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중국사
1. 선사
2. 삼대
3. 춘추전국
4. 진한
5. 위진남북
6. 수당오대
7. 송요금원
8. 명청
9. 국공
10. 인민공화국
11. 통사
· 오늘 :  823 
· 어제 :  966 
· 최대 :  6,990 
· 전체 :  2,165,325 
 
  2004-05-12 15:06:196659 
진시황의 최후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양승국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좌승상 이사(李斯)와 그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를 대동하고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太監)의 호위 아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통일제국의 순행길에 나섰다.


황제의 대부대가 함양(咸陽)에서 출발해서 무관(武關)을 나와서 단수(丹水)와 한수(漢水) 유역을 지나 장강(長江) 연안을 끼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랐다. 진시황은 회계산에서 대우(大禹)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공적을 돌에 새겼으며, 또한 당시 중국 동남 변경지역에 남아있던 씨족 사회의 혼인 풍습과 남녀의 음란한 현상에 대해 일침을 가하여 “ 태평 성세를 위해 천하에 교화의 풍을 계승하여 민속을 정리하도록 하라!”라는 교지를 내리고, 이를 돌에 새겨 만 백성들이 깨닫도록 했다. 회계산을 떠난 진시황은 뱃길을 이용하여 낭야(琅邪)에 당도했다. 진시황은 방사(方士) 서불(徐巿)의 말을 듣고 궁노수(弓弩手)와 함께 교어(鮫魚 : 상어)를 잡으러 바다로 나아갔다. 대어를 잡은 진시황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낭야대(琅邪臺)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그 때 문득 몸이 불편함을 느낀 진시황은 그의 행렬을 서쪽으로 돌려 환궁하도록 명했다. 진시황의 행렬이 평원진(平原津 :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서남쪽의 옛 황하의 나루터)에 도달했을 때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때는 태양이 작열하는 한 여름이었다. 더위에 시달리는 시황제와 그의 군대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이사와 호해는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시황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 했다. 죽음의 신이 그의 곁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 일행이 하북 지역에 있는 사구평(沙丘平 :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에 이르렀을 때 이미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진시황은 이사와 조고를 불러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유언의 내용은 북방에서 흉노족을 지키고 있던 태자 부소(扶蘇)에게 함양(咸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이사와 조고는 황급히 조서를 지어 진시황에게 보여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옥새를 이사에게 전하면서 진시황이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를 시작했다.


“ 속히 사자를 파견하여 부소를......”


미처 말을 끝맺기고 전에 진시황은 숨을 거두었다. 거대한 대륙의 중국 정치 무대에서 온갖 역정을 다 겪으며 천지를 개벽시킨 위대한 인물, 진시황이 끝내 찬란했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 나이 50세,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지 겨우 12년만의 일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승상 이사는 새로운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왕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선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시황제의 죽음은 이사 자신과 호해와 조고, 그리고 몇몇의 시종 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이사와 조고는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진시황의 시신을 온도가 조절되는 온량거(轀輬車)에 실었다.


수레에 휘장을 치고 평상시처럼 음식과 물을 집어넣도록 했으며, 신료들이 상주하는 일에 대해서는 호해와 중거부령인 조고, 그리고 이사가 대신해서 처리했다. 이들을 제외하고 다른 신료들은 그 누구도 진시황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신구 정권이 교체하는 위험한 시기에 직면하여 이사는 조고에게 속히 부소에게 조서를 보내 함양으로 돌아와 상례를 치르고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하라고 재촉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고는 딴 속셈이 있었다. 결국 그의 강요와 뀜에 빠진 이사도 또한 진시황의 유언을 변조하는 데 찬성했고, 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蒙恬)에게 검을 보내어 자살하도록 명령하고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사구(沙丘)의 음모(陰謀)’이다.


부소와 몽념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느라 행렬은 일부러 정형(井陘 : 지금의 하북성 정형현(井陘縣))에서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포두시(包頭市)) 쪽으로 크게 북상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함양으로 향했다. 긴 여정과 무더위로 진시황의 시체가 부패하여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사와 조고는 시체 썩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 몇 수레를 가져다가 시황의 시신을 싣고 있던 온량거 곁에다 두었다. 그들의 행렬이 함양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부소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이사와 조고는 정식으로 진시황의 죽음을 공포했다. 부패하여 이미 썩어 문들어진 진시황의 시신을 그 해 9월 여산(驪山) 진시황릉에 매장하고 호해가 2세황제로 등극했다. 조고는 승상에서 낭중령으로 승진되고 이사는 승상직을 계속 유지했다.


조고의 사주로 호해는 등극하자마자 제일 먼저 부소를 추종하던 장군 몽염에게 독주를 내려 죽이고, 이어서 6명의 공자와 10명의 공주들을 체포하여 두현(杜縣 : 지금이 삼서성 서안시 동남 쪽)으로 압송한 다음 차례로 죽였다. 다시 12명의 공자를 함양으로 압송하여 길거리에서 참수한 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밖의 황실의 종친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다가 어림군에게 피살당했다. 화근을 철저하게 뿌리뽑기 위해서 호해는 조정에서 이견을 가진 신료들을 차례로 모두 죽였다. 마지막으로 조고의 유혹으로 자신의 등극을 도왔던 이사마저 함양의 시내에서 요참(腰斬) 형에 처해 죽였다.


