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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22:05:295469 
거시기 열전
양승국
일반

일찍이 여불위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소양왕의 증손자 이인(異人)을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알아보고 전 재산을 투자하여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여불위의 활약으로 진왕으로 자리에 오른 이인은 여불위의 첩이었던 조희와의 지나친 방사로 재위 4년 만에 죽고 진왕의 자리는 여불위의 종자로 여겨지는 조희의 소생 진시황이 잇게 되었다. 원래 양기가 세고 방중술에 능한 여불위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장양왕후 즉 조희(趙姬)로부터 총애를 받아 궁궐의 내궁 출입을 거리낌없이 해왔으나 진시황이 장성함에 따라 총기가 뛰어나고 사리에 밝은 출중한 청년이 되자 자기의 행동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태후의 음욕(淫慾)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강해져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고 여불위를 내궁(內宮)인 감천궁(甘泉宮)에 불러들여 음욕을 채웠다.

여불위는 자기의 일이 탄로 나면 하루아침에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를 대신할 사람을 골라 태후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후의 음욕을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불위는 시중에 양물(陽物)이 크기로 이름이 나 있는 노대(嫪大)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의 음탕한 부녀자들은 그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진나라 말에 음행을 즐겨하는 사람을 애(毐)라고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노애(嫪毐)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가 결국은 간음죄를 저지르고 옥사에 갇혀 있던 것을 여불위가 알고서 방면시켜 주고는 그를 불러 승상부(丞相府)의 사인(舍人)으로 삼아 곁에 두었다.

진나라 풍속에 농사철이 끝나면 온 나라가 삼 일 동안 마음껏 노래와 춤으로 즐기며 일년 동안의 고생스러웠던 노고를 잊는 절기(節期)가 있었다. 그 날이 되면 모든 백성들은 한가지라도 특기나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나와서 온갖 놀이를 벌이는데, 특히 남이 따라 하지 못하는 재주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 날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 재주를 자랑하였다.

여불위는 오동나무로 수레바퀴를 만들어오게 하여 노애에게 주자 노애는 땅에 누워 그의 양물을 수레바퀴 가운데에 끼고 허공을 향해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나 그의 양물은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노애의 장기(長技)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태후가 그 소문을 듣고 여불위를 불러 물 「태후께서 그를 한번 만나보시겠다면 신이 그를 대령하겠습니다.」

태후가 듣고 웃기만 할뿐 선뜻 대답하지 않다가 한참을 생각한 다음에서야 말했다.

「대감은 나를 놀리십니까? 그는 궁 밖에 사는 사람인데 어찌 그를 내궁으로 들인단 말입니까?」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사람을 시켜 그의 옛날 죄를 밝히게 하여 궁형의 죄를 내리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태후께서는 그의 형을 집행하는 형리(刑吏)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으로 형을 집행하게 한 다음 내시로 만들어 궁중에 들게 한다면 일에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참으로 묘한 계책입니다.」

태후가 즉시 여불위에게 백금의 황금을 내 주어 형리에게 뇌물로 주도록 했다. 여불위는 아무도 몰래 노애를 불러 자기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노애는 원래 음탕한 자라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는 보기 드문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며 여불위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여불위가 과연 노애가 옛날 저지른 간음죄를 밝혀 그에게 궁형의 죄를 내리도록 명했다. 여불위는 다시 태후가 준 백금의 황금을 형리들에게 뇌물로 나누어주고 당나귀의 양물을 잘라 피와 함께 취하여 형을 집행한 것처럼 꾸몄다. 이어서 노애는 스스로 자기의 수염과 눈썹을 모조리 뽑아 버렸다. 노애의 형을 담당했던 형리는 일부러 당나귀의 양물을 형장 주위에 전시해 놓고 그것이 모두 노애의 것이라고 말했다. 형장에서 양물을 구경한 사람은 모두가 그 크기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노애는 거짓 궁형을 당하고 마치 환관의 모습을 하고 내시들 틈에 끼어 궁궐로 들어갔다.

