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40 
· 어제 :  344 
· 최대 :  2,389 
· 전체 :  1,681,963 
 
  2005-12-09 17:49:506602 
범수열전(范睢列傳) 19-2.채택(蔡澤)
양승국
 채택.jpg  (307.5K)   download : 82
일반

채택(蔡澤)

  채택(蔡澤)은 연나라 사람이다. 유세술을 배워 크고 작은 제후들을 수 없이 찾아다니며 벼슬을 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관상을 잘보는 사람을 찾아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선생이 이태(李兌)1)의 관상을 보고 말하기를 ‘ 100일 이내 에 정권을 손에 잡을 것이오.’라고 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입니까?」

당거가 대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소.」

「그렇다면 이 사람의 관상은 어떠합니까?」

당거가 한참 동안 뚫어지게 채택의 모습을 살펴보더니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선생은 들창코에 어깨가 목보다 높이 솟고, 이마는 상투처럼 튀어나오고, 다리는 활처럼 휘었으며 게다가 납작코이기도 합니다. 나는 성인(聖人)의 상은 볼 수 없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선생을 두고 말한 것 같습니다.」

당거가 자기를 놀리는 줄로 생각한 채택이 물었다.

「부귀야 내가 하기 나름인 것이고 내가 모르는 것은 내 수명이오! 나는 몇 살까지 살 수 있겠소?」

「선생은 지금 이후로 43년을 더 사실 수 있습니다.」

채택이 웃으면서 사례를 하고 물러가며 자기의 수레를 모는 마부에게 말했다.

「내가 흰 쌀밥과 고기반찬을 먹으며 준마를 휘몰고 다니면서 황금으로 만든 인장을 가슴에 품고 허리에는 자색의 비단 띠를 두르고 군주 앞에서 읍양을 행해 육식을 즐기는 부귀한 생활을 하는 데는 43년이면 충분하다 하겠다!」

당거와 헤어진 채택은 조나라에 들어갔다가 쫓겨나서 다시 한(韓)과 위(魏)나라에 차례로 들어갔으나 도중에 도적을 만나 취사도구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때 자기가 천거했던 정안평(鄭安平)과 왕계(王稽) 등이 모두 진나라에 중죄를 지어 응후가 내심으로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채택은 곧바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진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진왕을 만날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사람을 보내 응후의 면전에서 자기의 큰소리를 전하게 하여 그를 격노케 했다.

「연나라에 온 유세객 채택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는 천하 영웅의 자태에, 뛰어난 변설을 지니고 있는 지혜있는 선비입니다. 그가 일단 진왕을 한 번 뵙기만 하면 진왕은 틀림없이 승상을 곤란에 빠뜨리고 그 자리를 빼앗아 나에게 줄 것입니다.」

응후 범수가 듣고 말했다.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의 일이나 백가의 학설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알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의 변설을 물리친 바가 있는데 어찌 그자가 감히 나를 곤궁하게 만들어 나의 지위를 뺏어갈 수 있단 말인가?」

범수가 사람을 보내 채택을 불러오게 했다. 채택이 들어와 범수 앞에 섰으나 절을 올리지 않고 읍만을 행했다. 응후가 원래 채택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러와 접견해 보니 다시 오만한 태도를 취하자 그를 꾸짖어 말했다.

「그대는 예전에 나를 대신해 진나라의 상국이 되고 싶다고 했다는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 이유를 한 번 듣고 싶노라!」

「아아, 승상께서는 어찌 일을 헤아리는 눈이 그렇게 늦으십니까? 무릇 사시도 그 순서에 따라 변하듯이 공을 이룬 사람은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건강한 신체와 자유로운 수족, 밝은 눈에, 잘 들리는 귀를 갖게 되는 일을 어찌 선비 된 자들만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소.」

「인(仁)을 근본으로 삼아 의(義)를 견지하고, 정도를 걸으며 은덕을 널리 펼쳐, 천하에 자기가 평소에 품고 있던 뜻을 실현시킴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받들어 존경하고 앙모하게 되어 모두가 그들의 군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유세술에 능하고 밝는 지혜를 갖춘 선비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소.」

「부귀와 명성은 찬란하게 빛나고 세상의 만물을 잘 다스려 각기 그 본연의 자리를 찾도록 합니다. 또한 저마다의 수명을 오래 유지토록 하여 종내에는 일생을 평안히 보내 요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또한 천하가 그 전통을 이어 받아 그 공업을 지켜 영원무궁토록 전하도록 합니다. 명분과 실리가 완전무결하게 일치되어 그 은혜는 천년 후까지 전하게 합니다. 세세대대로 그를 칭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고 하늘과 땅과 함께 그 시작과 끝을 같이 하게 되고 정도를 밟아 은덕을 널리 펼칩니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성인들이 말하는 소위 길하고 상서로운 선행이 아니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진나라의 상군(商君), 오나라의 오기(吳起), 월나라의 문종(文種)과 같든 사람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범수는 채택이 유세술로 자기를 곤란한 처지에 빠뜨려 말문을 막고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교묘하게 말을 돌려 대답했다.

