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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05 10:48:034034 
진시황릉의 개요
양승국

1.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

이윽고 시황의 시신을 실은 행렬이 직도(直道)를 거쳐 함양에 당도하여 시황의 상을 발표하고 태자 호해(胡亥)가 뒤를 이어 이세(二世) 황제라 칭했다. 그해 9월 시황을 여산(驪山)에 장사지냈다. 시황이 옛날에 제위에 오르자 여산(驪山)에 공사를 벌리기 시작하고 다시 천하를 병합하자 세상의 죄인 70여만 명을 보내 땅을 깊이파고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그 구멍을 매워 외관(外棺)을 만들고 다시 궁궐의 모형을 만들고 그 안에 작록에 따라 백관들의 모습을 흙으로 만들어 세운 다음 세상의 희귀한 보물과 기이하게 생긴 돌들을 모두 옮겨서 가득 채우게 하였다. 장인들에게 명하여 노궁을 기관으로 설치하여 자기의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게되면 자동적으로 화살이 발사되어 만들었다. 수은(水銀)을 부어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의 모습으로 만들고 기관을 설치하여 수은들을 흐르게 하였다. 위에는 천문의 모습으로 꾸몄으며 아래에는 천하의 지리를 본따서 만들었다. 사람의 모습을 닮은 고기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꺼지지 않게 하였다. 이세(二世) 황제가 말했다.

“ 선황(先皇)의 후궁들을 자식이 없다하여 궁궐 밖으로 내보는 것은 옳지 않다. ”

이어서 이세 황제가 령을 내려 모두 순장하도록 하자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시황의 시신을 장사지내는 절차가 모두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공인(工人)과 장인(匠人)들이 무덤 안에 설치된 기관과 가져다 놓은 수많은 진기한 보물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어 그들이 결국은 그 비밀을 누설할 것이라고 했다. 대사가 모두 마무리되고 보물들도 모두 매장하자 묘도(墓道)의 가운데 문을 폐쇄(閉鎖)하고 또한 묘의 바깥문을 내려서 공인과 장인들을 안에 가두니 아무도 묘(墓) 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묘 바깥에는 나무와 풀을 심어서 묘가 마치 산과 같이 되었다.


2.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유향전(劉向傳)

진시황제를 여산의 언덕에 묻을 때, 세 번이나 지하수를 지날 만큼 땅을 깊이 파고 위로 세 개의 봉분을 높였는데, 그 높이가 50장( 약 150여 미터)이고 사방 5리 남짓 에워쌌다. 돌로 만든 곽(槨)을 유관으로 삼고 인고(人膏)로 등촉을 삼았으며 수은으로 강물을 만들고 황금으로 오리와 기러기를 만들었다. 항우가 그 궁실과 조형물을 불태우니 뒤를 따르는 이들이 모두 그 나머지를 발굴했다. 이후에 목동이 그곳에서 양을 길렀는데 양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목동이 횃불을 들고 양을 쫓아 들어갔다가 진시황의 관곽을 불태우고 말았다.


3. 북위 때의 지리학자인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

진시황이 죽자 크게 장사를 지냈는데, 여산(驪山)에 묘소를 조영했다. 일명 남전(藍田)이란 곳인데 그 여산의 북쪽에는 금이 많고 남쪽에는 옥이 많아 시황제가 그 아름다운 이름을 탐내 그곳을 장지로 삼았다. 산허리를 자르고 돌을 파고 들어가 땅 밑으로 세 번씩이나 지하수를 지났고 구리로 곽을 만들었고, 주위 30여 리를 에워싸 천문의 별자리 모양을 그렸으며, 아래로 수은을 흘려 사방의 하천으로 삼았다. 온갖 하천과 천하의 오악(五嶽), 구주(九州) 등 지리의 위세를 갖추었고 별궁과 문무백관을 두었고, 기이한 기물과 진기한 보물로 그 안을 가득 채웠다. 분묘의 높이는 50장이었다. 항우가 관중에 들어가 발굴하니 30만 명이 30일 동안 보물을 운반했는데도 다함이 없었다. 관동의 도적들이 외관을 녹여 구리를 얻었다.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잘못해 지하궁을 불태웠는데 그 불길이 90일 동안 꺼지지 않았다.


4.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의 규모

남북의 길이 515미터, 동서의 너비 485미터, 총면적 24만 9천 평방미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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