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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19 12:00:2310664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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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 출신에서 제왕이 된 유방은, 훗날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는 대장부들에게 커다란 용기와 희망과 선례를 던져주었다. 그는 후대에 용인술(用人術)에 뛰어난 제왕으로 널리 칭송이 되었는데, 그의 용인술은 그리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숨겨져 있었다. 사기와 기만, 악독과 교활이 한데 어우러져 일장(一場)의 연극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지금의 강소성에 해당하는 패현(沛縣)이 고향으로 그의 출신성분은 한마디로 건달이었다. 다만 후대의 문인들이 그에게 방(邦)이라는 이름을 붙여 조종(祖宗)의 영예를 주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그의 집안은 무지막지한 그런 집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순서에 따라 백(伯), 중(仲), 계(季)인데, 지금 말로는 첫째, 둘째, 셋째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그의 집안은 약간의 문화소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이름이 계(季)였던 그는 황제가 된 이후에 문인들이 나라를 일으킨 사람이라는 뜻에서 방(邦)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방(邦)은 국(國)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의 《사기·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유방이 황제가 되기 전의 행각에 대해서, 매일 집안에 파묻혀 놀고먹기를 즐겼으며, 호언장담을 일 삼고, 술과 여자를 매우 밝혔다고 전한다. 요즈음 말로는 술 마시고 외상 긁기를 밥먹듯이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방의 품성은 그다지 남에게 존경을 받을만한 구석이 없었는데, 진(秦)나라 말기에 들어서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어느 날 홀연히 초가집을 박차고 나가 3척의 검을 높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 이후로 마상에서 천하를 주유하며 세력을 모으고, 끝내는 중국의 역사상 평민에서 임금의 자리를 획득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훗날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는 대장부들에게 그는 커다란 용기와 희망과 선례를 던져주었는데, 이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며 또한 중국 역사에 특출한 발자취를 남긴 셈이다.
천하를 얻는 이러한 대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남을 뛰어넘는 지혜와 재주를 가져야 하는데, 유방에게서 가장 돌출되는 장점은 남을 쓰는 데에 비상한 실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그는 황제에 오르자 군신(群臣)을 불러 모으고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원인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나의 재주와 지혜는, 전투에 나서면 철저히 준비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며 결전에 있어서 반드시 승리하고야 마는 장량(張良)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국가를 관리하고 백성을 위무하며, 병력의 운용에 필요한 장비를 준비하는 일에 대해서는 소하(蕭何)보다 못하며, 수십 만 병력을 통솔하고, 조련하며 전투를 지휘하는 재주는 한신(韓信)보다 아래이다. 이 세 사람은 당대의 호걸이며 유능한 인재들이다. 나는 마음을 기울여 그들을 썼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군신들은 유방의 말에 탄복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역사학자들도 그 점에 대해서 유방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용인(用人)이라는 오묘한 기술을 유방이 완전하게 진실을 이야기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남을 잘 쓴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장점을 제대로 발휘하게 만드는 기술도 있겠으나, 또한 한 사람의 단점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통제하는 고도의 술책도 필요하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용이 없어지고, 혹은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면 선택의 시기를 고려하여 상대를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완전한 제왕의 용인술이다.
유방은 하나는 확실하게 말을 하지 않고 슬그머니 본질을 흐렸고, 다른 하나는 제왕의 용인술을 은밀하게 자손에게 전수하여 대신들을 통제하도록 획책하였다.
안타깝게도 주연에 참석한 군신(群臣)들은 모두 유방에게 속았으며, 심지어 현재의 역사학자들도 그에게 속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유방은 명명백백하게 뛰어난 음모가임에 틀림없다.
가장 쉽게 드러난 예는 바로 유방이 말한 세 명의 참모 중의 하나이며, 재주가 비상하다는 한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후, 항우(項羽)의 세력은 가장 강성하여 각지의 반진(反秦)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군웅들을 아우르는 맹주 격이었다. 서기전 206년에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부르며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했다.
그 중에서 유방은 항우가 가장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유방은 항우에게서 한왕(漢王)이라는 제후왕에 책봉받고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한중은 한수(漢水)의 상류지역으로 북쪽의 진령산맥과 남쪽의 대파산맥으로 가로막힌 편벽된 지역이며 교통이 불편하였고 생산력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은 한중으로 기꺼이 들어와 세력을 키우며 항우와 천하의 패권을 다툴 준비를 갖추었다. 이때 한신은 항우의 군중에서 중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홀연히 유방에게 투항하였다. 유방의 진영에서 승상을 맡고 있던 소하는 한신의 재주를 높이 사서 유방에게 한신을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대장군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한신의 공로를 논한다면 누구도 비할 사람이 없다.
그는 대장군이 된 이후 시기가 무르익자 곧바로 한중을 돌파하고 진나라의 본거지인 관중지방을 공략하였다. 한중 돌파에 성공한 한신은 그 후, 유방과 병력을 반으로 나누어 3년 기간 동안 지금의 산서(山西), 하남(河南), 하북(河北)를 거쳐 산동(山東)을 공략하고 백만에 가까운 항우와 그 추종세력의 병력을 격파하고 천하의 반을 자기 세력권 하에 두었다.
