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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15 12:23:379347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21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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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21. 廉頗·藺相如(염파인상여)

1. 완벽귀조(完璧歸趙)

- 인상여가 화씨벽을 보존하다. -

염파(廉頗)는 조나라의 명장이다. 조혜문왕(趙惠文王) 6년, 기원전 283년 염파는 조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하여 그 군사들을 대파하고 양진(陽晉)1)을 빼앗아 조나라 땅으로 삼자 그 공으로 상경에 제수되고 염파의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은 조나라 사람으로 환자령(宦者令) 목현(穆賢)의 문객이었다.

조혜문왕이 초나라의 화씨벽(和氏璧)을 얻게 되었다. 진소왕(秦昭王)이 듣고 사자를 보내 15개의 진나라 성과 화씨벽을 바꾸자는 뜻의 국서를 전했다. 조왕이 대장군 염파와 다른 대신들과 함께 그 대책을 의논한 결과, 화씨벽을 주었다가 진나라의 성을 받지 못하고 헛되이 속임을 당하는 경우를 걱정했다. 그렇다고 화씨벽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트집잡아 진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아 전화를 입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계책이 정해지지 않아 진나라에 사자로 보낼 만한 사람을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환자령 목현이 조왕에게 말했다.

「신의 문객 중에 인상여라는 사람이 있는데 가히 사자로 보낼만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옛날 제가 대왕께 죄를 얻었을 때 저는 아무도 몰래 연나라로 도망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객으로 있었던 인상여가 저를 제지하면서 ‘대감은 무슨 생각으로 연왕에게로 달아나라고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대답하기를 ‘내가 예전에 연왕을 회견하기 위해 국경으로 나가는 대왕을 수행한 적이 있었소. 연왕이 그때 아무도 몰래 내 손을 잡으며 나와 친구의 교분을 맺고 싶다고 했소. 그래서 나는 연왕의 마음을 헤아려 연나라로 가려고 하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자 인상여가 저에게 말하기를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그리고 대감은 왕의 총애를 받고 있기 때문에 연왕이 친분을 맺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감께서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도망간다면, 조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연나라는 대감을 머무르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연왕은 대감을 결박하여 조나라로 압송할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차라리 육단(肉袒)2)에 부월을 지고 조왕께 엎드려 죄를 청한다면 다행히 죄를 용서받아 화를 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의 말을 따라 대왕께 복죄하자 대왕께서는 황공하게도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신이 가만히 그를 살펴본 결과, 그는 용사에 지모가 있어 진나라에 사자로 보낼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왕이 인상여를 물러 물었다.

「진왕이 15개의 성과 과인이 갖고 있는 화씨벽을 바꾸자고 했소. 화씨벽을 보내야 되겠소? 아니면 보내지 말아야 되겠소?」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진왕이 우리의 화씨벽만을 취하고 성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진나라가 성을 준다고 하면서 화씨벽을 달라고 했으니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화씨벽을 주었으나 진나라가 성을 주지 않는다면 그 허물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저울질 해 볼 때 마땅히 화씨벽을 주고 그 허물을 진나라에 있게 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사자로 보내야 되겠소?」

「대왕께서 마땅히 보낼 사람을 찾지 못하시겠다면 신이 원컨대 화씨벽을 받들어 사자로 가겠습니다. 성이 조나라에 들어온다면 마땅히 화씨벽을 진나라에 두고 오겠지만, 성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화씨벽을 온전하게 보전해서 조나라에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이에 조왕은 마침내 인상여에게 화씨벽을 주어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진왕이 장대(章臺)3)에 앉아 인상여를 접견하자, 인상여는 화씨벽을 받들어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이 크게 기뻐하며 비빈들과 좌우의 신하들에게 돌려가며 차례로 보여주자, 진왕의 좌우에 있던 시자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상여가 보니 진왕은 주기로 한 성을 조나라에 할양할 생각이 없음을 알고 즉지 그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그 벽에는 티가 있습니다. 저에게 잠시 넘겨주시면 그 티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상여가 진왕으로부터 넘겨받은 화씨벽을 손에 들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두 발을 굳게 땅에 딛고 기둥에 몸을 기대더니 그의 머리에 쓰고 있던 관이 들먹거릴 정도로 대노하여 진왕을 향해 외쳤다.

