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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21 04:29:345357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운영자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태안현) 사람으로, 부친 이당호(李當戶)는 한(漢)나라의 명장 이광(李廣)의 아들이다. 이릉은 부친이 일찍 죽었으므로 유복자로 태어났다. 한 무제(武帝) 때에는 기도위(騎都尉)가 되었다.













한 무제 천한(天漢) 원년, 즉 기원전 100년, 소무(蘇武)는 사신으로 흉노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소무는 투항하라는 흉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다가, 결국 구금 당하여 북해(北海) 부근에서 양을 치게 되었다.













이듬해, 한 무제는 이광리에게 흉노 정벌을 명하였는데, 이릉은 대장군 이광의 손자로서 이광리의 군대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릉은 한무제에게 5천 보병으로 직접 흉노를 공격하겠다고 하여, 허락을 받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이릉은 40여 동안 흉노의 3만 기병을 상대로 최선을 다하여 전투를 하였지만, 결국 항복하고 흉노 땅에 머물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릉과 친한 친구인 소무를 흉노 땅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소무는 19년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6년, 즉 기원전 81년 한나라와 흉노가 화친한 것을 계기로 석방되어 한나라로 돌아왔다.













<답소무서(答蘇武書)>는 소무가 귀국하여 관직에 오른 뒤, 이릉이 그에게 써보낸 편지이다. 모두 여덟 문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데, 처음 두 문단은 이국(異國)에서의 처량하고 고생스런 삶을 기록하고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흉노의 풍속, 민정(民情), 인물 등 한나라와 다른 점을 묘사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나라와 황제, 어머니와 아내 친구들을 그리워하며 자신이 겪고 있는 비통함을 적었다. 셋째 문단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 흉노의 대군과 싸워 세운 대공(大功)을 적고 있으며, 넷째 문단에서는 참혹하고 격렬했던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 흉노는 전쟁에서 패배하자, 온 백성들을 동원하고, 정병(精兵)을 다시 훈련하여, 그 수효가 십만을 넘었으며, 흉노 왕은 군대의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였지. 흉노 군대와 우리 군대의 형편은 서로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며, 보병과 기병의 실력 차이 또한 너무 심하였네. 지친 병사들은 다시 일어나 싸웠지만, 한 사람이 천 명의 적병을 상대해야 했으므로, 상처를 떠받치고 고통을 참으며, 목숨을 걸고 싸웠네. 죽은 병사들의 시체가 황야를 뒤덮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100명이었으며, 그들도 모두 부상을 당하여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네. 그렇지만, 내가 팔을 들고 한 번 외치자, 창에 찔려 다친 병사들은 모두 일어났으며, 내가 칼을 들어 오랑캐들을 가리키자, 그들은 말을 몰아 도망하기에 바빴네(然陵振臂一呼, 創病皆起, 擧刃指虜, 胡馬奔走). 무기도 없고 화살도 떨어져버리고, 손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모두 머리를 내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올라갔네. 이때, 천지는 진노하는 듯하였고, 병사들은 나를 위해 피눈물을 흘렸네. 흉노의 왕은 내가 항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군대를 돌려 가버렸지. 하지만 첩자가 이 사실을 흉노왕에게 알리자, 그들은 다시 공격해 왔으며, 나는 그들의 공격을 더 이상 막아낼 수가 없었네. .... "













다섯째 단락에서는, 훗날 나라에 보답할 더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조정의 양해를 얻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말하였다. 나머지 부분에서, 이릉은 공신(功臣)들에 대한 조정의 각박한 대우를 비판하고, 굴욕적인 귀국을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이릉은 기원전 74년 흉노 땅에서 병으로 죽었다.































