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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27 14:31:494846 
비참한 최후를 마친 서한 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
운영자


서한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主父偃) 이야기




진의 천하통일은 권력구조라는 측면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전통적으로 중국은 제후들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봉건제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진시황은 분봉(分封)을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해내(海內)를 하나로 통일하고 대권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이로써 동주(東周)시대 이래로 열국의 쟁패전이 종료되고, 백성들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의 국운은 너무 짧았다. 스스로 시황제라고 칭한 영정(嬴政)은 영원히 자신의 후손이 대를 이어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후계자를 2세, 4세, 5세 황제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 달리 진왕조는 물과 2세에 망하고 말았다. 시대를 불문하고 급진적인 혁명이 제도적으로 정착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왕조를 세운 유방은 진의 폐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종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고, 중앙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울타리가 되어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 달리 한왕조 초기에는 여후의 집권과 동시에 위기를 맞이했다. 여후는 유씨가 아니면 제후왕으로 봉하지 않는다는 유방과 대신들의 약속을 어기고 여씨를 왕으로 봉했다. 다행히 고조의 구신인 진평과 주발의 노력으로 여씨를 몰아내고 유씨의 왕조를 회복했으나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동성인 제후들의 권력이 급격히 강화되었던 것이다. 여씨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제왕 유양(劉襄)과 그의 동생인 유장(劉長)이 유력한 황제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결국 고조의 아들인 대왕(代王) 유항(劉恒)이 제위를 차지했다. 그가 문제(文帝)이다.




문제는 그의 뒤를 이은 경제의 시대와 함께 소위 문경지치(文景之治)라는 성세를 이룩한 어진 군주라는 평가를 받았다. 22년의 통치기간 동안 그는 농업을 장려하고 전조(田租)를 감면했으며, 황제가 사용하는 비용을 줄이고 자신의 경호원이자 비서 노릇을 하던 낭리(郎吏)의 수를 줄여 재정을 튼튼히 비축했다. 또한 혹독한 형법을 완화하여 육형(肉刑)을 폐지하는 대신 태형과 노동형에 처했다. 연좌제(連坐制)와 비방요언률(誹謗妖言律)을 폐지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에는 그의 이러한 조치가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조의 건의로 시행된 전조감면조치는 농민들에게 전조를 징수하는 대신 부민(富民)들에게 곡물로 헌납하게 했다. 부민들은 그 곡물로 관직을 샀으며, 국고는 풍부해졌지만, 빈부의 격차가 오히려 심화되는 폐단을 초래했다. 또한 육형은 폐지되었으나 태형을 받다가 숨지는 경우가 많았으니 실제로는 사형이나 다름이 없었다. 연좌제 역시 신원평(新垣平)의 반란사건 이후로 다시 부활되었다. 따라서 문제의 선정은 실질적 효과 보다는 정치적 선전에 불과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그의 이러한 조치가 전혀 허무맹랑하지는 않았다. 강압적인 통치에서 유연한 정치적 분위기가 조성되자 문화적 역량이 강화되면서 새로운 인재가 등장했다.




1. 가의의 실패




문제의 통치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에는 고조 유방의 공신들이 대부분 노쇠하거나 사망하고 빈자리를 현량방정(賢良方正)과 직언극간(直言極諫)한 인재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낙양 출신으로 한나라 초기 최고의 천재 가의(賈誼)였다. 유방의 공신인 장량, 소하, 진평, 육고(陸賈)도 뛰어난 지략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원대한 통치이념과 정치적 대안을 지녔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가의는 이들 지략가나 정객들에 비해 원대하고 분명한 정치적 이념과 대안을 지닌 인재였다. 그는 한왕조가 당면한 내부적인 문제인 강성한 제후국과 중앙정부의 관계, 대외적인 문제인 흉노와의 관계에 대해 정확한 인식과 대안을 제시했으며, 심각한 빈부의 격차를 야기한 상업중시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민생안정대책으로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제안했다. 또한 과거의 역사를 분석하여 예치(禮治)를 기본으로 법치를 가미하려고 했으며, 왕조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과 20세 초반의 청년이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자 기존의 대신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가 정치적 위기에 몰린 직접적인 원인은 열후취국령(列侯就國令)이었다. 제후들은 각자의 봉지를 받았으나 중앙에 거처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가의는 이러한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장안을 떠나 각자의 봉지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발을 비롯한 원로들과 제후들은 힘을 합쳐 가의를 공격했다. 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문제는 가의를 장사왕의 태부(太傅)로 좌천시켰다. 가의가 상수(湘水)를 지나며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이후 가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요절했다.