「어찌하여 그 사람들처럼 되는 일이 불가하다는 것이오. 대저 상군 공손앙은 효공(孝公)을 온몸을 다하여 받들며 결코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며, 공실만을 위해 심력을 기우리고 결코 사사로운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소. 또한 형구(形具)를 마련하여 나라 안의 간사한 무리들을 금했으며, 신상필벌(信賞必罰)을 행하여 나라에 치세가 오도록 했소. 가슴속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열고 진정한 마음을 밝혔으며, 그 과정에서 원한과 허물을 뒤집어쓰고 옛친구까지 속여 공자앙(公子卬)2)을 사로잡아 사직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이롭게 했소. 상군은 마침내 적장을 사로잡아 진나라의 영토를 천리까지 넓혔소. 그리고 오기는 초나라의 도왕(悼王)3)을 받들면서 사가(私家)들이 공실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참언하는 자들로 인하여 충성된 자들이 가려지지 않게 했으며, 말을 억지로 맞추지 않았고, 행동을 또한 구차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위험하다고 하여 행동을 바꾸지 않았으며 의를 행하는 일을 어렵다고 피하지 않아 결국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어 패자(覇者)가 되도록 하면서 자신에게 닥치는 화난도 마다하지 않았소. 대부 문종(文種)은 월왕을 섬기면서 곤란에 처하고 욕됨을 입은 주군에게 충성스러운 마음을 다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다가 주군이 이윽고 망해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나라를 잃었으나 여전히 주군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그 곁을 떠나지 않았소. 마침내 월왕이 나라를 다시 찾은 후에 문종에게 대공을 이루었다고 고했음에도 스스로 자랑하며 교만하지 않았으며 자기가 이룬 부귀 역시 방종하게 사용하거나 가볍게 처신하지 않았소. 그 세 사람은 원래 대의의 지극함과 충성을 바쳐 절개를 지킨 사람의 표본을 보여준 사람들이오. 왜냐하면 군자가 난을 당함에 죽음으로써 대의를 지키기를 마치 죽음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행했기 때문이고, 살아 욕됨을 얻는 것은 죽어서 영광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오. 선비란 원래 자기 몸을 죽여 이름을 얻고자 하지만 다만 그 대의가 존재하는 곳이면 비록 죽어도 아무런 한을 두지 않는 법이오. 어찌 이 세 사람처럼 되는 것이 물가하다고 하오?」

「군주가 성인이면 그 신하들도 어질어 그것은 천하의 커다란 복입니다. 군주가 명철하면 그 신하들도 정직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나라의 복입니다. 아버지가 자애롭고 그 아들이 효성스러우며, 지아비가 믿음이 있고 그 처가 정결하면 집안의 복입니다. 그러나 비간(比干)4)이 비록 충성스러웠지만 은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오자서가 지혜로웠지만 역시 오나라를 완전히 보존시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신생(申生)5)은 효성스러웠지만 당진국의 변란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충신에 효자였으나 나라와 집안은 변란이 일어나 멸망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들의 충성과 효성을 알아주는 명철한 군주나 자애로운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로 천하 사람들로부터 그 군주와 아버지는 욕됨을 얻는데 그 신하와 아들들은 가엽게 여겨지게 됩니다. 그런데 상군, 오기, 문종 이 세 사람은 모두 남의 신하된 자로 훌륭한 사람들이나 그 군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 세 사람이 공업을 이루었으나 덕을 행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슨 이유로 불우하게 죽은 세 사람을 앙모하십니까? 무릇 죽음으로써 충절을 세우고 명성을 이룩할 수 있다면 미자(微子)는 인(仁)을 이룰 수 없었고, 공자는 성인으로 추앙받기에 부족했으며, 관중은 큰일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이 공을 세우는 데 있어서 완전하게 이루는 것을 어찌 바라지 않겠습니까? 몸과 이름을 같이 보존하는 자는 제일이며, 이름은 남겼으나 그 몸은 죽은 자는 그 다음이며, 이름은 욕됨을 입고 몸도 죽는 것이 제일 나쁘다고 여겨지는 일입니다.」

이에 범수는 채택의 말이 옳다고 수긍했다. 채택이 다시 얼마간의 뜸을 들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대저 상군, 오기, 문종 그 세 사람은 남의 신하된 자로써 충성을 다하여 공업을 이룬 일은 비록 본받을 만 하다고 하겠으나, 굉요(宏夭)7)가 주문왕(周文王)을 받들고, 주공(周公)이 주성왕(周成王)을 보좌한 일은 또한 충성스럽고 지극히 지혜로운 공업이 아니겠습니까? 군주를 모시는 신하로써 논한다면, 상군, 오기, 문종과 굉요(宏夭), 주공(周公) 중 어느 편을 본받기를 원하십니까? 」

「상군, 오기, 문종 등의 공적은 굉요와 주공 두 사람의 공적에 비할 수 없소.」

「그렇다면 지금 승상께서 모시고 있는 지금의 군주가, 인자하고 충신을 믿으며, 오랜 친구의 정을 잊지 못하는 돈후한 심성에, 현능하고 지혜로우며 유도(有道)한 선비와의 사귐이, 마치 아교나 칠을 바른 것과 같이 친밀하고, 공신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의리에 있어서,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 등과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채택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승상의 주군되시는 분은 충신들과 친하기가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 보다 못함에도, 승상께서는 지혜를 발휘하여 능히 군주의 안전을 위해 정치를 개혁했습니다. 이어서 내란을 다스리고 강병을 키워, 미래의 환란을 꺾어 예방하고, 영토를 넓히고 양식의 생산을 늘린 결과 나라는 부강하게 되고 백성들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또한 군주의 위세를 강하게 했으며 사직을 높이고 진나라 종묘의 영광을 제후들 사이에 찬란하게 들어나게 함으로 해서 천하에 아무도 주군을 감히 속이거나 범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주군의 위엄은 해내(海內)를 진동시키고 그 공업은 빛을 발해 만리 밖에까지 비추고 그 이름은 천세에 걸쳐 찬란하게 전해질 것입니다. 승상이 이룩한 공업과 상군, 오기, 문종 세 사람이 행한 공업을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들보다 못하오.」