한왕(漢王) 4년(서기전 203년)에 한신은 제나라 땅을 점령하고 제왕(齊王)에 봉해달라고 유방에게 요청했다. 유방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를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유방의 수십 만 대군은 하남 일대에서 항우의 주력군과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다. 만일 제왕 한신이 유방을 도우면 그의 승리가 되고, 항우를 도우면 그의 승리가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항우는 옛정을 표시하며 한신을 정중하게 초청하면서 유방과 손을 끊고 천하를 3분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한신의 참모인 괴철(蒯徹)도 유방과 갈라서고 항우와 더불어 천하를 3분하는 게 좋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른바 천하 3분지계(天下三分之界)의 시초였다. 훗날 제갈공명은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받고 출사하며 내던진 계책이 바로 천하를 세 사람이 나누어 다스리며 기반을 다진 다음에 천하를 도모하자는 계책이었는데 그 시작은 괴철의 머리에 나왔다. 하지만 한신은 유방이 자신의 그릇을 알아보고 중용해 준 은혜를 저버릴 수가 없다며 단호하게 항우의 청을 거절했다.
한신이 가세한 한나라는 서기전 202년에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군대를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이때 한신이 이끄는 30만 대군이 승리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사실 한신이 항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면 유방은 절대로 천하를 차지하지 못했다.
항우를 제거하는데 한신의 공로는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우뚝 솟았다. 그가 이끄는 30만 대군은 그의 세력과 위망(威望)을 지탱해주는 토대였다. 한왕 5년 서기전 202년, 바로 항우를 꺼꾸러뜨린 그 해 겨울, 한신은 대군을 이끌고 정도(定陶)에 주둔하였다.
이미 대전(大戰)이 끝난 상태라 한신의 군대는 경계태세가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대군이 한신군의 중심부를 뚫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당시에 항우의 잔여 병력은 뿔뿔이 흩어져 각지에 웅거한 채 제 몸 하나 지키기에 급급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대군을 이끌고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한신의 30만군에 대항하는 세력은 사실상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신은 보고를 받고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는 단지 적을 맞을 준비를 명령하고, 친히 중군(中軍)이 머물고 있는 군영 주위에 설치한 누벽에 올라갔다. 이때 물밀듯이 밀려온 병력은 중군의 군영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한신이 자세히 보니 상대방의 군대는 바로 한왕 유방의 군대였다. 해하의 싸움이 끝난 후에 항우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그의 잔당들은 한(漢)에 투항을 하지 않고 노나라 땅에서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에 유방은 친히 주력군을 이끌고 소탕전에 나섰다. 유방은 부하 장수들을 각지로 보내 격렬하게 저항을 하는 잔당들에게 이미 항우가 죽었으니 저항을 포기하라고 선무했다. 항우의 잔당들은 대장군이 죽은 사실을 확인하고는 대부분 저항을 포기하고 유방에게 투항하였다. 그다지 큰 싸움 없이 노(魯)나라 땅을 평정한 유방은 군대의 방향을 서쪽으로 돌려 낙양으로 향하다가 돌연히 방향을 바꾸어 정도(定陶)로 들이닥쳤다. 유방의 주력군은 한신의 군대가 어떤 준비도 하기 전에 이미 중군을 신속하게 포위하였다. 바로 한신의 군대를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게 사실상의 노나라 땅으로 들어온 목적이었다. 결국 항우의 잔당을 토벌한다고 떠벌린 구호는 사실은 미끼에 해당했다. 잠깐 사이에, 유방은 준마에 몸을 싣고 수많은 장군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신의 중군 진영으로 들어왔다. 한신은 급히 제장들에게 유방을 공손하게 맞을 준비를 시켰다. 한신의 군영에 주연이 베풀어지자 유방은 껄껄 웃으며 항우를 격파하는데 한신의 공로가 지대하다며 추겨 세운 후, 갑자기 말문을 바꾸어 한신의 병력을 무력화 시켰다.
「이제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마땅히 병사들은 쉬어야 하오. 장군께서는 병부(兵符)를 반납하고 제나라 땅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을 편안하고 안락하게 보내시기 바라오.」
이때 한신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허를 찔려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졸지에 30만 병력을 유방의 수중에 건네주고 말았다.
얼마 후, 유방은 제후왕들의 추대형식을 빌어 칭제(稱帝)를 선언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선포한 다음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후에 다시 장안(長安)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낙양은 동도(東都)라고 호칭하였다. 당시에 국가의 체제는 대부분 진대(秦代)의 군현제(郡縣制)를 답습하였고, 동시에 국가를 세우는데 공이 많은 8명의 이성(異姓)을 가진 제후를 왕으로 봉하였다. 8명에게 왕을 봉한 것은 나라를 세우는데 이들의 공로가 지대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본래 상대적으로 독립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유방에게 귀의하기 전에 이미 봉기를 해서 왕을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제왕(齊王) 한신은 초왕(楚王)으로 다시 분봉 받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신의 출신지가 초(楚)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제(齊)나라는 토지가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어, 이곳을 기반으로 봉기를 하면 자칫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유방으로서는 한신을 결코 제왕으로 놔둘 수가 없었다.
