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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3-2.추양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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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梁苑(양원)

王昌齡(唐)

양원(梁園) 가을 대나무엔 옛적의 안개이건만

梁園秋竹古時煙(양원추죽고시연),

성밖 바람은 슬피 울고 해는 지려 하는구나

城外風悲欲暮天(성외풍비욕모천)。

만승의 제후왕 깃발은 어느 곳에 있는지

萬乘旌旗何處在(만승정기하처재),

평대(平臺)의 손님들 누가 가엾게 여기는가?

平臺賓客有誰憐(평대빈객유수린)。

'양원(梁園)'은 한나라 문제의 넷째 아들이 봉해진 양나라의 효왕(孝王)이 만든 정원이다. 그는 크게 궁실을 짓고, 사마상여(司馬相如)와 매승(枚乘) 등의 문사를 이곳 '양원(梁園)'에 초빙하여 성대한 연회를 자주 열었다. 양원은 이후로 한나라 초기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 양원에 심어놓은 대나무 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는 가을이 되어도 예전 그대로이건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옛적의 문사(文士)들과 당시의 번화함. 그로 인해 시인에게 들리는 성 밖의 바람 소리는 그야말로 처량하게 들릴 뿐이다. 천자에 못지않은 큰 권세를 상징하는 양나라의 깃발은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그리고 누가 당시의 양왕 밑에서 부귀를 누렸던 문사들을 가엾게 여기겠는가?

추양이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고 모함을 받아 하옥 되었을 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내용의 글은 청조 강희제(康熙帝) 때 오초재(吳楚材)가 편찬한 고문관지(古文觀止)에는 옥중상양왕서(獄中上梁王書)라는 제목으로 올라있다. 양원(梁苑)은 양효왕이 조성한 정원으로 당시 서한의 유명한 문사들을 불러 연회를 열고 시와 부를 읊으며 즐기게 했던 곳이다.

열전23-2. 추양(鄒陽)

추양은 제나라 사람이다. 일찍이 양(梁)나라에 놀러갔다가 오(吳)나라 사람 장기부자(莊忌夫子)1), 회음(淮陰) 사람 매생(枚生)2)과 같은 명사들과 교우를 맺었다. 추양이 글을 올려 당시 양효왕(梁孝王)3)의 문객으로 있던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의 무리에 혼자 힘으로 낄 수 있었다. 양승 등이 추양을 시기하여 양효왕의 면전에서 그를 모함했다. 분노한 효왕이 추양을 관리들에게 넘겨 죄를 물어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추양은 양나라에 놀러왔다가 참언을 받아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면 명성에 누가 될 까봐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효왕에게 올렸다.

