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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5-06 18:05:546463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3-1.노중련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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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23-1. 노중련(魯仲連列傳)

노중련은 제나라 사람이다. 그는 장대한 풍체에 뛰어난 책략을 지녔으나 조정에 나가 벼슬을 살지 않고 고고한 절의만을 지키며 살았다. 어느 날 노중련이 조나라에 들렀다.

그때 조나라는 효성왕(孝成王)1)이 다스리던 시대로, 진소양왕(秦昭陽王)이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에서 40여 만의 조군을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동쪽으로 진격하여 조나라의 도성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있을 때였다. 두려움에 빠진 조왕은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했다. 제후들이 보낸 구원군은 진나라의 위세에 눌려 감히 진군을 공격하지 못했다. 진비(晉鄙)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일으켜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한 위안리왕(魏安釐王)2)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위나라 구원군의 행군을 탕음(蕩陰)3)에서 멈추게 하고 객장(客將)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한단으로 들어가 평원군을 통해 조왕을 설득하도록 했다.

「옛날 진왕은 제민왕(齊湣王)과 강성함을 다투어 함께 제호(帝號)를 칭했다가 곧바로 취소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제나라는 이미 쇠약해지고, 바야흐로 혼자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 진왕이 군사를 보내 한단성을 포위한 이유는 한단을 넘보기 위함이 아니라 본심은 제호(帝號)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조나라가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진왕을 제(帝)로 받들기로 청한다면 진왕은 틀림없이 기뻐하며 군사들을 물리칠 것입니다.」

평원군이 신원연의 말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때 손님으로 조나라를 방문하고 있었던 노중련(魯仲連)은 마침 진군이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개시한 때를 만나 위나라가 조나라로 하여금 진소왕(秦昭王)을 제(帝)로 받들게 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노중련은 평원군을 찾아가 말했다.

「위나라가 청한 일을 장차 어떻게 처리하시려고 생각하십니까?」

 평원군이 대답했다.

「이 승(勝)이 어찌 감히 이 일에 대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조나라는 장평에서 40여 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고, 오늘 다시 한단성이 포위당해 안에서는 진군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위왕이 객장 신원연을 사자로 보내와 우리 조나라로 하여금 진왕을 제로 받들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자로 온 신연원이 이곳에 있습니다. 어찌 이 승이 감히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노중련이 말했다.

「저는 원래 군은 천하에 이름이 높은 어진 공자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보니 군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량(大梁)에서 온 객장 신원연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군을 위해 그를 책하여 위나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이 승이 선생을 소개하여 신원연으로 하여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평원군이 즉시 신원연을 찾아가 말했다.

「동쪽의 제나라에서 노중련이라는 선생이 이곳 한단성에 방문하고 있는데 제가 장군께 소개하여 교제를 맺도록 하고 싶습니다.」

신원연이 대답했다.

「저도 노중련 선생이 제나라의 높은 선비라는 사실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연(衍)은 위나라의 신하라 사자로써 받들어야할 직무가 있습니다. 저는 노중련 선생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장군이 이곳에 계시다고 노중련 선생에게 말했습니다.」   

신원연이 할 수 없이 노중련과의 졉견을 허락했다. 이윽고 노중련이 신원연을 만났으나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원연이 먼저 말했다.

「제가 포위 된 이 성안에 거주하거나 머물고 있는 사람을 살펴 본 바 모두가 평원군에게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의 당당한 모습을 보니 선생은 평원군에게서 아무 것도 구하는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포위되어 위급하게 된 성에 머물며 떠나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포초(鮑焦)4)가 도량이 크지 않아서 죽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포초가 세상에 몸을 두고 있는 세상이 혼탁한 것을 수치로 여겼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지 이해타산에 젖어 자기 한 몸만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오로지 전공(戰功) 만을 숭상하여, 선비들은 권모술수로 대하고 그 백성들을 마치 노예처럼 부려먹고 있습니다. 만일에 진나라로 하여금 왕 위의 제호(帝號)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의적으로 칭하게 한다면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천하를 통치하려고 덤벼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단지 도망쳐서 동해바다에 몸들 던져 죽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결코 진나라의 온순한 백성이 되는 경우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장군을 찾아와서 뵙는 이유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조나라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선생께서 어떻게 조나라를 돕는다는 이야기입니까?」