「대왕께서 이 화씨벽을 구한다고 하면서 사자 편에 편지를 써서 우리 조왕에게 전했습니다. 이에 조왕께서는 군신들을 모두 불러 상의한 바, 군신들은 하나 같이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나라라 그들의 힘을 믿고 빈말에 단지 화씨벽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니 아마도 화씨벽을 주고 주겠다는 성은 얻지 못할까 걱정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조나라의 조정의 중론은 진나라에 화씨벽을 보내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포의를 입고 다니는 필부도 서로 속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대국이 그런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벽옥 한 개로 막강한 진나라의 우호적인 뜻을 거슬리는 일은 더욱 불가하다고 진언을 올렸습니다. 이에 조왕께서는 즉시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신 후에 신으로 하여금 벽옥을 받들어 이 진나라 조정에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대국의 위엄을 존중해서 존경을 표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이 이곳에 이르러 보니 대왕께서는 진나라의 관리들을 모두 불러 구경시키시며 매우 오만한 자세로 예절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벽옥을 받으시자 후궁들에게 주어 돌려가며 구경하도록 하여 고의로 신을 조롱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대왕께서 우리 조나라에 15개의 성을 할양하시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감히 이 벽옥을 다시 거두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저를 강제로 몰아치신다면, 신의 머리는 지금 바로 즉시 이 벽옥과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부셔지고 말 것입니다!」

인상여가 곧이어 손에 든 벽옥을 노려보며 기둥에 던져 부셔버리려고 했다. 벽옥이 부셔질까봐 걱정한 진왕은 즉시 인상여에게 사죄하고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간청했다. 이어서 진왕은 주관하는 관리를 불러 지도를 찾아서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성 15개를 조나라에 할양하도록 하라는 명을 전해 그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인상여는 진왕이 조나라에 성을 할양하겠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짐작했다. 실제로는 성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 상여는 진왕에게 말했다.

「화씨벽은 천하가 인정하는 보물입니다. 그러나 조왕께서는 진나라의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왕께서 이 벽옥을 진나라에 보낼 때, 5일 동안 목욕재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대왕께서는 역시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신 후에 이 궁정의 뜰에서 구빈지례(九賓之禮)4)를 행하셔야만, 신은 감히 벽옥을 바칠 수 있겠습니다.」

이에 강압적으로 화씨벽을 빼앗을 수 없다고 생각한 진왕은 5일 동안 재계를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동안 인상여를 광성(廣成)이라는 영빈관에 머물도록 했다. 영빈관으로 물러나온 인상여는 진왕이 비록 재계를 하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필시 약속을 지키지 않고 15개의 성읍을 조나라에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상여는 자신을 수행한 일행 중 한 사람에게 화씨벽을 빼돌려 건넸다. 그 사람은 옷을 허름하게 바꿔 입은 후 화씨벽을 품속에 감추고 소로를 따라 진나라를 몰래 벗어나 조나라로 돌아갔다.

이윽고 5일 동안의 재계를 끝낸 진왕은 전당에 올라 구빈지례를 행하기 위해 백관들을 모두 도열하게 하고 조나라의 사자 인상여를 궁궐에 들게 했다. 인상여가 궁궐에 들어와 진왕에게 말했다.

「진나라는 목공(穆公)이래 지금까지 20여 군주 중 자기가 맺은 맹약을 지켰던 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대왕께 속임을 당해 우리 조왕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까 걱정되어 제가 데리고 왔던 수행원을 시켜 벽옥을 조나라에 돌려보냈습니다. 오늘 강대한 진나라의 대왕께서 먼저 15개의 성을 조나라에 할양하신다면, 조나라가 어찌 감히 벽옥을 진나라에 보내지 않아 대왕께 죄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을 속여 죄를 범한 신은 마땅히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실로 원컨대 기름 가마솥에 던져져 삶아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단지 대왕과 여러 대신들은 제가 드린 말씀을 깊이 생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진왕과 여러 군신들은 모두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신음소리만을 연발했다. 진왕의 시종 중에 상여를 붙잡아 끌어내어 죽이려고 하자 진왕이 입을 열어 말했다.

「지금 상여를 죽인다 해도 벽옥은 이미 조나라로 돌아간 벽옥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진과 조 두 나라의 우호관계만 깨지게 될 것이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상여를 후대한 후에 조나라에 돌려보내 준다면 조왕이 한낱 벽옥 한 개로 우리 진나라를 속이지는 못하리라!」

진왕은 다시 상여를 전당에 오르게 하여 접견을 한 다음 구빈지례를 행한 다음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2. 민지회맹(澠池會盟)

- 민지의 회맹에서 조나라의 위신을 세운 인상여 -

인상여가 무사히 조나라에 돌아오자, 조왕은 그가 한 사람의 훌륭한 대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사자의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제후로부터 속임이나 욕됨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상대부의 자리에 임명했다. 진나라는 결국은 조나라에 15개의 성을 할양하지 않았고 조나라 역시 진나라에 화씨벽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석성(石城)5)을 빼앗아 가고 다시 다음 해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그 군사 2만 명을 살해했다.