답소무서(答蘇武書)













이릉(李陵)













자경(子卿)1)께 올립니다. 당신께서 근면성실하여 훌륭한 덕이 널리 알려지고, 태평한 시절에 조정에서 일하면서 명예를 드높이셨으니, 정말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옛 사람들은 외국으로 멀리 몸을 피하는 일을 슬퍼했습니다. 서로 멀리서 바마보면서 옛 친구를 회상하니, 서로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에 제가 보낸 서신을 잊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답장을 하셔서 형제보다 더 간절하게 위로해 주시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비록 우둔하나 어찌 감동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 적에게 항복한 후로 지금까지 처신하기 어려워 홀로 앉아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괴로워했습니다. 하루종일 이민족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부드러운 가죽 팔찌를 차고 취막(毳幕)2)에서 비바람을 피하며, 양고기와 우유로 배고픔과 갈증을 풀었습니다. 눈을 치켜들고 웃으며 말하려 하지만, 누가 저와 함께 기뻐하겠습니까? 오랑캐 땅에는 얼음이 두껍고 변방 땅은 얼어 갈라집니다. 들리는 것은 비풍의 쓸쓸한 소리뿐입니다. 차디찬 9월이 오면 변방 밖의 풀은 말라 버립니다. 밤중에 잠을 못 이루어 멀리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우이고 있노라면, 오랑캐 피리 소리 서로 화답하고 방목하는 말들 슬프게 울어 신음 소리가 무리지어 들립니다. 이러한 소리가 변경사방에서 들립니다. 아침에 일어나 앉아서 이런 소리를 듣노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 자경! 어찌 저라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당신과 헤어진 후, 더욱 즐거운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노모께서는 연로하신데도 죽임을 당하시고, 처자는 죄가 없는데도 살육을 당했습니다. 저는 국은을 버려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귀국하여 영광를 받고 저는 여기 남아 수모를 받고 있으니 이것이 운명이란 말입니까? 예의를 아는 곳에서 내처나 이 무지한 곳에 와서, 임금님과 부모님의 은혜를 버리고 야만인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슬픕니다. 선군(先君)의 자손이 오랑캐 조속으로 변하다니! 저의 슬픔 더욱 큽니다. 공로가 크고 죄는 적은 데도 임금님의 현명하신 보살핌을 받지 못했고, 저의 작으나마 국은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마저도 저버려졌습니다. 매번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심장을 도려내어 스스로를 밝히고 목을 잘라 의지를 보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다만 나라가 저를 버렸으니, 죽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수치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그래서 매일 억지로 용기를 내어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이러는 것을 보고 듣기 거북한 웃음으로 저를 위로했지만, 이방에서의 즐거움은 사람들 슬프게 하고 근심만 더해줄 뿐입니다.