「 지금 승상의 주군이 충신들과 친하거나 옛친구를 잊지 못하는 심성에 있어서 진효공, 초도왕, 월왕 구천보다 못하고, 또한 승상께서 이룩한 공업은 상군, 오기, 문종보다 못함에도, 승상의 봉록과 작위는 지극히 높아, 승상 개인의 부는 그 세 사람을 능가합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물러나지 않고 머무르고 있으니 닥칠 환란은 그 세 사람보다 훨씬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위험은 승상 가까이에 있습니다. 속담에 ‘해가 중천에 이르면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고 했습니다. 만물이 성하면 쇠하게 되는 일은 천지간의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나아가고 물러서며, 채우고 덜어내기를 시세와 함께 변화하는 자세는 성인들의 변하지 않는 도입니다. 고로 ‘나라에 도가 있으면 세상에 나와서 벼슬하고 도가 사라지면 물러나 숨는다.’라고 했습니다. 성인들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남이 이로우리라!’8) ‘불의로 얻은 부귀는 나에게는 마치 뜬 구름과도 같도다!’9)라고 했습니다. 지금 승상께서는 원수들에게는 원한을, 은인들에게는 덕을 베풀어 모두 갚았으며 마음속으로 바라던 바는 모두 성취했음에도 변화에 대해 아무런 계획이 없으니, 제가 가만히 보건대 승상의 그와 같은 태도는 취하면 안 되는 법입니다. 물총새, 고니, 물소, 코끼리 등은 그들이 처해 있는 장소가 죽음과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들이 사냥꾼에게 잡혀 죽는 이유는 미끼에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소진과 지백(智伯)10)의 지혜는 치욕을 피하고 죽음을 멀리하기에 충분했지만 그들이 결국 목숨을 잃은 이유는 탐욕에 미혹되어 중지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인들은 예법(禮法)을 제정하여 욕망을 절제하도록 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징수할 때는 한도를 두었으며, 일을 시킬 때는 절기를 고려했고, 인력을 사용할 때는 그치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고자 하는 뜻은 강력하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 않았고, 행동에는 교만하지 않았으며 항상 도와 함께 하여 실수함이 없었습니다. 고로 천하는 그의 뜻을 승계하여 끊어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옛날 제환공이 구합제후(九合諸侯)와 일광천하(一匡天下)의 위업을 달성해 놓고도 결국은 규구(葵丘)의 회맹에서 교만하고 과시하려는 뜻을 품음으로써 아홉 나라가 등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왕 부차(夫差)가 이끌던 군대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었지만, 너무 용기를 과신한 나머지 제후들을 경시하여 제(齊)와 진(晉)과 같은 강국을 능멸한 결과, 곧바로 몸은 죽고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육(夏育)11), 태사교(太史噭)12)와 같은 장사는 고함을 한 번 지르면 삼군을 놀라게 했으나, 결국 두 사람 모두 범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성대하게만 할 줄 알았지 돌아올 줄 몰랐고 물러나 낮은 곳에 거하여 검약할 줄 몰랐기 때문에 당한 환난입니다.

대저 상군(商君)은 진효공(秦孝公)을 위해 법령을 밝히고 간사한 본성을 금했으며, 공을 세우면 작위를 높이고 상을 주었으며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주었습니다. 저울추를 균등하게 했으며, 길이와 부피를 재는 기구를 통일하고, 상품이나 화폐의 유통을 위해 중량을 일정하게 조절했습니다. 또한 농지의 천맥(阡陌)13)을 허물어 정전제(井田制)를 폐기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그 풍속을 하나로 통일했습니다. 백성들에게 농경을 권장하여 토지의 생산성을 제고시키고, 한 집안에는 두 가지 이상의 생업을 영위하지 못하게 하여 일을 효율적로 행하게 했으며, 힘껏 밭을 갈아 양식을 비축하게 한 다음 싸움과 진법 훈련에 임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군대가 한 번 움직이면 국토가 넓어지고, 싸움을 끝나 병사의 일을 쉬게 되면 나라는 부유하게 되어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에 대적할 나라가 없게 되어 제후들에게 위엄을 세워 진나라를 패주로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상군의 공업이 이루어지자마자 그는 곧바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고 말았습니다. 초나라의 땅은 사방 수천 리에 달하고 극을 쥔 군사들의 수효는 백만입니다. 그런 초나라와 장군 백기(白起)14)는 단지 수만 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싸웠습니다. 한 번 싸움에 언․영(鄢郢)15)을 함락시키고 이릉(夷陵)16)을 불태웠습니다. 남진하여 두 번 싸움에 촉(蜀)과 한중(漢中)을 병합했습니다. 다시 한(韓)과 위(魏) 두 나라의 국경을 넘어 북진하여 강고한 조나라를 공격하여 마복군(馬服君) 조괄(趙括)17)을 구덩이에 묻고 조나라의 항졸 40여 만의 군사들을 모두 도살함으로 해서 장평(長平)18)의 성 밑으로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고 군사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우레와 같았습니다. 계속해서 동진하여 한단성을 포위함으로 해서 진나라는 마침내 제업(帝業)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초(楚)와 조(趙) 두 나라는 천하에 강고한 나라들로 진나라와는 원수 사이였으나 언영과 장평의 싸움 후로는 두 나라는 모두 두려움에 몸을 엎드려 감히 진나라를 다시는 공격하려는 마음을 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장군 백기의 위세에 의해 이루어진 공업입니다. 백기가 몸소 복속시킨 성은 무려 70여 개에 달해 그의 공업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어명에 의해 하사받은 검으로 두우(杜郵)에서 죽었습니다.