진왕이 조왕에게 사자를 보내 서하 밖의 민지(澠池) 땅에서 진과 조 두 나라의 우호를 위해 회맹을 하자고 통고해왔다. 진나라를 두려워한 조왕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염파와 인상여가 서로 의논한 후에 조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만일 가시지 않으신다면 조나라가 허약하고 대왕은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진나라가 이후로는 우리 조나라를 얕보게 됩니다.」

그래서 조왕은 회맹장에 참석하기로 결심하고 인상여가 수행하기로 했다. 조나라 국경에까지 따라나선 염파가 조왕에게 말했다.

「대왕의 이번 행차는 거리와 회맹의 의식에 걸리는 날짜를 생각하면 30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30일이 지나도 대왕께서 돌아오시지 못한다면 청컨대 태자를 대신 왕으로 세우겠습니다. 대왕을 볼모로 잡아 조나라에 뭣인가 얻어가려는 진나라의 헛된 생각을 단념할 수 있게끔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왕이 염파에게 좋다고 허락하고 회맹장으로 길을 출발하여 이윽고 진왕을 만났다. 진왕은 술자리의 주흥이 무르익어 가자 조왕을 향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조왕께서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청컨대 저를 위해 거문고를 한 번 연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왕이 거문고를 가져오게 하여 연주했다. 이에 진나라의 사관들이 단상에 올라와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과 술을 마시다가 진왕의 명을 받은 조왕이 거문고를 연주했다.’라고 기록했다. 인상여가 자리에 일어나 단상에 올라가 말했다.

「우리 조왕께서는 진왕께서 진나라에 음악에 능하시다고 들으셨습니다. 청컨대 진왕께 분부(盆缶)6)를 가져다 올리오니 한 번 두드려 서로 간에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

진왕이 화를 내며 인상여의 청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인상여가 계단을 통해 분부를 가지고 전당에 올라 진왕 앞에 엎드리며 분부를 연주해 주기를 청했다. 진왕이 분부를 연주하려고 하지 않자 인상여가 말했다.

「대왕께서는 저에게로부터 다섯 발자국 내에 계십니다. 정녕 제 청을 거절하신다면 제 목의 피로 대왕의 몸을 적시겠습니다.」

진왕의 좌우에게 있던 시위들이 인상여를 칼로 찌르려고 하자, 인상여는 눈을 부릅뜨며 그들을 꾸짖었다. 진왕의 시위들이 모두 놀라 몸을 떨며 물러갔다. 그래서 진왕이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분부를 한 번 두드렸다. 인상여가 조나라의 사관을 불러 ‘모년 모월 모일에 진왕이 조왕을 위해 분부를 연주했다.’라고 적게 했다. 진나라의 군신들이 말했다.

「조왕께서는 우리 진왕의 축수를 위해 조나라의 성 15개를 바치시기 바랍니다.」

이에 인상여도 역시 말했다.

「진왕께서는 진나라의 함양성을 바쳐 우리 조왕의 축수를 빌기 바랍니다.」

진왕은 주연이 다 파할 때까지 결국은 조왕을 제압할 수 없었다. 조나라 역시 회맹장과 가까운 곳에 많은 군사들을 주둔시켜 진나라에 대비하고 있었음으로, 진나라는 감히 어쩌지 못했다.

3. 將相和(장상화)

-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근본은 재상과 장군의 화합이다. -

이윽고 회맹의 의식이 끝나고 조나라에 돌아온 조왕은 인상여의 공이 크다고 생가하여 그를 상경에 제수하여 염파의 위에 두었다. 이에 염파가 말했다.

「나는 조나라의 장군으로 수많은 전장에 나가 야전과 공성(攻城)에 큰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상여는 단지 혓바닥만을 놀렸을 뿐인데 그의 지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았다. 또한 상여는 원래 천민 출신이라 내가 그의 밑에 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다. 」

또한 공공연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떠들었다.

「내가 상여를 만나게 된다면 내 반드시 그를 욕보리라!」

상여가 염파의 말을 전해 듣고 서로 자리를 같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회가 있을 때는 언제가 몸에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참석하지 않음으로 해서 관직의 서열로 인해 염파와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고 얼마 후에 외출했던 상여가 멀리서 오고 있던 염파를 보고 수레의 방향을 돌리게 해서 염파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그래서 상여의 문객들은 모두 그에게 달려가 따졌다.

「우리들이 친척들의 곁을 떠나 대감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이유는 대감의 높은 절의를 앙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감과 염파는 그 관직의 등위가 서로 같은데도 불구하고 염파 장군이 대감에게 욕을 하고 다니는데 오히려 대감께서는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십니다. 그를 두려워함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십니까? 필부도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수치스럽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그 신분이 장상에 이르신 분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불초들은 이만 대감과 하직하고자 합니다.」

인상여가 문객들을 극구 만류하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염파장군과 진왕 중 어떤 사람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십니까?」

문객들이 대답했다.