아, 자경! 사람들은 서로 알고 지매면서, 서로 마음을 이해하여 주는 것이 귀중합니다. 저번에 보낸 서신은 바쁘게 써서,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대략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에 선제(先帝)께서 저에게 보병 오천을 주셔서 먼 흉노지역까지 출정했습니다. 다섯 장군이 길을 잃어 저 혼자서 전쟁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보병을 거느리고 식량을 만 리 이상 운반하면서, 한나라 국경을 떠나 강한 오랑캐 땅에 들어가 오천 명의 군사로 십만 대군을 대적했습니다. 피로에 지친 병사를 독려하여 흉노의 정예 기병을 막아냈으며, 적장의 머리를 베고 적의 깃발을 빼앗았습니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흔적을 없애고, 먼지를 쓸어내듯이 용맹한 적장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군사들이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안했습니다. 그러나 제게 능력이 없어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맡기가 어려웠지만, 이러한 때에 공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흉노가 패한 후, 거국적으로 군대를 일으키고 다시 날래 군사를 훈련시켰는데 그 수가 십만이 넘었습니다. 흉노 군장이 몸소 진영 앞에서 저의 군사를 포위했습니다. 외국에 나와 있는 저의 군대와 자기 영토에 있는 흉노군의 형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저의 보병과 흉노의 기병 세력도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친 병사들이 다시 싸움에 임했는데, 한 사람이 천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상처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목숨을 다해 다투어 앞에 있는 적을 죽였습니다. 부상자와 시체로 들판이 가득 찼고, 살아남은 사람은 백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부당당해 싸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리치며 팔을 휘두르자, 부상당하고 병든 군사들이 모두 칼을 들고 오랑캐를 가리키니, 오랑캐들도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병사들은 화살이 바닥났습니다. 손에는 조그마한 무기 하나도 없고 머리에는 투구도 없이, 소리 지르며 앞 다투어 진격했습니다. 이때 천하 사람들은 제가 진노했다고 여기고, 저를 위하여 전사들이 피눈물을 머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흉노 군장이 저를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병사를 인솔하여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역적이 그에게 후원군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 흉노군장이 달려와 재차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망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 고황제(高皇帝)께서는 삼심만 대군으로도 평성(平城)에서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때 맹장들이 구름처러 모여들고 지모있는 신하들이 비오듯 많았으나, 칠일 간이나 굶주리고 나서야 간신히 곤란한 상황을 면하셨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해 어찌 쉽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일하는 고관들이 제가 죽지 못한 것을 원망스레 이야기했습니다. 맞습니다. 제가 죽지 못한 것은 죄가 됩니다. 자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구차하게 살며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입니까? 어찌 임금과 어버이를 배신하고 처자를 버려가면서 이익을 꾀하겠습니까? 제가 죽지 않은 것은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번 서신에 말씀드린 것처럼 임금님께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은 덕을 보답하는 것만 못합니다. 옛적에 범려(范蠡)는 회계에서 수치를 당했으나 죽지 않았고, 조말(曹沫)은 제나라와 세 번 싸워 세 번 패하는 수모를 당했으나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범려는 구천의 원수를 갚고, 조말은 노나라의 수치를 씻었습니다. 적의 변변치 못한 생각도 이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어찌 뜻을 세워 꾀하지도 않았는데 원성이 생기고 계획을 실현하기 전에 부모와 형제들이 죽음 당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가슴을 치며 피눈물을 흘리는 이유입니다. 그대께서 또 한왕조가 공신에게 후하게 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대는 한나라 신하인데 어찌 이러한 사실을 말하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소하(蕭何)와 번쾌(樊噲)는 구금당했고,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은 죽임을 당했으며, 조착(竈錯)은 피살당했고, 주발(周勃)과 두영(竇嬰)은 죄를 입었습니다. 그 외에 천자를 돕고 공을 세운 가의(賈誼)와 주아부(周亞夫) 같은 사람들은 정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었고 재상과 장군이 될만한 그릇인데도, 소인배들의 참소로 인해 재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재주가 있었으나, 비방을 받아 능력을 펴보지도 못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등용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위해 누가 슬퍼한 적이 있었습니까? 저의 조부께서는 공로가 천하를 덮을 듯했고, 의기와 용맹은 삼군 중에 제일이셨습니다. 다만 권력 있고 높은 공신과 대신들의 환심을 사지 못해 먼 지역에서 자결하셨습니다. 이것이 공신과 의사(義士)들이 창을 가지고 길게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공신들에게 후하게 대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게다가 전에 자경께서는 몇 명 안 되는 수행원을 거느리고, 강한 오랑캐 나라에 가신 적이 있습니다. 불리한 때를 만나 칼 위에 엎드러져 목숨을 돌보지 않아야 할 때도 있으셨고, 이곳저곳 떠돌며 고생하시다 변경 북방 황야에서 거의 죽을 뻔하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젊어서 사신으로 가서 백발이 성성해서야 비로소 돌아오셨습니다. 노모께서는 돌아가시고 살아 있던 처도 개가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천하에 매우 드문 일로 고금을 통해서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랑캐들도 당신의 절개와 지조를 높이 샀는데, 천하를 통치하는 임금께서는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당신께서는 봉지와 천승에 해당하는 상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께서 귀국하신 후 받으신 것은 겨우 이백만 전뿐이고 직위는 속국(屬國)에 불과했으며 봉지는 조금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공로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게다가 공훈과 능력있는 사람을 해친 신하들은 모두 만호후의 제후가 되었으며 황제의 친척들과 아첨하는 무리들은 모두 조정의 대신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일찍이 이처럼 대접을 받으셨으니, 제가 어찌 바랄 바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한왕조에서 제가 절개를 지켜 죽지 않은 것을 엄하게 책하고, 그대가 절개를 지킨 것에 대해서는 박하게 상을 내렸습니다. 먼 곳에서 이런 소식을 접한 신하가, 멀리 바라보고 달려가 목숨을 다해 명을 받들기란 실로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매번 생각해도 후회스럽지 않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은혜를 버렸지만 한왕조는 덕을 버렸습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충신은 비록 반드시 격렬하게 행동을 해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목숨 버리는 것을 아까와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정말 펀안하게 지낸다면, 임금께서 어찌 항상 저를 생각하시며 못잊어하시겠습니까?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나서 이름을 내지 못하면, 죽어 오랑캐 땅에 묻힐 뿐입니다. 그러니 누가 다시 몸을 굽혀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고, 대궐로 돌아가 옥리가 법을 가지고 장난칠 기회를 갖게 하겠습니까? 그대는 제가 돌아가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아, 자경! 또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왕래도 없고 길도 다릅니다. 살아서 서로 다른 곳에 있고 죽어서도 서로 다른 곳의 귀신이 될 터이니, 당신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 대신 옛 친구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주시고, 임금님께도 힘써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대 아드님은 잘 있으니 걱정하시 마시기 바랍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북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저를 생각하시고,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이릉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고문관지-지영사 전재)