진제국이 무너지고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경악할 만한 피의 역사도 세월 속에 묻혀갔다. 후대 사람들은 당시 조정 안팎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기고, 폐부를 찢는 듯한 처참한 비명소리가 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2200년 후인 1976년 10월 어느 날, 진릉(秦陵) 고고학발굴대(考古學發掘隊)의 대원들이 진시황릉 동쪽에서 17기의 순장묘를 발견함으로써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옛날의 비참한 살육의 현장이 만인에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분묘의 형태와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탐사대원들은 그중 8개의 묘에 대해 발굴 작업을 단행했다. 묘의 매장 구조는 모두 경사진 갱도가 나있는 갑(甲) 자 형태였다. 그 안에는 경사로가 있는 네모난 형태의 관곽(棺槨)을 묻은 갱혈(坑穴)인 광(壙) 묘가 2기가 있었고, 역시 경사로가 있는 네모난 형태의 광(壙)에 동실(洞室)이 있는 묘 6기가 있었다. 묘의 독특한 형태로 보아 묘지의 주인이 황실 종친이나 귀족, 또는 대신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진나라의 경우 일반 평민은 이런 묘도(墓道), 즉 경사로가 있는 무덤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에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거대한 관곽(棺槨) 또한 평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순장묘 안에서 흐트러진 유골들과 기이한 물건들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유골은 하체 부분이 관 옆의 황토에 묻혀있고, 두개골은 곽실의 두상(頭箱)※ 덮개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또 어떤 시체의 두개골은 곽실 밖에 놓여 있었는데, 그 나머지 뼈들은 관 안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어떤 시체는 몸과 사지가 서로 분리되어 아무렇게나 관 안에 처박혀 있었고, 두개골만 관 밖의 흙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머리뼈의 오른쪽 이마 위에 부러진 구리 화살촉이 꽂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매장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발굴된 8기의 묘 가운데 결국 한 기에서는 유골을 찾을 수 없었고, 단지 검 한 자루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볼 때 묘의 주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한 뒤에 사지가 찢겨져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묘의 주인들이 황실 종친이나 귀족들이었다는 근거는 독특한 묘의 구조 외에도 무덤 안에서 대량의 금, 은, 구리, 옥, 칠기, 비단 따위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은으로 만든 두꺼비로, 입 안쪽에 ‘소부(少府)’라는 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는 이 장례 기물이 진나라 소부 즉 중앙의 구리 주조관서인 소부에서 제조된 뒤에 묘의 주인이 그것을 소유한 것임을 나타낸다. 이런 진귀한 기물들 또한 당시 평민들이 소유하거나 구경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호해가 빚어낸 역사의 참극을 연상시킨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유골들은 피살당한 공자, 공주, 또는 황실 출신 대신들의 것으로, 정상적인 죽음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학적 검증의 결과, 이 일곱 구의 유골은, 20세를 전후한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한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30세 전후의 남자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나이의 남자가 일제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둑 주의를 끄는 것은 묘실 안에서 묘를 팔 때 난방을 위해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숯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묘를 파던 시기가 동절기였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호해가 공자, 공주, 신료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던 시기 또한 늦겨울이나 이른봄의 추운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처럼 참혹하게 학살된 후 결국 진제국도 파멸할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진시황이나 호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진시황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노역과 지나치게 긴 병역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반발 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물론 진나라를 패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하윤곤(賀潤坤)이 말한 대로 ‘ 진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호해가 왕위를 찬탈한 뒤 모든 것을 도리에 역행해 끌고 갔기 때문이고, 진나라 통치 집단의 모순과 분열을 조성해 통치 역량을 나약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만일 호해가 왕위를 계승한 뒤, 힘써 정치를 하고 진나라 사회의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면 그렇게 빨리 나라가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정 내부 관료 집단의 단결과 이익을 보호했다면 설사 봉기가 일어났다 해도 이를 막아낼 충분한 역량이 있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당시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이 몇 십만에 달하는 여산(驪山)의 죄수들을 무장시켰다면 주장(周章)의 농민 봉기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쪽 변경에서 국방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던 대장군 몽염과 그의 30만 정예병이 장한과 합세하여 공동으로 봉기군에 대처했다면 유방이나 항우의 대군도 함곡관(函谷關)이나 무관(武關)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함양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패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다시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진나라가 급속해 패망했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가설은 역사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또한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시황 능묘에서 발견된 17기의 순장묘는 후세 사람들에게 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통해 생활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민족에 이롭고 또한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두상(頭箱) : 겉널인 곽(槨)과 안널인 관(棺) 사이의 공간을 말하는데, 시신의 정수리 부분의 공간을 두상(頭箱), 발 쪽의 부분은 각상(脚箱), 양쪽 옆구리 쪽의 것은 변상(邊箱)이라 한다.