「무섭기로 말한다면 염파장군은 진왕에 비할 바가 안 됩니다.」

「나는 그 무서운 진왕을 그의 조정에서 꾸짖고 그의 신하들을 모욕했소. 이 인상여가 비록 무능하다고는 하나 염파 장군을 무서워하기야 하겠소? 단지 내가 생각하기에 강포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에 대해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해 오지 않는 이유는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인 것이오. 지금 두 마리의 호랑이처럼 서로 싸우게 된다면 필시 우리 두 사람은 공존할 수 없소. 먼저 나라의 위난을 생각하고 후에 개인적인 원한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인내하고 염파 장군에게 양보했을 뿐이오.」

4. 負荊請罪(부형청죄)

- 회초리를 등에 지고 자신의 편협한 행동을 사과한 염파 -

상여의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즉시 어깨를 들어내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지고7) 그의 문객들과 함께 인상여의 집에 가서 사죄하며 말했다.

「저는 장군께서 이렇듯 관대하게 대해 주시는 줄도 몰랐던 비루하고 천박한 인간입니다. 」

두 사람은 결국은 서로 화해를 하고 문경지교(刎頸之交)8)를 맺었다.

그 해에 염파는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일 개 군단을 격파했다. 다음 해에 염파는 다시 제나라를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몇 개의 고을을 점령했다. 또 다시 그 다음 해에 염파는 위(魏)나라의 방릉(防陵)9)과 안양(安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 다음 해는 인상여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평읍(平邑)까지 진격했다가 멈추었다. 다음 해에 조사가 진군(秦軍)을 연여(閼與)10)에서 격파했다.

5. 奉公守法(봉공수법)

-귀척에게 공법을 밝혀 법을 집행하다. -

조사(趙奢)는 조나라 전부(田部)의 세리(稅吏)였다. 세금을 걷는데 평원군(平原君)11)의 집에서 세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가 법으로 다스려 평원군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 9명을 잡아서 죽였다. 평원군이 노하여 조사를 죽이려고 했다. 조사가 평원군에게 말했다.

「군은 조나라의 귀한 신분이신 공자이십니다. 지금 군의 집에서 공실을 받들지 않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조나라의 법은 문란해지고, 국법이 문란해지면 조나라는 약해집니다. 약해진 조나라를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오게 되면 군은 어디서 이와 같은 부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군과 같이 귀하신 분이 공실을 받들게 된다면 상하가 공평하게 되고, 상하가 공평하게 된다면 국력이 강하게 될 것입니다. 나라가 부강하게 되면 조나라의 사직은 공고하게 되어 군과 같은 귀한 공실의 인척을 천하의 그 누가 군을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평원군은 조사가 현인이라고 생각하여 조왕에게 조사의 일을 고하여 천거했다. 조왕이 조사를 등용하여 나라의 세금 걷는 일을 맡겼다. 세금을 걷는 일이 크게 공평하게 되어 백성들은 부유하게 되었고 국고가 재물로 가득 차게 되었다.

6. 兩鼠鬪穴 勇者取勝(양서투혈 용자취승)

- 좁은 구멍에서 두 마라의 쥐가 싸우면 용감한 쥐가 이긴다. -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연여에 주둔했다. 조왕이 염파에게 한나라를 구원해야 하는지 물었다. 염파가 대답했다.

「연여는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길도 협소하니 구원할 수 없습니다.」

조왕이 다시 악승(樂乘)을 불러 그 의견을 물었으나 염파와 같은 의견이었다. 또다시 조사를 불러 묻자 대답했다.

「연여로 가는 길이 멀고 좁아 마치 두 마리의 쥐가 좁은 굴속에서 서로 싸우는 형상이라 용기 있는 자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조왕이 즉시 조사를 장수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하라고 했다. 조사가 군사를 이끌고 한단성을 나가 30리 되는 곳에 이르자 행군을 멈추고 군중에 령을 내렸다.