초도왕을 위해 법을 세운 오기는 대신들의 지나치게 비대한 권한을 깎고, 무능한 자들을 파직시키고, 무용한 직제를 폐지했으며, 꼭 필요하지 않은 관원은 줄이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았습니다. 또한 초나라의 풍속을 일신시키고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고 유랑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농사짓는 사람들 중에서 정예한 군사들을 길러 남쪽으로는 양월(楊越)19)을 점령하고 북으로는 진(陳)과 채(蔡)를 겸병했습니다. 합종과 연횡의 허황된 논리를 파헤쳐 흩어지게 함으로 해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유세가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백성들을 격려하여 붕당을 짓는 것을 금함으로써 초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그 군사력으로 천하를 진동시켜 그 위세로써 제후들을 복종시켰습니다. 이윽고 오기의 공업(功業)이 이룩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의 몸은 찢겨져 죽고 말았습니다.

대부 문종은 월왕을 위해 치밀하고 원대한 계략을 써서 월왕으로 하여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서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치욕을 영광으로 돌렸습니다. 또한 초지를 개간하여 유민들을 모아 성읍을 채웠고, 전답을 새로이 개척하여 양식을 증산했으며, 사방의 용사들을 이끌고 상하의 노력을 한 곳으로 집결시켜 월왕 구천의 현능함을 도왔습니다. 마침내 부차에게 원수를 갚고 강력한 오왕을 포로로 잡아 월나라는 패업을 이루었습니다. 문종의 공은 이미 빛나고 천하에 신망에 얻게 되었으나 구천은 결국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세 사람은 공을 이루고도 물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입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펼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몰랐고, 나아갈 줄만 알았지 되돌아 갈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종과 같이 월왕을 모셨던 범려(范蠡)는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세상을 버리고 물러나 도주공(陶朱公)이 되어 몸을 길이 보전했습니다. 대감께서는 설마 도박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어떤 때는 크게 돈을 걸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금씩 걸어 남과 함께 돈을 나누어 갖으려고 하는 습성도 승상께서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대감께서는 진나라의 승상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계책을 세우되 자리에서 일어날 필요가 없으며, 책모를 정하되 조정을 떠날 필요가 없고, 앉아서 제후들을 제압하여 삼천(三川)의 지리(地利)를 얻어 의양(宜陽)을 튼실하게 했습니다. 또한 양장(羊腸)20)의 천험을 끊어 태항산(太行山)의 길을 막아 옛날 범씨(范氏)와 중행씨(中行氏)들의 땅이었던 한(韓)나라와 위(魏)의 요로(要路)를 끊었습니다. 또한 육국으로 하여금 합종을 막았고 천리에 걸쳐 잔도(棧道)를 건설하여 촉(蜀)과 한중(漢中)으로 통하는 길을 건설함으로 해서 천하가 모두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만들어 진나라가 바라던 바를 이루었습니다. 이로써 대감의 공은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야 말로 대감께서는 공을 나누어 가져야할 때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일 사정이 이러함에서 승상의 자리에 물러나지 않는다면 즉 상군(商君), 백기(白起), 오기(吳起), 문종(文種)이 당했던 화가 승상의 몸에 머지않아 미칠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물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을 거울로 삼는 자는 자기의 길흉을 알 수 있다.’21)라고 했습니다. 또한 서(書)에 ‘성공한 곳에서는 오래 머물지 말라.’라고 했습니다.’22) 상군, 오기, 백기, 문종 이 네 사람은 성공한 곳에 오래 머물다가 화를 입었는데 대감께서도 어찌하여 오래 머물려고 하십니까? 대감께서 지금 당장 승상의 인장을 돌려주어 현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 자신은 물러나 암굴에 거하며 산천을 벗 삼아 살지 않으십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승상께서는 백이(伯夷)의 청렴한 이름을 얻게 되어 오랫동안 응후(應侯)의 작위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세세손손 열후의 대열에 서서 고(孤)를 칭할 수 있으며, 허유(許由)23)나 연릉계자(延陵季子)24)와 같이 겸양의 덕으로 이름을 얻어 왕자교(王子喬)25)와 적송자(赤松子)26)와 같이 장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아 화를 입어 생을 마치는 일과는 어느 편이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스스로 떠나지 못하고, 의심하여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필시 네 사람처럼 화를 입게 되는 것은 필연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항룡유회(亢龍有悔) 즉 높이 올라 간 용은 후회함이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 올 줄은 모르고, 몸을 펼 줄만 알지 굽힐 줄 모르며, 나아갈 줄만 알지 되돌아 올 줄 모른다는 말입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제가 듣기에 ‘욕심을 부리되 멎을 줄 모르면 자기가 바라던 것을 잃게 되고, 가지고 있으되 족할 줄을 모르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는다.’라고 했습니다. 선생께서 다행히 가르침을 주시니 이 범수가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범수가 즉시 채택을 맞이하여 상객으로 삼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범수가 입조하여 소양왕에게 상주했다.