「저는 위(魏)나라와 연(燕)나라에 조나라를 돕도록 청할 예정이며, 제(齊)와 초(楚) 두 나라는 원래 조나라를 돕고 있으니 문제없습니다.」

「연나라가 선생의 말을 따를 것이라는 말은 제가 믿겠습니다. 그런데 위나라에 대해서는, 위왕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사자로 온 사람은 바로 본인입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위나라로 하여금 능히 조나라를 돕도록 하시겠다는 말입니까?」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됨으로 해서 일어나는 재앙을 위나라가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조나라를 돕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됨으로 해서 입게 되는 재앙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하면, 위나라는 틀림없이 조나라를 돕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제호를 칭하게 되면 위나라가 무슨 어떤 화를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옛날, 제위왕은 인의(仁義)를 받들어 천하의 제후들을 이끌고 주천자에게 조현을 올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주나라의 국세는 곤궁하고 또한 약소했기 때문에 어떤 제후도 와서 조현을 올리지 않았는데 오로지 제나라만이 천자에게 조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주열왕(周烈王)5)이 서거하자 조문을 드리러 온 제위왕이 시간이 늦게 당도했습니다. 상례를 끝내고 새로 주왕의 자리에 오른 주현왕(周顯王)은 화가 나서 제나라에 보내는 답례사절을 통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습니다.

‘천자가 서거하여 마치 하늘이 꺼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대사 중의 대사라, 새로운 천자 역시 궁실을 떠나 상중에 풀로 짠 돗자리에 잠을 자고 있는 마당에, 동방의 번신(藩臣)인 인제(因齊)6)가 늦게 당도했으니 마땅히 그 목을 베어야 할 것이다.’

제위왕이 듣고 발연히 노하여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종년의 아들놈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래서 결국 제위왕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천자가 살아있을 때는 거르지 않고 주나라를 찾아 조현을 드려 정성들여 받들어 놓고서는 천자가 죽으니 욕을 해서 신하로써의 본분을 잃은 행동은, 사실은 새로 등극한 천자의 가혹한 요구에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도 해도, 그러나 비록 세력이 미약하지만 그래도 천자는 천자인 것이라, 주왕이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저 노복이 보이지 않습니까? 10명의 노복이 한 명의 주인을 따르는 연유는 힘이 부족하거나 지혜가 따르지 못해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주인의 신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위왕과 진왕의 경우를 말할 것 같으면 위왕의 처지가

노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진왕으로 하여금 위왕을 팽살한 다음 그 고기로 육젓을 담그게 하겠습니다.」

신원연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의 말씀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선생께서 무슨 수로 진왕으로 하여금 위왕을 팽살시켜 그 시신으로 육젓을 담그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저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장군께 말씀드리겠으니 들어보십시오. 옛날 구후(九侯)7), 악후(鄂侯), 서백(西伯)은 모두 은나라 주왕(紂王)의 세 제후로 삼공(三公)의 직에 있었습니다. 구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주왕은 그녀가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구후를 죽여 그 시신으로 육젓을 담궜습니다. 악후가 만류하며 강하게 간하여 구후를 변호했습니다. 주왕은 다시 악후를 죽여 그 시신에서 포를 뜨게 했습니다. 서백이 그 소식을 듣고 단지 장탄식을 했을 뿐이었지만 주왕은 서백을 잡아 유리(羑里)의 감옥에 100일 동안이나 가두어 놓고 죽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왕과 같은 왕의 신분임에도 결국 그의 신하를 자처하여 포로 뜨여지거나 육젓에 담궈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연군(燕軍)에 쫓긴 제민왕(齊湣王)8)이 노(魯)나라로 들어갈 때 이유자(夷維子)가 말채찍을 잡고 수행하면서 제민왕을 영접하러 나온 노나라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우리의 군주를 모시려고 하는가?’

노나라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장차 10 태뢰(太牢)9)로 그대의 군주를 모시려고 합니다.’

이유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예로써 우리의 군주를 모시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군주는 곧 천자라, 천자가 순수(巡狩)를 나서면 제후들은 그들이 거처하는 정궁(正宮)을 비워주고 창고의 열쇠를 내어주며, 옷깃을 여미고 식탁을 배치한 후에 당하에 서서 천자에게 바치는 요리를 살펴야 하며, 천자가 식사를 다 한 후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물러나 조회에 임하여 정사를 돌보아야 하는 것이오.’