노애는 내궁에서 태후를 모시는 내시가 되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태후가 노애를 불러 시험삼아 잠자리를 같이해 본 결과 과연 욕정을 마음껏 풀 수 있어 여불위하고 할 때보다 열 배는 더 좋았다. 다음 날, 여불위를 불러 많은 선물을 주고 노애를 보내 준 노고를 치하했다. 여불위는 드디어 태후의 욕정에서 몸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태후와 노애는 마치 부부지간이나 되는 듯이 항상 같이 지내면서 음락을 즐겼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아이를 출산하게 될 때 노애와의 치정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 태후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에 누웠다. 태후는 노애에게 황금을 주어 점쟁이를 매수하게 하여 거짓 점괘로 감천궁에는 액운이 끼어 있어 200리 서쪽으로 몸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그때 태후와 여불위의 간통 사실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진왕은 태후를 잠시 멀리 떠나보내 여불위가 태후궁에 드나드는 행위를 막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즉시 좌우에게 명했다.

「옹주(雍州)는 함양과 서쪽으로 200백여 리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옛날에 선왕들이 기거하던 궁전이 아직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으니 태후께서 가셔서 묶으시게 하라!」

이어서 태후는 거처를 옹성으로 옮기면서 노애를 마부로 삼아 데려갔다. 옹성의 고궁을 대정궁(大鄭宮)이라고 고쳐 부르게 한 태후는 노애와 아무 것도 거리끼지 않고 더욱 친근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옹성에 옮겨와 살면서 2년 동안에 아들을 둘이나 낳아 밀실을 짓고 그곳에다 숨겨 아무도 몰래 길렀다. 더욱이 그녀는 노애에게 앞으로 왕이 죽게 된다면 그들의 아들을 그 후계라 삼겠다고 약속했다. 태후를 모시던 측근들은 두 사람의 모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권세가 무서워 아무도 감히 입 밖으로 발설하지 못했다. 태후는 진왕에게 노애가 왕을 대신해서 자기의 봉양을 극진히 모신 공이 있음으로 토지를 주고 후로 봉하도록 청했다. 진왕은 태후의 명령을 받들어 노애를 장신후(長信侯)로 봉하고 산양(山陽)의 땅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노애의 일가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는 더욱 방자하게 되었다. 노애는 태후로부터 매일 셀 수도 없는 많은 상을 받았다. 또한 궁실의 거마를 타고 사냥이나 놀이를 마음대로 나갈 수 있었으며 궁궐의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그가 도맡아 행했다. 노애는 자기의 부중에 수천 명의 종복들을 두고 부렸으며, 또한 노애를 찾아온 빈객들은 환관이 되겠다고 하며 그의 사인이 된 사람도 천여 명이 넘었다. 다시 함양에 살고 있는 조정의 높은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고 사당을 결성하자 그에게 빌붙어 더 높은 권력을 차지하려는 자들이 앞을 다툰 결과 노애의 위세는 오히려 문신후보다 더 높아졌다.

태후가 옹성에 기거한 후에도 진왕은 매년 백제(白帝)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옹성에 들렸다가 태후을 문안했다. 진왕은 옹성에서 제사를 지내는 전례를 올릴 때는 항상 기년궁(祁年宮)에 기거했다. 옹성의 교천단에는 제사를 봄철에 지냈다. 마침 제사를 지낼 때를 맞추어 하늘에 긴 꼬리의 혜성이 나타난 것이었다. 옹성에서 제사를 올리기 위해 행차를 하게 된 진왕(秦王) 영조정(贏趙政)은 대장 왕전에게 명하여 함양 성안에서 3일 동안 군사를 대대적으로 사열하고 여불위와 함께 도성을 지키도록 했다. 다시 환의(桓齮)에게 3만의 군사를 이끌고 기산(岐山) 밑에 주둔하며 비상사태에 대비하라고 명한 다음에서야 어가를 움직여 옹성으로 향했다.

그때 진왕은 나이가 이미 26세에 이른 성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인식을 올려 관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태후가 명하여 덕공(德公)을 모신 사당에서 성인식을 치러 관례를 올리도록 했다. 관례를 올림으로써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닐 수 있게 된 진왕은 백관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어 5일 동안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기게 했다. 태후도 역시 대정궁에서 잔치를 벌려 진왕과 함께 즐겼다.