「신은 듣기에 ‘진실로 충성된 자는 그 보답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고, 진실로 믿음이 있는 자는 남에게 의심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신은 항상 그 말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한낱 헛된 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옛날에 형가가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의 의기를 경모하여 진왕을 죽이러 길을 떠날 때 흰 무지개가 일어나 태양을 꿰뚫었으나태자단은 형가가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의심했습니다. 다시 위(衛)선생5)이 진왕을 대신하여 장평에서의 일을 계획하여 조나라를 멸하려고 하자 태백성(太白星)이 묘성(昴星)을 침범하여6)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으나 진소왕(秦昭王)은 여전히 의심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의 정성이 통하여 하늘과 땅이 움직였으나 태자단과 소양왕 두 주인은 믿지 않았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은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온 정성을 다 바쳐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원컨대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왕의 주위 사람들이 사리에 밝지 못하여 결국 그들의 말을 쫓아 저를 관리들에게 넘겨 심문케 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저를 오해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형가와 위선생이 지하에서 다시 부활한다고 해도 태자단이나 진소왕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왕께서는 부디 이와 같은 정황을 세밀하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옛날 변화(卞和)가 천하의 진귀한 보옥(寶玉)을 바쳤으나 초왕은 그의 다리를 잘랐으며,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해 받들었으나 호해(胡亥)7)는 그를 극형에 처해 죽였습니다. 기자(箕子)가 미친 척한 일이나 접여(接輿)가 세상을 피한 일은 모두 이러한 화를 만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변화와 이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초왕과 호해처럼 판단을 잘못하여 신으로 하여금 기자와 접여가 당한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비간은 심장이 도려졌고, 오자서는 목이 잘려 가죽부대에9) 담겨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신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오늘은 그 일이 사실임이 믿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깊이 살피시어 조금이나마 저를 가련히 여겨주십시오. 속담에 ‘흰 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음에도 마치 새로 사귄 친구처럼 서먹하게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쳐가는 수레 위에서 나눈 몇 마디 대화로도 죽마고우처럼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것은 바로 서로 안다고는 했지만 기실은 모르고 지내왔기 때문이며, 같은 지내기는 했지만 그 마음이 있는 곳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옛날의 번오기(樊於期)11)가 진나라로부터 도망쳐 연나라에 망명하여 살다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형가에게 그의 수급을 빌려주어 그로 하여금 태자단의 일을 받들어 수행토록 했습니다. 또한 왕사(王奢)12)는 제나라를 떠나 위(魏)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 제군이 공격해 오자 성루에 올라 목을 찔러 죽음으로써 제나라 군대가 물러가게 하고 위나라를 지켰습니다. 왕사와 번오기 모두에게는 제(齊)와 진(秦) 두 나라에서 오래 살아 새로운 나라가 아니었고, 또한 위(魏)와 연(燕) 두 나라에는 새롭게 옮겨 오래 살았던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은 자기가 오래 살았던 나라를 떠나 새롭게 살기 시작한 위․연(魏燕) 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태자단과 위왕의 뜻이 자기들이 지향하는 뜻에 부합했고 그들의 정의를 향한 무궁한 동경심에서 기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진(蘇秦)은 천하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받지 못했으나 오직 연나라만이 마치 미생(尾生)13)의 믿음을 가지고 소진을 대했습니다. 백규(白圭)14)가 중산국의 장수가 되어 싸움에 나가 패하여 6개의 성을 잃었으나 후에 위(魏)나라를 위해 중산국을 멸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사실은 중산국은 백규를 잘 알지 못했고 위나라는 백규를 잘 알아 그를 후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연나라의 재상이 된 소진을 연나라 사람들이 왕에게 모함하자, 연왕은 칼을 들어 분노를 표하고 결제(駃騠)15)를 잡아 요리를 만들어 소진에게 먹였습니다. 백규가 중산에서 이름을 얻자 중산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여 참소했습니다. 위문후는 중산 사람들이 참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노하여 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벽옥(碧玉)을 백규에게 하사했습니다.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두 사람의 주군과 신하들 사이에는 심장을 가르고 간을 나누듯이 서로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유언비어나 참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변하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여자란 아름답거나 추한거나를 떠나 일단 궁중으로 들어가면 질투를 받게 되고, 선비란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를 떠나 일단 출사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면 모함을 받게 됩니다. 