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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여행가 장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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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여행가 장건(張騫)


“장건은 의지가 강하며, 견실하게 일에 임하였고, 마음이 넓으며 사람을 믿었다.” (사기(史記)·대원열전(大宛列傳)》) 중국과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과의 외교적, 문화적, 상업적 교류의 물꼬를 튼 한나라 무제 시대 장건의 인물됨을 평하는 말이다.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지의 땅을 여행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서 더 없이 적합한 자질이 아닐 수 없다.


1. 흉노를 견제하기 위한 동맹의 임무를 맡다

한나라 초기의 대외 정책에서 가장 큰 과제는 흉노를 견제하고 제압하는 일이었다. 제7대 황제 한무제(전156-87년) 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즉위 초기 무제는 투항한 흉노인에게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월지(月氏)가 흉노 묵특선우에게 패해 서방으로 쫓겨났으며, 노상선우 때는 월지왕이 살해되어 흉노가 월지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삼았다는 정보였다. 월지가 흉노에 대해 깊은 원한과 복수심을 품을 것이라고 판단한 무제는 월지와 연합하여 흉노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월지와 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사자를 파견해야 했던 한무제는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위험한 임무를 누가 맡길 사람이 필요했다. 이때 자원하여 사자로 선발된 사람이 한중(漢中) 출신의 낭관 장건이었다. 장건이 출발한 시기는 기원전 139년경으로 추정된다. 장건은 월지와 동맹을 맺고 흉노를 협공하는 약속을 성립시키는 임무를 지니고 흉노 출신 감보(甘父)를 길잡이 삼아 10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장안을 출발했다.


월지의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더구나 흉노의 영역을 지나야 하는 위험천만한 여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건 일행은 하서(河西) 지역에서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지배자 군신선우(軍臣單于)는 장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흉노가 한나라의 영역을 지나 남방의 월(越)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하고자 한다면 한나라가 그것을 묵인할 수 있겠는가?”

군신선우는 장건 일행을 억류시켰다. 억류 생활 10여 년 동안 장건은 흉노 여인을 처로 얻어 아들까지 낳았다.


2. 기나긴 억류 생활과 13년만의 귀국


그러나 장건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기회를 노리다가 탈출에 성공한 장건은 서쪽으로 수십 일을 여행한 끝에 우즈베크스탄의 페르가나협곡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던 대완(大宛) 왕국에 도착했다. 대완 왕은 장건에게 호의적이었고, 장건은 비로소 월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다. 장건은 강거(康居)를 지나 대완의 서쪽 약 1천 키로 미터 떨어진 아무다리야 강 북안의 대월지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건은 무제의 뜻을 전하며 월지왕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월지는 비옥한 땅에서 풍요를 누리고 있었으며 주변 대하(大夏)국을 사실상 복속시켜 안정을 누리고 있었다. 월지로서는 굳이 한나라와 동맹하여 흉노를 공격할 까닭이 없었다. 1년 남짓 머무른 장건은 월지를 떠나 귀로에 올라 흉노의 땅을 지나다가 또다시 그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1년 정도 억류되어 있던 장건은 군신선우가 세상을 떠나고 왕위를 둘러 싼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흉노인 아내와 시종 한 명을 데리고 탈출하여 기원전 126년경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안을 출발한 지 약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비록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장건은 서쪽 지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보고했고, 이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무제는 장건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다. 《사기》와 《한서》에 나오는 서역에 관한 자세한 기록 대부분은 장건의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특히 장건은 대하(大夏)의 시장에서 촉(蜀) 지방의 산물이 거래되고 있으며 그것이 신독(身毒), 즉 인도를 거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흉노 지역을 피해 신독을 거쳐 서역 여러 나라와 교통할 수 있다고 판단한 장건은 무제에게 허락을 얻어 신독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3. 동서 문화 교류를 위한 가교를 놓다