노나라 사람이 듣고는 관문을 닫고 문에 열쇠를 채워 제민왕을 노나라 영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민광은 결국 노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민왕 일행은 다시 방향을 바꿔 설(薛)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도중에 추(鄒)나라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추나라 군주가 죽어 민왕이 들어가 조문을 행하려고 하자, 이유자가 추나라 군주의 후계자에게 말했습니다.

‘천자가 조문을 할 때는 상주는 관을 뒤로하고 남쪽에 자리를 펴고 북면하면, 천자가 남면하여 자리를 잡고 앉아 조문을 행하는 것이오.’

이에 추나라 군신들이 말했습니다.

‘조문을 이와 같이 행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칼 위에 엎어져 죽겠소.’

그래서 민왕은 감히 추나라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추와 노 두 나라의 신료들은 그들의 국군이 살아 있을 때는 나라가 가난하여 마음껏 봉양하지도 못했고, 죽었을 때는 변변하게 재화나 수의를 장만하여 부장하지도 못했지만, 제민왕이 천자의 예로 그들 국군을 대하려고 했음에도 추와 노 두 나라의 신료들은 단연코 거절한 것입니다. 오늘 날, 진나라는 만승의 나라이고 위나라 역시 만승의 나라입니다. 똑같이 만승의 나라에 왕호도 같이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한 번의 싸움에 이기자 사용하려고 하는 제호를 위나라가 또한 따르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삼진(三晋)의 대신들을 추나 노 두 나라 신료들의 종복이나 첩의 처지만도 못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만일 진나라가 탐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어코 제호를 칭한다면, 그때는 틀림없이 제후국들의 대신들을 바꿀 것입니다. 그들은 장차 그들이 불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파면하고, 그들이 현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바꿀 것이며,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그들이 총애하는 사람들로 모두 교체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자녀와 요사스러운 희첩들을 제후의 비빈으로 삼게 하여 위나라의 궁궐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왕은 무슨 수로 안녕하게 생활할 수 있겠으며 장군은 예전처럼 위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신원연이 자리에 일어나더니 노중련에게 절을 두 번이나 올리며 사죄의 말을 했다.

「처음에는 제가 선생을 범인으로 생각했으나, 말씀을 듣고 보니 선생이야말로 천하의 뛰어난 선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결코 다시는 진왕은 제로 받들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한단성을 포위하고 있던 진나라 장수가 소식을 전해 듣고 50리 밖으로 군사를 물리쳤다. 그때 마침 위공자 무기(無忌)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나라 대장 진비(晉鄙)로부터 군권을 탈취하여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은 조나라에서 물러갔다.