그러다가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던 노애가 기고만장하게 되어 마침내 사단을 일으키고 말았다. 노애는 진왕의 측근 대신들과 술을 마시며 도박판을 벌렸다. 이윽고 4일 째 되는 날, 노애가 중대부 안설(顔泄)과 도박을 하다가 연전연패하여 벌주를 계속해서 마셔 고주망태가 되어 버렸다. 술에 취해 내기를 계속하자고 조르는 노애의 청을 안설이 거절했다. 그러자 분노한 노애가 안설의 멱살을 잡고 손바닥으로 뺨따귀를 올려 부쳤다. 안설이 지지 않고 노애의 관끈을 잡아 당겨 끊어 버렸다. 노애가 길길이 날뛰며 두 눈을 부릅뜨고 안설을 책망했다.

「나는 곧 지금 왕의 의붓아비인데 너 같은 한낱 미천한 자가 어찌 감히 나에게 덤벼든단 말이냐?」

안설이 노애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떨며 그의 앞에서 달아나는데 그때 마침 태후와 술을 마시다가 자리를 파하고 그 뒤를 따라 대정궁 궁문 밖으로 나오고 있던 진왕의 일행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진왕을 본 안설은 땅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부딪치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소연했다. 진왕은 원래 기지가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설에게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으며 단지 좌우에게 안설을 일으켜 기년궁으로 데려가도록 명하고 자세한 내막을 그때 묻겠다고 했다. 이윽고 기년궁에 당도하여 진왕과 마주 대한 안설은 노애가 자기의 뺨을 후려치며 스스로 왕의 의붓아비라고 했다고 말하며 노애와 있었던 일의 전말을 모두 고해바쳤다.

「노애는 실은 환관이 아닙니다. 그는 거짓으로 궁형을 당했다고 꾸며 아무도 몰래 태후의 잠자리 시중을 들다가 지금은 태후로부터 두 아들을 낳아 대정궁 안에서 비밀리에 기르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진나라 왕위를 찬탈할 역모를 일으킬 것입니다.」

진왕이 사건의 전말을 알고 대노하여 비밀리에 병부(兵符)를 왕의(王齮)에게 보내 군사를 이끌고 옹성으로 진군해 오도록 명했다.

그때 내사(內史) 사(肆)와 좌익(佐弋) 갈(竭) 두 사람은 평소에 태후와 노애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과 비밀리에 결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안설의 밀고 사실을 알고 황급히 노애가 있는 부중으로 달려가 고했다. 노애는 이미 술에 깨어 있다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즉시 대정궁으로 달려가 태후를 찾아 그 동안의 사정을 말했다.

「오늘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환의의 대군이 이 곳에 당도하기 전에 궁궐의 모든 위병들과 부중의 빈객 및 사인들을 동원하여 기년궁을 공격, 왕을 죽여야만 우리 부부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궁궐의 호위병들이 과연 내 명령을 듣고 왕을 공격하겠는가?」

「태후께서 인장을 내주시면 진왕의 옥새 대신 사용하겠습니다. 제가 ‘기년궁에 도적이 들어 진왕께서 궁기병(宮騎兵)과 위병들을 모두 동원하여 역도들을 소탕하고 어가를 구원하라는 명을 받았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나의 명을 따르지 않는 병사들은 없을 것입니다.」

태후도 그때에 이르러서는 진왕을 죽이고 노애의 소생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생각을 품고 말했다.