옛날 사마희(司馬喜)16)는 송나라에 있을 때 슬개골이 잘리는 빈형(臏刑)을 받았으나, 중산국으로 들어가 마침내 재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범수(范睢)는 위나라에 있을 때 갈비가 부러지고 이빨이 다 빠질 정도로 곤궁한 처지가 되었지만 마침내는 진나라에 들어가 승상이 되어 응후(應侯)에 봉해졌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신의를 지키는 일만을 신념으로 삼고, 무리를 지어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았음으로 고독한 처지가 되어 결국 소인배들로부터 질투를 받아 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도적(申徒狄)17)은 스스로 하수에 몸을 던졌고 서연(徐衍)18)은 돌을 가슴에 품고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자기들이 세상에 용납이 되지 않았던 이들이지만 세태에 영합하여 구차한 생을 탐하여 조정에서 무리를 짓고 사욕을 취해 그 군주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진목공은 거리를 방황하며 걸식했던 백리해를 불러 국정을 맡겼고, 지나가던 수레 곁에서 소를 치던 영척(寧戚)을 제환공이 불러 나라를 맡겼습니다. 이 두 사람의 등용을 어찌 조당의 관리들 천거를 통해서거나 좌우 사람들의 칭송에 의해서라고 하겠습니까? 마음이 통하고 몸가짐이 일치하면 아교로 붙이거나 칠을 한 것처럼 분리할 수 없는 친형제와 같이 친밀하게 되어 비록 많은 사람들의 참언하는 말이 있다한들 미혹되겠습니까? 고로 한쪽 말만 듣는 행위는 사악한 일을 조장하는 것이며, 한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는 행위는 화란의 원인이 됩니다. 옛날 노후(魯侯)는 계손(季孫)의 말을 듣고 공자를 쫓아냈고19), 송군은 자한(子罕)20)의 말에 혹하여 묵자(墨子)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21) 공자와 묵자와 같은 변설로도 다른 사람들의 참언으로부터 자신에게 닥친 화를 면하지 못했고, 결국은 노(魯)와 송(宋) 두 나라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째서 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의 말은 무쇠라도 녹일 수 있고, 계속해서 비방하는 말이 쌓이게 되면 뼈라도 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22)진나라는 융인(戎人) 유여(由餘)23)를 등용하여 패자가 되었고, 제나라는 월인(越人) 몽(蒙)24)을 등용하여 제선왕(齊宣王)과 위왕(威王) 양대에 걸쳐 강력한 국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가 세속에 얽매이거나 이끌리고, 또한 아첨과 한쪽에 치우친 언사에 미혹된 적이 있었습니까? 공정한 자세로 듣고 또한 살펴 올바른 판단을 함으로 해서 그 이름을 당세에 드높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로 뜻만 맞으면 호(胡)나 월(越) 같은 오랑캐 출신의 사람들과도 친형제처럼 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융인 유여나 월인 몽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또한 뜻이 맞지 않으면 골육의 형제도 용납하지 않고 쫓아내니 이것은 바로 단주(丹朱), 상(象) 및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경우라 하겠습니다.25) 오늘날 그 군주나 주인 된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제나라나 진나라가 행한 올바른 방법을 행하고 후의 송나라나 노나라처럼 잘못 된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오패가 이룩한 공적을 넘어 삼왕(三王)26)의 공업도 쉽게 이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명한 군주는 자지(子之)27)와 같은 거짓된 마음의 신하를 내칠 수 있고 가식적인 선행을 행한 전상(田常)28)의 행위에 대해 능히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간(比干)29)의 후예를 찾아서 제후로 봉하고, 임산부30)의 무덤을 찾아서 보살펴 준 주무왕은 공업을 이루어 천하에 널리 퍼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무왕이 선행을 행하는 데 전혀 싫증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진문공(晉文公)은 그를 죽이려던 원수를 용납하여 친근하게 지냄으로써 수많은 제후들 가운데에서 패자를 칭할 수 있었으며, 제환공(齊桓公)은 그를 죽이려던 원수를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바로 잡았습니다.31) 이것은 또한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자한 마음과 간절한 태도로 사람을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지 어찌 거짓된 언사를 빌려 패업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심지어는 진나라는 상앙을 등용하여 시행한 변법으로 동쪽의 한(韓)과 위(魏) 두 나라를 약화시키고 그 군사들은 천하의 강군이 되었으나 결국 그를 거열형에 처했으며, 또한 월나라는 문종(文種)의 계책32)을 이용하여 당시의 강대한 오나라를 멸하고 패자가 되었으나 결국 그를 주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孫叔敖)33)는 세 번이나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고 오릉(於陵)34)의 자중(子仲)35)은 삼공(三公)의 직을 마다하고 남의 집 정원에 물을 주며 살았습니다. 오늘 대왕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신 후에 다른 사람들의 공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가슴에 품고 속내를 꺼내 진정되고 소박한 마음을 보여 간과 쓸개를 쏟아 덕을 두텁게 베풀어 처음부터 끝까지 동고동락을 같이 하며 선비들을 사랑하고 받드시면, 비록 걸왕(桀王)이 기르는 개일지라도 요임금 같은 성인을 물게 할 수 있으며 도척(盜跖)36)의 손님에게 시켜 허유(許由)37) 같은 어진 은자(隱者)를 칼로 찍어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만승(萬乘) 대국의 왕이 갖고 있는 권세와 성왕의 자질을 갖추신 대왕의 명이라면 더 이상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형가가 진왕을 암살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그 칠족(七族)이 모두 해를 입게 한 일38)이나 요리(要離)가 왕료(王僚)의 아들 경기(慶忌)를 죽이기 위해 그의 처와 자식을 불태워 죽게 만든 일39)만으로 어찌 충분하다고 하겠습니까?