子 卿 足 下 :




勤 宣 令 德 , 策 名 清 時 , 榮 問 休 暢 , 幸 甚 幸 甚 。 遠 托 異 國 , 昔 人 所 悲 , 望 風 懷 想 , 能 不 依 依 ? 昔 者 不 遺 , 遠 辱 還 答 , 慰 誨 勤 勤 , 有 逾 骨 肉 , 陵 雖 不 敏 , 能 不 慨 然 。




自 從 初 降 , 以 至 今 日 , 身 之 窮 困 , 獨 坐 愁 苦 。 終 日 無 睹 , 但 見 異 類 。 韋 韝 毳 幙 , 以 御 風 雨 ; 羶 肉 酪 漿 , 以 竟 飢 渴 。 舉 目 言 笑 , 誰 與 為 歡 ? 胡 地 玄 冰 , 邊 土 慘 裂 , 但 聞 悲 風 , 蕭 條 之 聲 。 涼 秋 九 月 , 塞 外 草 衰 。 夜 不 能 寐 , 側 耳 遠 聽 , 胡 茄 互 動 , 牧 馬 悲 嗚 , 吟 嘯 成 群 , 邊 聲 四 起 。 晨 坐 聽 之 , 不 覺 淚 下 。 嗟 乎 子 卿 , 陵 獨 何 心 , 能 不 悲 哉 。




與 子 別 後 , 益 復 無 聊 , 上 念 老 母 , 臨 年 被 戮 ; 妻 子 無 辜 , 并 為 鯨 鯢 ; 身 負 國 恩 , 為 世 所 悲 ; 子 歸 受 榮 , 我 留 受 辱 , 命 也 如 何 ? 身 出 禮 義 之 鄉 , 而 入 無 知 之 俗 ; 違 棄 君 親 之 恩 , 長 蠻 夷 之 域 , 傷 已 ! 令 先 君 之 嗣 , 更 成 戎 狄 之 族 , 又 自 悲 矣 。 功 大 罪 小 , 不 蒙 明 察 , 孤 負 陵 心 區 區 之 意 , 每 一 念 至 , 忽 然 忘 生 。 陵 不 難 刺 心 以 自 明 , 刎 頸 以 見 志 , 顧 國 家 於 我 已 矣 , 殺 身 無 益 , 適 足 增 羞 , 故 每 攘 臂 忍 辱 , 輒 復 苟 活 。 左 右 之 人 , 見 陵 如 此 , 以 為 不 入 耳 之 歡 , 來 相 勸 勉 , 異 方 之 樂 , 祇 令 人 悲 , 增 忉 怛 耳 。