「산동에서 온 객(客)이 있는데 이름을 채택(蔡澤)이라 합니다. 유세객으로써 삼왕(三王)의 일과 오백(五伯)의 패업(霸業) 및 세속(世俗)의 변화에 밝아 능히 진나라의 정사를 맡길만 합니다. 신이 사람을 매우 많이 보아왔지만 이 사람만한 사람이 없었으며 신조차 따를 수 없습니다. 신이 감히 주청드리옵니다.」

소양왕이 채택을 불러 같이 말을 나누어 본 결과 크게 기뻐하여 객경으로 삼았다. 범수가 병을 칭하고 승상의 인장을 반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다. 소양왕이 완강하게 범수의 청을 허락하지 않고 그로 하여금 계속 일을 보게 했다. 그러나 범수는 다시 칭병하고 몸이 위독하다고 했다. 마침내 소양왕은 범수를 승상의 자리에서 면직시키고 채택의 새로운 계책을 듣고 기뻐하여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진나라는 채택의 계책에 따라 동쪽의 주나라 왕실을 멸하고 그 땅을 겸병했다.

채택이 진나라의 승상이 된지 몇 개월 후에 어떤 사람이 그를 모함했다. 진왕으로부터 죄를 얻어 주살될 것을 두려워한 채택은 그 즉시 병을 칭하고 승상의 인장을 반납하자 소양왕은 그를 강성군(綱成君)에 봉했다. 그는 진나라에 10여 년을 머물며 소양왕(昭陽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莊襄王)을 섬겼다. 이윽고 진시황(秦始皇)이 즉위하여 명을 받고 연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었다. 3년 후에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진나라에 들어왔다.

태사공이 말한다.

「한비자가 말하기를 ‘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전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 말이 진정으로 옳음이여! 범수와 채택은 세상에 말하는 소위 일체변사(一切辯士)27)다. 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제후들에게 유세를 행하고 다녀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음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를 행한 나라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떠돌이 유세객이 진나라에 들어와 서로 경상(卿相)의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업(功業)을 천하에 널리 빛낸 일은 강하고 약한 기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들에게는 또한 우연한 만남이 있는 법이니 두 사람과 같은 현자들이 많음에도 모두가 뜻을 얻지 못한 경우를 어찌 숫자로 세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져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마음이 격분되어 발분할 수 있었겠는가?

- 채택열전 끝 -

주석

1)이태(李兌)/ 전국 때 조나라의 대신이다. 무령왕이 작은아들 공자하(公子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태를 태부에 임명했다. 공자하가 조효성왕이다. 무령왕이 조나라를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안양군(安陽君) 장(章)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태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무령왕이 묵고 있던 사구궁(沙邱宮)으로 도망쳤다. 그의 뒤를 추격하여 사구궁으로 진입한 이태는 공자장을 잡아서 죽였으나 그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구궁을 포위하여 무령왕마저 굶겨 죽였다. 효성왕은 이태를 사구(司寇)에 임명하여 조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2)공자앙(公子卬)/ 위혜왕(魏惠王 : 재위 369-319)의 아들이다.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상앙(商鞅)이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공격하자 공자앙은 위군(魏軍) 대장이 되어 대항하였다. 그는 상앙과는 어렸을 때부터 일찍이 교분이 있었다. 강화회담을 구실로 상앙의 초청을 받은 공자앙은 주연석상에서 진나라의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히고 그가 이끈 위나라 군사들은 싸움에서 패하고 그 자신은 살해되었다.

3)초도왕(楚悼王)/ 전국 때 초나라 군주로 성왕(聲王)의 아들이고 이름은 웅의(熊疑)에 기원전 401년에 즉위하여 381년에 죽었다. 재위시 오기(吳起)를 기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여 법을 밝히고 령을 세우는 것에 중점을 두어 군사들의 전투력을 높이고자 공실 귀족들을 통제했다. 이윽고 신장된 국세와 증강된 군사력으로 남쪽으로는 백월(百越)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진(陳)과 채(蔡)를 멸하여 병탄하고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공격하여 국세가 크게 일어났다. 재위 21년 만에 죽자 귀족들이 란을 일으켜 오기를 살해함으로 해서 초나라의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4)비간(比干)/ 상나라 왕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이 음락을 밝히고 정치를 포학하게 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닦으라고 삼 일 밤 낮을 간하여 물러나지 않았다. 주왕이 고민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결국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말했다.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하니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 주왕이 비간을 죽여 그 배를 갈라 비간의 심장을 살폈다.

