수 가운데의 늪지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발견하고 좌우에게 명하여 화살을 쏘게 했다. 군사들이 쏜 화살은 모두 호랑이 곁에 떨어지고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호랑이는 놀라지도 않고 앉은자리에서 떠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운자(鄖子)가 마음속으로 의아한 생각이 들어 시종을 보내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호수 가운데의 늪지로 보내어 살펴보도록 했다. 시종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호랑이가 갓난아이를 안고 젖을 주고 있는데 사람을 보고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

「호랑이는 영물이라 놀라게 하면 안 된다.」

운자는 사냥을 그만두고 궁중으로 돌아와 그 부인에게 말했다.

「몽택의 늪지에 가서 사냥을 하고 있던 참에 이상한 일을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었습니까?」

운자가 사냥 중에 호수의 늪지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갓난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고 있었던 일을 운부인에게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운부인이 듣고 말했다.

「부군께서는 모르시고 계시겠지만 그 아이는 제가 버렸습니다.」

운자가 놀라 물었다.

「부인이 어떻게 하여 그 아이를 얻고 또한 어찌하여 그곳에다 버리게 되었습니까?」

「부군께서 너무 저를 책하지 마십시오. 그 아이는 실은 우리 딸이 조카 투백비와 관계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제가 딸의 이름이 더렵혀질까 걱정되어 시종에게 명하여 몽택의 늪지에 버리게 했습니다. 옛날 은나라 때 강원(薑嫄)㉒이라는 여인이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서 아이를 배어 사내아이를 낳자 얼어붙은 강 위에 버렸습니다. 강 위에 버려진 아이를 날짐승들이 날개를 펴서 안고 보호하자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 강원이 다시 거두어 키웠습니다. 이윽고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자 이름을 기(棄)라고 짓고 농사일을 관장하는 후직(後稷)이라는 벼슬을 내리게 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후에 주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첩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도 이미 호랑이가 거두어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을 보니 이것은 성장하면 필시 크게 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자가 듣고 운부인의 말대로 사람을 몽택의 늪지에 보내 갓난아이를 거두어 오게 하여 딸에게 돌려주며 기르도록 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운녀를 아이와 함께 초나라로 보내 투백비와 혼례를 치르게 하고 같이 살도록 했다. 초나라 방언에 유(乳)를 곡(穀)이라 하였고 호(虎)는 오토(於菟)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호랑이가 젖을 먹여 살려낸 아이’라는 뜻으로 곡오토(穀於菟)라고 하고 자는 자문(子文)이라고 지었다.

지금도 호북성 운몽현(雲夢縣)㉓에 오토향(於菟鄕)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이 투곡오토의 생가이다. 그 앞에 호랑이가 어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의 상을 세워 자문의 일을 기리고 있다. 투곡오토가 성장함에 따라 치국안민의 자질을 보여 온갖 경서와 병법에 통달하여 문무를 겸전한 사람이 되었다. 그 부친 투백비가 초나라에 출사하여 대부의 벼슬을 살다가 죽자 투곡오토가 그 직을 이어받았다. 곧이어 자원이 란을 일으켜 죽자 영윤의 자리가 비게 되었다. 초성왕이 투렴을 영윤으로 삼고자 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말했다.

「바야흐로 지금의 형세에 있어서 초나라를 대적할 만한 나라는 제나라뿐인데 제나라는 관중과 영척을 임용하여 국세가 크게 신장되어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신의 재주는 관중과 영척의 재주와는 그 종류가 다릅니다. 왕께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 초나라의 정치를 크게 일으킨 후 중원을 도모하실 생각이시라면 투곡오토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 대부들도 일제히 투렴을 도와 주청했다.

「투곡오토 말고는 영윤의 직을 잘 수행할만한 사람은 초나라에 없습니다. 」

초성왕이 허락하여 투곡오토를 영윤으로 제수하면서 말했다.

「제나라가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하면서 중보(仲父)라고 부르게 했다. 오늘 투곡오토가 초나라에서 귀한 사람이 되었으니 역시 자로써 불러야 할 것이다.」

초성왕은 즉시 투곡오토를 자문으로 부르게 하고 이름을 호칭하지 못하게 했다.

그때가 주혜왕13년 기원전 664년의 일이었다.

자문이 영윤으로 제수를 받은 후에 목소리를 높여 초왕에게 말했다.