嗟 乎 子 卿 , 人 之 相 知 , 貴 相 知 心 , 前 書 倉 卒 , 未 盡 所 懷 , 故 復 略 而 言 之 。




昔 先 帝 授 陵 步 卒 五 千 , 出 征 絕 域 。 五 將 失 道 , 陵 獨 遇 戰 , 而 裹 萬 里 之 糧 , 帥 徒 步 之 師 ; 出 天 漢 之 外 , 入 強 胡 之 域 ; 以 五 千 之 眾 , 對 十 萬 之 軍 ; 策 疲 乏 之 兵 , 當 新 羈 之 馬 。 然 猶 斬 將 搴 旗 , 追 奔 逐 北 , 滅 跡 掃 塵 , 斬 其 梟 帥 , 使 三 軍 之 士 , 視 死 如 歸 。 陵 也 不 材 , 希 當 大 任 , 意 謂 此 時 , 功 難 堪 矣 。




匈 奴 既 敗 , 舉 國 興 師 。 更 練 精 兵 , 強 逾 十 萬 。 單 于 臨 陣 , 親 自 合 圍 。 客 主 之 形 , 既 不 相 如 ; 步 馬 之 勢 , 又 甚 懸 絕 。 疲 兵 再 戰 , 一 以 當 千 , 然 猶 扶 乘 創 痛 , 決 命 爭 首 。 死 傷 積 野 , 餘 不 滿 百 , 而 皆 扶 病 , 不 任 干 戈 , 然 陵 振 臂 一 呼 , 創 病 皆 起 , 舉 刃 指 虜 , 胡 馬 奔 走 。 兵 盡 矢 窮 , 人 無 尺 鐵 , 猶 復 徒 首 奮 呼 , 爭 為 先 登 。 當 此 時 也 , 天 地 為 陵 震 怒 , 戰 士 為 陵 飲 血 。 單 于 謂 陵 不 可 復 得 , 便 欲 引 還 , 而 賊 臣 教 之 , 遂 使 復 戰 , 故 陵 不 免 耳 。




昔 高 皇 帝 以 三 十 萬 眾 , 困 於 平 城 。 當 此 之 時 , 猛 將 如 雲 , 謀 臣 如 雨 , 然 猶 七 日 不 食 , 僅 乃 得 免 。 況 當 陵 者 , 豈 易 為 力 哉 ? 而 執 事 者 云 云 , 苟 怨 陵 以 不 死 。 然 陵 不 死 , 罪 也 ; 子 卿 視 陵 , 豈 偷 生 之 士 而 惜 死 之 人 哉 ? 寧 有 背 君 親 、 捐 妻 子 而 反 為 利 者 乎 ? 然 陵 不 死 , 有 所 為 也 , 故 欲 如 前 書 之 言 , 報 恩 於 國 主 耳 , 誠 以 虛 死 不 如 立 節 , 滅 名 不 如 報 德 也 。 昔 范 蠡 不 殉 會 稽 之 恥 , 曹 沫 不 死 三 敗 之 辱 , 卒 復 勾 踐 之 仇 , 報 魯 國 之 羞 , 區 區 之 心 , 竊 慕 此 耳 。 何 圖 志 未 立 而 怨 已 成 , 計 未 從 而 骨 肉 受 刑 , 此 陵 所 以 仰 天 椎 心 而 泣 血 也 。