5)신생(申生)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56년에 죽은 춘추 때 당진(唐晉)의 태자다. 진헌공(晉獻公 : 재위 기원전 676-652년)의 아들로 상하 양군으로 나누어진 군사 들 하군의 대장이 되어 진헌공을 따라 종군하여 곽(霍), 경(耿), 위(魏) 등의 나라를 쳐서 멸했다. 헌공이 노년에 맞이한 후부인 려희(姬)를 총애하여 그녀의 아들 해제(奚齊)를 대신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대부 사위(士蔿)가 그에게 외국으로 망명하라고 권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헌공 21년 기원전 656년 여희가 제사 지낸 고기에 독약을 놓고 신생에게 누명을 씌우자 해명이나 반역을 도모하지 않고 여희의 잘못을 밝히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의 부친이 노년의 즐거움을 잃어 버리는 것을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도망칠 경우 악명을 얻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공태자(恭太子)다.

6) 미자(微子)/ 이름은 개(開)로 즉 미자개를 말한다.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으로 주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고토에 주왕의 장자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제후로 봉했으나 후에 삼감(三監)의 부추김으로 녹보가 반란을 일으키자 은나라 유민을 고토에서 분산 소개하여 상구(商丘)로 옮기고 주왕의 서형인 미자개(微子開)를 찾아 송에 봉했다. 즉 미자개는 춘추전국시대 때 송나라 시조이다.

7)굉요(宏夭)/ 주문왕(周文王)과 무왕(武王) 때의 명신이다.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이 문왕을 가두었을 때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및 여융(驪戎) 산의 문마(文馬)와 유웅씨(有熊氏)의 사마(駟馬) 아홉 조, 그리고 세상의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은나라의 총신 비중(費仲)을 매수하여 주왕(紂王)에게 바 바쳐 구해낸 산의생(散宜生), 태공망(太公望) 등의 현신들 중 한 명이다.

8)飛龍在天 利見大人(비룡재천 이견대인)/ 주역 乾爲天 95의 효사(爻辭)다. 文言傳 5陽에 ‘ 무릇 동류는 동류끼리 서로 구하는 법이다. 물은 습한 땅에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에 붙는다. 구름은 승천하는 용을 따라 솟아오르고, 골짜기의 바람은 호랑이의 울부짖음에 의하여 일어난다. 이와 같이 성인이 나타나면 만백성은 그에 감응하여 그를 우러러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의 기를 받은 것은 하늘을 따르고 땅의 기를 받은 것은 땅을 따른다. 이는 각기 그 동류를 구하는 모습이다.'라고 했다. 채택이 인용한 것은 명군이 재위에 있으면 현인이 보좌하여 포부를 펼칠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9)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불의이부차귀 어아여부운)/ 논어 述而篇에 나오는 말이다.

10)지백(智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453년에 죽은 춘추 말 당진국의 정경(正卿)이다. 희성(姬姓)에 원래 순씨(荀氏)였으나 후에 지(智) 혹은 지(知)로 바꾸어 지백(智伯)으로 불렀다. 진출공(晉出公 : 재위 전475-458전) 즉위 초에 부친 지선자(智宣子)로부터 당진국의 정경이 되어 제나라와 정나라를 정벌하고 중산국을 무찔렀다. 주정왕 11년 기원전 458년 조(趙), 한(韓), 위(魏) 삼가와 연합하여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를 멸하고 그 봉읍들을 나누어 가졌다. 이어서 출공(出公)을 쫓아내고 그의 손자 교(驕)를 새로 세웠다. 이가 진애공(晉哀公)이다. 교만해진 지백은 당진국의 정권을 오로지하고 대신들을 모욕하는 것을 즐겼다. 후에 한위조(韓魏趙) 삼가에 봉지의 할양을 요구하여 한과 위 두 가문으로부터는 만 호에 해당하는 성읍을 빼앗았으나 조가로부터는 거절당했다. 분노한 지백이 한위 이가를 위협하여 삼가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조가들의 근거지 진양성(晉陽城)을 공격했다. 3년을 공격했으나 성이 함락되지 않자 진수(晉水)의 물을 막아 진양성을 물에 잠기게 했다. 조가들의 모사(謀士) 장맹담이 한위 이가를 설득하여 반격을 가하자 지백은 잡혀 참수되고 지가는 멸족되었다. 지가를 멸한 한위조 삼가는 지가의 봉지를 포함하여 당진의 공실의 땅까지 모두 삼분하여 나라를 세움으로써 기존의 진(秦), 초(楚), 제(齊), 연(燕) 등과 함께 전국칠웅이 되어 전국시대를 열었다. 이를 역사상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한다.

11)하육(夏育)/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田搏)에게 살해 되었다고도 했다.

12)태사교(太史噭)/ 춘추 때 전설상의 용사로 색은(索隱)에서는 분육(賁育)이라 했고 회주고증(會注考證)에서는 전국 때 제나라 출신의 력사로 진무왕을 모신 맹분(孟賁)이라고 했다.

13)천맥(阡陌)/ 논이나 밭의 두렁으로 동서로 난 것을 맥(陌) 남북으로 난 것을 천(阡)이라 한다.