< 출전 : 일빛 출판사 간 부활하는 군단-1>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09-04-02 22:59:09 중국사(으)로 부터 이동됨]

목록
9245
[] 한무제의 흉노정벌도

한무제의 흉노정벌 종합도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1-03-16 17:17:14 진한(으)로 부터 이동됨]
양승국 06-04-07
[]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와 그 부근도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는 지금의 안휘성, 하남성, 산동성과의 접경지역인 강소성 서주시(徐州市) 경내 패현(沛縣)의 풍읍(豊邑)이다. 한나라를 창건한
운영자 07-02-20
[] 정형의 싸움에서 배수의 진으로 조군을 무찌른 한신

한군의 대장군 한신(韓信)은 한왕 유방의 명을 받고 위(魏)나라로 쳐들어가 위군을 대파하고 위왕 위표(魏豹)를 사로잡았다. 승세를 탄 한신이 조(
운영자 10-04-03
[] 동한말 13자사부의 관할구역도

전한의 한무제가 설치하여 동한까지 지속된 13자사부의 명칭과 관학구역도. 삼국시대 위촉오(魏蜀吳)의 영토는 13자사부 중 오는 양주, 교주 및 형
양승국 06-03-15
[] 대하(大夏-Bactria)

박트리아(Bactriana, 고대 그리스어: Βακτριανα, 페르시아어: Bākhtar, بـلـخ , 중국어: 大夏 대하[통
운영자 10-10-18
[] 안식(安息-파르티아)의 역사와 영역

왕조의 창시자 아르사케스의 이름을 따 아르사크왕조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안식(安息)이라고 불렀다. 시리아 국왕 안티오코스(2세)가 이집트전쟁을
운영자 10-10-18
[] 한나라 비빈들의 품계와 작록표

한나라 비빈들의 품계와 작록표 서한 초의 제도는 진나라가 제정한 제도를 답습하여 황제의 정비는 황후라 칭하고 그 외의 부인 이하를 합쳐 모
운영자 10-10-15
[] 서한의 황제표

西漢皇帝 廟號 諡號 其他名稱 姓名 年號 在位時間 漢太祖 高皇帝 漢高祖 劉邦 - 前206年—
운영자 10-10-14
[] 누란국왕을 살해하고 서역을 한나라의 지배하에 둔 부개자

부개자(傅介子) 1. 간개(簡介) 기원전 65년에 태어난 부개자는 서한왕조에서 외교사절로써 용맹을 떨친 인물이다. 지금의 감숙성 경양(慶
운영자 10-09-14
[] 실크로드의 지배자 반초(班超)와 로마에 사신으로 파견된 감영(甘英)

실크로드의 지배자 반초(班超)와 로마에 사신으로 파견된 감영(甘英) 1. 반초(班超) 반초(班超, 32년 - 102년)는 중국 후한의 무장이다. 문인
운영자 10-09-08
[] 중국 한왕조 때 인구현황

한왕조의 인구변동 진말 농민기의와 초한전쟁 진행과정 중 많은 인구가 사망했다. 사마천은 그의 저서 사기에서 한탄했다. " 처음 진섭(陳涉)
운영자 10-07-18
[] 전국 때 진나라의 군사들이 적군의 수급에 메달렸던 이유

진나라는 효공(孝公 : 재위 전 362-338년) 때부터 법가사상가의 지도 아래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의 운용제도과 군제(軍制)에 대해 혁신적인 개
운영자 10-07-08
[] 비참한 최후를 마친 서한 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

서한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主父偃) 이야기 진의 천하통일은 권력구조라는 측면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운영자 09-12-27
[] 곡괭이로 찾아 낸 세계 8대 기적

곡괭이로 찾아 낸 세계 8대 기적 // [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
운영자 09-11-11
[] 세기의 여행가 장건

세기의 여행가 장건(張騫) “장건은 의지가 강하며, 견실하게 일에 임하였고, 마음이 넓으며 사람을 믿었다.” (사기(史記)·대원열전(大宛列傳)
운영자 09-11-10
[] 병길(邴吉) 

병길(邴吉)  1. 邴吉舊故(병길구고)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년에 죽었다. 자는 소경(少卿)으로 서한 노국(魯國) 북해
운영자 09-07-08
[]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131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운영자 09-06-25
[] 전한시대 승상의 역할과 권세

전한시대 승상의 역할과 권세 상국(相國)이라고도 칭하는 승상(丞相)은 진(秦)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천자를 위한 승(丞), 즉 천자를 보좌하여
운영자 09-06-19
[]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 출신에서 제왕이 된 유방은, 훗날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는 대장부들에게 커
운영자 09-06-19
[] 진시황의 최후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좌승상 이사(李斯)와 그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를 대동하고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太監)의
양승국 04-05-12
[처음][이전][1][2][3] 4 [5][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