신은 듣기에 ‘명월주(明月珠)나 야광벽(夜光璧)을 한 밤중에 길을 가던 행인을 향해 던지면, 놀란 나머지 칼을 부여잡고 눈을 치켜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 자기들 앞에 버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특이하게 구부러진 나무뿌리 같은 하찮은 물건임에도 나라의 지존인 군주가 감상하는 기물이 됩니다. 무슨 이유에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먼저 조각도 하고 꾸미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귀중한 수후지주(隨侯之珠)40)나 야광지벽(野光之璧)과 같은 보물일지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눈앞에 버려져 있게 되면 원한만 사게 되고 은혜를 입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람이든지 그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해놓으면 죽은 나무나 말라비틀어진 가지일지라도 그것으로 공을 세우게 되어 잊혀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 천하의 포의(布衣)를 입고 곤궁하게 지내는 선비들은 신세가 빈천하게 되어, 비록 요임금이나 순임금의 치술(治術)을 이해하고 있거나, 이윤(伊尹)이나 관중의 변설과 같은 재능을 갖추고 있거나, 관룡봉(關龍逢)이나 비간(比干)이 가지고 있던 지조(志操)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라도 당세의 군주에게 충성을 바쳐 헌신하려면, 평소에 먼저 나무뿌리를 조각하거나 꾸미는 사람들의 천거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한 일입니다. 또한 비록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충성과 신의로써 그 군주를 보좌하여 나라에 치세가 오는데 공을 이루고 싶다고 해도, 그 군주 되는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보물이 자기 앞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 화가 나서 칼을 잡고 노려보게 됩니다. 그래서 포의지사는 썩은 나무나 말라비틀어진 나무줄기보다 그 쓰임이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왕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마치 도공들이 녹노(轆轤)41)를 사용하여 도기를 만드는 일과 같아 저마다의 독특한 방법으로 세상을 교화하여 좌우의 어리석고 어지러운 의견에 끌리지 않으며, 대중들의 근거 없는 말에 미혹되어 큰일을 그르치는 법이 없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 연유로 진시황은 중서자 몽가(蒙嘉)42)의 말을 신임하여 형가의 황당한 말을 믿음으로써 마침내 형가가 비로소 사람들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틈을 타고 몰래 비수를 꺼내어 진시황을 죽이려고 덤벼들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문왕은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여상(呂尙) 강태공(姜太公)을 발견하고 자기의 수레에 태워 처소로 돌아와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진시황은 믿었던 좌우의 측근을 죽여야 했으나, 주문왕은 까마귀 떼처럼 우연히 만난 여상을 얻어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그것은 자기를 속박하는 말에 구애받지 않고, 궁원 밖에서 분분하는 논의에 귀를 기우려 자기만의 방법으로 밝고 넓은 도를 살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군주들은 아첨하는 말에 빠지고, 희첩과 근시들에게 포위되어 견제를 받아 뛰어난 재주를 지닌 선비들을 대하기를 마치 늙은 소와 같이 마굿간에 넣어 같은 사료를 먹여 기르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포초(鮑焦)43)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여 부귀에 연연하지 않고 떠난 것입니다. 신은 ‘의관을 화려하게 차려입고 조정에 나은 자는 이를 탐하여 의를 더럽히면 안 되며, 또한 이름을 갈고 닦고자 하는 자는 사욕으로 품행을 무너뜨리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때문에 효성이 지극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현(縣) 이름이 불순하다하여 발길을 돌렸으며, 조가(朝歌)44)라는 성읍 이름이 자신의 근검(勤儉) 사상과 위배된다고 하여 수레의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천하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지사들은 막중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자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악한 면모의 더러운 품행의 인사들은 아첨이나 일삼는 소인배들을 받들며 그저 대왕의 측근들과 친교만을 맺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뜻있는 선비들은 결국 캄캄한 석굴 속에서 늙어 죽고 말 것이니, 어찌 온 정성을 다해 충성과 신의를 바쳐 대왕을 모실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이 양효왕에게 상주되자, 효왕은 사람을 시켜 추양을 옥에서 꺼내 마침내 상객으로 모셨다.