14)백기(白起)/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7년에 죽은 전국 말 진나라의 명장이다. 지금의 섬서성 미현(郿縣)인 미(郿) 출신이다. 진소양왕(秦昭陽王 : 재위 기원전 306-251년) 때 좌서장(左庶長)으로부터 시작해서 우경(右更), 국위(國尉)를 거쳐 대양조(大良造)에 이르렀다. 용병에 대단히 능하여, 진나라를 위해 한(韓), 위(魏), 조(趙), 초(楚) 등의 나라를 공격하여 광할한 넓이의 영토를 빼앗았다. 소양왕 29년 기원전 278년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그 공으로 무안후(武安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長平大戰)에서 조나라의 항복한 45만의 군사들을 모두 구덩이 파묻어 살육을 자행했다. 후에 진나라의 상국 범수(范睢)와 틈이 벌어지고 다시 소양왕의 뜻을 거슬려 자살했다.

15)언영(鄢郢)/언(鄢)은 언읍으로 초나라의 별도(別都) 즉 부도(副都)이고 영(郢)은 도성을 칭하는 초나라의 서울을 일컫는 일반명칭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초나라의 서울을 말할 때 언과 영을 함께 칭했다. 일설에는 영은 원래 초나라의 서울이었는데 후에 언(鄢)으로 천도하자 일반명칭인 영을 함께 사용하여 언영이라고 칭했다고 했다.

16)이릉(夷陵)/ 초나라 선왕들의 묘가 있는 곳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호북성 의창(宜昌) 동남이라는사기색은의 설과 호북성 의성(宜城) 외서산(外西山)이라는 수경(水經)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17)조괄(趙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60년에 죽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장군으로 명장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의 아들로 조사가 죽자 마복군이라는 봉호을 이어받아 마복자(馬服子)라고 불렀다. 지상병담(紙上兵談) 즉 병론에만 밝아 실제적으로 군사를 부릴 재능이 없었다. 주난왕(周赧王) 55년 기원전 260년 진(秦)나라의 반간계에 떨어진 조효성왕(趙孝成王)에 의해 잘 싸우고 있던 염파(廉頗)를 조군의 총대장에서 파면하고 대신 조괄을 임명해 그 직을 대신하도록 명했다. 그는 조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장평(長平)에서 무모하게 출전하여 진나라 진영으로 돌격을 감행했다가 진나라의 명장 백기의 전략에 빠져 살해 당하고 그가 이끌던 40만에 달하는 조나라 군졸은 진나라에 항복했다. 진군 대장 백기는 40만의 항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임으로써 조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18)장평(長平)/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이다.

19)양월(楊越)/ 전국 때부터 위진남북조 시대 까찌 월족의 통칭이다. 일명 양월(揚越)이라고도 한다. 양주(揚州)는 월족의 원주지였음으로 양월이라 한 것이다.

20) 양장(羊腸)/ 양장판(羊腸坂)을 말한다. 태항산(太行山) 남북으로 나 있는 산길을 말하며 남쪽의 산서성 진성시(晉城市)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호관현(壺關縣) 동남쪽에서 끝난다.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게 산중에 난 길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1)鑒於水者見面之容(감어수자견면지용),鑒於人者知吉與凶(감어인자지길여흉)

22) 成功之下 不可久處(성공지하 불가구처)

23)허유(許由)/ 요임금 때의 은사(隱士).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九州)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24)연릉계자(延陵季子)/ 오나라의 공자 계찰(季札)을 말한다. 춘추 때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다. 연릉(延陵)에 봉해져 연릉계자(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원래 수몽이 오왕의 자리를 계찰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형이 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수몽이 그 자리를 장자인 제번(諸樊)에게 물려주면서 이후로는 오나라의 군주 자리는 부자상속 대신에 형제상속을 행하여 계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 제번이 그 부왕의 뜻을 받들어 그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오왕의 자리는 제번에 이어 이매(夷昧), 여제(餘祭)등으로 차례로 형제간에 이어졌다. 여제 4년 기원전 544년 계찰은 여제의 명을 받들어 노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례(周禮)를 살펴보고 그 뜻을 모두 알고 있어 노나라 사람들의 공대를 받았다. 다시 제(齊), 정(鄭), 당진(唐晉) 등의 나라를 방문하여 당시의 현인들로 이름이 난 안영(晏嬰), 자산(子産), 숙향(叔向) 등이 명현(名賢)들과 교유를 맺고 국가의 흥망성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후에 중국 역사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계찰이 예견한 대로 진행되었다. 여제가 죽자 오왕의 자리는 그의 아들 왕료(王僚)가 이었다. 기원전 512년 왕료의 명을 받들어 당진에 사신으로 가 있던 중에, 왕료가 제번의 아들인 공자광(公子光)에 의해 살해되었다. 공자광이 오왕 합려(閤閭)다. 계찰은 귀국하여 합려에게 사신으로 갔다온 일을 복명한 후에 왕료의 묘를 찾아 곡을 올렸다. 후에 공자(孔子)가 친히 계찰이 묻힌 무덤을 찾아가서 <유오연릉계자지묘(有吳延陵季子之墓)>라고 비문을 썼다. 계찰은 공자보다 한 세대 전 사람이다.

25)왕자교(王子喬)/ 주영왕(周靈王 : 재위 기원전 571-545년)의 태자로 이름은 진(晉)이다. 생황을 즐겨 불며 이수(伊水)와 락수지간을 놀러 다니다가 도사 부구공(浮丘公)을 만나 숭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30년 후에 그를 찾아 산에 오른 환량(桓良)이라는 사람에게 「 7월 7일 구지산(緱氏山) 등성이에서 나를 기다리라고 왕실에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윽고 때가 되자 과연 왕자진이 백학을 타고 날아와 산꼭대기에서 머물며 밑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며칠 후에 사라져 버렸다고 했다. 전고는 유향의 열선전이다.