그래서 평원군이 노중련에게 상으로 땅을 주어 봉하려고 했으나 노중련은 한사코 사양하여 결국 받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평원군이 주연을 마련하고 초대하여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천금으로 노중련의 수(壽)를 빌려고 했다. 노중련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뛰어난 선비가 천하 사람들로부터 숭상을 받는 이유는, 그들은 능히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화를 물리쳐주고, 재난을 없애 주며, 분쟁을 해결주면서도 그 대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바로 대가를 바라고 하는 장사꾼들의 행위에 불과한 일입니다. 어찌 내가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평원군에게 작별을 고하고 조나라를 떠나 죽을 때까지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20년 후, 연나라 장군이 요성(聊城)10)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요성 사람이 연왕에게 그 장수를 참소하자, 그는 주살될 것을 두려워하여 요성에 머무르며 감히 자기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제나라 장군 전단(田單)11)이 한 해가 넘도록 요성을 공격했지만 많은 사졸들만 전사하고 요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노중련이 듣고 편지를 한 통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나라 장수에게 전하도록 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듣건대 지혜로운 사람은 시류에 역행하지 않아 이를 놓치지 않고, 용사는 죽음을 피해 그 명성을 훼손시키지 않는다고 했으며 충신은 그 군주를 먼저 돌아보고 자신을 돌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은 일시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연왕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그 신하를 부릴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 것은 불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싸우다가 몸은 죽고 요성마저 잃는다면, 그 높은 이름은 제나라에 떨칠 수가 없으니 이는 용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룬 공은 무너지고 그 이름은 묻히니 또한 지혜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당세의 군주들은 신하로 쓰지 않을 것이고 유세하는 선비들은 그런 사람들을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결단에 주저하지 않으며, 용기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금 장군은 생사(生死)와 영욕(榮辱), 귀천(貴賤)과 존비(尊卑)의 기로에 있습니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원컨대 깊이 생각하여 세속의 일반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나라와 위나라가 제나라의 남양(南陽)12)과 평륙(平陸)13)을 각각 공격하고 있지만 제나라는 남쪽의 일에 그다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남양을 잃는다 해도 그 해가 크지 않고, 제북(濟北)을 얻는 이익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계획을 정해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제나라를 도운다면 위나라는 감히 동쪽으로 군사를 보내 제나라를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진과 제 두 나라가 연횡(連橫)의 국면을 이루게 되면 초나라 또한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형세 하에서 제나라가 남양을 포기하고 우변의 국토를 잘라서 버리고서라도 제북을 평정하려는 이유는 이해득실을 면밀히 따져서 시행하는 결책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제나라는 필히 요성을 탈환하려고 하니 장군은 주저하지 마시고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지금 초와 위 두 나라 군대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제나라에서 철군하고 있는데 연나라에서의 구원군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나라는 전국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다른 나라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요성을 공격할 것이니 이미 1년 이상이나 포위되어 피폐해진 요성을 장군이 결코 지킬 수 없음을 자명한 일입니다. 또한 연나라에는 내란이 일어나 그 군신들은 속수무책이 되었고, 상하는 미혹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율복(栗腹)14)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나라 밖으로 출전하여 다섯 번이나 계속해서 패전한 결과 1만 량의 병거를 보유하고 있는 대국이면서도 장평대전에서 40만에 달하는 전 군사를 잃어버려 허약해진 조나라에게 오히려 포위당해 국토는 줄어들고 군주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나라는 피폐해지고 화난은 많아 백성들은 그 불안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오늘 장군이 피폐해진 요성의 군민들을 이끌고 제나라의 전군에게 대항하려고 하는 행동은 마치 묵적(墨翟)이 초나라의 공격을 훌륭하게 방어한 일과 견줄 수 있습니다. 15)그러나 식량이 떨어져 인육으로 허기를 채우고, 해골을 주어 땔감으로 쓰고 있으면서 성안의 군민들은 결코 장군을 배반할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것은 군사를 잘 다뤘던 손빈의 능력에 비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장군의 위명은 천하에 이미 빛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비록 이렇다 할지라도 장군을 위해 고려한다면 성안의 병력을 보전한 채로 연나라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군사들을 보존하여 연나라로 돌아간다면 연왕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며, 그 온전한 몸으로 군사들이 귀국하게 된다면 백성들 또한 죽은 부모와 다시 상봉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며, 친구들 역시 흥분하여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칭송을 하면 장군의 공업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위로는 군주가 군신들을 통솔하는데 돕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르며 유세객들에게는 그 사례를 제공하고, 또한 국정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꾸며 공업과 명성을 함께 이룩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장군께서 연나라로 돌아갈 마음이 없다면, 세속의 여론에 구애받지 마시고 연나라를 버리고 동쪽으로 나와 제나라에 귀의하십시오. 제나라는 틀림없이 그 영토를 떼어 장군을 봉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의 도(陶)에 봉해진 위염(魏冉)16)이나 상(商)에 봉해진 위앙(衛鞅)이 누린 것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부귀를 얻어 세세손손 제후가 되어 고(孤)를 칭하며 오랜 세월 동안 제나라와 같이 함도 한 가지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은 모두 이름을 높이고 실리를 두텁게 할 수 있는 방책이나 원컨대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어 그 중 하나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작은 절조에 연연하는 자는 찬란히 빛나는 명예를 이룰 수 없고, 작은 치욕을 못 참는 자는 큰 공업을 이룰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옛날 관중이 제환공을 활로 쏘아 허리띠의 죔쇠를 맞추었으니 이는 실로 찬탈행위에 해당함이며, 후에 다시 공자규가 죽자 따라 같이 죽지 않았으니 니는 실로 비겁한 행위였으며 다시 몸에 형구를 차고 옥에 갇히었으니 이 또한 치욕을 받았음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행하거나 당한 사람을 세상의 군주들은 신하로 삼지 않을 것이며, 그와 친한 고향사람들은 그를 찾지도 않을 것입니다. 처음에 만일 관중이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죽어 제나라에 돌아 올 수 없었다면, 그는 그와 같은 치욕이나 비열한 이름을 얻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비조차도 그 이름이 관중과 함께 논해지는 일을 수치로 여기는데 하물며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관중은 감옥에 갇힌 몸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를 태평하게 못하게 한 일을 치욕으로 생각했으며, 공자규를 따라 죽지 않음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제후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높이지 못한 일을 치욕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록 관중이 군주의 옥체를 범하고, 죽음을 피해 목숨을 아꼈으며, 옥에 갇히어 죄수가 되어, 모두 세 가지의 치욕을 당했음에도 제환공이 오패의 으뜸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하여 그 이름은 천하의 그 누구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주위의 제후국들 위에서 찬란히 빛나게 된 것입니다.