한신은 비록 군사상으로는 재능이 뛰어났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왕이 된다는 환상에 매우 만족하였다. 그는 유방이 펄쳐 놓은 경기(競技)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 또 한 번 농락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漢)이 들어서자 총명한 몇 명의 공신들은 한고조 유방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매우 행동을 조심하였다. 예를 든다면 장량(張良)은 한고조 유방의 패업을 도운 공신중의 공신이었지만, 이때는 어떠한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고 집안에 파묻혀 장생술(長生術)에 빠진 척 하였다.
또한 소하(蕭河)도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오로지 신도(新都) 장안성(長安城)의 건축에만 몰두하면서 유방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그는 일이 없을 때는 평소에 집에 들어와 오로지 사치와 향락을 일삼으며 가슴에 큰 뜻을 품지 않고 있다고 은근히 유방에게 표시하였다.
그러나 한신은 이러한 도리를 모르고 위엄과 세력을 드날리는 일을 좋아하였다. 초국(楚國)에 도착한 한신은 매우 빠른 시기에 자신의 군대를 양성하고, 각지의 군현을 시찰하면서 다수의 위병(衛兵)을 대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삼십만 대군을 이끌었던 대장군이었다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쉽게 유방의 주목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에 한신이 보여준 군사적인 재능은 유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따라서 그의 재능은 항상 유방에게 근심으로 따라다녔다. 만일 한신이 건재하다면 그것은 항상 유방의 불안으로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 다른 사건이 발생하여 유방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항우의 수하 중에 명장으로 소문난 종리매(鍾離昧)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한신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항우가 패업에 실패하자 그는 갈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한신은 옛정을 생각해서 그를 기꺼이 수중에 거두어 들였다. 이 일은 얼마 후 유방에게 곧바로 밀고가 되었다. 유방은 한신이 불량한 의도를 갖고 모반을 준비한다는 의심을 하였다. 유방은 조서를 한신에게 내려 종리매를 초지(楚地)에서 떠나도록 종용하였다. 한신은 조서를 받고나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유방은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제장(諸將)을 소집하고 한신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는 여러 사람들의 밀고를 얘기하면서 그 대책을 물었다. 많은 장수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병력을 내려 주시면 단숨에 반적(反賊)을 잡아 오겠습니다.」
대전이 갑자기 시끌벅적 소란스러워졌다. 유방은 장군들의 호언장담을 들으면서 한신이 대군을 이끌며 제장을 일거에 장악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이 일은 다음에 다시 상의를 하도록 하겠으니 모두 물러가오.」
장군들이 물러나자 유방은 모사(謀士) 진평(陳平)을 불러들였다. 진평은 유방의 참모 중에서 음모를 획책하는 술수가 가장 빼어난 인물이었다. 진평은 상황을 듣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폐하! 지금 폐하의 군대가 한신의 군대와 싸울 경우 이길 수 있겠습니까?」
유방은 한동안 생각 끝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길 수가 없소.」
사실 유방이 장악하고 있는 병력의 수는 결코 한신이 따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신이 훈련하고 통솔하며, 작전을 하는 병력의 힘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찍이 3년 전에, 유방이 하남에서 항우와 대치하고 있었을 때, 유방은 항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여 병력이 줄어들고 사기가 땅에 떨어져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인 적이 있었다. 그때 한신은 조나라 땅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연전연승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방은 밤을 세워 한신의 군영으로 달려가 그의 군대를 빼앗아 다시 하남으로 돌아가 항우와의 전투에 투입시켜 간신히 전선을 유지한 적이 있었다.
졸지에 주력부대를 유방에게 빼앗긴 한신은 그곳에서 병력을 재차 모집하여 한편으로 훈련을 시키며 한편으로 제나라 땅을 공략하였다. 뜻밖에도 한신은 1년여라는 짧은 기간 동안 새로 모집한 병력을 완벽하게 훈련시켜 제나라 전 지역을 석권했다. 후에 해하의 전투에서 한신의 군대만이 강력한 항우의 주력군과 정면으로 부닥쳤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는 유방이 한신을 겁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진평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폐하 휘하의 대장군 중에서 누가 한신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평의 이 말은 물을 필요가 없었다. 한신과 비교할 만한 대장군이 있다면 유방이 그렇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지금의 걱정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방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없소.」
「그렇다면 섣불리 병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는 우는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스스로 위험을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유방은 병사를 초나라로 보내느냐 마느냐를 상의하기 위하여 진평을 불러 들인 게 아니었다. 그는 무표정한 말투로 진평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진평은 한동안 고심 끝에 천천히 계책을 내었다. 유방은 그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경은 과연 과인의 모사(謀士)에 부족함이 없소.」
진평은 심각한 얼굴 표정으로 유방에게 당부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일은 만일 한신이 모반을 결심했다면 이 계획은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위험하게 됩니다.」
진평의 이 말에는 사실 유방의 심사를 풍자하는 뜻이 농후했다. 한신은 결코 모반을 하지 않을 사람이지만 뒷날의 걱정을 미리 제거하기 위하여 모반을 결심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유방은 전혀 진평의 말에 개의치 않고 그의 어깨를 치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대의 계책은 훌륭하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한왕 6년(서기전 201년) 겨울, 유방은 각지의 왕에게 조서를 내려, 자신이 운몽택(雲夢澤)에 사냥을 나가기로 하였으니 제후들은 모두 진(陳) 땅에 모여 함께 이 대회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다. 이런 사례는 이미 주대(周代)에 천자(天子)가 각지를 순행할 때 있었던 일의 하나였다. 일반적으로 순수(巡狩)라고 부르는 이런 행사는 천하를 순찰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제왕이 즐기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운몽택은 경치가 빼어나고 물길이 아름다운 지방으로 인구가 적어서 사냥을 하거나 자연을 감상하는 데는 적격인 곳이었다.