태사공이 말했다.

추양의 말은 비록 겸손하지 못했지만 유사한 사물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 비교함으로 해서 사람들을 확실히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또한 그것은 불요불굴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나는 그를 열전에 실었다.

<추양열전 끝>

주석

1)장기부자(莊忌夫子)/ 서한의 저명한 사부(辭賦)의 저자이다.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의 이름 장(莊)을 휘하여 성을 엄기(嚴忌)로 바꾸었다. 부자(夫子)는 애칭이나 존칭이라고도 하고, 자(字)라는 설도 있다. 경제(景帝) 때 오왕 유비(劉濞)를 받들다가 유비가 반역을 꾀하자 이를 알게 된 장기가 불가함을 간했으나 듣지 않자 양(梁)나라로 달아나 양효왕(梁孝王)의 문객이 되었다. 그의 시문은 추양(鄒陽), 매승(枚乘),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그의 작품 사부 24편 중 굴원의 불운을 슬퍼한 <애시명(哀時命)> 1편은 특히 유명하다.

2)매생(枚生)/ 기원전 140년에 죽은 서한의 관리이며, 저명한 사부가(辭賦家) 매승(枚乘)을 말한다. 자는 숙(叔)으로 매생은 별칭이다. 처음에 오나라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오왕 유비(劉濞)가 반란을 획책하자 그는 표문을 올려 해롭고 이로움을 열거하며 중지할 것을 간했으나 오왕은 듣지 않았다. 그때 양효왕 유무(劉武)의 세력이 높아 귀하게 되어 문사들을 초빙하여 받들었음으로 매승은 즉시 오나라를 떠나 양나라로 들어갔다. 양효왕은 매승을 낭중으로 삼았다. 얼마 후에 관직을 물러나 향리로 돌아가 은거했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다시 오왕에게 천하정세를 분석한 표문을 올려 군사를 거두어들이기를 권했다. 오왕은 여전히 매승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칠국의 란이 평정되자 그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져 경제가 불러 그를 홍농도위(弘農都尉)에 임명했다. 군의 관리들의 불쾌하게 생각했음으로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도위직을 그만두고 다시 양나라로 들어가 유유자적했다. 당시의 저명한 사부가(辭賦家) 추양, 엄기 등과 교우하고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효왕의 문객들은 모두가 이름있는 사부의 대가였으나 그의 사부는 그 중에서 최고였다. 기원전 144년 양효왕이 죽자 양나라를 떠나 회음으로 돌아갔다. 태자로 있을 때 평소에 그 명성을 들었던 한무제가 즉위하자 즉시 부들로 치장한 안거(安車)를 보내어 초빙했으나 노년으로 인하여 도중에 죽었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매승부(枚乘賦)>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3)양효왕(梁孝王)/ 태어난 해는 확실하지 않고 기원전 141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으로 이름은 유무(劉武)이고 한문제(漢文帝)의 아들이고 한경제(漢景帝)의 동모제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대왕(代王)에 봉해지고, 4년 회양왕(淮陽王)으로 개봉되었다. 12년 기원전 168년 양왕(梁王)으로 옮겼다. 다음은 양효왕세가 편의 일부 기록이다. ‘ 양효왕은 동원(東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둘래가 300여 리나 되었다. 또 수양성(睢陽城)을 확대하여 70여 리가 되게 하였다. 크게 궁전을 짓고 볻도(複道)를 만들었는데 궁전에서부터 평대(平臺)까지가 장장 30여 리가 되었다. 조정이 하사한 천자의 깃발을 받았으며, 출입하는 관원이 1,000여 수레와 10,000여 마리의 말로 가득하였다. 동서로 수레를 달리며 사냥하며그 위세가 천자와 같았다. 외출할 때에는 미리 길을 치워 행인을 차단시켰고 돌아와서는 경계를 강화하였다. 사방의 호걸지사 등을 불러들여 효산(崤山) 이동(以東)의 유세객들이 다 왔으니, 제(齊)나라의 양승(羊勝), 공손궤(公孫詭), 추양(鄒陽)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4) 白虹貫日(백홍관일)

5)위선생/ 전국 때 진나라의 모사(謀士)로 이름은 미상이다. 기원전 260년 진(秦)과 조(趙)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이었던 장평대전 직후 진나라 대장 백기(白起)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계속 진격하여 조나라를 멸하기 위해 위선생을 본국으로 보내 진소양왕을 설득하여 병력과 양식의 추가로 지원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백기의 성공을 시기한 응후(應侯) 범수(范睢)의 방해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6)태백(太白)은 금성(金星)을 말하고, 묘성(昴星)은 28수의 하나로 조나라를 나타내는 별자리다. 즉 전쟁을 주관하는 태백이 조나라의 별자리인 묘성을 침범했다는 것은 조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징조를 말한다.

7)호해(胡亥)/ 진시황의 막내아들로 진시황이 순행 도중에 수레 안에서 죽자 첫째 아들 부소(扶蘇)를 후계로 삼는다는 유언장을 조고(趙高) 및 이사(李斯)와 모의하여 변조하여 황제의 뒤를 이었다. 후에 조고에 의해 살해되고 진나라는 망했다.

8)접여(接輿)/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 “ 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지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수레를 타고 지나가던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봉황새야! 봉황새야! (鳳兮 鳳兮)

너의 덕은 어찌 이리 쇠락해 졌던 말인가? (何德之衰)

지난날의 잘못이야 돌이킬 수 없지만 (往者不可諫兮)

앞날의 잘못이야 피할 수 있으리! (來者猶可追也)

그만두어라! (已而已而)

지금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위태로울 진데 (今之從政者殆而)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해 몸을 피해 달 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 (공자세가)

9)원전은 치이(鴟夷)다. 시체를 담는 가죽부대의 모양이 마치 솔개와 같다고 해서 생긴 말로 오나라의 공신 오자서가 부차에게 죽임을 당해 목이 잘리고 그 몸은 가죽부대에 담겨 강물에 던져졌음으로 월왕 구천 곁을 떠난 범려(范蠡)가 그 화를 면했다는 뜻으로 사용한 이름이다.

10) 白頭如新 傾蓋如故(백두여신 경개여고)

11) 번오기(樊於期)/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27년에 죽었다. 전국 말 때 진나라 장수였으나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어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태자단(太子丹)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시황이 진나라에 남아있던 그의 부모와 처 및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했으며 그가 연나라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자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했다. 형가(荊軻)가 태자단에게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서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면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적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단이 번오기를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말하자 형가가 은밀히 번오기를 만나 진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번오기는 형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자기의 목을 베어 죽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과 비수가 감쳐진 독항의 지적도를 가지고 진왕을 배알하다가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2) 왕사(王奢)/ 전국 때 제(齊)나라 사람으로 위(魏)나라로 망명했다. 후에 제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위나라를 공격하자 왕사는 성루에 올라 제나라 장수를 향해 말했다. “ 장군께서 위나라를 정벌하러 온 것은 단지 이 왕사 한 사람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목숨에 연연하여 나를 용납한 위나라에 누를 끼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는 즉시 목을 찔러 자살함으로 해서 제나라 군사들은 물리쳐 위나라를 지켰다. (<사기집해(史記集解)> 引 <한서음의(漢書音意)

13)미생(尾生)/ 춘추 때 노(魯)나라 사람으로 신의로 유명한 고대 전설상의 인물이다. <장자(莊子). 도척(盜拓)> 편에 ‘ 미생이 한 여인과 다리 밑에서 기한을 정해 만나기로 약속했다. 여자는 오지 않고 강물이 불어났으나 미생은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리 밑을 떠나지 않아 물에 익사하고 말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한 번 약속한 것은 절대로 어기지 않는다는 뜻의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성어는 융통성 없는 고지식함을 비꼬는 말로 쓰인다.