2. 조조(竈錯)의 실패




문제 시대에 등장하여 경제 유계(劉啓)의 시대에 활약한 조조(晁錯)는 가의의 정책을 더욱 구체화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원로대신들과 제후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문제의 삭번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산업기술이 발달하자 제후왕들은 각자의 봉지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오(吳)왕 유비(劉濞)를 비롯한 7국의 세력이 가장 강했다. 중국의 동남쪽을 차지한 오는 구리와 소금의 산지로 유명했다. 유비는 구리와 소금을 전국에 판매하여 국부를 충실히 비축하고, 백성들에게는 조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당연히 백성들은 그러한 유비를 잘 따랐다. 인기가 높아지자, 그는 점차 다른 욕심이 생겼다. 그러나 재물은 많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재물을 아끼지 않고 뿌리자 천하의 망명객들이 오나라로 모여들었다. 세력이 강화되자 그는 중앙정부를 무시할 정도로 방자해졌다.








경제시대에 조조(晁錯)는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유비의 죄를 탄핵하고, 제후들의 세력을 삭감할 것을 건의했다.




“옛날 고조께서 처음 천하를 평정했을 때 어린 아우와 아들을 중심으로 황실의 울타리가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제후를 봉했습니다. 그 가운데 제왕(齊王)은 70여개의 성을, 초왕(楚王)은 40여개의 성을, 오왕은 50여개의 성을 차지했습니다. 천하의 땅 가운데 절반이 이 세 제후국에 속했습니다. 과거에 오왕과 문제의 태자이신 폐하 사이에 오랜 원한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불편했던 오왕은 늙고 병들었다는 핑계로 조정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죄는 죽어야 마땅했지만, 문제께서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하여 후하게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오왕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방자해졌습니다. 오왕은 사사로이 산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바닷물로 소금을 구어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제정이 풍부해지자, 오왕은 천하의 망명객들을 모아 법도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오왕은 이미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세력이 결집되자 이제 봉지를 삭감하든 하지 않든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신중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왕의 봉지를 삭감하면 사안이 발생하더라도 피해가적을 것이지만, 삭감을 하지 않으면 우환이 점점 더 커져서 수습하기가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일이 지연되면 피해도 더 코지게 됩니다.”




BC 154년, 경제는 조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나라로부터 동해군(東海郡)을, 조나라로부터 상산군(常山郡)과 교서(膠西)의 6개현을, 오나라로부터 회계군(會稽郡)과 예장군(豫章郡)을 삭감하려고 했다. 조정에서 봉지의 삭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은 오왕은 드디어 반란을 일으킬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초왕 유무(劉戊), 교서왕 유앙(劉卬), 교동왕 유웅거(劉雄渠), 조왕 유수(劉遂), 제남왕 유벽광(劉辟光), 임치왕 유현(劉賢) 등과 약속하여 조조를 죽여서 군주의 주변을 깨끗이 한다는 명분으로 광릉(廣陵)에서 20만명의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는 자못 등등했다. 그들은 주변의 주현을 공략하고 회수(淮水)를 건너 서쪽으로 진격하며 잇달아 관군을 격파했다.








조조가 삭번책을 건의했다는 말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께서 즉위하신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네가 대정을 손에 쥐고 제후들의 권력을 삭감하고 유씨 골육들 사이를 이간질한다고 세상 사람들이 떠들고 있다. 왜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하느냐?”