「군사의 일로 나에게 간하는 자가 있다면 죽이겠다.」

진나라의 군사들은 당시 무안(武安)12)의 서쪽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북은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며 군사들을 조련시키는데 무안 성내의 집들의 기왓장들이 진동했다. 이어 군중의 척후병 한 사람이 무안을 급히 구원해야 한다고 하자 조사는 그 군사를 잡아 목을 베었다. 조사는 단지 보루를 단단히 하고 28일 동안 머물며 단지 보루를 높이 쌓을 뿐이었다. 진나라의 사자가 조군의 정황을 염탐하기 조나라 진영으로 들어오자 조사는 좋은 음식을 내어 그를 잘 대접한 다음 돌려보냈다. 진나라의 사자가 돌아가 그 대장에게 보고했다. 진군의 대장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조군이 그 도성을 떠나 30리 되는 곳에서 행군을 멈추고 보루를 높이고 있으니 아마도 연여는 이미 조나라의 땅이 아니다.」

진나라의 첩자가 돌아가자 조사는 즉시 군사들의 갑옷을 벗게 한 후 그 뒤를 추격하여 이틀 동안 밤낮으로 꼬박 행군을 한 끝에 멈추어 활을 잘 쏘는 군사들을 선발하여 연여에서 50리 되는 곳에 영채를 세우게 했다. 이윽고 영채가 완성되자 진나라 군사들이 소식을 듣고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허력(許歷)이란 군사 한 명이 군사의 일로 간할 일이 있다고 조사에게 접견을 청했다. 조사가 막사 안으로 들게 하자 허력이 말했다.

「불의에 우리 조군이 이곳에 당도하자 진나라 장수가 전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 뒤를 따라 달려왔는데 그 사기가 매우 높습니다. 장군께서는 병력을 집중하여 진지를 두텁게 포진시켜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조군은 싸움에 필시 패하고야 말 것입니다.」

「너의 조언을 받아들이겠다.」

「저에게 부질형(鈇鑕刑)에 처해 죽여주십시오.」

「이 일은 나중에 한단에 돌아가서 처리하겠다.」

허력이 다시 의견을 말했다.

「먼저 연여의 북산(北山)을 점령하는 측이 싸움에 이기고 후에 당도한 측은 싸움에서 질 것입니다.」

조사가 허락하고 즉시 1만 명의 군사를 선발하여 허력에게 주고 달려가 북산을 점령하도록 했다. 이어서 진군이 나중에 당도하여 북산을 다투었으나 먼저 당도한 조군으로 인해 산으로 오를 수 없었다. 이에 조사가 군사를 풀어 진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길 수 있었다. 진군이 연여의 포위를 풀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조혜문왕이 조사에게 마복군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허력에게는 국위라는 벼슬을 내렸다. 조사는 그 공로로 염파 및 인상여와 같은 대열에 서게 되었다.

7. 紙上兵談 兵家大忌(지상병담 병가대기)

- 탁상공론은 병가들의 가장 꺼리는 일이다. -

그리고 4년 후에 조혜문왕이 죽자 효성왕(孝成王)이 조왕으로 새로 섰다.13) 효성왕 7년 기원전 259년 진과 조 두 나라의 대군이 장평(長平)에서 대치했다. 그때는 조사는 이미 죽었고 인상여는 병이 들어 위독했기 때문에 조나라는 염파를 장수로 삼아 진군을 막도록 했다. 진군에 의해 여러 차례 패배한 조군은 보루를 높이하고 굳게 지켰다. 진군이 여러 번 싸움을 돋웠으나 염파는 결코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왕은 진나라 첩자의 말을 믿게 되었다. 진나라 첩자가 조나라 시중에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오직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조군의 대장이 되는 경우이다.」

조왕은 그로 인해서 조괄을 조나라 대장으로 삼아 염파를 대신하게 했다. 인상여가 듣고 말했다.

「왕께서는 조괄의 명성만을 듣고 조군의 대장으로 삼으신 처사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14)과 같아 융통성이 없으신 처사이십니다. 조괄은 단지 자기 부친이 남겨 준 서책만을 읽고 실전에서의 임기응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조왕은 인상여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괄을 대장으로 삼아 전선으로 보냈다.

조괄은 어렸을 때부터 병법을 공부하여 병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세상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호언했다. 옛날 한 번은 자기부친 조사와 군사에 관한 논쟁을 벌였는데 조사가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사는 그런 조괄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이 그 이유를 묻자 조사가 대답했다.

「군사의 일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그러나 조괄은 너무나 쉽게 병사의 일을 생각하고 있소. 우리 조나라가 조괄을 대장으로 삼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그를 대장으로 삼는다면 조나라 군사를 망하게 하는 자는 필시 조괄이 될 것이오.」

이윽고 조괄이 조나라 군사들의 대장으로 임명되자 조괄의 모친이 편지를 써서 조왕에게 바쳤다.