14)백규(白圭)/ 사기집해(史記集解)에 의하면, “ 백규는 중산국의 장수가 되어 싸워 6개의 성을 빼앗겼다. 중산국의 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위나라로 도망쳐 위문후의 후대를 받고 위나라의 장수가 되어 중산국을 멸했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백규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5)결제(駃騠)/ 태어난 지 7일 만에 그 어미말보다 더 빨리 달린다는 명마의 이름이다.

16)사마희(司馬喜)/ 전국 때 중산국의 재상으로 사마희(司馬熹)라고도 한다. 원래 송나라 사람이었으나 슬개골이 짤리는 빈형(臏刑)을 받아 도망쳐 중산으로 들어가 재상이 되었다.

17)신도적(申徒狄)/ 상나라 말기 때 관리로 신도적(申屠狄)이라고도 한다. 포학무도한 정치를 행하는 주왕(紂王)에게 간했으나 듣지 않자 돌을 가슴에 안고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18)서연(徐衍)/ 춘추 때 주왕실의 관리로 주변의 관료들로부터 모함을 받자 돌을 가슴에 품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19)노후(魯侯)는 노소공(魯昭公: 재위 전 541-517)을 말하고 계손(季孫)은 당시 노나라의 정권을 담당했던 계손씨의 당주 계환자(季桓子)를 말한다. 공자가 노나라를 떠난 장면은 공자세가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공자가 상국이 되어 다스린 노나라가 급격히 국세를 신장시키자 이를 두려워한 이웃 제나라가 미인 악사를 노소공에 보내 정사를 소흘히 하게 만들고 다시 노소공이 미인악사에 빠져 노나라 종묘에 제사를 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을 보고 공자가 실망해서 노나라를 떠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노소공이 계환자의 참언을 듣고 공자를 쫓아냈다고 이 기사는 잘못이다.

20)자한(子罕)/ 춘추 때 송나라의 현신(賢臣)으로 사성자한(司城子罕)을 말한다. 성은 악(樂)이고 이름은 희(喜)다. 근검청렴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송나라 사람이 옥을 얻어, 사성(司城) 벼슬의 자한에게 바쳤으나, 자한이 받지 않았다. 옥을 바치는 사람이 "그것을 옥 감정자에게 보여주니 보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치는 것입니다."고 말하자, "나는 탐하지 않는 마음을 보배로 삼고, 그대는 옥을 보배로 여긴다. 만약 그것을 나에게 주면, 둘 다 보물을 잃게 되는 것이다. 각자 그 보물을 소유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21)송나라의 명신 자한의 참소로 송군이 묵적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 기사 역시 근거없는 말이다.

22) 眾口鑠金 積毀銷骨(중구삭금 적훼소골)

23)유여(由餘)/ 춘추 때 섬진국의 진목공의 대부다. 그 조상은 당진국 출신으로 융(戎)으로 들어가 융왕을 모셨다. 진목공 34년 기원전 626년 융왕에 의해 섬진에 사자로 온 유여를 진목공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 그로 하여금 섬진에 귀의토록 한 다음 대부로 임명했다. 진목공은 융족의 지리에 밝은 유여의 계책을 이용하여 12개에 달하는 융족의 나라를 평정하고 그 1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진목공은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유여(由余)>라는 3편의 저사가 지금까지 전한다.

24) 몽(蒙)/ 전국 때 월나라 출신의 제나라의 대신으로 자는 자장(子臧)이다. 제선왕(齊宣王)과 제위왕(齊威王)을 보좌하여 공적을 쌓았다.

25)단주(丹朱)/ 요임금의 아들이다. 단주가 불초하여 천하를 다스릴만한 재목이 안 된다고 생각한 요임금이 그 자리를 순임금에게 선양했다. 상(象)/ 순임금이 이모제로, 순임금이 아버지가 여러 번에 걸쳐 순임금을 해치려고 했으나 순임금은 그럴수록 더욱 부친을 공손한 자세로 모시고 동생 상을 사랑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주공단의 동모제로 성왕이 어려 주공단이 섭정에 올라 주나라를 다스리자 주공단을 의심한 관숙과 채숙 두 사람은 은나라의 구지를 다스리던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부추겨 반란을 사주했다. 반란을 진압한 주공단은 관숙은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26)삼왕(三王)/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왕조를 각각 창건한 우임금, 탕임금 및 주무왕을 말한다.