두영(竇嬰)과 원앙(袁盎)을 비롯한 대신들은 삭번책을 너무 다급하게 시행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조의 생각을 달랐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자가 권위를 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종묘가 불안하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제마저 반신반의할 정도였다. 결과를 보면 조조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삭번책을 강행하느냐 마느냐와 관계가 없이 어차피 반란은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조조는 그렇다면 차라리 반란을 도모하는 자들이 대비하기 전에 압력을 가하여 하루라도 빨리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조를 제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같았던 조정의 대신들과 제후들의 협공을 받은 경제는 원앙의 말을 믿고 조조를 죽이고 말았다. 경제의 부름을 받은 조조는 조복을 입고 입궐하다가 체포되어 동시(東市)에서 요참형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그가 죽었다고 반란군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오초칠국의 난은 간신히 평정되었다.




3. 추은령(推恩令)으로 등장한 주보언(主父偃)




무제가 즉위한 후에도 삭번책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으나 반발을 우려하여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삭번책은 한왕조의 초기부터 내정부문에서 가장 큰 과제였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대책을 제시한 사람으로 문제에게 가의가, 경제에게 조조가 있었다면, 무제에게는 주보언(主父偃), 서락(徐樂), 엄안(嚴安)이 있었다. 이들이 제시한 치국의 방략은 물론 삭번책에 제한되지는 않았다. 무제가 자신감을 가지고 제후들의 세력을 제한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친 배경에는 선대의 노력도 있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널리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여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은 각자 대책을 제시하여 무제의 눈에 들었다.








주보언은 제(齊)의 임치(臨菑) 출신으로 일찍이 장단종횡술(長短縱橫術)을 배웠다. 주보가성이고 언이 이름이다. 주석가들은 장단종횡술이 2가지 뜻이 있다고 한다. 대체로 전국시대의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를 위주로 시행된 외교 전략인 합종책과 연횡책을 해석하는 방법을 가리키며, 합종과 연횡의 장단점을 설명한다는 의미와 길거나 짧게 종횡으로 변설을 전개한다는 뜻이다. 《사기 평진후 ․ 주보열전》에 따르면 나중에 주보언은 《역경》, 《춘추》, 제자백가를 두루 익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는 유학자라기보다 경세가가 가깝다. 주보언은 그리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고향의 유생들은 그를 배척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에 필요한 돈을 빌리려고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실망한 그는 고향을 떠나 연(燕), 조(趙), 중산(中山) 등지를 떠돌았지만 역시 누구에게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주보언이 제후들에게 등용되지 못한 까닭은 그가 주장하는 방략이 제후국으로서 채택하기가 곤란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자신도 한 귀퉁이를 차지한 제후국을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주보언은 제후를 디딤돌로 삼아 중앙정계로 진출하고 싶었다.








무제 원광(元光) 원년인 BC 134년, 그는 더 이상 제후들의 문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장안으로 들어가 대장군 위청(衛靑)을 찾아갔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위청은 여러 차례 무제에게 추천했지만 부름을 받지는 못했다. 그동안 돈도 떨어지고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되자 주보언은 직접 상소를 했다. 당시에 젊은 황제 무제는 대단한 열정과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보언이 오전에 올린 글을 읽은 무제는 그날 오후에 곧바로 그를 불렀다. 당시에 주보언이 무제에게 올린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보언의 철학과 식견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명한 군주는 신하들의 직간을 받아들여 만세에 전하게 합니다. 사마법(司馬法)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대국이라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태평천하라고 전쟁을 잊으면 위태롭다. 천하가 평안해도 군주는 항상 군사가 개선할 때 연주하는 음악을 들어야한다. 천자가 봄과 가을에 사냥을 하는 것과 제후가 봄과 가을에 사열을 하는 것은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대체로 노(怒)한다는 것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고, 병(兵)은 흉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옛날의 군주는 한 번 노하면 반드시 시체를 엎어놓고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성왕(聖王)이라면 이러한 일을 엄중하게 피했습니다. 싸워서 이기려고 함부로 무력을 휘두르는 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진시황은 전승(戰勝)의 위력을 앞세워 천하를 잠식하여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흉노를 지려고 하자, 승상 이사(李斯)가 다음과 같이 간했습니다.