「조괄은 우리 조나라 군사들의 대장으로 삼으시면 안 됩니다.」

조왕이 그 이유를 묻자 그녀가 다시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옛날 첩의 부군이 조나라의 장군이 되었을 때, 몸소 음식을 받들어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십 수 명에 달했고 친구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백 수십 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대왕과 종실에게 내린 상은 모두 군리들과 막료들에게 나누어주고 이윽고 왕명을 받아 전장에 나갈 때는 집안의 일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괄(括)의 행동을 보니 왕명을 받자마자 동쪽을 향해 앉아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군림하는 자세를 취하자 군리들은 아무도 감히 머리를 들고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왕께서 하사하신 상금과 재물들은 모두 집으로 가지고 와서 창고에 쌓아두고는 매일 값이 싸고 좋은 전답이나 저택을 살펴보러 나갔다가 사둘만한 것은 사곤 했었습니다. 대왕께서는 괄이 그 부친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몸들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그 마음은 같지 않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제 자식놈을 보내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조왕이 회답을 보냈다.

「이 일은 이미 결정된 일이니 부인은 더 이상 관계치 마시오.」

이에 조괄의 모친이 다시 서신을 써서 조왕에게 보냈다.

「대왕께서 정녕 괄을 대장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신다면, 만일 그가 그의 직무를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경우, 저를 연좌해서 죽음을 면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조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8. 長平大戰 坑殺四十萬降卒(장평대전 갱살사십만항졸)

-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항졸 40만 명을 산채로 묻어 죽이다. -

염파를 대신해서 조군 대장으로 부임한 조괄은 원래 염파가 정했던 군령들을 뜯어고치고 군리들은 모두 바꿨다. 진군 대장 백기(白起)15)가 그간의 조군 진영의 정황을 듣고 별도의 기습부대를 보내 일부러 패주하는 척해서 조군을 유인한 후에 다시 일군은 보내 양도를 끊어 조군을 양단했다. 이에 조나라 군사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이윽고 그 상태로 40여 일이 지나자 조군은 식량이 바닥나 굶주리게 되었다. 이에 조괄은 정병을 선발하여 진영에서 나와 진군과 육박전 전개하려고 했으나 진군은 활로 조괄을 죽였다. 싸움에 진 40만에 당하는 조군은 진군에게 투항했다. 진군은 항복한 40만의 조군을 모두 산채로 매장해서 죽였다. 조나라는 이 싸움으로 모두 45만의 군사를 잃었다. 다음 해, 진군은 장평에서의 승리의 여세를 몰아 그 도성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위(魏)와 초(楚) 두 나라가 보내 준 구원군의 덕분으로 간신히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한단성은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조왕은 장평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조괄의 모친을 옛날 약속을 지켜 연좌하여 죽이지 않았다.

9. 燕趙相殘(연조상잔)

- 약소국 연조 두 나라가 이전투구하여 멸망을 재촉하다. -

한단의 포위가 풀리고 5년 후에, 연나라의 사자로 조나라에 다녀 온 율복(栗腹)16)이 연왕에게 말했다.

「조나라의 장정은 모두 장평의 싸움에서 죽고 조나라에는 단지 아직 성인이 안 된 고아들만 있습니다.」

이에 연왕은 율복의 계책을 받아들여 조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조왕은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연군을 막도록 했다. 염파는 호성(鄗城)17)에서 연군을 대파하고 율복을 죽인 다음 계속 진격하여 연나라의 도성을 포위했다. 연나라가 5개의 성을 조나라에 할양하고 강화를 청하자 비로소 싸움을 멈추었다. 조왕이 염파를 위문(尉文)18)에 봉하고 신평후(信平侯)라 봉호를 내리고 상국 대리로 삼았다.

염파가 장평의 싸움에서 대장의 자리에서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권세를 잃었을 때 그의 문객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다시 그가 장군으로 임용되자 문객들이 다시 돌아왔다. 분개한 염파가 그 문객들을 모두 물리치라고 말했다. 이에 문객 중의 한 명이 말했다.

「아!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세속의 흐름에 그리 둔하십니까? 무릇 천하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듯이 교제를 합니다. 군께서 권세가 있을 때는 내가 와서 군을 따랐고 군께서 세력을 잃으니 그 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당연한 이치이온데 어찌 그것을 원망하시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6년 후에 염파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번양(繁陽)을 점령했다.

10. 一飯三矢(일반삼시)

- 한 끼 밥에 세 번 화장실을 간다고 염파를 모함하여 나라를 망치다. -

조효성왕이 죽고 그의 아들 도양왕(悼襄王)이 새로 조왕의 자리에 올랐다. 도양왕은 염파를 면직시키고 악승(樂乘)을 대신 대장으로 임명했다.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다. 염파는 위나라의 대량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조나라는 이목(李牧)을 장수로 삼아 연나라를 공격했다. 이목은 연나라의 무수(武遂)19)와 방성(方城)20)을 점령했다.