27)자지(子之)/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14년에 죽은 연(燕)나라 상국이다.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연왕 쾌(噲)가 선양을 행하여 기원전 316년 연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어서 폭정으로 내란이 일어나 2년 후인 기원전 314년 제나라의 공격을 받고 연왕 쾌와 함께 모두 죽었다.

28)전상(田常)/ 춘추 때 제나라의 대신으로 원래 이름은 항(恒)이었으나 한문제(漢文帝) 유항(劉恒)을 휘(諱)하여 상(常)이라고 바꿔 부르게 되었다. 전걸(田乞)의 아들로 제간공(齊簡公) 밑에서 상국이 되어 감지(闞止)와 정권을 다투었다. 그 부친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 줄 때 큰 되를 사용하고 받을 때는 작은 되를 사용하도록 하여 민심을 얻은 후 기원전 481년 군사를 일으켜 제간공(齊簡公)과 감지(監止)를 죽이고 간공의 동생 평공(平公) 오(驁)를 대신 세우고 자신은 상국(相國)이 되어 제나라의 정권을 전횡하였다. 전상 이후 그의 5대 손인 태공(太公) 전화(田和)가 기원전 376년에 제나라 국권을 빼앗아 강씨들의 정권을 대신했다.

29)비간(比干)/ 은나라 말기 때의 대신으로 태정제(太丁帝)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에 의해 소사(少師)에 임명되어 어진 이름을 얻었다. 주왕이 음락을 즐기고 학정을 행하여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간언했다. 3일 동안 간언을 행하고 물러가지 않자 주왕이 노하여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성인의 심장에는 과연 구멍이 7개가 있는지 봐야 되겠다.’라고 말하고 비간을 죽여 배를 가르고 그의 심장을 살폈다.

30)임신한 여자/ 원문은 잉부(孕婦)로 주왕(紂王)이 뱃속의 태아를 살펴보기 위해 임부(姙婦)를 죽이고 배를 갈랐다.

31)원문은 夫晉文公親其讎,彊霸諸侯;齊桓公用其仇,而一匡天下。진문공이 원수처럼 여겼던 자객 발제(勃鞮)와, 유랑생활 중 경비를 들고 달아나 진문공 일행을 곤궁하게 만들었던 두수(頭須)를 용서하여 흉흉했던 당진국의 인심을 수습한 일과 제환공이 제나라 군위를 차지하기 위해 망명지를 떠나 환국하고 있을 때 도중에 매복하여 자신을 활로 쏘아 죽이려고 했던 관중을 등용하여 패자가 된 일을 말한다. 즉 진문공은 원수들과 친하고 제환공은 원수를 등용하여 패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32)문종지모(文種之謀)/ 범려와 함께 월왕 구천을 도와 당시 패자를 칭하던 오왕 부차를 멸하고 월나라를 패권국으로 만든 문종이 제안한 7가지 계책이다. 월왕 구천은 문종을 의심하여 칼을 보내 자살하게 만들었다. 문종의 오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구사한 7가지 계책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재물을 보내어 상대국의 임금과 신하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며, 둘째 곡식의 가격을 올려 그들의 창고를 비우게 하고, 셋째 아름다운 미녀를 보내어 그들의 마음과 의지를 빼앗고,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그들의 궁실을 크게 짓게 하여 그 나라의 재물들을 탕진하게 만들 것이며, 다섯째 아첨을 잘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생각을 어지럽히고, 여섯째 충신들을 구석으로 몰아 스스로 죽게 만들어 그 나라의 임금을 보좌할 수 있는 인재의 벽을 얇게 만들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는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이 재물을 축적하게 하며 한편으로는 군사를 동원하여 대외원정 하게 하여 그 나라의 재정을 피폐하게 만든다. (1. 捐貨幣, 以悅其君臣 2.貴糴粟槁, 以虛其積聚 3. 遣美女, 以惑其心志 4. 遣之巧工良材, 使作宮室, 以罄其財 5. 遣之諛臣, 以亂其謀 6.强其諫臣使自殺, 以弱其輔 7.積財練兵, 以承其弊.)