「나라의 화근은 모두가 군주가 허약하고 신하들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모든 벼슬아치들의 채읍 중 그 절반을 나라에 바치게 하도록 하십시오.」

자문이 먼저 투씨 일족의 채읍 중 그 반을 바치자 다른 종족들도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영성(郢城)은 남쪽으로 상담(湘潭)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한수(漢水)와 강수(江水)에 의지하여 가히 천하를 아우를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하여 초나라의 도성을 단양(丹陽)㉔으로부터 옮겨 그 땅을 영도(郢都)라고 칭했다. 자문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현사(賢士)를 추천하여 임용하고 공족 중에서 굴완(屈完)이라는 사람이 어질다고 하여 천거하여 대부로 삼았다. 또한 투씨 가문 중에 투장(鬪章)과 투반(鬪班) 부자가 재주와 지혜를 갖추고 있어 투장에게는 군사의 일을 맡아보게 하고 투반은 신공(申公)에 임명하여 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관문에 해당하는 신읍(申邑)을 다스리고 했다. 이에 초나라는 크게 다스려져 치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10. 이시욕벌 부전이굴(以示欲伐 不戰而屈)

- 무력을 시위하여 싸우지 않고 굴복시킨 제환공-

제환공은 초나라가 현사를 임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가 중원을 도모하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여 제후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고자 관중에게 물었다. 관중이 대답했다.

「초나라가 남해에 있으면서 왕호를 칭하고 있는데 땅은 넓고 병사들은 강하여 주나라 천자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은 또한 자문을 임용하여 정사를 맡긴 결과 초나라의 정치는 안정되어 병사를 출동시켜 위엄을 보인다고 해도 그 뜻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주군께서는 이제 막 제후들의 마음을 얻어 바야흐로 패업을 이루기 직전입니다. 존망(存亡)과 흥멸(興滅)의 은혜가 아니면 제후들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듣지 않아 병사를 동원하라고 했을 때 그들이 말을 듣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위엄과 덕을 더욱 베풀어 조금 더 때를 기다리다가 병사를 일으켜야만 만전을 기하는 일이 됩니다.」

「선군이신 양공께서 우리9대조의 원수를 갚아 기국(紀國)을 멸하여 그 땅을 병합해 공업을 이루셨소. 그런데 그 부용국인 장국(鄣國)㉕이 아직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어 과인이 멸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장국은 소국이고 그 선조는 태공의 손자라서 우리 제나라와는 동성의 나라입니다. 동성의 나라를 공격하여 멸하는 행위는 의로운 일이 아닙니다. 주군께서 왕자 성보(成父)에게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기성(紀城)을 순시토록 하면서 마치 장국을 정벌하려는 듯이 시위를 하면 장국은 필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겨 항복을 청해 올 것입니다. 이것은 친척이 되는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오명을 얻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땅을 넓히는 실리를 취하는 방법입니다.」

환공이 관중의 계책대로 성보를 시켜 기성으로 나가 무력을 시위하자 장국이 과연 두려워하여 항복하기를 청해왔다. 환공이 말했다.

「중보의 계책은 백 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빗나가는 법이 없구나!」

제나라의 군신들이 조당에 모여 나라의 정사에 대해 상의를 하고있던 중에 갑자기 시자가 와서 아뢰었다.

「산융(山戎)의 침략을 받게 된 연나라가 사자를 보내와 구원을 청하고 있습니다.」

관중이 듣고 환공을 보고 상주했다.

「주군께서 훗날 초나라를 정벌하시려고 한다면 먼저 융(戎)을 평정하십시오. 융으로부터의 환란을 종식시킨 연후에 즉시 남방으로 방향을 돌려 초나라를 정벌하십시오.」

『제21회로 계속』

주석

①서(徐)/ 지금의 산동성 미산호(微山湖) 호반의 미산현(微山縣) 동(東). 전국시대 때 맹상군(孟嘗君)의 봉지인 설(薛) 땅이다.

②)융(戎)/ 춘추 초기에 활약한 이민족으로 당시의 거주지는 지금이 산동성 정도현(定陶縣) 서남 쪽이었다.

③당진(唐晉)/ 진(晉), 진(秦), 진(陳) 세 나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진(晉)은 당진(唐晉)으로, 진(秦)은 섬진(陝秦)으로, 진(陳)은 그대로 사용했다.

④강(絳)/ 지금의 산서성 익성현(翼城縣) 경내. 지금의 강현(絳縣)은 익성(翼城)에서 약 40키로 남쪽에 있다.