‘불가합니다. 흉노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철새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기 때문에 제지할 수 없습니다. 경기병으로 깊이 쳐들어갔다가는 군량이 끊어집니다. 그렇다고 군량을 지고 가다가는 행동이 둔해집니다. 흉노의 땅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황무지입니다. 얻더라도 이득이 없습니다. 흉노의 백성들은 아무리 잘 대해주어도 충성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죽이면 백성들의 부모된 도리가 아닙니다. 중국을 피폐하게 만들고 흉노를 이겨서 통괘하게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진시황은 기어코 몽념(蒙恬)에게 흉노를 치게 했습니다. 새로 얻은 땅은 염분이 많은 소택지라서 농사를 짓지 못했지만, 천하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북하(北河)를 지키게 했습니다. 10여년 동안 수 십 만명이 죽었음에도 결국은 북하를 건너지 못했습니다. 군사가 부족하거나 무기가 정비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할 수 없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군사들이 사용할 군수물자를 대느라고 황현(黃縣), 수현(腄縣), 낭야(瑯邪) 등 바다를 등진 곳에서 북하까지 운송을 했지만, 겨우 1/10만 도착했습니다. 남자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군량이 부족하고, 여자가 아무리 밤을 새워 길쌈을 해도 장막을 만들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니 노약자들을 어떻게 부양하겠습니까? 천하가 진을 배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천하를 평정하고 한왕조를 건국한 고조께서도 흉노가 대곡(代谷)의 바깥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받고 그들을 정벌하려고 했습니다. 고조께서는 어사 성진(成進)이 진의 이사와 같은 이유로 반대했지만 기어코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평성에서 곤욕을 겪었습니다. 간신히 유경(劉敬)을 시켜 화친을 맺은 이후로 천하에서 병력을 동원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진은 수 십 만의 군사에게 이슬을 맞히며 흉노의 선우를 포로로 잡기도 했지만, 그들과 원한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비용을 감당하기에는 턱도 없이 모자랐습니다. 이처럼 국고를 탕진하며 해외를 원정하는 것은 옳지 않을 일입니다. 흉노는 천성적으로 침략을 일삼으며 노략질을 자행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제어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고대의 우(虞), 하(夏), 은(殷), 주(周)에서는 그들을 짐승처럼 여기며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고대의 제어방법을 검토하지 않고 근세의 실패를 답습하려는 것은 백성들에게 고통을 줄 뿐입니다. 변경의 백성들은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도적들과 내통하게 됩니다. 위타(尉佗)와 장감(章邯)이 나라를 배반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진의 정치가 그릇된 것은 위타와 장감에게 권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득실을 살피셔야 합니다. 《서경 주서(周書)》에서 국가의 안위는 군주의 명령에 달려있고, 존망은 사람을 쓰는 것에 달려있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미루어 주보언이 글을 올릴 무렵 무제는 흉노를 원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정한 거처에 안주하지 않고 자연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족 흉노와의 전쟁이 부당함을 건의했다. 농경민족끼리의 전쟁은 영토를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일정한 영토가 없는 흉노와의 전쟁은 전혀 달랐다. 흉노는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중국을 침략했기 때문에 목적을 달성하면 재빨리 그들의 활동무대로 물러났다. 이런 상대와의 전쟁은 의미가 없었다. 농경민족인 한족으로서는 흉노의 땅을 점령하더라도 소용이 없었으며, 오히려 그곳을 지키느라고 엄청난 희생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막을 건너 서역과 무역을 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흉노의 땅을 침략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흉노에 대한 주보언의 주장은 옳았다. 그는 흉노에 대한 강경책이 잘못되면 내부의 이탈자를 양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나중에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들의 세력을 삭감하려고 한 그는 위타와 장감의 예를 들면서 신하들에게 권력이 주어지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주보언의 주장이 무제의 시선을 끌었다.