옛날 조말(曹沫)은 노나라의 장군이 되어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패배하여 5백리에 달하는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처음에 만일 조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상황을 세세하게 고려하여 계책을 내게 하지 않고 그저 대책만을 재촉하여 목을 찔러 자살로 몰았다면 적군에게 포로로 잡힌 패군지장이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말은 세 번이나 싸움에서 패한 일을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돌아와 노군에게 5백리의 땅을 돌려받을 수 있는 계책을 의논했습니다. 제환공이 천하의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여는 것을 기회로 한 개의 단검에 의지하여 회맹단에 올라 그 단검을 뽑아 제환공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조말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고 말투와 태도는 흔들림이 없이 태연하였습니다. 결국 조말은 세 번의 싸움에서 잃은 영토를 한 번의 노력으로 되찾아 천하를 진동시키고 제후들을 놀라게 하여 노나라의 이름을 저 멀리 오(吳)나 월(越)나라까지 드높이게 하였습니다. 만약 이 두 사람이 작은 염치와 작은 절의를 세우는 것에 만족했다면, 자신의 몸을 죽이고 후손들을 단절시켜 공명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것은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일시적인 분노를 버리고 평생의 위명을 세웠으며, 일시적인 분노를 버려 세세대대로 전해질 공업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세운 공적은 삼왕(三王)이 이룬 것과 우열을 논할 만하고 그 명성은 하늘과 땅에 영원히 전해질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하시기를 바랍니다. 」

노중련의 편지를 읽어본 연나라 장군은 3일 동안을 흐느껴 울며 결단하지 못했다. 연나라로 돌아가려고 하자니 그때는 이미 연왕과는 틈이 생겨 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고, 제나라에 투항하자니 제나라 군사들을 너무 많이 죽이거나 포로로 했기 때문에 항복했을 경우 당할 치욕을 걱정했다. 그는 오랫동안 탄식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잡혀서 죽느니 스스로 죽는 편이 낫겠다.」

연나라의 장군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요성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탄 전단은 군사를 진군시켜 성안의 군민들을 도륙했다. 전단이 제나라 도성으로 돌아가 제왕에게 노중련의 공을 말하고 그에게 작위를 내리려고 했다. 노중련이 해상으로 달아나 몸을 숨기며 말했다.

「부귀를 탐하게 되면 남에게 몸을 굽혀야 하는데, 나는 차라리 빈천하게 살면서 세상일을 가볍게 보고 내키는 대로 살리라!”

태사공이 말한다.

노중련이 갖고 있는 뜻의 요지는 대의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평민의 신분으로 벼슬이나 권세도 없는 그가 천하를 종횡하며 제후들에게 몸을 굽히지 않고 세상사를 논해 권세있는 공경(公卿)들을 굴복시켰으니 가히 칭송할만하다고 하겠다.