이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을 따라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한 공으로 박망후(博望候)에 봉해졌다. 사서에는“장건은 교위(校尉)로서 대장군을 따라 흉노를 쳤는데, 물과 풀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불편 없이 지냈다.”라고 했다. (《한서·장건전》) 그러나 이광과 함께 장군으로 출병했다가 예정된 기일을 맞추지 못해 군율을 어긴 죄로 박망후의 작위를 잃었다. 그러나 무제는 서역 전문가로서의 장건을 신임했다. 장건은 월지 대신 오손(烏孫)과 연합하여 흉노를 제압한다는 새로운 대책을 건의했다. 무제는 장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원전 119년 장건을 오손으로 파견했다. 일행 300명과 함께 오손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선물할 막대한 재물을 갖고 떠난 장건은 오손 왕의 후대를 받았지만 흉노를 협공하는 동맹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오손은 내부 권력 다툼이 심했고 특히 오손은 흉노에 대한 두려움을 크게 갖고 있었다. 장건은 주변 여러 나라에 부사(副使)를 파견하고 오손의 사자 수십 명을 데리고 기원전 115년 귀국했다.


두 차례의 서역 여행에서 장건은 흉노를 협공하는 동맹을 맺는다는 본래의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다. 군사적,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한 셈이라 하겠으나 완전한 실패는 아니었다. 특히 오손과의 동맹은 흉노를 견제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고, 한나라의 영향력이 서역 여러 나라에 미치도록 하는 데에도 기여했기 때문이다. 서역 여러 나라들은 한나라가 막강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장건 일행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많은 나라들이 한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건의 여행이 지니는 의미는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와 다른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실크로드라 일컬어지는 동서 교통로의 기반을 놓고 중국과 서역 사이의 상업적, 문화적 교류를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4. 세계 인식의 확장에 기여

예컨대 한나라는 오손과 동맹을 맺으면서 무제의 조카 유건(劉建)의 딸 세군(細君)을 오손으로 시집 보냈다. 이 때 세군은 관리, 시종, 환관 등 수백 명과 함께 오손으로 갔다. 세군이 죽은 뒤에는 황족 유무(劉戊)의 손녀 해우(解憂)를 다시 오손에 보냈고, 해우가 오손으로 시집 가 나은 딸들이 나중에 사차(莎車: 야르칸드)와 구자(龜玆: 쿠차) 왕의 부인이 되었다. 이들은 한나라와 서역의 정치적 관계는 물론 문화적 교류에서도 일종의 거점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장건이 대완, 강거, 월지, 대하, 안식, 신독, 우전, 한미 등 서역 여러 지역에 파견한 부사들도, 각 지역의 한나라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인식을 높이고 한나라의 서역에 대한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부사들은 귀국하면서 현지의 상인과 사절들을 데리고 왔다.


장건 이전에도 서역 여러 나라들은 교류하고 있었고 교통로도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제국 차원에서 공식적인 교역과 교류가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세계와 중앙아시아 세계 나아가 더 먼 서쪽과 상업적, 문화적, 정치적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은 장건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공식적인 교역의 물꼬가 트이자 서역에서 중국으로 보석, 산호, 공예품, 향료, 석류, 포도, 목재 등이 들어왔고 중국의 견직물을 비롯한 많은 산물들이 서역으로 들어갔다. 무제는 대완 지역에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곧 한혈마(汗血馬)가 있다는 장건의 정보를 바탕으로 기원전 104년 장군 이광리를 보내 한혈마를 입수하기도 했다.


장건은 오손에서 돌아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은 대행령(大行令)에 임명되어 서역 외교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게 되었지만, 기원전 114년 세상을 떠났다. 장건의 고향인 오늘날 중국 섬서(陕西)성 성고(城固)현 서쪽 박망진(博望鎭)에 측백나무에 둘러싸인 장건의 묘가 있다. 장건의 출생 시기를 정확히 알기는 힘드나 월지로 처음 떠난 기원전 139년경 그의 나이를 30대로 추정해 본다면, 대략 50대 후반 또는 6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셈이 된다. 둔황에는 7세기에 그려진 장건출사서역도(張蹇出使西域圖)라는 벽화가 있다(막고굴 제323굴 북벽). 무제가 말 위에서 손을 들어 장건에게 명령을 내리는 가운데 장건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장건의 여행 8백 년 뒤에 벽화가 그려질 정도로, 특히 실크로드 지역에서 그의 명성은 지속적으로 드높았다고 볼 수 있다.



글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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