한신은 조서를 받자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는 유방의 교활한 성격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유방은 한신의 병권을 두차례에 걸쳐 교묘하게 탈취한 선례가 있었는데, 그는 어쩌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뺏기고 말았다. 이번에도 순수라는 구실이 붙었지만, 호리병 속에 어떤 약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더욱이 제후들을 모이라고 지정한 진(陳)은 초나라의 서쪽 변경에 위치해 있어 초왕의 신분인 한신이 빠져나갈 구실을 아예 막아 버렸다. 만일 가지 않는다면 영락없이 모반을 하였다는 의심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이다. 한신의 머리를 지근거리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때 한신의 문객으로 있는 어떤 참모가 계책을 내었다.
「폐하는 종리매의 목을 원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그의 목을 따다 폐하께 바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한신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종리매가 그 소식을 듣고 한신에게 달려와 한차례 욕을 퍼붓고 검을 빼서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한신은 친구의 정리(情理)를 저버린 자신이 부끄러웠지만 결국에는 그의 목을 따다 유방에게 바치고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한신은 또다시 중대한 착오를 범하였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익(利益)의 필요성이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죄가 필요하면 죄가 만들어 질 것은 불문가지의 상식이고, 죄가 없다 해도 죄는 자연스럽게 덧붙여진다.
한신이 종리매를 핍박하여 스스로 죽게 만든 일은 없던 일에 또 다른 하나의 혹을 붙인 셈이었고,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무성한 말만 계속 만든 꼴이 되었다.
그해 12월, 한신은 종리매의 목을 갖고 진(陳) 땅으로 나아가 유방을 알현했다. 임시로 꾸며진 대전에는 유방이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양쪽으로 창을 세운 병사들이 도열하여 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유방은 위엄스런 황제의 자세가 아니라 발을 긁거나 코를 후비면서 몸을 비틀며 한신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한신은 유방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예를 올리고 시종이 들고 온 목합을 유방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소신 한신이 명을 받고 반적 종리매의 목을 갖고 왔습니다.」
한신은 말을 하면서 슬그머니 유방의 표정을 지었다. 유방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고 병사에게 손짓을 보내 한신을 포박하도록 명령했다.
한신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꼼짝없이 유방 앞에 포박을 당하고 말았다. 그때서야 한신은 길게 탄식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교활한 토끼의 사냥이 끝나니 날렵한 사냥개를 잡아 먹는구나[교토사(狡兎死) 주구팽(走狗烹)!]」
한신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유방을 바라보았다. 옛말에 높이 나는 새를 모두 잡아들이면 훌륭한 활을 감추고, 적국이 무너지면 훌륭한 참모는 제거된다고 하였다. 바로 한신을 두고 한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하가 평정되니 이제 내가 죽을 차례가 되었구나.」
유방은 한신의 중얼거림에 기분이 좋지 않은 듯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장군이 모반을 꾸몄다고 말하는데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시오.」
유방은 한신을 체포하고 나서도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듯, 제후들에게 모두 봉지(封地)로 돌아가도록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운몽택으로 사냥나가는 계획을 취소하고 한신을 함거에 태워 낙양으로 돌아왔다.
낙양에 도착한 유방은, 한신의 공로가 뛰어나며 건국원훈이므로 그 죄를 특별히 사면하여 왕의 직위만 박탈하고 회음후(淮陰侯)(淮陽侯)로 강등하여 그의 거주지를 경도(京都)에 제한시켰다. 초왕에서 회음후로 폄직(貶職) 되었다는 말은 지금으로 말하면 광역시장이나 도지사에서 면장 정도로 강직되었다는 뜻이다. 왕작(王爵)을 삭탈당한 한신은 곧이어 장안으로 이송되었다. 그가 모반을 했는지 여부는 그 이후로 전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이루어질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한신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유방이 자신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한신은 매우 분개하였다. 사실 이러한 커다란 변화를 거치면 마땅히 온순하고 근신하며, 날카로운 칼날을 숨겨서 유일한 생로(生路)를 찾아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한신은 다년간 질풍노도와 같이 전장을 누비며 용맹을 떨친 영웅답게 좀처럼 자신의 감정과 의도를 숨기지 못하였다. 모든 생활에서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그의 행동과 언행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한 요소였다.