조(趙)나라 출신 서락은 대외적인 문제를 언급한 주보언과 달리 주로 내정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토붕(土崩)이라고 합니다. 기왓장이 깨어지는 것처럼 부분적인 것이 허물어지는 것을 와해(瓦解)라고 합니다. 신은 천하의 근심이란 와해가 아니라 토붕이라고 들었습니다. 진나라 말기의 상황이 토붕이었습니다. 진승(陳勝)은 땅 한 조각도 없는 하찮은 신분이었으며, 공자, 묵자, 증자처럼 현명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猗頓)처럼 부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궁색한 거리에서 몸을 일으켜 창칼을 들고 주먹을 휘두르니 천하가 흔들렸습니다. 군주가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랫사람의 원망을 듣지 못했으며, 풍속과 정치기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섭은 토붕의 시기를 만나서 일시적이나마 위세를 떨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천하의 근심은 토중에 있습니다.




경제 시대에 발생한 오초칠국의 난 따위는 와해입니다. 7개의 제후국이 반란을 모의하여 각자 군주라 일컬었으며, 수 십 만의 군대를 이끌며 자신의 세력권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만 서쪽을 진출하여 한 치의 땅도 차지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권위가 필부보다 못하고, 군사가 진승보다 적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선제(先帝)의 뜻과 덕이 쇠하지 않았으며, 풍속을 지키며 자신의 땅에서 살고자 하는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누구도 제후들에게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와해입니다. 따라서 와해 따위는 천하의 근심이 아닙니다.




천하의 대세가 토붕일 때는 하찮은 사람의 선동에도 천하가 흔들리고,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았더라도 와해의 추세에는 막강한 군대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요즈음 관동(關東)에 기근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가 변경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백성들 가운데에는 편안하지 못하여 요동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이는 토붕의 세에 해당합니다. 현명한 군주는 만물이 변화하는 근본을 헤아려 안위의 기틀을 다져야합니다. 묘당(廟堂)에 앉아서 드러나기 전에 미리 녹여버림으로써 토붕의 세를 막아야합니다.




폐하께서는 타고난 성군으로 관대하고 어지십니다. 진심으로 천하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신다면 탕무(湯武)와 이름을 같이 할 것이며, 성강(成康)시대의 풍속을 부흥시킬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확립되면, 높은 곳에 편안히 거처하며 사해를 아울러 만세에 남은 덕을 전하실 것입니다. 남면(南面)하여 왕공들로 하여금 읍(揖)하도록 하는 것이 폐하의 일입니다. 왕으로서 노력을 다하면 성취를 하지는 못해도 스스로 편안하게 지낼 수는 있다고 들었습니다. 편안해지면 무엇인들 구하지 못하고, 무엇을 이루지 못하며, 어디를 정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천하의 흥망성세를 토붕과 와해로 구분한 서락의 정치적 견해는 철저히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유가의 정치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는 아무리 뛰어난 정치적, 군사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라도 민심을 향배를 정확히 가늠하지 않으면 천하를 장악할 수 없다는 생각을 지녔다.