주석

1) 조효성왕(趙孝成王)/기원전 265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245년에 죽은 전국 때 조나라의 군주다. 혜문왕(惠文王)의 아들로 이름은 단(丹)이다. 즉위 초에 모친 혜문후가 국정을 장악했다. 후에 진나라가 한나라의 상당군을 공격하자, 한나라의 상당군 수장은 진나라에 항복하는 대신 조나라로 투항했다. 상당군을 접수한 효성왕은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지키도록 했으나 후에 진나라의 세작이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고 조괄로 교체했다. 진군 대장 백기는 조괄이 이끈 40여 만의 조군과 싸워 포로로 잡아 모두 생매장시켜 죽였다. 후에 진군이 출격하여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하자 위와 초 두 나라가 보낸 원군의 도움으로 진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2) 위안리왕(魏安釐王)/기원전 276년에 즉위하여 243년에 죽은 전국 때 위나라의 군주다. 소왕(昭王)의 아들로 희(姬) 성에 이름은 어(圉)고 양왕(梁王)이라고도 부른다. 즉위 초에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대량이 포위되자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 일대의 온읍(溫邑)을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기원전 273년 조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한나라의 화양(華陽)을 공격했다가 진장 백기의 반격을 받아 13만에 달하는 군사를 잃었다. 위안리왕은 다시 남양(南陽)의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후에 진나라의 침략을 계속 받아 회(懷 : 지금의 하남성 무척(武陟) 서), 형구(邢丘 : 지금의 하남 온현(溫縣) 동) 등을 빼앗겼다. 진나라가 다시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조나라를 공격하여 한단을 포위하자 안리왕은 진비(晉鄙)를 대장으로 삼아 구원군을 보냈다. 이에 진나라로부터 위협을 받은 안리왕은 진비에게 행군을 멈추고 업(鄴)에 머무르게 하고 다시 신원연(新垣衍)이라는 유세객을 조왕에게 보내 진나라를 제(帝)로 받들어 그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그의 동생 신릉군(信陵君)이 병부(兵符)를 훔쳐 진비를 죽이고 그 군권을 탈취한 후 북진을 감행하여 진군을 격퇴시키고 조나라를 구했다. 진군을 격파한 여세를 몰아 조군과 함께 왕흘(王齕)이 이끄는 진군을 영신(寧新)에서 대파하고 진나라의 동방진출의 교두보였던 도군(陶郡)을 점령했다. 기원전 253년 위(衛)나라의 멸하여 병탄했다. 진소양왕의 뒤를 이어 새로 진왕의 자리에 오른 장양왕이 대거 위나라를 공격해오자 병부 탈취사건으로 조나라에 망명하고 있던 신릉군을 소환하여 진군을 막게 했다. 제나라를 제외한 다섯 나라의 합종군을 이끈 신릉군은 하외(河外)에서 진군을 대파했다. 이에 신릉군의 위망을 시기한 안리왕은 그로부터의 병권을 빼앗아 신릉군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게 하여 죽게 만들었다.

3)탕음(蕩陰)/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蕩陰縣) 남쪽에 위덕고성(魏德故城)이다. 일명 진비성(晉鄙城)이라고도 한다.

4)포초(鮑焦)/ 춘추 말 은사(隱士)로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한 행동으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항상 땔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으며 도토리나 밤을 주어 허기를 채웠다. 그는 세상의 도가 무너져 암흑세상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자나 제후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했다. 우연히 만난 자공(子貢)이 ‘주나라에 불만이 있다면 주나라를 떠나서 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비난을 받자 ‘ 현인은 쉽게 부끄러워하고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라고 말하고 그 즉시 나무를 부등켜 안고 음식을 끊어 죽었다.

5)주열왕(周烈王)/ 재위 전375-369년이다. 신원연과 노중련이 조나라를 구원하기 문제로 논쟁한 해는 기원전 257년이다.

6)인제(因齊)/ 제위왕의 이름이다.

7)구후(九侯)/ 주왕(紂王) 때 삼공의 한 사람으로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臨漳縣)에 봉해진 제후다 지가 있었다.

8)악후(鄂侯)/ 봉국은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북쪽에 있었다.

9)서백(西伯)/ 주문왕(周文王)을 말한다.