어느 날 한신은 번쾌(樊噲)의 부중(府中)에 간 적이 있다. 번쾌는 개백정 출신에 유방의 손아래 동서로 맹장으로 인정받아 무양후(舞陽侯)에 봉해져 있었다. 번쾌는 한신을 매우 존경했고 매사에 존대를 잊지 않았다. 그는 한신을 왕처럼 모시면서 한쪽 발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왕께서 어찌 미천한 신의 부중에 왕림 하셨습니까?」
번쾌의 공손한 태도에 한신은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번쾌는 나를 따르는구나.」
또 한 번은 유방이 한신을 불러 마련한 주연에서 장군들의 재능에 대해서 물었다.
「만일 내가 장군이라면 몇 명의 병사를 지휘할 수 있겠는가?」
「폐하라면 대략 10만 명은 지휘하실 수 있겠습니다. 많아진다면 아마 힘이 들 것입니다.」
유방은 크게 웃으며 또다시 물었다.
「그대라면 어떻겠나?」
「다다익선(多多益善)입니다. 저라면 많을 수 록 좋습니다.」
한신은 겸손한 표정 없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유방은 아무런 화도 느끼지 않는 듯 계속 말했다.
「많으면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단번에 나에게 잡혀왔는가?」
한신은 그 말에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비록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지는 못하지만, 오히려 뛰어난 장군들을 이끄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에게 잡힌 이유입니다. 하물며 페하의 성공은 바로 하늘의 뜻으로 결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유방은 한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마음 속으로 굴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유방은 주먹을 불끈 쥐며 언젠가 한신의 세력을 모두 제거하기로 마음을 더욱 굳혔다.
한왕 10년 서기전 197년, 진희(陳豨)가 대(代)와 조(趙) 사이의 땅에서 병사를 일으켜 봉기했다. 유방은 친히 병력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다.
사서에 따르면 진희가 처음으로 대(代)의 수비를 명령받고 임지로 떠날 때, 한신과 더불어 모반을 계획하였다고 했다. 한신은 장안에서 가신들과 계획을 수립하여, 조서를 거짓으로 만들어 관부의 죄수들과 노예들을 석방한 다음 여후(呂后)와 태자(太子)를 습격하려고 하다가 부하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나서 피살되었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관찬사서에서 거짓으로 꾸며놓은 역사일 뿐이고, 사실은 아무런 관련성과 가능성이 없는 얘기이다. 한신은 당시에 장안에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사서에는 그가 병력을 동원하였다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수중에는 일체의 병사가 없었다는 반증이 된다.
그는 싸움에 있어서는 걸출한 장군이고, 지략가인데, 어떻게 죄수와 노예들을 동원해서 황궁을 공격하는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장안과 대, 조의 땅은 거리가 너무 멀어 안팎으로 호응할 수 있는 조건을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여후가 보기에 유방은 이미 늙어 얼마 살지 못하고, 아울러 태자마저 유약하고 무능해서, 그녀는 사후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정적과 장애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신은 비록 새장에 갇힌 새의 꼴이지만, 그가 만일 탈출한다면 결과는 누구도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유방이 비록 한신을 체포하여 구금은 하였지만, 오랜 동지이자 원훈공신인 한신을 죽이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한 여후가 먼저 손을 썼으리라는 추측이다.
이 날 한신은 무료하게 집안에서 소일하다가 상국(相國)으로 있는 소하의 방문을 받았다. 소하는 한신의 오랜 친구로 한신이 한중에 있을 때, 유방이 처음에 거들떠보지 않는 바람에 화가 나서 한중을 떠나자, 밤낮으로 달려와 한신을 다시 한중으로 끌고 돌아가 오늘의 한신을 탄생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지금도 유명한 경극(京劇)인 ‘소하가 달밤에 한신을 쫒아가다[소하월하추한신(蕭何月下追韓信)]’의 전고다.
어쨋든 소하는 도리어 여후와 짜고 한신에게 함정을 만들었다. 그래서 한신을 만든 사람도 소하요, 그를 망친 사람도 소하![성야소하(成也蕭何) 패야소하(敗也蕭何)]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소하의 돌연한 방문을 받은 한신은 내막을 모른 채 반갑게 그를 맞이하였다. 소하는 자리에 앉자 곧바로 한신에게 말문을 열었다.
「진희의 모반을 평정하신 폐하께서 급전을 보내와, 궁중에서 연회를 준비하고 각지의 제후와 군신(群臣)을 참가시키도록 명령하시었소.」
한신은 그동안 유방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수년간 궁중의 연회에 초청을 받아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한신은 예에 비추어 소하에게도 몸이 아파 참가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소하는 억지로 웃으며 한신에게 거듭 참가를 재촉하였다.
