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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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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25. 여불위(呂不韋)


1. 奇貨可居(기화가거)

- 참으로 진기한 재화라 사둘만하구나! -


여불위(呂不韋)는 한나라 양책(陽翟)의 대상(大商)이다. 여러 나라를 돌아니며 싼 값에 물건을 사서 비싼 값에 팔아 수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


진소왕 40년 기원전 267년 진나라의 태자가 죽었다. 42년 태자의 동생 안국군(安國君)을 태자로 삼았다. 안국군에게 20여 명에 달하는 아들이 있었고 평소에 매우 사랑하는 희첩이 있어 후에 그녀를 정비로 삼아 화양부인(華陽夫人)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화양부인과의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안국군의 아들 중에 이름이 자초(子楚)라고 있었는데 그의 모친은 하희(夏姬)였으나 안국군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이 되었다. 진나라가 수차에 걸쳐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자초에게 진나라의 왕손에 대한 예를 행하지 않았다.


  자초는 진나라의 서얼 춘신의 왕손으로 제후의 나라에 인질이 되어 거마를 타고 행차할 때도 충분치 못했고 거차하는 숙소는 곤궁하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여불위가 한단(邯鄲)에 장사하러 왔다가 지나가는 자초를 보고 매우 측은하게 여기며 말했다.

「참으로 진기한 재화라 사둘만하구나!」

그리고는 곧바로 자초를 찾아가 말했다.

「저는 공자의 문호를 크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자초가 여불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우선 그대 자신의 집 문호를 크게 만들고, 이후에나 내 집의 문호를 넓히시오.」

「공자께서는 모르시고 계십니다. 우리집의 문호는 공자를 맞이하기 위해 이미 크게 높여놨습니다.」

자초가 마음 속으로 여불위의 뜻을 짐작하고 그를 인도하여 자리에 앉도록 한 후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불위가 다시 말했다.

「진왕은 연세가 매우 연로하고 안국군은 태자가 되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안국군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을 사랑하고 있으나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으니 누가 태자의 뒤를 이을 황태손으로 설지는 오로지 화양부인에게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공자의 형제는 모두 20여 인에 달하고 그 중 공자의 서열은 중간 정도이나 크게 총애를 받지 못한 결과 오랫동안 제후들의 나라에 인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진왕께서 돌아가신다면 부친이신 안국군께서 왕위에 오르더라도 공자께서는 세손이 될 기회도 없을뿐 아니라 여러 공자들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안국군 앞에서 경쟁하여 태자가 될 기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소?」

「공자께서는 가진 재물이 없이 이곳에서 인질생활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진나라에 계시는 부친이나 화양부인께 바칠 예물도 없고 또 이곳에서 빈객들과 사귈 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이 비록 가난하다하나 청컨대 천금의 돈을 가지고 서쪽으로 들어가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받들어 공자를 적서로 세우고 싶습니다.」

자초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일이 그대의 계획대로 된다면 약속컨대 진나라를 나누어 그대와 함께 다스리겠소.」

여불위는 5백 금을 자초에게 주어 빈객들과 교분을 맺는 데 쓰도록 하고 자기는 나머지 5백 금으로 기이한 보물과 노리개를 사서 휴대하고 서쪽의 진나라로 들어갔다. 진나라에 당도한 여불위는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를 통해 화양부인을 만나 그 물품들을 모두 바치면서 말했다.

「현능하고 지혜를 갖추신 자초님은 조나라에 인질로 있으면서도 천하의 이름있는 빈객들과 두루 교분을 맺고 있습니다. 또한 항상 말씀하시기를 '이 자초는 부인을 하늘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매일 밤마다 부친과 부인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며 생활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불위의 말을 들은 화양부인의 언니가 크게 기뻐하며 부인을 찾아가 말했다.

「내가 들으니 미색으로 다른 사람을 모시는 자는 나이가 들어 미색이 쇠하게 되면 총애도 식는다 했는데, 지금 너는 태자를 모시며 그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으나 자식이 없다. 사랑을 받을 때 빨리 다른 여러 공자들 중 현능하고 효성스러운 적자로 세운다면 태자가 곁에 있을 때는 존중을 받다가 먼 훗날 그 아들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면 그때까지 세를 잃지 않으니 그것이야 말로 한 마디로 말하면 만세에 이르도록 누릴 수 있는 이득이 아니겠는가? 또한 모든 일이 번성할 때 기반을 마련해 놓지 않아 후에 미색이 쇠해져 부군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네가 하는 말 중 한마디라고 다른 사람이 받들겠는가? 오늘 현능하다는 자초 자신은 여러 공자들 중 서열이 중간 밖에 못 되어 스스로는 적자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그의 생모는 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너에게 의지하려고 하니, 네가 이 번 기회에 그를 선택하여 적자로 세우면 너는 결국 대를 이어가며 진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화양부인이 그 말에 혹하여 태자가 쉬는 사이에 넌지시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자초가 매우 현능하고 그와 내왕이 있는 자들은 모두 그를 칭찬해 마지않는다고 전했다. 화양부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계속 말했다.