엄안은 다음과 같이 법과 윤리의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주왕조가 처음 천하를 차지했을 때는 40년 동안이나 형벌을 집행하지 않아도 평안했습니다. 주왕조는 가장 흥성했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이후 300년 동안 안정되었으며, 약해지기 시작하여 망하기까지도 300년이 걸렸습니다. 춘추시대에는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晋文公), 진목공(秦穆公), 송양공(宋襄公), 초장왕(楚莊王) 등의 오패(五覇)가 잇달아 일어나 주의 천자를 도와 천하의 해악을 제거하고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오패가 몰락하자 성현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립된 천자의 권위가 약화되자 제후들이 점차 방자해졌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고, 다수가 소수를 학대했습니다. 전국시대가 되자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고 독립한 경우도 있습니다. 전상(田常)은 강(姜)씨의 제나라를 대신했으며, 진(晋)에서는 육경(六卿)이 각자 독립했다가 한(韓), 위(魏), 조(趙) 등 삼진(三晋)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때부터 백성들의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강국은 공격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고, 약국은 지키느라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를 비롯한 유세객들이 합종과 연횡을 위해 사방으로 분주하게 다니기 시작하자, 군사들은 갑옷 속에 이와 서캐가 들끓었으며, 백성들은 고통을 호소할 곳도 없어졌습니다.




육국(六國)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진왕 영정(嬴政)은 스스로 시황제라 칭했습니다. 해내를 하나로 합친 그는 제후들의 성곽을 허물고 무기를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수많은 백성들도 비로소 전쟁이 없어지고 현명한 천자를 만났으니 다시 살아났다고 기뻐했습니다. 진이 이러한 천하의 기대에 부응하여 형벌을 완화하고, 세금과 요역을 줄이고, 인의를 권세보다 숭상하고, 후덕함을 간교함보다 중시하여 풍조를 바꾸었다면 대대로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법과 교활한 지혜와 보다 강한 권세와 개인의 이익을 토대로 흥성한 진은 여전히 과거의 풍교(風敎)를 유지했습니다. 진시황은 아첨꾼의 부추김을 믿고 더욱 위세를 부렸습니다. 몽념(蒙恬)에게 흉노를 치게 하여 땅을 개척했으며, 국경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해 먼 곳까지 군수물자를 운반했습니다. 위타(尉佗)와 도수(屠睢)에게 수군을 이끌고 백월(百越)을 치게 하고,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운하를 팠습니다. 그러나 월인들은 더욱 깊은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헛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진의 군사들은 군량미가 부족하여 고통을 받았습니다. 월인의 역공을 받은 진군은 대패했습니다. 진은 위타에게 월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진의 군대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곳에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10여년이 지나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진시황이 죽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진(陳)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무신(武臣)과 장이(張耳)는 조(趙)에서, 항량(項梁)은 오(吳)에서, 전담(田儋)은 제(齊)에서, 경구(景駒)는 영(郢)에서, 주불(周巿)은 위(魏)에서, 한광(韓廣)은 연(燕)에사 각자 기병했습니다. 이 외에도 깊은 산골짝에서 일어난 호걸들을 포함하면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공후(公侯)의 자제들도 관리들도 아니었습니다. 한 치의 땅도 없는 자들이 마을에서 무기를 들고 일어났으니, 이는 때를 노린 것이었습니다. 서로 계획을 하지도 않았지만 모두 함께 일어났습니다. 각자 점거한 땅이 넓어지자 각 지역의 패왕을 자칭했으니 시대가 그들을 만들었습니다. 존귀한 천자였던 진이 이렇게 망한 것은 무리한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는 약해서 망했고, 진은 강해서 망했습니다. 둘 다 시대적 상황에 변통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남이(南夷), 야랑(夜郞), 강북(羌僰), 예주(濊州) 공격하고, 흉노의 땅으로 깊이 들어가 그들의 근거지를 불사르려고 하십니다. 찬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명을 세워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이는 천하를 위해 유리한 계획은 아닙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개 한 마리도 함부로 짖지 않을 정도로 평안합니다. 그런데도 먼 곳에 얽매어 나라와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드시렵니까? 그렇다면 백성을 자식처럼 생각해야 할 군주의 도리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실익도 없는 원정을 하여 흉노와 원수를 맺으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사해를 아우르는 천자의 도리가 아닙니다. 원한이 풀리지 않으면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입니다. 어찌 폐하의 천하가 오래 가겠습니까?