足 下 又 云 : 漢 與 功 臣 不 薄 。 子 為 漢 臣 , 安 得 不 云 爾 乎 ? 昔 蕭 樊 囚 縶 , 韓 彭 葅 醢 , 晁 錯 受 戮 , 周 魏 見 辜 。 其 餘 佐 命 立 功 之 士 , 賈 誼 亞 夫 之 徒 , 皆 信 命 世 之 才 , 抱 將 相 之 具 , 而 受 小 人 之 讒 , 并 受 禍 敗 之 辱 , 卒 使 懷 才 受 謗 , 能 不 得 展 。 彼 二 子 之 遐 舉 , 誰 不 為 之 心 痛 哉 ? 陵 先 將 軍 , 功 略 蓋 天 地 , 義 勇 冠 三 軍 , 徒 失 貴 臣 之 意 , 剄 身 絕 域 之 表 。 此 功 臣 義 士 所 以 負 戟 而 長 嘆 者 也 。 何 謂 不 薄 哉 ?




且 足 下 昔 以 單 車 之 使 , 適 萬 乘 之 虜 。 遭 時 不 遇 , 至 於 伏 劍 不 顧 ; 流 離 辛 苦 , 幾 死 朔 北 之 野 。 丁 年 奉 使 , 皓 首 而 歸 ; 老 母 終 堂 , 生 妻 去 帷 。 此 天 下 所 希 聞 , 古 今 所 未 有 也 。 蠻 貊 之 人 , 尚 猶 嘉 子 之 節 , 況 為 天 下 之 主 乎 ? 陵 謂 足 下 當 之 茅 土 之 荐 , 受 千 乘 之 賞 。 聞 子 之 歸 , 賜 不 過 二 百 萬 , 信 不 過 典 屬 國 , 無 尺 土 之 封 , 加 子 之 勤 。 而 妨 功 害 能 之 臣 , 盡 為 萬 戶 侯 ; 親 戚 貪 佞 之 類 , 悉 為 廊 廟 宰 。 子 尚 如 此 , 陵 復 何 望 哉 ?




且 漢 厚 誅 陵 以 不 死 , 薄 賞 子 以 守 節 , 欲 使 遠 聽 之 臣 望 風 馳 命 , 此 實 難 矣 , 所 以 每 顧 而 不 悔 者 也 。 陵 雖 孤 恩 , 漢 亦 負 德 。 昔 人 有 言 : 雖 忠 不 烈 , 視 死 如 歸 。 陵 誠 能 安 , 而 主 豈 復 能 眷 眷 乎 ? 男 子 生 以 不 成 名 , 死 則 葬 蠻 夷 中 , 誰 復 能 屈 身 稽 顙 , 還 向 北 闕 , 使 刀 筆 之 吏 弄 其 文 墨 邪 ? 願 足 下 勿 復 望 陵 。













嗟 乎 子 卿 , 夫 復 何 言 ? 相 去 萬 里 , 人 絕 路 殊 。 生 為 別 世 之 人 , 死 為 異 域 之 鬼 。 長 與 足 下 , 生 死 辭 矣 。 幸 謝 故 人 , 勉 力 聖 君 。 足 下 胤 子 無 恙 , 勿 以 為 念 。 努 力 自 愛 , 時 因 北 風 , 復 惠 德 音 。 李 陵 頓 首 。













1)자경(子卿)/ 소무(蘇武 : BC 140~BC 80)의 자(字)다. 흉노(匈奴) 정벌에 공을 세운 소건(蘇建)의 차남으로 한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의 지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선우(單于)에게 붙잡혀 복속(服屬)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흉노의 선우가 그를 북해(北海: 바이칼호) 부근에 19년간 유폐시켰다. 흉노에게 항복한 지난날의 동료 이릉(李陵)이 설득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 귀국했다. 후에 선제(宣帝)의 옹립에 가담하여 그 공으로 관내후(關內侯)가 되었다.


2)취막(毳幕)/ 털가족으로 만든 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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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0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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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다이허<중국 허베이성>="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해중 암석인 강녀분을 중심에 두고 갈석궁지에서 서쪽으로 2㎞를 간
운영자 08-03-10
[]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태안현) 사람으로, 부친 이당호(李當戶)는
운영자 0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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