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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척도의 건설과정
양승국

당몽(唐蒙)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내기 위해 천여 리의 도로를 뚫었다. 이로써 서천지방의 광한(廣漢), 파(巴), 촉(蜀)의 백성들은 피폐하게 되었다.


한나라 조정은 서남이와 통하기 위해 수만 명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천리에 달하는 거리를 등에 짊어져 양식을 운송하고 있었는데 10여 종(鐘)을 보내면 도착하는 것은 단지 한 섬 정도에 불과했다. 한나라 조정은 그 양식을 공(邛)과 북(僰)의 이민족들에게 재물로 나누어주어 그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도로는 개통이 안되고 그것을 기화로 만이(蠻夷)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군을 공격했음으로 반격을 가하여 그들을 죽였다. 파(巴)와 촉(蜀) 지방에서 걷어들인 전 조세로도 서남이로 통하는 도로의 건설비용을 충당할 수 없었음으로 해서 결국은 남이(南夷) 지구의 부농(富農)들을 불러 모아 파와 촉의 관아에 바치게 하고 그 돈은 경사(京師)의 도내부(都內府)에서 받아가도록 했다.

▶당몽(唐蒙)/ 서한 무제 때 관리로서 처음에는 지방관인 파양령(鄱陽令)이었으나 건원(建元) 6년 기원전 135년 황제에게 야랑(夜郞)과 통하기 위해 도로를 닦아야 한다는 상서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야량은 지금의 귀주성 준의시(遵義市)와 동재(桐梓) 일대를 말한다. 당몽은 랑중장(郞中將)이 되어 천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랑으로 들어가 야랑후(夜郞侯) 다동(多同)을 접견하고 그곳에 한나라의 군현을 설치하고 야랑후의 아들을 그 태수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자 야랑후는 그 말을 따랐다. 그는 장안으로 돌아가 무제에게 복명하고 이어서 야랑의 땅에 건위군(犍爲郡)을 설치했다. 후에 사마상여(司馬相如)와 함께 파(巴)와 촉(蜀) 및 광한(廣漢)의 장정들 수만 명을 징발하고 막대한 자금을 들여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도로 천여 리를 뚫어 개통시켰다.


▶사마상여(司馬相如)/ 서한의 문학가로 기원전 172년에 나서 117년에 죽었다. 자는 장경(長卿)으로 촉군 성도(成都) 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견자(犬子)였으나 전국 때 인상여(藺相如)를 존경하여 상여(相如)로 이름을 바꿨다. 부(賦)를 잘 지어 경제(景帝)에 의해 무기상시(武騎常侍)로 있다가 양효왕(梁孝王)이 문학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양나라로 갔다. 그러나 양효왕이 얼마 있지 않아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하게 살았다. 임공(臨邛)의 도정(都亭) 직에 있을 때 우연히 알게된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성도(成都)로 도망쳐 살았다. 이 때 쓴 자허부(子虛賦)란 글이 한무제에 인정을 받아 랑(郞)이라는 벼슬을 제수 받았다. 한무제의 명을 받아 사자의 임무를 띠고 서남이(西南夷) 지방의 이민족들을 위무시켜 안정을 찾게 했다. 후세 사람들이 편찬한 <사마문원집(司馬文園集)>에 그 유명한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가 실려 있다.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참조.


▶종(鐘)/ 처음에는 10곡(斛) 즉 10석(石)이였으나 후에 6곡 4두로 바뀌었다. 곡(斛)은 석(石)이고 10두(斗)이다.


▶공(邛)/ 지금의 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았던 서남이(西南夷)의 일족을 말한다. 후에 한나라는 이곳에 월수군(越嶲郡)을 설치했다.


▶북(僰)/ 지금의 사천성 의빈시(宜賓市) 일대에 살던 서남이의 일족이다.


▶도내부(都內府)/ 대사농(大司農)은 서한의 구경(九卿) 중 하나로 재정(財政)을 담당했다. 대사농(大司農)은 도내령(都內令)과 도내승(都內丞)을 두어 국고를 관리했다. 도내부란 도내령과 도내승이 관리하던 창고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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