염파가 대량에 오래 머물렀으나 위나라는 염파를 기용하지 않았다. 그때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을 받아 위급한 상황에 처했던 조왕은 염파를 다시 기용하려고 생각했다. 조왕이 사자를 보내 염파를 대장으로 기용할 수 있는지 살피게 했다. 염파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곽개(郭開)가 사자에게 뇌물을 주어 염파를 헐뜯게 했다. 조나라 사자를 접견한 염파는 그 앞에서 한 말의 쌀로 짓은 밥을 먹고 고기 10근을 먹어 치운 후에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른 후에 그이 근력을 자랑하며 아직 싸움에 나갈 수 있다고 과시했다. 그러나 조왕의 사자는 돌아와 복명했다.

「염파 장군은 비록 연로했으나 식사도 많이 하고 근력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앉아 있는 동안 한 식경 동안에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

조왕은 염파가 이미 연로하여 싸움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부르지 않았다. 염파가 위나라에 체재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초나라가 아무도 몰래 사람을 보내 염파를 데려갔다. 염파는 초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나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자 말했다.

「나는 그저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고 싶을 뿐이다.」

염파는 결국은 초나라의 수춘(壽春)21)에서 죽었다.

11. 殺李牧墮長城(살이목타장성)

- 조나라가 명장 이목을 죽여 자신의 장성을 허물다. -

이목(李牧)은 조나라의 북쪽 변경을 지키는 명장이었다. 항상 대(代)22) 땅의 안문(雁門)23)에 늘상 거주하면서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는 형편에 맞추어 관리를 배치하고 시정의 세금은 모두 막부(莫府)의 수입으로 잡아 모두 사졸을 위한 비용으로 사용했다. 그는 날마다 소를 몇 마리씩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말타기와 활쏘는 연습을 시켰으며 봉화대를 요소마다 설치하고 많은 첩자들을 풀어놓고 전사들의 대우를 아주 후하게 했다. 병사들에게 령을 내리기를 ‘흉노가 들어와 노략질을 해 가면 군사들은 모두 보루로 들어가 지켜야 하며, 만일 멋대로 흉노를 공격하여 포로로 잡는 자는 참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흉노가 쳐들어 올 때면 항상 봉화를 신속히 올린 후에 재빨리 요새 안으로 들어가 감히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몇 년을 지내자 조나라의 변경지방은 아무 것도 잃지 않게 되었다. 과연 흉노는 이목이 겁이 많은 장수로 생각하게 되었고, 조나라의 변방을 지키던 군사들도 역시 자기들의 대장이 겁이 많은 대장이라고 여겼다. 이에 조왕이 이목을 질책했으나 이목은 개의치 않고 예전과 같이 행했다. 조왕이 노하여 이목을 소환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 흉노가 쳐들어오면 출전해서 맞이해 싸웠다. 그러나 조나라의 군사들의 수효는 항상 적었기 때문에 많은 물적 인적 손실을 입게 되어 조나라의 북쪽 변경에서는 결국은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군사들은 이목을 다시 자기들의 장수로 보내달라고 조왕에게 청했다. 이목은 한단성에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몸에 병이 났다고 하면서 대 땅으로 부임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왕이 다시 강제로 북쪽 변경의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다. 이에 이목이 조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신을 다시 쓰신다면, 신은 예전처럼 다스릴 것입니다. 이것을 허락하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조왕이 이목의 청을 허락했다.

이목이 다시 북쪽 변경 땅에 와서 옛날에 자기가 마련한 방식대로 다스렸다. 그러자 흉노는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얻어 갈 수 없었다. 결국은 사람들은 이목이 겁 많은 장수라고 생각했다. 변방의 군사들은 매일 상을 받고 후한 대접을 받음에서 싸움에 동원되지 않자 모두가 한 번 싸워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즉시 병거 1천 3백 량, 기병 1만 3천 명, 돌격대 5만 명24), 활을 잘 쏘는 군사 10만 명을 선발해서 한 부대로 조직하여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가축을 방목하고 백성들을 들판에 가득 차게 했다. 소규모의 흉노가 쳐들어오자 거짓으로 싸움에 패한 척 하며 수천 명의 군사들을 버려두고 도망치도록 했다. 흉노의 선우(單于)가 그 소식을 듣고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목은 적들이 예상치 못한 기이한 진법으로 많은 기병들을 포진시킨 후에 그 좌우의 양익을 펼쳐 반격을 가하자 10여 만 기의 흉노족 기병을 죽였다. 이목의 조군은 계속 흉노의 땅으로 진격하여 첨람(襜襤)이라는 흉노 부족을 멸하고 동호(東胡)를 무찌르고 임호(林胡)의 항복을 받아냈다. 선우는 북쪽 멀리 달아나 그후 10여 년 동안은 감히 조나라의 국경을 범하지 못했다.