「모든 일은 그대가 알아서 행하라!」

태후가 자기의 인장을 노애에게 내 주었다. 노애는 진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작성하고 그 위에 태후의 인장을 찍어 돌려 궁기병들과 위병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노애의 부중에 살던 빈객이나 사인들도 같이 불러들였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부산을 떨던 노애는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궁기병, 위병, 빈객과 사인들을 모두 모아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노애는 내사사와 좌익갈과 함께 그들을 삼 대로 나누어 각기 한 대씩 이끌고 대정궁을 나가 진왕이 묶고 있던 기년궁을 포위했다. 왕의의 군사들이 일각이라도 빨리 달려오기만을 살펴보기 위해 높은 누각에 올라 밖을 살펴보던 진왕은 궁기병을 위시한 많은 군사들이 바깥을 둘러싸고 자기가 있는 묶고 있던 기년궁을 범하려는 모습을 보고 좌우에 있던 측근에게 무슨 연유인지를 물었다. 측근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장신후가 기년궁에 도적이 들었다고 해서 궁기병과 위병들이 특별히 대왕의 어가를 구하기 위해 출동했다 합니다.」

「장신후가 바로 도적인데 어찌 궁중에 도적이 들었다고 하는가?」

진왕의 말을 전해들은 궁기병과 위병들은 그 중 절반은 흩어져 달아나 버리고 나머지 제법 담대한 자들은 오히려 무기의 방향을 거꾸로 돌려 노애가 동원한 빈객과 사인(舍人)들을 공격했다. 진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노애란 놈을 사로 잡아오는 자는 상으로 백만 전을, 그를 죽여 머리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오십만 전을 내리겠다. 역당의 머리를 한 개라도 바치는 자에게는 일급의 작록을 내리고 비록 그 신분이 노예나 비천한 신분에 처한 자 일지라도 같은 상을 주겠다. 」

진왕의 말을 듣고 환관이나 정원이나 마구간에서 일하던 천노(賤奴)들도 모두 뛰쳐나와 죽을힘을 다해 노애의 사병들에 대항하여 싸웠다. 궁궐 밖의 백성들도 노애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도 역시 몽둥이를 손에 들고 달려와 도왔다. 노애의 빈객과 사인들은 궁기병과 백성들에 둘려 싸여 협공을 당한 결과 죽은 사람의 숫자는 수백 명에 달하게 되어 노애는 싸움에 지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간신히 혈로를 열고 동문 쪽으로 나가 기년궁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노애의 일행은 몇 발자국도 띠기도 전에 그때 마침 기년궁을 향해 달려오던 환의의 대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노애는 속절없이 내사사와 좌익갈과 함께 왕의의 군사들에게 포박을 받아 사로잡히고 말았다. 진왕은 노애 일당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고문을 행하여 반란의 실상을 밝히도록 하고 다시 친히 대정궁으로 나가 샅샅이 뒤져 밀실에 숨겨 놓은 노애의 두 아들을 찾아낸 후에 좌우에게 명하여 그들을 부대 안에 넣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게 했다. 태후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고통스러웠으나 감히 살려주라는 말을 할 수 없어 문을 굳게 닫아걸고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나 진왕은 태후를 찾아 인사도 드리지 않고 기년궁으로 돌아간 후에 태사가 친 점이 맞았다고 해서 그에게 십만 전의 상금을 하사했다. 노애의 문초를 담당했던 옥리가 와서 알아낸 사실을 진왕에게 고했다.

「노애가 거짓으로 궁형을 당했다고 꾸며 내궁으로 들어간 일은 모두 문신후 여불위의 생각이었습니다. 노애와 목숨을 걸고 결사를 맺은 자들은 내사사, 좌익갈 등을 포함해 모두 20여 명에 달합니다.」

진왕이 명을 내려 노애는 기년궁 동문 옹성의 동문 밖으로 데리고 나가 거열형에 처하고 다시 그의 삼족을 멸하도록 했다. 내사사와 좌익갈은을 참수형에 처하고 그의 머리는 백성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효수시켰다. 노애의 빈객과 사인들 중 반란군에 가담하여 칼을 들고 대항한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했으며, 역모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자들은 옹성에서 몇 천리 떨어진 먼 땅인 촉(蜀) 땅으로 옮겨 살게 했는데 모두 합하여 사천여 호나 되었다. 태후는 그 인장을 역도에게 내주어 반란을 도왔다고 해서 국모로 모실 수 없다고 봉록을 줄이고 옹성 내의 또 다른 고궁으로 사람이 거처하지 않고 있었던 역양궁(棫陽宮)으로 옮겨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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