26)적송자(赤松子)/ 적송자(赤誦子)라고도 한다. 좌성남극남악진인(左聖南極南嶽真人) 좌선태허진인(左仙太虛真人)으로 불린다. 진한시대의 전설상의 신선 이름이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 ‘ 적송자는 금화산(金華山)에 살다가 스스로 몸을 태워 신선이 되어 적송간(赤松澗)에서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후한이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적송자는 원래 신화상의 염제(炎帝) 신농(神農) 때 사람으로 우사(雨師)였다고 했다. 음식으로 물을 먹고 옥으로 옷을 해 입은 적송자는 신농에게 능히 타오르는 화염속에서 견디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적송자는 항상 곤륜산 꼭대기로 날아가 서왕모가 사는 석실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바람과 구름을 타고 자유롭게 오르내리곤 했다. 염제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일찍이 그를 따라나서서 그녀 역시 선녀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했다.

27)일체변사(一切辯士)/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유세를 행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목록
8846
[일반] 경포열전(黥布列傳) 31

열전31. 경포(黥布) 경포는 육읍(六邑)1) 출신으로 성은 영(英)이다. 진나라 때 어떤 사람이 포의(布衣)의 어린 나이였던 그의 관상을 보고
운영자 07-12-25
[일반]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30

열전30. 魏豹彭越(위표팽월) 위표(魏豹)는 옛날 위나라 왕실의 공자출신이다. 그의 형 위구(魏咎)는 옛날 위나라가 망하기 전 영릉군(寧陵君)에
운영자 07-12-25
[일반]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29

열전29 장이진여(張耳陳餘) 장이(張耳)는 대량(大梁) 인이다. 그가 어렸을 때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의 문객을 지냈다. 장이가 일찍이 위
운영자 07-07-13
[일반] 몽염열전(蒙恬列傳) 26

열전28. 몽염(蒙恬)   몽영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조부 몽오(蒙驁)가 제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들어와 소양왕(昭襄王)을 모
운영자 07-07-03
[일반] 이사열전(李斯列傳) 27

열전27 이사(李斯) 1. 鼠在所居 人固择地(서재소거 인고택지) - 쥐도 거처하는 곳에 따라 다르니 사람이야 말로 머무를 데를 택해야 한다.-
양승국 07-05-27
[일반] 자객열전(刺客列傳) 26

열전26 자객(刺客) 1. 조말(曹沫)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이다. 용기와 힘으로 노장공(魯莊公)1)을 모셨다. 힘이 센 장사를 좋아했던 노장공에
운영자 07-03-11
[일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25

열전25. 여불위(呂不韋) 1. 奇貨可居(기화가거) - 참으로 진기한 재화라 사둘만하구나! - 여불위(呂不韋)는 한나라 양책(陽翟)의 대상(大商
운영자 07-03-11
[일반] 굴원가의열전(屈原賈誼列傳) 24-2.가의(賈誼)

열전24-2 . 가의(賈誼) 가생(賈生)의 이름은 의(誼)고 낙양(駱陽)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능히 시경을 낭송하고 서경에 익숙하여 그 명성이 군
운영자 07-02-24
[일반] 굴원가의열전(屈原賈誼列傳) 24-1.굴원

열전24-1. 굴원(屈原)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1) 초회왕(楚懷王)2) 때 좌도(佐徒)3)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운영자 06-11-21
[일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3-2.추양

梁苑(양원) 王昌齡(唐) 양원(梁園) 가을 대나무엔 옛적의 안개이건만 梁園秋竹古時煙(양원추죽고시연), 성밖 바람은 슬피 울고
양승국 06-05-16
[일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3-1.노중련

열전23-1. 노중련(魯仲連列傳)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장대한 풍체에 뛰어난 책략을 지녔으나 조정에 나가 벼슬을 살지 않고 고고한 절
양승국 06-05-06
[일반] 전단열전(田單列傳) 22

열전22. 전단(田單) 전단(田單)은 제나라 공실의 성씨인 전(田) 씨의 지족이다. 민왕(湣王)1) 이 재위에 있을 때 단은 임치(臨菑)의 시
양승국 06-01-10
[일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21

열전21. 廉頗·藺相如(염파인상여) 1. 완벽귀조(完璧歸趙) - 인상여가 화씨벽을 보존하다. - 염파(廉頗)는 조나라의 명장이다. 조혜문왕(趙
양승국 05-12-15
[일반] 악의열전(樂毅列傳) 20

열전20. 악의(樂毅) 악의의 선조는 위나라의 장수 악양(樂陽)이다. 악양은 위문후(魏文侯)의 장수가 되어 중산을 정벌하여 취했다. 위문후는 그 공
양승국 05-12-05
[일반] 범수열전(范睢列傳) 19-2.채택(蔡澤)

채택(蔡澤)   채택(蔡澤)은 연나라 사람이다. 유세술을 배워 크고 작은 제후들을 수 없이 찾아다니며 벼슬을 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양승국 05-12-09
[처음][이전][1][2][3] 4 [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