조도양왕 원년 기원전 244년 염파가 위나라로 망명하자 조나라는 이목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목은 연나라의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점령했다. 그로부터 2년 후 조나라의 방훤(龐煖)이 다시 연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 극신(劇辛)을 죽였다. 그리고 7년 후에 진군이 조장 호첩(扈輒)을 무수에서 죽이고 그 군사 10만의 목을 베었다. 조나라는 이목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군을 의안(宜安)25)에서 격파하자 진장 환의(桓齮)는 도망갔다. 이에 조나라는 이목을 무안군(武安君)에 봉했다. 그후 3년 후에 진나라가 다시 쳐들어와 파오(番吾)를 공격하자 이목은 다시 진군을 무찌르고 남쪽으로는 한(韓)과 위(魏)의 군사들을 막았다.

조왕 천(遷) 7년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왕전(王翦)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을 보내 진군을 막도록 했다. 진나라가 조왕의 총신 곽개(郭開)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반간계를 행하여 이목과 사마상이 장차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왕이 조총(趙葱)과 제나라 출신의 장군 안취(顔聚)를 보내 두 사람을 대신하게 했으나 이목은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조왕이 아무도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이목이 아무 대비를 하지 않는 틈을 이용하여 이목을 체포하여 죽이고 사마상의 병권을 빼앗았다. 3달 후 왕전은 기회를 잡아 조나라를 공격하여 조군을 대파하고 조총은 죽이고 조왕 천과 그의 장군 안취를 사로잡아 결국은 조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난다. 이는 죽음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손에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왕과 그 신하들을 질책할 때, 그는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비 중에는 혹 두려워하여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인상여가 한 번 그 용기를 떨치자 그 위엄은 적국에 미치고, 다시 조나라에 돌아가서는 염파에서 양보했으니 그 이름은 태산보다도 도 중하게 되었다. 인상여야 말로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염파인상여열전 끝>

주석

1)사구(沙丘)의 란/ 무령왕의 원래 태자는 조장(趙章)이었으나 작은아들 하(何)를 총애하여 장을 폐하고 하를 세웠다. 하가 조혜문왕(趙惠文王)이다. 곧이어 무령왕 자신은 나라 밖의 일에 전념하겠다는 구실로 조왕의 자리를 하(何)에게 넘겨주고 스스로는 주보(主父)라고 칭했다. 후에 무령왕이 마음이 바뀌어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장(章)을 대왕(代王)에 임명하려고 했으나 측근의 반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장이 그 소식을 듣고 무령왕이 혜문왕과 함께 사구(沙丘)에 있던 행궁에 행차한 틈을 이용하여 란을 일으켜 혜문왕을 살해하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장은 목숨을 구하여 무령왕의 숙소로 피했다가 조성(趙成)과 이태(李兌)에게 잡혀 살해되고 이어서 후환을 두려워한 두 사람은 사구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석 달만에 굶어 죽게 만들었다.

2)제민왕(齊湣王)/ 재위 기원전 301년-284년

3)聖賢之君不以祿私親, 其功多者賞之, 其能當者處之.

4)원문은 ‘이행어리(以幸漁利)’로 어부지리(漁父之利)란 말은 제나라와 싸워 피폐해진 연나라를 공격하여 개인적인 명성을 얻는 다는 말이다. 연혜왕이 악의가 자기에게 앙심을 품고 조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와의 싸움에 지친 연나라를 공격해 올 것을 걱정하여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악의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밝혀 연왕을 안심시킨 것이다.

5)고밀(高密)/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高密縣) 경내에 있었던 고을.

6)괴통(蒯通)/ 본명은 괴철(蒯徹)이다. 한초(漢楚) 분쟁시 제왕(齊王)이 된 한신(韓信)의 모사다. 제왕이 된 한신에게 한고조를 배신하고 독립하여 천하를 삼분할 것을 권했으나 한신은 듣지 않았다. 후에 한신은 한고조가 한왕조를 창건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그의 능력을 두려워한 한고조에 의해 잡혀 살해되었다.

7)주보언(主父偃)/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6년에 죽은 서한(西漢) 때의 대신이다. 성은 주보이고 이름은 언이다.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淄博市) 동북의 임치(臨淄) 인이다. 종횡설, 주역, 춘추 및 백가의 학술에 밝았다.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하여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안에서 위청(衛靑)의 천거를 받아 무제에 의해 낭중의 벼슬을 얻었다. 다시 알자(謁者)로 옮기고 후에 중대부(中大夫)가 되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건의하자 무제는 그 의견을 쫓아 <추은령(推恩令)>이라는 조서를 내려 제후들로 하여금 그 자제들에게 소유의 봉지를 나누어 후로 봉하도록 했다. 그 후로 강력한 지방 제후국들은 분열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기원전 127년에 한나라의 승상이 되자 제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만들고 제후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하옥되어 멸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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