「몸이 아프면 부축이라도 받고 참가하는 게 좋소. 이번에도 참가하지 않으면 황후께서 몹시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모함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오.」
한신은 소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참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회날이 되자 그는 몇 명의 부하를 데리고 궁으로 들어섰다. 몇 개의 궁문을 지난 그는 성대한 연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자 퍼뜩 의심이 들었다. 그 순간 수 명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포박하였다. 졸지에 체포된 한신은 장락궁의 어느 작은 방에 구금되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고문을 가하는 행형(行刑) 도구들이 사방에 가득 걸려 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신은 후회를 하였지만 시간을 돌릴 수는 없었다. 얼마 후 한신을 목을 치려는 망나니가 방으로 들어와 날이 시퍼런 장도를 들고 한신에게 다가왔다.
한신은 그떼서야 옛날에 그가 제왕(齊王)으로 있을 때 괴철이 한 말이 떠올랐다.
「유방은 교활한 사람이라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항우의 제안을 받아 독립하셔야 합니다.」
그는 괴철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때 괴철의 계책을 따랐어야 했는데, 이제 소인배와 여자의 속임수에 걸려 최후를 마치게 되다니, 이건 하늘의 뜻이 아니로다.」
한신이 채념하고 눈을 감자 망나니의 칼이 공중에 잠시 머물었다가 힘차게 땅으로 떨어지며 한신의 목을 그의 몸에서 떼어냈다.
일대의 명장이며 전략가인 한신의 일생은 이렇듯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곧이어 한신의 가족과 그의 종족(宗族)은 물론이고 가신들마저 모두 잡혀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신이 모반을 하였다고 고발한 낙열(樂說)은 그 공로로 신양후(愼陽侯)에 봉해졌다.
한고조 유방은 진희의 난을 평정하고 낙양으로 돌아와 한신이 이미 죽었다는 보고를 받자 희색이 만면하여 연신 중얼거렸다.
「아깝다, 아까워.」
유방은 가장 대하기 어려운 정적(政敵)을 제거하여 속이 후련하면서도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였던 것이다.


한나라 초기에 이성(異姓)으로 왕에 봉함을 받은 8명의 사람 중에 양왕(梁王) 팽월(彭越)이 있었다. 팽월은 원래 출신이 도적이었다. 그는 거야택(鉅野澤)을 근거지로 민가를 털어서 연명을 했었다. 진나라 말기에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그는 만여 명을 모아 그 일대에 튼튼한 기반을 다지고 항우나 유방과 어떤 관계를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유방이 한중을 돌파하여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툴 때, 그는 팽월의 이용가치를 발견하고, 사자를 파견하여 팽월을 장군으로 삼는다는 조건을 내걸고 항우의 후방을 교란시켜 달라고 설득하였다.
초(楚)의 항우와 한(漢)의 유방이 격렬하게 싸우고 있을 때, 팽월은 세력을 급속하게 팽창시켜 지금의 하남성과 안휘성을 활동무대로 삼고, 항우의 배후에서 유격전술을 펼쳤다. 항우의 주력군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물러나면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며 팽월의 세력은 항우의 목줄기를 움켜잡았다. 특히 팽월의 세력은 항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위치에 있었다. 팽월은 때때로 항우의 군량창고를 습격하여 노획한 식량을 유방에게 보내면서 항우의 세력을 분산시켰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기반으로 천하에 군림하던 항우의 세력이 천하제패에 실패한 원인은 다분히 보급의 단절과 양식의 부족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팽월은 유방에게 대단한 공로를 세운 셈이었다.
해하(垓下)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유방은 팽월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하여 그가 점거하고 잇던 토지를 인정하고 양왕(梁王)에 봉하였다. 팽월은 양왕이 된 후에, 유방이 운몽택에서 한신을 거짓으로 불러들여 체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유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한왕 10년 유방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병해서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 팽월에게 조서를 보내 병력을 파견하라고 명령했다. 팽월은 유방이 두려워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병을 핑계로 단지 부하 장군에게 일부의 병력을 딸려 보냈다.
유방은 대노하여 곧바로 사신을 재차 파견하여 팽월을 질책하였다. 팽월은 후회가 막급하여 친히 유방의 군영에 나가 사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팽월의 참모들들이 모두 나서서 반대했다.
「대왕께서는 처음에 나서지 않으려다, 질책을 받고 사죄를 하러 가신다면 황제에게 틀림없이 체포될 겁니다. 이는 차라리 봉기를 하느니만 못합니다. 만일 양(梁)과 대(代)의 지방에서 변고가 발생한다면 황제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때를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팽월은 참모들의 말을 듣지 않고, 다만 친히 사죄하려던 계획만 바꾸어, 여전히 병으로 직접 나설 수 없음을 유방에게 고하고 사죄를 청했다.