「제가 후궁에 있다가 태자님의 총애를 받아 태자비가 되었으나 불행히도 아직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컨대 자초를 적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워 주시면 제가 노년에 몸을 그에게 의탁하려고 합니다.」

안국군이 허락하고 그 즉시 부인에서 옥을 갈라 맹세의 징표로 주며 자초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안국군과 화양부인이 많은 예물을 준비하여 자초에게 보내며 여불위에게 그의 태부가 되어 줄 것을 청했다. 자초는 이로써 그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2. 獻出愛姬 暗贈呂兒(헌출애희 암증여아)

- 사랑하는 애첩을 받쳐 진나라 궁중에 여씨 아이를 몰래 들여보내다. -


여불위가 한단에서 춤을 잘 추는 무회를 취하여 같이 동거하던 중 그 무희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와 함께 술을 들다가 그 무희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여불위를 위해 축수를 하고 그 여인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미 일이 이미 진행되어 전 집안의 재산이 자초를 위해 탕진되었으며 또한 자초를 이용하여 얻어야 할 큰 이득이 있음으로 그 무희를 바쳤다. 그 무희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이윽고 12달 만에 아들 정(政) 을 낳았다. 자초는 그 무회를 자기의 정부인으로 삼았다.

진소왕 50년 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왕의(王齮)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한단을 포위하고 급공을 가하자 조나라가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자초와 여불위가 서로 모의하여 황금 6백 근으로 자기를 감시하는 관리들을 매수하여 한단성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일행은 진나라 진영에 당도함으로써 무사히 진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조나라가 자초의 처자를 찾아 살해하려고 했으나 자초의 부인은 조나라의 호족 집안 출신이라 몸을 숨길 수 있었음으로 자초의 부인과 아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3. 一本萬利(일본만리)

- 나라를 사고 팔아 만배의 이익을 취하다. -


진소왕 56년 기원전 251년,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고 화양부인은 왕비가 자초는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가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찾아 진나라에 보냈다.

진왕은 왕위에 오른지 1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태자 자초가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莊襄王)이다. 화양왕비는 화양태후가 되고, 장양왕의 친모 하희(夏姬)는 하태후로 높여졌다. 장양왕 원년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 하남의 낙양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4. 一字千金 呂氏春秋(일자천금 여씨춘추)

- 한 자에 천금을 들여 여씨춘추를 편찬하다. -


장양왕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태자 정이 왕의 자리를 이었다. 진왕 정은 여불위를 상국으로 올리고 중보(仲父) 즉 작은아버지라고 불렀다. 진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태후는 아무도 몰래 여불위를 불러 정을 통했다. 불위의 집에는 가동만 만 명이 넘었다.

당시 위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 조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 제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있었는데 모두 빈객을 모으기를 좋아하여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진나라는 강대국임으로 그들보다 빈객들을 많이 모으지 못한다면 수치라고 여긴 여불위는 그 역시 선비들을 초빙하여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여 3천 명이 넘는 식객들을 모았다. 그때 많은 변사들이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를 하고 있었는데 순경(荀卿)도 그 중 한 사람으로써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반포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즉시 그의 빈객들을 시켜 당시 다른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을 모아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 등의 20여 만자로 된 책을 편찬했다. 이로써 천지만물과 고금의 일들을 모두 기록했다고 하며 그 책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2)라고 명명했다. 함양성 시중의 조문 위에 천금을 걸어놓고 공포하기를 제후들이나 각 나라의 유세객이나 빈객들 중 이 책에 한 자라도 글을 더하거나 감할 수 있다면 천금을 상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5. 僞腐濊宮(위부예궁)

- 거짓 궁형으로 진나라 왕궁을 더렵힌 嫪毐(노애)


   시황제가 장성했음에도 태후는 음행을 그만두지 않았다.

태후와의 일이 발각되어 그 화가 자기에 미칠 것을 두려워한 여불위는 비밀리에 양물이 대단히 큰 노애(嫪毐)라는 사람을 찾아 사인으로 삼아 유흥장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노애로 하여금 그의 양물을 동으로 만든 수레바퀴를 가운데 구멍에 끼고 돌리는 묘기를 펼치도록 해서 고의로 태후의 귀에 들리도록 해서 유인했다. 소문을 듣게 된 태후가 과연 비밀리에 노애를 찾았다.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궁으로 들여보내면서 다시 사람을 시켜 그를 궁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다고 고변하게 했다. 그리고는 여불위가 태후를 찾아가 은밀히 말했다.