33)손숙오(孫叔敖)/ 춘추 초장왕(楚莊王 : 재위 전613-592년) 때의 영윤(令尹)이다. 이름은 위오(蔿敖)이고 숙오(叔敖)는 그의 자(字)다. 원래 침구(寢丘)에 살았음으로 침윤(寢尹) 혹은 심윤(沈尹)이라고 칭했다. 초성왕(楚成王)에게 살해당한 초왕 분모(蚡冒)의 증손자다. 초장왕(楚莊王) 밑에서 사마(司馬)로 있던 그의 부친 위가(蔿賈)가 반란을 일으킨 투월초(鬪越椒)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는 종족들을 이끌고 지금의 하남성 회빈(淮濱) 동남의 기사(期思)라는 지방으로 이주해서 근검절약하며 살았다. 후에 초장왕에 의해 발탁되어 초나라의 영윤이 되었다. 그는 작피(勺陂)에 대규모의 수리시설을 확충한 다음 현재 평수로 550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가 가능하게 했으며 다시 지금의 하남성 상성(商城)의 우루(雩婁)의 대규모의 전답을 조성하여 초나라의 농업생산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초장왕이 무게가 가벼운 화폐를 무겁고 큰 것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백성들이 사용하기가 불편하다고 호소하자, 손숙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왕명을 취소하도록 했다. 후에 장왕을 따라 종군하여 지금의 하남성 형양(滎陽) 동북의 필(邲)에서 당진군을 대파하여 초장왕이 패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기 순리열전(循吏列傳)에 ‘ 그가 재상에 세 번이나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한 번도 기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재주가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가 세 번이나 재상의 직에서 파면되었지만 슬퍼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자기의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34)오릉(於陵)/ 지금의 산동성 추평현(鄒平縣) 동남으로 전국 때 제나라 땅이다.

35)자중(子仲)/ 진자중(陳子仲)을 말하며 전국 때 제나라 사람으로 오릉에 살았다. 초왕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자 처자를 이끌고 도망쳐 남의 집 정원에 물을 주며 살았다.

36)도척(盜跖)/ 장주(莊周)가 지은 장자(莊子)라는 책의 편명으로 중국 고대전설 상의 유명한 도적이름이다. 장주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하고 그의 제자가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한다.

37)허유(許由)/ 요임금 때의 은자로 유명한 현인이다.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九州)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38)형가의 칠족이 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7족의 범위는 형제를 포함하여 증조, 부, 본인, 자, 손자, 증손을 말한다.

39) 춘추 말, 오나라의 공자광(公子光)이 자객 전제(專諸)를 시켜 오왕 료(僚)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오왕 합려(闔閭)다. 합려가 다시 왕료의 아들 경기(慶忌)를 두려워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힘이 장사인 그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에 요리가 경기를 죽이겠다가 자원했다. 요리는 오왕 합려로 하여금 자기에게 죄를 물어 자신의 한 팔을 자르고 그의 처자를 잡아 불태워 죽이도록 한 후에 위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경기에게 달려가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어서 오나라로 잠입하여 합려를 죽이고 왕위를 찾아야 한다고 경기를 부추겼다. 경기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요리와 함께 귀국길에 올라 강을 건널 때 요리가 칼을 뽑아 경기를 찔렀으나 힘이 장사인 경기는 죽지 않고 요리의 몸을 움켜쥐고 강물에 던져버렸다. 경기의 몸이 수면에 떠오르면 집어서 물 속에 던지기를 3번이나 연속 했음에도 요리가 죽지 않았다. 경기가 요리가 국사(國士)라고 칭하며 그를 방면하여 오나라에 돌아가게 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리는 오나라에 돌아와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40)수후지주(隨侯之珠)/ 춘추 때 호북성 수주시(隨州市) 일대에 있어던 제후국 수(隨)나라의 군주가 소유했던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수나라의 군주가 놀이를 나가다가 길위에 한 마리의 커더란 뱀이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수후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싸매준 다음 풀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상처가 아문 뱀이 한 개의 구슬을 입에 물고 수후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말했다. “ 나는 곧 동해 용왕의 아들인데 군주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특별히 와서 보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후지벽은 신령스러운 뱀이 물어다 분 구슬이라는 뜻의 영사지주(靈蛇之珠)라고도 한다.

41)원문은 도균(陶鈞)이다. 녹노(轆轤)는 도공이 도자기의 둥근 모양을 낼 때 사용하는 회전판이다.

42)몽가(蒙嘉)/ 전국 말 진나라의 중서자(中庶子)의 직에 있었던 관리다. 중서자의 임무는 주로 제후와 경대부(卿大夫)들의 서자들에 대한 계율과 교리(敎理)를 관장했다.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형가(荊軻)를 진나라에 보냈을 때, 그는 뇌물을 받고 형가가 진시황을 접견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몽가는 본의 아니게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 게 되어 그 죄로 살해되었다.

43)포초(鮑焦)/ 춘추 말 은사(隱士)로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한 행동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항상 땔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며 도토리나 밤을 주어 허기를 채웠다. 그는 세상의 도가 무너져 암흑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자나 제후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 우연히 만난 자공(子貢)으로부터 비난을 받자 ‘ 현인은 쉽게 부끄러워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나무를 부등켜 안고 음식을 끊어 죽었다.

44)조가(朝歌)/ 은나라가 망할 때 도성으로 춘추 초에는 위(衛)나라가 도읍했으며 전국 시대에 이르러 조(趙)나라 령이었다. 이름의 뜻이 ‘아침부터 노래를 불러 즐긴다’도 해서 근검절약을 주장하는 묵자의 사상에 반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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