⑤곡옥(曲沃)/ 황하(黃河)의 하곡부(河曲部) 북쪽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문희현(聞喜縣) 동북쪽에 옛 성터가 남아있다. 지금의 곡옥(曲沃)이라는 지명은 당시의 위치에서 약 30키로 북쪽이었음. 당진(唐晉)의 도읍(都邑)은 강성(絳城)이고 곡옥(曲沃)은 당진의 공실(公室)이 일어난 고을이다.

⑥수(隨)/ 지금의 호남성 청발수(淸發水) 강안의 수주시(隨州市)이다. 주왕실과 같은 희성(姬姓) 제후국이다. 초무왕(楚文王) 때 초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⑦당진(唐晉)의 헌공(獻公) 전까지의 본국인 익(翼)과 곡옥의 계보표는 본회 미주(尾註) 참조.

⑧시초(蓍草)/ 엉거시과에 속하는 다년초인 비수리 혹은 톱풀. 점치는 산가지로 썼으나 후세에 와서 대 조각으로 만들어 대신 썼기 때문에 서죽(筮竹)이라고도 한다.

⑨관괘(觀卦)/ 주역 64괘 중 20 번째인 풍지관(風地觀)의 곤하(坤下) 손상(巽上) 괘다. 관은 응시하는 것이며 그저 막연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니,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다.

⑩육이효(六二爻)/ 觀卦의 육이효(六二爻)는 다음과 같다.

<六二> 闚觀利貞女 즉 엿보는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마음이 곧으면 이로우리라. <象曰> 闚觀女貞亦可醜也 엿보는 것이니 여자에게 정조가 있어야 한다 함은 역시 추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이다.

⑪포(蒲)/ 지금의 산서성 석루현(石樓縣) 경내. 섬서성과의 경계지역에 있음.

⑫굴(屈)/ 지금의 산서성 길현(吉縣)으로 섬서성과의 경계인 하수 동쪽의 고을. 여희의 계략에 의해 이오(夷吾)가 좌천된 곳이며 이오는 이곳에 있다가 헌공이 잡으러 군사를 보내자 하구 건너편에 있던 양(梁)나라로 도망갔다.

⑬경(耿)/ 지금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동남에 있었던 제후국으로 당진의 헌공(獻公) 16년 기원전 661년 당진에 의해 멸망당하고 조숙(趙夙)을 봉했다.

⑭곽(霍)/ 현 산서성 곽현(霍縣). 산서성을 관통하고 있는 분수(汾水) 중류의 강안 도시.

⑮위(魏)/ 지금의 산서성 예성(芮城). 하수의 하곡부(河曲部) 북안에 있었다. 헌공을 모시던 필만(畢萬)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봉해져 후에 당진을 삼분하여 전국칠웅 중의 한 나라가 된 위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⑯길질관(桔柣關)/ 신정성 남쪽의 외곽에 설치했던 관문이다.

⑰순문(純門)/ 길질관과 남문 사이에 삼중의 성벽을 세웠는데 순문은 그 첫 번째 성벽을 통하는 문이다.

⑱규시(逵市)/ 순문 안에 형성되었던 시가지다.

⑲동구(桐邱)/ 지금의 하남성 언릉(鄢陵) 남

⑳사사(射師)/ 활에 관련된 모든 일을 관장하던 관리의 장이다.

㉑운(鄖)/ 작위는 자작국(子爵國)으로서 지금의 운수(溳水)인 청발수(淸發水) 중류에 있었던 제후국이다. 청발수 강안에는 하류로부터 차례로 운국(鄖國 : 현 안륙시(安陸市)), 수국(隨國: 현 수주시(隨州市)), 당국(唐國)등 군소 제후국들이 있었다. 후에 모두 초나라에 복속되었다.

㉒강원(薑嫄)/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인 제곡(帝嚳)의 비(妃)로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주나라 시조인 후직(後稷) 기(棄)를 낳았다. 사마천 사기 주본기 참조- 원문의 은나라라는 원작자의 착오이다.-

㉓운몽현(雲夢縣)/ 운국(鄖國)이 위치했던 안륙시(安陸市) 남쪽 약 25km지점의 고을

㉔단양(丹陽)/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자귀시(秭歸市)를 말함. 장강 연안에 위치했던 고을임.

㉕장국(鄣國)/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동평현(東平縣) 접산향(接山鄕) 장성촌(障城村) 일대에 있었던 제후국으로 서조 초기 강태공이 서자를 봉한 제나라의 부용국이다.