「거짓으로 궁형을 받게 한 다음 궁중의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곁에 두십시오.」

태후가 은밀히 궁형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후한 재물을 하사하여 노애에게 궁형을 집행한 것처럼 꾸미고 궁중으로 불러 그의 시중을 들게 했다. 태후가 노애와 아무도 몰래 정을 통하기 시작하더니 노애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이윽고 임신하게 된 태후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걱정한 나머지 점을 쳐 거짓 점괘를 만들어 좋지 않은 때를 피하기 위해 거처를 옹(雍)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노애가 항상 태후를 시종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재물로 후하게 대했다. 태후의 일은 모두 노애의 손에서 처결되었다. 수천 명의 가동을 거느리게 된 노애를 찾아와 궁형을 받아 그의 사인이 되어 일하고 싶다는 사람만도 천여 명이 넘었다.

시황 7년 기원전 240년, 장양왕의 생모 하태후가 죽었다. 효문왕후 화양태후가 효문왕과 같이 수릉(壽陵)에 합장되었고 하태후의 아들 장양왕은 채양(茝陽)에 장사지냈음으로 하태후는 결국 혼자 두동(杜東) 묻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동쪽으로는 아들이 서쪽으로는 남편을 바라 볼 수 있으니 수백 년 후에는 아마도 주위에 만호의 사람이 사는 성읍이 들어서게 되겠구 나!」

시황 9년 서기 238년, 실제로 환관이 아닌 노애가 태후와 침식을 같이하여 아들 둘을 낳아 감추어 기르고 있으면서 태후와 모의하기를 만일 왕이 죽는다면 그 아들로 후계자로 삼으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그래서 진왕이 관리에게 사실 여부를 조사하라고 명하자 그 고변이 사실임이 들어나고 상국 여불위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9월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태후의 소생 두 아들을 죽인 후에 태후를 옹의 다른 곳으로 쫓아내어 연금시켰다. 노애의 수많은 사인들은 그 가족들과 함께 모두 촉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진왕이 상국을 죽이려고 했으나 여불위의 빈객들과 변사들이 여러 대중들에게 선왕을 받드는 공을 생각해서 죽이면 안 된다고 유세했기 때문에 차마 법을 적용하지 못했다.


6. 不謹招亡(불근초망)

- 근신하지 않아 목숨을 잃게 된 여불위 -


진왕 10년 11월 기원전 237년, 여불위를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시켰다. 제나라 사람 모초(茅焦)의 간언을 듣고 진왕이 그 모후를 옹에서 맞이하여 함양으로 데려왔으나 문신후는 하남의 봉국에 부임하도록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제후와 빈객들이 보낸 사자들이 진나라로 통하는 길을 열을 지어 오고가면서 문신후를 뵙기를 청하곤 했다. 진왕이 문신후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를 변란을 걱정하여 서신을 한 장 써서 보냈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을 세웠기에 하남에 10만 호의 식읍을 봉국으로 주었고, 그대가 진나라 종실과 무슨 인척관계가 있기에 중보(仲父)라는 호칭을 받았단 말이오?. 그대는 가솔들을 이끌고 촉군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자기의 지위가 날이 지날수록 깎여지는 것을 본 여불위는 혹시라도 진왕에게 살해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여불위와 노애로 인해 분노했던 진왕은 두 사람이 모두 죽자 촉군으로 보내 살게 했던 노애의 사인들을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했다.

시황 19년 기원전 228년, 태후가 죽자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 짓고 장양왕이 묻혔던 채양(茝陽)에 합장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비천한 출신의 여불위와 노애는 신분이 귀하게 되어 열후(列侯)의 반열에 올랐다. 어떤 사람이 노애가 거짓 궁형을 받았다고 고변했으나 노애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왕은 좌우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진왕이 옹성(雍城)의 교외에 당도하자 노애는 화가 자기의 몸에 미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같은 당의 무리들과 모의하고 태후의 옥쇄를 위조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년궁(蘄年宮)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진왕이 관리들에게 군사를 주어 노애를 공격하게 하자 노애는 싸움에서 지고 도주했다. 호치(好畤)에서 노애를 잡아 참수하고 노애의 종족을 멸족시켰다. 그래서 여불위는 그 사건에 연루되어 축출된 것이다. 공자가 말한 바 있는 '명성만 쫓는 사람'이 바로 여불위가 아니었겠는가?」


- 여불위열전 끝 -


주석

1) 양책(陽翟) /전국 때 한 나라의 영토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일대다. 우왕(禹王)이 세운 하(夏)나라의 도읍이었다. 춘추 때는 정나라 땅으로 역읍(櫟邑)이었다가 전국 때 한나라 령이 되어 양책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2)여씨춘추(呂氏春秋)/ 여람(呂覽)으로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 3천여 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 <서의편(序意篇)>에 '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 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 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 8편과 유시(有始)의 각 7편 씩을 합하여 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의 각 6편 씩의 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 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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