지금 천하는 무기를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느라고 하루도 쉴 날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로 천하가 걱정하는 바입니다. 군사를 오래 유지하면 반드시 변란이 발생하고, 시끄러운 일이 발생하면 천하가 어지러워집니다. 지금 우리의 영토 바깥에 광활한 땅을 유지하려면, 제후들을 억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공실(公室)을 위해 유리한 상황이 아닙니다. 제(齊)와 진(晋) 망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공실은 약하고 육경은 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이 망한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군수(郡守)의 권세는 육경에 비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와 무기로도 천하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엄안도 무리한 원정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화되고,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것이 곧 국가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세 사람의 상소문을 읽은 무제는 그들을 불러서 늦게 만난 것을 아쉬워했다. 세 사람의 주장을 요약하면 결국 외정(外征)보다는 내정(內政)이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무제는 자신의 위세를 해외로 떨치려던 생각을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세 사람을 낭중으로 삼았다가, 주보언을 알자(謁者)로, 서락을 중대부(中大夫)로 승진시켰다. 주보언은 한 해에 4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주보언은 다음과 같이 가의와 조조보다 정교하고 본격적인 삭번책을 주장했다.




“옛날의 제후는 봉지가 사방 1백여리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중앙에서 강약을 조절하기가 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제후들 가운데 강한 곳은 사방 1천여리의 땅과 수 십 개의 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앙에서 조금만 통제를 늦추면 금방 교만해져서 방자하게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조금만 통제를 강화하면 자기들끼리 합종하여 경사에 거스르고 있습니다. 지금 법으로 제후들의 영지를 깎으려고 하면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난 날 조조가 실패한 경우와 같습니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제후들의 자제는 많게는 10여 명에 이릅니다. 그러나 적자만 대를 잇고 나머지는 골육이라도 1척의 땅을 받지 못합니다. 이래서야 인후(仁厚)의 도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후들에게 인애(仁愛)를 앞세워 자제들에게 골고루 땅을 나누어주도록 허락하십시오. 기대하지 않다가 폐하의 은혜로 제후가 된다면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위에서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지만, 아래에서는 실질적으로 땅을 분할하게 됩니다. 전제적으로는 제후들의 땅을 삭감하지 않지만, 결국은 점차 세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이른바 ‘추은령(推恩令)’이다. 무제는 무릎을 치고 감탄하며 주보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후왕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주고 싶으면 각자 보고하라! 짐이 친히 적절한 호칭을 내릴 것이다.”




조칙이 반포되자 제후왕들은 다투어 자제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곳곳에서 새로운 제후들이 생겨났다. 강한 제후국일수록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분할되어 세력이 약화되었다. 나중에는 조정에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켜 제후국을 없애려고 했지만, 이미 세력이 약화되어 반항할 힘이 없어졌기 때문에 대부분 복종하고 말았다. 말로는 은혜를 베푼다고 했지만 사실은 제후들의 세력을 약화시킨 주보언의 아이디어는 절묘했다. 그는 객관적인 형세와 인간의 본성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자식을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누구에게는 유산을 물려주고, 누구에게는 물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제후들로서는 무제의 속셈을 알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역경(易經)》 곤괘(坤卦)의 육이효에는 ‘이상(履霜) 견빙(堅氷)’이라는 말이 있다. 서리를 밟으니 곧 얼음이 단단해질 것이라는 뜻이다. 우주의 만물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음도 하루의 강추위로 단단하고 두꺼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일은 급하게 서둔다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급하게 이루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화근을 불러일으켜 수습하지 못하게 된다. 역사상 수많은 개혁가들이 나라를 위한다고 급격하게 변화를 추구했지만 대부분 공을 이룩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노련한 사람은 이러한 점을 깊이 깨닫고 몰래 계략을 발휘한다. 이러한 도리를 알고 있던 주보언은 가의나 조조보다 계략의 명수였다.