[평설]

그때까지 초나라를 받들던 정나라는 제나라의 세력이 더욱 강해짐을 보고 토벌을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제나라의 패권을 인정했다. 이에 제환공은 기원전 667년 송(宋), 노(魯), 진(陳), 정(鄭) 등의 네 나라 군주를 유(幽) 땅에 불러 회맹을 하고 정문공을 복종시켰다. 제환공이 패자로써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 주혜왕(周惠王)은 10년 전인 기원전 676년 위혜공 삭이 주나라를 공격하여 자기를 내쫓고 왕자퇴를 주왕의 자리에 올린 것에 대해 원한을 품고 제환공에게 위나라의 정벌을 요구했다. 그때 위나라는 위혜공 삭이 죽고 그 아들인 적(赤)이 군주로 있었다. 적(赤)이 위의공(衛懿公)이다. 제환공은 주왕의 명을 받아 다음 해인 기원전 666년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출동했다. 위의공은 자기 부인이 지은 죄이기 때문에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장자인 공자 개방(開方) 편에 많은 재물을 바쳐 강화를 청했다. 제환공이 위의공의 청을 받아 들여 강화를 허락했다. 이에 사자로 온 공자 개방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제환공의 마부가 되어 곁에서 모시겠다고 하자 제환공이 받아 들였다. 공자 개방은 위나라의 군주 자리를 버리고 제환공의 신하가 된 것이다. 후에 개방은 수초(竪貂), 이아(易牙) 등과 함께 제환공을 측근에 모시는 삼흉(三凶)이 되어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한편 지금의 산서성(山西城) 일대에는 주나라 2대왕인 성왕(成王)이 11세기 초에 그의 동생 희우(姬虞)가 봉해진 당진(唐晉)이라는 제후국이 기원전 744년에 분봉된 곡옥(曲沃)의 성사(成師)와 그 후손들이 본국인 익성(翼城)과의 오랜 싸움 끝에 진무공(晉武公) 대에 이르러 기원전 679년에 본국을 점령하고 주왕에게 재물을 바쳐 당진의 정식 제후로서 인정을 받았고, 기원전 670년에 그 아들 진헌공 궤제(詭諸)가 물려 받고 있었다. 진헌공은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르자 사위(士蔿)를 등용하여 공족출신의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군주권을 강화했으며 주변의 이민족들을 정벌하여 국세를 획기적으로 신장시켰다. 진헌공이 세자 때 가희(賈姬)를 부인으로 취했으나 애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견유주의 질녀인 호녀(狐女)를 데려와 첩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중이(重耳)를 낳았다. 다시 소융(小戎)의 일족인 윤성씨(允姓氏)의 딸을 취하여 이오(夷吾)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무공 만년에 제나라에 혼사를 청하여 제양공의 딸을 데려와 부인으로 삼아 제강(齊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때는 무공이 나이가 너무 들어 잠자리를 같이할 수 없었다. 헌공이 제강의 미모를 사모하다가 몰래 범해 그 사이에 아들을 낳아 신씨 성의 사가에 맡겨 몰래 기르게 하고 이름을 신생(申生)이라고 불렀다. 무공이 노환으로 죽었을 때는 정부인인 가희가 죽었기 때문에 제강을 부인으로 삼았다. 신생은 중이와 이오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정부인의 소생이라고 해서 적서를 논하여 태자가 되었다. 제강은 여자 한 아이를 더 낳고 죽었다. 이에 헌공이 가희의 동생을 불러와 첩으로 삼고 가군(賈君)이라고 부르게 하고 그 여아를 맡아 기르게 했다.

다시 헌공이 이민족 국가인 여융(驪戎)을 정벌하러 갔다가 여융주의 두 딸을 얻었다. 두 여인은 모두 미모가 뛰어나 모두 헌공의 총애를 받았다. 큰딸을 여희(驪姬) 작은 딸을 소희(少姬)라 하며 각각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여희의 소생을 해제(奚齊)라하고 소희의 소생을 탁자(卓子)라 했다. 여희는 절세미녀일 뿐만 아니라 희대의 요녀였다. 헌공이 여희를 더욱 총애하여 그녀를 정부인으로 삼았다. 여희는 자기의 소생인 해제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신생, 중이 및 이오를 먼저 도성 밖으로 쫓아내서 헌공과의 사이를 소워하게 만들려고 했다. 신생은 당진의 종읍과 같은 곡옥(曲沃)에, 중이는 포성(蒲城)에, 이오는 굴성(屈城)으로 각각 보내 지키도록 했다.

울리히
12-04-30 18:12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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占쏙옙占쏙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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