후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팽월이 양나라의의 태복(太僕)에게 벌컥 화를 내며 목을 베려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태복은 이를 미리 알고 양국을 탈출하여 유방에게 달아나 팽월이 모반을 준비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유방은 팽월이 결코 무모하게 반란을 일으킬 재목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지만, 모처럼 그를 제거할 기회가 찾아오자 이를 놓치지 않았다. 유방은 걱정거리가 있으면 사전에 그것을 제거하는 비정함을 이제껏 보여주었다. 만일 팽월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방비를 한다면 모든 일은 쉽게 해결할 수가 없다. 유방은 진희의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자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오는 한편, 사자를 양국의 정도(定陶)에 파견하였다. 팽월은 반란을 애초부터 꿈꾸지 않았으므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사자가 왕부에 도달하자 유방이 어떤 내용의 조서를 내렸을까 생각하면서 예에 따라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었다. 사신의 손에서 조서를 받은 팽월이 공손하게 조서를 읽어나갈 때, 사신을 호송하던 몇 명의 시위들이 번개처럼 팽월에게 달려들어 그를 포박하고 목에 칼을 겨누었다. 사자는 팽월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어떤 사람이 대왕의 모반을 밀고 하였소. 페하께서는 대왕을 낙양으로 모셔와 사실 여부를 변명하라고 명하였소. 밀고가 무고하다면 대왕께서는 양국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으니 대왕께서는 잘 생각해서 결정하시오.」
팽월은 지난날 호첩(扈輒)이 꾸몃던 모반의 주청이 탄로났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무고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자칫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낙양에 가서 떳떳하게 무고를 밝히는 게 낫다고 판단하였다. 호첩이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궁으로 달려와서 죄는 자신에게 있으니 팽월과 함께 낙양으로 가겠다고 요청했다. 죄수를 실은 수레가 낙양에 도착하자, 판관은 두 사람을 옥에 가두고 며칠에 걸쳐 신문하기 시작하였다. 팽월의 모반 사건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하루도 걸리지 않아 그 진상이 쉽게 밝혀졌다. 호첩은 법률에 따라 죄가 확정이 되었고, 팽월은 아무런 죄가 없어 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유방의 뜻을 알고 있는 판관은 쉽사리 팽월을 놓아 줄 수가 없었다. 판관은 어쩔 수 없이 모반에 얽힌 사건의 전모를 유방에게 고하였다.
「모반의 계획은 호첩에게서 나왔으니 사형에 처하고, 신하의 모반 주청을 받고도 그대로 놓아준 팽월도 죄를 가하는 게 옳겠습니다.」
유방은 판관의 보고를 받고 죄를 물어 처형하고 싶었으나, 많은 공신들과 대신들이 불복할까 염려되어, 팽월에게 특별사면령을 내렸다. 유방은 팽월의 죽음을 사면하여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촉군(蜀郡)의 청의도(靑衣道)로 추방하였다. 이때는 한신이 피살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팽월은 가족을 이끌고 호송관들을 따라서 낙양에서 서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촉군으로 떠났다. 그들은 수일 후에 관도에서 일단의 군대를 만났다. 이들은 황후(皇后)의 일행으로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는 중이었다.
팽월은 길에서 황후를 만나게 된 것이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막에서 물을 만난 사람처럼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여후(呂后)의 수레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구며 자신이 억울하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예로부터 여인은 감정에 약하다고 하였다. 팽월은 이 점을 노려서 간곡하게 여후에게 부탁하였다.
「황후마마! 청의도는 편벽하고 황폐한 지역으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합니다. 소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저 소신을 고향으로 보내 평범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여후는 뜻밖에도 향후에 커다란 후환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이런 곳에서 만나자 희색이 만면하여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또다시 하늘이 기회를 나에게 주는구나. 이렇게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서 후환을 모두 제거할 수 있겠구나.」
여후는 창문의 주렴을 걷어 올리며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양왕(梁王)께서는 이제 서쪽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수레를 하나 내어 줄 터이니 다시 낙양으로 돌아가십시다. 폐하를 알현할 때 이 몸이 대왕의 청을 주청하겠습니다.」
팽월은 여후의 따스한 말에 감동하여 연신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낙양에 돌아온 여후는 유방을 보고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팽월은 천하에 소문난 맹장으로 이미 모반에 연루되었으면 후환을 제거해야지 어찌 촉군으로 추방을 하였습니까?」
유방은 그제서야 후회가 되는듯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구려. 이미 촉군으로 떠난 지가 수 일이 되었으니, 잠시 살려 주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겠소.」
여후는 유방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첩이 낙양으로 오는 도중에 그를 만나 다시 이곳으로 끌고 왔습니다.」
유방은 여후의 주도면밀한 행동에 감탄을 하면서 연신 그녀를 칭찬하였다. 이때 팽월은 궁문 밖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나절을 기다려도 어떠한 동정도 나오지 않자 그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은 팽월은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 순간에 궁문을 지키던 위사들에게 포박당하고 말았다. 옥리(獄吏)는 며칠 전 풀려난 팽월이 다시 잡혀오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여후는 형법을 관장하는 정위(廷尉) 왕염개(王恬開)를 불러 팽월을 재차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정위 왕염개는 난색을 표시하며 말했다.