중앙정부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해 주보언은 다음과 같이 호족과 부호들의 세력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제는 생전에 이미 자신의 무덤을 조성하면서 무릉(茂陵)이라고 불렀다. 주보언은 무릉 주위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그곳으로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키려고 했다.




“지금 막 무릉이 완성되었습니다. 천하의 호걸들과 부호들은 물론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맥성들을 모두 무릉으로 옮기게 하십시오, 안으로는 수도가 충실해지고, 밖으로는 간악한 무리들이 없어지게 됩니다. 칼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나라의 해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무제는 두 말 하지 않고 주보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4. 아궁이에 던져진 장작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마치다.




사족이지만 주보언의 최후는 그의 선배 조조처럼 비참했다. 무제의 신임을 등에 업은 그는 위(衛)황후를 세우고, 연왕의 음모를 적발하여 더욱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대신들까지 그의 입이 두려워 많은 뇌물을 바쳤다. 이떤 사람이 너무 지나치지 않느냐고 충고하자 주보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40년 동안이나 사방을 전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부모형제도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니 남으로부터는 어떤 대접을 받았겠는가? 사나이로 태어나 대부들의 음식인 오정(五鼎)을 먹지 못한다면 죽어서 오정에 삶긴다고 한다. 날은 이미 저물고 내가 가야할 길은 멀다. 일의 순서를 따지다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오정은 대부들의 식사인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기장밥 등의 5가지를 담은 솥을 가리킨다. 날은 저물고 내가 가야할 길은 멀다는 말은 오자서가 복수를 서두르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한 말이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은 할 일은 많으나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의 변명이다. 권력의 맛을 알게 되자 주보언은 점차 신중함과 총명함을 잃기 시작했다. 처음에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강공책을 반대했던 그는 위세를 해외로 떨치고 싶어 하는 무제의 뜻에 영합하여 흉노를 침공하기 위해 삭방(朔方)을 경영하자고 건의했다가 승상 공손홍(公孫弘)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도 주보언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변치 않았다. 무제는 그의 건의를 채택하여 삭방군을 설치했다.








주보언이 멸망을 재촉한 것은 제왕을 탄핵하면서 시작되었다. 무제의 명을 받아 제왕의 승상으로 부임하여 금의환향한 주보언은 형제들과 친구들을 불러서 5백금을 나누어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 내가 빈궁했을 때 형제조차 나를 외면했다. 이제 제의 승상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대들은 천리를 마다하지 않고 나를 맞이하러 왔다. 나는 그대들과 절교한다.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형제와 빈객들을 부른 것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지난날 홀대받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앙갚음을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주보언은 확실히 옹졸한 인간으로 변했다. 둘째는 개인적인 인연으로 찾아와 청탁을 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마천은 이후에 그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첫 번째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필자는 두 가지의 이유가 공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보언은 제왕이 그의 큰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들추었다. 연왕처럼 사형을 받을까 두려워한 제왕은 결국 자살했다. 유사(有司)가 그 사실을 무제에게 알렸다. 주보언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연과 조를 떠돈 적이 있었다. 그가 연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자 불안해진 조왕은 몰래 무제에게 글을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주보언이 조정에 있을 때는 감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마침 주보언이 제의 승상으로 나가자 조왕은 새로 제후가 된 사람들이 주보언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밀고했다. 제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무제는 주보언의 협박 때문이라고 화를 내고 있었다. 이 무렵 조왕의 밀서가 도착하자 무제는 주보언을 심문하라고 명했다. 주보언은 뇌물을 받은 것은 시인했지만, 제왕을 협박한 것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황제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이때 공손홍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살한 제왕에게는 후손이 없어서 나라가 해체되고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 것은 주보언 때문입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천하에 사고할 말이 없어집니다.”




결국 주보언은 일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문전을 드나들던 1천여명의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시신을 거두려고 하지 않았다. 효현(洨縣) 출신으로 공거(公車)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유일하게 주보언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 소식을 들은 무제는 공거야말로 장자(長者)라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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