8)제민왕(齊湣王)/ 기원전 300년부터 284년까지 재위한 전국 때 제나라의 군주다. 전(田) 성에 이름은 지(地)이고 제선왕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중, 진소왕과 함께 제(帝)를 칭하다가 후에 제호(帝號)를 버리고 왕호를 다시 사용했다. 제나라의 강한 군사력에 의지하여 빈빈히 주위의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회수(淮水) 이북의 땅을 빼앗고, 서쪽으로는 삼진(三晋)을 공격하여 다시 주나라의 영토를 병합하여 천자가 되려고 시도했다. 다시 군사를 대거 일으켜 송나라를 멸하여 병탄함으로 해서 진소왕의 분노를 샀다. 이에 진소왕은 연(燕), 초(楚) 및 삼진과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를 5국 연합군의 대장으로 삼았다. 임치(臨淄)에서 악의의 연군에게 참패한 제민왕은 도주하여 거성(莒城)으로 달아났으나 초나라 장수 요치(淖齒)에게 살해되었다.

9)태뢰(太牢)/ 소, 돼지, 양 각각 1마리 씩을 잡아 접대하는 것을 태뢰라 하고 10태뢰는 각각 10마리 씩을 잡아 접대한다는 뜻이다.

10)요성(聊城)/ 전국 때 제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하북과 하남성과 경계와 접하는 산동성 요성시(聊城市) 일대다.

11) 전단(田單)/ 전국 때 제나라의 장군이다.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동북의 임치 출신으로 제민왕(齊湣王) 때 시연(市掾)이라는 하급관리를 지냈다. 제민왕 40년 기원전 284년 연(燕), 진(秦), 한(韓), 조(趙), 위(魏) 5국 연합군을 이끈 연나라의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제나라 땅 대부분을 점령하고 제민왕은 전란 중에 피살되었다. 그는 제나라의 잔존세력을 규합하여 즉묵성으로 들어가 연군에 대항했다. 성민들은 그를 장군으로 옹립했다. 제양왕(齊襄王) 5년 기원전 279년 연나라의 소왕(昭王)이 죽고 혜왕(惠王)이 뒤를 이어 연왕에 즉위하자 전단은 반간계를 사용하여 연혜왕으로 하여금 악의를 연군 대장에서 물러나게 하고 기겁(騎劫)을 대신시키게 했다. 이어서 화우진(火牛陣)이라는 기책(奇策)을 구사하여 연군을 물리치고 연군에게 빼앗긴 제나라의 70여 개의 성을 되찾았다. 싸움에서 승리한 전단은 제양왕을 임치성으로 맞아들여 제나라를 부흥시키고 자신은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안평군에 봉해졌다. 제왕(齊王) 건(建) 원년 기원전 264년 조나라에 들어가 상국에 임명되고 평도군(平都君)에 봉해졌다.

12)남양(南陽)/ 전국 때 남양의 지명은 세 곳이 있었다. 태항산 남록의 위나라와 한나라 령, 하남성 남양시 일대의 초나라 령, 그리고 지금의 산동성 문양과 태산 일대의 제나라 령으로 여기서는 제나라 령을 가르킨다.

13)평륙(平陸)/ 지금의 산동성 문상현(汶上縣) 일대로 역시 제나라 령이다.

14)율복(栗腹)/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1년에 죽은 전국 말 연나라의 대신이다. 연왕 희(喜) 때 승상에 임명되었다. 연왕 희 4년 기원전 251년 왕명을 받아 조효성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조나라에 사자로 갔다가 돌아와 조나라의 장정들은 모두 장평에서 죽고 없어 그 틈을 타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조나라를 정벌할 수 있다고 진언했다. 연왕은 그에게 40만(일설에는 10만)의 병력을 주어 조나라를 공격했으나 5전 5패하고 자신은 염파에게 살해되었다.

15)묵적이 초나라의 공격을 막아 낸 일/ 기원전 440년 노나라의 기술자 공윤반(公輪般)이 송나라를 공격하려는 초나라를 위해 운제(雲梯)를 만들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가 초나라로 달려가 공윤반이 만들어준 운제로는 송성을 함락시킬 수 없다고 하면서 공윤반과 함께 도상으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공윤반은 자기가 만든 운제를 이용하여 9번이나 송성을 공격했지만 묵자에 의해 격퇴당했다. 이에 초왕은 송나라에 대한 공격을 단념했다.

16)위염(魏冉)/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시호(諡號)는 양후(穰侯)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자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고 범수(范睢)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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