「이번 사건은 이미 폐하께서 비준을 하셨기 때문에 뒤집을 수 없습니다.」
여후는 그 말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렇게도 못 알아 듣는가? 팽월이 호첩과 모반을 얘기했다면, 다른 사람과 하지 않았다는 보장을 누가 하겠는가?」
왕염개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며칠 후 팽월의 문객 중에 한 사람이 고발장을 접수하였다. 팽월이 모월 모일, 어디에서, 누구와 모반을 얘기하였다는 고발이었다. 물론 고발의 내용은 거짓이다. 그러나 팽월은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보처럼 여후에게 구명을 호소한 자신의 지난 행동이 억울할 뿐이었다. 팽월의 모반죄는 재차 심리가 되어 사형에 처해졌고, 그의 3족이 몰살을 당하였다.
팽월을 제거한 유방은, 시체를 매장시키지 못하게 명령하고 그의 살고기로 장육을 만들어 제후들에게 시식을 하도록 명령했다.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는 유방의 조서를 받고 놀라움과 공포에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유방이 내린 식합(食盒)을 받아들고 장에 저려진 팽월의 살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영포는 널리 알려진 용장이다. 그도 팽월과 마찬가지로 출신성분이 강도였다. 처음에는 항우의 부하로 늘 전장에 나서면 선봉에 섰다. 항우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빨리 공을 세워서 일찍부터 구강왕(九江王)에 봉해졌다.
후에 항우로부터 전투에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질책을 받고 있을 때, 유방이 보낸 사자의 설득에 넘어가 초(楚)를 배반하고 한(漢)에 투항하였다. 만일 영포의 견제가 없었다면 항우의 전력이 투입된 팽성(彭城)대전에서 유방은 포로가 되거나 죽었을 것이다. 해하의 전투에서도 영포는 유방을 도와 커다란 공을 세웠다. 천하를 평정한 유방은 영포의 공로를 인정하여 회남왕에 봉하고 지금의 강서(江西)와 안휘(安徽)의 일부를 영지로 내렸다.
한신, 팽월, 영포는 유방이 천하를 얻는데 공로가 가장 큰 사람들이며, 이성(異姓)의 여덟 왕 중에서 세력이 또한 강대하였다. 한신과 팽월이 모반죄를 뒤집어쓰고 살해되자 영포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국경의 수비를 더한층 강화토록 하였다. 하지만 모반을 하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품지 않았다. 팽월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남왕의 대부(大夫)로 있던 분혁(賁赫)이 영포에게 죄를 짓고 장안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분혁은 유방의 면전에서 화남왕 영포가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고 밀고했다. 유방은 이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영포는 한신과 팽월이 당한 사례에 비추어 죄가 없더라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병마를 일으켜 봉기했다.
유방은 늙은 몸을 이끌고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 직접 출정했다. 경포의 운명도 역시 앞서 간 두 사람의 제후왕의 전철을 밟았다. 경포의 건은 음모의 범주에 들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의 의미는 없으나, 유방은 이렇게 자신의 측근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데 종국에는 모두 성공했다. 일 년여 기간 동안 유방과 그의 부인 여치(呂雉)는 이성(異姓)의 제후 중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세 사람을 제거하고 한(漢)의 통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성공했다. 유방은 영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환하면서 도중에 고향 패현(沛縣)에 들러 가족 친지와 고향 어른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취기가 오르자 축(筑)을 두드리며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큰 바람이 부니 구름이 흩날리는도다.
위엄이 세상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용맹한 장수를 어떻게 얻어 사방을 지킬꺼나!.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그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르며 한신, 팽월, 영포와 같은 용맹한 장수들을 생각했을까? 어떻게 용맹한 장수를 얻어 사방을 지키겠느냐는 자탄은 세 사람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내포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나 아무튼 그는 호쾌한 심정과 착잡한 기분이 엉켜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당시에 패현의 농가에서 유방의 부친은 매일 놀고먹으며 건달 생활을 하는 셋째 아들 유방을 나무라며, 늘 공부와 집안일에 열심인 둘째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후에 건달에 가까운 셋째 유방은 천하를 도모한 후 낙양에서 크게 연회를 베풀고 태상황(太上皇)이 된 그의 부친에게 당시에 자신을 마무라던 광경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버님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둘째 형의 산업이 거대합니까 아니면 그토록 나무라던 저의 산업이 거대합니까?」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유방은 중국의 거대한 대지를 자신의 개인적인 산업으로 여겼으며, 그래서 용맹한 장수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물론 용도는 자신의 산업을 지키는(守) 일이었다. 이 때문에 유방은 자신의 산업을 지킬 수 없거나, 자신의 산업을 파괴하려는 어떠한 용맹한 장수를 용서하지 않고 죽음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끝)
중국의 역대 황제 발췌-오정윤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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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9-06-19
[]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 출신에서 제왕이 된 유방은, 훗날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는 대장부들에게 커
운영자 09-06-19
[] 진시황의 최후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좌승상 이사(李斯)와 그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를 대동하고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太監)의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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